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당한 유언들 밀란 쿤데라 전집 12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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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생전에 인정을 받은 작가들도 있지만, 살아 있을 때는 별 주목을 받지 못했거나 또는 엄청난 혹평에 시달린 작가들이 있다. 그들은 예술에 새로움을 불러와 그 시대의 사람들과 불화한다. 


이를 쿤데라는 '어떤 예술 작품의 본질적인 것은 그 새로움(새로운 형식, 새로운 문체, 사물을 보는 새로운 방식)에 있으며, 몰이해에 맞닥뜨리는 것은 당연히 바로, 이 새로움인 것이다. (365쪽)'라 하고 있다.


새로움, 그냥 낯섬이 아니라 낯섬 속에서 무언가를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작품들. 이 작품들은 언제든 우리 곁으로 온다. 우리들에게 인정을 받는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품, 작가들도 있고,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 작가들도 있다.


잘 알려진 작가로 화가 고흐가 있지 않나, 우리나라에서는 이상이 있다고 하면 될 테고. 유렵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이상과 같은 작가로 카프카를 꼽으면 카프카에 대한 실례가 될까? 그가 이상보다는 먼저 나고 먼저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니까, 이상을 한국의 카프카라고 하면 될 수도 있겠다.


이상이 죽고 김기림은 쥬피터(제우스)에 이상을 빗대어 표현한 시를 썼는데(쥬피타의 추방-이상의 영전에 바침), 이상이 죽은 뒤 우리나라 시단이 반 세기나 뒤로 갔다고 아쉬워하는 김기림. 그런 김기림에 빗댈 수 있는 사람이 카프카의 유언을 배신하고 그가 남긴 글들을 출판한 막스 브로트 아닌가 한다.


카프카를 거의 성인의 반열에 올려놓은 브로트. 하지만 쿤레라는 이 책에서 카프카를 그렇게 규정지은 브로트를 비판하고 있다. 브로트가 처음으로 카프카를 한정지었기 때문에 후속 연구자들도 거기서 벗어나기 힘들었다고.


브로트는 카프카를 세계문학에 위치시키기보다는 아주 작고 협소한 부분으로 후퇴시켰다고 쿤데라는 이 책에서 비판하고 있다. 배신당한 유언으로 카프카를 우리가 알게 되었지만, 카프카가 남긴 유산을 더 추적하고자 하는 욕구를 제한당하고 있다는 비판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쿤데라의 말을 직접 살펴보자.


'헤르만 브로흐는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스베보와 호프만슈탈과 함께 소(小) 맥락 속에 넣는 것에 항의했었다. 가엾은 카프카, 그에게는 이 소맥락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에 대해 얘기할 때 사람들은 호프만슈탈도, 만도, 무질도, 브로흐도 돌이켜 보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에게 남겨 둔 유일한 맥락은 펠리체, 아버지, 밀레나, 도라라는 맥락뿐이다. 그는 소설사와 동떨어진, 예술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자신의 전기라는 소-소-소-맥락 속으로 되돌려 보내진 것이다.' (400쪽)


이게 아니다. 소설은 작가의 자서전이 아니다. 그러니 소설 속에서 작가를 찾으려고 너무 애써선 안 된다. 작가는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살아가는 인물을 우리에게 보여줄 뿐이다. 그것이 혹 작가 자신이라 해도, 작가가 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쿤데라가 우려하는 '타인의 사생활을 유포하는 것, 이것이 습관이 되고 규칙이 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과연 개인이 생존할 것이냐 멸할 것이냐가 중대 관건이 되는 그런 시대로 들어서게 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387쪽)' 이런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 작가에게 이런 일이 생긴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지금 우리는 이런 위험, 위협이 수시로 일어나고 있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다른 매체들에 의해서. 조심해야 한다.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을 작가의 사생활과 연결시키는 것도 위험한데, 그냥 개인의 사생활을 파헤쳐 까발리려 하는 행위는, 인간이 인간에게 수치심을 주는 가장 지독한 행위일 수 있는 것이다.


막스 브로트가 카프카의 작품을 남겨 우리에게 물려준 것은 공에 해당하지만, 카프카가 굳이 출판하고 싶지 않았던 글들까지 출판한 것은 과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나는 과(잘못)보다는 공이 더 많다고 생각하지만.


