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이 다 되어 간다. 힘들게 지냈던 기간이. 사람의 상식으로는 상상이 되지 않던 일들이 버젓이 일어났던 5년이.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도대체 우리가 힘들여 이루어냈던 절차적 민주주의가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닫게 해준 5년.

 

그리고 비단 사람들만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면 다른 존재들에게도 못된 짓을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5년.

 

그래서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5년.

 

이러한 학습은 그냥 학습에만 머물고 말았고, 사람들은, 특히 어려움을 겪었던 세대들은 그러한 학습을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쪽으로 해석하고 적용하고 말았다.

 

나눔, 함께 함, 진정한 어른의 모습, 진정한 보수의 모습은 책 속에만, 우리의 머리 속에만 존재했고, 진보는 머리 속에서도 책 속에서도 사라지고 만 듯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

 

새로운 5년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다시 역사는 반복하지 않는다는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또다시 반복되고 말았다.

 

아니, 우리가 역사를 반복하게 만들고 말았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바로 우리들 탓이다. 정치인들이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집단이지 결코 민중의 행복을 먼저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들의 말과 행동은 하나하나 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5년. 또 앞으로 5년.

 

특별히도 추운 이번 겨울, 더 추운 나날들을 보내야 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닥친, 또는 닥칠 더한 추우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함께 함. 나눔. 나만이 아니라는 생각. 이것 아닐까.

 

제 자리에서 묵묵히 할 일을 하는 사람들, 이들은 어떠한 추위에도 굴하지 않는다. 어떠한 절망에도 굴복하지 않는다. 추위는 이겨낼 수 있으므로.

 

이들의 삶이 실려 있다. 특집은 '흔들림'인데 지금 우리는 많이 흔들리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도종환의 "흔들리며 피는 꽃"이란 시에 나오는 내용처럼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흔들림이 더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니... 지금 새로운 5년이 절망만은 아니어야 한다. 오히려 새로운 희망을 예고하는, 더 나은 세상을 준비하게 하는 준비단계라는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한 각오는, 삶창에 나오는 사람들에게서 자연스레 느낄 수 있다. 큰 결심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내가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이런 점에서 삶창은 나를 다독거려준다. 아직 희망은 있다고... 아직도... 우리에게 희망은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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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전집 5
프란츠 카프카 지음, 오용록 옮김 / 솔출판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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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성은 존재한다. 그러나 도달할 수 없다. 분명 앞에 보이는데 가는 길을 알 수 없다. 성에서 사람이 오기도 하는데, 역시 갈 수 없다. 특정한 사람만을 제외하고는.

 

이 성은 이성과 합리로 운영되지 않는다. 성이 운영되는 기제는 비합리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아니, 이해해서는 안된다. 이성의 힘으로 파악하려고 하면 할수록 성에 가는 길은 꼬이고, 숨는다.

 

그러니 주인공 K는 성에 갈 수가 없다. 그는 성에 가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그에게 성으로 가는 길은 끝내 열리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성이란 소설, 카프카가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K가 마부를 따라가는 데서 소설이 멈춘다. 도대체, 언제 K는 성에 갈 수 있을지, 하지만 그 앞까지의 전개를 보면 K는 결코 성에 도착할 수가 없다.)

 

그는 성에 갈 수 없을 뿐더러, 성과 관계를 맺고 있는 마을 사람들과도 어울리지 못한다. 미끄러짐, 그와 마을 사람들의 관계는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미끄러짐이 그를 성에 도달하지 못하게 한다.

 

마을 사람들은 성과의 관계에서 합리성을 버리고 있는데, K는 합리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직업(?)이 측량사로 나온 것만 봐도 그렇다. 측량사란 극도로 합리성을 추구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즉, 측량사는 객관적으로 수치화된 정확성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미 합리성을 포기한 마을 사람들과 어울릴 수가 없으며 그의 말이나 행동은 자꾸만 마을사람들과 어긋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성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성의 고위 관리인 클람을 만날 수 없고, 기껏해야 클람의 비서만을 만나지만, 그것도 의사소통이 되는 만남이 아닌 일방적인 만남에 그치고 만다.

 

배경이 겨울이고, 밤에 소설이 시작된다. 어둡다. 그리고 힘들다. 이는 성에 도달하는 길이 그렇다는 것을 암시해준다고 할 수 있는데...

 

가지 못한다는 사실, 또 성이란 분명 존재하지만 어떤 존재이다라고 할 수 없는 면에서 이 성을 진리라고 한다면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이 K라 할 수 있고, 마을 사람들은 진리가 무엇인지를 이성적으로 판단하기를 멈추고 그냥 그들의 생활에서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맹목적인 받아들임을 측량사인 K는 이해할 수가 없고, 그래서 이성적인 사람이 겪을 수밖에 없는 방황이 시작되는 것이다.

