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혁명 1 - 학습부진 탈출편 뇌기반교육 교수과학 시리즈 1
에릭 젠슨 지음, 이찬승.김성우 옮김 / 교육을바꾸는책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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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수업을 잘하고 싶지 않은 교사가 있을까? 공부를 잘하고 싶지 않은 학생이 있을까? 자기 학교가 좋은 학교라고 소문내고 싶지 않은 교장이 있을까? 자신의 교육구가 좋은 교육구라고 자랑스러워하지 않을 교육감이 있을까? 자기 나라의 교육이 잘되었다고 자부심을 갖고 싶지 않을 교육부(우리나라는 교과부) 장관이 있을까? 교육에 성공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 대통령이 있을까?

 

답은, 없다. 다들 교육에 관해서는 좋은 소리를 듣고 싶어하고, 칭찬을 받고 싶어하고, 자랑스러워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게 잘 안된다. 교육에 적응하지 못하고 뛰쳐나가는 학생들, 학교 가는 일이 하루하루 고역인 교사들, 오로지 더 좋은 자리만을 찾아 가고자 하는 교장들, 자신의 교육구가 너무도 방대해 무엇을 해야 할지 감을 잘 못 잡는 교육감들, 교육현실과는 동떨어진 정책을 펴서 여러 군데에서 지탄을 받는 교과부 장관,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말만 하지만, 교육 분야에 우선을 두지 않는 대통령. 이게 현실이다.

 

한 직장에서 10년, 20년, 30년 근무하다 보면 전문가로서 인정도 받고, 자부심도 느끼게 된다는데, 우리나라 교육현장은 오히려 나이 든 교사들을 무능하다고, 아이들과 맞지 않는다고 배쳑하고 있지 않은가.

 

또 학생들은 도대체 왜 배워야 하는지, 학교를 왜 다녀야 하는지 의미를 찾지 못해 마지못해 시간을 때우러 오고, 시간을 때우러 오다보니 학교에서 온갖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게 되고, 여기에 학생들은 더욱 학교를 싫어하고, 오직 학교란, 부모가 가라고 해서 할 수 없이 오는 곳으로 전락하고 말았지 않은가.

 

자꾸 부정적인 얘기를 하지 말자고 생각하면서도, 교육 문제만 나오면 부정적이 된다. 이러면 안되는데... 부정은 스트레스를 가중시키고, 스트레스는 다시 부정을 강화하니,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교육은 정말 가능성이 없어진다.

 

이렇게 하지 말고, 자그마한 긍정이라도 하나씩 찾아보자. 아니, 자그마한 긍정이 아니라, 엄청난 긍정이 숨어있을 수 있다. 그것을 아직 찾지 못했을 뿐. 어쩌면 찾으려고도 하지 않았을 뿐.

 

이 책은 이러한 긍정에서 시작한다. 더구나 요즘은 과학이 발달하여, 우리들의 뇌를 친절하게 보여주기까지 하지 않는가. 뇌에 기반한 교육을 한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좋은 교육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이렇게 하여 큰 성과를 거둔 학교들도 많지 않은가.

 

안된다. 안된다 하지 말고, 최신의 과학을 이용하자. 뇌는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는 것이 요즘 과학계의 정설 아닌가. 그렇다면 "넌 안 돼" 라는 말은 성립할 수가 없다. 뇌는 환경이나 자극에 따라서 충분히 변화가 가능하니 말이다.

 

특히 사회경제적인 요소로 인해 어릴 적 배우지 못한, 자세를 갖추지 못한 아이들에게, "넌 원래 그런 놈이야."라는 생각은 잘못되었고, "네가 이러는 건 지금까지 네가 이런 일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지금부터 해도 충분히 할 수 있어." 라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고 한다.

 

따라서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운 빈곤층 자녀들이 많은 학교에서, 힘들다, 힘들다만 하고 변화를 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던 점을 문제로 제기하고 충분히 할 수 있음을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사의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교사들이 학교 생활을 즐거워하고, 책임감을 지닐 수 있는 환경을 우선 조성해 주고, 이 교사들에게 뇌에 기반한 교수법을 알게 함으로써, 학생들의 지금 상태가 고정불변이 아니라, 교사가 하기에 따라서는 언제든 변할 수 있음을 인식시켜야 한다고 한다.

