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교사 양성과정
홍세화.이상대.이계삼 외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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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가장 범생이 집단이 모인 공간이 교사 집단일텐데... 이들을 대상으로 불온하라고 연수를 하다니...이걸 배짱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이렇지 않으면 우리 교육이 나아질 가능성이 없다고 해야 하나. 불온한 교사 양성이라는 강좌에 교사들이 들으러 왔다는 사실 자체도 참 놀라운 일이다.

 

내가 경험한 교사들은 범생이 중에서도 범생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이들은 학창시절에 범생이였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학교 생활을 하면서 교사들과 부딪히지 않고 학교 생활을 했으며, 또한 성적도 좋아서 교사들의 칭찬과 격려를 받으며 학교 생활을 하였을 것이다. 게다가 이들은 대대학에서도 다른 방면으로 눈을 돌리지 않고 공부를 했으며, 그런 결과로 임용고시라는 교사 임용시험에 합격을 하였을 터다.

 

이런 과정을 거친 그들은 자신들의 사고가 한정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세계가 마치 세상의 전부인양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 요즘은 교사들의 경제적 지위도 높아졌으며(많은 돈을 벌지는 못하지만, 정규직에다가 평생이 보장되어 있는 직장에, 월급이 밀릴 가능성은 거의 없는 상태에, 월급도 평균 이상이라고 할 수 있고, 방학이 보장되어 있다), 또한 경제적 지위가 어느 정도 되는 사람들이 교사가 되는 경향이 많다.

 

예전에는 돈이 없는 머리 좋은 학생이 사대나 교대를 가서 교사를 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면(그래서 어려운 형편의 학생들을 자신의 체험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었다면), 요즘은 어려운 가정형편의 학생들은 교사도 되기 힘든 현실이라는 것이다.

 

이런 교사들, 지금의 학생들을 이해하기 힘들리라. 그러니 교육이 안된다는 둥, 학교 생활이 너무 힘들다는 둥 이런 하소연들을 학생이 아닌 교사들이 하고 있는 실정이리라.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학생과 교사가 겉돌고 있을 수만은 없다. 이것이 불온한 교사 양성과정이라는 강좌를 개최한 이유이기도 하리라.

 

불온하다는 얘기는, 지금 내가 속해 있는 곳을 그 곳의 시선이 아니라 밖의 시선에서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즉, 비판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순응하고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밖을 볼 수 있는 능력,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 그래서 희망을 잃지 않고 희망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는 태도를 지닌다는 얘기다.

 

이 강좌에서도 나오지만 기대란 남이 해주기를 기다리는 순응적인, 무비판적인 태도라면, 희망이란 내가 하겠다는, 내가 해야만 한다는 그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그리고 비판적인 태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교사들, 적어도 학생 앞에서 삶을 보여주는 존재들이라면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강고한 교육의 틀에 얽매여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학생들로 하여금 이 체제에 빠져들어가게 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게 된다.

 

하여 교사들은 불온해야 한다. 불온하지 않으면 자신이 비판하고 있는 교육제도, 교육현상을 고착화시키는데 앞장서게 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규교사들, 한 때는 벌떡 교사, 비판의식이 있는 교사였으나 지금은 한걸음 떨어져 있는 교사들이 들으면 좋은 강좌라고 했다. 아마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들었겠지 하고는 있지만, 제목에서 주는 불온이라는 말을 듣고도 강좌를 듣겠다고 온 사람이라면 이미 볼온한 교사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학교라는 조직 내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이 많지만, 학교를 벗어났다고 해도 교육을 그만둔 것은 아니라는, 교육은 단지 학교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도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꼭 교사들이 읽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교육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읽어도 좋을 것이다. 물론 교사들은 읽어야 한다. 이 책에 나오는 주된 내용이 교사들이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 때 공부는 수업방법론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눈, 또 교육과 관련된 폭넓은, 그리고 깊이 있는 공부를 의미한다.

 

시간이 부족하다고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마음이 통하는 몇몇 교사들끼리라도 모여 이야기한다면 교육은 조금씩이라도 변해갈 희망이 있다고 한다. 이것이 불온한 교사 양성과정이라는 이 책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일 것이다.

