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하는 공포 산책자 에쎄 시리즈 2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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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번엔 바우만이 쓴 책 중에서 '유동하는 공포'라는 제목을 지닌 책이다. 'liquid'라는 말에 유동적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액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고 한다. 어떤 언어든지 바우만이 하고자 하는 말을 잘 전달하면 되는데...

 

이 책의 번역자 말에 의하면 이 liquid라는 말에는 "여기저기 스미는, 어느새 젖어드는, 차갑고, 무한하며, 숨막히게 하는"(306쪽)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유동하는 공포란, 우리의 삶에 알게모르게 젖어들어 있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공포라는 뜻으로 사용할 수 있으리라.

 

이러한 공포가 언제 나타났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다만 바우만은 근대(현대)에 나타나는 공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즉, 공포란 언제든지 존재했지만, 유동적인 공포는 현대의 것이라는 얘기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공포가 가장 무서울 때는 그것이 불분명할 때, 위치가 불확정할 때, 형태가 불확실할 때, 포착이 불가능할 때, 이리저리 유동하며, 종적도 원인도 불가해할 때다. 어떤 규칙성도 합리적 이유도 없는 공포, 그 낌새가 여기저기서 선뜻선뜻 나타나지만, 결코 통째로 드러나지는 않는 공포야말로 가장 무시무시하다. '공포'란 곧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위험의 정체를 모른다는 것, 그래서 그것에 대처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에 달려들어 맞서 싸우려 해도, 싸워볼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11-12쪽)

 

바로, 이게 공포다. 우리는 모르는 것, 불확실한 것에 공포를 느낀다. 이런 공포는 죽음, 악에서 나타난다.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는 예측불가능하기 때문이고, 그 다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조건에서 죽음만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러한 죽음과 친숙한 것이 바로 악이다. 이 악은 우리에게 죽음을 불러온다. 그래서 두렵다. 이것 자체가 공포다. 악에 대해서는 또한 알려져 있지 않다. 왜 악일까? 그 악을 어떻게 막을까? 신을 동원해도 악은 해답이 없다. 신과 악에 대한 문제, 즉 악으로 인한 고통은 성서에 나오는 '욥'의 이야기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가.

 

욥은 도덕적인 인간이다. 신심이 깊은 인간이다. 그럼에도 그는 온갖 고통을 받는다. 신이 그에게 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준다. 그는 악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 악은 공포의 근원이 된다.

 

하지만, 이렇게 초자연적인, 인과관계를 떠난 공포보다는 우리가 알고 있는, 또 알 수 있는 공포에 주목해야 한다. 초자연적인 것은 우리의 인식체계를 넘어선 것이기에 원초적인 공포를 제공하고 있다고 보고 논외로 한다면, 우리에게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공포, 즉 테러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테러는 전세계적으로 퍼져 있으며, 실질적인 위협보다는 매스컴을 통해 보여지는 위험이 더 크기에 공포를 조장하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우리나라는 테러보다는(테러는 유럽이나 미국에서 종교 분쟁과 관계가 깊다고 볼 수 있으므로) 분단의 위협이 공포로 작동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 책에서 바우만이 테러를 통해 이야기하는 것을 우리는 '분단'으로 받아들이고 적용하면 될 것이다.

 

바우만이 이 책에서 주장하고 있는 공포를 조장함으로써 지배권력을 유지한다고 보면, 이 말은 예전의 우리나라(정말로 예전이었으면 좋겠다)에 해당이 되는 말이다. 심심하면 터졌던 간첩단 사건이라든지, 땅굴 사건이라든지, 또는 북한의 도발 위험이라든지 하는 소위 말하는 '북풍'이 꽤 있었으니 말이다.

 

하여 전쟁 자체보다는 언론에서 보여주고 있는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우리 사회를 지배했으며, 우리의 행동을 제약하고 있었다. 이러한 공포를 지식인들(그람시의 용어로 하면 유기적 지식인이 아닌 전통적 지식인)이 더 조장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고.

 

그러나 바우만이 말하는 점을 새겨둘 필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일테니 말이다.