 

교사가 변하면, 변한 교사에 의해서 학생과 교사 간의 관계도 변한다. 서로 신뢰관계가 쌓이면 자연스레 학습에도 흥미를 갖게 된다. 이 때 교사가 조금만 더 노력한다면 충분히 지금까지의 퇴보를 만회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 노력 중에 기억나는 것은 예,체능을 강화하라는 것, 그리고 심화학습을 하라는 것, 긍정적인 환경을 만들어주라는 것 등이다.

 

우라나라도 지금 예체능을 강조하고 있는데, 여건도 안된 상태에서 체육활동을 늘이라고 해 문제가 되고 있긴 하지만, 체육활동은 학생들에게 필요하고, 또 공부에 필요한 것은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미술과 음악 역시 학생들의 정서 뿐만이 아니라 학습에도 필수적이라는 것을... 또한 너희들 수준은 이 정도야에서 그치지 말고, 한 단계 놓은 학습을 하도록 유도하는 심화학습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더 높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을 하다보면 그보다 낮은 단계의 학습은 자연스레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감도 갖게 되고.

 

빈곤층 학생들에게 필요한 일은 바로 이러한 자신감, 자존감, 그리고 할 수 있다는 희망, 무엇을 하겠다는 꿈 등을 지지하고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학교 환경이다. 

 

하여 이 책은 뇌에 기반한 교육을 한다고 하지만, 뇌에 대해 복잡한 설명을 하지는 않는다. 단지, 예체능이 뇌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 희망, 꿈, 긍정이 뇌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 한 단계 높은 학습이 뇌를 발전시킨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그러면서 학교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과, 학급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며 보여주고 있다.

 

혁신학교가 유행하고 있는 이 때, 단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학생들의 발전을 위해서 지금의 혁신학교에서 하는 일에, 이 책에 나온 방법들을 더한다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받아들이자는 얘기는 아니다. 이 책에서는 체육 시간 다음에 어려운 교과를 배치하면 더 효과적이라고 했는데.. 우리나라 현실에서도 이것이 맞을까는 의문이다. 내 기억을 살피면 체육 시간 다음에 우리는 진이 빠져 그 다음 시간에 집중할 수가 없었는데 말이다. 단, 체육 시간 다음에 충분한 휴식 시간이 있다면 가능하겠단 생각은 들었다. 최소한 땀을 뻘뻘 흘렸으면 샤워는 하고 수업을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학교 환경이 개선이 된다면 이 책에서 말한 이런 내용은 타당성이 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늘.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내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좋지 않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교육의 방법에 관한 책은 좋은 참고자료이다. 이것을 참고해서 교사들이, 교장들이, 교육감들이 자신이 처한 현실에 맞게 변형하여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좋은 참고자료가 하나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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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시원하게... 

땅도 적시고, 나무들도, 풀들도, 그리고 따끈하게 데워져 있는 강물들도, 열로 확확 달궈져 있는 콘크리트, 아스팔트들도 적시고, 무더위에 지쳐 있는 사람들 몸도 마음도 적시게.

 

그런데 하늘은 여전히 파랗다. 파란 하늘이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지 못하고 있다. 오죽하면 이 무더위 때문에 태풍도 피해간다고 하지 않는가.

 

거기에 강들은 녹색으로 덮이고 있다고 하고... 더위에는 장사 없다. 오뉴월 늘어진 개처럼 우리들도 늘어질 수밖에 없다. 이젠 시원한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마음이 시원해질 수 있는 시가 무엇이 있을까 책장을 훑어본다. 어떤 시를 읽으면 조금이라도 시원해질 수 있을까. 난해한 시는 제외한다. 머리를 써야 하고, 그 시를 갖고 고민해 빠져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덥다. 이럴 땐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시, 그런 시가 오히려 마음을 시원하게 해 줄 수 있다.

 

그렇다면 별로 망설이지 않는다. 서정홍의 시집이다. 무엇이 있나? 찾아보니 두 권이 있다.

