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추념식. 


  대통령이 참석을 하지 않았다. 여당 대표도 참석을 하지 않았다. 그냥 자기들이 하고 싶은 일만 하고 말았다.


  정치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원하는 일을 하는 것 아니겠는가.


  민주주의란 자기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서 권력을 위임받아 행사하는 것인데... 어떤 국민이 그들에게 4.3추념식에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지...


아마도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국민도 있겠지... 태영호와 같은 국민의 힘 국회의원은 4.3을 왜곡하는 발언을 해놓고도 무엇을 사과해야 하는지 모른다고 했으니... 이와 같은 사람들을 대변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데...


하지만 적어도 4.3 추념식을 망치는 짓은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뉴스를 보다가 충격을 받았다. 모든 국민이 한 사상으로 똘똘 뭉친 사회도 끔찍하지만, 과거를 이렇게 왜곡하는 사람들이 버젓이 행동하는 사회도 끔찍하다.


그런 행동은 하지 못하게 막아야 하는데... '서북청년단'이라니, 제주도민들 중에 '서북청년단'이라면 이가 갈리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닐텐데...


21세기에 어떻게 서북청년단이라는 이름을 단 옷을 입고 4.3 추념식을 방해할 수 있단 말인지... 그것이 용납이 되고 있다는 말인지... 답답했다.


대통령, 여당 대표가 참석 안 했다는 것도 잘 이해가 가지 않지만, 최소한 '서북청년단'이라는 이름을 건 단체가 4.3추념식에 나타나는 일은 막았어야 하지 않나. 그것이 4.3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아닌가. 사람에 대한 예의 아닌가.


예의와 염치가 없는 사람들이 활개를 치고 있음을 이번 4.3추념식에서 보고 이건 아니라고, 정말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영화 '지슬'이 있다. 이들이 영화 '지슬'을 볼 리가 없겠지만, 적어도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은 봤으면 좋겠다.  


영화 볼 시간이 없겠지... 정치를 하시느라 워낙 바쁘신 분들이니까. 하지만 적어도 왜곡된 시각을 지니지 않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하지 않나.


북한에서 외교관 활동을 하시다가 우리나라 국회의원이 되신 태영호 의원은 특히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점에서 사과해야 하는지 이 영화를 보면 알 수 있을테니.


영화 볼 시간이 없으면 20-30분만 투자하면 되는, 영화를 바탕으로 만든 책 '지슬'을 읽기 바란다.


거의 끝장면에서 '그만 죽이세요'라는 말... 이 말을 전해주고 싶다. 말로 4.3을 그만 죽이고, 극우단체가 시위를 통해서 또 한번 죽이는 그런 행동은 그만하라고.


영화 포스터에 있는 문장처럼 아직도 '끝나지 않은 세월'인가 보다. 나라에서 추념식을 하는 4.3인데도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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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23-04-08 15: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치를 외면하는 가장 큰 댓가는 저열한 인간들에게 당신이 지배를 당하게되는 것이다 ㅡ국가론, 플라톤
같은 내용의 댓글을 2번째 씁니다. 메르켈이라는 정녕 위대한 인물을 가졌던 독일인들이 하염없이 부러울 뿐입니다.

kinye91 2023-04-08 15:40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 헌법 제1조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 조항을 정치인이 명심하게 해야 하는데, 몇몇 정치인이 생각하는 국민의 개념이 좀 다른 것 같아요. 국민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인지시킬 필요가 있단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Vanessa 2023-04-08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원더보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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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보이', 경이로운 소년이다. 초능력이다. 남의 생각을 읽을 줄 아는. 남의 생각을 읽을 줄 안다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다른 사람에게 공감할 수 있다는 뜻이다. 공감하면서 공명할 수 있는 능력. 이 공명의 능력은 혼자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공명은 퍼져나가야 한다. 물결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가듯이, 공감은 공명을 통해 사람들에게 퍼져나간다. 이런 공감의 능력, 공명이 바로 우리들을 좀더 나은 삶으로 이끄는 동력이 된다.


이 소설은 사고로 아빠를 잃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빠를 잃는 순간, 특별한 능력을 얻게 된다.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된다. 그냥 그렇게 초능력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면 이 소설의 배경인 1980년대를 빼놓은 것이 된다.


