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대표시를 말한다
최두석.나희덕 엮음 / 비(도서출판b)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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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서점에 들렀다.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사버릇하니 직접 서점에 가서 책을 대면할 시간이 없다. 그렇게 시간을 내지 않는다. 엄청난 책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즐거움도, 책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즐거움도 사라져버린 지 오래다.

 

그래도 가끔은 아주 가끔은 서점에 갈 일이다. 가서 직접 책을 고를 일이다. 그런데, 서점에 가면 참 엄청나게도 많은 학습관련 책들이 있다. 거의 서점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도대체 우리나라 서점은 학생들이 없으면 유지가 안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서 서점의 반은 신경도 쓰지 않고, 나머지 반 중에서 기술관련 서적들을 포기하면, 그 나머지 반 정도만 둘러보게 된다.

 

문학, 철학, 사회과학, 종교, 예술 등등. 그런 이름이 붙어있는 곳을 둘러 본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집어든다. 한 번 죽 훑어본다. 살 만한가, 아니면 미뤄두어야 하나?

 

많은 책들을 들었다 놨다 하다가 손에 들고 계산대까지 간 책. 바로 이 책이다. 서점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차례도 보고, 또 수록 내용도 보았으니 고르는데 실패할 일이 없는 책이다.

 

"나의 대표시를 말한다"

 

시인이 직접 자신의 시를 고르고, 그 시에 대해서 이야기한 책이다. 시 창작과정이 나와 있는 부분도 있고, 시에 얽힌 이야기가 있는 부분도 있고, 또 자신의 시론을 이야기하는 부분도 있는, 시인이 자신의 대표시를 이야기하는 기획의 책임에도 시인들답게 정말로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다.

 

기획은 기획일뿐, 난 내 예기를 한다. 시인답다. 총 63명의 시인이 참여했다. 적어도 63편의 시를 읽게 되는 셈이다. 그것도 시인 자신들이 좋아하는 시,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시를...

 

하여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또 시의 뒤안길을 함께 걷는 느낌도 받아서 더 좋기도 하다. 이미 읽었던 시도 있지만, 그것이 이 책을 읽는 재미를 반감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더 재미를 느끼게 한다. 어, 이 시에 이런 의미가 있었어, 이 시를 이런 식으로 썼구나 하는 새로움을 더하게 된다.

 

시로 들어가는 문이 63개가 있다고 보면 된다. 아무 문이나 열고 들어가면 된다. 그 문을 열면 더 많은 시의 세계가 펼쳐진다. 읽다가 마음에 드는 시를 만나면 출처가 친절하게도 명시되어 있으니, 시집을 사면 된다.

 

그렇게 되면 이 책은 자신이 할 일을 다 한 셈이 된다. 즉, 이 책은 하나로 완결된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시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문 역할을 한다. 충실한 문이다. 문이 너무도 많다. 어느 문을 선택하든 시의 세계로 들어가겠지만, 그 세계는 너무도 다름으로 인해 고르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선택의 불확실성. 그 즐거움. 이미 정해진 길만을 가는 권태로움에서 벗어나 무엇이 펼쳐질지 모른르는 시의 세계로 들어가는 설렘. 그것을 만끽할 수 있다.

 

여기에 이 책은 세 개의 선택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는 우선 이 책의 편자들이 한 선택이다. 그 많은 시인들 중에 편자들은 63인의 시인을 선택했다. 아마도 더 많은 시인들을 선택했겠지만, 요청에 응하지 않은 시인들도 있을터. 또 황동규의 경우와 같이(황동규, 시가 태어나는 자리) 자신의 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이미 한 시인도 있을터. 그래도 우리나라 모든 시인에게 글 한 자락을 요청하지는 않았으리라.

 

때문에 이 책에는 편자들이 선택이 들어 있다. 시를 바라보는 편자들의 시각이 먼저 개입하고 있는 셈이다.  

 

다음은 시인들의 선택이다. 자신에게 대표시를 뽑아달라는 청탁이 왔다. 세상에, 여러 자식들 중에 어느 자식이 가장 예쁘냐는 질문과 같다. 난감하다. 그래도 이 책에서 장철문 시인이 말하듯이 '서로가 응원하며 살아도 벅찬 세상에 안 쓰고 버틸 수도 없다'(256쪽)고 같은 시인들의 처지에서 이런 책을 기획하는 어려움을 알기에 시인들은 어렵지만, 또 그닥 하고 싶지 않지만 자신들의 대표시를 고른다.

