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하반기에 들어와서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선정적인 내용이 지나치게 많아졌단 생각이 들었다.

 

이 방송 저 방송 가릴 것 없이 내용이 비슷하고 별 차이도 없는데...

 

정작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내용은 방송이 되지 않고, 사건 사고들만 내리 방송이 되고 있었는데...

 

왜 저럴까? 저것 말고도 뉴스거리가 훨씬 많을텐데...

 

우리 삶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사건사고들로 도배를 하다니...

 

여기에 뉴스인데 영화소개를 한다든지, 대중가요, 대중가수 홍보를 한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건강정보랍시고 온갖 병들을 들이대 공포분위기를 조성한다.

 

이게 뉴스의 전부인가? 경제적인 정치적인 사회적인 다른 문제들, 좀더 우리 삶을 윤택하게 할 수 있는 문제들을 다룰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

 

여기에 생각나는 책이 부르디외의 "텔레비전에 대하여"였는데...

 

읽은 지 오래되어 다시 읽어보니, 사회학자답게 텔레비전에 대한 이야기를 사회구조 문제까지 생각하면서 언급하고 있다.

 

텔레비전으로 인하여 다른 사회 문화 양상이 왜곡될 수 있으며, 텔레비전은 다른 많은 일들을 은폐하기도 하며, 또한 깊고 긴 사고를 하지 못하게 한다는 이야기가 들어있다.

 

여기에 텔레비전을 하나의 장으로 파악하고 그 장이 움직이는 구조의 문제를 들여다보도록 하고 있는데...

 

읽으면서 아, 그래... 그러니 우리나라 텔레비전도 이럴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하지만 그는 텔레비전, 시청률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텔레비전의 장에 속한 사람들을 적대자의 위치에만 놓지는 않는다.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또 함께 해야만 한다고 한다.

 

지금 텔레비전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한 텔레비전을 움직이는 요소는 부르디외가 지적했던 시청률이고, 우리를 알게 모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텔레비전을 다르게 볼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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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토론학교 : 교육과 청소년 - 학교와 배움에 대한 일곱 가지 물음 중학생 토론학교
한국철학교육연구원 지음 / 우리학교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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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을 대상으로 '토론'에 관한 책을 연속해서 내고 있다. 첫번째 책이 "문학"이었는데, 문학작품 속에 나온 상황이나 인물에 관해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게 하는 책이었다.

 

이번에 나온 "교육과 청소년"은 좀더 청소년들의 처지에 다가간다. 청소년들이 알게 모르게 인식하고 있던 문제를 밖으로 끄집어내어 생각해보라고, 그리고 말해보라고 한다.

 

즉, 토론을 해보라고 한다. 아니 토론을 하자고 한다. 왜냐하면 토론이란 나를 정립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생각을 지닌 남을 인정하고 그 인정의 바탕 위에서 나를 다시 생각해가는 과정, 그것이 바로 토론이다.

 

하여 토론이 활발하단 얘기는 편견에 빠져 있지 않다는 얘기가 된다. 자신의 의견을 정립할 줄 알고, 남 앞에서 이야기할 줄 알며, 그와 같은 비중으로 남의 이야기를 듣고 받아들일 수도 있는 태도를 갖추게 된단 얘기다.

 

그래서 토론은 교육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학생 수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아니면 입시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간 우리 교육에서 등한시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사회가 토론을 경원시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침묵의 제국, 윤휴"란 책을 읽다가 윤휴가 나중에 했다는 말, '생각이 다르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 까지야 없지 않은가'란 말, 그만큼 우리나라에서는 당쟁이 부정적으로 인식되어 있었는데, 당쟁, 즉 다른 당파와의 논쟁에서 지면 자신의 목숨을 버려야 할 정도였던 적도 있었으니, 토론보다는 두루뭉수리로 그냥 묻어가는 편이 좋다는 생각이 퍼지기도 했으리라.

 

여기에 전란을 겪으면서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은 사람이 얼마나 많았고, 지금까지 사상으로 인해 고초를 겪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하면 우리나라 교육에서 토론이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은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그러나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다. 아무리 좋은 생각도 자기 머리 속에만 있다면 쓸모가 없다는 말과 같이 자신의 생각을 정교하게 또 바르게 정립해나가는데는 반드시 남의 생각을 듣는 과정이 필요하다.