 

안 돼. 이미 틀렸어. 이런 얘기는 하기 쉽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이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자세 아닌가 반성하라고 한다.

 

학교라는, 교육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자신을 그냥 내맡기지 말고 그 흐름을 밖에서 볼 수 있는 자세, 이것이 불온한 자세이고, 밖에서 본 것을 가지고 내부에서 흐름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자세, 그것이 불온한 교사가 지녀야 할 자세라고 이 책은 주장한다.

 

교사들이여, 제발 불온해져라. 불온한 교사들이여, 그대들이 학교에서 자신의 뜻을 펼쳐라.

 

그런 교사가 많아져야 한다. 학생들을 위해서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사들 자신을 위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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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 집단의 문학을 위하여: 카프카론 현대의 문학 이론 26
질 들뢰즈 외 지음, 조한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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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란 작가 자체가 우리나라 이상이 받는 대접을 받고 있을 정도로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그보다 더 어려운 말을 구사하는 철학자인 들뢰즈와 가타리가 카프카에 대해 쓴 책은 읽기 전부터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도대체 뭔 소리를 할까?

 

사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공동 저작도 많지만, 독자적인 저작도 많은데, 이 책은 둘의 공저다. 어디까지가 들뢰즈의 생각이고, 어디까지가 가타리의 생각인지 알 수가 없다. 아니 굳이 알 필요도 없다.

 

이 책에서 이들이 펼친 내용을 따라가기도 벅차니 말이다.

 

이 책을 읽을 땐 조건이 있다. 하나는 카프카의 작품을 적어도 절반 이상은 읽었을 것. 최소한 '변신',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유형지에서', '개에 대한 연구' '시골 의사'와 같은 단편과 장편이라고 할 수 있는 "성, 소송, 실종자"는 반드시 읽어야 한다. 그래야만 이 책의 내용을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다.

 

두 번째 조건은 최소한 들뢰즈, 가타리의 철학 개념은 알 것. 이들의 철학 개념이 카프카의 작품을 읽는데 도처에서 튀어나오고 있다. 그리고 이런 개념에 카프카의 작품을 대응시키고 있다. 그러니 이들 철학자들의 개념을 알지 못하면 이게 뭔 소린가 하면서 책장을 넘길 수밖에 없다.

 

즉, 책을 읽어가면서 출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읽으면 읽을수록 미로 속으로 들어간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빛에서 점점 멀어지는 읽기는 읽는이로 하여금 피로에 나가떨어지게 한다. 김현의 말마따나 '책 읽기의 괴로움'이 된다. 그런데, 이들 철학자의 개념에 조금 익숙하다면 '행복한 책읽기'가 된다.

 

그렇다고 우리가 철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철학을 심도 있게 공부한 것도 아니니, 대략 개념에 대한 맥락만 이해하면 된다는 얘기다. 여기에 우리 자신이 읽은 카프카를 더붙인다면 훌륭한 읽기가 되지 않을까 한다.

 

아주 오래 전에 산 책인데... 최근 카프카의 글들을 다시 읽으면서 이 책도 사놓았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읽었는지 읽지 않았는지 가물가물했는데, 책을 다시 읽다보니, 한 부분만 읽었다. 그 부분에만 표시가 되어 있으니 말이다. 읽은 부분이 제3장 '소수집단의 문학이란'이다. 아마도 제목과 관련지어서 이 부분만이라도 이해하자는 생각으로 읽지 않았을까 한다.

 

하지만 다시 읽어보니 그건 읽기의 실수다. 어리석은 읽기였다. 물론 제3장부터 읽는 것 좋다. 아니, 어쩌면 제3장부터 읽어야 더 좋을 듯하다. 다 읽는다면 말이다. 우선 제목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읽는 것이 좋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이들이 말하는 소수성이란 정통에 대비되는 개념이라는 사실, 통념에 대비되는 존재를 소수집단이라고 보면 되니, 독일인도, 체코인도 되지 못하고, 유대인으로서, 변형된 독일어에 관심을 가진 카프카는 소수집단에 속하는 문학을 한 사람이 된다.

 

이 다음에 그의 작품들에 나타나는 여러 모습들을 이야기하는데, 머리에 와닿은 개념은 탈영토화, 재영토화다.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부분에서 벗어나(탈영토화), 자신의 다른 영토를 구축하는 것(재영토화).

