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바다출판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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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것은 일본 청년들에게 고하는 말이다.


그렇게 살면 안된다고, 당신들이 그렇게 살면 당신들 미래는 없다고. 청년답게 살라고. 아니, 사람답게 살라고. 사람답게 살지 않으면 나중에 이런 말이나 하게 된다. 


"인생 따위 엿이나 먹으라고!"


이때 인생은 우리들 삶 전반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기 삶을 자기 삶으로 살지 못한 사람이 죽음에 임박해서 회한에 젖어 하는 말이다. 평생을 허비하고 나서 그것을 인생이었다고 착각하면서 외치는 말.


따라서 "인생 따위 엿이나 먹으라고!"라는 말 앞에서는 '그런'이나 '이런'이라는 말이 붙어야 한다. 모든 인생이 '따위'가 될 수 없다. 또 그렇게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바로 '그런 인생 따위'가 되지 않도록 자기 삶을 살아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크로포트킨이 '청년에게 고함'이란 글에서 청년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어야 함을 강조했다면, 스테판 에셀이 쓴 '분노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체제 순응적인 청년들에게 그런 삶을 살면 안 된다고 외치고 있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다. 일본의 청년들에게 외치고 있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할까? 바로 독립적인 삶,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한다.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부모로부터 독립을 해야 한다. 즉 자신의 삶은 부모에 매인 삶이 아니라 스스로 살아가야 할 삶이라고... 그래서 저자는 이런 부모가 너무 없으니 청년들이 알아서 독립해야 한다고 한다.


  '더 나아가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 앞으로는 네 힘으로 살아가라고 진지하게 가르치고, 자신들은 어떻게든 살아갈 테니 네 인생에만 집중하라고 충고하고 또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부모는 더욱 적다.

  부모의 희생물로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자식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다 못해 자기 부모와 똑같은 부모가 되고 마는 자식은 또 얼마나 많은가.' (20쪽)


  자식은 부모의 제2 인생을 사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니 자식이 독립할 수 있을 때 독립시켜야 한다. 자식 삶은 자식 삶이고 부모 삶은 부모 삶이다.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한다. 효가 강조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끈끈한 가족간의 유대를 강조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주장이긴 하지만...


  여기에 더 나아가 국가에 의존해서도 안 된다고 한다. 국가의 실체는 바로 소수의 권력집단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운용하는 집단이라고 한다. 그러니 맹목적인 국가에 대한 충성심, 애국심으로 뭉쳐있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


국가가 먼저 있지 않고 사람이 먼저 있다는 점을 명심하라고... 국가를 우선하기 위해서 권력은 교육이나 방송 등을 통해서 사람들이 자연스레 받아들이도록 하고 있다고. 그래서 국가에 대한 맹신이 전쟁이나 핵발전소 폭발 등 엄청난 재앙을 일으켰지만 권력자들은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그들을 믿고 자신의 삶을 맡겨서는 안 된다고... 이런 식으로 연애나 직장 생활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학교 졸업하고 직장에 취업하는 일을 왜 당연하게 여겨야 하냐고? 과연 학교에서 배운 직장 생활이 자아실현을 할 수 있냐고? 연애 역시 환상에 빠져 실제 삶과는 괴리된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않냐고... 


그러다 죽음을 앞두고는 겨우 한다는 말이 "인생 따위 엿이나 먹으라고!"일 뿐이라고.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자신의 삶을 찾으라고. 그것이 바로 청년이 해야 할 일이라고.고생을 마다하지 말라고... 고생을 해야 자신의 삶을 찾을 수 있다고. 주어진 것을 받아먹는 태도를 버리라고 하고 있다.


'삶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의지로 쟁취하는 것이고, 죽음은 가능한 한 물리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한 악전고투와 고생에야말로 생명의 가치가 숨겨져 있다.' (196쪽)


이 책에서 저자는 아주 단순하고 강하게 주장을 한다. 작은 제목들만 읽어도 저자가 무슨 주장을 하는지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지금처럼 살면 안 된다고... 기존에 좋다고 하는 것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과연 자신에게도 좋은지. 자신이 원하는 삶인지. 그리고 도전하라고. 결과를 생각하지 말고 우선 부딪쳐 보라고. 부딪쳐 보지도 않고 머리 속으로 계산하고 피하지 말라고 할 수 있다.