 

남의 생각을 듣고, 내 생각을 펼치는 과정, 이것이 바로 토론이며, 그래서 토론은 대등한 두 사람이(혹은 여러 사람이) 대등하게 자신의 생각을 펼쳐나가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하여 토론이 잘 된다는 얘기는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필요없이 가장 좋은 방법을 말을 통해, 토론을 통해 찾을 수 있다는 얘기도 된다.

 

이런 토론의 습관을 길러주는 역할을 교육이 해야 하고, 이는 시간이 없다, 학생수가 많다, 입시에 도움이 안된다와는 상관이 없는 문제이다. 오히려 사람답게 잘 살기 위해서는 토론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토론을 할 수 있을까? 우선 학생들 자신이 겪는 문제부터 생각하게 해야 한다. 이 책은 바로 이것을 시도하고 있다.

 

토론거리로 주어진 주제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학교를 꼭 다녀야 할까?

좋아하는 과목만 공부하면 안될까?

시험을 꼭 봐야 할까?

우리에겐 어떤 선생님이 필요할까?

남녀 합반이 좋을까 남녀 분반이 좋을까?

학생은 생활 지도를 받아야만 할까?

폭력 학생을 힘으로 막는 동아리가 생긴다면?

 

학생들의 일상과 밀접하게 관련된 주제들 아닌가? 학생들 스스로도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 아닌가? 이 문제들을 안으로 안으로 감추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드러내서 우리 공개적으로 토론해 보자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도입부분과 찬반에 관한 글들과 정리글들이 잘 배열되어 있지만, 정리글을 읽다보면 어느 한 쪽 편에 강조점을 두고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이 드는 글들도 있다.

 

그리고  한 쪽 정도 여백을 두고 자신의 생각을 쓰게 했으면 더 좋겠는데, 단편적인 생각거리를 제기하고, 종합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기회를 주지 않고 있는 점이 아쉽다. 물론 이 책이 토론글을 적은 연습책이 아니기에 그러하겠지만, 이 책의 목적이 토론을 하게 하는 데 있는지, 아니면 이런 주제를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에 있는지 조금은 헷갈린다. 그 점이 명확했으면 더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학년말에 이런 주제로 토론을 학교에서 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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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신문을 보니 이런 기사가 실려 있다. 홉스봄이 아직 살아 있었던가 싶은 생각이 들었던 건, 그가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에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역사책을 썼고, 번역도 많이 되어 있는데, 나는 읽은 책이 몇 권 되지 않았고, 또한 그의 책은 두껍고 값도 비싸서 선뜻 사기가 좀 그랬던 책이기도 했다.

 

다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정확하고 공정하게 평가하려고 했던 학자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연휴가 끝나고 온 신문에 그의 타계 소식이 실려 있다니... 내 젊은날, 영향을 준 학자들이 이제는 하나둘씩 사라져 가고 있단 생각에 세월의 무상함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으니...

 

나에게 깊은 감명을 준 그의 책은 무슨무슨 시대라는 제목이 붙은 그의 대표적인 책들보다는 작은 책이었던 "의적의 사회사"다. 그런데 이 책을 구할 수가 없다. 이제는 출판이 되지 않는지.. 여러가지로 생각할거리가 많은 책이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 작품이었던 "홍길동전"의 홍길동이나 "임꺽정"의 임꺽정을 어디에 놓아야 하나 생각하기도 했었는데...

 

단지 체제에 반항하는 부류에서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부류까지 다양하게 나타났지만, 이들이 단지 사회반항세력이 아니라 이들이 있음으로해서 사회가 조금씩 변해왔다는 것을 인식했었는데...

 

그러다 한 번 더 읽은 책이 "극단의 시대"다. 90년이 넘어서 나온 책. 우리는 극단의 시대를 거쳐 지금 여기에 있기 때문에 그 시대에 대한 고찰은 지금 여기를 인식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제 그는 격동의 시기를 지나 영면의 세계로 돌아갔다. 그가 이룬 업적들은 이 세상에 남아있을테니, 그가 편안히 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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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문화사 2 - 부르주아 문화 1830~1860 유럽 문화사 2
도널드 서순 지음, 오숙은 외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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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이 1830년부터 1880년대이고, 부제는 부르조아 문화이다. 이 시기가 산업혁명이 완수되고, 급속도로 자본주의가 세계로 확장이 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식민주의도 함께.

