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의 증명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7
최진영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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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하다. 그렇지만 괴기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들 사랑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으므로.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사랑이므로.


사랑하는 사람을 잊지 않기 위해 더 오래 살라고 하는 죽은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기 싫어서 자신의 몸의 일부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이나. 그들이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지므로, 이들의 사랑을 괴기스럽다거나 공포스럽다고 느낄 수가 없다.


막다른 골목. 딱히 내가 잘못한 일도 없는데 더이상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사람이 사람이 아니라 물건으로, 돈으로 판단되는 세상에서 그럼에도 너와 함께 있어서 살 수 있다는 그런 사랑.


소설은 현재와 과거, 과거와 현재가 얽히면서 전개된다. 담이와 구의 시점이 번갈아 가면서 나오고, 둘의 이야기가 달라지는 지점도 있지만 겹치게 되면서 그들의 사랑을, 그들의 상황을 점차 이해하게 된다.


사람으로 살고자 했으나 사람으로 살게 하지 않는 세상에서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구와 그를 보낼 수 없는 담. 그들의 사랑.


처절한 사랑이다. 죽어서도 잊지 못하는, 죽은 사람을 잊지 못하는 그런 사랑. 하지만 세상은 그들의 사랑을 내버려둘까?


그들의 사랑을 순수하게 바라볼까? 아마도 세상에 이런 사실이 알려진다면 괴기스러운, 정상이 아닌, 미친, 사이코패스인 이라는 수식어가 붙고, 이들의 사랑은 세상 사람들의 흥미거리로 전락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담은 구를 보낼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담은 누구보다 오래 살아남기를 바란다. 자신이 이런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때까지 살겠다고 한다.


이 세상에서는 절대로 인정받지 못할 사랑이기에, 이 세상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는다. 담은 그렇다. 구 역시 마찬가지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다시 만난다는 믿음을 가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자신이 죽은 뒤 죽은 다른 사람을 만나지 못했기에. 그렇기 때문에 구는 담이 오래 살기를 바란다. 그런 담을 자신이 바라보고 있으므로. 천년 만년 그렇게 담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영원한 사랑 이야기로 이 소설을 읽어도 되지만, 이들을 이렇게 내몬 사회, 아이 때는 모든 것을 사람으로 보지만, 어른이 되면 사람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말이 이 소설에 나오는데, 그렇게 사람을 돈으로, 물건으로 판단하는 사회의 모습을 이 둘의 사랑에서 보게 된다.


그것을 거부하는 삶이 얼마나 힘든지, 그렇게 살 수 없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적어도 담이와 구가 말했듯이 아이들에게 그런 세상을 물려주지는 말아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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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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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이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을 대변한다.


'몸은 힘들겠지만 고통과 불만족을 겪어내면 이윽고 단순한 기쁨이 찾아온다. 가을이 되면 가을이 제일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고 싶다. 여기에 단순한 기쁨이 있다. 물론 겨울과 봄과 여름에도 단순한 기쁨은 있다. ... '어두운 시간'이 '빛으로 가득 찬 이 몸'을 만든다. 지금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도 이런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은 언젠가 우리의 삶이 될 것이다.' (작가의 말에서. 273쪽)


끝났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자신이 끝났다고 생각할 뿐이다. 몸이 살아 있는 한, 정신은 계속된다. 몸이 살아 있지 않더라도 정신은 더 계속된다. 언제가 사라질 정신이라도 당분간은, 그 당분간을 이 소설집 마직막에 실린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라는 소설에서 미래 80년이라고 한다.


이 소설의 배경이 2020년인데, 2100이라면 80년 뒤의 미래다. 소설 속 할아버지는 그렇게 자신의 삶 80년, 과거 조상의 삶 80년, 그리고 미래의 삶 80년 해서 240년을 우리가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


당분간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포함되고, 이 미래를 현재로 끌어오기에 비관이 아닌 낙관으로 살아갈 수 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아니라, 그 미래를 지금에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과거만을 생각하면서 현재를 살아가지 말고, 미래를 생각하면서 현재를 살아가자고 이 소설집은 말한다.