문학, 예술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이 책이지만, 문학과 예술이 무엇인가? 결국 우리 삶에 대한 이야기 아닌가. 그러므로 쿤데라의 이 책에서는 작가를 대하는 태도도 나와 있지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한다.


짧은 글들의 모음. 그러나 연결이 되는 글들. 소설로 치면 연작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글들은 생전에는 인정받지 못했으나 죽은 뒤에 그들의 작품이 어떻게 평가되고 향유되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2023년에 세상을 뜬 쿤데라, 노벨 문학상이 놓친 또 한 명의 작가로 이름을 올리게 된 작가. 이렇게 내가 이야기하는 것도 쿤데라에게는 실례일 수 있겠다. 그는 결코 그런 평가를 바라지 않았을테니.


기억할 만한 구절들도 많아, 아래에 남겨둔다.

~라블레의 책은 전적으로,그리고 근본적으로 소설이 된다. 도덕적 판단이 중지된 땅 말이다. - P14

도덕적 판단을 중지한다는 것, 그것은 소설의 부도덕이 아니라 바로 소설의 도덕이다. 즉각적으로, 끊임없이 판단을 하려 드는, 이해하기에 앞서 대뜸 판단해 버리려고 하는 뿌리 뽑을 수 없는 인간 행위에 대립하는 도덕 말이다. 이 맹렬한 판단 성향은 소설의 지혜라는 관점에서 보면 더없이 고약한 어리석음이요 다른 무엇보다 해로운 악이다.
- P15

웃음이 소설의 공기 속에 보이지 않게 퍼져 있다는 점에서, 소설적 세속화야말로 다른 무엇보다도 해롭다. 그래서 종교와 유머는 사실 양립할 수 없다. - P18

소설은 ~ 다른 법칙에 토대를 둔 다른 세계다. 유일 진리가 맥을 못 추는 곳, 악마적 모호성이 모든 확실성을 수수께끼로 만들어 버리는 지옥 같은 곳이다.
- P 42

유머란 이 세계의 도덕적 모호성을 드러내는,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다른 사람을 심판할 수 없는 존재인지를 드러내는 신성한 빛이다. 유머란 인간사의 상대성이 대한 도취요, 확실한 건 없다는 확신에서 오는 기이한 즐거움이다. - P50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것이 뭔지도 모르는 채 죽는 것이다. - P190

서정, 서정화, 서정적 담론, 서정적 열정은 흔히 전체주의라 불리는 세계의 구성 요소다. 전체주의 세계는 그냥 굴라그가 아니라 사방의 담이 시로 수놓인, 그리고 사람들이 그 앞에서 춤을 추는 그런 굴라그인 것이다. - P234

곡의 구성(곡 전체의 건축적 편성)을 작곡가가 자신의 창의력으로 채우기 위해 빌리는, 그런 미리부터 존재하는 하나의 틀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구성 자체가 하나의 발명, 작곡가의 독창성 전체가 투영되는 그런 발명이어야 한다. - P256

진정으로 소설적 사유(라블레 이후 소설이 알게 된 사유)는 언제나 체계와 규율에 반한다. - P259

신념이란 게 무엇인가? 정지된 사유, 굳어버린 사유요, ‘신념을 가진 사람‘이란 곧 한정된 사람이다. 실험적 사유는 설득을 하려는 게 아니라 영감을 주고자 한다. 어떤 다른 사유에 영감을 주고, 사유 행위 자체를 자극하고자 한다. 그래서 소설가는 자신의 사유를 철저하게 탈 체계화해야 하고, 그 자신이 자기 아이디어들의 주위에 세운 바리케이드에 발길질을 가해야 한다. - P260

인간은 안개 속을 나아가는 자다. 그러나 과거의 사람들을 심판하기 위해 뒤돌아볼 때는 그들의 길 위에서 어떤 안개도 보지 못한다. 그들의 먼 미래였던 그의 현재에서는 그들의 길이 아주 선명하게 보이고,펼쳐진 길 전체가 눈에 들어온다. 뒤돌아볼 때, 인간은 길을 보고, 나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그들의 잘못을 본다. 안개가 더는 거기에 없다. - 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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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장이와 연금술사 - 신화상징총서 5
미르치아 엘리아데 지음, 이재실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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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장이와 연금술사는 공통점이 없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엘리아데의 이 책을 읽으면 이들에게는 짙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대장장이는 금속을 변형시키는 일을 하고, 연금술사 역시 물질을 변형시키는 일을 한다. 그런 변형이 지금 우리 시대에 생각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겠지만.


