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가 들려주는 전체주의 이야기 철학자가 들려주는 철학 이야기 4
김선욱 지음 / 자음과모음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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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에게 철학이 무얼까라고 질문을 하면, 대부분은 망설이고 답을 하지 못한다. 철학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 아니며 너무나 형이상학적인 이야기, 그래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라는 선입견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는 철학하면 특정한 사람들만이 하는 학문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학교에서도 소크라테스부터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여기까지는 그래도 학생들이 이름은 한 번쯤 들어본 사람들이고, 칸트, 헤겔이 나오면 머리가 아파오는데, 이들 말고도 데카르트, 스피노자, 니체, 하이데거, 사르트르 하면 머리를 쥐어싸매게 된다.

 

이런 사람들도 이름을 한 번 들어봤을까 말까 한 학생들에게 한나 아렌트 이야기를 하면 누구? 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리기 십상이다.

 

사실 아렌트는 학생들 뿐만이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무척 어려운 사람 아니던가.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해주어야 한다면 참 막막하겠단 생각이 들었는데...

 

이 책은 한나 아렌트의 핵심 사상을 이야기하면서도 결코 어렵지 않다. 유대인 차별을 통한 정치적 인간이라는 이야기, 전체주의 이야기, 악의 평범성 등을 한 편의 동화 속에서 잘 구현해 내고 있다.

 

철학적 내용을 학생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동화라는 장르를 선택했다는 사실이 놀랍고, 이를 예전에 시도한 책이 위기철의 논리시리즈였는데, 이보다 더 정교하게 동화 속에서 아렌트의 사상을 설명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더 놀랍다.

 

철학을 전공한 사람이 또다른 철학을 전공한 사람이거나, 철학에 관심있는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과 철학에 대해서 전혀 무지한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일이다. 특히 더 힘든 일은 철학에 대해 무지한 사람에게 철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이다.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용어부터 사상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설명해 내야 한다. 그러나 이 책은 왕따라는 동화 속의 현상을 통해서 인간은 정치적 행위를 해야 함을, 정치적 행위를 하지 못했을 때는 자신의 권리, 권력을 행사하지 못함을 이야기 하고 있으며, 다음으로는 우리가 쉽게 다수결 원칙으로 넘어가는 문제를 전체주의 문제와 연결시켜 참여와 대화가 필요함을, 그래서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을 통해 더 나은 합의를 이끌어가기를 알려주고, 다름으로 인해 남을 멸시하는 문제를 왕따 문제를 예루살렘의 아히히만의 예를 들어서, 악의 평범성을 들어서 설명해주고 있다.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동화 속에서 이야기가 하나의 흐름을 통해 자연스럽게 전개되기에 동화를 읽으면서 아렌트의 핵심사상을 자연스레 습득하게 된다.

 

결국 동화로 철학이야기를 할 수 있는 능력은 자신이 철학을 완전히 소화해낸 상태에서 이를 남에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얘기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아렌트 소개에 완전히 성공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지금 학교 폭력 문제가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학교 폭력, 이를 이 책에 나오는 왕따와 같은 문제로 볼 수 있는데, 이에 대한 해결책을 이 책은 아렌트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아이들은 자신의 문제를, 어른들은 어른들의 문제를 이 책을 통해 인식하고 해결하려는 자세를 갖출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이 초등학생이니 초등학생이 읽어도 좋지만, 사실 초등학생에겐 약간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고(책을 제법 읽은 초등학교 고학년이면 재미와 이해를 함께 할 수 있는 책이지만), 중학생 이상이면 충분히 이해하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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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업이란 무엇인가
힐베르트 마이어 지음, 손승남 옮김 / 삼우반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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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업이란 무엇인가? 제목이 참 평이하면서도 도발적이다. 평이한 이유는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보는 말이기 때문이고, 도발적이란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대해서 고민하고, 정리해서 한 권의 책으로 냈기 때문이다.

 

좋은 수업에 대해서 고민하는 사람은 우선 교사일테고, 다음은 학부모쯤 되려나? 그렇다면 수업의 또다른 주체라는 학생은? 과연 좋은 수업이란 무엇일까 고민을 할까? 그러니 이 책이 도발적일 수밖에.