"58년 개띠""내가 가장 착해질 때"

 

사실, 이 더위에 신경질이 많이 늘었다. 그럴 때 '내가 가장 착해질 때'라는 시는 어떨까? 어떨 때 가장 착해질까? 시인은 우리의 예상과 다르게 이야기한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면 맞다. 이럴 때 우리는 착해지고, 또 더위로 인한 짜증도 누구러뜨릴 수 있다. 요즘 도시에서는 참 하기 힘든 일이지만.

 

     내가 가장 착해질 때

 

 

이랑을 만들고

 

흙을 만지며

 

씨를 뿌릴 때

 

나는 저절로 착해진다.

 

서정홍, 내가 가장 착해질 때, 나라말, 2008. 초판. 내가 가장 착해질 때 전문

 

흙과 더불어 사는 사람, 착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얼마나 흙에서 멀어져 왔는가. 흙에서 멀어져 온 결과가 이렇게 더위를 더욱 더 심하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서정홍 시인의 이 두 시집은 각기 다른 생활을 그리고 있다. "58년 개띠"는 좀더 시인이 젊었을 때 낸 시집으로 이 시집의 주요 배경은 공단이다. 노동자의 삶이다. 그는 노동자로 오랫동안 일해왔다. 그래서 이 시집에는 노동하는 사람들의 진솔한 삶들이 시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반대로 일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이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극명하게 대조되어 나타난다.

 

시인은 자신을 출세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출세는 우리가 말하는 출세와는 다르다. 그의 시집 제목이 되기도 한 '58년 개띠'라는 시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 황금을 다 준다 해도 / 맞바꿀 수 없는 / 노동자가 되어 / 땀 흘리며 살고 있다.

 

갑근세 주민세 / 한 푼 깎거나 / 날짜 하루 어긴 일 없고 / 공짜 술 얻어먹거나 / 돈 떼어먹은 일 한 번 없고

 

어느 누구한테서도 / 노동의 대가 훔친 일 없고 / 바가지씌워 배부르게 살지 않았으니 / 나는 지금 '출세'하여 잘 살고 있다.

 

서정홍, 58년 개띠, 보리, 2003 고침판 1쇄. 58년 개띠 5-7연에서

 

말 그대로 세상에 나와 세상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살고 있는 모습이 시에 나타나 있다. 그런 시인이기에 없는 사람, 힘든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하다. 반면에 있으면서도 군림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고 있다. 여기에 있는 체하는 사람들까지도.

 

하여 시인은 시란 어렵게 써서는 안된다고 한다. 바로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 노동을 하는 사람들, 노동자이건 농민이건 어리건 나이 들었건 모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써야 한다고 한다. 그의 유명한 시 '우리말 사랑1-4'를 보면 이런 시인의 생각이 너무도 잘 나타나 있다.

그래, 그래, 시는 이래야 해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내가 가장 착해질 때"는 시인이 농사를 지으면서 농부로 살아가면서 이웃과 함께 어울리고 느꼈던 점들을 그려내고 있다. 노동자 시절에도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았던 시인이 농민으로 살아가면서, 흙과 같은 이웃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더욱 따뜻해지고 있다. 이 따뜻함이 무더위에 시원함으로 다가온다.

 

여기에 두 시집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아내에 대한 사랑,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가족이란 무엇인가, 진정 행복한 가족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한다.

 

바로 우리 이웃이 곁에 있는 것처럼, 때로는 미소를 머금게 하고, 때로는 눈물을 짓게 하는 시들이 넘쳐나고 있다. 어느 한 시 어렵지 않고, 그렇다고 가볍지 않고... 곁에 두고 언제든지 펼쳐보아도 좋은 시들이다.

 

서정홍 시인이 생각하는 시인으로 마무리 한다.  

 

시인이란

 

시인이란

쉬운 걸

어렵게 쓰는 사람이 아니라

어려운 걸

쉽게 쓰는 사람이다.

서정홍, 내가 가장 착해질 때, 나라말, 초판, 시인이란 전문

 

 

시인

 

그저 바로처럼

외롭고 눈물 많은

사람입니다.

 

그 눈물로

세상을 적시고 싶은

사람입니다.