전두환 독재시대... 많은 사람들이 제 할 말을 못하고 살던 시대. 자기 마음을 감추고 살아야만 했던, 그런 시대에 공감하는 능력, 사람들과 공명하는 능력은 초능력이다. 그리고 이렇게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아이를 통해서 사회의 문제를 드러낸다.


아빠, 결코 애국자와는 거리가 먼 아빠가 간첩을 잡기 위해 희생한 사람으로 둔갑한다. 정보부에 의해서. 이는 자신이 권력을 쥐기 위해서 사건을 조작하던 당시 권력을 추구하던 인간들의 모습을 권대령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나타낸다. 여기에 부화뇌동하는 인간들까지.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도 등장해야 한다. 고문당하는 사람들, 그 마음을 읽었기에 견딜 수 없었던 주인공. 그가 탈출해 만나는 사람들. 그들이 겪어야 했던 시대의 아픔. 그 아픔을 알아가면서 그도 조금씩 성장해 간다.


물론 그 아픔을 알게 되면서, 사람에게 마음을 주면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은 점점 사라진다. 당연한 일이다. 이미 자신의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주었기 때문에, 그 사람 이외의 사람들 마음을 자연스레 읽을 수는 없게 된다.


그렇다고 그 마음 읽는 능력을 온전히 잃게 되지는 않는다. 다른 방식으로, 직접적으로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아닌,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있는 정답을 찾는 행위가 아닌, 질문을 만들어가는 방식으로 사람들 마음을 읽게 된다.


이런 전개 방식으로 인해서, 소설은 주인공의 엄마를 통해서 분단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강토로 살아가려고 하는 희선을 통해서 1970년대 박정희 시대를 소환하기도 한다.


1987년이 되기 전까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시기를 거쳤던 우리나라. 그 시기를 살아가던 사람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다른 사람 마음을 읽는, 고아가 된 주인공 김정훈을 통해서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1986년을 거치면서, 1987년... 소설은 그 87년에서 끝난다. 우리 시대의 겨울도 그렇게 끝났으면 좋으련만, 지금 우리는 그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으니, 소설 이후의 세계를 우리는 살고 있다.


여전히 우주는 젊고, 우리는 할 일이 있다. 소설의 끝에서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 만약 누군가 그런 짓을 하려고 든다면, / 우리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 뭐라도 할 것이라고 /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 우린 혼자가 아니라고' (319쪽)


아직도 갈 길은 멀지만, 그만큼 우리에게 당도하지 못한 밝고 따스한 별빛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그 빛들은 언젠가 도달할 것이라는 믿음은 잃지 않는다.


답이 고정되어 있지 않음을, 답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임을, 그 답을 제대로 찾기 위해서는 질문을 잘해야 함을 이제는 알기 때문에...


마음을 읽는 능력을 잃어가지만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질문을 하게 되는, 이제는 주변을 볼 수 있게 되는 주인공처럼, 그렇게 우리는 지내왔기에.


그럼에도 역사는 직선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세상은 단선적이지 않다. 복잡하게 나아간다. 앞으로도 옆으로도 때로는 뒤로도. 하지만 소설에서 말하듯이 이미 겪은 일들은 우리에게 답을 찾는 능력을 주었다. 소설에 바보와 모범생과 천재의 읽기가 나오는데, 적어도 우리는 바보의 읽기는 끝냈으므로.


처음에는 상황이 비극적이지만 밝고 경쾌하게 진행되던 소설이 조금씩 무거워지더니, 우리나라가 거쳐온 독재 정치를 정면으로 다루고, 1987년으로 나아간다. 


고립된 개인,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감각한 개인들의 사회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고 공명하는 사회로 나아간 우리 사회의 모습을 사고로 초능력을 얻은 주인공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다.


가볍지만 무겁다고 할 수 있고, 무겁지만 경쾌한 전개를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다. 소설 마지막 부분, 행갈이를 한 그 문장들... 왜 2023년인 지금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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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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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나라 독립운동 역사에서 슬픈 학살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슬픈 학살? 이런 말이 성립할 수 있나?


학살은 잔인하다고 표현해야 하지 않나? 하지만 잔인함보다도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는 사건이 바로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일어났다. 소위 말하는 민생단 사건.