그래야 "인생 따위 엿이나 먹으라고!"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된다고. 그러면서 책의 마지막에 이런 말을 한다. 자신의 인생을 사는데 누구를 거리낄 필요가 없다고. 그러면서 "인생 다위 엿이나 먹어라!"라고 하면서 저돌적으로 살라고.


지금까지 말해왔던 "인생 따위 엿이나 먹으라고!"가 부정적인 회한에 잠긴 말이었다면,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는 말은 내 삶을 스스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말이다. 이제 나는 내 인생을 살겠다는 선언.


청년들은 그래야 한다는 선언. 바로 이 책이 하는 말이다. 사실 그러러면 청년들이 어던 시도를 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마련해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가령 기본소득(기본 배당이라는 말이 더 좋다) 등을 통해 생계 문제를 사회(국가)가 해결해준다면, 그래도 청년들 특권이 무엇인가.


실패해도 좋다. 내 삶을 살아보겠다는 의지와 행동 아닌가. 그래서 우리가 온갖 도전을 할 수 있도록 사회 기반을 마련하라고 하는 일도 청년의 몫이다. 그냥 주어지지는 않으니까.


과연 이 책을 일본 청년에게만 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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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캐넌의 세계 환상문학전집 5
어슐러 K. 르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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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귄의 소설을 다시 읽기 시작한다. 환상적인 배경을 통하고 있지만, 결코 환상적인 이야기가 아닌 소설.


[로캐넌의 세계]는 르 귄이 쓴 [바람의 열두 방향]이란 소설집에 실린 '샘레이의 목걸이'를 확장해서 쓴 소설이다. 이 소설에도 '샘레이의 목걸이'는 프롤로그에 목걸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이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미지의 행성으로 찾아온 로캐넌이 펼치는 이야기가 바로 이 소설이다.


그는 샘레이를 만난 뒤에 미지의 행성을 탐험하기로 하고, 이 행성에 와서 지낸다. 지내던 어느날 행성 연합에 반란을 일으킨 세력이 그의 우주선을 파괴하고 동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 행성에 살고 있는 종족들을 몰살하거나 노예로 삼는다. 가공할 만한 현대 무기를 앞세워서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쫓아내거나 노예로 삼는 행위.


로캐넌은 그런 행위를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


'적어도 세 종 이상에, 모두 기술적으로 낮은 수준에 있는 이 행성의 고도 지성 생명체에 대해서는 모두 무시하거나 노예로 삼거나 절멸시키거나 중에 제일 편한 길을 택할 것이다. 침략자들에게는 기술만이 문제가 될 뿐이므로.' (68쪽)


이렇게 알려지지 않은 행성에 살고 있는 생명체들에 대한 존중은 없다. 함께 살아가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그들의 생활 방식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들의 기술력을 믿고 그들을 종속시키려 할 뿐이다.


이런 세력이 점점 많아지면 평화란 없다. 오로지 전쟁뿐이다. 그렇게 행성 연맹은 해체되어 가기 시작한다. 그런 해체를 로캐넌의 세계에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행성에 대한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로캐넌은 영주인 모지언과 그 수행원들과 함께 침략자들의 기지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 이 소설은 그런 모험담이기도 하지만, 이들이 긴 여정을 떠나면서 만나게 되는 일들이 바로 우리가 모르는 세계나 사람들과 처음 만났을 때 어떤 위험이나 또는 어떤 환대를 받게 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기지를 찾아내지만, 이미 깨지기 시작한 행성 연맹의 평화가 지속되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로캐넌은 돌아갈 곳이 없다. 이 행성에 머무르기로 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이름을 지닌 별을 지니게 된다.


이름, 막대한 기술력을 지닌 존재들은 무엇에든 자신들이 알 수 있는 이름을 붙이려든다. 이 이름이 기존 사회와 갈등을 일으키든, 기존 사회에 필요가 없든 상관이 없다. 그러니 소설의 끝부분에서 이 행성에 '로캐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서술은 평화로운 공존이 이루어지는 행성 연맹이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로캐넌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이 역시 강자의 이름짓기에 불과하다. 그 행성을 자신들의 체계 속으로 끌어들이는.


사실 '아메리카'라는 이름도 그 대륙에 살던 원주민들이 붙인 이름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그들이 부르던 이름으로 그곳을 지칭할 수도 있어야 하는데, 힘이 있는 자들의 언어로 이름을 붙이는 일들... 결국 이름은 권력이다.