 

가난한 나라의 빚을 탕감하고, 부유한 나라의 시장을 가난한 나라의 주요 상품에 개방하고, 지금 취학 기회를 전혀 얻지 못하고 있는 1억 1천 5백만 명의 아동이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후원하는 일, 그리고 이와 비슷한 행동들을 고안하고, 결의하고, 실행하는 일이 진정한 테러와의 전쟁이다. (181쪽)

 

이것을 우리는 북한에 적용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전쟁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지식인의 역할이 아니겠는가.

 

다가오는 공포, 우리의 힘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공포에 대한 유일한 치료법. 그 시작은 그것을 바로 보는 것이다. 그 뿌리를 캐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그 뿌리를 찾아 들어가 잘라버릴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286쪽)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공포, 우리 삶에 속속들이 들어차 있는 공포, 그래서 우리의 행동을 제약하는 공포. 그것을 바로 보는 일. 그 뿌리를 캐고 들어가는 일.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 그것이 바로 지식인이고, 그람시가 말한 유기적 지식인이다.

 

이런 지식인들이 제 역할을 할 때 우리는 '유동하는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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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의 시대 - 유동하는 현대사회의 문화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윤태준 옮김 / 오월의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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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회학자라고 해야 한다. 지그문트 바우만. 최근에 우리나라에 엄청나게 소개되고 있는 학자이고, 나 역시 그의 책을 읽기 시작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학자들이 많으련만, 자꾸 외국학자에게 눈이 가는 이유는, 아무래도 우리나라 문화를 멀리서, 좀 떨어뜨려 놓고 보고 싶은 생각이 앞서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유행의 시대라고 제목을 붙였지만, 책에 있는 영어 식의 제목에 의한 번역에 따르면 '유동하는 현대사회의 문화'이다.  '유동하는 현대 사회'를 '액체 근대'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액체 현대'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지금을 이야기하는, 1900년대부터 2000년대를 '모던'이라는 이름으로 지칭한다고 보면 별 문제는 없는 번역일텐데... 각 출판사나 번역가들이 하나로 정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현대 사회의 문화에 대한 고찰을 담고 있는데... 여러 글들이 모여 하나의 책을 이루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문화'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는 책이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의 핵심을 바로 이 구절이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람들의 모든 의심과 저항이 하나의 흐름으로 함께 흘러가지 못하도록 막을 수만 있다면, 탄압받는 사람 하나하나가 각자 개별적으로 한 가지 유형의 억압만 따로 떼어 해결하려 단독으로 노력하며 다른 불행한 사람들도 똑같이 하고 있을지 의심스럽게 바라보게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가능하다면 여러 감정의 흐름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배출되도록 유도하고, 분해하고, 흩어버려서 많은 부족과 공동체가 하나로 뭉쳐서 저항하는 에너지를 소진시킬 수 있게 될 것이다. 법의 수호자들은 공정한 중재자의 옷을 입고 집단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대변자이자 평화로운 공존의 전도사로서 모든 반목과 상호 파괴적인 전쟁을 끝내는 데 헌신하는 역할을 맡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는 동안 적개심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현 상황을 가져온 그들 원래의 역할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침묵 속에 잠들 것이다. (64쪽)

 

어떤 문화에 대한 글이든 결국은 사람이 살아가는 일에 관한 글일테니, 문화가 계몽으로 작동을 하든, 지배로 작동을 하든, 또는 소비를 작동으로 하든, 문화는 우리의 삶에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이 문화를 이러한 '분할하여 통치하라'는 식으로 운영을 하는 것이 지배층의 전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즉, 유행이라는 것도 다양한 집단을 하나로 묶는다기보다는 다양한 집단을 각기 유행이라는 이름으로 자꾸만 분산시킴으로써 하나로 뭉치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된다.  역시 마찬가지로 자본이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에는 '예술'도 역시 자본의 지배하에 들어가 자본의 취향에 맞게 변형, 구분, 분할되어 존재하게 되고, 이러한 문화들은 실생활과 동떨어지게 된다.

 

전체적인 내용보다는 인용한 구절에 집중을 하면,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볼 수가 있게 된다. 상당히 많은 일이 일어나지만, 지금 우리는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람들의 모든 의심과 저항이 하나의 흐름으로 함께 흘러가지' 못하고 있으며, 이들은 각자의 불행에만 치중할 뿐, 다른 이들의 불행은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지 않은가.

 

미국산 소고기 수입부터, 한미 FTA, 4대강 사업, 강정마을, 밀양 송전탑, 철도 파업, 여기에 최근에는 특정 방송사 징계까지... 많은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이들이 하나의 흐름으로 연계되지 못하고 있다.

