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쉬는 인권
송영현 지음 / 이담북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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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는 인권의 시대다.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더욱 풍부해졌으며, 인종, 계급, 국가, 성별 등을 떠나 사람이라는, 사람이기에 기본적으로 지닐 권리가 있다는 의식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인권의식이 하루아침에 생긴 것은 아니고, 또한 위로부터 주어진 것도 아니다.

 

인권은 기나긴 세월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의 투쟁으로 쟁취된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순간 인권 감수성을 잃는다면 인권은 다시 우리들의 삶에서 사라지게 되고 말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국가인권위원회라는 국가조직으로서 인권을 보장하는 기구도 설치되어 있다. 물론 기구라는 것이 그 기구를 운영하는 사람에 의해 달라지기는 하지만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인권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 주목을 하면 형식상, 제도상으로 갖추어진 인권이 실질적으로도 인권적인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인권위도 지금 문제가 많으며, 사회의 여러 부분에서 인권이 후퇴하고 있다는 조짐이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듯 인권은 아차 하는 순간 우리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그래서 인권에 대해서는 늘 깨어있는 감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인권에 늘 주목하고 있어야 한다.

 

인권을 법적으로 접근하면 상당히 어려워진다. 법이 아직은 우리와는 멀어서 법과 인권을 관련짓는 순간 인권에 대한 관심이 멀어지게 되는데... 그렇다고 법과 인권을 관련짓지 않을 수도 없으니... 늘 적절한 균형이 필요하다.

 

또 인권은 철학과 윤리와도 관련이 된다. 그래서 서양의 경우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인권 담론에 늘 등장한다. 동양에서는 동양철학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이렇게 학문적으로 인권에 접근하면 머리가 아파진다. 그리고 학문 속으로 인권이 파묻히게 된다. 이는 인권을 위해서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다.

 

지금까지 인권에 관한 책들이 많이 어려웠다. 법과 철학, 윤리 등과 연결지었기에 배경지식들이 인권을 이해하는데 작동을 하게 되었고, 그런 배경지식의 부족은 인권을 어려운 학문으로 이해하게 하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벗어나 있다. 인권에 관한 개설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간략간략하게 인권에 관해서 서술하고 있다.

 

법도, 철학도, 윤리도 섞여 있으면서, 그것도 동양과 서양을 다 아우르면서도 어렵지 않게 인권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다. 하여 인권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먼저 읽으면 좋을 책이다.

 

인권, 이것은 이제 우리 인간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요소이다. 누구에게 양도할 수 없는 권리. 이 권리는 학문, 즉 이론의 차원에서 머무르면 안된다.

 

인권은 바로 실천이기 때문이다. 그 점을 확실히 깨닫게 해준다. 이 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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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이야기들
에릭 홉스봄 지음, 이경일 옮김 / 까치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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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철학자는 이제까지 세계를 해석했을 뿐이다:문제는 세계를 바꾸는 것이다"(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이 책 354쪽에서 재인용)

 

1980년대까지 우리나라에서는 마르크스가 유행했었다. 사회학은 물론이고, 철학에서도, 그리고 경제학에서도... 이런 학문적인 분야말고도 사회운동 분야에서 마르크스는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세상은 마르크스의 말대로 되어가는 듯했고, 그 당시 많은 젊은이들은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곧 마르크시즘이 쇠퇴할 줄을 모른채.

 

그러다 1990년대에 들어서 사회주의권이 몰락했다. 말 그대로 몰락이다. 자본주의에 필적한 만한 사회제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마르크시즘은 이제는 한물 간 사상이라고 치부했다. 여기에 사회민주주의라는 개량주의도 한몫했다.

 

이제는 혁명의 시대는 물건너 갔다. 오직 개량만이 살 길이었다. 사회주의에 대해서 언급하는 사람은(공산주의는 말할 것도 없다) 시대에 뒤떨어진, 시대를 읽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급속히 희망을 잃은 사람들은 회한에 젖거나, 아니면 현실에 안주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세계를 바꿀 힘을 잃었다. 아니, 힘이 아니라 의지를 잃었다.

 

이제 마르크스는 도서관의 한 구석으로 물러나 버렸다. 마르크스를 공부하는 사람은 자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서울대에 있었던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의 자리도 사라져갔다.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마르크스는 사라지는 이름이었다. 사라지는 학문이었다. 사라지는 실천이었다.

 

하다못해 진보정당에서도 노동계급의 이익을 내세우지 않는다. 노동계급이라는 마르크시즘을 지탱하던 계급이 사라졌다고 판단하는지, 당이름에서 노동을 빼버렸다. 그리고 그들 정당의 주요 구성원들은 노동계급과는 거리가 있는 지식인들, 또는 시민단체 구성원들로 채워졌다.

 

노동은 조직화를 잃고, 힘을 잃고 그냥 파편화된 개인으로, 시민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홉스봄이 안타까워했듯이 이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어갔고, 세상의 조류에 휩쓸리기만 했다.

 

그러나, 노학자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2008년 이후, "다시 한 번 마르크스를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때가 왔다(이 책 429쪽)"고 한다. 