이름은 존재를 자신에게 가져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로캐넌은 이 말이 우리에게 이름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나는 이 땅에서 새로운 나무를 보고 네게, 혹은 너는 잘 대답해 주지 않으니까 야한이나 모지언에게 나무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지. 이름을 알기 전에는 마음이 불편하거든.' (169쪽)


이렇게 이 소설을 읽으며 압도적인 기술력을 발휘하는 외계에 대항하는 이 행성의 사람들, 특히 날아다니는 말을 타고 다니는(그리폰의 후예라고 하나?) 그들의 모습에서 영화 '아바타'를 연상하게 된다.


이 영화 역시 [로캐넌의 세계]와 비슷한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외부에서 온 존재로 인해서 위기를 벗어나고, 그 외계 인물이 아바타들의 세계에 동화되는 모습이 바로 그렇다. 이렇게 보면 또 다른 문명에 대한 침탈과 그에 대항하는 사람이야기는 영화 '늑대와 춤을'에서도 볼 수 있다.


아메리카 대륙에 이미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이주민들이 어떻게 몰아냈는지를 생각해 보면, 이 소설은 새로운 세계에 도달한 이주민들이 그 세계를 어떻게 파괴해 왔는지를, 그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깨닫게 한다.


르 귄이 쓴 이 소설 [로캐넌의 세계]는 우리가 낯선 곳에서 낯선 존재를 만났을 때 그들과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먼 미래의 이야기도, 실현 불가능한 공상 속 우주 이야기도 아닌, 바로 지금 우리 삶에서 우리들이 지녀야 할 삶의 자세를 생각하게 해주는 그런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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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의 추억 - 가슴 뛰는 그라운드의 영웅들
김은식 지음 / 이상미디어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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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의 추억'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거나, 아냐, 이건 그렇지 않지, 난 좀 생각이 다르지 할 만한 내용들이다.


한때 800만 관중을 동원했다는 우리나라 프로야구. 엄청난 인기를 끌다가 코로나19가 유행한 요즘은 주춤하고, 몇몇 선수들의 일탈행동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프로야구는 인기가 있다.


FA를 통해 거액의 연봉을 받는 선수들이 있는데, 이는 인기가 없는 스포츠라면 이런 투자를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2009년에 출간됐다. 지금으로부터 10년이 넘는 과거에 쓰인 책이다. 그러니 지금 활약하고 있는 선수들을 찾아볼 수는 없다.


야구를 좋아한 지 10년 정도 된 사람들에게는 낯선 선수들이 대부분이겠지만, 야구를 좋아한 지가 오래되지 않았더라도 프로야구에 대해서 알아본 사람들이라면 한번쯤은 들어왔음직한 선수들 이야기다.


그래서 더 흥미진진하다. 프로야구에서 나름대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 이야기. 그들이 어떻게 프로무대에 뛰어들었고, 그들의 장점과 기록은 무엇이었으며, 어떻게 우리들 관심에서 사라져갔는지, 또 프로야구에서 기억될 만한 순간들이 어떤 장면들이었는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이 책에 나와 있는 선수들 중에 지금 뛰고 있는 선수는 없다. 없을 수밖에 없다. 그때쯤 데뷔한 신인이면 이 책이 다루지 않았을테고, 그때 한창 전성기를 구가한 선수들이라면 지금은 은퇴했을텐... 양준혁이나 이종범의 경우가 그렇다.


이미 은퇴해서 다른 길을 가고 있는 선수들 아닌가. 그런데 이종범은 야구를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요즘 다시 소환되고 있다. 자신이 아니라 아들 이정후를 통해서. 그러니 이 책의 후편이 있다면 이제는 요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선수들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질테다. 또 그들의 선배들과 관련된 일화도 더불어서.


최근에 야구에 관심을 가져 이 책에 나온 선수 중에 아는 사람이 한명도 없다고 해도 이 책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야구를 기록 경기라고 하는데, 단지 기록만을 보지 않고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최고의 선수들만 존재할 수 없다. 다른 선수들이 있어야 최고가 있을 수 있다. 또 최고의 선수가 늘 최고의 장면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우리 기억에 남는 최고의 장면 중에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선수가 펼친 장면이 남아 있을 수도 있다.