 

이러한 사회의 변화는 중간계층을 많이 양산해내었는데... 새로운 중간계층을 부르조아라고 한다. 요즘은 부르조아 하며 잘사는 상류계층을 의미하지만, 이 시대에는 상류계층은 귀족과 왕을 의미하고, 부르조아는 막 떠오르기 시작하는 중간계층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빠르게 사회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고, 그들이 가지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세계 문화를 선도하기 시작한다. 그들이 문화를 선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두 가지, 시간과 돈이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있기에 그들에게 맞는 무언가를 찾아야 했고, 돈이 뒷받침되기에 망설이지 않고 그들에게 맞는 문화에 투자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 부르조아 문화가 중심으로 떠오르는 시기를 서순은 1830년에서 1880년대로 잡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간 설정에 동의하게 되는데 그 이유가 이 책을 읽어보면 알게 되겠지만 문학, 음악 분야에서 우리에게 알려진 사람들이 활약한 시기가 바로 이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압도적인 분량을 문학이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문학이 인쇄술의 발달로 말미암아 더 빠르게 더 멀리 퍼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음악이나 연극과 같은 다른 문화들과는 달리 기록으로 남아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디킨스, 위고, 발자크, 뒤마 등등 세계적으로 알려진 소설가들이 이 때 등장해서 자리를 잡았으며, 탐정소설, 어린이 책과 같은 장르가 확립되었고, 또 여성이 작가로서 등장하여 인정을 받았고, 학교교육이 광범위하게 자리를 잡아 교과서 산업으로 인한 출판업이 돈을 벌게 되는 시기.. 그리고 작가들이 저작권이라는 개념을 확립하는 시기가 바로 이 시기이다.

 

음악에서도 베토벤을 비롯해, 리스트, 베르디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음악가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으며 오페라가 이 때 하나의 장르로 자리매김했다는 사실이 서술되어 있다.

 

물론 이때나 지금이나 고급예술과 대중예술로 구분하려는 시도는 있었고, 돈과 시간이 많은 사람들은 고급예술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었으나, 산업화된 사회에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려는 문화를 추구하는 경향도 나타나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이 점점 가까워져 가고 있는 현상을 보이는 시대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방대한 저술인데, 이 2권도 500쪽이 넘는데, 그래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아마도 학창시절에 머리 속에 들어와 있던 인물들이 이 책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각자 자리를 잡고 우리에게 나타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단편적으로만 기억되던 인물들이 유럽문화사라는 흐름 속에서 정리가 되어가고 있다고나 할까.

 

그 때 사회적, 경제적 환경 속에서 어떤 예술들이 중심을 잡아가고, 또 어떤 예술들이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지를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해야 할까.

 

이제는 현대에 다가간다. 3권에서는 드디어 20세기에 접어든다.

 

덧글

 

그런데 좀 이상한 부분이 있다.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설명하고 있는 부분에서,

209쪽 '선량한 매춘부 코제트, 그녀의 딸이자 순수한 절세미인 팡틴'이라고 되어 있는데, 내 기억 속에는 엄마가 팡틴이고, 딸이 코제트인데... 번역의 잘못인가, 아니면 우리나라에 번역될 때 등장인물을 바꾸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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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롤롤 2012-10-12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뿌리와이파리 편집부입니다. 아주 창피한 실수죠... 작가가 혼동했는지 원서에 엄마와 딸이 거꾸로 나와 있더군요. 실수를 발견하지 못한 저희 출판사 편집부의 잘못입니다. 2쇄를 찍으면서 수정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며칠 전에 뉴스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 진영에서 김지하 시인을 영입한다는 얘기를 했기 때문이다.

 

단지 김지하 시인을 모셔 도움을 얻겠다는 목적일까? 아니면 김지하 시인의 지명도를 업고 지지율을 더 올리겠다는 얘기인가?

 

인혁당에 대한 말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던 후보가, 그 때 대척점에 서 있던 시인을 영입하려 한다니...

 

하지만 적어도 김지하 시인을 자기 진영으로 끌어들이려면 과거에 대한 철저한 사과와 단절이 있어야 할텐데.. 하는 생각을 했는데... 설마, 김지하 시인이?

 

다시 얼마 뒤 김지하 시인은 박 후보 진영으로 갈 생각이 전혀 없다는 인터넷 기사를 보았는데... 공중파에서는 아직 듣지 못했는데.. 내가 못 들은 건지, 아니면 방송을 하지 않은 건지...

