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주는 학교 우리 교육의 희망과 대안을 찾아 2
커스틴 올슨 지음, 노승영 옮김 / 한울림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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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 주는 상처란 무엇인가

. 일상에서 배움의 기쁨을 잃어버린다.
. 자신이 똑똑하지 않고 배움에 소질이 없다고 생각한다.
. 자신의 능력이 정해져 있으며, 노력과 조언, 자기 이해를 통해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자신이 그저 그런 보통 아이라고 생각하여 낙담한다.
. 학교에서 창피스러웠던 기억이 아프게 남아서 매사에 불안을 느끼고 마음의 문을 닫는다.
. 과거에 학교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거나 관심을 못 받아서 교사에게 만성적이고 습관적으로 분노를 느낀다.
. 학교에서의 경험 때문에 자신이 지적으로나 인지적으로 남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한다.
. 도전을 꺼리고 주어진 과제만 간신히 끝내고 싶어한다.
. 정답에 집착한다.
. '똑똑하다/멍청하다', '재능이 있다/없다'와 같은 이분법적 범주로 자신과 남들을 나누려 한다.
. 어른이 되어서도 자녀나 학생을 대할 때 교육과 학습에 대해 극단적인 감정에 사로잡힌다.-44쪽

학교가 주는 상처는 학생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 자신이 똑똑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 학교생활을 잘하는 데 필요한, 따라서 삶을 잘 살아가는 데 필요한 능력이 자신에게 없다고 생각한다.
. 자신의 생각이 가치가 없거나 타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 자신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평균을 밑돌 것이라고 생각한다.
. 자신이 결함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 노력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학습된 무기력'에 빠진다.
. 배움에 대한 기쁨과 용기를 잃는다.
. 자신에 대한 기대를 접고, 자제력을 잃고, 어려움을 이겨낼 끈기를 발휘하지 못한다.-54쪽

배우고 싶게 하는 세 종류의 기쁨은 무엇일까?

. 저절로 샘솟는 기쁨 : 배움의 행위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이상적인 기쁨이다. 이 기쁨은 배움의 경험 자체에 내재하며 기쁨이 기쁨을 낳아 무한 증식한다.

. 사회적 보상 : 학습자가 무언가를 숙달하거나 달성하여 사회적 보상을 얻었을 때 생기는 기쁨이다. 칭찬 스티커, A+학점, 현장학습 혜택, 장학금, 발표가 끝난 뒤에 받는 박수갈채, 친구들의 존중 따위가 이에 속한다.

. 긴장과 이완 : 까다로운 과제를 완수한 뒤에 느끼는 기쁨이다. 비슷한 것으로 프로이트의 성적 흥분과 만족 모형이 있다. 논문을 끝냈거나 열심히 공부하여 시험을 치렀을 때도 이처럼 긴장에서 풀려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세 가지 형태의 기쁨이 모두 중요하지만, 교육자들은 흔히 '저절로 샘솟는 기쁨'을 과소평가하고 연구를 등한시한다.-65쪽

창의성을 잃어버린 상처

. 남다른 생각과 능력에 대해 가치가 없거나 별나거나 괴상하다고 생각한다.
.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유용하거나 설명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여긴다.
. "네가 뭔데 감히 그런 걸 시도하니." "넌 소질 없어." "성공하지 못해."라는 식으로 자체 검열을 한다.
. "너는 그 일이 가치나 의미가 있을 만큼 열심히 하지 않았어."라는 식으로 자기비판을 한다.
. 자신이 하고 싶거나 좋아하는 일이 아닌 사회가 관습적으로 기대하는 일을 하려 한다.
.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 세상에 어떤 기여를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가슴속 나침반을 부정한다.-70쪽