 

소설이 전개될수록 이상하게 성의 실체는 사라지고 만다. 오직 마을 사람들만이 실체로 나오게 된다. 그리고 이런 마을 사람들을 통해 K의 일이 실패할 거라는 예상을 하게 된다

 

장황한 소설이다. 무슨 미로 찾기 같다. 그런데 출구를 찾지 못하겠다. 찾기도 전에, 마치 찾지 말라는 듯이 소설이 끝나 버린다. 도대체 어떤 결말을 내려고 했을까?

 

수많은 해석들이 모여 카프카를 만들고 있다는 역자 후기에서처럼 읽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장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성을 나는 진리의 세계로 파악하고자 한다.

 

그리고 K는 화엄경의 선재동자처럼 진리를 알려줄 스승을 찾아 헤매는 구도자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선재동자는 여러 스승들을 만나 점차 진리의 세계에 접근해 가지만, K는 선재동자가 만난 스승들을 만나지 못하고 오히려 진리의 세계를 맹목적으로 믿는 사람들에 싸여 점점 진리의 세계에서 멀어지고 만다.

 

그래서 그는 진리로 가려고 하지만, 결코 가지 못하고 진리의 주변만을 얼쩡거리고 있을 뿐이다. 지금 내 삶이 그렇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 우울했다고나 할까.

 

말로 진리란 무엇이다라고 딱 규정할 수는 없다. 진리는 측량처럼 객관적으로 이것이다라고 말해질 수 없다. 그래서 진리에 이르는 길은 다양하다. 어쩌면 숨어 있다가 찾는 사람에 의해 발견된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발견을 방해하는 사람들, 이 소설의 마을 사람들처럼, 어디에나 있다.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것이 이 소설에서 찾아야 할 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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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은 절망이라는 늪에서 피어나는 희망의 꽃이다.

 

이렇게 말해야 한다.

 

세상은 이상하게도 점점 더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있는데, 어둠 속에서 살다보니 어둠에 익숙해지듯이, 절망 속에 있다 보니 절망에 물들어버리고 마는 경우가 많은데, 녹색평론은 '아니다. 희망은 있다. 자, 봐라'하고 있다.

 

인간에게 남겨진 최후의 것이 희망이라고 하듯이 이 희망마저 없다면 이 절망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희망의 꽃이 더 많이 피어 더 많은 사람들이 보고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번 호는 "힘있는 탈핵운동을 위하여"이다.

 

탈핵, 반원전. 고립되고 소수의 운동으로 보여지지만, 광범위하게 퍼져 있고, 공감을 얻고 있는 운동이기도 하다. 다만 원자력마피아라고 불리는 집단의 비민주성, 정보의 독점, 그리고 전문가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 사용 등으로 사람들의 핵에 대한 접근이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국민의 건강을,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할 정부에서도 이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반감기라고 독성이 반으로 주는 데만도 짧은 것이 몇 십년 긴 것은 몇 만 년 걸리는 그 핵의 위험성에 대해 바로 옆 나라에서 일 년 전에(이제는 일 년이 지나 이 년이 되어가지만) 일어난 핵발전 사고에 대해서도 아직도 퍼져 나오고 있는 방사능의 위험에 대해서도, 바다의 오염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노후화된 원전이 몇 기가 있는 우리나라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가끔 고장이 나 서 버리는 원전에 대해서도, 부품을 불량부품을 썼음에도 제대로 교체를 했다는 소리도 없이 조용히 재가동해 버리는 그런 모습에 대해서도 전체적으로 해명이 없다.

 

단지, 겨울철 전력수급이 어렵다는 말만 되풀이 한다. 국민 각자가 전기절약을 해야 하며(그래서 어제 10일에 전국적으로 자발적인 전기절약 운동-이것을 민방위 훈련이라고 한다-을 했다), 원전은 전기를 생산하는데 꼭 필요한 존재라는 인식을 하도록 언론 플레이를 한다.

 

이번 호에 나와 있듯이 전력이 부족하다면 계획 정전을 하면 되고, 이를 우리나라 국민들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을 것이며, 불필요하게 낭비되는 산업전력을 효율적으로 쓴다면 전력대란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데(전력 부족, 진실과 거짓), 이런 대책은 세우지도 않고 오직 전력 수급이 어려울 수 있다는 불안감만 조성하고 있다.

 

충분히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이유? 참...

 

그렇다고 우리가 "왜?"에만 매몰되어서는 안된다. 이제는 "왜?"를 넘어 "어떻게?"로 나아가야 한다.

 

왜 그러는지 대충 알지 않는가. 이제는 어떻게 하면 "핵"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벗어나는지 고민하고 행동해야 할 때다. (힘있는 탈핵운동을 위하여)

 

그러한 논점으로 진행된 이번 호에 실린 대담이 여러가지로 생각할거리를 준다.