 

이 뉴스를 듣는 순간 김지하 시인의 "중심의 괴로움"이란 시집이 생각이 났다. 도대체 이 양반은 이제 정치와는 손을 놓고 지내는데도 이렇게 주변에서 괴롭히는구나. 김지하 시인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중심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나 해야 할까. 

 

김지하 시인은 박정희 전 대통령 때는 민주화 운동의 투사였고, 80년대가 넘어서서는 생명운동, 환경운동에 참여를 했으며, 그 다음에는 율려라는 이름의 영적 운동에 참여를 했었다. 그 다음에는 잘 모르는데... 94년에 낸 시집의 제목이 "중심의 괴로움"이고, 그 시집의 제목은 주로 "봄"과 관련이 있다.

 

시인이 돌고 돌아 다시 시작하는 봄으로, 즉 자신의 만년에 이제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는 시들로 채워져 있다고 생각하는데...

 

시인의 새봄이라는 연작시 중에서 마지막 시인 새봄9를 보자.

 

새봄 9

 

벚꽃 지는 걸 보니

푸른 솔이 좋아

푸른 솔 좋아하다 보니

벚꽃마저 좋아.

 

김지하, 중심의 괴로움, 솔, 1997 10쇄. 새봄9 전문

 

이 시에서 말하는 새봄은 대동세상이다. 모두가 하나되어,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있는 세상. 이것이 시인이 도달한 세계이다.

 

이런 세계에서 시인은 이 시집에서 모든 생명과 자신이 연결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으며, 반면에 모든 생명에서 인간은 제외되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어, 외로움이 짙게 배어나고 있다.

 

인간에게서 느낀 고독, 외로움이 다른 생명과의 교감으로 지탱되고 있다는 느낌.

 

그래서 시인은 중심을 지키고자 하나, 중심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생각. 흔들리기에 중심이라는 생각.

 

중심의 괴로움

 

봄에 / 가만 보니 / 꽃대가 흔들린다

 

흙밑으로부터 / 밀고 올라오던 치열한 / 중심의 힘

 

꽃피어 / 퍼지려 / 사방으로 흩어지려

 

괴롭다 / 흔들린다

 

나도 흔들린다

 

내일/ 시골 가 / 가 / 비우리라 피우리라.

 

김지하, 중심의 괴로움, 솔, 1997 10쇄. 중심의 괴로움 전문

 

아래로부터 위로부터, 좌로부터, 우로부터 중심은 늘 당김을 당한다. 그 당김을 묵묵히 견디며 싹을, 꽃을 피워내는 일, 그것이 중심이 할 일이다. 그러한 중심은 흔들리고, 흔들리지 않으면 오히려 꽃을 피울 수 없게 된다.

 

시인은 자신이 이제는 우주의 중심이 되고자 한다. 아니 우주의 중심이어야 한다. 이것이 지천명에 다다른 시인이 깨달은 점일테다.

 

이러한 우주의 중심에서는 좌니 우니, 나니 너니 하는 구분이 무의미해진다. 오히려 넌 나고, 난 너고, 좌는 우고, 우는 좌일 수밖에 없다. 그것들이 다 중심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심에 속한 것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미묘한 틈. 그 틈이 바로 다른 것이 생겨나는 힘이 된다.

 

 

아파트 사이사이 / 빈틈으로 / 꽃 샘 분다

 

아파트 속마다 / 사람 몸 속에 / 꽃눈 튼다

 

갇힌 삶에도 / 봄이 오는 것은 / 빈 틈 때문

 

사람은 / 틈

 

새일은 늘 / 틈에서 벌어진다.

 

김지하, 중심의 괴로움, 솔, 1997 10쇄. 틈 전문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곧 '새봄'을 맞이할텐데...'틈'에서 어떤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렇게 '중심의 괴로움'을 새생명의 탄생으로, 새세상의 탄생으로 만들어내야 하는데...

 

시인의 이 시집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바로 우리 앞에 펼쳐질 '새봄'을 만들 '틈'을 우리가 '중심'을 잡고 가야 한다는 것, 그래서 우리가 중심을 잡기가 참 힘들다는 것, 중심은 흔들리지만, 그 흔들림을 통해 새로움을 탄생시킨다는 것. 그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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