순종을 강요당한 상처

. 학교에서 인정받고 받아들여지려면 규칙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규칙이 불공정하거나 부당하거나 해롭더라도 지켜야만 보상을 받을 거라고 생각한다.
.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남들보다 튄다는 이유로 처벌받게 될까 봐 두려워한다.
. 학교와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느라 자신의 참모습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학교의 규칙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지만 지키는 수밖에 없었어요."
. 외적 보상이 없으면 동기가 유발되지 않는다. "이 과목을 수강 신청한 이유는 오로지 성적이 잘 나올 것 같아서예요."-75쪽

반항하는 상처

. 자신을 지키려면 방항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인정받지 못해서 교사와 다투고 말썽을 피우고 성질을 부린다.
. 다른 사람의 견해를 용납하지 못하고 분노와 피해 의식에 사로잡힌다.
. 싸움이나 문제 행동을 학습한다.(이러한 행동은 고착되고 부적응을 일으키며 자신에게 해를 끼친다.)-77쪽

무감각해지는 상처

. 배움과 연관된 감정을 잃어버린다. (무감각, 흥미 상실, 배움의 활력 상실)
. 배움이라는 사건과 분리된 느낌을 받는다.(주어진 순서를 따라가기만 한다)
. 배움의 경험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린다.
. 배우려는 욕구를 상실한다.(배우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닥쳤을 때 용기를 내지 못한다)-80쪽

과소평가로 인한 상처

. 계급, 인종, 민족, 문화적 배경, 성별 때문에 학교에서 자신을 몰라준다고 생각한다.
. 학교에서 신상 정보를 토대로 자신을 판단한다고 생각한다.
. 학습 결과도 이러한 판단을 '확증'한다.
. 학습자에 대한 판단 때문에 학습 기회를 얻지 못한다.-86쪽

완벽주의로 인한 상처

. 학교에서 자기가 아무리 잘해도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 항상 다음 목표를 생각하고 언제나 최고, 최선을 이루고 싶어한다.
. 실패에 대해 취약하고, 실패하거나 잘못을 저지르면 큰일 난다고 생각하며, 한 번이라도 실패하면 영영 오점이 남는다고 생각한다.
. 남이 정해준 목표에 과도하게 집착하여 정작 자신의 배움과는 단절된다.
. 실수를 저지를까 봐 두려워서 배움에서의 도전을 꺼린다.
. 실패가 두려워 배움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90쪽

평범해서 받는 상처

. 적절하지 못한 시험이나 우열반 편성 때문에, 자신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 능력은 고정되어 있으며, 아무리 노력해도 능력을 향상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다.
. 자신에 대한 기대가 낮아서 꿈과 열정을 억누른다.
. 자신의 능력을 부인한다.
. 학교에서 자신을 주목하지 않고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 자신에 대해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94쪽

학교가 주는 상처들의 공통점

. 학생의 인지 능력, 정서 상태, 정체성의 차이를 용납하지 않는 교육환경에서 생겨난다.
. 남과 다르다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하고 수치심을 느낀다.
. 순응의 압박 속에서 교육환경에 적응하지 못할 때, 또는 너무 잘 적응할 때 생긴다.
. 학습자로서의 자기 자신에게서 소외된다.
. 배움의 기쁨을 잃어간다.-97쪽

학교가 준 상처를 부인하면, 자신의 정서적 경험을 과소평가하고 상처를 남의 일로 돌리게 된다. 이러한 부인의 밑바탕에는 깊은 수치심과 후회가 깔려 있다.-138쪽

치유 과정의 공통점

. "진흙에서 꽃이 핀다."라는 조너선 무니의 좌우명.
. 나의 단점은 뛰어난 재능의 그림자다.
. 나는 실수로부터 배우는 데 능하다. 실수는 나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말해준다.
. 나는 언제나 더 나아질 수 있다. 나는 높은 기대를 품고 있다.
. 실수를 저지른다고 해서 세상이 끝장나는 것은 아니다!(화가 로버트 라우션버그의 좌우명은 "망치는 게 좋은 것이다."였다!)
. 도전은 분명 근사한 일이지만, "넌 할 수 없어."라는 말을 듣는 것은 달갑지 않다.
. 나를 규정하는 것은 남들이 아니라, 내가 다니는 학교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 나는 자신에게 관대하다.
. 내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안다. 내 감정을 활용하고 약점을 현명하고도 전략적으로 보완한다.-140쪽

