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선택한 시집.


  한때 테트리스라는 게임이 유행했었다. 레고 블록 같은 여러 모양의 막대들을 빈 자리에 맞추는 게임.


  그 막대들을 여러 방향으로 바꿀 수 있었는데... 카멜레온은 보호색으로 유명한 동물이니... 둘이 어떻게 연결이 될까 했더니, 변화다. 아니 이 시에서는 변신이다.


그다지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변화나 변신이나 자신이 지녔던 과거의 모습과는 달라진 모습을 이야기하는데, 변신이라고 하니까 왠지 안 좋은 쪽으로 변했다는 생각이 든다.


시집 제목이 된 시를 읽어보면 그런 생각이 옳았음을 알게 된다.


    테트리스와 카멜레온


컴퓨터 오락인 테트리스를 할 때마다

변하는 세상의 모습 한눈으로 보지

키를 누를 때마다 자유자재로

변신, 변신, 변신을 시도하는 블록들

변신, 변신을 거듭하며

벽돌담 쌓듯이 척척 아귀가 맞는 블록들

나도 그들 닮을 수는 없을까

푸른 빛 보호색으로 감싸

내 자신 위장시킬 수는 없을까

완전무결하게

플러그 뽑힌 채로 마음의 버튼 누르기만 하면

우리를 슬프게 하는 세상의 모습과 우울한 생각들도

변신, 변신, 변신을 시도

내 마음은 기쁨

내 마음은 사랑

내 마음은 평화

철철 넘치는 내 마음은 자유

한때 우리들 세계의 전부였던 신념과 철학도

변신, 변신, 변신을 시도

자본주의꽃처럼 피어나

달콤한 열매를 맺을 수는 없을까

테트리스 테트리스 테트리스

카멜레온 카멜레온 카멜레온


차정미, 테트리스와 카멜레온. 푸른숲. 1994년. 28-19쪽



세상이 변함에 따라 변하지 않고 버티는 사람도 있지만, 세상의 변화에 빠르게 발 맞추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적응하면서 잘산다고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을 보면서 시인은 자신도 변신하고 싶다고 하지만, 이는 반어다. 그런 변신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세상의 모습과 우울한 생각들'에서 시인은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시인의 변신은 그런 생각들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데에 있다. 신영복 선생이 한 말처럼 시인은 어리석게도 세상을 바꾸려고 한다. 그리고 어리석은 사람때문에 세상은 변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 시에서 변신은 세상을 바꾸지 않는다. 세상에 자신을 맞춘다.


신영복 선생의 말을 다시 빌리면 세상에 자신을 맞추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지만, 그런 사람은 낮은 곳에서 신음하는 사람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한다. 오로지 자신의 부귀와 영달만을 추구할 뿐이다. 이런 지혜로운 사람들은 변신의 귀재다. 그리고 변신의 귀재들이 넘치는 사회에서는 힘없는 사람들은 더 힘들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들은 변신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1990년대 형식적인 민주화를 실질적인 민주화로 착각하고, 이제는 그런 민주화 운동은 할 필요가 없다고 많은 사람들이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까지도 우리나라 정치계를 좌우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우리나라 정치계에서는 지혜로운 사람들만이 모여 있으므로... 그 지혜로 시류에 맞게 변신들을 잘해왔으므로. 변신의 귀재들만 모였으므로, 그들은 자본주의꽃처럼 피어났고, 열매를 맺었던 것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 세상은 얼마나 변했는지.. 그들이 세상을 얼마나 바꾸었는지 생각해 보자. 그들은 자신을 바꾸는 데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세상을 바꾸는 데는 그다지 관심이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시를 읽으면서 그렇게 변신의 귀재들이 모여서 세상을 바꾸었나,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나? 시인은 그런 질문을 한다는 생각을 했다.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고... 그 점을 알아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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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당연하지 않다 - 어쩌다 자본주의가 여기까지 온 걸까?
데이비드 하비 지음, 강윤혜 옮김 / 선순환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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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를 모르는 사람들도 있겠다. 이제는 한물 간 사상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다. 그만큼 마르크스에 대한 연구는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에 관한 책들도 많이 줄었고. 우리나라 학계에서도 마르크스 경제학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경제학을 강의하는 교수도 많이 줄었다. 한때 서울대 김수행 교수의 후임을 놓고 설왕설래한 경우가 있었다. 김수행 교수는 우리나라에 자본론을 번역하기도 한, 정치경제학을 전공한 교수였는데, 그 후임으로 정치경제학을 전공한 교수를 뽑지 않았다고 한다. 서울대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공한 교수는 없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있는데...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여전히 마르크스주의를 주장한다. 한물간 사상가가 아니라 지금 꼭 필요한 사상가라고, 우리 시대를 넘어 새로운 시대를 열 때 그 열쇠를 제공하는 사람이 마르크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 여러 곳에서 마르크스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우선 그는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임을, 정확히는 사회주의자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이제 사회주의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사회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주변부가 아닌 핵심 과제로 두고 싶어하는 운동'(90쪽)이다. 그리고 이런 사회는 사람들이 부유하게 사는 사회인데, 그때 말하는 '부란 잉여노동시간을 좌지우지하는 데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과 사회 전체가 직접적인 생산에 필요한 시간 외에 이용할 수 있는 시간에서 생기는 것이다'(324쪽)라고 하고 있다.


