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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숲
니콜 크라우스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6월
평점 :
[사랑의 역사]를 읽고 흥미를 갖게 된 작가. 그가 쓴 세 번째 장편이라고 하는데, 읽으면서 어라, 작가가 직접 등장한다고? 소설이니 작가라고 생각하면 안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게 된 소설.
소설 속 작가를 작가가 창조한 작가라고 보면, 이 작가는 소설 속에 등장해서 자신의 소설을 써나가고 있다고 봐야 하는데, 어디에도 그런 이야기가 없다.
두 인물의 이야기가 교차되고 있는데, 한 사람은 엡스타인이라는 68세 노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39세 작가이다. 변호사로서 성공한 삶을 살던 엡스타인. 어느 순간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바꾼다. 가지고 있던 것을 남들에게 주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스라엘로 간다.
또 한 사람은 작가인 니콜. 이 소설을 쓴 니콜 크라우스와 같은 이름이다. 작가라고 착각하게 하는 장치라고 해두자. 성공한 소설가다. 어느 순간 소설 쓰기 힘들어지고 남편과의 관계도 멀어진다. 이때 홀린 듯이 이스라엘로 간다.
이 두 사람이 지닌 공통점은 유대인이라는 것밖에는 없다. 한 명은 나이든 남자, 한 명은 젊은 여자. 직업은 변호사와 소설가. 여기에 공통점을 찾으면 이들은 그것을 정점이라고 한다면 자신의 인생에서 (또는 일에서) 정점에 오른 적이 있다는 점이다.
정점에 오른다. 그것은 이제 다른 길로 가야함을 뜻한다. 자신이 온 길은 끝났음을 인식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정점이다. 이들이 도달한 정점이 바로 '어두운 숲'이다. 숲에는 도달했으나 앞길은 보이지 않는, 과거 역시 볼 수 없는 그러한 숲이다. 새로운 길을 내야 한다.
이 새로운 길이 무엇일까? 엡스타인은 사막으로 걸어들어가고, 니콜은 사막에서 나온다. 둘의 방향은 다르다. 그런데 집에 도착한 니콜의 눈에 이미 자신이 있다. 지난 날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여겨지는 자신.
어두운 숲에서 돌아온 니콜이 과거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는 것은 현실과 타협해야만 한다는 이야기인가? 그렇지 않으면 엡스타인처럼 사막으로 가야만 하는 것인지.
여기에 한 인물이 더 첨가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카프카. 물론 카프카는 엡스타인 하고는 관계가 없다. 하지만 부모를 생각하면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다만 다르게 반응했을 뿐이다. 엡스타인의 부모, 특히 아버지가 굉장히 폭력적이었고, 위협적이었다는 서술은 나오지만, 카프카가 평생 아버지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던 반면에 엡스타인은 아버지에게 주먹을 날리고, 그에게서 벗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부모를 기리는 기부를 하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즉, 카프카와 비슷한 엄격한 아버지에게서 자랐지만 엡스타인은 그것에 머물지 않고 나아감으로써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기부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여기에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마지막까지 지니고 있던 그림을 처분하려고 하는데, 심부름하는 사람의 실수로 그림이 분실되고 만다. 엡스타인이 실종되듯이.
니콜은 카프카가 남긴 원고를 받았고 (합법이 아니라, 프리드만이라는 정체가 모호한 사람이 갖고 온 짐꾸러미에 있다고 여겨지는 것). 그것을 읽는다. 카프카가 살아서 이스라엘에 살았다고? 이건 허구다. 분명한 허구기 때문에 소설에서 카프카를 등장시키는 것은 실제가 아니라 허구임을 명심하게 한다.
그런데도 카프카를 등장시킨 이유는 카프카가 문턱을 넘지 못했던 사람, 즉 경계에 살았던 사람이라고 니콜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카프카가 문턱을 넘었을 수도 있다고 여기는데, '천국과 이 세상 사이의 문턱은 환상에 불과하며, 사실 우리는 천국을 떠난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라는 것이 카프카의 생각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 우리는 지금도 바로 거기에 있으면서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지도 모른다.'(329쪽)고 니콜의 생각이 바뀌게 된다.
카프카 역시 생전에 넘지 못했을지 몰라도 그는 죽어서 그러한 문턱을 넘었다. 우리에게 문턱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은 문턱을 넘었다고 할 수 있다. (아니 이 소설에서는 카프카가 죽지 않고 이스라엘에서 정원을 가꾸고, 나중에는 사막에서 홀로 살다가 죽었다고 함으로써 문턱을 넘었다고도 할 수 있다. 니콜이 사막에서 홀로 지내는 집은 카프카가 마지막에 지냈다는 집이라고 니콜이 추정하고 있으니... 당연히 소설적 장치다)
니콜이 다시 사막에서 돌아오는 것은, 비록 집에서 이미 자신을 보지만, 그것은 니콜은 이곳과 저곳을 나누는 문턱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처음 읽은 작품에서도 유대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느꼈는데, [사랑의 역사]에는 억압받는 유대인들의 모습만 나온다면, 이번 소설에서는 억압하는 유대인들의 모습도 나온다. 그렇다. 유대인들 역시 자신들이 억압받았다는, 홀로코스트에 갇혀 있기만 하면 그것은 문턱을 절대로 넘지 못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엡스타인의 코트를 팔레스타인이 가져간 것이나 (물론 고의가 아니라 실수다), 니콜을 사막에 보내는 것은 이스라엘인이라는 사실을 통해서 이제 유대인은 과거에서 벗어나 현재를 봐야 하는데, 그들 역시 정점에 이르러 어두운 숲에 도달했는데, 여전히 이제는 보지 않아도 될 과거만 보고, 더 나은 미래를 보지 않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하여 유대인들의 모습에 대해서 비판적인 모습도 어느 정도 지니고 있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 이후에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지 생각하면, 참...
그런 점을 모두 떠나서 우리도 삶의 정점에 이른다면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생각도 한다. 우리 모두 한번쯤은 어두운 숲에 들어가지 않겠는가. 과거는 보이지 않고, 미래 역시 보이지 않는 그러한 숲에. 그때 내가 갈 길이 어디인가? 그것을 찾으려면 이미 내게 있는 길을 봐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