 

아직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야만 한다고 홉스봄은 그의 마지막 저서가 된 이 책에서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관철하기 위하여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를 개관하고 있다. 각자 따로 쓰여진 글들이지만 홉스봄 자신이 그 글들을 마르크스주의의 탄생부터 발전, 쇠퇴를 각 시기별로 정리하여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내고 있다. 아마도 이 책은 50여년에 걸쳐 쓰여진 책이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그렇다면 반세기동안 홉스봄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 고민하고, 또한 이 사상에서 희망을 찾았다는 얘기가 된다.  그리고 아직도 우리는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적어진 지금,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있는 이 책은 결코 쉽지는 않지만, 한 눈에 마르크스주의를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여기에 마르크스-엥겔스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그람시도 다루고 있으니...

 

그람시의 헤게모니라는 개념과 지식인에 대한 논의는 지금 이 시대에도 얼마나 필요한지. 게다가 그가 말했더 진지전이라는 개념과 또 수동혁명에 대해서 고민을 한다면, 마르크스주의 정치철학을 확립한 사람으로 왜 홉스봄이 그를 다루고 있는지 알 수 있을테고, 또한 지금 정치현실에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방법론을 배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마르크스주의의 탄생부터 발전, 그리고 쇠퇴... 하지만 다시 마르크스를 생각해야 한다는 끝부분의 말까지.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의 테제에서 했던 말, 지금 우리나라 지식인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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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서로 미사일을 날리고 있는데...

 

아직은 군사력의 차이에서 이스라엘이 더 힘있게 나가고 있지만, 쥐도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

 

팔레스타인도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으니, 이들의 대응도 극단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을 터.

 

같은 뿌리에서 나온 종교가 서로를 사랑하지 않고 서로를 미워하고, 한 하늘 아래에서는 함께 살 수 없다는 식의 적대감을 표출하고 있으니...

 

사랑의 종교는 어디 갔는지...

 

만약에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중동이나 한반도에서 시작하리라고 누군가가 말했었는데, 중동에서는 끊임없이 소소한 전쟁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으며,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에서는 남북의 긴장관계 말고도 일본과 중국과의 긴장관계도 만만치 않으니..

 

지구는 화약고를 두 개나 가지고 있는 셈인가?

 

아니, 우리에게는 먼 일처럼 느껴지고 있지만 아프리카에서는 아직도 작은 분쟁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으며, 인도와 파키스탄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험을 간직하고 있고, 또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아직도 전쟁이 완결되지 않았으며, 이라크에서도 전쟁은 끝났다는 선언이 있었지만, 여기저기서 폭탄테러라는 이름의 작은 전쟁들이 일어나고 있으니...

 

지구에는 화약고가 단 두 개만이 아니다.

도처에 화약고가 있다.

조금만 건드려도 터져버리는.

그런 화약고 중에 커다란, 거대한 폭발이 일어날 수 있는 지역이 중동과 한반도라는 이야기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런데, 왜 전쟁을 하려할까?

정치적, 경제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사람이 그런 이유로 사람들을 몰살한다는 것은 이미 있어서는 안된다고 합의를 보지 않았던가?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우리는 전쟁의 참상을 겪지 않았던가.

 

인간의 학습능력이 이것밖에 안되는가? 아니면 인간의 기억력이 이것밖에 안되는가?

그러한 참상들보다도 자신들의 이익이 더 우선시 되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전쟁을 통해 피해를 입는 사람은 전쟁을 일으키는 당사자들이 아니다.

힘없는, 착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자신과 자신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그러한 사람들이 전쟁으로 인해 죽어가거나 비참해지게 된다.

 

그래서 전쟁은 더욱 나쁘다.

지금... 중동에서는 전운이 감돌고 있다고 한다.

 

이때, 오래 전에, 우리에게 "톰 소여"와 "허클베리"로 알려진 마크 트웨인의 이 책이 생각났다.

"전쟁을 위한 기도" - 설마, 이 책을 진짜 전쟁을 위해서 기도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지...

 

아니, 생각났다기보다는 머리 속에서 계속 이 책이 맴돌았다고 해야 옳다.

제발 생각 좀 하자. 전쟁이 어떤지.

트웨인의 이 반어(反語), 이 역설을 한 번 보자.

 

전쟁을 위한 기도

 

“오 주여, 우리 아버지시여! / 우리의 젊은 애국자들이 / 우리의 사랑하는 용사들이

전장으로 나가나이다. /이들과 함께 하소서!  (중략)

 

오, 우리 주 하나님이시여! / 우리를 도우시어 / 우리의 포탄으로 / 저들의 병사들을

갈기갈기 찢어 / 피 흘리게 하소서. / 우리를 도우시어 / 저들의 청명한 벌판을

저들 애국자들의 / 창백한 주검으로 뒤덮게 하소서. / 우리를 도우시어 / 천둥 같은 총성을

저들의 부상병들이 /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 내지르는 비명 속에 잠기게 하소서.

우리를 도우시어 /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포화로 / 저들의 누추한 집들을 

잿더미로 화하게 하소서.