스탈린이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뿐만 아니라, 조선인들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킨 이유가 여럿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조선인들이 일제의 첩자노릇을 하지 않나 하는 의심. 그 의심을 송두리째 없애기 위해서 강제 이주를 시켰다고 하는데...


마찬가지로 민생단이란 단체는 독립운동에서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죽이게 하는 역할을 했다. 나라를 구한다는, 여기에 세상을 구한다는 거창한 명분을 담고 행동한 사람들이 서로를 믿지 못한다? 이는 서로를 죽임으로써 그 믿지 못함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뜻이니...


소설은 김해연이라는 지식인을 서술자로 택한다. 그는 독립운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러니 소위 만철(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 근무한다. 식민지 시대, 일제에 부역하는 일을 하는 것. 그 일에 그는 잘못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게 지내던 그에게 이정희라는 사랑이 찾아오고, 어느날 이정희가 죽었다고, 그 죽음에는 독립운동이 관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랑을 잃고 폐인처럼 지내던 그는 용정에서 간도로 가고, 거기서 이정희의 흔적을 만나게 된다. 새로운 삶을 살고자 했고, 여옥이라는 여인과 다시 사랑에 빠지기도 하지만, 또다시 일본 토벌대에 의해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는 공산주의 조직에 가담하게 되고, 무장투쟁을 하는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공산주의 사상을 학습하고 무장투쟁을 위한 몸을 만들게 된다. 이때 바로 민생단 사건이 소설에 등장한다.


민생단, 첩자로 일제에 독립군의 활동을 알려주던 역할을 하는 단체라고 여기고, 민생단원을 색출해 제거하기로 한다. 하지만 민생단원이 누구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결국 민생단은 자신들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상대를 숙청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다.


저자가 민생단원이다, 하면 총살이다. 그냥 죽음이다.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이렇게 죽어간 독립운동가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자신과 사상이 다른 사람을 민생단원으로 몰아 처단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음을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중학시절 뜻을 같이 했던 네 명의 인물들이 어떻게 다른 길을 가고, 죽음에 이르게 되는지를 이정희를 사랑했던 김해연을 통해 하나하나 밝혀지게 된다.


서로를 팔아버리는 이유가 어쩌면 한 여성 때문일 수도 있음을, 자신의 개인적 사랑 때문에 이들은 서로를 죽이기에 이르게 되고...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은 김해연은 자신의 복수를 하지 못한다. 왜? 그에게는 사랑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남아 있기 때문에 가족을 이루며 살아가는, 아이들의 아버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본 다음에는 그를 죽일 수 없게 된다.


그는 역사의 흐름에 휘말려 서로 죽이는 관계가 된 친구들과 다른 위치에 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랑을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정희를 둘러싼 네 명의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죽이게 되지만, 과연 그것이 사랑일까?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다. 소설에서 사랑을,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김해연뿐이고, 이정희는 그것을 깨닫는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실린 이정희의 편지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바로 세상을 구하려고 뛰어든 사람들, 어떤 사상으로 무장하기 전에 바로 그들을 움직인 것은 사랑 아니겠는가? 그러던 것이 사상으로 인해서 사랑을 잃게 되면 죽음이 찾아오게 된다. 사랑을 잃고 사상만으로 건설한 세상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일 수 있음을, 그런 세상은 만들어질 수 없음을, 김해연이 겪어온 일들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다. 이 세상은 지옥이지만, 이 지옥에서도 천국을 맛볼 수 있음은 바로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계산하지 않는 사랑. 그런 사랑을 본 김해연은 복수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가 복수를 한다면 그 자신 또한 사랑을 버린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소설은 우리나라 역사에 부끄러운 과거로 남은 민생단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그럼에도 사랑을 잃지 않아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이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사랑에 있음을, 사랑이 없는 세상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임을, 그 사랑은 집착이 결코 아니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개인은 개인으로 살아남아야 함을, 그냥 역사 속에 자신을 묻어버리면 그때 그에게 사랑은 올 수 없음을, 그에게는 오로지 사상만이 남고, 그 사상은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죽일 수 있음을 김해연과 그가 만나는 다른 인물들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된다.


