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경제학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김영욱 외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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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17대 대통령의 시대가 가고 18대 대통령의 시대가 온다. 그런 시대가 오는 해의 첫날이다.

 

지난 대선에서 화두는 무엇이었을까? 정치적 능력이나, 인간적인 품성, 이런 것들이 아니었다. 가장 큰 논점은 바로 경제였다. 이 경제가 17대 때도 가장 큰 문제였는데, 또다시 5년이 지난 뒤 18대 때도 경제다.

 

아니 어쩌면 IMF를 겪은 이후부터 우리에게는 경제가 늘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경제를 살리겠다는 정치인을 그의 과거와 상관없이, 그의 정치 능력과 상관없이 지지했는지도 모른다.

 

한 번 16대 때 경제를 잠시 뒤로 미뤄두고 지지를 하기도 했지만, 이런, 그 때 정권도 경제에 관해서는 우리를 더 힘들게 해서, 정치보다는 경제가 중요하다는 인식을 더욱 확고하게 심어주었는지도 모른다.

 

아이엠에프 이후, 신자유주의라는 광풍에 중산층들이 속절없이 나가떨어지고, 정규직이 비정규직이 되고, 청년들은 88만원 세대라는 소리를 들으며, 이태백이라는 신조어(이십대 태반이 백수)까지 등장하였으니...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보다는 당장 눈 앞에 닥친 생존이 더 급한 문제로 다가온 때였다.

 

그러니 '747'이라는 화려한 공약(空約)을 내건 사람이 당선이 되었지. 747점보 비행기가 멋지게 이륙한 것이 아니라, 이륙도 못하고 두 동강 나 버렸지만 말이다.

 

그러면 여기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이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대기업에, 다국적기업에 종속된 언론들이 신자유주의 비판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어서 신자유주의의 본질에는 다가가지 못하고, 이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현상이 일어나고 말았다.

 

오호라, 개인의 책임이라니...세계경제의 시스템이 신자유주의로 굴러가고 있는데... 그런 5년을 겪었다. 그래서 이번엔 '경제민주화'라는 걸 들고 나왔다. 함께 살자는. 말은 좋은데, 과연 신자유주의를 그냥 내버려두고 이게 가능할까.

 

아니다. 라고 답해야 솔직한 답변이 된다. 아니라고 얘기하는 정치인이 솔직한 정치인이고, 아니라고 얘기하는 경제학자가 공부를 제대로 한 경제학자다. 그런데,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아니, 많다. 다만 우리의 귀에까지 들리지 않을 뿐이다. 언론이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언론이 침묵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유는 뻔하지 않은가.

 

이제 새 시대가 시작된다. 새 시대는 '성장'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제 지속적인 성장이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지 않은가. 오히려 우리는 새 시대를 저성장, 어쩌면 성장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을 찾는 기간으로, 새로운 실험을 해야 하는 시대로 삼아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헬레나 노르베르 호지는 그래야 한다고 한다.

 

'마이너스 성장 사회에 대한 대비는 지역 식량 생산으로 사람들을 먹여 살리고, 농촌 지역으로의 이주를 권장하며, 단순한 생활 양식을 가진 지속 가능한 새로운 공동체를 설립하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다. 기본적인 필수품도 지역에서 생산하며, 지방으로 분산된 에너지 자원의 성장을 지원하는 것이다. (97쪽)

 

이것은 '지역화'를 기반으로 하는 경제를, 정치를 확립하자는 주장으로 나아가고, 이는 지금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IMF(국제통화기금)와 WTO(세계무역기구)를 대신할 수 있는 세계환경기구(WEO)를 만들자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자본에 의해 주권을 상실하고, 환경을 파괴하는 대신에 주권도 보호하고, 약자도 보호하며, 더불어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추구하는 세상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기 위해서는 약한 나라들부터 서로 연대하는 모습을 보이고, 지역에서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삶을 살기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의 폐해와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이 책을 통해서 낱낱이 까발리고 있으며, 대안은 없다고 주장하는 그들의 주장에 대안이 있음을, 이미 대안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새로운 시작, 우리나라는 어떤 길을 가야 할 것인가? 적어도 새 정치를 시작할 사람이라면 이 정도 책은 읽고 고민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또다시 747처럼 이륙도 못해보고 땅에서 두 동강이 나지 않도록, 그 많은 환경파괴 에너지가 드는 이륙을 하지 않고도 이 땅에서 서로가 서로에 의존해, 인간이 자연과 함께 어울리며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정책을 펼쳐야 하지 않겠는가.

