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론보다 이 시 하나가 페미니즘에 대하여 잘 말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시집 제목이 된 '여왕코끼리의 힘'도 페미니즘을 잘 보여주고 있지만...


 노자의 [도덕경]에서도 여성성을 강조하고 있고, 그러한 여성성을 부드러움과 일치시키고, 그것이 다시 비어있음과 포용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이 시집에서도 그러한 여성성에 대해서 다룬 시들이 많다.


  강함을 추구하는 사회는 배제를 전제로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약한 것들을 배제하고, 또는 드러나지 않게 하는 사회. 그래서 강함은 딱딱함과 연결이 되고, 딱딱함은 포용성 없음으로, 다양성보다는 단일성, 획일화를 추구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도덕경에서도 그런 말이 나온다고 기억하고 있는데, 단단함은 곧 죽음이라고. 이걸 우리 생각에 연결시키면 사고의 경직성은 생각의 죽음이니, 이런 사람들이 권력을 잡으면 그 사회는 다양성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가 된다고. 그리고 이런 사회는 여성성을 추구하는 사회와는 다른 사회라고.


이 시집에 실린 '연금로(練金爐)'라는 시를 보면 여성성이 추구하는 방향이 무엇인지, 그러한 여성성이 실현되지 않는 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 수 있다. 어떤 이론서보다도 더 명확하게 이이해할 수 있게 된다. 시를 보자.


     연금로(練金爐)


여자가 여자에게로 면면히 물려주는 유품입니다


티라노사우루스의 이빨이 들어갑니다

칭기즈칸의 창, 나폴레옹의 칼,

히틀러의 전자포, 루스벨트의 핵폭탄,

식민지에 복제 인간을 대량 사육하고 싶은

남자의 채찍이 들어갑니다


수천만 년 불뚝이는 육식성 근육질들

무쇠 가마 안에서 물엿 끓듯 오래 달여져

펄죽펄죽, 퍽, 퍽,

연금로 안에서 공기 방울을 터트립니다

뎅글뎅글한 헷살들이 터져 나옵니다


붉은 해저궁 같은 연금실 공간에

순금 노을이 햇살을 굴리며 여울질 때


거름망을 통과한 사내아이들이 걸어 나옵니다

순한 쌍떡잎 언뜻언뜻 비치며


......................................그럼에도

역사는 전환점에 다다르지 못한 것 같고,


들춰 보면 늘 고통의 벽화입니다

퉁겨져 나올 듯 어깨뼈가 불거진 아프간 아이들

조막손이로 줄줄이 태어나는 체르노빌 아이들

철조망을 붙잡고 사라진 지평선을 내다보는

킬링 필드의 아이들, 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아이들


나는

연금술 이론 자체를 엎어 버릴까, 말까, 생각합니다

이미 내벽이 얇아지고 군데군데 헐어 버린

오래된 연금로를 깃털 업는 어깨 위로 치켜들고


조명, 여왕코끼리의 힘. 민음사. 2008년 1판 2쇄. 40-41쪽.  


'연금술 이론 자체를 엎어 버릴까, 말까, 생각합니다'라고 절규하는 시인의 목소리. 이는 아직도 세상은 이 시의 앞부분에서 말하고 있는 것들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고, 그래서 이렇게 힘들고 혼란스럽다고...


하지만 이 연금로가 완벽하게 작동하지 않는다고, '내벽이 얇아지고 군데군데 헐어 버'렸다고 버려서는 안 된다. 고쳐야 한다. 이런 연금로 없는 세상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세상이 될 수밖에 없으므로.


시인도 그 점을 안다. 그러니 이 시집 제목이 바로 힘센 남성성을 거느리고 평화를 유지하려 한다는 내용을 담은 '여왕코끼리의 힘'이지 않겠는가.


다만, 아직도 강함과 배제와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우리에게 연금로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들이 연금로를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버리게 했다간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생각해 보라고...


시 앞부분에서 제시했던 엄청난 폭력성들을 계속 겪을 것이냐고, 우리 후손들에게 그런 세상을 물려줄 것이냐고?  시인의 이 시는 어떤 이론보다도 더 단순하고 명확하게 우리에게 '여성성'이 중요함을 생각하게 한다. 