 

그리고 꼭 한 마디 한다. 아직 나의 대표시는 쓰여지지 않았다고. 그렇다. 시인이 이것이 나의 대표시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 시인은 이미 늙어버린, 시인으로서의 영감을 잃은 그런 상태가 되어버리리라.

 

그럼에도 편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독자들을 위해서 시를 위해서 그들은 한 편의 시를 선택한다. 그 선택이 이 책에 나와 있다.

 

편자의 선택과 시인의 선택에 중첩에 더하여 이제는 읽는 사람의 선택이 더해진다. 시인이 아무리 이 시 좋다고 해도 읽는 독자는 자신의 관점에서 시를 판단한다. '그건 네 얘기고'가 되는 셈이다. 독자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다시 만들어간다. 그런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63인의 시인 중에 선택을 한다. 시인이 아니라면 시를 선택을 한다. 마음에 드는 시가 있으면 그 시가 수록된 시집에도 기웃거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독자의 선택이다.

 

이런 세 가지의 선택이 모여 이 책을 이룬다. 63개의 문이 언제든지 열릴 준비를 하고 있다. 그냥 아무 문이나 자신이 고른 문을 열고 들어가면 된다. 시 세계에 발을 담그면 된다. 그러면 이 책은 자신이 할 일을 다하게 된다.

 

이제는 다른 책으로, 다른 시집으로 시의 세계를 여행하면 된다. 자신만의 지도를 갖고, 자신의 발검으로. 

 

이 책에 나와 있는 머리말이 바로 이 책의 효용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시인에게 대표시는 늘 미래에 존재하는 한 그루 나무와도 같다. 안개 속에서 그곳을 향해 걸어가게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다시 저만치 사라지는 한 그루 나무. 그 최후의 시를 행해 모든 시인은 고단하게, 그러나 끊임없이 걷는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펴내게 된 것은 시를 읽고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실제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책이 드물고 아쉬운 사정 때문이다. 현대시가 갈수록 난해해지고 있는데다 발표되는 시의 분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언제부턴가 독자디 따라 읽기가 어려워져 버렸다. 원론적인 성격의 시론이나 시창작법에 관한 책은 많이 있지만, 그 효용은 상당히 제한적이다. 시인마다 시에 대한 관점과 태도가 다르기에 좋은 시편들의 공통적 특질을 추출해 일반화한다는 것 자체가 무망한 일이 되기 십상이다. (5쪽)

(중략)

  이 책은 일반 독자들뿐 아니라 시를 습작을 하는 이들에게도 좋으 참고가 되리라 믿는다. 시인으로 살아가는 일의 속내와 시상이 떠오르는 순간, 그리고 그 날것의 소재가 한 편의 시로 태언기까지의 우여곡절을 세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6쪽)

  

더 말해 무엇하리. 직접 읽으면 된다.

 

덧글

 

이 책을 읽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다른 점이 있었다. 잘못된 글자임에 분명한 시 구절을 보고서, 이 시집이 내게 있다는 생각에 찾아보게 된 시. 이시영의 '고개'

 

3행. '아제야 야제야 정갭이 아제야'라고 되어 있는데, 두 번째 '야제야'는 분명히 '아제야'의 오타이다. 단순한 실수이지만, 시에서는 치명적일 수도 있다. 조심할 일이다

 

그리고 14행. '못 살아가겠다고 못 참겠다'고, 15행. '너도 울고 나도 울고 쩌렁쩌렁 울었지만' (42쪽)으로 되어 있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이시영의 시집 "바람 속으로"에 보면(1995년 초판 5쇄. 132쪽) 14-15행이 한 행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시어도 하나가 다른데..(이 책에서는 '너도 울고 나도 울고'로 되어 있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시집에는 '너도 울고 도 울고'로 되어 있다.)

 

도대체 시인은 어느 쪽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지. 시인이 시를 고쳤다고 봐야 하는 건지, 아니면 이것도 편집자의 실수일런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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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스 비벤디 -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 유동하는 근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한상석 옮김 / 후마니타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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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바우만이 쓴 책 중에 내가 두 번째로 읽은 책. 그가 갑자기(?) 우리나라에 소개되었고, 그의 저작들이 물밀듯이 번역되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만 10여 권이 넘으니, 지금 우리나라는 바우만 열풍이라고 할 수도 있다.

