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기술
피터 펜윅.엘리자베스 펜윅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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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 달 사이에 연달아 세 번의 죽음을 만나게 되었다. 이제는 죽음을 만날 나이가 되었다는 서글픔도 있지만, 어느새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할 나이가 되었다는 생각도 든다.

 

잘 죽음, 이것은 잘 삶만큼 중요하다고 하는데, 어떤 죽음이 잘 죽는 죽음일까? 도대체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런 의문은 끝없이 드는데, 답은 없다.

 

최근에 읽은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죽음에 대해 철학적으로 접근을 해서,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했다면, 이 책은 구체적인 죽음 순간의 모습과 그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래서 역시 죽음에 대한 어떤 기술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아니, 죽음에 대해서 기술을 알려줄 수는 없다. 죽는 순간은 단 하나뿐인 순간이며, 이는 남에게 알릴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죽음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누구나 한 번은(?) 겪을 일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죽음의 순간에 영혼으로 나타나든, 연기로, 구름으로, 또는 바람으로, 아니면 다른 자연현상으로, 또는 텔레파시로 나타나든, 죽음에는 어떤 영적인 요소가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단지 인간은 뇌와 육체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뇌에는 우리가 규명하지는 못하지만, 분명 영적인 요소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주장을 뒷받침 하기 위해서 다양한 사례들을 언급한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순간에, 또는 친족,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겪는 순간에 겪었던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소개하면서 사람은 단지 뇌만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고, 아직은 설명하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부정할 수 없는 어떤 요소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영적인 존재를 인정하는 순간, 죽는 사람이든, 남아서 죽음을 지켜보는 사람이든 마음은 훨씬 편안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역시 마음이 편안해진다.

 

죽음이 그냥 소멸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죽음을 미지의 세계로의 여행이라고 한다. 그 여행을 떠날 때 미리 알려주기도 하고, 여행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도 하며, 다시 만나지 못할 여행이기에 그동안에 쌓여 있던 감정들을 해소하기도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더 편안한 마음으로 죽음이라는 여행을 떠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도 죽음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한다.

 

지금 우리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병원에서 태어나 병원(요양원)에서 죽는 경우가 대다수다. 자신의 삶을 구성하던 친숙한 공간이 아닌 다른 곳에서 생의 첫발을 대딛고, 생의 마지막 발을 내딛는데, 이 책을 읽어보면 탄생의 순간이든, 죽음의 순간이든, 친숙한 공간에서 친밀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이 두렵다고 해서 그냥 멀리할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죽음의 기술이 말하고자 하는 바다.

 

이렇게 죽음을 받아들이면 죽음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던 편견을 떨쳐버릴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허황된 얘기로 치부하지 않고,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죽음, 그는 곧 삶에 동반한 그림자이자, 삶의 길에서 잠시 벗어나면 만나게 되는 뒤안길이라는 사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이것은 죽음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라는 얘기가 아니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삶을 더욱 충실하게, 즐겁게 영위하라는 뜻이다.

 

"죽음의 기술"이라는 책은 결국 "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잘 죽음"은 곧 "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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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보는 나, 착각하는 너 - 나보다 타인이 더 신경 쓰이는 사람들 심리학 3부작
박진영 지음 / 시공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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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이라고 하면 우선 어렵다라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된다.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고, 또 웬지 구름 따먹는 소리를 하는 것 같은, 마치 전문적인 학자나 의사, 상담사 등이 해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심리학이라는 말이 들어가면 우선 거리를 두고 싶은 마음이 든다. 여기에 '사회심리학'이라니... 심리학에 사회학이 더해졌다는 느낌마저 준다. 더욱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우리는 선입관을 지니고 심리학이나 사회학을 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동안 학교에서 배웠던 공부가 주로 이들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생각이 들고, 대학에서도 전공하는 사람이 아닌 한 교양과목으로 겨우 들었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사회학이나 심리학은 우리 생활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다만 우리가 의식을 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사회심리학'이라는 분야가 사회학고 심리학이 기계적으로 합쳐진 그런 분야는 아니다. 그냥 쉽게 생각하면 된다.

 

어짜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하니, 사람들은 함께 모여 살고, 또 모여 살 수밖에 없는데, 그러한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공부를 '사회심리학'이라고 하면 된다.

 

우리를 괴롭히는 학문이 아니라 우리 삶에 도움을 주는 아주 실용적인 학문이라고 생각을 하면 '사회심리학'에 조금 더 쉽게 접근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은 아마도 그런 의도에서 쓰여지지 않았나 싶다.

