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크리스 임피 지음, 이강환 옮김 / 시공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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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궁금해 하면서도 아직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 두 개.

 

죽음이란 무엇인가?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결국 사람들은 탄생과 죽음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 이 질문들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질문의 최대치이지만 반대로 가장 기본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에 대한 많은 책들이 나와 있지만 우리들은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생명의 탄생이나 세상의 시작에 대해서도 많은 책이 나와 있지만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정답은 있지만, 아직 우리 능력으로는 정답에 다가갈 수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이 질문이면서도 대답을 할 수 없는, 또는 누구나 대답하려고 도전하고 있는 질문, 여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매달려 왔던가.

 

이 책은 죽음이 아니라 탄생에 대한 탐구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우주까지 포함하여-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최근에 나온 과학이론을 총동원하여 알려주고 있다.

 

세상의 시작을 탐구하는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라고 하는데, 그러기에는 너무도 많은 수학, 물리학, 천문학 지식들이 동원되고 있다. 이런 과학지식이 없는 사람은 도대체 뭔 얘기를 하는가 하고 읽다가 포기할 수밖에 없고, 또한 약간의 지식을 가진 사람에게도 이 책은 어렵다.

 

아니 어려울 수밖에 없다. 물리학이나, 수학이나 천문학이나 전공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누가 다시 공부하겠는가. 얄팍하게 고등학교 때까지 배운 지식으로 버티든지, 아니면 뭔 소리야 하면서 책을 덮든지 할 수밖에 없다.

 

교양인을 양성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국민공통과정이라 할 수 있는 고등학교에서도 문과와 이과를 나누어 편중된 교육을 하고 있는 현실에서 문과생들은 과학분야에서는 문맹이 되며, 이과생들은 인문학 분야에서 문맹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이런 반성 속에서 책을 끝까지 밀고 간다. 어짜피 딸리는 과학지식으로 이 책을 비판할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있으니, 책의 내용을 조금이나마 이해해야지 하면서 읽는다.

 

우주로의 여행이 세상의 시작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 말에서 이 책은 호기심을 자극한다. 우주는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데, 이런 우주 여행이 우리의 근원으로 가는 길이라니...

 

가만 생각해 보면 그렇겠다 싶기도 하다. 이것은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빛 때문이다. 빛의 속도가 대략 일초에 30만 킬로미터를 간다고 하니, 빛의 속도로 계산을 하면 100억광년 떨어져 있는 별을 우리가 관측한다는 사실은 100억년 전의 별을 보고 있다는 얘기가 되니 말이다.

 

이 책에서는 우주의 역사를 137억년 정도라고 하는데,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별들에서 우리는 우주의 시작을 발견할 수 있고, 또한 그러한 연구가 진척되고 있다는 얘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우리가 직접 가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길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줌으로써, 빛보다 빠른 물질을 개발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우주에 대한 관심을 포기하지 말 것을 은연 중에 강조하고 있다고나 할까.

 

엄청나다. 정말로 방대한 스케일이 책 속에 펼쳐지고 있다. 이 자그마한 나라에서, 그것도 서로 아웅다웅하면서 살고 있는 모습이 너무도 좀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단위 자체도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로 크거나 작고. 우주의 크기는 무한대에 가깝다고 하고, 어떤 은하들은 빛의 속도보다도 더 빠르게 우리 은하로부터 멀어져 가, 나중에는 우리 은하밖에는 관측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나올 정도니...

 

하늘을 본다는 것, 천문학을 공부한다는 의미가 아니더라도 방대한 우주에서 나란 존재는, 우리란 존재는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는 것이리라.

 

우리의 무한한 상상력을 과학지식으로 조금씩 조금씩 채워나가려는 노력. 이것이 천문학자, 물리학자, 수학자들이 하고 있는 일이란 생각이 들고, 이러한 과학과 종교가 결코 배타적이 아님을 저자의 생활에서(그는 티벳 스님들에게 천문학을 강의한다고도 하고, 마찬가지로 스님에게 배운다고도 한다) 또 저자가 예를 든 목사이자 천문학자인 사람의 이야기에서도 배우게 된다.