 

바우만이 쓴 책 중 처음으로 읽은 책이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였는데, 지속적으로 불평등 지수가 높아지고 있음에도 우리가 불평등을 감수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을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사회가 있다는 식으로 이해했는데...

 

이 책도 역시 "개인"이다. 지구화된 시대에 오히려 사람들의 삶은 "개인화"되었다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소통을 할 수 있는 기회는 더욱 많이 늘어났으나, 그것은 기회에 불과할 뿐이고, 오히려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서 담을 쌓고 있는 현실이라고 한다.

 

하여 이 책의 제목은 우리말로 번역된 것만 들면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다.

 

'유동하는 세계', 이는 흐르는 세계라고 해도 좋고, 급격하게 변하는 세계라고 해도 좋다. 또는 고정적인 장소를 잃어버린 세계라고 해도 좋다. 오히려 고정적인 장소를 잃어버리고, 순간순간적으로 머무는 공간만 존재하는 세계라고 해도 좋겠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장소를 잃고 낯선 공간에 내던져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경제학 용어로는 노동유연성이라고 하고, 자본의 초국적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노동유연성이라는 말이 다른 말로 바꾸면 노동자를 쉽게 해고할 수 있는 조건이라는 뜻이고, 초국적성이라는 것은 이윤을 위해서라면 어디로든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자본이라는 뜻인데, 노동자로 대표되는 사람은 장소성을 잃고, 자본은 장소성을 버리는 상태.

 

하여 세상은 끊임없이 유동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유동성은 불안과 공포를 조장할 수밖에 없다. 이제는 생활이 아니라 생존이 문제가 되고, 이러한 생존에 장소를 잃은 사람들이 위협을 가한다는 선전이 행해진다.

 

즉 유동하는 세계에서는 바로 이곳이 지옥이 되는 것이고, 이 지옥은 다른 말로 유토피아에 다름 아니다. 결국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세계, 벗어나고자 하는 세계에 불과하다고 한다.

 

지구화란 말을 쓰지만 오히려 더 개인화된 사회에서는 남에 대한 공포 두려움이 조장이 되고, 이러한 두려움은 자신들을 보호하는 장벽을 쌓게 마련인데, 이 장벽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공간이 바로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또 도시민들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낯선 이방인들이 자신에게 침입해 들어오지 않도록 담장을 높이, 문을 꼭꼭, 게다가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아파트 단지 입구에 경비실을 설치해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관리하는 것도 모자라, 아파트 동 건물에는 비밀장치를 한 잠금장치를 해서 다른 사람들이 아예 들어올 수 없게 만들어 놓고 있으며, 택배에 대한 두려움을 조장하여 함부로 문을 열지 말라는 경고성 방송을 하고 있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차량에도 우리는 블랙박스라는 감시 카메라를 달고 있지 않은가. 사회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해결하라고 하는, 그렇지 않으면 피해는 고스란히 너에게 돌아간다는.

 

역시 마찬가지로 사회 구조적인 문제는 내버려두고 범죄 예방을 위해서 감시카메라를 더 많이 설치 해야 한다는 그런 발상들만이 판치고 있는 세상이 아니던가.

 

바우만은 이 책에서 세 가지의 사회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사냥터지기의 사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정원사의 세계, 그리고 마지막은 사냥꾼의 세계.

 

사냥터지기는 사냥터로 대표되는 자연을 훼손하려 하지 않는다. 또한 자기 뜻대로 그곳을 바꾸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 그곳이 지켜지길 바란다.  하여 그는 그 곳을 망가뜨리는 행위를 막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런 일에 자신의 삶을 바친다. 이것은 과거의 세상이라고 할 만하다. 적어도 근대에 들어서서는 인간은 자연을 그냥 내버려두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번째 사회로 넘어갈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정원사의 세계이다. 정원사는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있다. 그 모습대로 사회를 가꾸어가려고 한다. 사회에 대한 밑그림이 있다면 그 밑그림대로 사회를 만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습과도 같다. 바로 근대의 인간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세계를 바로 유토피아라고 했으며, 그런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신들이 유토피아를 건설하고 있다는 생각에 의문이 들었다. 과연 이것이 유토피아인가. 무언가 잘못되지 않았던가.