엘리아데는 이를 신화적 상징으로 해석하고 있다. 자연은 오랜 시간에 걸쳐서 물질들을 우리에게 내놓는다. 즉 자연이 출산을 하는 것이다. 그런 출산을 대장장이와 연금술사는 시간을 앞당겨 우리에게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과거에 대장장이와 연금술사는 신성한 존재로 여겨지기도 했다고.


즉 자연이 보여주는 일들을 인간이 보여줄 때 그에게는 신성성이 부여되고 있음을 여러 사례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 신화들을 통해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연금술 하면 마법을 떠올리고, 얼토당토않다는 생각을 지금은 하지만, 과학이 현실에서 주를 이루고 있는 지금의 사고방식을 잠시 뒤로 젖혀두고 과거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생각하면, 연금술은 자연이 하는 일을 인간이 하고 싶다는 욕망, 또 인간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런 그들에게 대장장이는 불을 통해 용광로에서 풀무와 망치를 통해 이 물질을 다른 물질로 변형시키는 존재였으니, 연금술사와 비슷한 기능을 했다고 여겨질 만했다.


이런 연금술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신화를 살피는 일이 과거를 살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우리 삶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한 일이라면, 연금술을 살피는 일도 거기에 해당할 것이다.


엘리아데는 이렇게 말한다.


'연금술을 통해서 물질의 완성에 참여하는 동시에 인간은 자신의 완성을 견고히 하게 된다. ... 자연을 변화시키는 책임을 맺게 됨으로써, 인간이 시간을  대신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176-177쪽)


자연의 시간을 인간의 시간으로 바꾸어 놓는 일, 그것이 대장장이와 연금술사의 역할이었다는 것. 지금은 자연의 시간보다는 인간의 시간이 우세하다는 생각이 드니, 연금술사들의 노력이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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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두석 시집에는 '꽃'이 들어가는 시집들이 많다. 대꽃, 성에꽃, 투구꽃, 숨살이꽃과 더불어 꽃에게 길을 묻는다,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처럼...


  꽃. 아름답다고, 우리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고, 누군가를 축하할 때 우리는 꽃을 선물하기도 하고, 누군가를 기릴 때 꽃을 가져가기도 한다. 그만큼 꽃은 우리 곁에 가까이 있다.


  그러던 시인이 이번에는 꽃이 아니라 새를 시집의 제목으로 삼았다. 이 시집에도 '꽃'을 다루는 시들이 (동강할미꽃, 물매화, 산수유나무, 뻐꾹채, 바람꽃,도체비꽃 등등) 있지만, 주를 이루는 것은 새들이다. 


  지상에서 천상으로 관심이 옮아갔는가? 아니, 지상을 수놓는 꽃들과 천상을 수놓는 새들이 통한다고 보았겠지.


새들 역시 우리 곁에 있는 자연이니까. 우리가 심상하게 쓰는 표현 가운데 '새처럼 자유롭고 싶다'는 말이 있으니...


인위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사는 존재에 대한 시인의 시선이 꽃에서 새로 확장이 된 것이겠지. 공중에서 지상으로 낙하하는 꽃들과 지상에서 천상으로 비상하는 새들. 우리 삶도 한때 그렇게 꽃을 피우고 또 그렇게 비상했겠지. 누구에게나 그런 때가 있어야겠지.


결국 우리 삶도 자연의 일부이니, 삶과 죽음이 하나로 내 곁에 있듯이, 지상의 존재와 천상의 존재, 그리고 지하의 존재, 아직 알려지지 않은, 모르는 존재들이 내 곁에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시집이다.


자연을 다룬다고 마냥 평화롭지만은 않다. 자연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고 있기에 누군가의 생명 유지는 누군가의 죽음을 바탕으로 하기에.