 

과학에 문외한인 나같은 사람에게 이런 책은 좀더 나를 좀더 낮춰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는 점, 조금 더 겸손하게 이 세상의 존재들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는 점, 좀더 커다란 세상을 꿈꿀 수도 있어야 한다는 점, 우리의 눈에는 너무 큰 것도, 너무 작은 것도 보이지 않으니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는 점에서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한가지 이 책이 우주에 대한 안내서 역할을 한다면, 적어도 일반인들이 읽어야 한다고 한다면 이 책의 부록에 천문학이나 물리학의 전문 용어들을 해설해 주는 친절을 베풀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켈빈 온도라는 말이나, 그밖의 다른 용어들에 친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다른 참고자료를 뒤적거리는 일은 책에 집중하는 시간을 뺏어가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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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조정육 동양미술 에세이 1
조정육 지음 / 아트북스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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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는 어느 한 순간이 포착되어 잡혀 있다. 잡혀 있다고 해야 한다. 그림 속에 있는 그 순간은 영원히 그림 속에 갇히게 된다.

 

그런데 그 갇힘 속에서도 끊임없이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갇혀 있으면서도 갇혀 있지 않음. 그것이 그림의 숙명이다.

 

그림은 갇혀 있기만 해서는 그림으로서의 존재를 완성할 수 없다. 갇힘으로서 갇힘을 벗어나는 순간 그림은 그림으로서 존재한다. 그것이 그림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가 된다.

 

이것을 많은 사람들은 대화라고 한다. 그림과 사람이 대화를 하는 순간, 사람은 그림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 순간에 사람의 삶은 더욱 풍요로와진다. 이것이 그림이 지닌 갇혀 있지 않음이다. 언제나 그림은 제자리에 있는 듯하지만, 결코 제 자리에 있지 않는다. 그림은 늘 같은 모습을 지닌 듯하지만, 같은 모습이 아니다. 

 

사람에 따라서, 때에 따라서, 장소에 따라서 그림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다르게 말을 걸어온다. 그림은 갇혀 있으면서도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자신을 가꾸고 있나 보다.

 

그림 속에서 어떤 이야기를 읽어내는 순간, 그림 속에서 삶을 발견해내는 순간, 그림은 단순한 그림으로 존재하지 않고 내 삶으로 존재하게 된다. 이런 그림을 만나는 순간, 꽃봉오리가 활짝 터지듯이 삶이 만개하게 된다.

 

지은이의 삶과 그림이 대화를 하고 있다. 이런 대화를 엿들으며 나 또한 그림과 대화를 한다. 그리고 내 삶과 대화를 한다.

 

그림 속에서 가격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림에서 삶을 읽어내고 삶을 발견한다. 그러한 그림 읽기, 아니 그림과 함께 살아가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문화예술교육이 강조되고 있다. 이 중에 학교에서는 체육을 가장 강조하고 있지만, 체육만큼이나 음악, 미술교육이 강조되어야 하고, 또한 다른 문화(철학이라든지, 고전 읽기라든지 하는 인문학이라는 분야)도 강조되어야 한다.

 

한 쪽만 강조해서는 제대로 된 삶을 영휘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창작을 중심으로, 또는 감상을 중심으로, 기법을 중심으로 미술을 가르치는 방향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미술을 배우는 이유 역시 자신의 삶을 좀더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이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이 책에서처럼 그림을 통해, 미술을 통해 자신의 삶의 한 귀퉁이에 숨어 있던 그 어떤 것들을 끄집어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교육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겠지만, 그림을 보며 자신의 삶을 발견해내게 하는 교육, 또는 음악을 들으며 자신의 삶과 대화를 하는 교육, 그런 교육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미술관에서 스윽 지나치는 미술관람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불시에 자신의 삶 속으로 그림이 들어오게 되는 그런 순간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미술교육.

