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배반 - 언어학자와 정치학자, 권력에 중독된 언어를 말하다
김준형.윤상헌 지음 / 뜨인돌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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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언어는 가치 중립적인가? 예전에 토론거리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던 주제였는데...

 

"언어는 가치 중립적이다."

" 아니다. 언어에는 이미 이데올로기가 들어 있다."

 

이렇게 첨예하게 갈리는 관점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쳐나가기도 했는데... 언어 자체에 지시대상과 지시관계, 그리고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이미 언어는 그 자체로 가치 중립일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언어 자체가 그 자체로 존재하기도 하겠지만, 언어가 언어로서 기능하는 것은 특정한 사람에 의해서 특정한 상황에서 발화되었을 때니, 발화 상황, 즉 담론의 입장에서 보면 언어는 분명히 이념(이데올로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언어에는 사전적 의미의 뜻도 있지만, 상황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이 되기도 한다. 단지 해석되기만 하지 않고, 사회-정치적인 힘을 발휘하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힘을 발휘하는 낱말이 바로 "친북 좌파" 또는 "좌빨", "빨갱이"라는 말일테다. 이 말이 상대에게 향하는 순간, 상대는 무장해제 당하고 만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사람들도 더 이상 논의를 진전시켜 나가지 못한다.

 

그만큼 이 말은 무소불위의 힘을 지니고 우리의 삶을 옭죄고 있다. 특히 선거 때에 상대 정당을, 상대 후보를 공격하기에 이만큼 좋은 말도 없으니...

 

분단 현실이라는 우리나라 상황이 이 말이 상대를 꼼짝 못하게 얽어매는 힘을 발휘하게 만들고 있다.

 

이런 말들을 언어학자와 정치학자가 주고받는 형식으로 다루고 있다. 많은 말들을 다루고 있는데, 앞에서 이야기한 "좌빨"이라는 말부터 시작하여... 우리가 아무 의식 없이 쓰는 말인 '순수'라든가 '진정성, 용서와 화해, 착함'이라는 말까지 두루 살펴보고 있다.

 

역시 말은 무서운 것.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쓰이냐에 따라 굉장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경우 힘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힘없는 사람들을 누르는 역할을 하지만...

 

이런 말들이 쓰이는 상황을 스토리텔링의 관점에서 보면, 이 말을 깰 수 있는 또다른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다.

 

최근에 논란이 되고 있는 NLL건만 보아도 그렇다. 포기니 아니니, 정상회담 대화록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말들, 실체는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 실체를 규정하는 말들이 서로 다르고, 그 말들이 힘과 힘으로써 부딪히고 있다.

 

여기에 또 하나의 힘으로써 악용되고 있는 "여론"이란 말이 사람들의 의식을, 일방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평화구역으로 만들자를 포기로 바꾸는 그런 언어의 배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지역이기주의로 바꾸는 그런 언어의 배반... 지금도 많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하다못해 공약(公約)에 있던 노인기초연금 20만원 지급도 국민연금과 연동할 수 있다고 했다고 하고 있고,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며, 최선을 다해서 하려고 하기에 공약 파기가 아니라고 하는 언어의 배반.

 

그래서 우리는 언어에 대해서 민감하게 생각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그런 습관을 들이는데, 이 책은 도움을 줄 수 있다.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쓰는 언어가 이렇게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 말들이 어떤 권력을 지니고 있는지, 우리 생활을 어떻게 침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공자는 자신이 추구하는 일이 바로 정당한 이름짓기라고 했다고 하다. 정명(正名).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언어가 본래 지니고 있는 의미로 쓰이게 하는 것, 그것은 언어를 두고 또다른 힘과 힘이 부딪치는 일일테다.

 

하여 언어의 배반을 한탄하기 보다는, 언어에는 정치-사회적인 힘이 있음을 인식하고, 언어를 바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또한 바른 언어를 사용하도록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사회가 바르게 갈 수 있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다양한 언어에 이런 사회-정치적인 함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 책이고, 아무 생각없이 이런 용어들을 사용하는 것은 또다른 권력을 형성해주는 일임을 깨닫게 해준 책이기도 하다. 조심할 일이다.