 

그냥 절망에만 빠져 있으면 안 된다고,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우리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은 많다고... 당장 시작하자고...그렇게 희망을 보여준다. 희망을 이야기한다.

 

희망은 우리에게 삶이다. 녹색평론은 그렇게 다시 삶을 노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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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자 카프카 전집 4
프란츠 카프카 지음, 한석종 옮김 / 솔출판사 / 2003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완성되지 않은 소설을 읽는 당혹감.

내용이 어떻게 전개될지 예상하는 기대감.

또는 자신이 결말을 완성해 가는 창조감.

빈 자리를 채워가는 상상을 하는 즐거움.

 

이런 것을 느낄 수 있는 소설이다.

 

평전을 읽다보면 카츠카가 이 작품에 애착을 가지고 시작을 했다가 뜻하지 않게 중단을 하고, 계속 마무리를 하려 했으나 결국 하지 못한, 더이상 그로서는 작품을 진척시키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가 오래 살았다면 완성되었을까? 완성되었다면 어떤 결말이 되었을까?

 

이 작품은 완성이 되지 않았기에 중간 부분에서 끊긴다는 느낌을 받고, 나머지 그가 정리해 두었던 원고를 모아두었던 내용까지 합쳐도 결말에 이르기 위해서는 한참을 더 진행해야 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냥 나와 있는 내용만으로 무언가를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굳이 결론을 찾아내려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실종자. 그것은 이 사회에서 그의 존재가 사라졌다는 의미이다. 그의 인간적인 죽음은 의미가 없다. 죽음을 떠나서 그의 존재 자체가 사라졌다는 말이다. 즉 사람들 사이에서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뜻이다.

 

실종자라는 제목을 떠올리고 읽으면 그가 어떻게 사회에서 추방되는지에 관심을 두고 읽으면 된다.

 

부모로부터의 추방, 이는 부모와의 관계 맺기에 실패했다는 얘기이고, 여기서 그는 첫번째 그의 부모, 그의 고향으로부터 실종이 된다. 그의 나이 열일곱에. 열일곱이라는 나이는 부모로부터 스스로 독립할 준비를 하고, 부모 역시 그의 독립을 준비시켜줄 나이임에도 그는 하녀를 임신시켰다는 이유로-스스로 살 수 없는 사람이 또다른 책임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니- 미국으로 쫓겨난다. 하여그는 이미 출발부터가 실종자이다.

 

첫째 장에서 "화부"라는 제목을 달고 있고, 다른 매체를 통해 이미 발표되기도 한 글이기도 하지만, 다시 이 책의 첫 장으로 실려 있는 그 장에서 그는 실종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는 앞으로 그가 미국에서 겪게 될 삶의 경로를 미리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내리기 전에 이미 배에서 자신의 짐과 길을 잃고 헤매게 된다. 그리고 화부를 만나지만 그와 소통이 되지 않는다. 이 장이 바로 이 책의 전체적인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고 보면 된다.

 

부모로부터의 추방에 이어 그는 미국에서 만난 후견인 역할을 하는 외삼촌으로부터도 추방이 된다. 관계맺기, 이에 대한 계속된 실패다. 그의 말과 다른 사람들의 판단이 늘 어긋나게 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단초가 된다. 이렇듯 가족간에도 소통이 되지 않는, 그래서 관계맺기에 실패하는 주인공이 다른 사람들과 제대로 된 관계를 맺을 수는 없다.

 

계속된 옥시덴탈 호텔에서의 추방과 로빈슨, 들라마르쉬에 의한 브루넬라의 하인 생활. 하지만 과연 여기서 소통이 되고 있을까. 되지 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동등한 인간으로서 관계 맺지 못하고 하인으로 존재하게 된다.

 

더 나아가야 하는데, 원고는 중단되고, 갑자기 브루넬라의 이사가 나온다. 앞에서 그를 괴롭혔던,친구같지도 않은 친구들인 로빈슨과 들라마르쉬는 사라지고.

 

여기서 다시 이야기는 끊기고 오클라하마 얘기가 나온다. 여기서 직원을 채용한다는, 그리고 거기에 고용되어 기차로 여행을 가면서 이야기가 끝난다. 다만 이 부분에서 여자 친구 파니 얘기가 잠깐 나오는데, 그렇다면 다시 파니와의 관계가 나와야 하는데, 이는 미완성인가 보다. 자신의 이름을 대지 못하고 '니그로'라고 하는데 이것에서 관계 맺기에 실패한 사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가족과 사회에서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 겪을 수밖에 없는 비극을 다루고 있다고 보면 된다. 우리 역시 소통의 부재로 얼마나 고통을 받게 되는가. 얼마나 많은 오해 속에서 살고 있는가.