그러니 이런 사회에서는 노동시간은 하루 6시간이 되어야 한다. '우리 삶의 두 가지 기본적인 요소는 주거지에서 보내는 일상생활과 일터에서 보내는 일상적인 노동의 리듬' (274쪽)이라고 하는데, 이런 리듬이 깨진 사회가 바로 자본주의 사회인 것이다. 일상적인 노동의 리듬이 깨지면서 주거지에서 보내는 일상생활도 흔들리고 있는 상태인 사회가 된다.


그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불안과 분노에 차 있게 된다. 이들에게는 어떤 계기가 있으면 폭발하게 되는데, 그 폭발이 자본가나 권력자들에게 향하지 않고 약자들에게 향한다는 문제점이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팬데믹에 빠져 있을 때 소수자들을 향한 분노들이 어떻게 표출되었는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또한 이를 이용하는 정치가들이 있음도 알고 있고.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지니고 있는 내재적인 문제라고 한다. '자본의 관점에서 보는 노동이 어떤 것인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입니다. 즉 노동은 사용가치에 불과하며, 생산에 필요한 한 가지 요소일 뿐입니다. 따라서 일회용이며, 일정한 환경과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취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그러나 노동자에게 노동은 가족의 생활이며, 사회관계이며, 공장에서 일어나는 일인 동시에 지역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모든 것이 연결되어 일어나는 일이며, 노조의 일원으로 수행하는 일입니다.' (289쪽)라는 말로 저자는 정리하고 있다. 사람을 목적으로 대하지 않고 수단으로 대하는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라는 말이다.