 

결국 카프카의 작품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세상을 다르게 보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보면 된다. 이렇게 탈영토화, 재영토화하는데 탈주가 이루어지고, 이런 탈주는 변신으로 나타난다고 보면 되고, 이러한 탈주들은 각자의 욕망을 지니고 집단을 이루며, 연결되고, 배치되는 특성을 지닌다고 보면 된다는 것.

 

결국 카프카의 문학은 '나무'처럼 중심에서 확고히 연결되어 나아가는 문학이 아니라, '리좀'처럼 각자의 영역이 자신만의 특성을 지니면서 방향없이 나아가는 문학이라는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다.

 

'리좀'이 잘 이해 안되면 감자를 생각하면 된다. 감자의 뿌리가 땅으로 들어가 감자들이 열리듯이 카프카의 작품에서 등장인물들은 이 감자들처럼 존재한다고 보면 된다는 얘기.

 

독립적으로 존재하나 독립적이지 않은 존재들, 서로 연결이 안되어 있을 것 같으나 서로 연결이 되어 있는 존재들, 그래서 결론이 날 수가 없는, 영원히 흩어나가는 그런 존재들이 바로 카프카의 작품이란 얘기다.

 

이런 작품이기에 아직도 우리는 그에게서 이야기를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이런 얘기를 이 책은 하고 있다.

 

덧말

 

아쉬운 점은, 들뢰즈, 가타리의 철학 용어에 대해서 맨 뒤에 부록으로 해설을 달아주었으면 하는 것과, 번역상에서 작품들의 이름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

가령 이 책에서는 "심판"이라고 하는데, 요즘 읽은 솔 출판사에서는 "소송"이라고 하고, 이 책에서는 "아메리카"로 나와 있는데, 지금은 "실종자"라고 하는 것 등. 작품 명에 대해서도 헷갈린다는 점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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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편지 - 약혼녀 펠리체 바우어에게 카프카 전집 9
프란츠 카프카 지음, 권세훈 외 옮김 / 솔출판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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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사랑이구나, 이런 사랑은 집착이지 않을까,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사랑을 하는구나, 내가 아닌 남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이런 사랑.

 

카프카가 펠리체에게 보낸 편지를 읽으며 든 사랑에 대한 개념이다. 어쩌면 광적이지 않을까, 정신병적이라는 말이 들어맞는 그런 편지들이다.

 

사랑한다고? 단 한 번을 만나보고서? 무슨 운명적인 사랑? 작가적 감수성으로, 자신의 인생에 느닷없이 들어와버린 펠리체란 여인에게 카프카는 열정적으로 편지를 보낸다.

 

첫편지 이후, 그는 거의 매일 여러 통의 편지를 쓴다. 그리고 매일 편지를, 하다못해 그냥 서명이 든 엽서라도 보내 줄 것을 펠리체에게 요구한다. 편지가 오지 않으면 왜 편지를 하지 않았냐고 징징거리는 편지를 보낸 카프카.

 

그의 작품에 나오는 분열적인 모습, 광적인 모습, 자신은 진지하게 생각하고 대화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과는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고 있는 모습을 그의 편지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나 할까.

 

이렇듯 열정적으로 펠리체의 사랑을 갈구하던 그는, 어쩌면 펠리체라는 살아있는 육체를 지닌 여인이 아니라, 자신을 받아줄 수 있는 이상적인 여인을 추구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만남보다는 편지를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루어질 수 없고, 이루어져서도 안되는 그런 사랑이 되어버리고 만다.

 

신은 멀리 있어야 한다. 인간의 세계에 내려온 신은 이미 신이 아니다. 그는 박해받을 수밖에 없다. 이미 인간과 함께 했기에 신성을 잃고 인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화된 신은 카프카에게는 견딜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그러니, 자꾸, 멀어질 수밖에...

 

자신에게 필요한 공간은 지하실이라고 하는 사람, 그런 자신에게 식사를 제공해줄 사람만을 필요로 하는 사람, 그에게는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 그것이 카프카와 펠리체 만남의 비극이다.

 

이년 동안은 격정적으로, 그리고 두 번의 파혼으로 그들의 관계는 끝나고 만다.