'백로와 숭어'(52쪽)라는 시를 보면 이런 자연의 모습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백로가 숭어를 낚아채어 가는데, '백로와 숭어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마주친다 ... 백로도 숭어도 오직 보는 일에만 집중한다(최두석, 백로와 숭어 중에서. 52쪽)'고...


그렇게 죽살이가 한 순간 공존하고 있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그것을 시인은 '강물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유유히 흘러간다.'(앞의 시)고 하고 있다.


우리 삶에도 여러 굴곡이 있겠지만 삶은 그렇게 유지되고, 그러한 삶에 대해 최두석의 이번 시집을 통해 생각한다. 그럼에도 참 삶은 위태위태하다. 이 위태위태함이 삶인지도 모르겠지만.


세상에서 가장 편한 때가 잠잘 때여야 하는데, 그럴 때조차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는 때가 있으니. 자연도 마찬가지다. 마냥 평화롭지만은 않다. 온갖 것이 혼재해 있는 것이 자연이니. 이 시집의 제목이 된 시를 읽어본다. 


  두루미의 잠


삵 같은 천적 피하기 위해

얕은 물에 발을 잠그고 자는 두루미는

추위가 몰려오면

한 발은 들어 깃 속에 묻는다


외다리에 온몸 맡긴 채

솜뭉치처럼 웅크린 두루미의 잠


자면서도 두루미는

수시로 발을 바꿔 디뎌야 한다

그래야 얼어붙지 않는다

그걸 잊고 발목에 얼음이 얼어

꼼짝 못하고 죽은 새끼 두루미도 있다


한탄강이 쩡쩡 얼어붙은 겨울밤

여울목에 자리 잡은

두루미 가족의 잠자리 떠올리면

자꾸 눈이 시리고 발목도 시려온다.


최두석, 두루미의 잠. 문학과지성사. 2023년. 42쪽.


시인의 눈이 어디 두루미에서 그치랴. 시인이 보고 있는 자연은 곧 우리의 삶이고, 그러니 시인은 우리의 삶들에서 두루미와 같이 잠자리에서도 경계를 해야 하는 이들을 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의 이치가 그렇게 흘러가도록 하겠지만, 인간은, 인간적이라 함은 같은 인간이 그렇게 힘든 상황에 있을 때 그냥 지나치지 못하지 않는다. 측은지심이라고 해야 하나, 인간은 어려움에 처한 존재에 손길을 내민다. 


자연의 자연스러움을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곁의 자연을 보고 인간의 삶을, 인간적인 삶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라는 시인의 뜻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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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사람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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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많은 사람 중에 내가 선택하지 못하고 지정해준 단 한 사람만 살릴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고려할 수 없고 그냥 구해야만 한다면? 그 사람을 구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다면? 그 사람의 심정은 어떨까?


우선 많은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또 한 사람이라도 구했다는 안도감, 아니면 내가 구할 사람을 선택하지 못했다는 무력감. 어떤 마음이 들까?


이래도 저래도 마음은 확실히 편치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살린 사람보다는 살리지 못한 사람이 많고, 살린 사람들이 모두 괜찮은(?) 사람이라는 보장이 없으니까. 단적으로 소설에서는 폭력범을 살리기도 하고, 사기꾼을 살리기도 한다. 정작 자신이 살리고 싶은 사람은 살릴 수 없으면서도.


내가 선택하지 못하고 누군가, 그것도 단 한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일까, 재앙일까? 여기에 대한 세 사람의 반응이 나온다. 아니 어쩌면 네 사람이라고 해야겠다. 나중에 목화의 조카인 루나 역시 사람을 살리는 일에 참여하게 되니까.


임천자의 단 한 명은 기적.

장미수의 단 한 명은 겨우.

신목화의 단 한 명은, 단 한 사람.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다. (233쪽)


소설은 오 남매로부터 시작한다. 아니, 나무로부터 시작한다. 나무, 하늘과 땅을 잇는, 또는 하늘과 인간을 잇는 신목(神木)으로 일컬어지지 않았던가. 두 나무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서로 다르게 자란 두 나무는 뿌리를 연결해 결국 한 나무가 된다. 사람들이 베어버렸을지라도. 