 

유토피아를 건설한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그런 삶이 사냥꾼의 삶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냥꾼의 삶은 미래를 내다보지 않으며, 현재에서도 오직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하다. 바로 '지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지옥, 이것이 바로 지금의 세계 '유동하는 세계'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우만은 이탈로 칼비노가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카르코 폴로의 말이라고 한 말을 인용한다.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방법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끊임없는 경각심이 필요하고 불안이 따르는 위험한 길입니다. 그것은, 즉 지옥의 한 가운데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해 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 공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174쪽)

 

이 말에 이어 자신의 말을 한다.

 

'다수'는 '다수에게 쉬운' 전략을 선택할 것이며, 결국 그 사회의 일부가 되어 더 이상 그 사회의 괴상한 논리에 어리둥절해 하거나, 어디서나 제시되는 강압적이고 대체로 허무맹랑한 요구에도 자극받지 않을 것(174-175쪽)이라고 하고, '누가 그리고 무엇이 지옥이 아닌지'를 알아내려고 고투하는 사람이라면, 자신들이 고집스럽게 '지옥'이라고 부르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온갖 종류의 압력에 맞서 용감하게 싸워야만 할 것이라는 점(175쪽)이라고.

 

우리 사회도 많이도 파편화되었고, 수많은 위험들이 과장되어 우리 앞에 전달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두려움에 빠져 있으며, 그런 위험들을 개인적으로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지옥'이다.

 

함께 할 수 있음을, 두려움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깨우칠 때 우리는 이러한 유동하는 세계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것이 바우만이 하고자 하는 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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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23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져요~!
 
1913년 세기의 여름
플로리안 일리스 지음, 한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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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캡슐을 연상시키는 제목이다. 이런 제목으로 책을 쓰다니, 단지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이기 때문일까 하는 생각을 했으나, 꼭 그렇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이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이기 때문에 쓰인 책이라면, 앞으로 해마다 이런 종류의 책이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100년 전은 언제나 있다. 그리고 사건은 언제나 있고, 사람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지금까지는.

 

그렇다면 세기의 여름이다. 단지 여름을 이야기하는 책도 아닌데... '세기의'라는 말에 지중을 하면, 1900년대를 이루고 있는 년도 중에서 가장 뜨거운 해가 바로 1913년이라는 얘기가 된다. 여름은 계절 중에서 가장 뜨거운 계절이고, 사람들이 자신을 외부에 가장 잘 드러내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왜 1913년이 '세기의 여름'이 될까? 의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단순하게 생각하자. 인류의 역사에서 제일 먼저 큰 파국을 겪게 되는 1차 세계대전이 바로 다음 해에 일어난다. 즉, 1913년은 세계대전으로 달려가는 정점에 서 있는 해라는 뜻이기도 하다.

 

너무도 뜨거운 인간의 인간상실. 그것이 바로 전쟁이고, 이것이 국지전의 형태가 아닌 세계 전면전의 형태를 띠게 된 것이 바로 1차 세계대전이니, 1913년은 너무도 뜨거워서 곧 터져버릴 듯한 그런 해가 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세기의 여름'이 된다.

 

그렇다고 이 책은 정치사를 다루고 있는 책도 아니다. 역사를 다루고 있는 책도 아니다. 그냥 1913년을 보여주고 있다. 그 해에 일어난 각종 일들을. 현재의 역사와 연결지어서.

 

따라서 이 책은 몽타쥬 기법을 잘 살린 책이 된다. 온갖 이야기들이 중첩되어 나타난다. 그런 중첩 속에서 우리는 1913년을 재구성해낼 수 있다.

 

전쟁 위협에 대한 이야기가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더라도, 당시 군주들의 사냥 모습에서 전쟁의 냄새를 맡을 수 있으며, 시대의 흐름을 가장 잘 읽어내는, 몸으로 감지해내는 예술가들의 삶에서 그런 우울, 불안을 읽어낼 수 있다.

 

아주 세세하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인물들의 행적이 소개되고 있다. 단지 그들이 1913년에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그 속에서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또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들이 아슬아슬하게 비켜가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으니,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책이 된다.

 

1913년 1월에, 사실 1월에 없어지지도 않았는데...모나리자가 실종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12월에 다시 모나리자를 찾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모나리자의 실종과 발견. 이것이 1913년 일반인들을 강타한 사건이라면,,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청기사파','다리파', '입체파' 등의 미술 사조들이 나오고, 그들의 내면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지 못하던 그런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으며, 문학인으로서는 조이스, 카프카, 무질,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릴케 등이 나오고, 음악가로도 많은 사람이 나오는데...