 

정말로 '분할하여 통치하라'는 명제가 우리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각기 불행할 뿐이다.

 

얼마나 통렬한 통찰인가?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통찰을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유행이 하나의 흐름으로 집단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것 같지만, 사실 유행은 지극히 개별화되고 펴현화된 움직임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유행의 창출에 성공했기에 사람들은 전체의 흐름을 볼 수 없게 되었고, 그에 따라 자신의 불행만을 보고, 남의 불행은 보지 못하는 현실이 되는 것이다.

 

가령 철도파업으로 사람들의 출퇴근과 이동이 불편해지고 있다. 방송은 이 점을 중점적으로 방송하고 있다. 즉, 나의 불편함을 불행으로 치환하여 호도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러한 불편함으로 인해서 생존이 달린 불행에 처한 사람들과 구별짓기(부르디외의 용어)를 하고 있다.

 

즉 나의 불편함과 그들의 불행을 등가교환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되고 있기에, 내가 불행을 당할 때 그들도 역시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유동하는 현대 사회의 문화가 지니고 있는 불행이다.

 

이러한 일을 바우만은 '문화적 다원주의'라고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다른 문화를 인정하는 '다원주의'가 아니라, 다원주의라는 이름으로 다름을 배제하고, 관심을 끊는 그런 문화적 상대주의를 일컫고 있는 것이다.

 

저것은 내 일이 아니야.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 공연히 간섭할 필요 없어. 이렇게 규정 짓는 순간, 이것은 '문화적 다원주의'를 표방한 또하나의 억압이고 말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그대로 돌아온다.

 

하여,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는 '타인의 존재를 무관심하게 잊어버리지 않고, '자기와 관계 없는 일에 끼어들(69쪽)'어야 한다. 이것은 힘든 일이고, 자신에게는 엄청난 모험이겠지만, 적어도 지식인은 이래야 한다고 바우만은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이게 단순히 지식인만의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일이지 않은가.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던 말...  니믈러 목사의 말이라고 하는데... 행 갈이를 하면 시가 되는 그런 말.

 

이 말은 바우만이 말한 앞서 인용한 글과 통한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에게도 경종을 울리는 말이다.

 

나치가 공산당원을 잡으러 왔다. 난 침묵했다 난 공산당원이 아니기때문에. 다시 나치는 유태인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때도 난 침묵했다. 난 유태인이 아니기때문에. 시간이 흘러 나치는 다시 천주교인을 잡아들이기 시작했지만, 난 또 침묵했다. 난 개신교도인이기때문애. 마침내 나치가 나를 잡으러 왔다. 그러나 내 주변엔 날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나치주의자들만이 남아 있었다.

 

덧글

 

번역자도 역자의 말에서 말하고 있듯이 문장이 참으로 만연체다. 그래서 글의 핵심을 놓치지 일쑤다. 바우만의 문체가 그렇다고 하고,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을 그는 그의 언어로 유려하게 표현했다고 하지만, 우리 말로 옮길 때에는 우리말에 맞게 좀 다듬었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 말은 역자도 했지만, 역시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힘든 작업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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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류지향 - 배움을 흥정하는 아이들, 일에서 도피하는 청년들 성장 거부 세대에 대한 사회학적 통찰
우치다 타츠루 지음, 김경옥 옮김 / 민들레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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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다 타츠루. 요즘에 많이 읽고 있는 일본 학자다. 교육에 관한 책을 주로 읽고 있는데, 이 책에 세 번째 책이다.

 

이 책이 내 손에 들어오기까지는 참으로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장바구니에 담아 놓고, 늘 살까 말까 망설이다가 다시 장바구니에서 지우곤 했던 책이다.

 

"하류지향"이라는 제목에 '배움을 흥정하는 아이들, 일에서 도피하는 청년들'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책이라, 당연한 얘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도서관에서 빌려볼까, 사서 볼까 망설이고 있는 와중에, 이 책을 펴낸 "민들레"에서 오랫동안 정기 구독을 했다고 이 책을 보내주었다. 결국 이 책은 내게 올 책이었구나.

 

이렇듯 어떻게든 내 손에 들어오는 책이 있다. 인연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간, 이 책은 내게 다가와 내 정신의 일부가 되었다.