상황이 이런 데도 사회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지내온 것과 같이 소외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물론 사회를 바꾸는 일은 단번에 되지 않는다. 저자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냥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자본주의 사회가 지닌 문제점을 지적하고 알리는 일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들 삶을 자유롭게 하자고, 부유한 사회에서 살아가도록 하자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우리의 과제는 현 사회에 잠재되어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잘 살펴서 그 대안이 될 수 있는, 보다 사회주의적인 시대로 평화롭게 전환될 수 있도록 모색하는 것입니다. 혁명은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라 기나긴 여정입니다.'(28쪽)라고 말하고 있으니 그 과정이 쉽지 않음을 저자 역시 지적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으로 더 힘들어진 사람들이 누구인지 우리는 온몸으로 겪고 있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지도 알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이 틀에서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모색해 봐야 한다. 물론 그 방법은 평화적이어야 한다. 지금은 폭력으로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시대는 아니다. 그리고 폭력은 폭력을 부를 뿐이니...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그가 왜 사회주의를 주장하는지, 그리고 그런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알아야 할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는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사회주의나 자본주의라는 사회체제를 떠나서 저자는 '개인의 자유와 해방의 진정한 뿌리는 하루에 6시간 노동을 통한 집단적인 행동으로 우리의 기본적인 욕구가 해결되고 나머지 시간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상활 속에 있습니다'(331쪽)고 말하고 있다. 지금 우리 역시 6시간 노동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이처럼 이 책은 기존 체제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다른 상상력을 동원해 해결하려는 자세를 지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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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들의 잔을 (반양장) 문학과지성사 이청준 전집 5
이청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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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 소설은 독백체가 간간이 드러나고 있어서, 작가가 소설 속에 인물을 빌려 자신의 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약간 예스러운 문체도 소설을 읽을 때 완전히 몰입하기보다는 인물에게서 한 걸음 물러서게 만들기도 한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등장인물은 한진걸, 김상응(김의원), 안 선생, 노명식, 지윤희 그리고 무불 스님과 배경숙, 약혼녀 명순, 친구이자 처남이 될 경식이다. 이 중에 경식은 스쳐지나가고, 약혼자라고 하는 명순(명숙? 이 책에서 이 인물에 대한 이름이 명순과 명숙으로 뒤섞여 나온다. 337쪽. 466쪽.문학과지성사 하면 문학 작품으로는 전문적인 출판사인데, 이 소설에서 이런 실수가 곳곳에서 나오니) 역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


그러니 여래암이라는 절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는데, 이야기를 전개하는 사람은 한진걸이다. 고시를 준비한다는, 세상을 다 아는 듯한 태도를 지닌 사람. 그러나 읽어갈수록 그에 대한 믿음은 떨어진다. 그는 자신이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읽는 사람은 그가 참 허랑방탕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지니게 된다. 그러니 그가 하는 말이나 행동에 거리를 두게 된다. 이 거리두기를 통해서 이 소설이 그냥 남녀간의 사랑을 다룬 소설로 국한되지 않게 된다.


'이제 우리들의 잔을'이라는 제목이 무슨 뜻일까 궁금해 하면서 읽게 되는데, 이 말은 소설의 끝부분에 '이젠 나도 내 잔을 들어야 할 때가 온 듯싶으니까'(489쪽)이라는 말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삶이 있다는 것, 남의 삶을 살피고, 남의 삶을 살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이 살아가야 할 삶을 살아가야 함을 이 말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 여래암 사람들에게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데 김의원은 자살이라고 할 수 있는 죽음으로 자신의 정치 인생을 끝낸다. 그에게 이제 정치를 할 수 없는 상황은 죽음과 같다고 할 수 있지만, 이 죽음이 꼭 정치적 자살로는 읽히지 않는다. 


그것은 사촌여동생을 범한 노명식의 참회록에 나오는 장면과 비슷한 장면이 김의원이 죽을 때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명확히 명시는 하지 않지만, 읽다보면 어린 시절 노명식의 장면과 나이 든 김의원의 장면이 겹치게 된다. 


그런 노명식이 신학교에 가서 참회를 계속 이어가고자 하는데, 이는 안 선생이 전직 신부였다고 하니 노명식이 안 선생의 잔을 물려받아 자신의 잔을 채우게 되는 셈이고, 안 선생은 무불 스님으로부터 머리를 깎고 여래암에 눌러앉아 자신의 잔을 채우고, 무불 스님은 불교 정치를 한다고 속세로 나아갔으니 김의원의 자리를 이어받아 잔을 채웠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윤희는 무엇인가? 진걸로 하여금 여자들에게 지녔던 환상을 깨게 하는 인물이다. 자신이 만났던 여자들 그래프를 그려놓고 10번째 여인으로, 그래프를 완성시켜줄 여인으로 윤희를 생각했지만 윤희는 결코 진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 하는 여인이 아니다. 윤희에게도 자신의 잔이 있기 때문이다.