 

말로만 하는 경제민주화가 아니라, 그 경제민주화가 바로 이 책에서 말하는 지역화임을, 공동체 만들기임을 정책으로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그러한 정책을 실시하도록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살펴야 하고, 우리의 주장을, 삶에 대한 주장을 그들의 귀에 들어갈 수 있게 외쳐야 하지 않겠는가.

 

성장의 경제학이 아니라, 행복의 경제학.

 

새 해, 시작하는 날. 경제, 사람도 살리고 자연도 살리는, 서로 함께 살아가는 그러한 경제가 되도록 했으면, 그런 시작의 해였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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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가르고 치다 - 난장과 끝장의 교사 욕망 분출기
김준산 지음 / 네시간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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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유하로부터 시작한다. 아니 그의 시로부터 출발한다.

가슴 아픈 현실을 에둘러 가지 말고 똑바로 가자고.

리가 지금까지 겪어온 교육은, 또 지금도 하고 있는 교육은 바로 이 시에 나와 있는 것과 같지 않냐고.

현실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현실을 바꿀 수 있다고.

교육에 대해서, 교사에 대해서 좋은 말로만 포장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느낀 그대로 한 번 표현해 보자고.

여기서 부터 출발하자고.

 

시를 보자.

살벌하다.

교육이, 아니다, 교육이란 이름으로 대표되고 있는 학교가 우리에게 얼마나 안 좋은 존재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학교의 맨살을 보여주고 있다.

 

학교에서 배운 것 (유하) 

 

인생의 일할을 나는 학교에서 배웠지 

아마 그랬을 거야

매 맞고 침묵하는 법과

기와 질투를 키우는 법

그리고 타인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는 법과
경멸하는 자를

짐짓 존경하는 법
그중에서도 내가 살아가는 데

가장 도움을 준 것은 

그 많은 법들 앞에 내 상상력을
최대한 굴복시키는 법

 

교육의 전부를 학교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요즘은 좀 다르려나? 평생교육 운운하는 소리들이 많으니) 우리 인생에서 얻은 배움 중에 학교에서 배운 배움은 겨우 일할이란다.

 

아마도 인생을 백년으로 보면(요즘은 백세 시대라고 하니) 학교에 다니는 시간이 (의무교육만 보면) 일할 정도가 맞다.

의무교육이 현재는 9년이니까. 하지만 의무교육은 아니더라도 고등학교까지는 다녀야 한다는 인식이 지배하고, 거의 모든 청소년이 고등학교까지는 다니니 12년, 일할이 조금 넘는 기간을 학교에 다닌다.

 

여기서 제대로 배웠다면 아마도 '인생의 일할'을 학교에서 배웠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학교에서 과연 일할을 배울까? 유하가 말한 일할은 정말로 엄청나게 많이 쳐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할을 밑의 행에 나오는 '침묵, 비교, 굴복' 등으로 채운다면 그 일할은 정말 끔찍할 정도로 많다. 일할이 인생의 방향을 좌우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시를 보면 교사, 참, 모골이 송연해지는 직업이다.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두려운 직업이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이걸 이 책의 저자는 안타까워한다.

교사는 자신만이 잘 사는 전문가가 아니라, 자신의 삶보다는 남의 삶이 더 잘 살아지기를 바라고, 노력하는 지식인이어야 한다(155쪽)고 하는데, 지식인이 되기 위해서 교사가 지녀야 할 태도와 또 가야 할 길이 만만치 않음을 자신의 경험을 예로 들어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교사는 지식인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하여 교사는, 그런 교사가 하는 교육은 카프카가 말한 책의 기능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리는 다만 우리를 깨물고 찌르는 책들을 읽어야 할 게야. 만일 우리가 읽는 책이 주먹질로 두개골을 깨우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는단 말인가?  자네가 쓰는 식으로 책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라고? 맙소사, 만약 책이라고는 전혀 없다면, 그 또한 우리는 정히 행복할 게야. 그렇지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고통을 주는 재앙 같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 같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리 숲 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자살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들이지.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나는 그렇게 생각해.