 

약혼을 하고 함께 살 준비를 하는 동안 그들은 서로의 차이를 확인할 수밖에 없다. 편지로 주고받던 이상적인 세계와는 다르게 현실의 세계는 그들을 부딪히게 만든다. 그리고 그러함 부딪힘 속에서도 관계를 이어나가던 그들은 한 번의 파혼, 그 다음 간신히 이어져 나가던 관계를 현실에서 이룰 수 없음을 안 카프카에 의해서 두 번째 파혼이자, 영원한 이별로 이어진다.

 

카프카는 두 번째 이별의 근거로 자신의 폐병을 들고 있지만, 사실 폐병이 아니더라도 이들의 관계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리라. 이상의 세계를 이루기 위한 사랑과 현실의 세계는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편지들은 소중하다. 카프카의 내면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얼마나 문학에 목숨을 걸고 있었는가를 편지들은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랑이 그를 지금도 우리에게 읽히는 작가로 만들지 않았을까. 그에게는 몇 년 동안 펠리체는 살아있는 육체를 지닌 사람이라기보다는 문학으로 존재했다고 해야하니까. 펠리체로 인해서 그는 문학을 살 수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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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편지 - 약혼녀 펠리체 바우어에게 카프카 전집 9
프란츠 카프카 지음, 권세훈 외 옮김 / 솔출판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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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 안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을 억제하기엔 외부 세계는 너무 작고 너무 솔직하고 너무 정직합니다.-83쪽

얻는 게 많으면 많을수록 사람들은 이 회전하는 지구 위에서 더 많이 두려워해야 하기 때문입니다.-84쪽

임의적인 것도 필연적으로 변화하기 때문입니다.-93쪽

갈망은 절망감에서 나온 것입니다. -106쪽

평온함과 강함은 불안과 허약함이 필요로 하는 곳에 머물러야 할 운명인 것 같습니다.-124쪽

최고의 것이 주어지지 않았을 때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135쪽

낯선 사람들과 있을 때 얻을 수 있는 만족스런 첫 결과는 - 순간적인 만족이긴 하지만 - 영원히 강요된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손가락 끝까지 부여받은 책임감의 대부분을 잊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156쪽

그대가 있다 해도 나는 내 소설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 글쓰기를 통해 나는 삶을 붙들고 있고 그대가 서 있는 배를 붙들고 있으니까요.-279쪽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을 과도하게 열어놓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적인 교제에서 마음을 극도로 열어놓거나 헌신을 할 때는 자신이 그 안에서 길을 잃어버린다고 느끼게 됩니다. -311쪽

기호는 항상 존재하게 마련이지요. 모든 것은 기호로 채워져 있지만, 우리는 기호와 마주칠 때에만 알아차릴 수 있지요.-338쪽

"그녀 없이는 살 수 없지만 그녀와 함께도 살 수 없다."-500쪽

결혼이 요구하는 것은 인간적인 일치, 즉 모든 의견들의 근저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입니다. 이러한 일치는 검증할 수 없고 느낄 수만 있으며, 따라서 인간적인 결합의 필연성입니다. 이것으로 인해 개인의 자유는 조금도 방해받지 않습니다. 개인의 자유는 우리들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필연성이 없는 인간적인 결합에 의해서만 방해받습니다.-530쪽

나는 문학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나는 다른 그 어떤 것도 아니며 그럴 수도 없습니다.-595쪽

나를 방해하는 것은 실제적인 사실이 아니라 극복할 수 없는 두려움, 즉 행복에 대한 두려움이며 더 높은 목적을 위해 나를 괴롭히는 욕망과 명령입니다.-615쪽

손실을 뚜렷이 의식하면서 결혼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내가 유일하게 바라는 결혼생활에서는 아내와 남편이 인간적인 본질에서 서로 동등해야 통일성 속에서 자립적이 될 수 있습니다. -641쪽

인간은 그 현재 모습을 받아들이거나 현재의 모습대로 내버려두어야 합니다. 인간을 변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기껏해야 본질을 방해할 뿐이지요.인간은 무언가를 끄집어내고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을 만큼 개별적인 것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은 하나의 전체입니다. 그대가 한쪽 끝을 잡아당기면 그대의 의지와는 달리 다른 쪽 끝도 움찔하고 움직입니다. -643쪽