 

정말 백화점이다. 유럽에서 유명하다고 하는 사람은 모두 다 한 번 쯤은 얼굴을 내밀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정말로 세기의 여름에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과거를 바라보는 입장에서, 지금 현재의 입장에서 판단하는 것도 의미있는 읽기가 된다.

 

우리는 지금 2013년이 1913년과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 역시 그 시대를 살았던 그 사람들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누구는 불안과 우울에 시달리고, 누구는 근거 없는 희망에 차 있으며, 누구는 남들이 하지 못하는 실험을 하고 있고, 누구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남을 비방하고 있으며, 누구는 앞날을 예측하지 못해 외부로 탈출하려 하고 있는 그런 상태.

 

과거가 현재를 비추어주는 거울이라면, 다음 해 전쟁이라는 큰 재앙이 닥칠 그 직전 해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맞이할 2014년을 대비할 수 있지 않을까.

 

먼 훗날 적어도 2013년을 '세기의 여름'이라고 지칭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이 아니라, 바로 내일, 더 잘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한 거울 역할이 바로 이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친숙한 이름들이 이 책을 읽는 재미를 더하게 해주고 있으며, 이들 생활을 엿보는 듯한 느낌을 지니게 되는 그러한 감정도 갖게 만드는 책이다.

 

1913년을 만화경처럼, 파노라마처럼 표현해 낸 책이기에, 읽기에 전혀 지루하지 않다.

 

1914년 앞의 1913년이 '세기의 여름'이 되었는데, 우리는 2013년이 2014년으로 인해 '세기의 여름'이 되지 않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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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속담이 생각이 나지?

 

혀 속에 칼이 있다는.

 

말이 그만큼 위험하다는 얘기일텐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말이 위험한 것은 확실한데... 도대체 어떤 말이 위험할까?

 

말은 오히려 치유의 효과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세헤라자데처럼 말로써 목숨을 건지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물론 말로써 자신의 소중한 무엇을 잃은 사마천 같은 경우도 있고.

 

그런데 말이 다 똑같이 위험할까? 어떤 말은 가벼운 상처만을 남기고, 어떤 말은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지 않을까?

 

어떤 말은 상처를 주는 듯하나 오히려 도움이 되기도 할텐데...

 

요즘 우리 사회는 말들의 천국이다.

 

주인 잃은 말들이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고, 이 말들은 정착도 하지 못한다.

 

그냥 부유한다.

 

여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칼을 들이댔다고 한다.

 

같은 칼이 아닌데...

 

강자가 한 번 뱉은 말은 치명적인 위협으로 다가오고, 약자가 뱉은 말은 몸부림에 불과할진대...

 

이런 말의 경중을 따지지도 않는다.

 

그냥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위협이라고만 말한다.

 

그런 말들이 너무도 많이 떠돌아다닌다.

 

갑자기 이런 말이 생각난다.

 

양약고어구, 충언역어이(良藥苦於口, 忠言逆於耳)

 

좋은 약은 입에 쓰고, 충성스러운 말은 귀에 거슬린다.

 

이게 옛 선현들이 명심하고 있던 말이다.

 

자신의 귀에 거슬린다고 그건 해서는 안될 말이라고 하기보다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혀 속에 칼이 있다는 말, 그 칼이 나를 해치는 칼이 아니라 나를 깨우치는 칼이 되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말들을 다모클레스의 칼처럼 늘 자신의 머리 위에 두고 있어야 하지 않나.

 

그러면 지금보다 한결 나은 그런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데...

 

경어인(鏡於人), 사람에 나를 비추어 보라고 했다.

 

나를 말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내 거울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말에 일희일비할 까닭이 없다.

 

오히려 나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런 태도, 그런 지혜가 필요하다.

 

그래서 말은 하게 내버려두어야 한다.

 

말을 처벌하면 그 때는 자기 검열의 시대가 된다.

 

이런 검열의 시대는 곧 혀 속에 칼이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칼은 서로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게 된다.

 

그런 칼이 아니라, 서로를 경계하게 하고 발전하게 하는 칼이 되게...

 

우리의 혀 속에 있는 칼들이.. 그런 말들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요즘 세상이 하도...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서.

 

 

 

헌책방에서 구입한 박희진의 "미래의 시인에게"를 읽다.