(물론 이때 여성성은 생물학적인 여성이 아니라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여성성을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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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송필환 옮김 / 해냄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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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마구 소설 '~도시' 연작을 읽고 있는 중. 앞선 눈먼 자들의 도시와 눈뜬 자들의 도시가 경악, 공포를 불러일으켰다면, 이 소설은 그에 비해서는 차분하다는 인상을 준다.


그런데 그 차분함이 어쩌면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라는 제목에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서 읽는데, 내용은 단순하다. 등기소 직원인 주제 씨가 한 여인의 기록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여인을 추적하는 과정이 소설의 전부다.


왜 추적하는지, 무엇을 알려고 하는지도 잘 밝혀지지 않는다. 단순한 호기심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소설을 통해서 우리는 그 여인의 이름을 끝까지 알 수 없게 된다. 아니 이 소설에서는 이름을 지닌 사람으로는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주제 씨밖에는 없다. 다른 사람들은 거주지에 따라서 또는 직급에 따라서 불리고 있을 뿐이다. 이렇듯 이 소설에선 이름을 지닌 인물이 거의 없다. 그냥 이름 없이 살아갈 뿐이다. 아니, 이름이 있는데도 이름으로 불리지 못한다. 


그런 극단적인 예가 바로 주제 씨가 관심을 갖고 있는 여인이다. 그녀가 자살을 해서 공동묘지로 갔는데도 이름보다는 번호만이 남게 된다. 그것도 바뀐 번호로. 그렇다면 이름은 무엇일까? 정체성일까? 관계를 맺는 기초일까? 친근한 사람들끼리 이름을 부르면서 관계를 맺어가는데, 이름 없는 자라는 이야기는 관계 맺기가 안 된 사람이라는 뜻이 되지 않을까.


여기서 김춘수의 '꽃'이란 시를 떠올릴 수 있다.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는 나에게는 관계가 없는 존재일 뿐. 사람들 관계도 마찬가지 아닐까? 사회 생활을 하면서 맺는 관계에서는 이름보다는 직급이나 다른 호칭으로 불릴 수도 있지만, 사적인 관계, 친밀한 관계가 되려면 서로의 이름을 불러야 하지 않나.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형식적인 관계일 수밖에 없다.


여자는 주제 씨에게 기록으로 다가오지만, 그 기록을 우리는 알 수 없다. 여자가 다녔던 학교, 직장까지 찾아가지만 그것이 전부다. 왜 그녀가 자살을 했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당연하다.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지금 대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이렇게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냥 기록으로만 남아 있고, 그 기록이 진실을 담고 있는지를 알 수 없는 그런 세상. 그러기에 사라마구의 이 소설은 익명으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관계를 맺고 살고 있을까를 생각하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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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이 어둡다. 암흑향이라니... 암흑이라면 캄캄함이고, 향이라는 한자어는 마을, 고향이라는 한자어니까, 제목을 풀어쓰면 캄캄한 마을 정도가 되겠다.


  표지 디자인 역시 검은 테두리에 하얀 바탕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암흑이라고 해서 전부 까맣지는 않으니... 암흑은 빛을 예비하고, 빛은 다시 암흑을 예비하니...


  우리가 알고 있는 빛들은 어둠 없이는 우리에게 올 수 없지 않은가. 빛이 더욱 아름다운 이유는 어둠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시 제목인 암흑향은 어두운 마을이라는 의미보다는, 이 어두움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시집에 실린 시들이 하나같이 어려워서, 또 한자도 많아서, 그리고 고대신화(우리나라나 서양의)들이 맥락없이 (시인에게는 맥락이 있을지 몰라도 내게는 맥락이 없다. 단지 그러한 사건들, 사람들, 존재들, 이야기들을 뒤섞어놓은 듯한 느낌만 있을 뿐) 섞여 있어서, 시집 자체가 암흑향이다. 내겐 조연호 이 시집이 아주 어두운 마을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더듬더듬 나아가야 하는, 한 줄기 빛을 애원하게 하는 그런 역할을 한다.