치유에 도움이 되는 것

. 학교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와중에도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고 지지하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어도 도움이 된다. 조너선에게는 어머니가, 토드에게는 아내가 있었다.
. 아이들에게 꼬리표를 붙이고 분류하지 않는 학교 환경
. 평범하지 않은 학습자에게 지적 자극을 주는 학교 환경(이들의 고유한 학습 재능을 존중하고 끌어낸다.)
. 경험을 긍정적으로 재해석하도록 끊임없이 유도하는 것
. 학교 교육에 대한 비판적 인식-174쪽

학부모, 당당하게 자기 몫을 하라

. 학교의 신화를 벗겨내라.
. 자신의 교육관이 어떠한지, 이것이 학교의 교육관과 다를 수 있음을 자녀에게 솔직히 이야기하라.
. 학교의 교육관에 전부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자녀의 학문적 성과를 격려하고 칭찬하라.
. 자녀가 스스로 자기 주장을 할 수 있는 실질적 전략을 함께 고민하라.
. 현실적으로 대처하라.
. 부모 자신의 삶에서 배움의 기쁨과 즐거움을 실천하라.
. 자녀가 강인하고 현명하다고 믿으라.
. 결코 자녀를 포기하지 말라.-198쪽

변화를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우선 학교의 잘못된 관행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학교가 왜 이렇게 돌아가는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이야기해야 한다. 변화는 작은 실천에서 시작된다. 날카롭게 의문을 제기하고 관습에 저항하는 동료를 돕고, 학교는 원래 이런 곳이라는 대답을 거부하라. 사소한 변화가 거대한 혁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변화는 이렇게 시작된다.-237-2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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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공정하고 짝을 이루는 말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법 하면 어려움, 불공정을 떠올릴까?

 

헌법재판소라는 법 위의 법기관이 있는데, 그 헌법재판소장 청문회에서 나온 온갖 소문들, 진실들, 그런데 참, 법 위의 법을 판결하는 기관인데, 그런 기관의 수장에게 좋지 못한 소문들이 또는 사실들이 나오고 있으니... 법이란?

 

악, 법이라고?

 

이건 좋아하는 말이 아니다. 경탄의 말이 아니라, 경악의 말이다.

 

법의 잣대로 힘없는 사람을 더 힘들게 할 때 힘없는 사람들이 외칠 수 있는 말이다. 악! 법이라고?

 

제길, 법은 세상을 공정하게 하기 위해, 오직 힘에 의해 지배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막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법은 힘있는 자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있으니...

 

법이라는 한자어가 기가 막히다. 물이(水) 가는 데(去). 물이 가는 곳, 그곳은 낮은 곳이다.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 평형을 이룬다. 즉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존재하는 것, 그것이 바로 법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이를 바꾸면 물은 꼭 낮은 곳으로 흐른다. 낮은 곳에 모인다. 낮은 곳에 넘친다. 물로 인해 힘들어 하는 사람들,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나라 법은 앞의 의미가 아니라 뒤의 의미인가? 그렇지 않아야 하는데...

 

온갖 소송으로, 온갖 법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보면, 힘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로지 힘없는 사람들이 법 때문에 힘들어 한다.

 

그런 법, 요즘 더 자꾸 생각이 난다. 그러면 안되는데... 우리에겐 그런 법은 필요 없는데...

 

오래 전에 나온 책이지만 이 책이 요즘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만큼 이 놈의 법이란 놈이 내게는 공정과는 거리가 먼 존재로 다가왔나 보다. 법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없어져야 하겠지.

 

그래야 법도 제 역할을 다했다고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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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크리스 임피 지음, 이강환 옮김 / 시공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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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궁금해 하면서도 아직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 두 개.