서정홍, 내가 가장 착해질 때, 나라말, 초판, 시인 전문

 

서정홍 시인의 시가 내 마음을 시원하게 적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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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조해야 할 것
수잔 손택 지음, 김유경 옮김 / 이후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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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작가이자, 비평가, 연출가로 알려져 있는 손택이다시피, 다방면에 박식하다. 이렇게 많이 알고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것을 글로 써낸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여기에는 영미 문학(문화) 또는 서양 문학(문화)에 대해서 무지한 내 자신의 상태가 그를 더 대단하게 보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손택이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 중에 솔직히 읽은 게 없다고 해야 하나? 이거야 우리가 세계문학에서 다뤘던 사람들을 이야기하지 않고, 아직은 우리나라에 덜 알려진 작가들을 그들의 위대함을 찾아내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하니, 내 무지가 그냥 무지가 아님을 위안하여도 되는지...

 

내가 본 것들, 내가 읽은 것들, 그곳과 이곳으로 나누어져 있는 책이다. 각 부마다 나름대로의 일관성은 있지만, 굳이 이렇게 묶을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짜피 안 보고, 안 읽고, 못 가본 곳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손택의 글은 읽을 만하다. 그 이유는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남들과 같은 시선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시선을 가지고 어떻게 대상을 바라보는지를 손택을 통해서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1부에서는 주로 무용과 영화와 그림 등에 대한 이야기라면, 그를 통해서 우리는 이러한 문화적인 대상을 감상할 때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때로는 지루하기도 하고, 뭔 얘기인지, 원 작품을 알 수 없으니 그냥 손택의 논의를 따라가는 것이 좀 짜증나기도 하지만... 방향을 바꾸어서 작품에 접근하는 방식이 어떠한지 파악하는 방법으로 읽으면 읽을 만하다.

 

2부는 그래도 1부보다는 조금 친숙하다. 문학 이야기니 말이다. 물론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작가에 대한 이야기다. 그렇다고 해도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이미 우리에게도 친숙한 것 아니던가. 여기에서 가장 기억에 부분은 구절은 읽기와 쓰기에 관한 부분이다. 작가는 쓰는 사람이라 읽지 않는다고 하는 작가들에 대해 손택은 자신은 작가이기에 읽는다고 말한다. 쓰기 위한 행위를 하기 위해서 먼저 읽을 수밖에 없다고.

 

우리나라에서도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좋은 시들을 많이 읽어라라고 답한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마찬가지다. 글쓰기에 대한 자세는 동양이건 서양이건 나름대로 자기만의 스타일을 확립한 사람들은 글쓰기만을 고집하지 않느다. 그렇게 쓰기까지는 얼마나 많이 읽어야 했는가. 또 읽을 것인가.

 

그래서 손택은 자신의 작품을 자신이 읽을 수 있어야 좋은 작가라고 말하는 듯이다. 작가에게 눈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 글 하나만으로도 손택의 이 책은 나에게 의미가 있다.

 

3부는 그곳과 이곳이다. 이분법으로 갈려진 세상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이분법으로 갈라놓으려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게다. 손택은.

 

여기서는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도 하지만, 사실 여행이란 이곳과 그곳을 극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요소이니 말이다. 예전에는 그곳을 야만의 장소로, 다시 우리가 도달해야 할 이상의 장소로 인식했던 여행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주요 내용은 사라예보에서 있었던 일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내전(사실 내전이라는 말보다는 학살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이 한창인 사라예보에서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했던 일을 중심으로 그곳과 이곳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우리는 그곳을 배제의 장소로 이곳과는 다른 장소로 인식하기 위해서 그곳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어느 곳이나 다 사람이 살 수 있는 곳,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라는 사실. 그리고 평소에 말이 많던 지식인들이 그곳에 대해서는 왜 입을 다물고 있었는가 하는 사실.

 

그곳에 대해서 약간의 지식이 있었던 나는 손택의 이 글이 가슴에 와닿았다. 멀리서 그곳이라고 지칭했을 땐 이미 그곳과 이곳은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 지금 우리도 그곳이라고 부르는 장소가 한둘이 아니지 않은가.

 

먼 나라,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얘기라는 생각이 들어서 많이 부끄러웠다. 나 역시 그곳은 이곳과 다른 곳으로 구분짓고, 나는 안전한 이곳에서 그곳을 방관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 나를 반성하게 만든 글이다.