 

참 많은 시집을 낸 시인이란다. 이 시집에서만 보아도 31권의 시집을 내었다고 하니. 이 중에 4개의 시집에서 골라 펴낸 시선집이다.

 

박희진 시인은 시낭송을 하기로 유명한 시인이니... 시는 곧 우리의 말과 함께 있음을 몸소 보여주는 시인인데...

 

그의 시 중에, 이 시집 마지막에 실린 시인데...'한국어를 기리는 노래'라는 시이다.

 

그 중의 한 부분

 

'한국의 시인은 / 한국어라는 소리를 내는 악기'(1-2행)라는 구절이 있다. 어디 시인만이겠는가.

 

우리는 모두 한국어라는 소리를 내는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의 말들이 칼이 아니라 음악이 되게 해야 하지 않을까. 그 말소리만 듣고도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말들.

 

적어도 힘있는 사람들의 말이 칼로 느껴지지 않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는 말들이 음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참 많은 시가 있지만....제목이 된 시.

 

      미래의 시인에게

 

어디서인지 자라고 있을 / 너의 고운 수정의 눈동자를 난 믿는다

또 아직은 별빛조차 어리기를 꺼리는 / 청수한 이마의 맑은 슬기를

 

너를 실제로 본 일은 없지만 / 어쩌면 꿈속에서 보았을지도 몰라

얼음 밑을 흐르는 은은한 물처럼 / 꿈꾸는 혈액이 절로 돌아갈 때

 

오 피어다오 미래의 시인이여 / 이 눈면 어둠을 뚫고 때가 이르거든

남 몰래 길렀던 장미의 체온을

 

 

활활 타오르는 불길로 보여다오 / 진정 새로운 빛과 소리와 향기를 지닌

영혼은 길이 꺼지지 않을 불길이 되리니

 

박희진 시선집, 미래의 시인에게, 우리글. 2008년. 29쪽. 

 

꼭 미래의 시인이 아니래도 좋다. 미래의 우리, 아니 현재의 우리들이 이런 '새로운 빛과 소리와 향기를 지닌 영혼'을 지니고, 그런 '불길'로 이 세상을 꽃피웠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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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진짜 유고시집이다. 행방불명 되었을 때의 시집이 아닌.

 

그의 사후 모아놓은 시들에다가 그를 추모하는 글을 모아 책으로 냈다.

 

엄밀히 말하면 시보다는 그에 대한 글이 더 많으니 천상병 유고시집이라기보다는 천상병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야 하리라.

 

역시 헌책방에서 구입한 책.

 

천상병은 시인이라기보다는 기인으로 더 많이 알려졌는데... 그의 말년 그가 텔레비전에도 나오고 하여, 인사동에 있는 귀천이 덩달아 유명해지기도 했다.

 

술과 돈을 달라는 일화로 유명한 시인. 그러나 그는 정작 시인이다. 우리는 그의 시 "귀천"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시인이 평생동안 수많은 시를 쓰지만 시대를 넘어 자신의 시가 한 편이라도 대중에게 계속 읽힌다면 그 시인은 행복한 시인일텐데... 천상병은 "귀천"이라는 시로 이미 행복해졌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초기시들과 후기시들의 내용이 많이 다르기는 하지만, 그는 천상 시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삶 자체가 시 아니었던가.

 

다른 사람이 이렇게 행동을 했으면 비난을 많이 받았을텐데... 이 책에 나와 있는 글들에서 볼 수 있듯이 천상병의 그 순진무구한 행동은 비난을 받을 수 없게 만든 그런 행동이었다니... 참.

 

그가 남에게 돈을 달라고 했지만, 딱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만 달라고 하였고, 남의 집에서 기숙한 것도 어떤 악의가 있어서 한 것이 아닌, 자연스런 행동이었다고 하니. 이런 시인, 이런 행동을 한 사람...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그런 사례이기도 하리라.

 

천상병에 대한 일화를 알고 싶으면 읽으면 된다. 예전 기인(?)들의 삶을 읽으면서 내 삶을 돌아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는 시 '귀천'에서 이 세상의 삶을 소풍이라고 했는데, 그는 소풍을 마치고 다른 세상으로 갔지만, 우리는 아직도 소풍 중인데...

 

소풍이라고 느낄만큼 아름다운 세상인지... 그런 세상을 단지 바라기만 해서는 안되고, 우리가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지... 이건 기행하고는 상관없는,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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