직접적인 경험은 전체적인 조망을 방해합니다. -658쪽

칼은 단지 앞쪽만 찌르는 것이 아닙니다. 돌아서 뒤쪽을 찌르기도 합니다.-9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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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주는 학교 우리 교육의 희망과 대안을 찾아 2
커스틴 올슨 지음, 노승영 옮김 / 한울림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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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겨울방학 중.예전 같으면 학생들이 남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 몸을 비비꼬면서 무엇을 할까 고민을 할 때인데...집에서 몇 발짝만 나가면 학원가가 있고, 학생들은 오전에서 오후 또 밤까지

이 학원 거리에서 쏟어져 나온다.

 

방학맞이 특강이란다. 학교에 다닐 때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학원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아이들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뒤떨어진다고 생각을 하고, 그런 관념이 널리 퍼져 있기도 하다. 이런 모습에 학교는 책임이 없을까?

 

오히려 아이들이 학원에 목매달고 있는 이 현실은 학교에서 받은 상처로 인해서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학원에서 배우고, 학교에서 잔다고는 해도 아직도 학교가 삶에서 중심이고, 학원은 학교를 보조하는 곳이라는 인식에는 변함이 없다면, 이런 학원 문화에 대한 책임에서 학교가 벗어날 수는 없지 않을까.

 

즉, 학교에서 받은 상처를, 특히 학습면에서 받은 상처를, 학원을 통해서 치유하려고 하지 않나 하지만, 학교에서 학습으로 상처를 받은 학생은 학원에서는 오히려 그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강화하고 만다. 학교보다도 더 심하게 우열반으로 나누어 학생들을 편가르는 쪽이 학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학교는 역시 학생들에게 상처를 준 가장 큰 원인이 된다. 그렇기에 학원이 성업을 이루고 있겠지. 만약 학교가 학습만을 강조하지 않았다면, 그것으로 학생들을 평가하지 않았다면, 그것으로 학생들을 줄세우고 편가르지 않았다면 이렇게 학원이, 그것도 보충학습 학원이(말이 보충학습이지 사실은 선행학습 학원이다. 아이들은 미리 한 학기, 한 학년, 심하게는 두세 학년 분을 미리 배운다.) 이렇게 성행하지는 않았으리라.

 

이런 상처를 사람들은 쉽사리 외면한다. 상처는 있는데, 없는 척한다. 또는 별 것 아닌 척 한다. 분명히 별거인데 말이다. 그래서 상처를 직시하지 못하기에 치유를 하지 못한다. 상처는 세대를 통해서 계속 덧나고 있다.  곪아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세계 최장의 공부시간을 자랑하면서 세계에서 우수한 학업능력을 뽐내고 있지만, 학업에 대한 만족도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밑바닥에 속하는 지금 우리나라의 모습은, 미국의 학교 교육 실상을 그려내고 있는 이 책보다도 심하다.  

 

이 책에서도 상당히 심하다는, 이런 교육이 앞으로 몇 십 년만 지속되면, 아니 몇 년만 지속되어도 아이들이 견디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보다 더 심한 우리나라 교육은?

 

하여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학교가 상처를 주는 것,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제일 먼저 학생들, 자신의 처지를 판단해야 한다. 남의 눈이 아닌 자신의 눈으로. 그 다음 부모들. 자신들이 겪었던 학교 생활을 철저하게 다시 검증해봐야 한다. 반추해봐야 한다. 그리고 그런 학교 생활이 자신의 인생에 어떻게 다가왔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그러한 판단이 선 다음에 아이륻 보아야 한다. 그러면 해야 할 일이 보인다.

 

학생과 학부모가 이렇게 변해도 최종적인 열쇠는 교사가 쥐고 있다. 아무리 사방에서 교사를 쥐고 흔들어도 학생들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존재는 교사다. 학교의 구조가 학생들에게 상처를 주는 구조라 하여도, 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게 해주는 존재도 역시 교사다. 그러므로 교사는 학교의 구조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고려해야 한다.

 

그런 방법에 대해서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언제까지 외면만 할 거냐고. 이제는 학교를 제대로 보자고, 그리고 그 상태에서 앞으로 나아가자고... 그래, 이 책의 마지막에 나온 말처럼, '변화는 작은 실천에서 시작된다.'