어떤 장면들이 있을까? 이 책을 읽으면 그동안 우리나라 프로야구에서 많은 선수들이 어떤 극복 없는 드라마를 썼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들의 노력, 그들의 성과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올해 개막할 프로야구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 


그들이 써나갈 극본 없는 드라마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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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19로 배달시키는 일이 많아졌다. 도로 곳곳에서 배달 노동자들을 만날 수 있다. 

  

  속도, 속도, 빠르게 빠르게... 조금만 늦어도 배상을 해야 하는 상황. 무조건 빨라야 한다. 배달 사정은 고려하지 않는다. 도로 상황이 어떻든, 교통 규칙을 지켜야 하든 말든, 오로지 빠르게 제 시간에 배달이 되어야 한다. 그게 규칙이다. 반드시 지켜야 할.


  그러나 우리가 얼마나 빠를 수 있나? 빛보다 빠를 수 있나? 빨리 빨리를 외치다 제 삶의 여유를 잃고 오로지 빠름 속에서만 존재하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현재 느리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들, 그들에게는 여유가 있다. 그렇게 빨리 빨리를 외칠 필요가 없는데도 그들은 이윤을 위해서 빨리 빨리를 외친다. 자기가 아니라 남에게. 빨리 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가 힘든 사람들에게 자기 이익을 더 남기기 위해서 또는 자기가 좀더 편하기 위해서.


그래서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은 더 빨리 움직여야 하고, 먹고 사는 것이 남아 도는 사람들은 더 남아돌게 하기 위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빨리 움직이게 한다. 자신은 느긋하게 있으면서.


빨리 움직여야 살 수 있는 사람과 느리게 움직여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이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들은 같은 공간에 있지만 서로가 만날 수 없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지 않을까? 배달 음식을 시켜도 직접 얼굴을 마주 보면서 받는 경우보다는 이제는 배달 음식이 왔다는 문자만 남기고 문 앞에다 놓고 가게 하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은가. 계산이야 예전에는 직접 배달하는 사람에게 주었지만, 지금은 배달을 시키는 순간, 배달료까지 다 계산이 되니, 얼굴을 마주 볼 일이 없다. 같은 공간이지만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들.


주창윤 시집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특히 1부'너무 늦었다 역으로 가는 쿠팡 트럭' 속에 있는 시들을 읽으며. 줄여서 '배민'이라고 부르는 '배달의 민족'이라는 배송 업체,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배민 라이더'에 대한 이야기들과, 로켓 배송이라고 자랑하는 쿠팡에 속한 배달하는 사람들 이야기.


그들은 배달하는 사람, 빨리 움직여야만 살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배달 받는 사람들은 느리게 움직여도 되는 사람. 같은 나라에 살고 있지만 살고 있는 세계가 다른, 그들이 처한 세계는 우리 은하와 안드로메다만큼이나 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들은 안드로메다로 배달을 나간다. 갈 수 있을까? 안드로메다가 우리 은하에서 가장 가까운 은하로 알려져 있다고 하지만, 빛의 속도로도 위키백과를 찾아보니 250만 광년이 걸린다고 한다. 시속 1만 광년으로 달려도 250년이 걸리는 곳. 그런 곳에 도달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이들이 집으로 돌아와 편안히 쉴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들이 안드로메다에 배달을 빠르게 해도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배달해야 하는 저쪽과 쉴 수 있는 이쪽의 거리. 안드로메다와 지구의 거리... 그 거리에서 빠르게, 빠르게, 삶을 소진해야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시집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특히 제목이 된, '안드로메다로 가는 배민 라이더'와 '안드로메다에서 오는 배민 라이더'를 읽으면 마음 한 켠이 찡해 온다.)


결국 안드로메다는 그들이 도달할 수 없는 세계가 된다. 다른 존재들이 살고 있는 다른 곳. 결코 지금처럼 살아서는 갈 수 없는 곳. 이만큼 사람들 사이에 거리가 있다. 그래서 주창윤의 이 시를 읽으면서 빠르게 배달하는 사람들의 고충도 읽혔지만, 거기에 더해 이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도달할 수 없는 삶이 있음을, 그런 삶은 개인의 노력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음을. 