첫번째 소설에서 그래서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상상할 수 있었다면'(34쪽.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서) 결코 죽음에 이르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이 소설집은 바로 이것이다. 끝났다고 생각할 때, 미래를 생각하면 현재를 살아갈 수 있다는 것. 결국 우리는 이런 삶 속에서 기쁨을 느끼며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 미래는 결코 화려하지도, 특별하지도 않다. 그냥 평범한 미래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은 낙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두운 시간'이 '빛으로 가득찬 몸'을 만든다고 작가가 말한 것이리라.


소설집에 실린 여덟 편의 소설들이 어떤 끝을 보여준다. 끝을 보여주는데, 그 끝이 다시 시작이 된다. 왜냐하면 현재의 끝은 바로 미래의 시작이기 때문이고, 그런 미래의 시작은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간다.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미래와 현재가 만난다. 그런 만남을 통해 끝을 시작으로 만들 수 있게 된다. 


그 중에 이 소설집의 주제를 잘 알려주는 소설이 제목이 된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고통의 와중에서도 비관이 아니라 낙관을 지녀야 함을 마지막 소설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에서 잘 나타난다.


우리 삶은 어려움 속에서도 기쁨을 찾을 수 있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찾을 수 있다. 한 순간의 삶이 아니라 과거-현재-미래가 지속되는, 영속적인 삶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이 끝이 아님을,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지금 살아가야 함을 작가는 소설 속 여러 인물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한편 한편에서 이런 주제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지만, 또 각 편이 지닌 상황의 개별성이 있다. 이는 다양한 삶 속에서 펼쳐지는 고난, 그 고난 속에서도 삶은 지속되어야 함을 이 소설집에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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꾿빠이, 이상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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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김해경.


두 이름이 있다. 이름이 존재라고 한다면, 두 이름은 다른 존재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상은 알아도 김해경은 잘 모른다.


이상은 작품을 통해서 불멸의 존재가 되었으며, 김해경은 유한한 삶을 마감함으로써 소멸의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가와 작품은 함께 하기도 하지만, 따로 갈 때도 있다. 특히 작가가 다른 이름으로 작품을 쓴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이 소설은 바로 이런 간격을 소재로 삼아 쓴 소설이다. 불멸의 존재 이상과 소멸의 존재 김해경. 그리고 존재해야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작품 오감도 16호-30호. 


(이상은 자신이 30편을 엄선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것 역시 이상이라는 작가의 비밀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15편 이후의 작품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은.)


이상을, 이상 작품을 소재로 소설을 전개하기에 이 소설에서 서술자는 한 명이 아니다. 소설의 서술자는 세 명으로 각 부분에서 달라지고, 그 달라진 서술의 내용을 통해서 이상에게 다가갈 수 있다.


이상의 데드마스크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기자가 서술자가 되는, 그러나 그 데드마스크는 가짜로 인정이 되지만, 과연 그것이 가짜인지 진짜인지 알 수 없는 내용. 즉, 이상의 얼굴을 떴다는 데드마스크조차도 진위 여부를 판단할 수 없는데, 그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에서랴.


여기서 서술자의 삶과 이상의 데드마스크 부분이 겹치면서 소설은 더욱 복잡해지는데, 이 복잡함을 두 번째 부분에서 이상의 삶을 좇아가는 인물을 통해서 세 번째 부분으로 연결시켜 준다.


수기를 쓴 사람. 평생을 이상처럼 살고자 했으나, 삶은 누구에게나 단 한번의 삶. 자신만의 삶이 있기에 다른 사람을 모방하는 삶은 진짜 삶이 될 수 없다.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모방은 자신의 작품을 더 잘 쓰기 위한 방편이지, 결코 자신의 작품이 될 수는 없다.


모방이 작가에게 필수적인 과정이라면,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 즉, 날아보려 해야 한다. 날아보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날개 힘에 의존해 난다면, 그 작품은 자신의 것이라 하기 힘들다.


두 번째 서술자의 모습이 그렇다. 그는 이상처럼 살고자 했으나, '이상처럼'은 되어도 '이상은(또는 이상이)' 되지 못한다. 단 한번뿐인 삶을 재현할 수는 없다. 그러니 그가 수기에 쓴 작품들이 그 자신의 작품이 되지 못한다. 그는 이상을 흉내내었을 뿐이다.