 

"힐링"이라는 말이 유행하는 이 때, 개인적인 치유도 중요하고, 개인의 마음을 치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 그러한 문제가 생겼는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해결이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하도록 하는 학문이 바로 이 '사회심리학'이다.

 

그러므로 결코 어렵지 않다. 아니, 오히려 재미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삶에서 흔히 겪는 사례들을 예로 들어 왜 그런 문제가 발생했고, 어떻게 하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를 평이하게 서술하고 있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명제에서 시작하여, 결국 인간은 소속욕구와 인정욕구를 지니고 있으며, 이를 충족시켜야지만 행복한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이끌어내며, 우리들의 심리가 기본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심리상태에서는 어떻게 하면 더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이야기부터, 그것이 곧 행복한 삶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으며, 생존을 위해서 함께 지내야 하는 직장에서는 상사는 어떤 심리상태를 지니고 있는지, 왜 그런지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설득하려면 어떤 방법으로 다가가야 하는지도 알려주고 있으니, '사회심리학'이란 다른 말로 '행복한 삶을 사는 법'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힐링"이 넘치는 시대는 무언가 문제가 있는 시대다. 이 책은 그런 시대에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마음을 지녀야 할까에 대한 '사회심리학자'의 답이라고 보면 된다.

 

나를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고, 또 내 주변의 사람들을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 결코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주기도 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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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나에게 보내는 편지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19
프란츠 카프카 지음, 박환덕 옮김 / 범우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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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할 수 없는 것은 더 아쉬움을 갖게 한다.

 

책이 분명히 출판이 되었는데, 시일이 지났다는 이유로 구할 수 없을 때, 물론 상업적 이익을 위해서는 판절이든, 품절이든 할 수밖에 없고, 도서관을 이용하는 방법을 강구할 수 있지만, 그 책에 대한 욕구는 더욱 강해진다.

 

꼭 소유해야지 하는 욕구.

 

어렵사리 구하면 먼저 손에 쥐고 읽기 시작한다. 읽기 시작할 때의 기쁨은...

 

그럼에도 그 기쁨을 끝까지 이어가기는 힘들다. 특히 이렇게 카프카의 본질적인 모습이 드러난 글들은.

 

어렵게 구한 책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무언가를 소유하지 못할 때 그것에 대한 욕구는 더욱 강해지는데, 혹시 카프카는 자신의 문학을 여인들을 통해서 이루어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도 그렇지만, 펠리체에게 보낸 편지도 그렇게 누이들에게 보낸 편지도, 그리고 밀레나라는 여인에게 보낸 편지에도 자신의 문학에 대한 자의식이 잘 드러나고 있다.

 

그의 삶과 여인들을 보면 펠리체, 율리에 보리체크, 도라라는 약혼과 결혼을 생각했던 여인들을 중심에 놓고, 자신을 어머니처럼 돌보아주던 누이동생인 오틀라를 그의 오른쪽에 놓는다면, 편지를 통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 밀레나는 왼쪽에 놓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여인들과의 관계를 통해 그는 자신의 생각을 다듬어가고, 또한 삶을 유지해나간다.

 

그런 모습이 이 편지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는데...

 

카프카가 쓴 편지만 남아 있는 상태에서 밀레나가 어떤 마음으로 카프카를 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년의 카프카는 밀레나와의 편지 교류로 자신의 삶을 유지해나가지 않았나 싶다.

 

품절이 되어 구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카프카에 관심이 있다면 읽어볼 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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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 승효상의 건축여행
승효상 지음 / 안그라픽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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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는 말보다는 "건축은 인문학이다"는 말이 더 마음에 꽂힌다. 인문학적 사유를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고, 인문학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고, 또한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는데... 여기에 "건축은 인문학"이라고 하니... 무엇이, 도대체 왜?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건축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주변과 함께 존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건축은 삶을 통해 완성된다. 바로 삶을 통해 완성되기에 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단순히 건축을 돌과 시멘트와 나무와 흙으로 무언가를 짓는 행위라고만 정의해서는 안되고, 건축에는 우리들의 삶이 녹아 있으며, 건축은 그 존재를 통해서 우리의 삶을 형성해간다. 그래서 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인문학이라고 해야 한다.

 

이런 인문학이 상실된 건축이 얼마나 흉물스럽게 다가오는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경험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아름다운 우리나라 건축물들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만 현실을 지금도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만약에 도시건축을 하는 행정가들이 인문학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아니 그들이 인문학적 상상력을 지니지 못했을지라도 오래 된 것들의 그 아름다움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생각했더라면 이렇듯 회색도시의 모습을 우리나라 도시들이 지니지는 않았으리라.

