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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 문서고와 증인 ㅣ What's Up 10
조르조 아감벤 지음, 정문영 옮김 / 새물결 / 2012년 1월
평점 :
말로 표현하기 힘든 현실, 그래서 가능하지 않아야 했던 일이 가능했던 아우슈비츠...
아우슈비츠는 대량학살을 대표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냥 대량학살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죽 했으면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는 불가능하다는 아도르노의 말도 있겠는가.
하지만, 아우슈비츠는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고, 또한 아직도 가능태이다. 누가 아우슈비츠가 단지 과거의 일이라고만 치부할 수 있겠는가.
세계 도처에서 우리는 아우슈비츠를 경험했고, 또한 우리 역시 경험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한 사람들이란 말인가.
단지 이 말을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라고 해야 하나.
그 말로는 이 말이 지닌 의미가 다해질 수 없단 생각이 든다.
아우슈비츠의 증인과 증언과 그리고 무슬림, 부끄러움과 주체, 문서고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그다지 두껍지 않은 이 책이지만, 내용은 참 무겁다. 그리고 어렵다.
철학에 약해서인지 몰라도, 언어에 대한 지식이 얇아서인지 몰라도 이 책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무슨 흥미거리로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다간 큰 코 다친다.
최소한 윤리와 법에 대해서, 그리고 말들의 어원에 대해서 언어학에 대해서, 푸코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한다. 아니, 꼭 알고 있어야 한단 법은 없지만, 알고 있으면 읽기에 유리하다는 얘기다.
이런 지식이 옅은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힘든 책이었는데... 그래서 내 나름대로의 해석에 오독이 많겠지만, 어쩌랴 책은 오독을 필수로 한다는 얘기로 위안을 삼으며...
살아남은 자의 슬픔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더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 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한마당, 1994 개정판 3쇄. 살아남은 자의 슬픔
첫 장을 읽으면서 이 시가 생각났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말하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서 말을 대신 해주는 사람, 그들이 바로 살아남은 자들이다. 그렇다면 말하지 못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소위 무슬림이라고 하는, 이 책에서는 이슬람교도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가장 비참한 수용소 생활을 하고, 결국은 대부분이 죽어나간 사람들이다. 정말로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이다.
이들은 수용소에서 극한의 생활을 했고,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생활을 했는데, 비인간과 인간이 함께 존재했던 공간, 인간이 비인간이 되고, 다시 비인간이 인간이 된 공간에서 증인은 누구여야 하는가. 당연히 이슬람교도들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증언을 할 수가 없다.
증언을 할 수가 없으면, 현실이 현실이 아니게 되는가. 과연 그런가. 그러나 말해지지 못하는 일이 현실로 계속 존재할 수 있을까. 과거가 현재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에게는 언어가 필요하다. 즉 언어로 말해져야 한다. 아니 인간이 언어로 말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인간이다.
여기서 증인이 필요하다. 그 일에 대해서 증언을 해줄 사람, 증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주체성을 회복한 사람이다. 주체성이 없는 사람은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존재, 즉 이 책에서 말하는 이슬람교도에 불과하다. 그래서 주체성을 지닌 사람은 언어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고, 이는 부끄러움을 알 수 있는 사람이다.
즉, 부끄러움을 알 수 있다는 얘기는 주체성이 있다는 얘기가 되고, 어떤 일에 대해서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단 뜻이 된다. 그 사람이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를 하는 과정, 이것이 바로 증언이다. 우리는 이런 증언을 통해 아우슈비츠를 비현실에서 현실로 끌어오게 된다.
현실로 끌어온 아우슈비츠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환기시켜준다. 우리가 기억을 되살리는 이유는 과거를 현재로 끌어와 미래로 나아가는 힘으로 삼으려고 하는데 있다. 그냥 문서고에 저장하는 지식으로 과거를 끌어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이슬람교도들처럼 인간이 아닌 비인간의 극한까지 갔던 사람이 증언을 하지 못한다면 과연 그것을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또 그 증언이 얼마나 우리에게 다가오는가. 그들 역시 브레히트의 시에 나온 것처럼 부끄러움을 아는, 그러나 죽어가는 자들에게는 강한 사람으로 인식되는 존재 아니겠는가.
그래서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과, 이슬람교도들이 하는 증언의 간극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되는데...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증언을 할 수 없다고 여겨졌던 이슬람교도들의 증언이 실려 있다.
아우슈비츠의 진정한 증언은 이슬람교도들이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 이 책에서 실현이 되고 있다고 해야 하는지....
우리나라에 아우슈비츠(또는 죽음의 수용소)에 관한 책들은 제법 된다. 만화로는 "쥐1,2"가 있고, 책으로는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있다. 이들을 생각하면서 이 책을 읽으면 굳이 철학이나 언어학에 대한 지식이 얕더라도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법과 윤리의 문제가 이 책에 나오는데, 지금 이 시대는 어쩌면 법이 모든 것을 좌우하고 윤리가 쇠퇴한데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여기서도 언급이 되었지만, 그 유명한 아이히만의 주장도 역시 법적으로는 자신은 무죄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죄가 있다는 말, 이는 현대의 병폐이지 않을까 한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우리들은 법보다는 윤리를 회복하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윤리가 회복이 된다면, 아우슈비츠는 과거의 기억에서 우리를 추동하는 힘으로 작동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왜 사람이되 사람으로 취급받지 않는 사람들을 이슬람교도라고 했을까. 유대인들은 죽어가면서도 이슬람교도들을 자신들보다 열등한 존재로 취급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참...... 이슬람교도란 번역이 자꾸 거슬렸는데... 무슬림이 이슬람교도들이니 어쩔 수 없지만, 종족 차별로 죽어가면서도 또다른 종족을 끌어들이다니... 이것이 인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