이 이야기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려준다. 나무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한다. 단 한 사람만을. 그것을 기적으로 받아들이는 할머니 임천자. 겨우 단 한 명을 살린다는 것에 좌절하는 엄마 장미수, 그리고 왜 자신이 사람을 살리는지 이유를 알려고 하는 신목화. 나중에 신목화는 단 한 사람이지만 그것은 전부인 한 사람임을 깨닫는다.


어떤 사람이건 생명은 소중한 것. 그는 이 세상에 유일한 존재인 것. 그러므로 사람을 살리는 일에 어떤 가치를 동반할 필요는 없다. 생명의 무게는 누구에게나 똑같기 때문이다. 이 점을 알려주기 위해 작가는 이 가족의 셋째인 금화의 죽음을(? 명확하게 죽었다고는 나오지 않지만, 나중에 목화와 목수가 나무를 만들어 바다로 보내려는 것은, 금화의 죽음을 인정하고, 금화를 보내준다는 의미를 지닌다) 설정한다.


자기 목숨을 대신 가져가라고 할 정도로 소중했던 사람을 살리지 못하지만, 단 한 사람, 바로 세상의 전부인 그 사람을 살리는 일을 인정하게 되는 목화. 그렇다. 우리가 누구를 살릴지 결정할 수 있다면 과연 그 세상이 행복한 세상이 될까?


아닐 것이다. 선택할 수 없기에 누구의 생명이든 소중하다는 것, 그 자체로 온전한 하나의 생명임을 명심해야 한다. 삼대에 걸쳐 단 한 사람을 살리는 일에 참여하게 되는, 조카인 루나까지 하면 4대에 걸쳐 단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사람들 이야기. 


이들 4대에 걸친 사람들만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단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소설은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을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 있을 수도 있음을, 그래서 우리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겨야 함을 인식하게 한다. 바로 내가 그들이 살려낸 단 한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


소설 속에 수많은 죽음이 나온다. 전혀 예기치 못한 죽음부터 예상하고 받아들이는 죽음까지 다양한 죽음들. 그러나 죽음은 삶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어쩌면 삶과 죽음은 두 나무의 뿌리가 하나로 엮이듯이 하나일지도 모른다. 단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서 그렇지.


삶과 죽음에서 단 한 사람을 삶의 길로 가게 만드는 것이 비극일 수 없다. 사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살릴 수는 없다.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삶의 길은 자신이 걸어가야 한다. 삶의 길을 자신이 찾아야 한다. 자신이 찾을 수 있도록 다시 기회를 주는 일. 그것은 단 한 사람에게도 벅찬 일이다.


그 벅찬 일을 하는 사람. 그래서 더욱 괴로워하는 사람. 더 많은 생명을 살리지 못했다는 자책. 살리는 사람을 선택할 수 없다는 무력감. 하지만 선택할 수 있다면 더한 죄책감에 시달릴 수도 있다. 자신의 감정때문에 다른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는. 따라서 단 한 사람을 구하는 일에도 무작위가 작동해야 한다. 구하고 그것으로 끝내야 한다. 삶의 길을 보여준 것으로... 그 길을 가는 것은 그 사람의 몫이다. 거기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자.


세상은 온갖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들이 어울려 살아가고 있으니까. 물론 좋은 사람만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어디 그런가. 삶과 죽음이 공존하듯이 옳음과 그름도 공존하고, 선과 악도 공존하는 것이 세상이다. 다만, 우리는 삶에 더 중점을 두듯이 옳음과 선 쪽에 더 강조점을 두고, 그렇게 살아가고자 할 뿐이다.


단 한 사람만 살릴 수 있다는 가정.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삶이란 무엇인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혹시 아는가? 우리 역시 어느 순간 죽음에 직면했음에도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남았을지. 우리가 그 단 한 사람일지. 그렇다면 삶의 길에 들어선 우리는 내 삶의 길에서 죽음의 길로 들어선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내 삶은 나만의 삶이 아니다. 단 한 사람을 살렸지만, 그 단 한 사람의 생명에는 수많은 죽음이 함께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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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니, 이게 무슨 말? 내 얼굴이 내 몸과 떨어질 수가 있나? 나는 들어왔는데, 내 얼굴은 도착하지 않았다니... 그렇다면 얼굴이 지닌 뜻이 뭐지?