이 암흑향인 시집에서 어떤 빛을 찾을까? 찾으려고 노력하면 찾을 수 있을까? 이 시집에 유난히 적()이라는 한자어 제목을 단 시가 네 번 나오는데, 이 '적()'이라는 한자어는 부적이라는 뜻이다.


부적, 귀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지니고 있거나 집에 붙이거나 하는 물건 아닌가. 즉 부적을 지니고 있다는 말은 귀신과 재앙을 늘 의식하고 산다는 얘기다. 그러니 그런 세상에서는 귀신과 사람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시집 첫 시인 '적()'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죽어 또 귀신이 된 너와 만나 즐거웠다' (9쪽) 

그렇게 시는 귀신과 함께 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러면서 어둠이 빛과 함께 할 수밖에 없음을 같은 시에서 '더러운 얼굴로만 깨끗한 얼굴을 닦을 수 있다는 걸 거기서 배웠다'(9쪽)고 하고 있다.


조연호의 시는 독자에게 어떤 애교도 없다. '시'라는 시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시는 / 애교가 없어 불행하다'(12쪽)


이렇게 조연호 시는 애교가 없어 불행하다. 애교가 없는 시를 다른 말로 하면 독자들의 마음에 드는 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즉 독자를 위해서 쓴 시가 아니라 시인이 쓸 수밖에 없는 시를 썼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니 시인은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또는 무의식 저변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을 잡아 시라는 형식으로 표현해내고 있을 뿐이다. 그 시를 읽는 우리는 그 시에서 또다른 암흑을 느낄 뿐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어디 암흑향인 곳이 이 시집만이랴. 더 많은 암흑향들이 있고, 그럼에도 우리는 그 암흑향에서도 아주 작은 빛을 찾아 삶을 꾸려가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되지 않겠는가. 


이 시집을 읽으면서 '마크 로스코'의 그림이 떠올랐다. 특히 검은색 계열로 칠해진 그림들. 그 그림들에서 암흑향을 보는데, 마냥 암흑만은 아니라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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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2-15 1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로스코!
그의 그림에서도 향기가 날까요?
세계가 거기에 담겨있다고 하니!
오랜 응시는 감동을 자아낸다던데 여행자는 그럴 시간이 없죠 ㅠ

kinye91 2022-02-15 11:00   좋아요 1 | URL
저도 그림은 잘 몰라서요. 다만 오랜 응시를 통해 감동을 받을 순 있을텐데...저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네요.

초란공 2022-02-15 14: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와 함께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것 같네요.~ 잘 읽었습니다!

kinye91 2022-02-15 14:0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눈뜬 자들의 도시 (리커버 에디션)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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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충격, 경악, 두려움.


이 소설을 읽은 느낌을 세 단어로 표현하면 이렇다. 긍정적인 단어들이 나와야 하는데, 제목이 '눈먼 자들의 도시'가 아니라 '눈뜬 자들의 도시' 아닌가.


눈을 떴다는 이야기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정치로 따지면 민주주의를 이룩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사람들 이야기 아닌가.


그래서 불의를 참지 못하고, 부패에 저항하며, 독재 정권을 용납하지 못하는 그런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도시가 바로 '눈뜬 자들의 도시' 아닌가.


그런 기대를 하고 읽게 되고, 소설 전반부에서는 그런 기대를 충족시키고 있다. 그럼 그렇지. 부패한 정권,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평화적인 방법. 도시 사람들은 백지 투표를 한다. 두 차례에 걸친 선거에서 처음에는 70% 정도가 백지 투표를 했다면(투표를 하러 나왔지만 어느 정당에도 기표를 하지 않고 투표 용지를 제출하는 상태) 두 번째 선거에서는 이보다 더 나아가 80%이상이 백지 투표를 한다.


정권을 잡고 있는 우익 정당에게도, 그를 뒤쫓고 있는 중도 정당에게도, 그렇다고 변화를 주장하는 좌익 정당에게도 유의미한 표를 주지 않는다. 그것은 그만큼 그들이 기성 정치를 불신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대로는 안 된다. 바꿔야 한다고 우리가 촛불을 들었듯이 소설에서는 선거에서 백지를 냄으로써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한다. 누구랄 것도 없도 선동자도 없이 그렇게 백지를 내자 정부는 당황한다.