 

세계적인 화가들의 그림을 보여주고 작가와 기법을 외우게 하기 보다는, 이런 그림에 관한 에세이들을 읽히면 자연스레 그림과 대화하는 사람으로 성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러기에는 우선 여유가 있어야겠지.

 

대화란 여유에서 나올테니, 여유가 없을 땐 일방통행만이 이루어질테니.

 

주로 우리나라 그림들이 많고, 가끔 중국과 일본 그림이 나온다. 하여 동양화를 보는 즐거움도 있고, 이런 그림들을 통해 자신의 삶을 끌어내는 모습을 읽는 재미도 있는. 하여 이런 글을 읽는 여유를 만끽하는 그런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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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엽서 - 누이에게 카프카 전집 10
프란츠 카프카 지음, 편영수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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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카프카가 누이에게 보낸 편지 모음이다.

 

누이라고 해봤자 카프카는 자신과 가장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또는 가장 마음 놓고 이야기할 수 있었던 오틀라에게 주로 편지를 보냈다.

 

여기에 펼쳐진 120편의 편지 중에서 오틀라에게 보낸 편지가 100편이 넘는다.

 

그만큼 카프카는 자신의 진솔한 마음을 오틀라에게 전달했다고 보면 된다.

 

프라하에서 살면서 프라하를 힘들어 했지만 결코 프라하를 벗어날 수 없었던 카프카. 그는 베를린에서 작가로서만 생활을 영위하려고 했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 못했으며, 작가로서의 삶 때문에 펠리체와의 약혼도 결국 파혼으로 치달았으며, 작가로서의 삶에 매진하겠다는 욕구가 소음에 견딜 수 없게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이해해주는 오틀라에게 편지를 보냈으며, 오틀라에게서 어떤 위안을 얻곤 했다는 것을 편지글에서 알 수가 있다.

 

오틀라 역시 하나뿐인 오빠를 잘 보살펴주었으며, 무엇보다 오빠를 잘 이해했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카프카는 오틀라의 살뜰한 보살핌 속에서 만족한 생활을 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상당히 예민한 성격의 카프카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남들과는 다른 시간을 살았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남들이 활발하게 움직일 때 그는 휴식을 취했으며, 남들이 쉴 때 비로소 작품 활동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자신만의 작업을 하길 원했다. 그래서 시골에 왔을 때, 아마 취라우던가, '자신은 급행을 타고 왔는데, 소음은 완행을 타고 왔나 보다'고, 시골에서도 소음을 느끼며 자신의 생활에 방해를 받았다고 여겼다.

 

그가 채식을 위주로 한 식습관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편지를 통해서 알 수 있고, 또 부모들과도 많은 편지 왕래가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는데, 불행히도 부모에게 보낸 편지나 부모 또는 오틀라가 카프카에게 보낸 편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게 아쉽지만...

 

적어도 카프카는 편지를 통해서 구원을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편지를 통해서 소통을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하고. 친구들과 가족들과 그밖의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그는 육체적으로는 한 공간에 매여 있었지만, 그래서 육체적으로는 자신만의 공간에 처해있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어디로든 갈 수 있지 않았을까.

 

또한 그것이 그가 고독에서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몸은 프라하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지만,(그가 여행을 하거나, 또는 말년에 잠시 베를린에 머물렀던 것은 제외하자. 그는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할 생각도 했지만 결국 건강 문제로 포기하고, 베를린에서도 작가로서의 삶을 영위하고자 했지만, 말년에 죽음에 이르러서야 도라와 함께 산 짧은 기간만 베를린에 체류했을 따름이다. 그것도 아주 힘든 시기에.) 그의 정신만은 전세계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는 얘기가 되고, 그것이 지금도 우리가 카프카를 읽는 이유가 된다는 생각이 든다.