 

교육학을 공부하거나, 교사가 되기 위해서 사범대 또는 교대, 그리고 다르게 교직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책의 제목이 전혀 낯설지 않고, 오히려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고, 이거 또 하나 이런 책이 추가되었군 하기 십상인데, 수업에 관심이 전혀 없는 학생에게는 이런 책은 스쳐지나가기도 뭐한 관심 밖의 책이고, 학부모들은 좋은 수업에 대해서, 오로지, 아니 대다수의 학부모들은 좋은 수업이란 자기 자식 성적 올려주는 수업일테니, 역시 진부한 질문을 단 책이라고 여기기 쉽다.

 

도대체 좋은 수업이란 무엇일까? 저자는 여기에 대한 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고 말한다. 백이면 백, 다 다른 답이 나올 수 있고, 또 현장에서 직접 교육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경험과, 대학에서 이론을 전공하는 사람들 사이에 답이 달라질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책을 내는 이유는, 우리가 그 많은 답에서도 무언가 공통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고, 이런 공통점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좋은 수업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좋은 수업은 열 가지로 정리된다. 물론 이 열 가지가 다는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면, 우리는 이 열 가지에서 좋은 수업에 대한 나름대로의 관점을 형성할 수 있다.

 

좋은 수업의 열 가지 특성

수업의 명료한 구조화, 학습 몰두 시간의 높은 비율, 학습 촉진적인 분위기, 내용적인 명료성, 의미 생성적 의사소통, 방법의 다양성, 개별적인 촉진, 지능적 연습, 분명한 성취 기대, 준비된 환경

 

이들은 우리가 중요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통적으로 인정할 만한 요소들이다.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환경에 맞는 교육방법을 택한다면 나름대로 좋은 수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런 논의에 맞추어 우리나라에서는 학생들의 자존감 회복과 공부에 대한 목표를 정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즉, 배움에 대한 생각을 스스로 학생들이 정립하지 않으면, 교사가 아무리 좋은 수업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될 터이니 말이다.

 

공부의 목적이 오로지 대학에 가겠다가 아니라,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무엇을 통해 내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인가? 함께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는 교육, 이 책에서도 단지 지식의 습득만이 아니라, 사회에서 민주시민으로서 살아가는 모습을 제대로 가르치는, 또는 배우는 모습이 좋은 수업이라고 얘기하고 있으니, 준비된 환경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수업, 이는 주어지지 않는다. 학생과 교사가 함께, 그리고 사회의 다른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엉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좋은 수업은 만들어진다. 이를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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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세기 이후 오퍼스 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정한 옮김 / 이후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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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제도에 권력을 제공하는 것은 인민의 지지이며, 이러한 지지는 법을 생성시켰던 동의의 지속에 불과하다. 모든 정치제도는 권력의 발현이자 물질화이다.-70쪽

권력과 폭력의 가장 명백한 차별성들 중의 하나는 권력이 항상 다수를 필요로 하는 상태에 있는 반면에, 폭력은 도구에 의존하기 때문에 다수가 없어도 어느 정도 철할 수 있다는 점이다.... 권력의 극단적인 형태는 한 사람에 반하는 모든 사람이며, 폭력의 극단적인 형태는 모든 사람에 반하는 한 사람이다. 동시에 폭력은 도구 없이 단연 불가능하다.-71쪽

권력은...그냥 행동하지 않고 제휴하여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조우한다. ...(권력은) 집단에 속하는 것이면 집단이 함께 보유하는 한에서만 존속한다.-74쪽

모든 것이 권력 이면에 있는 권력에 좌우된다. 혁명을 예고하는 갑작스럽고 극적인 권력의 붕괴는 시민복종이 얼마만큼 지지와 동의의 외부로의 발현에 불과한 것인지를 순식간에 드러낸다.-80쪽

붕괴는 종종 직접적인 대결을 통해서만 명백해진다. 하지만 심지어 그 때, 권력이 이미 거리에 있을 때에도, 그 권력을 줍고 책임을 맡을 만한 그와 같은 우발적인 사태에 대비해 왔던 조직 성원들이 필요해진다.-81쪽

권력은 사실상 모든 통치의 본질이지만, 폭력은 그렇지 않다. 폭력은 본래 도구적이다. 다른 모든 수단들처럼, 항상, 그것이 추구하는 목적을 통하여 지침과 정당화를 필요로 하는 상태에 있다.-83쪽

권력은...그 자체로 모적이다. ... 권력은 결코 정당화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 정치공동체의 현존 자체에 내재한다. 권력이 필요로 ㅎ는 것은 정당성이다.-84쪽

권력은 언제든지 사람들이 모이고 제휴하여 행동할 때 생겨나지만, 그 정당성을 나중에 뒤따라올 어떤 행동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최초의 모임에서 유래한다. 정당성은, 도전받을 경우, 과거에 대한 호소에 기초하지만, 반면에 정당화는 미래에 위치하는 목적과 관련이 있다.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지만, 결코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84-85쪽