 

카프카, 행복한 불행한 이에게. 솔(2004).70쪽  오스카 폴락에게 보내는 편지(1904.1.27)에서

 

사람들 내면에 얼어 붙어 있는 것들을 깨부술 수 있는 도끼 역할을 교육이 해야 한다.

교육이 그렇게 하기 위해 교사는 늘 깨어 있어야 하며, 현실을 바로 볼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그래서 저자는 교사는 책을 읽어야 한다고 한다. 이 책 역시 교사들에게 도끼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역사에 대한 바른 인식, 인문학에 대한 공부를 통한 성찰,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 그리고 무엇보다도 희망.

 

이런 자세를 지닌 교사, 이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교사의 모습이고, 유하가 말한 '학교에서 배운 것'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힘들게 교육 활동을 하고 있는 교사들, 힘을 빼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더 힘내서 행복한 교육을 하자고, 저자는 현실을 제대로 보자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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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가르고 치다 - 난장과 끝장의 교사 욕망 분출기
김준산 지음 / 네시간 / 2012년 9월
품절


나의 달콤한 미래를 거역하고 남의 달콤한 미래를 대리 창조해주려는 매우 가당치 않은 기본정신, 그것이 바로 교사들에겐 혁신이며, 혁신이어야 합니다.-31쪽

'부킹(booking)없는 선생님은 소통 없는 선생님이요, 소통 없는 선생님은 별 볼 일 없는 직업인'이란 뜻입니다. 성찰과 소통은 교육의 근본목표입니다. 따라서 잘 가르치는 행위는 부킹 잘하는 행위가 됩니다.-42쪽

시대의 주류가 되고자 하는 전문성보다 시대의 비주류로 애써 남고자 하는 소수성이야말로 교사 자질의 근본이 될 수 있습니다. ...
참교사란, 전문이나 특권을 바라지 않고 그 반대로 꿋꿋하게 걸어가는 반시대적 사람입니다.-50-51쪽

교육적 태도란 '가능성의 믿음'입니다. 규정을 통한 한계보다 규정 바깥이 작은 가능성에 집중하는 태도, 그것이 교육입니다. ... 아이 스스로 살아 있는 자신을 증명할 시간을 유지하도록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지켜봐야 하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건강한 삶이란 정해져 있는 삶이 아니라 단독자의 삶이며, 비판적인 진보이며, 영원한 갈증임을 깨닫는 정성이 교육의 오늘이어야 합니다.-76쪽

교육은 상처를 치료하기보다 마취하고 세뇌합니다. ... 상처와 고통은 더 많이 웃기 위한 준비지요.. 도전과 실패는 더 많이 울기 위한 시도입니다. -83-84쪽

역사의 원동력을 창출하는 것이 교사들의 일입니다. 따라서 교사들의 쉼이란 역사의 원동력을 창출하기 위해 칭조적으로 쉬는 시간이지요. 상상하고 저축하는 시간입니다. ... 교실 밖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틸근대적 교사가 진정한 교사의 모습입니다. ... 교사란 자본 바깥의 가치를 창출하고 오역하고 오염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120쪽

학생들 스스로 이 사회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먼저 직시하게 해야 합니다. 무엇을 스스로 할 수 없고, 무엇을 스스로 할 수 있는지 비판적으로 생각해 보는 판단 능력이 더 중요합니다. ...
전문가는 시대를 읽어 자시이 잘사는 사람이고, 지식인은 시대를 앞선 고달픈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 교사는 지식인입니다. 교사는 시대를 비판하고, 시대를 앞서가고, 시대를 사유하는 지식인입니다. ... 더불어 시대를 변화시키는 실천가여야 합니다.-154-155쪽

진짜 교사는 방법에 대한 공부에 앞서 사회적 구조에 대한 공부에 힘을 붓습니다.-156쪽

말로만 하는 희망은 나누면 나눌수록 절망의 폭력으로 미끄러집니다. ... 무지란 말뿐인 앎의 다른 이름입니다.-244쪽

희망은 대립을 창조적 건설로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새로운 건설을 위해 비판의 융합을 결행해야 합니다.-226쪽