사회의 노력이 함께 해야만 안드로메다와 여기의 거리가 좁혀지고, 안드로메다가 갈 수 없는 세계가 아니라 현실에서도 갈 수 있는 세계가 될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누구는 아무리 빠르게 움직여도 자기 삶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고, 누구는 가만히 있으면서 다른 사람을 빨리 움직이게 하는 세상. 그들의 빠름으로 자기 안락을 추구하는 세상이 바람직한 세상은 아니고 그것이 개인의 책임은 아니니까, 


제목이 된 시를 감상하면 더 좋다. 이 시에 나오는 기계인간 테레사가 한 말이 실현되지 않도록 하려면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사회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책임을 지는 그런 사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 우리 은하와 안드로메다 은하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삶들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안드로메다로 가는 배민 라이더


머나먼 길이다 청량리역에서 안드로메다까지,

별의 여왕에게 영원히 배고프지 않는 마법의 라면을 배달하러

페가수스 별자리를 향해 일만 광년의 속도로 질주한다.


나보다 더 빨리 달리는 외계인 폭주족들,

향하는 곳이 암흑성운인 줄도 모르고

무한대로 들어간다 큰 코끼리 별과 반딧불 별 사이

스타벅스 커피숍을 지나면

낙태된 자매 별들이 무중력 상태로 떠다닌다.


소행성 벨트를 따라 흘러나오는 미세먼지와

서울에서 뿜어낸 가스가 모여 잉태한

신성新星들 사이에 있는 분식점 은하정에서

라면 한 개와 이천 원짜리 김밥 한 줄을

나는 성급히 먹는다.


천공의 성 라퓨타 계단 아래서 마구 떨어지는 운석들이

우주 아래에 하얗게 쌓인다

기계인간 테레사가

"내 별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 별도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는군요"라고 말할 때,


나는 이미 밤이 없는 행성을 지나

낮이 없는 행성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주창윤, 안드로메다로 가는 배민 라이더. 한국문연. 2021년. 18-19쪽.



이 시뿐만이 아니다. 2부에 있는 '펀치 머신, 헐歇!' 시들. 3부에 있는 '사우나 출애굽기'에 시들도 좋다. 한 시집에 이렇게 마음에 드는 시들이 많기도 드문데, 이 시집에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듯이 보여주는 그런 시들이 많아서 마음 속에 콕콕 박힌다.


펀치 머신에서는 이리저리 치이는 현대인의 삶을, 그리고 지친 몸을 싼 값에 쉬게 할 수 있는 사우나 풍경을 통해서 빠름 속에서도 쉼이 있어야 함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 이렇듯 지금 우리 사회 현대인의 모습이 이 시집에 오롯이 들어 있다.


이 시집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의 삶이 어디에 있도록 해야 하는가? 삶의 책임을 개인에게만 물을 수 있는가? 개인의 삶에는 사회의 책임이 따라야 하지 않는가? 내 빠름, 내 편안함을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더 빠름을, 더 힘듦을 요구하는 사회가 바람직한가?  


덧글


너무 감사하게도 시인에게서 이 시집을 받았다. 


시인이 시인의 말에서 한 말 


'언어의 안개를 명징하게 걷어내고 싶었다. / 날 것을 명쾌하게, / 표면적으로, / 그냥 입에 녹듯이,'라고 하고 있듯이 내게 명쾌하게 다가온 시집이다. 


선물을 받은 시집이지만, 시에 대한 감상은 오로지 내 몫이라는 사실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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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어 서점 마음산책 짧은 소설
김초엽 지음, 최인호 그림 / 마음산책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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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이 쓴 짧은 소설이다. 한편 한편이 독립되어 있지만 읽다보면 서로 연결되는 소설도 있다. 물론 우리가 흔히 리얼리즘이라 부르는 소설과는 거리가 있다. 김초엽은 다양한 상황,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상황과 과학기술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음직한 상황들을 창조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을 통해서 현재 우리 삶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많은 작품이 실려 있지만, 외계(인)를 다룬 소설들이 제법 있다. 외계인 하면 괴물을 연상하고, 그들이 지구를 침략하는 상황을 생각했던 과거 소설이나 영화에서 요즘은 더 나아가 외계 존재들과 공생하는 모습의 작품들이 많이 창작되고 있다.