 

덧글

 

사람의 이름은 정확히 표기해야 한다. 184쪽의 두번째 줄에서 세번째 줄의 "정치인 김문수 씨나 이재호 씨"라는 문장에서 '이재호 -> 이재오'로 바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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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 교사들과 함께 쓴 학교현장의 이야기
엄기호 지음 / 따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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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에 읽히는 책이다. 이렇게 절절하게, 또는 적절하게 교육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니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교육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학교에 대한 이야기, 더 좁혀서 이야기하면 학교에 근무하면서 교육에 종사하고 있는 "교사"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제목이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이다. 제목에 쓰인 조사 "도"가 마음에 안 든다. 학교를 두려워 하는 존재가 또 있다는 얘긴데... 학교를 누가 두려워하지? 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학교를 두려워 하나? 아니다. 학생들에게 학교는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시간을 때우는 공간에 불과하다. 학교라는 공간은 친구들을 만나 놀거나, 밥을 먹을 수 있는 공간이고, 때로는 학원공부로 인해서 부족한 잠을 때우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몇몇 사교육을 받을 수 없지만, 상급 학교로 진학을 하고자 학생에게는 학교가 배움의 공간이 되고, 교사들이 가르침을 주는 존재가 되겠지만, 이는 극소수에 불과하니... 학교가 학생들에게 두려운 존재가 될 수는 없다.

 

학부모들도 마찬가지다. 학부모가 학교에서 무엇을 기대할까? 자기 아이의 성적? 아니면 자기 아이의 인성? 또는 남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사회성? 아니다. 학교는 그냥 보내는 곳이다. 자신이 일을 하는데 아이를 돌볼 수 없기에 돌봄이 필요한 공간으로 학교는 존재할 뿐이다. 여기서 지식이나 인성, 사회성이 길러진다면 더욱 좋겠지만 학교에 우선으로 치는 가치는 돌봄이다. 아이가 무사하게, 건강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이면 된다.

 

따라서 학생이나 학부모에게 학교는 무언가를 함께 만들어가고 함께 하면서 공통의 기억을 형성하는 "장소"로서 기능하지 않는다. 그냥 시간을 보내는 공간일 뿐이다. 이런 공간에 두려움을 가질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학교에 가장 두려움을 가지는 존재는 단연 "교사"다. 따라서 제목이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가 아니라, "교사는 학교가 두렵다"가 되어야 한다. 다른 존재는 몰라도 교사에게는 학교라는 공간이 두려움의 공간이라는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 사실, 이 책의 내용은 그렇게 이루어져 있다.

 

학교는 교사들의 삶의 장소이다. 교사들은 학교에서 생활함으로써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고자 한다. 그리고 자신의 생계를 해결하고자 한다. 이렇듯 학교는 교사들에게 삶의 가장 중요한 장소가 된다. 그런 장소에서 무언가 결핍을 느꼈을 때,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무언가가 잘 안되고 있다고 느낄 때 불안감을 느낀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고 느낄 때 엄청난 불안감을 지니게 된다.

 

그만큼 지금 학교는 교사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고 있다. 만족을 주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루하루가 고역일 정도로 불안을 야기하고 있다. 학생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고, 학부모와의 관계에서도 그렇고, 교육관료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고, 둉료교사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학교라는 공간을 통해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모든 존재들과의 관계가 매끄럽지 않기에 교사들은 불안감을 지닐 수밖에 없다.

 

"신인류" 또는 "별종"이라는 말을 할 정도로 학생들과는 관계가 단절되어 있으며, 자기 자식만의 이익을 위해서 학교에 간섭한다고 생각하는 "학부모"들과도 의사소통이 되지 않으며, 사사건건 간섭을 하고, 오히려 교육에 맞지 않는 지시를 한다고 여기는 교육관료들과는 예전부터 담을 쌓고 지냈으며, 한 때 동료성을 발휘하여 함께 고민하고 문제를 풀어가던 동료들과의 관계도 언제부터인가 막히기 시작했다.

 

이 책에서는 그것을 신자유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때부터라고 하는데, 그 때부터, 우리나라에서 아이엠에프라는 커다란 격변을 겪은 후부터 교사가 되고자 하는 학생들이 달라졌다고 분석하고 있다.

 

예전에는 착하고 공부잘하는 가난한 모범생이 교사가 되고자 했지만, 아이엠에프 이후에는 공부잘하는 독한 모범생이 교사가 되고자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교사가 되어서 공부 못하고, 말썽 부리는 학생을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고 한다. 이런 태도는 교사들 간에 세대 갈등으로 나타난다고 하는데... 예전에 교사가 된 중견 교사들은 말썽 많은 학생들을 통해서 자신이 깨어져나가면서 타자성을 획득했다면, 요즘의 교사는 아예 이들을 밀쳐내버리고 말아 타자성에 대한 고민조차 하지 않으니, 교사들간에 학생을 사이에 둔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또한 전산화를 통한 개별화 파편화된 교사문화로 인해서 서로 대화를 하지 않게 되었으며, 교무실에 있는 교사들은 개개인이 모두 하나의 섬으로만 존재하게 된다고 한다. 같은 직장에서 함께 생활하는데도 서로 섬으로 존재한다면 그런 직장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또한 교사들끼리 세대간에 소통이 되지 않고, 중견 교사들은 젊은 교사들을 교육에 대한 관점도 없이 주어진 일만 하려는 한심한 세대로 치부하고, 젊은 교사들은 중견교사들을 쓸데없이 간섭하는, 나이 많다고 편하게만 지내려 하며, 시대의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는 꽉 막힌 세대로 치부하니, 어찌 학교가 두렵지 않겠는가.