날지 못한 사람. 날려고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상이라는 날개에 달라붙어 그냥 그렇게 공중에 떠 있고 싶을 뿐이었다. 이상의 날개에서 벗어났을 때 자신의 작품을, 불멸의 작품을 쓸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되지 못한다.


세 번째 서술자는 학자다. 이상을 연구하는 학자. 그러나 그의 삶 역시 어느 한 곳에 정착되어 있지 못하다. 이 서술자의 삶은 그 자체로 이상의 삶과 비슷하다. 아니다. 서술자는 이상이 아니라 김해경의 삶과 비슷하다고 해야 한다.  


김해경이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났고, 입양이 되었으며, 조선과 일본 또는 근대를 상징하는 다른 나라 사이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면, 그런 작품 활동의 결과가 그를 불멸의 존재인 이상으로 만들었다면, 미국에서 자랐지만, 대만 출신이고 입양되었으며, 한국에서 이상 연구자로 활동하는 서술자 역시 김해경의 삶과 비슷하다.


그렇지만 그는 불멸의 존재가 될 수 없다. 이상이라는 존재가 없다면 그의 활동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연구자의 숙명과도 같다. 그래서 연구자는 없던 것을 찾아내야 한다. 작가가 숨겨놓은 비밀을 파헤쳐야 한다.


그런 연구자가 뛰어난 연구자가 될 수 있다. 자신의 연구를 공유하지 않거나 또는 남들 모르게 불쑥 발표하는 연구자들의 모습으로 이 소설 속에 등장한다. 이들은 작가의 비밀을 하나씩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작가의 모든 비밀을 알 수 있는가? 그렇게 모든 비밀을 알게 하는 작가가 불멸의 존재가 될 수 있는가?


그래서 작가는 개인으로서의 삶과 작가로서의 삶이 분리된다. 분리된 삶 속에서 어느 쪽에 자신을 두느냐에 따라 날개를 달고 날아 불멸의 존재가 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날개에 얹혀서 가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불멸의 존재는 많은 사람들을 자신의 날개 힘으로 함께 날게 한다. 이런 작품이 좋은 작품이다. 불멸의 작품이 된다.


작품은 비밀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비밀은 캐고 캐도 끊임없이 재생산되어야 한다. 이상의 작품에 대한 해석, 발견되지 않은 유고 작품에 대한 이야기 등등은 이상을 계속 불멸의 존재로 남게 한다.


개인 김해경은 소멸해도 작가 이상은 불멸의 존재로 남는다. 그리고 그때 이상은 육체를 가진 개인이 아니라 문학사 속에서 영원히 살아 있는 존재가 된다. 그의 작품과 더불어.


그렇다면 작가라면 이상을 추종해야 할까? 아니다. 이상은 모방의 단계에서 그쳐야 한다. 두 번째 서술자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이상과 결별해야 한다. 굿바이. 이렇게 쓰고 싶지만, 소설 제목처럼 꾿빠이라고 해야 한다.


이상과 헤어져 자신만의 세계를 개척하는 사람, 그 사람이 이상을 제대로 계승한 사람이다. 그런 생각을 하게 했다. 이 소설은.

 

이상 작품을, 시나 소설, 또 수필을 읽은 사람에게는 이 소설이 매우 흥미로울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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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보이는창] 132호를 읽다.


나와 같은 보통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특별한 삶이 아니라, 일상의 삶이다. 그런 일상의 삶이 위협받을 때가 있다. 그냥 살고자 할뿐인데 제약이 있을 때가 있다.


특히 돈이 없거나, 권력이 없거나 하면 더더욱.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는 나라, 법질서가 잘 지켜지는 나라, 공정이 실현되는 나라라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자신이 살 집을 얻지 못할 자유, 아님 지상이 아닌 반지하에 살 자유, 몸이 불편하니 자유롭게 이동하지 않을 자유, 직업을 얻지 못할 자유, 권력이 없으면 아무 소리도 못하고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할 자유.


이런 자유 앞에서 평등은 능력에 따른 평등으로 전락하고 만다. 네가 노력하지 않았잖아?라는 능력주의가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압박한다. 