 

그래서 이 책은 뒷부분으로 갈수록 흥미를 끈다. 생각할거리를 제공해 준다. 손택의 글들이 참 자유분방하게 쓰였다는 생각이 들지만(번역의 문제는 아닐테고), 읽으면서 마음이 콕콕 박히는 글들이 있다. 그 점이 손택의 글을 읽게 하는 점인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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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덥다, 더워. 이 말도 이제는 상투어가 되어 버렸다. 같은 말도 자꾸 하면 효력이 떨어지는데...이제는 더위를 몸이 받아들여야 하는지... 더위에 계속 시집을 읽고 있다. 어쩌면 이 여름이 가기 전까지는 계속 읽을 수밖에 없으리라.

 

이 더위에 방학을 생각한다.

만약 방학이 없었다면 학생은 어떻게 지낼까? 나는 학생 때 방학이 없었다면 견딜 수 있었을까? 내 어릴 때는 여름이 견디기 더 쉬웠다. 젊어서였을까? 여름엔 놀 거리들이 풍부했고, 해는 길었으며 우리는 힘이 넘쳐났다. 더위 쯤이야 땀 한 번 뻘뻘 흘리고, 냇가에 가서 물에 한 번 풍덩 들어갔다 나오면 됐는데... 그래도 방학이 없는 학교는 상상도 하기 싫었다.

 

하지만 지금, 아이들에게 방학이 있는가? 방학 때 더위를 식힐 만한 곳이 있는가? 또 놀 시간이 있는가? 밖에 나가보면 학원을 마치고 나오는 아이들, 학원으로 가는 아이들, 그리고 길가에 주욱 늘어서 있는 학원 차량들이 보인다. 이 아이들에겐 방학도 공부를 할 수밖에 없는 기간이구나. 하여 이 아이들은 방학을 이중으로 받아야 한다. 학교에서 하는 방학과 학원에서 하는 방학.

 

덥다고 공부를 안 할 수야 없지만, 적어도 방학기간 만큼은 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밖에 능소화가 지천으로 피어 있다. 이상하다. 예전에는 잘 보이지 않던 능소화가 요즘은 왜이리도 잘 보이는지... 여름이면, 아니 여름이 되기 전부터 여름까지 능소화는 그 주황색의 꽃을 우리게에 보여준다.

 

담장을 넘어서든지, 아니면 가로수 옆을 타고서든지, 예전엔 양반꽃이라고 했다던데... 양반이 국민의 대다수가 되고, 이제는 아예 없어진 사회를 반영하는지, 우리에게 이 능소화는 잘 보인다. 그래 야안과 상민이 어디 있고, 꽃 중에 양반꽃이 어디 있어.

 

길을 걷다가 능소화를 보고 눈이 즐거워지고, 더위를 잠깐 잊기도 한다. 이 더운 여름에 저 꽃들은 그래도 잘 버티고 있구나. 나도 버텨야지 하면서.

 

윤재철의 "능소화"란 시집을 펼치다. 반성 시리즈 두 권을 읽었더니... 갑자기 학생들이 생각이 나고, 풍요로움 속의 비루함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집단이 학생들 아니던가. 윤재철 시인이 교사라는 생각과, 예전에 이 시집에서 매우 많은 학교 관련 시들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펼쳐보다.

 

그래 방학이란 본래 학교를 놓아버리는 기간인데... 학생들은 학교를 놓아버리되, 학원을 놓아버리지 못했고, 이들은 공부와 비슷하지만 공부는 아닌 공부를 하느라 이토록 고생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 

 

시집에는 시인의 개인적인 체험도, 생각도, 서정도 담겨 있지만, 학생에 중점을 두고 읽은 이 시는 2부가 압권이다. 우리나라 학교의 모습이 시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래 이게 바로 학교다. 이게 바로 우리 교육현실이다. 

 

획일화, 경쟁, 생각 하지 않음, 통제, 일방적 지시 등등.

 

다양성, 협동, 생각 함, 자율, 토의와 토론을 통한 일처리 등등은 사라지고 없다. 참 암울한 모습이다. 이 암울한 모습 속에서 시인은 그래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고 한다. 제도를 바꾸려고 투쟁하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지만, 그래도 이 아이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준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한다.