윤희를 만나기 전까지, 아니 윤희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 진걸은 여자들은 자신의 잔을 채울 수 있는 수단에 불과했다. (요즘 이런 태도를 지닌 남성은 마초라는 이름을 받을 수밖에 없을 테지만, 이 소설은 꽤 오래 전에 쓰여졌고, 이 소설 곳곳에서 나타나는 가부장적 요소를 지금 관점에서 비판하기는 그렇다고 본다. 당시 지배적인 사고방식이나 행동방식을 표현했다고 보면 된다. 물론 지금 관점에서 이 소설이 지닌 한계를 이야기하고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하기는 하지만) 그러니 그래프를 그려놓고 하지. 하지만 윤희는 윤희만의 잔이 있기에 진걸의 잔을 채워주는 역할에 그치지 않는다. 그렇게 진걸은 자신의 잔이 뭔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잔을 채우려고 했다고 할 수 있다.


시험에서 떨어지고 윤희에게서 완전히 자신의 처지를 알게 된 후 진걸은 여래암에 남아 있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고향으로 돌아가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명순과 결혼할 수도 없다. 아직 그는 자신의 잔에 무엇을 채워야 할지, 자신의 잔이 무엇인지 명확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 역시 끝을 맺지 않고 있다. 사실 진걸이 고향으로 돌아가 동네 사람들의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명순과 결혼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하면 이는 너무도 뻔한 결말 아니겠는가. 그러니 작가는 이런 결말 대신 진걸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려주지 않는 방향으로 결말을 맺는다.


다만,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진걸은 자신의 잔을 찾고 있을 것이라고. 그 자신의 잔을 채우려 노력하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게 해주는 인물이 배경숙이다. 어려운 처지에 있지만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그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하려고 하는 사람. 고통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사람.


그래서 진걸은 배경숙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고, 우리는 진걸 역시 그런 삶을 살아가려고 하지 않을까 추측을 하게 된다.


  여자로서는 가장 절망적인 부끄러움을 지녔던 여자 - 육신의 결함 때문에 누구보다 많은 부끄러움을 견뎌야 하는 그녀의 굴욕과 슬픔 속에서 그 마지막 부끄러움만이라도 자기의 것으로 지키는 여자가 되겠노라며 산을 내려간 배경숙 - 진걸은 아직도 그녀의 후일만은 쉽게 떠올려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만큼 그녀의 후일이 궁금했다.

  배경숙 - 그녀는 아직도 자신의 부끄러움을 견디면서 그것을 그녀의 마지막 진실로 지니고 살아가는 여자일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어둡고 아픈 삶을 아직도 어디서 부끄럽고 겸허하게 살아내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진걸은 이내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경숙의 아픔이나 부끄러움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불결스런 상상으로 하여 그녀의 순결한 삶(진걸에겐 그녀의 삶이 그렇게만 생각되고 있었다)을 욕보이게 하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배경숙의 아픔과 부끄러움에 비하여 자신의 그것은 오히려 당당하고 뻔뻔스러워지고 있을 듯싶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겐 그 경숙에게서와 같이 부끄러움다운 부끄러움조차도 없을 듯싶어졌기 때문이었다. (476-477쪽)


이런 장면 때문에 진걸은 자신의 잔을 찾아 살아가려고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장면에서만이 진걸이 진실로 자신을 돌아보게 되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진걸은 과거와는 달리 살아가게 되리라 믿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걸은 누구의 자리를 찾아갈까? 그건 누구라고 꼭 집어 말할 수 없다. 다만, 자신의 삶을 겸허하게 살아내는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이 소설은 진걸이라는 세상을 다 아는 듯이 젠체하는 사람의 시선과 행동을 통해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게 하고, 내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잔을'이라는 말에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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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 에콜로지와 민주주의에 관한 에세이
김종철 지음 / 녹색평론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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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생각난다. 아주 조금씩, 서서히 우리들에게 다가와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게 해, 알아차리는 순간은 이미 다 젖어 있게 되는 상태. '시나브로'라는 우리말 부사가 이렇게 적절하게 잘 맞는 때가 바로 지금이다.