 

말은 이미 행해진 다음에는 오해를 그 말 속에 품고 있다고 하지만, 그런 오해들 속에서도 서로의 진심을 읽어가는, 그래서 함께 살아가는 그런 사회를 우리는 원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이 소설 속에서처럼 한 사람의 행동은 계속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그를 인간들 사이에서, 사회에서 추방하게 되고, 결국 그는 살아있되,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는 '실종자'처럼 살아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유대인으로, 또 문학을 하고 싶었으나 생존에 매인 사람으로서,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으나 가지 못한 사람으로서 결국 카프카 자신도 그 자리에 있었으나 자신은 실종자처럼 살아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급변하는 사회, 여기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며, 다른 사람들의 정체성도 인정하며, 함께 소통하는 방법, 함께 소통하며 살아가야만 우리는 '실종자'처럼 살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

 

읽기에 쉽다. 완결이 되었다면 더욱 좋았을 그런 소설. 읽기 즐겁다. 세상에 카프카를 읽으며 즐겁다면 안될텐데...

 

이 책 역자 후기에 옛날 우리나라 헌책방에서 발견된 번역본의 표지 뒷면에 "이런 개새끼를 내가 읽다니!", "이것도 문학이냐?"라는 낙서를 발견할 수도 있었다고 하는데, 반반이다. 그의 문학을 재미있다고, 좋다고 느끼는 사람과 이런 사람은.

 

덧글

 

완성된 작품이 아니라 그런지 조금 의심이 가는 대목이 있는데...

이 책 첫 장인 "화부"의 첫 구절에서 "열일곱 살의 카알 로스만은..."이라고 되어 있는데, 5장 옥시덴탈 호텔에서에서는 "다음 달에 열여섯 살이 됩니다."하고 카알은 대답했다.(137쪽)고 되어 있다. 실제 원문도 그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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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유대인, 몸 - 「변신」과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서울대 인문 강의 시리즈 3
최윤영 지음 / 민음사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몸과 정신. 둘로 보느냐 하나로 보느냐 논쟁이 많은데... 이런 논쟁을 떠나 인간은 몸과 정신, 둘 다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으니 여기서는 구분을 하지 말자.

 

난해하다는 카프카의 소설을 '몸'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는 책이다. 카프카의 많은(?) 작품 중에 "변신"과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두 작품을 중심으로 카프카가 바라본 '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몸'에 대해 이야기 하기 전에 '몸'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사회적, 문화적 환경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는데, 이것은 서양에서는 '유대인'이라는 특징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몸'으로 차별을 받았고, 이들이 이런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서 서구화되려고 노력을 하는 모습을 살펴보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유대인'이라는 차별성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하는데, 이것이 나중에 유대인학살이라는 비극으로 나타나게 된다.

 

'몸'으로 나타나는 '차이'를 '차별'로 치환하는 모습이 지금도 종종 발견되곤 하는데, 이는 장애인에 대한, 또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아직도 인종에 대한 차별로 나타나곤 한다.

 

이런 몸에 대한 차별을 우화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와 "변신"을 들고 있다.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는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즉 진화의 모습을, 변신은 인간에서 갑충(벌레)으로 즉 퇴화를 보여주고 있는데, 둘 다 행복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준다. "몸"이 다름이 "차별"로 귀결됨을 이 소설들이 보여주고 있다고나 할까.

 

유대인이 서구인에 동화되려고 했지만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잃고서도 그들과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없었던 모습을, 그들이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다른 방면에선 자유를 잃고, 또한 구경거리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으며(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서구화되지 못하고 유대인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는 동구유대인들의 모습은 서구인들에게 또는 서구화되려는 유대인들에게 혐오감, 공포감을 주어 사라져야 할 존재일 뿐이라는 인식을 갖게 한다는(변신) 것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문학의 다의성에서 이렇게도 해석이 될 수 있고, 이런 해석이 타당성을 얻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카프카 자신도 유대인이며, 그는 서구화된 유대인에 속하지만 나중에 유대의 전통을 지키는 동구유대인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가지 못하게 되니 말이다.

 

'몸'으로 표현한 이 소설들을 당시 시대현실에 비춰보면 유대인의 모습으로 해석이 될 수도 있지만, 자유 또는 실존에 대한 인간 보편적인 모습으로 해석을 할 수도 있고,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를하려고 하지만 결국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는 카프카 자신의 모습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몸"의 "차이"가 "차별"로 나타나서는 안된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도록 해준다는 기본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좋은 작품이란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이 되고, 우리에게 다양한 관점으로 다가오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 면에서 카프카의 소설에 들어 있는 풍부한 요소 중 '몸'에 관해 천착한 이 글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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