김연수 소설은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그 역사적 사건이 한복판에서도 개인을 중심에 놓고 있다. 앞에 읽은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도 그랬는데, 이 소설 역시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개인의 사랑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정희가 어떻게 죽게 되었을까? 과연 범인은 누구인가 하는 생각에 끝까지 읽어야만 전모가 밝혀지는 소설이기에 흥미진진하게 읽게 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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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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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초반. 소설은 이 시기를 배경으로 전개되고 있다. 1991년을 중심으로 1990년에 벌어진 일들, 그리고 그 일들과 관련하여 현재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현재로 점점 깊어지고 있으며, 공간 역시 우리나라에서 외국으로 점점 넓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필연의 세계에서 우연의 세계로 들어가는 시대, 또 당위의 시대에서 선택의 시대로, 집단에서 개인으로 넘어가는 시대를 다루고 있다.


서술자는 소위 운동권이라 불리는 학생이다. 그러나 운동권이 지니고 있는 당위와 필연은 1990년을 기점으로 변하게 된다.


소위 공산권의 몰락. 그리고 해외여행 자유화. 우리나라에 불어닥친 이런 바람들로 인해서 세상을 변혁하겠다는 필연의 세계에 자신들을 올려놓았던 사람들이, 그 세계에서 내려와 우연의 세계에서 자신의 선택을 강조하는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또한 집단 윤리가 중시되고, 집단 윤리에 따라 희생이 강요되던 세상에서 개인의 선택이나 감정을 중시하는 시대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런 모습을 작가는 90년대 만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운동권으로 불리는 사회에서 개인의 사랑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초반에 그려지고 있지만, 그런 사랑으로 인해서 소설은 과거의 인물들을 불러내게 된다.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지닌 정민과 내가 소설의 중심에 있다면, 이 나를 중심으로 강시우(이길용)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어쩌면 나를 통해 들려주는 강시우의 이야기를 통해서 필연의 세계에서 우연의 세계, 당위의 세계에서 선택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강시우의 과거 이야기를 통해 우리나라 현대사의 한복판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1960년대 필로폰 밀수부터 시작해서, 노동자, 광주민주화운동 이후의 이야기, 노동자를 대하는 지식인들의 태도, 이길용을 강시우로 변신시키는 정보당국의 모습...


여기까지가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 살아가는, 필연과 당위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이라면, 이길용을 만난 상희의 변화, 그리고 상희의 죽음을 알게 된 이길용이 강시우로 살아가게 되는 모습에서 이제는 필연에서 우연으로, 당위에서 선택으로 넘어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프락치로서의 삶을 거부하고, 오히려 그를 이용하는 삶. 자신에게 주어진 흐름을, 자신이 선택함으로써 자신 인생의 주체는 자신임을 보여주는 강시우의 모습. 그런 모습을 통해서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된다.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개인은 속절없이 그 흐름 속에서 잊혀져 가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소설을 통해서 찾아보려는 노력을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강시우의 모습을 통해서, 과연 우리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잃고만 살 수 있는가? 아니다. 우리는 그런 흐름 속에서도 자신을 찾을 수 있고, 또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을 강시우가 된 이길용이 보여주고 있다. 소설 제목인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우리는 자신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점. 그 점을 시대의 흐름 속에 휩쓸려 살아가던 나와 강시우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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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한 선진국 - 대한민국의 불평등을 통계로 보다
박재용 지음 / 북루덴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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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우리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고 한다. 한강의 기적을 넘어서, 세계를 선도하는 나라가 되었다고 자랑스레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역사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고 하지만, 한순간에 선진국에서 떨어질 수는 있다.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말만 난무하고 있으니까. 실천도 하지 않으면서, 그냥 좋은 말은 다 뱉어내고 있으니까. 정책으로 실현해야 하는데, 정책은 실종되고, 말만 나부끼고 있으니...


불평등한 선진국이란다. 당연하다. 선진국이라고 해서 평등하지는 않다. 불평등하다. 그러나 그들은 불평등을 인지하고 있다. 불평등하기 때문에 정책으로 평등을 지향하려 한다.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파악하고, 그 상황을 타개하려 하고 있다. 그래야 선진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통계지표를 활용해서 선진국이라고 하는데, 평균치로 잡힌 통계에서는 불평등이 보이지 않는다. 그냥 화려한 숫자만 보일 뿐이다.


이 평균 숫자를 보지 않고, 평균을 이루게 된 숫자들을 보면 불평등이 보인다. 불평등이 보여야 평등을 지향할 수가 있다.