여기서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까? 민주적인 정부라면 이는 시민들의 불신이라고 생각하고 내각 총사퇴를 할 것이다. 정치 개혁을 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들은 정권을 내줄 생각이 전혀 없다. 시민들 가운데 약 500명 정도를 잡아간다. 그리고 그들에게 백지 투표를 했냐고 묻는다.


이 물음 자체가 이미 독재 정권임을 암시하고 있다. 현대 투표는 비밀 투표이기 때문에 누가 어느 정당에 투표를 했는지 물을 권리가 없다. 시민들은 그렇게 헌법에 기초해서 또 상식에 기초해서 대답한다.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자 정권이 시도하는 일은 우리가 잘 알고 이는 고문이다. 말로는 고문이 아니라고 하지만 격리시킨 다음에 나오는 행동은 뻔하다.


 (우리나라 엄혹했던 시절, 고문이 일상이던 시절을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이 소설에서 암시하고 있는 방법들, 그 장면들은 생생하게 떠오른다)


답이 나오지 않자 정부는 수도를 이전한다. 백지 투표가 수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리고 도시를 봉쇄한다. 누구도 들어오고 나가지 못하도록.


(기시감이 느껴질 대목이다. 광주민주화 운동 당시 계엄군이 했던 행동이 떠오르는데, 설마 사라마구가 우리나라 사례를 알고 소설에 도입하지는 않았겠지)


이때 수도의 시장이 한 행동이 민주주의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알린다. 수도 전철역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한다. 정부가 수도를 이전하고, 정부 관료, 경찰관들을 모두 철수시켰을 때 치안 걱정을 했지만, 도시는 예상 밖으로 잘 돌아간다. 여기에 당황한 정부에서 할 수 있는 방법. 혼란을 일으키는 일. 이를 간파한 시장은 시장직을 사임한다. 그에게는 시민들이 더 중요했던 것.


이때 한 통의 편지가 온다. (사실 세 통의 편지다. 대통령, 총리, 내무부 장관에게 온 같은 내용의 편지) 모두가 눈 멀었을 때 눈 뜬 여자가 있었다고, 이번 백지 투표 사태와 그 여자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내용의. 상황을 반전시킬 기회를 잡았다고 정부는 판단한다.


이에 내무부 장관은 경찰 세 명을 파견한다. 진상을 조사하고 여자를 체포하라고. 하지만 도시에 들어온 경찰 중 지도자인 경정은 여자가 무죄임을 알게 된다. 확신한다. 그리고 정부가 그 여자를 백지 투표의 주범으로 몰아가 자신들 정권을 안정을 꾀하려 함을 간파한다.


그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그냥 자신의 양심을 묻어두고 명령대로 할지, 아니면 양심에 따라 행동할지. 사라마구는 여기에서 낙관적으로 보이는 서술을 한다. 경정은 양심에 따라 행동한다. 언론에 그동안 자신이 한 일을 폭록한다. 물론 여자에게도 자신의 임무를 알리고.


언론에서는 이 일을 검열을 피해 교묘하게 발표하고 (꼭 남의 나라 일 같지가 않다. 보도지침이라는 언론통제 제도가 있던 나라가 우리나라 아니던가) 사람들은 그 신문이 발행정지가 되어도 기사를 복사해서 서로 알린다.


이제는 경정이 남았다. 진실을 폭로한 사람. 어떻게 될까? 제목이 '눈 뜬 자들의 도시'라서 희망을 보여주는 결말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안심하고 있는 순간, 경정은 죽임을 당한다. 그렇다. 정권의 비리를 폭로한 내부자는 살아남을 수 없다. (박정희 정권 때 중앙정보부장을 했던 김형욱을 생각해 보라. 그의 죽음을) 이렇게 하고 소설이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눈먼 자들의 도시'와 연결되는 장면들이 이 소설에 나오는데, 사람들이 갑자기 눈이 멀었던 시기에서 4년 뒤가 바로 이 소설의 배경이다. 그리고 유일하게 눈을 떴던 사람이 나오고... 그때에 유일하게 눈을 뜰 수 있었던 사람, 그 사람은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자, 4년 뒤 정권은 진실을 감추려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나 진실을 폭로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떻게 되어야 하나? 경정의 말에서 결말을 추측할 수 있다.