 

이 책에서는 이렇게 교사가 학교를 두려워하게 된 이유와 모습을 자세히 펼쳐보이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정말 "교육 불가능"이라는 말이 떠오르게 된다. 이대로 가다간 학교에서 "교육"이란 절대로 일어나지 않겠단 생각이 든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현실을 이렇게 보여주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현실을 똑바로 보라는 얘기다. 현실을 똑바로 보고 인정을 해야만 그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현재 교사들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정확히 파악해 보라는 얘기다. 현재 교사들의 처지를 정확히 파악한다면 거기에서부터 출발하면 된다. 그 출발점을 이 책이 제시해주고 있다.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충분히 할 수 있다고,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만나서 함께 관계를 만들어가고 전승을 하는 "교육" 아니겠는가고...

 

"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남을 남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나와 대등한 존재인 남으로 인정하고, 거기서부터 대화를 하자고. 대화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고, 함께 주고 받는 것이니, 칸막이로 막혀 있던 교무실에서 우선 교사들부터 동그랗게 앉아 이야기를 하자고. 교육에 대해서.

 

하여 이 책은 중견 교사들에게는 자신을 다시 보게 만드는 거울 역할을 하고, 젊은 교사들에게는 중견 교사들을 이해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고, 아울러 자신들의 "교육 활동"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해주고 있다.

 

교사들이 읽기에 불편한 진실을 담고 있지만, 교사들 자체가 모범적으로 공부 잘하던 학생들의 균질적인 집단이므로 이 정도 책은 충분히 읽고, 생각하고, 옳은 방향으로 "교육 활동"을 바꿀 수 있다고 본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우리는 "교육 불가능"의 시대를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때론 긍정하면서, 때론 너무도 슬픈 마음이 들면서, 그럼에도 "교육 가능성"에 대하여 희망을 잃지 않고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특히 젊은 교사들, 한 번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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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 시대의 불꽃 16
김문주 지음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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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

그를 처음 만난 건 풀빛 출판사에서 발간한 "풀꽃 판화 시선"에서였다.

시집의 첫 장에 판화 두 장이 실려 있었고, 그 판화는 힘있는 민중들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리고 마당극에서 걸개 그림으로 그의 그림이 이용되기도 했었고.

 

잊고 있었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났음을. 이제는 우리 곁에 없음을. 그의 작품이 미완임을.

 

정권에 아부하는 미술과 서양의 추상적인 미술을 추구하던 미술계에서 우리 전통의 맥을 잇는 미술을 하고자 했던 사람.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이란 치열한 고민을 통해 현실을 드러내고 현실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것을 미술로 보여주고자 했던 사람.

 

그의 판화는 독일의 케테 콜비츠를 떠오르게 하기도 하는데.. 케테 콜비츠도 독일의 현실을 판화로 표현해내어 독일 민중의 삶을 자신의 작품세계로 삼았던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윤이 살았던 시대와 콜비츠가 살았던 시대가 다르다는 점과 전통이 다르다는 점에서 차이가 나타나겠지만, 오윤의 작품에서는 민중들의 힘있는 모습이 잘 표현되고 있다. 그는 아무리 힘든 삶을 살아가는 민중이라도 그 힘듦 속에서도 변혁의 꿈을 잃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그것을 그의 작품 속에서 나타내려고 했다.

 

그의 작품이 동학에서 전쟁으로, 그리고 통일로 계속 나아가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의 작품을 '한(恨)을 생명의 춤으로' 바꾸었다고 평가를 하는데... 그림들을 살펴보면 무언가 힘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림에서도 이야기(스토리)가 있어서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알 수가 있다.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 그에 대한 평전이다.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스러져간 사람들의 평전 시리즈로 기획된 책 중에 16번째 책인데... 그에 대해서 잘 모르던 사람들을 위해서 아주 친절하고 자세하게 잘 쓰여져 있다.

 

한 가지 더 알게 된 사실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오윤이 '갯마을'로 유명한 소설가인 오영수의 아들이었다는 것. 참... 이렇게 세상은 서로 관계를 맺고 있구나.