 

승효상이란 건축가, 자신의 건축 철학을 비움의 건축이라고 한다. 비움이라? 이 비움은 우리나라 전통 건축인 한옥에서 실현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좋은 건축이라고 일컬어지는 건축들은 바로 이 비움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무엇이든 꽉꽉 채우려고 하는 이 시대에 이는 새겨들어야 할 말이기도 하다. 비움은 곧 채움을 의미하기에, 이 비움은 부족함이 아니다. 오히려 비움은 넉넉함이다. 이런 넉넉함이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 삶을 더욱 여유롭게 한다.

 

건축이 삶을 규정한다고 하고, 삶이 건축을 규정한다고 하면, 인간미 없이 빡빡하게 지어진 건축물들이 즐비한 도시의 삶에서는 넉넉함과 여유는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각박함만을 느낄 뿐이다. 그래서 작가는 우리나라 골목의 사라짐을 안타까워하고, 막개발을 개탄하고 있다.

 

이런 생각없는 건축을 막는 길은 모두가 건축에서 인문학적인 향취를 느낄 수 있도록 교육받거나, 또는 배우려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건축을 외부에서 보지 말고, 내부에서 자신의 삶과 관련지어서 보기 시작한다면 건축 하나하나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고, 우리들이 지금 살고 있는 건축들이 오래 되어 시간이 흐른 다음에 아름다운 존재로 남게 노력하지 않을까 한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세계 곳곳에 있는 건축들을 소개하고, 그 건축에서 느낀 감흥을 글로 펼쳐내고 있다. 글들도 좋고, 건축에 대한 생각을 읽는 것도 좋고, 그런 건축들의 사진을 보는 것도 좋다.

 

그렇게 보면서 건축에 대한 안목이 인문학적인 안목에 조금 더 다가갔다는 뿌듯함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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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평전 - 모조 근대의 살해자 이상, 그의 삶과 예술
김민수 지음 / 그린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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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를 주욱 읽었는데, 카프카가 우리나라의 이상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작품의 난해성이라든지, 죽은 다음에야 더 유명해지고, 지금까지도 많은 연구 논문들이 나온다는 사실들이 말이다.

 

또한 둘이 비슷한 시대에 살았다. 이상이 조금 뒤에 태어나고 활동하지만, 이들은 활동했던 시기는 근대성이 꽃 피우던 때이고, 이런 근대성을 넘어서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던 시대이기도 하다.

 

포스트 포던이라는 말이 90년대에 유행했었는데, 이 때 이미 카프카나 이상은 포스트 모던한 작가로 우리에게 다가왔으니 말이다.

 

이상, 이상, 정말로 많은 책들이 나와 있다. 하다못해 그의 전집만 해도 여러 학자들에 의해 다시 출간되고 있는 상황이다. 전집이란 원본이 확정이 되어야 하는데, 아직도 학자들마다 이상 전집을 펴내려 하는 것을 보면 그는 21세기가 된 지금도 유효한 작가임에 틀림이 없다. 또한 아직도 연구할 것이 많은 작가임에도 틀림이 없고.

 

이 책은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 건축과 미술의 관점에서 이상의 작품을 판단한 결과를 드러내고 있다. 기존에 이상에 대한 접근이 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에 의해 주로 이루어져 이상 문학의 단면만을 파악하고 있다는 문제제기로부터 시작한다.

 

이상 문학이 열린텍스트를 지니고 있기에 다양한 해석이 다 타당하다고 하는 기존의 주장에 대해서 건축의 입장에서, 디자인의 입장에서, 또는 미술의 입장에서 그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미 이상은 서구의 최신 건축이론을 습득했으며, 일본을 통한 짝퉁 근대를 인식한 것이 아니라, 일본을 통한 근대화가 짝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작품으로 표현해낸 작가라는 것이다.

 

하여 주장에 설득력을 얻기 위하여 문학적인 접근이 아니라(그런 접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방향에서, 즉 미술적인, 건축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이상의 삶 자체가 건축학도였으며, 그는 근대 건축에 관심이 많았고, 또한 "조선과 건축"이라는 잡지의 표지 디자인에 당선될 정도로 디자인 쪽에서도 이미 앞서간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런 삶과 문학이 떨어질 수 있을까?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은 이미 당대의 한계를 넘어섰으며, 이런 한계넘어섬을 자신의 시로 표현해내고자 했다고 한다. 그런데, 시대를 앞서간 사람이 겪게 되는 몰이해, 비난을 그는 견디지 못하고 소설, 수필의 세계로 빠져들지만,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기존에 나온 해석을 비판하며, 자신의 주장을 펼쳐가는데, 현대물리학, 천문학, 건축학, 디자인학 등이 종합적으로 이상을 해석하는데 동원되고 있다.