 

죽음이란 무엇인가?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결국 사람들은 탄생과 죽음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 이 질문들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질문의 최대치이지만 반대로 가장 기본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에 대한 많은 책들이 나와 있지만 우리들은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생명의 탄생이나 세상의 시작에 대해서도 많은 책이 나와 있지만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정답은 있지만, 아직 우리 능력으로는 정답에 다가갈 수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이 질문이면서도 대답을 할 수 없는, 또는 누구나 대답하려고 도전하고 있는 질문, 여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매달려 왔던가.

 

이 책은 죽음이 아니라 탄생에 대한 탐구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우주까지 포함하여-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최근에 나온 과학이론을 총동원하여 알려주고 있다.

 

세상의 시작을 탐구하는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라고 하는데, 그러기에는 너무도 많은 수학, 물리학, 천문학 지식들이 동원되고 있다. 이런 과학지식이 없는 사람은 도대체 뭔 얘기를 하는가 하고 읽다가 포기할 수밖에 없고, 또한 약간의 지식을 가진 사람에게도 이 책은 어렵다.

 

아니 어려울 수밖에 없다. 물리학이나, 수학이나 천문학이나 전공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누가 다시 공부하겠는가. 얄팍하게 고등학교 때까지 배운 지식으로 버티든지, 아니면 뭔 소리야 하면서 책을 덮든지 할 수밖에 없다.

 

교양인을 양성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국민공통과정이라 할 수 있는 고등학교에서도 문과와 이과를 나누어 편중된 교육을 하고 있는 현실에서 문과생들은 과학분야에서는 문맹이 되며, 이과생들은 인문학 분야에서 문맹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이런 반성 속에서 책을 끝까지 밀고 간다. 어짜피 딸리는 과학지식으로 이 책을 비판할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있으니, 책의 내용을 조금이나마 이해해야지 하면서 읽는다.

 

우주로의 여행이 세상의 시작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 말에서 이 책은 호기심을 자극한다. 우주는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데, 이런 우주 여행이 우리의 근원으로 가는 길이라니...

 

가만 생각해 보면 그렇겠다 싶기도 하다. 이것은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빛 때문이다. 빛의 속도가 대략 일초에 30만 킬로미터를 간다고 하니, 빛의 속도로 계산을 하면 100억광년 떨어져 있는 별을 우리가 관측한다는 사실은 100억년 전의 별을 보고 있다는 얘기가 되니 말이다.

 

이 책에서는 우주의 역사를 137억년 정도라고 하는데,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별들에서 우리는 우주의 시작을 발견할 수 있고, 또한 그러한 연구가 진척되고 있다는 얘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우리가 직접 가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길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줌으로써, 빛보다 빠른 물질을 개발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우주에 대한 관심을 포기하지 말 것을 은연 중에 강조하고 있다고나 할까.

 

엄청나다. 정말로 방대한 스케일이 책 속에 펼쳐지고 있다. 이 자그마한 나라에서, 그것도 서로 아웅다웅하면서 살고 있는 모습이 너무도 좀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단위 자체도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로 크거나 작고. 우주의 크기는 무한대에 가깝다고 하고, 어떤 은하들은 빛의 속도보다도 더 빠르게 우리 은하로부터 멀어져 가, 나중에는 우리 은하밖에는 관측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나올 정도니...

 

하늘을 본다는 것, 천문학을 공부한다는 의미가 아니더라도 방대한 우주에서 나란 존재는, 우리란 존재는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는 것이리라.

 

우리의 무한한 상상력을 과학지식으로 조금씩 조금씩 채워나가려는 노력. 이것이 천문학자, 물리학자, 수학자들이 하고 있는 일이란 생각이 들고, 이러한 과학과 종교가 결코 배타적이 아님을 저자의 생활에서(그는 티벳 스님들에게 천문학을 강의한다고도 하고, 마찬가지로 스님에게 배운다고도 한다) 또 저자가 예를 든 목사이자 천문학자인 사람의 이야기에서도 배우게 된다.