순전히 폭력만을 통한 지배는 권력이 상실되고 있는 곳에서 작동하지 시작한다.-86쪽

테러와 폭력은 동일하지 않다. 테러는 오히려 폭력이 모든 권력을 파괴하면서도, 완전한 통제를 포기하지 않고, 반대로, 유지하고 있을 경우에 나타나는 통치 형태이다. ... 텔의 유효성은 거의 전적으로 사회적 원자화 수준에 달려 있다고 지적되어 왔다.-88쪽

권력과 폭력은 대립적이다. ... 폭력은 권력을 하괴할 수 있다. 하지만 폭력은 권력을 전혀 생산할 수 없다.-90쪽

공적인 문제, 공적인 것에 괂 아주 약간의 관념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해관계의 문제에 있어서 비폭력적으로 행위하고 합리적으로 주장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이지도 않고, 합리적이지 않다.-120쪽

폭력은 본성상 도구적이므로, 그것을 정당화시켜야 하는 목적을 달성하는데 효과적인 때까지만 합리적이다. ...폭력은 단기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경우에만 합리적일 수 있다. ... 폭력은 원인들을 촉발시키지 않으므로,역사도 혁명도, 진보도 반동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불만을 극적으로 표현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고 그래서 공적인 주의를 환기시킬 수도 있다. ... 폭력은 혁명보다는 개혁을 위한 무기이다.-121쪽

폭력의 실천은 모든 행동과 마찬가지로, 세계를 변화시키지만 더 폭력적인 세계로 변화시킬 가능성이 가장 많다.-123쪽

폭력이나 권력은 ... 인간사의 정치적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서 행동능력,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는 능력에 의해서 보증되는 인간의 특성이다.-126쪽

모든 권력의 감소가 폭력의 공개적인 초대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모르고 있다면 알아야 한다.-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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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세기 이후 오퍼스 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정한 옮김 / 이후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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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 읽기를 다시 시작하다. 어떤 책을 고를까 하다가 가장 얇은 이 책을 선택하다. 먼저 머리에 기름을 칠한 다음 아렌트의 다른 책으로 넘어가는 편이 더 아렌트에 쉽게 접근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폭력의 세기, 제목을 영어대로 번역을 하면 폭력에 대하여 정도가 되겠다. 폭력에 대하여, 20세기후반에 일어났던 여러 폭력을 보면서 아렌트가 폭력과 권력에 대해서 나름대로 성찰한 내용이다. 그리 길지 않은 내용이지만, 많은 면에서 생각할거리가 많다.

 

이 책을 읽으며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폭력과 권력을 구분해야 한다. 아렌트가 말하는 폭력은 "도구적이고, 그래서 다른 모든 수단들처럼 항상 그것이 추구하는 목적을 통하여 지침과 정당화를 필요로 하는 상태에 있다"고 한다. 이에 반에 권력은 "그 자체로 목적이고, 필요로 하는 것은 정당성"이라고 한다.

 

그래서 권력은 "그냥 행동하지 않고, 제휴하여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조우한다....집단에 속하는 것이며, 집단이 함께 보유하는 한에서만 존속한다고 한다." 즉, 폭력은 사적 영역에 속할 수 있지만, 권력은 공적 영역에 속한다.

 

이런 논의를 참조하면 폭력의 상황에 사람들이 눈감을 경우, 그 폭력은 권력의 이름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명심해야 한다. 결코 권력이 될 수 없는 폭력임에도 불구하고 , 사람들은 이를 권력으로 착각하고 거기에 순응하게 된다. 이러한 무관심, 또는 감성의 부재가 사회에 폭력이 만연하에 만드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어떻게 폭력을 극복할 수 있는가를 황석영의 "아우를 위하여"란 소설을 통해서 깨우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힘센 폭력에 굴복하는 아이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폭력을 물리치는 과정이 나타난 소설인데, 이 소설을 아렌트의 이 책에 대입하면, 결국 폭력은 개인의 힘으로 나타나지만, 이러한 폭력을 극복하는 상태는 집단의 힘으로, 즉 집단의 행동으로 공적 영역에의 참여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공적 영역에 집단이 행동으로 나타내는 힘을 우리는 권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권력은 당연히 정당성을 획득하며, 폭력을 굴복시키게 된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더 마음에 새기게 된 말은, "권력이 이미 거리에 있을 때에도, 그 권력을 줍고 책임을 맡을 만한 그와 같은 우발적인 사태에 대비해 왔던 조직 성원들이 필요해진다"는 아렌트의 말이다.