 

카프카의 내면에 다가갈 수 있는 편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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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들 문학과지성 시인선 384
권혁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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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들이라니... 지금 얼마나 많은 소문들이 횡행하고 있는지...

 

대통령이 바뀔 즈음에 온갖 소문들의 잔치가 벌어지고 있다.

 

소문들은 나름대로 근거를 가지고 우리들에게 다가온다.

 

때로는 희망으로, 때로는 절망으로, 때로는 분노로.

 

이런 소문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시집을 꺼내들었다.

 

제목도 "소문들"이다.

 

이 소문들 연작은 언어의 유희라고 할 수 있는데, 언어들이 유희로 우리들을 다른 세상으로 인도한다.

 

아니 풍자라고 해야 옳겠다.

 

우리 사회에 대한 풍자. 말들이 지닌 발음의 유사성을 가지고 전혀 다른 뜻을 만들어내는.

 

그 중 한 가지를 보면 시에 나온 세계가 시집에 갇힌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겪는 바로 그런 세계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풍자의 진면목이 나타나는 순간.

 

소문들이 사실로 드러나는 순간, 그 순간, 우리는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소문들 연작시 지금 읽어도 우리 사회를 느낄 수 있다.

 

이 시집은 운율을 생각한다기보다는 머리 속으로 사회의 모습을 그리면서 읽어야 한다.

 

언어로 풍자하는 세상, 그리고 언어로 만들어가는 세상에 대해서.

 

덧글

 

시를 인용하고 싶었으나 한자어를 찾아내기 힘들어 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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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불행한 이에게 - 카프카의 편지 1900~1924 카프카 전집 7
프란츠 카프카 지음, 서용좌 옮김 / 솔출판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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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는 개인의 드러나지 않은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1900년에서부터 1924년 그가 죽기까지 여러 사람들에게 보냈던 편지의 모음이다. 중간에 사라져버린 것도 있고, 또 다른 책으로 펴내기 위해 뺀 편지도 있지만, 알려진 주요 인물들에게 보낸 편지 모음집이다.

 

읽으면서 우선 부러웠던 점 하나는 친구들이 이렇게 평생토록 함께 할 수 있었다는 사실.

 

우리나라 옛어른들도 친구들, 또는 다른 사람들과 왕래한 서신을 모아 서간집을 펴내기도 했지만, 요즘은 편지가 거의 사라져가고 있으니 말이다.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우체통이 거의 사라졌으며, 종이에 정성들여 글을 써서 우표를 붙이고, 우체통에 넣는 모습도 사라졌다.

 

여기에 받은 편지를 모아두는 면장철이라는 것도 요즘으 거의 쓰지 않는다.

 

이렇듯 우리는 바른 속도로 살아가는데 익숙해져 버리고 말았는데...

 

너무도 빨라서 이메일도 느리다고 카.톡이라든지, 또는 핸드폰 문자메시지의 짧은 문장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긴 글을 쓰는 일이 과거로 사라져버린 지금, 그 과거가 내 눈 앞에서 펼쳐졌으니 부러울밖에.

 

또 하나 생각나는 점은 그가 자신의 권리주장에는 철저했다는 사실. 월급이나 승진에 관해서 자신이 속한 공사에 보낸 편지를 보아서는 그렇다.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는 모습, 이게 당연한데, 왜 낯설게 느껴지는지.

 

노동교육을 받아보지 못한, 아직까지도 노동조합을 무슨 이상한 단체 취급하는 자본가들이 만연하는 사회에서 살아서 그런가...

 

내용이 너무 방대하다. 하긴 사람이 24년간 쓴 편지를 모았으니 방대하기는 하겠지만, 참...

 

약혼녀였던 펠리체에게 쓴 것과 그의 작품을 번역했던 밀레나에게 쓴 것은 빠졌는데도 편지 분량으로면 900쪽이 넘는다.

 

그래도 카프카란 사람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어서 좋았다고나 할까.

 

카프카에 빠져 지내는 요즈음이다. 앞으로 몇 권 더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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