절망 속에 피는 꽃의 아름다움을 애써 찾으려는 행위가 교육이니까요. ... 희망이 드러나는 조건은 절망입니다. 절망의 늪에서 희망이란 꽃은 더 아름답습니다.-227쪽

욕망하는 삶은 시적이고 예술적인 삶이며, 욕망을 통해 주인이 되는 삶입니다.-238쪽

자기에 대한 진리 추구가 교육 추구의 목표점이지요. 진리를 추구한ㄷ는 말은 곧 교육을 통해 '자기 혁명'을 추구한다는 말입니다.-241쪽

교육공동체는 개성을 폭발시킬 방법부터 고민해야 합니다. 공동체란 '자기 찾기'의 소통들이 춤추는 장소입니다. -248쪽

이 시대의 진정한 스승은 당당하게 정치를 말하는 사람입니다. ... 이론은 하나의 실천이고 교육입니다. ... 다른 사람의 삶에 개입하여 그를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힘. 그것은 바로 이론이주는 고마운 혜택입니다.-260쪽

진정 교육을 말하는 교사라면 부끄러울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충실하고 대담한 삶을 꿈꿀수록 부끄러움도 실패도 많아지게 마련입니다. 세상에 대해 대담해지려면 실패를 감수해야 합니다.-279쪽

가르치는 자들에게 스승의 의미는 파란색입니다. ... 교사의 본질은 늙어져도 꿋꿋이 버티는 파란 무늬이며 칼바람을 즐길 줄 아는 아이의 동정입니다.-282쪽

교사는 가르고 치는 사람입니다. 분명한 이성으로 옳고 그름을 가르고, 따뜻한 감성으로 아이들을 돌봐야(치기)합니다. 이성과 감성의 강력한 균형이 가르치는 자들의 존재론이지요.-2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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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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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죽음이란 두려운 대상이다. 도대체 죽음이 무엇인지, 죽음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막연한 두려움을 지니고 있다. 이런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죽음에 대해서 많은 책들도 나와 있고, 많은 종교도 생겨있다.

 

죽음, 인간에게 주어진 영원한 화두라고 있는데, 이러한 죽음에 대한 강의가 예일대에서 있었다고 한다. 그 강의를 바탕으로 책으로 내었고.

 

죽음에 대해 종교적인 차원에서, 또는 과학적인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고 철학적인 차원에서 접근했다고 봐야 한다. 윤리학이 철학의 한 분야이니.

 

삶을 전후로 죽음이 있는데, 삶의 전후에는 우리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존재에 대한 논의가 타당하지 않다는 말은 당연하게도 들린다. 이런 생각을 하면 죽음에 대해 위안을 얻는 경우도 있지만, 아무런 해답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왜냐하면 우리는 비존재일 때는 이미 생각을 할 수 없기 때문이고, 그런 비존재에 대해서 생각하는 존재는 살아있는 존재, 삶을 누리고 있는 존재이고, 이 삶을 누리고 있는 존재가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즉 미래를 현재로 끌어오면서 두려움에 쌓이게 되기 때문이다.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알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런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이 책은 여러가지 사례들을 들어 설명해 내고 있다.

 

읽으면서 죽음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정리된 것은 아니다. 아니 이게 어디 책 한 권으로 정리될 문제이던가. 그런 문제였다면 그 많은 사상들과 그 많은 종교들이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만 다시 한 번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는 것이 이 책을 읽은 의미일 것이다.

 

책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한다.

 

정말로 중요한 건 이것이다. 우리는 죽는다. 때문에 잘 살아야 한다. 죽음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다. (507쪽)

 

그렇다. 확실한 것은 우리는 죽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 이후는 모른다는 것이다. (내세를 믿는 종교인들도 영생을 믿는 사람들도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그들이 어떻게 될지 잘 모른다. 심판을 믿는다고 해도 자신이 어떤 심판을 받을지는 확실히 모른다.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 아님 환생을 할지. 다만 예측을 할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죽기 전에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정해져 있는 인간의 수명 (그래서 우리는 모두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 속에서, 존재하는 동안,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떤 삶이 가치 있는 삶일지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그런 가치 있는 삶을 실천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있는 관점을 지녀야 하는 것.

 

결국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잘 살 것인가라는 질문이 된다. 그리고 잘 살아야 한다는 당위가 된다. 잘 사는 것은 죽음에 대한 책임이자 의무이다. 