내가 이 일을 하면서 배운 바로는 정부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말도 안 된다고 판단하는 것 앞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고, 외려 그런 말도 안 되는 것을 이용해서 양심을 무디게 하고 이성을 파괴하오. (377쪽-2009년 초판 10쇄)


결말은 이야기 하지 않겠다. 다만, 정권 내에서도 치열한 권력 다툼이 벌어진다는 사실은 언급하고 넘어가야겠다. 그들은 권력을 나눌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언제든지 상대를 걸어서 넘어뜨리려 한다. 그리고 넘어뜨린다. 그래야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여긴다. 이게 권력의 속성이다. 이런 권력의 속성을 잘 드러내는 인물이 바로 소설 속 총리다. 그 총리는 소설 속 인물만이 아니라 독재 정권이 이뤄지고 있는 나라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인물이다.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이라는 말로 통칭할 수 있는 그런 인물들.


(총리가 장관들을 해임하고 법무부와 내무부 장관을 겸임하는 과정이 이 소설 속에 나오는데, 와 이거 완전 전두환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을 함께 맡아 군과 민간의 정보권력을 장악했던 그를. 사라마구 소설이 우리나라 현실을 빗대어 썼나 싶은 생각이 드는 장면이기도 한데, 이런 일은 권력을 추구하는 인간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파악할 수 있다)


사라마구는 우리에게 근거없는 희망을 지니지 말라고 말하는 듯하다. 민주주의는 그냥 유지되지 않는다고. 권력집단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그들을 제대로 감시하고 통제하지 못하면 다시 '눈먼 자들'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그래서 소설 결말에 다시 눈 먼 사람들이 등장하여 말을 하면서 소설을 끝맺는다. 권력을 제대로 감시, 통제하지 못했을 때 그렇게 우리는 눈 먼 자들이 될 수밖에 없고, 우리에게 조심하라고 경각심을 주는 존재를 잃으면서도 그것을 아쉬워하지 않게 된다고 하는 듯하다.


누가 환상적 리얼리즘이라고 했나. 이 소설은 리얼리즘이다. 그냥 우리 현실에서 너무도 잘 볼 수 있는 면들이다. 그것을 사라마구는 소설을 통해서 우리 눈 앞에 들이밀 뿐이다. 이래도 보지 않겠냐고, 이래도 눈 감고 있겠냐고. 계속 눈 감고 있으면 이렇게 된다고. 눈을 뜨고 있어도 권력은 이토록 보이지 않으면서도 치밀하고 집요하게 우리를 감시하고 괴롭히고 있다고.


우리도 곧 선거가 다가온다. 선거에 참여하기 전에 이 소설을 먼저 읽었으면 좋겠다. 우리 국민 모두가. 정말로 '눈먼 자들'이 되지 않고 '눈뜬 자들'이 되기 위해서. 우리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사라마구는 이 소설을 통해 이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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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2-02-14 16: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눈먼자들의도시는 재밌게 읽었는데 속편은 이상하게 손이 안가 안읽었어요. 근데 리뷰보니까 전편하고는 전혀 다른 분위기 같네요. 이 책도 속편이 더 있는 거 같던데 다 읽는게 나으려나요?^^

kinye91 2022-02-14 16:59   좋아요 1 | URL
눈먼 자들의 도시, 눈뜬 자들의 도시,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이렇게 세 편을 읽었는데, 제 생각으로는 눈뜬 자들의 도시는 재미있었는데, 이름없는 자들의 도시는 좀 그랬어요.
 
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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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한자어로 적혀 있으면 어느 나라 말인지 알기 힘들다. 사실 한자로 나라 이름을 적었던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오래 전이었으니...