 

그는 더 좋은 세상을 보지 못했다. 그의 사후 87년 민주화운동이 일어났고, 대통령 직선제가 이루어졌으며, 형식적 민주주의가 확립되어 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여 그의 작품이 과거에는 이랬지 하면서 과거를 회고하는 작품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었으면 했는데...

 

아니, 이런 오윤의 그 작품들이 지금에도 다시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다니... 그의 '칼노래'이란 판화에서 잘라냈던 그 많은 것들이 아직도 우리가 잘라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가 '통일대원'이라고 빌었던 그런 그림들이 우리에게 아직도 진행형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까?

 

이건 우리의 잘못이 아닐까? 그의 그림을 역사 속에 간직하지 않고 다시 현실로 불러내야 하는 이런 현실은 무언가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 된 것이 아닐까.

 

그의 '원귀도'가 아직도 우리에게 다가오다니.. 이런... 참...

 

민중들의 삶에서ㅡ우리의 역사에서-그는 자신의 미술을 살아냈다. 이제, 그의 뜻을 미술에서뿐이 아니라, 삶에서, 우리의 현실에서 이루어내야 하지 않을까...

 

역사는 반복하지 않는다고 했다. 만약 반복이 된다면 이는 "지금-여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잘못이다. 그의 평전을 읽고 그냥 참 잘 살았구나 감탄만 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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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감사회 - 9인의 공익제보자가 겪은 사회적 스트레스
신광식 지음 / 참여사회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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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의를 고발했다 그러나 정작 싸움의 상대는 불감사회였다"

 

이게 제목이다. 물론 검색어에는 불감사회라고만 쳐도 책이 나오지만.

 

제목만 보고도 내부고발자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다. 내부고발자란 조직 내부에서 일어나는 비리나 부정을 조직 외부에 알리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이 가끔 있는데, 이는 조직의 비리나 부정은 그 조직에 속하지 않고서는 발견해내기 어려운 것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가끔이라는 말을 쓴 이유는, 조직 내에서 생활하다보면 어느새 그 조직에 동화되는 경우가 많고, 조직에 동화되지 않더라도 좋은게 좋은 거라는 식의 사고를 하게 되거나, 아니면 자신이 겪게될 어려움 때문에 행동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부고발자는 어느 사회든지 있다. 이는 두 가지를 의미한다. 어떤 조직이든 부정이 있으면 반드시 폭로되게 되어 있다는 것과 옳지 못함에 대해서 민감성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겪게 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부정과 비리, 부패 등을 그냥 보아 넘긴다는 것이 힘든 사람들, 그것을 보고도 눈 감아야 하는 현실에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민감성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 이 민감성에 용감이 가세하면 자신의 미래보다는 사회의 미래를 위해서 이들은 내부고발자가 된다.

 

그리고 사회는 조금 더 좋은 쪽으로 발전해 간다. 우리 사회에 만연했던(분명 과거형이다. 아니 과거형이어야 한다. 21세기 민주화된 이 나라에서 과거형이 아니라면 너무 슬프지 않은가. 너무 화가 나지 않는가.) 부정 부패가 어느 정도 사라진 것도 이런 내부고발자들 덕분이다. 그들이 비록 힘든 삶을 지탱했고, 어떤 분들은 삶을 마감했을지라도, 그들이 없었다면 그냥 묻혀있었을 엄청난 비리들이 그들 덕분에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따라서 그것을 바꿀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에는 그러한 내부고발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9인의 공익제보자가 겪은 사회적 스트레스"라고 겉표지에 나온다. 내부고발자를 여기선 공익제보자라고 했다. 같은 개념으로 쓰자. 왜냐하면 내부고발자들은 공익을 위해서 제보를 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공익제보에 대해서 더 긍정적이고 이런 사람들이 대우를 받는 그런 사회의 모습이 그려져야 하는데, 이건 정반대다. 물론 제목과 표지의 글을 읽어보아도 알 수 있겠지만, 이들은 내부고발을 한 다음에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먼저 배신자라는 소리를 듣는 것. 왜냐하면 조직의 비밀을 밖으로 유출시켰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조직은 더 웃기게도 이들에 대한 정보를 다른 조직에 모두 넘긴다. 소위 블랙리스트라는 이름으로. 그럼 내부고발자의 신상을 넘긴 조직 구성원들은 배신자 아닌가. 참 우습다. 자신들의 잘못을 그 잘못을 폭로한 사람을 배신자로 몰아 덮으려는 그 심사들이. 그럼에도 이런 파렴치한 일들이 자못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불감사회였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가 되지 않겠는가.