  얼굴, 그냥 생각하자. 우리는 얼굴이 자신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얼굴은 내면을 드러내는 통로라고도 하고. 그렇다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의 본질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는 말이란 말인가.


  잘 모르겠다. 제목이 된 구절은 '붉은 달(24-26쪽)'이라는 시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집에 들어왔는데, '내 얼굴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을'(26쪽)이라고 문득 깨달았다고 한다.


  여기에 '마트료시카(120쪽)'라는 시를 보면 '어제의 얼굴을 다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는 구절이 있는데, 내가 밖에 나갔을 때는 얼굴이 함께 들어오지 않았고, 내가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만 내 얼굴을 다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하는데...


얼굴이 나를 알려준다고 하면 나는 어떤 얼굴을 지녀야 할까? 이 구절을 읽으면서 문득 최인훈이 쓴 [가면고]가 생각났다. 가장 완벽한 얼굴을 찾아 다니는 다문고 왕자의 이야기. 그는 완벽한 얼굴을 찾았지만, 시인은 아직 완벽한 얼굴을 찾지 못했다. 그것은 이 사회가 이미 완전한 자신을 발견하기 힘들게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신을 찾기도 전에 생활에 치여 살아가고 있는지도... 그러니 나는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여러 얼굴을 지니고 있고, 한 얼굴 속에 또 다른 얼굴이, 그 얼굴 속에 또 얼굴이, 얼굴이 계속 들어있는, 내 얼굴이지만, 내 얼굴이 아니기도 한. 내가 지니고 있는 얼굴이지만 새롭고, 또 놓고, 감추고 있는 얼굴일 수도 있는.


하여 나는 나를 찾는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수많은 '나'를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그러한 '나'를 찾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나의 얼굴만이 아니라 남의 얼굴도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남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에. 그렇기에 남의 얼굴을 통해서 나의 얼굴을 보기도 하니까.


  우리 사회에 다른 인물들인데 마트료시카와 같이 열어도 열어도 같은 얼굴이 나오는 인물들이 있다. 어쩜 이리도 비슷한지. 이들을 열지 않고 그냥 닫아두고 싶은데, 그런 같은 얼굴을 무슨 자랑이라고 계속 내미는 인간들이 있으니... 시와는 별 관계가 없지만 '마트료시카'라는 제목을 보고서 그런 인물들, 선한 마음, 인물들의 연속이 아니라, 안 보여야, 안 나와야 하는 인물들의 연속에 마음이 무거워지고 있으니...


  남 얼굴 타령은 그만하고, 내 얼굴을 잘 찾아야지. 아니 지금껏 내가 지니고 있던 얼굴들을 부정하지 않고 그 얼굴들을 받아들이면서 조금은 다른 내 얼굴을 만들어가야지.


이 시집에는 '마트료시카'라는 제목을 가진 시가 두 편 있다. 똑같은 제목이지만 내용은 좀 다르다. 그렇지만 본질 찾기는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마트료시카


나는 몇 개의 거울을 들고서 달렸다 // 똑같은 것들이 슬퍼 보였다 // 죽은 지 오래된 얼굴들은 더 안쪽 깊은 곳에 있다


이설야, 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 창비. 2022년. 70쪽.



마트료시카


문을 열면 / 문이 있었다 // 그 문을 열면 / 또 문이 있었다 // 문의 문을 열면 / 내 얼굴들 쌓여 있고 / 문밖에는 똑같은 눈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 나는 문의 문을 계속 열고 나갔지만 // 어제의 얼굴을 다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이설야, 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 창비. 2022년. 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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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야제 2025-03-18 15: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눌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kinye91님의 시와 소설 평론 글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를 좋아해서 혼자 문학 작품도 읽고 공부도 하고 있는데,
작품 속 아름다움들을 하나하나 면밀히 잘 짚어주시는 글을 보면서 저 또한 즐거워졌습니다.
자주 와서 읽고 문학 공부 열심히 하겠습니다.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kinye91 2025-03-18 16:08   좋아요 1 | URL
제가 감사하죠. 책을 읽고 쓴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는 것은 저의 또다른 즐거움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