 

하여 오히려 그런 시들 속에서 우리는 교육 현실이 잘못되었음을, 반드시 바뀌어야 함을 인식하게 된다. 슬픈 교육현실, 그 현실을 더위 속에서도 피어나 자신의 모습을 알리고 있는 능소화란 제목의 시에 담고 있다. 그래서 슬프다. 덥다. 그렇지만, 꽃은 피어나고, 학생들은 자라난다. 덥다고 나가떨어지지 않고, 물방울 하나 떨어뜨려 주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교사 아니던가.

 

이 시에 나타난 학교 현실을 보자. 우선 시험 때 이런 학생이 있다.

'중간 고사 수학 시험지 받자 마자 / 쭉 한번 훑어보더니 / 번호 이름 쓰고 그냥 엎드려 잔다'('지성이' 1-3행) 특별한 아이인가. 아니다. 학교에서 시험 때면 볼 수 있는 흔하디 흔한 모습이다.

 

여기에 '교문 지도 하는데 / 한 녀석이 반은 사복이고 반은 교복인 채 / 가방도 없이 쓰레빠만 신고 들어오길래'(겁먹은 송아지 1-3행) 이런 학생도 있고,

'공부하는 놈들은 처음부터 젖혀 두고 / 힘자랑 하는 놈들끼리 / 서로 다른 중학교 출신들끼리 / 불알을 늘어뜨리고 눈 부라리며 / 뿔싸움을 한다'(각축 2연)고 학기 초면 어김없이 벌어지는 순위 정하기 싸움이 있으며,

'환호작약 해방/ 더러는 이리 튀고 저리 튀며 / 식용유 붓고 밀가루 뿌리고 / 교복을 찢는다'(졸업식 2연)고 뉴스에도 나왔던 졸업식 모습도 보이고,

'학교에는 1,710개 번호가 산다네 / 컴퓨터도 이름은 모른다네 / 단지 오엠알 카드 까맣게 칠한 / 번호로 1,710명 얼굴을 기억한다네 / 학교에는 번호들이 하루 종일을 모여 산다네'(번호들의 세상 마지막 연)이라고 익명으로, 이름으로 존재하지 않고 번호로 존재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이름이 아닌 번호로 지내는 아이들, 비대화된 학교의 비인간적인 모습 아니던가. 우리는 작은 학교를 추구해야 하는데,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작은 학교을 없애려고 하는 모습은 교육과는 배치되는 모습 아니던가.

 

이 밖에도 학생부에 끌려와 부모님이 빌고 있는 모습과 머리카락을 왜 단속하는지 모르겠다는 아이들, 매점에서는 살아있는 아이들, 수능 때 몇 십만의 아이들이 똑같은 자세로 대기하고 있는 그 비인간적인 모습이 이 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렇다고 시인은 이것들을 어떻게 고치자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는 이 사실들을 사실적으로 우리에게 교사인 시적 화자의 눈을 통해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때로는 본다는 것이 큰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 보여지길 꺼려하는 것들을 보여주는 일, 이 또한 시인의 일이 아니겠는가. 자, 어떻게 바꾸어갈 것인지는 우리 몫이고, 시인은 이런 학교의 현실을, 생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지금 아이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시 한 편. 과연 이것이 아이티 강국의 모습일까. 생각해 보자.

 

내공

 

휴대폰을 늘 손에 달고 다니며

틈만 나면 귀신 같은 손놀림으로

자판 눌러대는 아이들을 보면

엠피 쓰리 귀에 꽂고 볼펜 돌려가며

시험 공부하는 아이들을 보면

내가 허전하다

 

도무지 혼자 있지 못하는 아이들

아이티 상품이 없으면 젖꼭지 빼앗긴 듯

외롭고 쓸쓸한 아이들

수염은 거뭇거뭇 덩치는 코끼리만 한 녀석들이

손바닥보다 작은 아이티 기기 속에 파묻혀

없다

 

옛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농경 문화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만 안테나 달고

도무지 내공이 없는 아이들을 보면

아이들이 허전하다

이 문명이 참으로 허전하다

 

윤재철, 능소화, 솔, 2007. 내공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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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를 벗어야 언론이 산다 - 한국 언론의 보도 관행과 저널리즘의 위기
박창섭 지음 / 서해문집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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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은 제 4부라고도 한다. 그만큼 정치와 밀접히 관련이 있는 집단이다. 행정, 입법, 사법에 이어 언론이라는 4부가 제 구실을 해야지만 민주주의가 잘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4부가 잘 이루어질까? 우리나라 행정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입법을 관장하고 있는 국회가 정상적으로 굴러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지, 그리고 사법부는 올해 대법관 임명 청문회로 인해 홍역을 치르지 않았던가. 