기후위기라는 말을 넘어서 이제는 기후재앙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고 하는데, 미세먼지 나쁨은 일상이 되었고, 감염병들이 도처에서 창궐하고 있는데, 비단 사람만이 아니라 동물들에게도 온갖 감염병들이 확산되고 있는 상태, 이것들의 위험을 깨달은 순간에는 이미 널리 퍼져 있는 상태.


하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라도 시작한다면 늦지 않은 상태가 될 수 있는데도, 이왕 젖은 옷이니 갈아입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그때 그때 일시적인 처방에만 힘쓴다면,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가랑비에 옷 젖는 일은 반복될 수밖에 없는데...


이 책은 김종철 선생의 생태사상론집이다. 이 책에 수록된 많은 글들이 이미 [녹색평론]에 실린 글들이지만, 그 책에 실리지 않은 글들도 있어서 김종철 선생의 생태사상에 대해서 일별하기엔 좋은 책이다. 그것도 2000년대 글만 모아놓았으니, 시대에 뒤떨어진 글들도 아니다.


하긴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글이나 말은 시대를 넘어선다. 그 시대에만 국한된 말ㅡ글이 아니라 인류 역사를 통해서 필요한 말-글이 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말은 현재만을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류가 지속적으로 이 지구에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들의 말-글에는 현대만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가 함께 담겨 있다. 그러니 그런 말-글들에서 시대의 한계를 인식하기는 힘들다.


김종철 선생의 주장을 한 마디로 말하면 생태문명으로 전환하자이다. 근대문명은 차별의 문명이고, 약자들의 착취를 기반으로 한, 또 자연파괴를 기반으로 한 문명이기에 이대로 지속할 수는 없다고 한다.


생태문명으로, 사람들이 생활 모습을 바꾸지 않으면 지속가능한 삶은 힘들어진다고 한다. 그렇다면 생태문명이란 무엇일까? 간단하게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이 말을 중심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우리의 삶의 방식을 영구적인 지속이 가능한 방식, 즉 자연과 인간 사이의 물질적 대사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순환적' 방식으로 갈 수 있는 길을 탐구하고, 가능한 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 그 방향으로 전환하려고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 영구적으로 인간다운 삶의 영위를 보장하는 거의 유일한 생존·생활 방식이 농사라는 점을 재인식하고, 그 농사의 궁극적인 토대인 토양을 건강하게 가꾸고 보존하는 것이랴 말로 얼마나 중요한가를 우리는 숙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우리의 집단적 삶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의사결정 과정, 즉 '정치'가 합리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안된다. (7쪽)


이런 이야기를 주제별로 묶어서 이 책에 실었다. 김종철 선생이 이야기하는 농사는 대농, 기업농이 아니라 소농을 말한다. 소농 개념에 유기농이 포함되어야 하고, 다품종 소량 생산, 자급자족할 수 있는 농사를 이야기한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농업, 기계와 화학비료를 이용해 대량으로 생산하는 농업, 돈이 되는 환금작물을 중심으로 하는 농업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1장)


소농 중심으로 서로 돕고 사는 자치가 살아있는 농촌을 이야기한다. 그러기에는 비대한 국가보다는 지역자치가 살아있는 사회를 꿈꾸게 된다. 이는 바로 민주주의와 직결되는데, 어떤 민주주의냐 하면 형식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시민들이 참여하는 민주주의를 말한다. 그래서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할 수 있는 시민참여 민주주의에 대하여 고민하고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2장)


시민참여가 활발해지기 위해서는 삶에 여유가 있어야 한다. 생계에 급급하다보면 참여하고 싶어도 참여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기본소득을 이야기한다. 지금 대선 후보들 중에 기본소득을 이야기하다가 철회하는 경우가 있는데, 김종철 선생은 예전부터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글에서 기본소득을 반대하는 사람들 주장이 지금도 통용이 되고 있고, 기본소득에 대한 반대여론이 더 높은 상황이니, 이 장을 읽고 기본소득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되어야 할 거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대통령 선거가 있는 올해를 앞두고 심도 있는 논의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수박 겉핥기 식으로 넘어가지 말고 철저한 검토가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기본소득을 기본배당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는데... 이 기본소득과 더불어 은행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은행에 대해서도 많은 논의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하고. (3장)


4장에서는 우리나라 촛불시위 또는 촛불혁명에 대해서 그 의의를 이야기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시민들이 참여해서 정치에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사례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 글에서 '시인 김해자는 근작 시 <여기가 광화문이다>에서 "대통령 하나 갈아치우자고 우리는 여기에 모이지 않았다"고 일갈한다. 이것은 지금 주말마다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오는 수많은 시민들의 공통적인 심경일 것이다'(324쪽)라고 하고 있다. 