일인당 국민소득을 4만 달러라고 하자. 선진국이다. 일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도 안 되던 나라에서 4만 달러라니...(이 책은 세계은행 자료를 인용해(2019년 기준인지, 2017년 기준인지는 조금 모호한데...2019년 기준으로 하면 1인당 평균소득은 3,528만원이라고 한다-이러면 환율을 1달러당 1300원으로 계산하면 약 27,138달러가 나온다 ) 43,430달러로 전세계 27위라고 한다.14쪽)


하지만 평균값은 상위 수준이 아주 높으면 상위 20%의 소득으로 나머지 80%의 소득과 같을 수가 있다. 평균은 올라가지만, 실질적으로 소득은 그리 높지 않은 사람들이 많을 수가 있다. 통계의 함정이다.


이 책은 이렇게 통계 수치를 평균으로 보지 않고, 구간별로 나누어서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나라 평등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게 된다.


많은 자료들을 인용하고 있는데, 결론은 불평등이다. 그것도 이 불평등이 점점 심화되어 가고 있다고 한다.


문제다. 불평등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오히려 평균소득은 높아지지만 불평등은 심해지고 있다고 하니...


특히 노동에서 격차가 벌어지고 있으며, 청년들 사이에서도 경제적 차이에 따른 차이가 더 벌어지고, 기존에 어렵게 살던 사람들은 갈수록 더 어려워지고 있는 현실을 4부에서 가족 해체, 노인 자살, 지방 소멸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소수자들이 얼마나 힘들게 지내는지를 이주노동자, 이주여성, 장애인 여성, 모자 가구, 주거 취약계층을 다룬 5부에서 보여준다. 


이들이 계속 더 힘들어지는 생활을 한다면, 우리나라는 무늬만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다. 무늬만 선진국이 아닌 실질적인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불평등을 인정해야 한다.


인정해야 고치려고 한다. 그것도 정책과 제도를 통해서.


책의 결론 부분에서 대책을 제시한다. 그런데 이 대책이 당연하다고 하는 사람과 얼토당토 않다고 하는 사람으로 나뉜다. 이런 갈등으로, 정책은 길을 잃고 불평등은 더 심화된다. 저자의 대책을 보자.


'먼저 소득에서의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최저임금을 올리고, 비정규직의 노동권을 확실하게 보호하고, 노동 시간을 줄여야 합니다. 정부의 소득 재분배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소득세 등 직접세 세율을 더 올리고 공공복지 예산을 늘려야죠. 부의 세습을 막기 위해 상속세와 증여세의 세율을 올리고 면제 범위를 축소하면 됩니다.

  불평등이 줄어들면 교육 문제의 기본이 해결됩니다. 소득 격차가 적어지면 기를 쓰고 명문대를 갈 이유가 줄어들고 자연스레 사교육도 감소합니다. 부모의 소득 중 교육비로 빠져나가는 비용이 주니 그 또한 좋은 일입니다. 소득 격차가 줄고 국가의 소득 재분배가 더 활발해지면 중산층이 넓어지고 여유가 생깁니다. 그러면 자연스레 출산율로 높아지고, 지방 소멸도 더뎌지겠지요. 

  이렇게 결론은 쉽습니다.' (458쪽)


아니, 결론이 쉽지 않다. 우선 최저임금 문제부터 갈등이 일어나니 말이다. 노동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말, 지금은 거꾸로 가고 있지 않은가. 직접세 세율, 깎으면 깎았지, 높이지 않으려 하고, 교육, 사교육이 심화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은가.


불평등이 심해지고 있는데, 그동안 불평등을 일으키고 그 간격을 더 크게 벌리는 제도들을 없애기는커녕 더 밀어붙이고 있는 형국 아닌가.


그러면 불평등한 선진국이란 말이 없어지지 않는다. 어디에서 불평등이 더 심해지고 있는지를 통계를 통해서 살펴야 한다. 평균만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그 점에서 이 책은 불평들이 나타나는 숫자들을 우리들이 보게 한다. 그 숫자들을 통해 평균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저자가 제시한 해결 방법, 정책에 반영될 수 있도록 많은 토론이 필요하다. 감정이 아니라 구체적인 자료를 통한 토론이.


결코 어렵지 않게 우리나라 현실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 책이다. 숫자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도 생각하게 해준 책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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