 

우리가 87년 6.10민주화 투쟁으로 권력을 쟁취해야 하는 순간, 이를 준비했던 조직 또는 조직 성원들의 부재로 우리는 권력을 넘겨주고 만 경우가 있었고, 그 후의 여러 촛불 시위에서도 거리에 이미 권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권력을 받아 새로운 권력을 창출하려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점에서 이 구절은 통열하게 다가온다.

 

이러한 폭력에 대한 고찰은, 정당한 권력을 창출하려는 노력을 하게끔 만드는데, 그 노력을 우리들이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 이 또한 명심해야 한다. 다만 권력은 그냥 주어지지 않고, 행동을 통해서만이 얻을 수 있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한다.

 

현존하는 권력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은 물론이고, 다른 여러 요소들을 통해 권력이 아닌, 폭력을 권력으로 위장하려 한다. 이러한 속임수를 간파하고, 이미 그 권력이 붕괴하고 있음을 알게끔 해주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단순히 폭력이다 비폭력이다를 떠나서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 어떠한 행동을 해야 하는가를 잘 알려주고 있는 책이다. 짧은 분량이지만,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덧글

불행하게도 이 책은 품절이 되었다. 그러나 이 책에 실린 내용은 다른 책에 다시 실려 있다. 구해서 충분히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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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대시사 : 1920~1945
유종호 지음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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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대시사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책은 많다.

정말로 많다.

그만큼 시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업적으로 내세우는 책이 바로 시사이다.

연구자라면 한 번쯤 욕심을 내보고 싶기도 하리라.

자신이 공부한 시를 하나의 체계를 세워 책으로 낸다는 일,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러다 보니 많은 연구자들이 시사에 관한 책을 냈고, 이 책들의 내용이 그만그만한 경우도 많았다.

또 이것저것 많은 연구성과들을 종합적으로 내세워서 일반인들이 읽기에 힘든 경우도 많았다고 할까...

 

이 책은 유종호 교수가 자신의 관점에서 또 일반인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우리 근대시사를 정리한 책이다.

읽기도 쉽고, 또 많은 시인들에 대해 장황하게 알기보다는 주요한 시인들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정리가 되어 있어서 기억하기도 쉽다.

 

그게 바로 이 책의 장점이다.

하지만 그는 근대지향과 전통지향, 그리고 사회현실지향과 우리언어지향이라는 네 축을 중심으로 살펴본다고 했는데, 과연 이것이 충실히 지켜졌는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뒤로 갈수록 시인의 시에 대한 설명이 많아지고 있는 반면에 이 시들이 이 축이 어디에 속하는지, 그리고 이 축들이 어떠한 변화를 통해서 우리 시를 형성해갔는지에 대한 설명은 부족하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도 말하고 있듯이 이 네 가지 축이 명확히 구분되지도 않는다.

아니 구분될 수가 없다. 전통지향과 근대지향은 구분히 가능하다 하더라고, 사회지향과 언어지향은 서로 나뉠 수 있는 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별의 불가능성은 시의 기본이 바로 언어라는 사실에 있다. 언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시는 이미 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를 음악적으로 표현하든, 회화적으로 표현하든, 시는 언어로 만들어진 예술이기 때문에 언어에 대한 관심이 기본이라면, 근대시사의 축을 오히려 사회지향과 개인지향으로 나누는 편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그렇다치더라도 문학사에서 살아남는 시는, 좋은 시, 기억할 만한 시임에는 틀림없으니,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1920년 대에서 1945년까지 나온 시집, 또 시들은 우리가 알아야만 할 시들이다.

물론 유종호 교수가 쓴 이 책에 나오는 시들이 다 좋은 시라고 말할 수는 없다.

또 언급하지 않은 시들이 좋지 않은 시라고 말할 수도 없다.

시는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근대시사를 읽는 이유도, 이런 책을 통해 시를 평가하는 안목을 기르는 연습을 하기 때문이다.

학자들이 어떤 기준에서 좋은 시라고 하는지, 여러 문학사 책들을 읽다보면 자신만의 시를 보는 눈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눈을 통해 시를 더 잘 감상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최승호의 '이것은 죽음의 목록이 아니다' 라는 시를 빌려서 말을 해보자. 제목을 비틀어서 이것은 문학사에서 사라진 시인들의 이름이 아니다 정도로 하고...