독일을 덕국으로, 프랑스를 법국으로 불렀던 시대, 희랍은 그리스다. 그러므로 희랍어는 그리스어다. 우리와는 관계가 없을 언어라고 생각하는데, 요즘 코로나19로 인해서 희랍어를 조금씩 만나게 된다. 변이 바이러스들의 이름을 그리스어 알파벳의 순서대로 붙이고 있다고 하니.


이런 것을 떠나서 희랍어는 우리와 상관없는 언어다. 우리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희랍어로 읽으려고 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겠는가? 그리스 문학을 전공하거나, 그리스에 관심을 가져 그 나라와 교류를 하려고 하는 사람이 아닌 경우, 또는 특별한 학문적(언어적) 호기심으로 배우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소설 제목이 희랍어 시간이다. 생소한 언어를 배우는 시간이 소설 제목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생소한 이야기여야 한다. 우리와는 결이 다른 사람들 이야기.


두 축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한강 소설이 보여주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서술자가 교차되어 바뀌는 경우가 많은데, 이 소설에서는 희랍어를 가르치는 강사인 남자와 희랍어를 배우는 학생인 여자가 서술자가 된다.


남자는 점차 시력을 잃어간다.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는 시력이 나빠지고, 안경을 쓰고도 잘 보지 못할 정도의 시력이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시력을 잃을 수 있는 상태. 그는 외부로부터 오는 시각적 정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즉 외부의 세계와 어느 정도는 단절이 된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닫혀간다는 의미가 된다. 


여자는 말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의식적이 아니라 어느 순간 말이 자신에게서 사라진다. 눈이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이는 역할을 한다면, 말은 내면에 있는 것들을 밖으로 표출하는 역할을 하는데, 말을 할 수 없는 상태는 자신의 내면을 다른 사람에게 표현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물론 글을 쓰면 되지만, 순간순간 이루어지는 대화의 장에서 글로 의사소통하기는 힘드니, 소통의 창구가 어느 정도 닫혔다고 보면 된다.


이렇듯 남자와 여자 모두 관계가 단절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런 상황이 소설 속에서는 여자의 말을 빌려 이렇게 표현되고 있다.


  시선만큼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접촉의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녀는 느꼈다. 접촉하지 않으면서 접촉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에 비하면 언어는 수십 배 육체적인 접촉이었다. 폐와 목구멍과 혀와 입술을 움직여, 공기를 흔들어 상대에게 날아간다. 혀가 마르고 침이 튀고 입술이 갈라진다. (55쪽)


이 표현을 보면 남자도 여자도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을 잃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둘은 모두 사회에서 접촉을 잃어가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존재를 잃어가는 사람들이 희랍어라는 낯선 언어로 만나게 된다.


접촉을 잃어간다는 공통점. 그 다음에는 무엇이 올까? 낯섬을 통해서 익숙함의 세계로 갈 수 있을까? 그것이 쉽지 않음을, 여자와 가장 가까운 관계라고 할 수 있는 아들과의 만남 장면에서 추측할 수가 있다.


'그녀가 붙들려고, 팔을 붙들려고, 손을 잡으려고 하자 물고기처럼 재빨리 빠져나간, 지느러미처럼 부드러운 살갗을 모른다.' (183쪽)


아들마저도 이렇게 그녀를 떠나가는데, 남자가 알 수는 없겠다. 이는 보거나 말로 듣거나 해야 하는데 여자는 남자에게 말을 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묘하게 한강 소설은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여운을 남긴다. 


제목이 희랍어 시간 아닌가. 낯선 언어를 배우는 시간. 왜 낯선 언어를 배우는가? 바로 낯섬을 통해서 자신이 겪는 일들을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 아닌가. 그리고 남자 역시 자신과 비슷한 절망을 안고 사는 사람이고.


그렇기에 한강이 다른 소설들에서 절망의 끝자락에 서 있다고 하지만,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려는 인물들을 만들어냈듯이. 세상을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듯이 이 소설 역시 절망으로 어둠 속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마침내 첫 음절을 발음하는 순간,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사라져 있을 것을 각오하듯이.' (191쪽)


이렇게 쓰인 이 소설의 마지막에서 그렇게 되겠다는 진한 여운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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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2 11: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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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2 12: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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