블랙홀- 죽음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간다는

누구는 시간까지도

빛까지도 들어가

나오지 못한다고 말한 세계

또 누구는 들어가는 곳이 있으면

나오는 곳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다른 세계로 가는 길목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이 세계에 존재했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하여 이 세계와 저 세계의 경계에 놓여

각기 다른 세계를 볼 수 없는,

한 세계에선

단 한 번 경험으로

끝내야 하는

블랙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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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영화란다.

 

뮤지컬로도 상연되고 있는데... 뮤지컬 영화로 만들었다니.

 

이미 영화로도 많이 만들어져 있지 않은가. 몇 번 본 기억이 있는데...

 

책은 어렸을 적, 레미제라블이라는 제목이 아니라 "장발장"이라는 제목으로 읽었다. 한 권으로 이루어진.

 

그러다 어느 순간 완역이라는 이름으로 위고의 "레미제라블이" 긴 장편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되었지.

 

프랑스 혁명의 순간들이 아주 자세하게, 길게 묘사되어 있다고.

 

여러가지 이유들이 이 영화로 날 이끌었다.

 

일년에 몇 편 보지도 않는데, 그래도 평이 좋으니 봐야지.

 

아는 사람이 이 영화를 보고 휴지를 준비하란다.

 

어라, 장발장에 휴지라고, 눈물샘을 자극하는 장면이 있었던가.

 

기억을 되살려도 그닥 눈물을 흘릴 장면은 많지 않을 것 같다.

 

그냥 장발장이 코제트를 두고 죽는 장면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영화를 보면서 곳곳에서 눈물이 난다. 그냥 주르륵... 눈물에 익숙하지 않은데... 참. 감정에 충실해야 한다. 그냥 흐르게 놔둔다. 그러면서 영화를 본다.

 

영화, 노래들이 좋다. 혼자서, 함께 부르는 그 노래들이 마음에 콕콕 와서 박힌다.

 

혁명은 실패로 돌아가고, 혁명의 와중에서 시민들은 문을 꼭꼭 걸어잠그고.

 

 

나중에 그들이 흘린 피를 닦으며 하는 말들...

 

왜 자꾸 우리나라와 겹칠까. 왜 그런 장면에서 우리나라 생각이 날까. 슬프게.. 더 슬프게...

 

그래도 그들은 희망을 잃지 않는다.

 

한 번 왕을 죽여봤던 경험이 있지 않은가. 언제든 다시 왕은 죽일 수 있는 존재다.

 

혁명의 경험은 그들에게 어떤 시련이 닥쳐와도 굴하지 않는 의지를 심어주었다.

 

하여 그들은 희망을 찾는다. 희망은 언제든 우리 자신의 손에 달려 있으니 말이다.

 

이런 혁명의 순간을 장발장이란 사람의 삶이 관통하고 있다. 그 자신의 고난과 더불어.

 

그의 고난은 가난으로 시작되었다. 이 가난이 평생동안 그를 범죄자로 쫓기게 한다.

 

그리고 가난이라는 환경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책임을 사람에게만 지우는 자베르 경감, 그는 평생

토록 장발장을 쫓는다.

 

그에게는 사람은 없다. 오직 범죄만이, 범죄자만이 있다. 그렇담 그에게 혁명군은?

 

역시 범죄자일 뿐이지 않는가. 그런 그에게 범죄자 또한 사람임을 알려준 존재는 장발장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 그 전에 그는 사람을 보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

 

소년 혁명군의 주검에 자신이 차고 있던 훈장(?)을 떼어놓는 장면.

 

그 장면이 내게는 눈에 선하다. 이 때 그는 사람을 볼 수 있는 눈, 마음을 지니게 되었다.

 

결국 순수한 마음을 가진 소년의 죽음은 구세대의 끝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

 

 새로운 세대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정권은 존재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담 우리는?

 

우리는 새로운 세대에게 희망을 주고 있는가? 생각해 볼 일이다. 특히 이번 대선과 관련해서.

 

소설도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 희망을 잃지 말라고, 결국 새로운 시대는 올 거라는 생각을 하게 한 영화, 레미제라블. 

 

이 시대의 장발장들이여, 희망을 버리지 말자. 우리에겐 아직도 많은 앞날이 기다리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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