그렇다. 대통령 한 사람을 바꾸자고 촛불을 들지 않았다.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하기 위해서 그 추운 날에도 촛불을 들고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광장에 나섰다. 이 말, 지금 또다시 대선을 앞두고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과연 우리는 대통령 한 명 바꾼 것에서 얼마나 나아갔을까 생각하게 된다. 


마지막 5장에서는 탈핵에 관해서 이야기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여전히 논쟁 중인 탈핵이다. 원자력발전을 포기하지 않고 외국에 수출까지 하는 나라가 됐는데, 기후위기를 벗어날 길은 원자력발전이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꽤 있으니... 하지만 원자력발전이 지닌 이면에 대해서 김종철 선생은 이 글들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생활 형태를 바꾸면서 실질적 민주주의를 이루어 지역자치를 이루고 다품종 소량생산을 하면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더 이상 성장지상주의에 빠지지 않는 그런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생태문명'이라는 말로 정리해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고 한다. 기후위기는 기후재앙이 되었다고, 그러니 변해야 한다고.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변해야 하기 때문에, 어떻게 변할 것인가에 대해서 논의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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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가라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제13회 동리문학상 수상작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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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에 읽힌다. 아니,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손에서 놓기가 힘들다. 한강 특유의 짧게짧게 툭툭 치며 나가는 문자들이, 그리고 결코 길지 않게 끊어놓은 단락들이, 마치 한 계단 한 계단 밟아올라가듯이, 또는 한 계단 한 계단 밟아내려가듯이 소설을 계속 나아가도록 한다.


추리를 하게 하는 면도 있지만, 사랑에 관한 면이 주를 이루고, 그 사랑이 육체적인 사랑보다는 서로의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랑이라는 점에서, 드러내놓고 보여주지 않는 사랑이어서 더 아련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중학교 때 만나게 된 두 친구 정희와 인주. 떨어져 있으면서도 결코 떨어져 있지 못한 친구 관계. 그런 친구들 중에 한 사람인 인주가 죽는다. 자살이라고 한다. 유고전도 열린다. 평전도 쓰인다. 그런데 유고전이나 평전을 쓰는 사람에게 또다른 친구는 짙은 의심을 지닌다.


인주는 결코 자살할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자살이란다. 정희는 평전을 반박하기 위해 죽은 친구인 인주가 만났던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그 과정이 긴박하게 펼쳐지면서, 평전을 썼던 강석원이라는 인물과 쫓고 쫓기는 갈등 관계가 겹쳐진다. 여기에 인주 엄마에 대한 류인섭의 글에서 인주 죽음의 진실을 밝힐 단서들이 나타난다.


정희는 인주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과연 정희와 인주는 서로를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사실 나도 나를 모르는데, 남이 나를 안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이있지 않나.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모르는 사실이 있다. 감추고 싶은 일들이 있다. 마음이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두 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이 소설에서 정희와 인주는 오랜 친구다. 서술자인 정희는 인주의 죽음이 석연치 않다고 여기고 인주 죽음의 진실을 찾아 다닌다. 그러다가 자신이 인주에 대해서 많이 몰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주가 끝까지 정희에게 감추고 있었던 것들. 그것은 인주 엄마에 대한 이야기도 있지만, 정희에 대한 인주의 감정이다.


소설 초반부에 잠깐 인주가 정희에게 지닌 감정이 서술된다.


한 번, 꼭 한 번이었지. 갑자기 네가 내 얼굴을 끌어당기고 입술을 포갰지. 