 

과학에 문외한인 나같은 사람에게 이런 책은 좀더 나를 좀더 낮춰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는 점, 조금 더 겸손하게 이 세상의 존재들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는 점, 좀더 커다란 세상을 꿈꿀 수도 있어야 한다는 점, 우리의 눈에는 너무 큰 것도, 너무 작은 것도 보이지 않으니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는 점에서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한가지 이 책이 우주에 대한 안내서 역할을 한다면, 적어도 일반인들이 읽어야 한다고 한다면 이 책의 부록에 천문학이나 물리학의 전문 용어들을 해설해 주는 친절을 베풀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켈빈 온도라는 말이나, 그밖의 다른 용어들에 친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다른 참고자료를 뒤적거리는 일은 책에 집중하는 시간을 뺏어가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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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조정육 동양미술 에세이 1
조정육 지음 / 아트북스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그림에는 어느 한 순간이 포착되어 잡혀 있다. 잡혀 있다고 해야 한다. 그림 속에 있는 그 순간은 영원히 그림 속에 갇히게 된다.

 

그런데 그 갇힘 속에서도 끊임없이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갇혀 있으면서도 갇혀 있지 않음. 그것이 그림의 숙명이다.

 

그림은 갇혀 있기만 해서는 그림으로서의 존재를 완성할 수 없다. 갇힘으로서 갇힘을 벗어나는 순간 그림은 그림으로서 존재한다. 그것이 그림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가 된다.

 

이것을 많은 사람들은 대화라고 한다. 그림과 사람이 대화를 하는 순간, 사람은 그림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 순간에 사람의 삶은 더욱 풍요로와진다. 이것이 그림이 지닌 갇혀 있지 않음이다. 언제나 그림은 제자리에 있는 듯하지만, 결코 제 자리에 있지 않는다. 그림은 늘 같은 모습을 지닌 듯하지만, 같은 모습이 아니다. 

 

사람에 따라서, 때에 따라서, 장소에 따라서 그림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다르게 말을 걸어온다. 그림은 갇혀 있으면서도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자신을 가꾸고 있나 보다.

 

그림 속에서 어떤 이야기를 읽어내는 순간, 그림 속에서 삶을 발견해내는 순간, 그림은 단순한 그림으로 존재하지 않고 내 삶으로 존재하게 된다. 이런 그림을 만나는 순간, 꽃봉오리가 활짝 터지듯이 삶이 만개하게 된다.

 

지은이의 삶과 그림이 대화를 하고 있다. 이런 대화를 엿들으며 나 또한 그림과 대화를 한다. 그리고 내 삶과 대화를 한다.

 

그림 속에서 가격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림에서 삶을 읽어내고 삶을 발견한다. 그러한 그림 읽기, 아니 그림과 함께 살아가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문화예술교육이 강조되고 있다. 이 중에 학교에서는 체육을 가장 강조하고 있지만, 체육만큼이나 음악, 미술교육이 강조되어야 하고, 또한 다른 문화(철학이라든지, 고전 읽기라든지 하는 인문학이라는 분야)도 강조되어야 한다.

 

한 쪽만 강조해서는 제대로 된 삶을 영휘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창작을 중심으로, 또는 감상을 중심으로, 기법을 중심으로 미술을 가르치는 방향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미술을 배우는 이유 역시 자신의 삶을 좀더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이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이 책에서처럼 그림을 통해, 미술을 통해 자신의 삶의 한 귀퉁이에 숨어 있던 그 어떤 것들을 끄집어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교육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겠지만, 그림을 보며 자신의 삶을 발견해내게 하는 교육, 또는 음악을 들으며 자신의 삶과 대화를 하는 교육, 그런 교육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미술관에서 스윽 지나치는 미술관람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불시에 자신의 삶 속으로 그림이 들어오게 되는 그런 순간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미술교육.