우리를 도우시어 / 저들의 죄없는 과부들이 / 비통에 빠져 / 가슴 쥐어뜯게 하소서.

우리를 도우시어 / 저들이 집을 잃고 / 어린 자식들과 함께 / 흙바람 이는 황폐한 땅을

의지가지 없이 떠돌게 하소서. (중략)

 

주님께 / 안식할 무덤을 간구하더라도 / 거절하시고 / 주님을 경모하는 / 우리를 위하여

저들의 소망을 산산히 날려버리시고 / 저들의 생명을 시들게 하시고

저들의 비참한 순례가 끝나지 않게 하시고 / 저들의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하시고

저들의 눈물로 저들의 길을 젖게 하시고 / 저들의 상처투성이 발에서

흐르는 피로 / 흰눈을 얼룩지게 하소서. / 우리는 그것을 바라나이다. (후략)


마크 트웨인, 전쟁을 위한 기도, 돌베개, 2003년 37~85쪽에서

 

정말, 이러고 싶은가? 이 기도대로 하고 싶은가? 이 기도대로 되게 하고 싶은가?

우리는 같은 사람이 아니던가? 인종, 국적을 떠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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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때는 선거가 있을 때이다.

나머지 기간은 그냥 정치와 자신은 무관한 양 지내게 된다.

이것은 노조 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경제적인 활동과 정치적인 활동은 따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와 경제가 따로 떨어져 있는 문제일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경제든, 정치든, 이들은 서로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치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는 상태에서도 늘 정치와 관련된 일들을 하고 있게 된다.

우리의 삶 자체가 정치라는 인식을 해야 한다.

 

삶창, 바로 우리의 삶이 보이는 창에서 이번 호의 기획 기사로 대통령 선거를 다루고 있다.

원하는 대통령?

 

노자에서 나오는 말이었던가, 가장 왕 노릇을 잘하는 왕은 왕이 있는지도 모르게 하는 왕이라는 말.

 

이는 국민들이 대통령이라는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게 정치를 하는 대통령이 가장 잘하는 대통령이라는 얘기가 된다.

 

군림하는, 또는 무언가를 제시하는 대통령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데, 자신도 국민들과 함께 살아가는 대통령, 그가 바로 좋은 대통령이라는 얘기다.

 

한참, 대선에 관한 논의가 한창인 이 때, 삶창은 우리의 삶과 관련된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현학적이지 않아서 좋고, 정말로 서민의 입장에서 원하는 대통령상을 이야기해서 좋다.

 

그래, 우리는 이런 대통령을 원한다. 이는 자기만의 대통령에 대해서 누구나 생각을 해야한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자신만의 색깔을 가지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도 된다.

 

멀지 않은 대선. 그보다는 더 우리 삶과 관계있는 정치. 그래, 정치는 바로 우리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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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의 제목이 "탈성장의 논리와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라는 말에 탈성장이라는 말이 결합되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가 되는데...

성장과 민주주의를 동일시했던 우리네 삶에 대한 반성이 담겨 있는 말이다.

언제까지 성장해야 하는가?

몇몇 경제학자들은 이제는 우리나라도 저성장을 인정하고, 저성장을 받아들여서 그러한 상태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해야 할 시기라고 하지 않나?

더 이상 성장주의에 매달리지 말고, 탈성장의 논리를 받아들여서 행복을 추구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상하게 성장과 원자력이 연관이 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탈성장을 주장하는 녹색평론은 반원자력을 표방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고.

원자력은 거대 산업이다. 여기에는 민주주의보다는 중앙집중적인 면이 더 많고, 비밀주의가 판치고 있으며, 성장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산업이다.

성장제일주의를 외치며 건설한 것이 원자력 아니던가.

그런 원자력이 이제는 오래되어서 우리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원자력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올해 고장이 나, 또는 검증이 안된 부품을 써 가동을 중단한 원전이 있음에도, 겨울철 전력난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부품을 교체하지 않고(부품 교체에 2년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그렇담 이런 부품이 얼마나 정교하고 안전해야 하는지를 이 기간이 말해준다고 할 수 있는데) 용접을 해서 임시로 사용을 하겠다고 하니...

 

127호에서도 여전히 이러한 원자력 문제를 다뤄주고 있다. 이번 호에는 과학자들이 시민과학자(이를 바른 과학자라고 해도 무방하다)와 관변과학자(어용, 잘못된 과학자, 또는 사이비 과학자라고 해도 된다)로 나눌 수 있고, 과학은 정치와 무관할 수 없음을 역설한 글을 만날 수도 있다.

과학이 중립적이라고? 과연 그럴까? 이번 호를 읽어보면 안다.

 

여기에 이번 호를 읽으면서 날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유력 대통령 후보들에게 원자력에 관한 공약을 제시하라고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냥 선언적인 의미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안을 제시하는 후보를 지지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

 

덧붙여 강력한 중앙집권이 아니라 지방자치를 실현할 수 있는 정책을 펼치는 후보, 이번 호에서는 이를 연방주의 개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한 후보를 지지해야 한다는 생각.

 

생각할거리가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이런 생각들을 정리해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만들어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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