 

이것은 문학사에서 사라진 시인들의 이름이 아니다

 

1923년 개인시집 "해파리의 노래"로부터 해방이 되는 1945년까지 나온 시집의 주인공들은.

김   억,조명희,이하인,박종화,변영로,노자영,주요한,김동환,김명순,김소월,유도순,한용운,

최남선,권구현,이광수,황석우,김영희,김동명,유   엽,양주동,이진언,이은상,정영수,김성실,

모윤숙,허수만,장정심,박귀송,김한촌,황순원,김희규,백용수,정지용,김영랑,오신혜,백   석,

김기림,장재성,김인걸,이서해,윤곤강,박영희,이용악,오장환,이상필,정희준,이   찬,허이복,

장만영,노천명,이해문,조동진,임   화,조중협,최경섭,박세영,김광섭,김대봉,최병량,이하윤,

한죽송,김태오,김상용,박용철,함윤수,김광균,이병기,김기림,정호승,신석정,박남수,김이랑,

박팔양,안자산,김동일,김남인,김해강,이기열,김달진,박노춘,서정주,강홍열,임춘길,김용호,

이가종,이강수,권   환,차원흥,김기한,이태환,진금도. 다

권영민 편저, 한국현대문학사년표1, 서울대출판부. 1987년 초판본에서

 

누가 이들을 문학사에서 사라졌다고 하는가. 어찌 알겠는가. 그들이 어느 문학사에 나올 줄.

최소한 한 권 이상의 시집을 냈던 시인들.

아마추어리즘에 빠져있든, 아니면 치열한 시적 정신을 지니고 있든, 그들은 한 권 이상이 시집을 내고 우리나라에서 시인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문학사에서 언급이 되든, 되지 않든 그들은 이미 시인으로 존재했고, 앞으로도 시인으로 존재할 것이다.

누가 언제 어떤 책에서 이들을 다시 언급할지 알 수 없으므로.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알려진 시집을 낸 시인들이 이만큼이라는 사실이 우리 근대가 얼마나 빈약한지 알려주는 증거나 되나, 이를 딛고, 더 많은 시인들이 더 좋은 시를 만들어내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20여년에 우리 시가 완전한 형태의 시로 자리매김하고, 시인이 시인으로 인정받는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에 경탄을 금할 수가 없다.

 

유종호의 책에서는 이들 중 몇 명만이 나온다.

그리고 이 목록에 없는 사람 중에 몇 사람이 더 나온다. 가령, 이육사는 해방후에 시집을 냈기 때문에 이 명단에 없지만, 그의 시들은 일제시대에 발표되었기에 이 책에서 다뤄지고 있다. 이한직도 마찬가지다. 그도 일제시대에 시집을 내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면에 발표를 해서 이 책에서 언급되고 있다.

여기에 함형수란 시인은 '해바라기 비명'이란 한 시로 이 책에 언급이 된다.

그 시 하나로 그는 시단에서 무시할 수 없는 시인이 되었다는 얘기다. 행복한 시인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리 많은 시집을 내도 문학사에서 지워져버리는 시인이 허다한데, 시 하나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시인은 많은 시를 양산해내기보다는 사람들이 기억하는 단 한 편의 시를 쓰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편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시인이다.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시인 중 한 명인 윤동주를 다루고 있지 않은 점이다.

윤동주의 시집이 해방 후에 나와서 이 책의 년도와는 맞지 않지만, 그의 시들이 비록 생전에 발표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시가 쓰여진 시기는 일제시대니 다뤄줘도 좋으련만... 저자는 엄격하게 자신의 규정을 지키고 있다.

 

한국근대시사라고 해서 시를 전공하는 사람,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만이 읽어야 한다는 편견을 버리게 하는 책이다. 대중을 위해서 쓴 책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문학전공하는 사람들이나 고르는 제목을 붙이면 잘 읽지 않는 게 우리의 모습이다.

 

그래서 우리는 제목이 주는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냥 옛날에 우리나라에 이런 시인들이 있었구나, 이들이 쓴 시는 이렇구나, 이런 시들을 바탕으로 지금 우리의 시들이 나오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으면 된다. 그렇게 읽은 다음 책을 덮을 무렵 더 풍부해진 상식과 지식으로 시를 보는 눈이 한층 더 좋아진 자신을 느끼게 된다.

 

어렵다고 포기하지 말고 우선 손에 들고 읽기 시작하자.

그게 시를 이야기하는 책에 다가가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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