 

세계적인 화가들의 그림을 보여주고 작가와 기법을 외우게 하기 보다는, 이런 그림에 관한 에세이들을 읽히면 자연스레 그림과 대화하는 사람으로 성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러기에는 우선 여유가 있어야겠지.

 

대화란 여유에서 나올테니, 여유가 없을 땐 일방통행만이 이루어질테니.

 

주로 우리나라 그림들이 많고, 가끔 중국과 일본 그림이 나온다. 하여 동양화를 보는 즐거움도 있고, 이런 그림들을 통해 자신의 삶을 끌어내는 모습을 읽는 재미도 있는. 하여 이런 글을 읽는 여유를 만끽하는 그런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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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엽서 - 누이에게 카프카 전집 10
프란츠 카프카 지음, 편영수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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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카프카가 누이에게 보낸 편지 모음이다.

 

누이라고 해봤자 카프카는 자신과 가장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또는 가장 마음 놓고 이야기할 수 있었던 오틀라에게 주로 편지를 보냈다.

 

여기에 펼쳐진 120편의 편지 중에서 오틀라에게 보낸 편지가 100편이 넘는다.

 

그만큼 카프카는 자신의 진솔한 마음을 오틀라에게 전달했다고 보면 된다.

 

프라하에서 살면서 프라하를 힘들어 했지만 결코 프라하를 벗어날 수 없었던 카프카. 그는 베를린에서 작가로서만 생활을 영위하려고 했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 못했으며, 작가로서의 삶 때문에 펠리체와의 약혼도 결국 파혼으로 치달았으며, 작가로서의 삶에 매진하겠다는 욕구가 소음에 견딜 수 없게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이해해주는 오틀라에게 편지를 보냈으며, 오틀라에게서 어떤 위안을 얻곤 했다는 것을 편지글에서 알 수가 있다.

 

오틀라 역시 하나뿐인 오빠를 잘 보살펴주었으며, 무엇보다 오빠를 잘 이해했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카프카는 오틀라의 살뜰한 보살핌 속에서 만족한 생활을 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상당히 예민한 성격의 카프카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남들과는 다른 시간을 살았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남들이 활발하게 움직일 때 그는 휴식을 취했으며, 남들이 쉴 때 비로소 작품 활동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자신만의 작업을 하길 원했다. 그래서 시골에 왔을 때, 아마 취라우던가, '자신은 급행을 타고 왔는데, 소음은 완행을 타고 왔나 보다'고, 시골에서도 소음을 느끼며 자신의 생활에 방해를 받았다고 여겼다.

 

그가 채식을 위주로 한 식습관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편지를 통해서 알 수 있고, 또 부모들과도 많은 편지 왕래가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는데, 불행히도 부모에게 보낸 편지나 부모 또는 오틀라가 카프카에게 보낸 편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게 아쉽지만...

 

적어도 카프카는 편지를 통해서 구원을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편지를 통해서 소통을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하고. 친구들과 가족들과 그밖의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그는 육체적으로는 한 공간에 매여 있었지만, 그래서 육체적으로는 자신만의 공간에 처해있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어디로든 갈 수 있지 않았을까.

 

또한 그것이 그가 고독에서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몸은 프라하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지만,(그가 여행을 하거나, 또는 말년에 잠시 베를린에 머물렀던 것은 제외하자. 그는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할 생각도 했지만 결국 건강 문제로 포기하고, 베를린에서도 작가로서의 삶을 영위하고자 했지만, 말년에 죽음에 이르러서야 도라와 함께 산 짧은 기간만 베를린에 체류했을 따름이다. 그것도 아주 힘든 시기에.) 그의 정신만은 전세계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는 얘기가 되고, 그것이 지금도 우리가 카프카를 읽는 이유가 된다는 생각이 든다.

 

카프카의 내면에 다가갈 수 있는 편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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