그만큼 인간들의 사고 방식이 유연해졌다고 할 수 있고, 외계 존재와 공생하는 방식을 택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인류의 삶을 파괴하는 외계 생명체도 나오지만, 인류와 더불어 살아가는 외계 생명체들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다. 지구촌이라는 개념을 더 넓히면 우주촌이 되기 때문에, 어차피 우주 존재들과 공생해야 하는 미래가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이 소설집에는 인공지능로봇도, 클론도, 외계인도 나온다. 그럼에도 이들은 지구에서 함께 살아간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어떨 때는 외계 생물체가 지구를 잠식해 지구인들이 살아가기 힘든 상황에 처하는 상황도 그려지지만, 그럼에도 그 상황에서도 외계 생물과 공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즉, 일방적인 침략을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어려운 환경에서도 함께 공존하는 모습을 그림으로써 김초엽은 우리 사회가 다양성과 함께 살아가야 함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름을 차별로 인식하고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존재도 껴안을 수 있어야 한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는 듯하다.


'선인장 끌어안기'라는 소설에서 외부와 접촉을 하면 고통을 받는 특이한 신체를 지닌 사람 이야기. 그럼에도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껴안기를 한다. 그렇게 고통을 받아들이는 모습, 어쩌면 고통 속에서 사랑을 깨닫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들 삶을 돌아보게 된다.


고통을 마냥 회피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그 고통도 자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이런 내용을 '오염 구역'이란 소설에서도 만날 수 있다. 외계 생명체로 인해 지구 환경이 파괴되고 사람들이 살아갈 수 없게 되지만, 한 오지에서 사람들이 미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간 파견원 이야기.


그곳 사람들은 외계 생명체와 공생하는 법을 익혔다. 몸에 버섯이 돋아나고 그 버섯을 먹으면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 비록 그것이 보기 흉하고, 자신들에게 고통을 줄지라도 그들은 미치기보다는 그렇게 외계 생명체와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선택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관계만을 맺고 살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고, 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나. 그럼에도 그 상처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법을 익혔기에, 지금까지 사회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면, 이 소설에 나오는 외계 생명체가 주는 고통을 그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소설집에서는 과학기술의 발달도 예전 삶의 방식들이 사라져 가는 모습과 그것을 지키려는 소수의 모습도 보이도 있는데 제목이 된 '행성어 서점'이 그렇다. 우주의 모든 언어가 번역될 수 있는 시대에, 번역이 안 되는 책을 파는 서점. 


관광지가 되어 자신들은 읽지 못하지만 멋으로 책을 사가는 사람들. 그런데 어느날 그 책들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난다. 그래, 이것이 바로 인간이다. 모든 것이 다 과학기술로 대체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이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일이 있다. 


책을 읽는 일도 어쩌면 이런 일이 속할지도 모른다. 이제는 책 읽어주는 로봇도 나올테고, 번역을 통해서 다른 나라들의 언어를 공부하지 않아도 소통이 되는 시대가 되겠지만, 그럼에도 힘들게 언어를 배워서 그 나라, 다른 언어로 쓰인 책을 읽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책 읽은 행위도 하나로 통일될 수 없다. 책 읽는 방법도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 다양성이 바로 인류를 풍요롭게 하는 요소일지도 모르고, 우리는 그런 다양성의 이로운 점을 잊고 획일화로 치닫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와 비슷하다고 느낀 소설이 '포착되지 않는 풍경'이란 소설이다. 사진으로 찍을 수 없는 광경. 사진을 찍어도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그런 현상. 사진가는 어딘가에서 가장 구식의 아날로그 사진기를 구해서 찍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그 풍경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글로 표현해내려 한다. 이렇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풍경을 기억하려 하는 사람들이 모습을 그린 소설이 이 소설이다.


이 소설집을 통해 바로 다양한 삶이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 다양한 삶들을 서로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도 하게 하고. 소설집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소설을 '서로에게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에서는 8편의 소설을, '다른 방식의 삶이 있음을'에서는 6편의 소설을 싣고 있다.


이렇게 나눈 부분을 이어보면 '서로에게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다른 방식의 삶이 있음을' 알고 함께 살아가자가 된다.


닿지 않는다는 말이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상대를 나와 동일하게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고 다른 존재임을 인정한다는, 즉 다른 방식의 삶이 있음을 인정한다는 말이 된다.


그렇게 우리는 다른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짧은 분량이지만 내용은 결코 짧지 않는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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