나는 너무 놀라 네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지. 

왜 그랬어, 라고 내가 묻자 너는 말했지. 

이해하고 싶어서.

나는 달아오른 뺨과 입술을 두 손으로 가리며 뒤로 물러나 앉았지. 열여덟 살이었지. 삼촌의 빈 작업실에서, 물건들을 정리하다가 갑자기, 네가 내 입술에 입 맞췄지. 그렇게 된 거였지. (24쪽)


이런 인주의 마음이 소설의 뒤에 가면 인주가 쓴 글을 통해서 한 번 더 나온다. 삼촌에게 독백하듯이 쓴 글에서.


왜 가끔 이렇게 오지 않았어? 아무 말 없이라도 나타나주지 않았어? 그랬다면 좀더 견디기 쉬웠을 텐데. 환멸을. 증오를. 고통을. 믿을 수 없을 만큼 망가진, 그 여자만큼이나 부서진 정희의 얼굴을. (373쪽)


인주는 정희를 사랑한다. 그렇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지켜볼 뿐이다. 정희가 살아가도록. 이런 인주의 마음을 정희는 알게 되는 걸까? 소설의 막바지에 불이 난 작업실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오며 정희는 이렇게 외친다. '살고 싶다'


그렇다. 이 소설은 두 친구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살아내야' 함을 말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우리는 살아야 한다. 어떤 고통 속에서도 죽음으로 회피하지 않고 살아서 겪어내야 한다. 


정희가 마지막에 하는 말은 바로 이 결심을 이야기한 것이고, 정희의 이 다짐으로 소설은 결말을 완결짓지 않고 더 생각하게 하는 여운을 남긴다.


결국 인주를 죽인 것은 누구인지 짐작은 하지만 확실하게 밝히지는 않기 때문에 인주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 밝혀질 것인가? 앞으로 정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점은 독자의 마음 속에, 머리 속에 남아 있다. 그 다음 이야기는 독자들이 써내려가면 된다.


이렇게 사랑 이야기로 읽어도 좋다. 그 사람의 고통까지도 사랑하는 관계. 그래서 어떤 말보다도 함께 있어주는 그런 관계. 충고도 조언도 없이 그냥 덤덤하게 함께 있어주는 인주. 그런 사랑의 이야기로 읽어도 좋다.


하지만 여기에 덧붙여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 그리고 서서히 밝혀지는 진실을 이야기하는 소설로 읽어도 좋다. 서술자인 정희로 하여금 진실에 한발 다가가게 만드는 단서들을 읽으면서 함께 찾아가는 재미도 좋다.


또한 한강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사회의 그늘이 개인의 아픔 속에 녹아들어 나오는 면을 찾아 읽어도 좋다. 권력을 통해서 진실을 왜곡하던 시대의 모습 (류인섭이 정희에게 쓴 편지글에서 이 점이 잘 드러난다), 가부장적인 사회의 모습(정희가 엄마를 도와 일하는 장면에서 남자 형제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등도 이 소설에서 찾아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살아냄을 담은 소설이다. 힘든 시기를 거치며 자살을 시도하는 정희에게 살아야 함을 이야기하는 인주, 그리고 인주가 정희에게 하는 말들.


정희야

넌 아마 아주 오래 살 거야.

모든 걸 기억하면서.

지금보다 더 추위를 타면서.

백 살, 백이십 살씩 사는 할머니들 봐.

다 체형이 너 같아. (327쪽. 187쪽에도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그러면서 인주는 말한다. '난 말이야, 그렇게 늙어갈 거야.'(187쪽)라고. 이런 인주가 자살을 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정희가 인주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파헤치려는 것이다. 또한 정희는 오래 살아서 진실을 기억해야 하고.


이렇게 짧은 문장들이 마음을 톡톡 건드리면서 소설의 끝을 향해 가게 한다. 그 자체만으로도 읽을 만한 소설이다. 단숨에 읽을 수 있는 그런 소설이었다. 읽고 나서도 마음 속에 긴 여운이 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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