 

이 정도로 이상이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사실. 그의 작품이 어정쩡한 상태의 작품이 아니라, 서구에서도 제대로 성공하지 못한 다다이즘을 구현한 작품이라는 주장까지도 나오고 있다. 우리는 이미 100년을 앞선 작가를 지니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조선이라는 한 주변부 국가에만 국한되는 작품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보편성을 지닌 작품이라고 한다. 이런 이상을 '민족주의'틀로 이해하려 하면 안된다는 주장도 하고 있다.

 

시대를 앞서간 사람.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가 시대를 앞서갔다면 지금 우리는 이상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이상이 바랐던 포스트모던 시대가 아니던가? 이미 이상이나 다른 서구의 작가들이 시도했던 작품 경향들이 해석되어 넘쳐나고 있는 시대 아닌가? 그럼에도 지금 이 시대에 우리에게도, 문학을 배웠다는 사람에게도 이상은 아직도 어렵다.

 

몸으로 디지털세계를 사는 아이들에게도 이상은 어렵다. 그의 작품은 아직도 암호의 세계이다. 이것은 무슨 이유인가? 다른 사람들의 건축에 대한, 미술에 대한, 디자인에 대한 지식이 얄팍해서인가?

 

문학은 지식과도 어느 정도 상관은 있지만, 대부분 좋은 문학작품은 지식을 떠나서 마음에 와닿는, 그래서 해석이 아니라 감동을 주는 작품이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이상 문학에 들어가면 과연 이상 문학은 좋은 문학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또 하나 의문이 있는데, 이상이 완벽하게 시대를 앞서 갔을까? 그가 시대를 앞서갔다면 일본이 우리나라에 심은 문명이 짝퉁 근대화란 사실을 넘어서 일본의 문명 자체도 짝퉁이라는 걸, 동경에 가기 전에도 이미 알고 있어야 하지 않나?

 

그러면 그는 동경에 가길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근대 문명의 중심이라는 뉴욕으로 가길 갈망했어야 하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든다. 동경 갔더니 일본이 짝퉁이고, 우리는 짝퉁의 짝퉁이더라란 인식을 했다면 이미 그 자체로 이상은 시대를 앞서갔다고 할 수 없지 않나 하는 의문이 든다.

 

그가 김기림에게 보냈다는 편지의 한 구절.

 

'나는 19세기와 20세기 틈바구니에 끼워 졸도하려 드는 무뢰한인 모양이오. 완전히 20세기 사람이 되기에는 내 혈관에 너무도 많은 19세기의 엄숙한 도덕성의 피가 위협하듯이 흐르고 있오그려.

... 그들(삼사문학 동인)은 이상도 역시 20세기의 스포츠맨이거니 하고 오해하는 모양인데 나는 그들에게 낙망을(아니 환멸)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들과 만날 때 오직 20세기를 근근히 포즈를 써 유지해 보일 수 있을 따름이구려! 이 마음의 아픈 갈등이어.'

(권영민, 이상문학의 비밀 13, 민음사 276쪽에서 재인용)

 

이 책의 저자는 이상 문학에 대해서 이제는 정통해석을 내놓았다고 자부하는데, 글쎄? 이렇게 하나로 해석이 완벽하게 되면 이미 그 자체로서 이상의 문학은 저급한 문학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무언가 완벽한 해석에 대한 반감일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참신한 해석임에는 틀림없다. 이상 문학에 접근하는. 그래서 읽는 내내 재미도 있고 즐거웠다.

 

덧글

 

읽으면서 자꾸 눈에 거슬리는 게 있었는데, 이상을 자꾸 李霜으로 쓰는 것이다. 이 책에서 이상을 한자어로 표기할 때는 어김없이 李霜으로 나오는데, 이 책에 나와 있는 이상이 발표한 작품을 사진으로 실어논 부분에도 이상은 李箱으로 나온다. 왜 李箱을 자꾸 李霜으로 표기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그리고 왜 제목이 이상 평전이 모르겠다. 이 책은 이상의 삶에 대한 평가보다는 문학에 대한 해석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그냥 이상 문학 연구로 했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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