 

여기에 언론은 자유로운가? 이렇게 질문을 던지자. 과연 언론은 공정하고 진실한 보도를 하고 있는가. 언론인들은 지식인으로서, 또 언론인으로서 자신들의 책임을 인식하고 책임있는 보도를 하려고 하고 있는가?

 

사람들이 신문을 안 본 지, 뉴스를 멀리한 지 오래되었다고 하는 말을 들어본 적은 있는가? 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언론에 "야마"라는 게 있단다. 처음 듣는 말이다. 하긴 이는 언론인들끼리 은어처럼 사용하는 말이라고 하니, 그리고 국어사전에 등재되어 있지도 않은 말이니, 언론인과 접촉이 없는 내가 이 말을 들었을 리가 없다. 내가 아는 야마는 기껏해야 일본어로 '산'이거나 우리가 비속어로 쓰는 '야마가 돈다'는 말밖에는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야마'란 말이 언론에서는 너무도 광범위하게, 그러나 중요하게 쓰이고 있단다. 이 '야마'가 없으면 기사가 되지 않는단다. 도대체 '야마'가 뭘까? 딱부러지게 사전식으로 정리할 수 없다. 이 책의 저자도 기자 생활을 16년 했고, 저널리즘을 공부했으며, "야마"를 가지고 책을 썼음에도 '야마'란 말을 무엇이라고 간단하게 정의할 수는 없다고 한다.

 

다만, 이 '야마'란 말은 보도의 내용과 관점, 의도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66쪽), 내용 야마, 관점 야마, 의도 야마(67쪽)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즉 기사에 깔려 있는 내용과 그 내용을 선정하게 된 관점, 그리고 그 기사를 내보낸 의도 등을 종합적으로 '야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쉽게 '틀'이라는 말로도 할 수 있는데, 이 틀보다는 더 정교하게 기사를 규정하는 존재가 '야마'라고 할 수 있다.

 

'야마'에 대한 이러한 정의를 바탕으로 각 신문사마다 어떻게 이런 야마가 작동하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사실, 야마에 따라서 관점이 달라지며, 의도가 달라지기에 내용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이러므로 같은 사안이라도 기자가 취급하는 취재원부터, 사실들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가 된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야마의 구현 방식을 살피기 위해 우리 사회에서 쟁점이 되었던 두 가지 사안을 예로 들어서 각 신문사의 야마를 파악하고 있다.

 

두 개의 사안 중 하나는 미디어법안이고, 또 다른 하나는 무상급식안이다. 이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그리고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 중립적인 성향의 한국일보를 대상으로 어떻게 기사화되었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이를 읽다보면 같은 사안인데도 이렇게 차이가 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내가 어떤 신문을 보는지에 따라서 내 관점도 알게 모르게 조정당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 사실 정보화시대라고 하지만, 어떤 특정한 사안에 대해서 여러 언론에서 정보를 얻는 사람은 이 책에서도 나와 있지만 13%정도라고 하고(305쪽) 있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가지 매체에서 정보를 얻는다는 얘기가 된다. 나역시 마찬가지고.

 

그렇다면 자신이 어떤 신문을 보느냐에 따라 즉 그 신문사의 "야마"에 따라 자신의 관점이 고정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이런 점을 깨닫게 해준 점이 이 책이 지닌 장점이다.

 

언론의 사명을 '진실'과 '공정'이라고 한다는데, 우리가 진실과 공정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읽는 독자인 우리들이 깨어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 독자들이 깨어있어야 언론들이 진실과 공정 보도를 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역으로 깨달았다고나 할까.

 

이책의 말을 받아 정리하면 이렇다, '야마'를 벗어야 언론이 산다. 마찬가지로 언론이 살아야 정치가 산다. 정치가 살아야 민주주의가 산다. 민주주의가 살아야 우리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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