공정은 능력이고, 능력에 따른 차별이 평등이자 자유다. 그러니 우리는 능력에 따라 대우를 받을 자유를 지니고 있다.


자, 네 능력을 키워라!


하지만 능력이 자신만의 힘으로 키워지나? 내가 돈을 많이 번다면 그것은 오로지 나만의 능력으로 벌게 된 걸까?


보이지 않지만 나와 연결된 수많은 사람들, 과거-현재-미래, 이곳-저곳 등등에서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로 인해서 내 능력이 발휘된 것 아닐까? 


그러니 오로지 나만의 능력으로 이루었다는 성과, 그런 능력주의는 문제가 있다. 우리들이 누리는 자유, 평등, 공정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삶창은 그런 점을 일깨워주고 있다. 삶창에는 바로 이렇게 우리 곁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으니까.


삶창에는 능력주의를 우선하는 사람들보다는 내가 조금 손해 보더라도 남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가 있으므로, 읽으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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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이 분노에 답하다 - 분노라는 가면을 쓴 진짜 감정 6가지
충페이충 지음, 권소현 옮김 / 미디어숲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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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라' 

 스테판 에셀이 쓴 책. 참 좋게 읽었다. 분노를 할 때 해야 한다고. 분노는 부정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오히려 분노하지 않는 사람들이 사회를 더 안 좋은 쪽으로 이끌어간다고 하던 책.


  분노할 때 분노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책도 그렇다. 분노가 꼭 부정적이지만은 않다고 한다.


  우리 몸이 안 좋을 때 열이 나듯이 무언가 나에게서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있을 때 분노가 인다고 한다.


  즉, 분노는 신호라고 한다. 이 신호를 읽지 못하면 더 큰 어려움에 처할 수 있다.


  잘못되어가는 사회에 분노하지 않으면 더욱 안 좋은 사회가 되어 모두가 고통받듯이, 자신이 분노하고 있는 지점을 파악하고, 그것을 해결하려 하지 않으면 자신의 인생도 힘들어진다고 한다.


왜 분노하는가? 무엇인가 해결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잘 해결되지 않았기에 분노라는 감정으로 표출이 된다고 한다.


이렇게 이 책은 분노에 대해서 여러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그리고 이 분노를 잘 다스려야 한다고. 무작정 억누르려고만 하지 말고, 표현할 수 있을 땐 표현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한다. 물론 적정한 수준을 지켜야 하고.


'분노는 사랑에 대한 호소이며 관계에 대한 갈망이다'라고 이 책의 표지에서 말하고 있다. 즉, 분노는 갈망에서 나온다. 그리고 자신을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자기가 한 만큼 대우받고자 하는 욕구에서 나온다.


나는 이렇게 했는데 왜 나처럼 안 해줘? 하는 마음이 분노로 나타날 때도 많다. 하지만 나와 똑같은 사람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다르다. 살아온 환경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행동도 다르다.


다를 수밖에 없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 여러 감정이 교차될 수밖에 없다. 분노 역시 마찬가지고. 그렇기 때문에 분노를 잘 들여다봐야 한다.


좀더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이렇게 분노를 잘 파악해서 자신의 삶을 긍정적인 쪽으로 이끌어가야 한다.


이 책은 여러 장에 걸쳐서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고 있다. 차분히 들여다보고, 분노를 다스리는 법을 익히라고 한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자신을 존중해야 한다고 한다. 나약함의 표출이 분노가 아니라 분노도 자신을 존중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그래야만 좀더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나를 존중하고 사랑하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를 파악하는 일. 이것이 남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가보다 앞서야 한다고 한다. 나를 존중하고 사랑하면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분노는 정당하게 자리잡고, 정당하게 행사될 수 있다.


이렇게 분노를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꾸는 삶. 그런 삶을 산다면 사회를 바꾸는데도 긍정적인 분노가 작동하지 않을까 한다. 스테판 에셀이 말한 '분노하라'는 바로 이런 긍정 위에서 행해지는 분노다.


이 책과 더불어 틱낫한 스님의 [화]를 읽어도 좋겠단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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