 

두번째는 조직의 비리를 내부고발한 사람들의 개인비리로 몰아가는 것. 조직 내에서 알지 못하는 사이에 또는 망설이는 사이에, 또는 어쩔 수 없어서 함께 한 일을, 그것도 개인이 주도하지 않은 일을, 조직이 시켜서 한 일을 '네가 한 거잖아. 넌 나쁜 놈이야' 하는 이런 덮어 씌우기.

 

다음엔 왕따 시키기. 괴롭히기. 폭력을 가하기. 이거야 원. 법치 사회라고 할 수 있나 싶을 정도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무서운 건 경제적으로 힘들게 하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활동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은 살지 말라는 소리와 같은데, 이런 짓을 대놓고 하고 있으니... 이것과 더불어 엄청나게 오래 걸리는 재판과정. 역시 절차를 중시하는 법치사회답다. 당장 먹을 게 없어서 힘들어 하는 사람과 시간과 돈이 넉넉한 사람이 몇 년씩 걸리는 재판을 한다면 승자는 누가 될까? 아니 여기서 도대체 이긴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러니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여 이들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 스트레스에도 반응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고 하고, 이 책은 이런 이들의 반응을 연구하여 앞으로 내부고발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목적으로 쓰여졌다고 보면 되는데...

 

지금은 좀 나아졌으려나? 갑자기 요즘 떠오르는 일이 있는 건?

 

중요한 것은 내부고발자가 나오지 않게 조직들이 투명하게 운영되는 것이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인이 알기 힘든 부정인데, 사회에 결코 좋지 않게 작동하는 것이라면 내부고발자가 나와야 하는데, 이런 내부고발자를 철저하게 보호할 수 있는 장치들이 마련되어야 하고, 이러한 내부고발로 어떠한 피해도 당하지 않도록 우리 사회가 공익제보에 관해서는 상당히 높은 민감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적어도 공익제보를 한 사람이 오히려 피해를 보고, 부정부패를 저지른 사람이 큰소리를 치면 안되지 않겠는가.

 

이런 내부고발자를 보호하는 한 방법으로, 또는 힘없는 약자들을 보호하는 한 방법으로 요즘 논의되고 있는 '기본소득'도 진지하게 고려해봐야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정부패가 없는 사회가 가장 좋지만, 만약 있다면 이런 부정부패를 감지하고 알릴 수 있는 파수꾼 같은 존재인 내부고발자가 피해를 입지 않고 지낼 수 있는, 아니 이런 내부고발자가 공익제보를 했다는 이유로 더 칭송받는 그런 사회가 되도록 우리들이 공익에 대해서는 민감한 감수성을 지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요즘, 왜 이런 종류의 책들이 자꾸 눈에 띠는지... 참.

 

덧글

 

나는 내부고발자와 공익제보자를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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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서 골라 든 책이다.

 

제목도 자극적이다.

 

"사형수 작곡 양심수 작사"

 

시국이 어수선하면 또 무슨 간첩단 사건이 생기겠구나 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남과 북이 갈라져서 일어나는 비극적 현실.

 

그런 비극적 현실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간첩이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갔는지...

 

이 책은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의 주인공인 김성만 씨의 글을 모아 놓았다.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사람은 네 명.

 

김성만, 양동화(이들은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나중에 무기징역으로 감형이 되고, 이후에 사면되었다), 황대권, 강용주.

 

이 중에 황대권은 "야생초 편지"로 유명해지고, 지금은 생태 운동을 활발히 하고 있어서

 

그의 글을 여러 번 읽어보았으니 친숙하고, 강용주는 전향서를 거부한 일로 인권단체에서 다루고 있었고, 지금은 광주에서 치유센터를 운영하고 있다고 하는데.. 양동화와 김성만의 현재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하여간 김성만의 글, 사형수로서의 느낌, 감옥생활, 그리고 자신의 민주화를 위한 열정 등을 모아놓은 책인데...

 

그 많은 간첩 사건 중의 하나... 그의 심경을 잘 알 수 있는 책이다.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시적인 글들을 모아놓았다면, 이 책은 산문적인 느낌을 주는 글. 그러나 당시 사회를 잘 알 수 있는, 왠지 기시감을 느끼게 하는 그런 책이다.

 

이제는 이런 일이 없어야겠지. 없겠지 하지만... 분단이란 상황이 해결되지 않았고, 한 때 풀려가던 남북관계도 많이 꼬여가고 있으니... 약 30년 전의 일이라고 치부해버리기엔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우리 역사의 어두운 면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는 이런 슬픈 역사가 반복되지 말아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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