 

학생은 학생으로서, 학부모는 학부모로서(우리나라 어떤 광고에서는 학부모와 부모를 대조하면서 학부모가 되겠느냐 부모가 되겠느냐 하지만, 학부모가 제대로 교육에 대해서 바라본다면 학부모와 부모는 분리되지 않는다), 또 교사는 교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면... 변화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한다.

 

이 책이 상처주는 학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국 이 상처가 삶에서 아름다운 무늬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교사의 역할이 중요함을 마지막 부분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러한 교사의 자세, 모습에 대해서 쓴 시들이다. 교사들, 다들 이런 교사가 되고 싶어한다. 이 시에 나온 선생이 아니라, '선생님'이 되고 싶어한다.

 

어릴 때 내 꿈은

 

어릴 때 내 꿈은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나뭇잎 냄새 나는 계집애들과

먹머루 빛 눈 가진 초롱초롱한 사내 녀석들에게

시도 가르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들려주며

창 밖의 햇살이 언제나 교실 안에도 가득한

그런 학교의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플라타나스 아래 앉아 시들지 않는 아이들의 얘기도 들으며

하모니카 소리에 봉숭아꽃 한 잎씩 열리는

그런 시골학교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나는 자라서 내 꿈대로 선생이 되었어요

그러나 하루종일 아이들에게 침묵과 순종을 강요하는

그런 선생이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

밤 늦게까지 아이들을 묶어놓고 험한 얼굴로 소리치며

재미없는 시험문제만 풀어주는

선생이 되려던 것은 아니엇어요

옳지 않은 줄 알면서도 그럴 듯하게 아이들을 속여넘기는

그런 선생이 되고자 했던 것은 정말 아니었어요

아이들이 저렇게 목숨을 끊으며 거부하는데

때묻지 않은 아이들의 편이 되지 못하고

억압하고 짓누르는 자의 편에 선 선생이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어요

 

아직도 내 꿈은 아이들의 좋은 선생님이 되는 거예요

물을 건너지 못하는 아이들 징검다리 되고 싶어요

길을 묻는 아이들 지팡이 되고 싶어요

헐벗은 아이들 언 살을 싸안는 옷 한 자락 되고 싶어요

푸른 보리처럼 아이들이 쑥쑥 자라는 동안

가슴에 거름을 얹고 따뜻하게 썩어가는 봄흙이 되고 싶어요

 

해직교사 신작시집, 몸은 비록 떠나지만, 실천문학사, 1989년. 9-10쪽,

도종환, '어릴 때 내 꿈은' 전문

 

그래서 이런 선생님은 아이들을 하나로 보지 않고, 하나하나로 본다. 그런 아이들에게는 자신만의 삶이 있기 때문이다. 그걸 바라보는 선생님, 이 책에서 말하는 상처주는 학교에서 치유자로서 존재하는 선생님일 것이다.

 

개학 첫날

 

여름방학 끝낙 다시 출근했더니

등꽃이 먼저 반겨주더군

다른 놈들은 이미 서너 달 전에 피었다 졌고

휘감아 올라간 넝쿨마다

기다란 씨앗주머니들 주렁주렁 매달렸는데

어쩌자고 뒤늦게 몇 놈

수줍게 고개 내밀고 있더군

 

늦된 게 부끄러운 줄 알기는 아는 모양

무성한 이파리 틈새에 숨어 있는

보랏빛 꽃송이를 보고 있자니

꼭 그런 놈들이 떠오르더군

 

수업시간 내내 졸다가 끝날 무렵

엉뚱한 질문이나 해 대는 놈

남들 다 해오는 숙제

미루고 미루다 막판에 내는 놈

몇 박자씩 꼭 늦는 놈

 

하지만 그런 놈들도 꽃은 꽃 아니냐

남들보다 서너 걸음 뒤졌지만

언젠가 한번은 꽃 피는 인생 아니냐

 

개학 첫날부터

그런 생각이 들더군

선생 노릇 다시 돌아보게 되더군

( 박일환, 푸른 삼각뿔, 내일을여는책, 2001년. 94-95쪽. '개학 첫날'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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