 

책은 쉽게 읽힌다. 우치다의 책이 그렇듯이. 또한 읽으면서 '그럴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만큼 설득력이 있다는 얘기다. 교육 얘기라고 할 수 있지만, 사회 얘기하고 할 수 있고, 일본 얘기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 얘기라고도 할 수 있다.

 

오래 전에 우리나라에서 출간이 되었다고 판절이 된 책이라고 한다. 이 책을 민들레 출판사에서 다시 출간을 하였고, 서문에 그런 경위에 대한 우치다의 감상이 실려 있다.

 

처음에 잘 읽혔기에 판절이 되었을텐데, 몇 년 지나 다시 책이 나오게 된 이유는,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현실이 우리나라에서도 나타났기 때문일테고, 그러한 현실에 대한 분석이 타당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민들레 출판사는 계속해서 우리나라 교육에 관심을 보여온 출판사이니, 지금, 이 시점에서 이 책은 우리 교육을 바꾸어가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을 내렸을리라.

 

'배움으로부터 도피하는 아이들'이라는 말을 사토 마나부 교수가 썼고, 사토 교수는 이러한 문제를 돌하하기 위하여 '배움의 공동체'를 시도하였고, 나름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고 본다.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배움의 공동체'가 소개되었고, 시도하고 있으며,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학교도 있으니 말이다.

 

사토 교수가 이렇듯 교육 실천에 주목하고 집중하고 있다면, 사토 교수로부터 '배움으로부터 도피하는 아이들'이라는 개념을 빌려온 우치다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하는 원인 분석에 치중한다.

 

그 원인은 참으로 단순하다. 바로 "등가 교환"이다. 등가 교환은 자본주의의 기본으로, 즉, 화폐 경제를 유지시켜주는 근본 요소이다. 우치다는 이러한 등가 교환을 학생들이 어렸을 때부터 몸으로 익혔기 때문에 배움을 흥정하는 아이들이 탄생했다고 본다.

 

그거 배우면 뭐가 좋아요? 라는 질문은 그 물건이 왜 좋아요, 또는 그 물건이 어디에 좋아요? 라는 질문과 같다는 얘기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니, 너도 나에게 그에 상응하는 무엇을 주어야 한다는 신념(그것은 신념이다)을 지니고 있는 아이들에게는 배움이라는 '불쾌함'에 상응하는 교환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육은 그렇지 않다. 이를 우치다는 교육의 역설이라고 하는데...

 

교육의 역설은 당사자가 교육이 제공하는 이익을 교육이 어느 정도 진행될 때까지, 경우에 따라서는 교육과정이 끝날 때까지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런데 소비주체로 학교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애당초 그런 역설이 교육을 성립시키는 바탕이 된다는 사실을 모른다. (56쪽)

 

이러니 아이들이 수업에 집중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에게 '불쾌함'에 대한  등가는 수업 시간 내내가 아니라, 수업 시간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나머지는 등가 교환이 되지 않는 요소이기 때문에, 더 수업에 집중하면 자신이 손해를 보기 때문에, 학생들은 기를 쓰고 수업에 집중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한다고 한다.

 

어째, 많이 보이는 모습인데...이를 학생들이 의식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몸에, 마음에 이미 내면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무의식적인 노력, 그것이 바로 수업에 참여하지 않는, 즉, 배움으로부터 도피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어른이 되면 일을 하지 않는 그런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또 이러한 등가 교환에는 시간이 사라져 버린다고 하는데... 시간이 왜 중요하냐면 

 

지성이란 요컨대 나 자신을 시간의 흐름 속에 놓고 나의 변화를 고려하는 것이다. 이 말을 거꾸로 하면, '무지'의 정의도 가능하다. 무지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 자신 역시 변화한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못하는 사고를 뜻한다. ... 공부로부터의 도피, 노동으로부터의 도피는 자신의 무지에 고착하는  욕망인 것이다. (156쪽)

 

이렇게 시간을 고려하다보면 '등가 교환'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등가 교환을 포기하는 순간 배움이 일어난다. 왜냐하면 미지의 것에 대한 추구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자신의 인생을 거는 모험이다. 이러한 모험을 떠나기 위해서는 스승이 필요하고, 스승은 단지 기술을 전수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사회에 연결해주고, 나를 과거와 미래로 연결시켜주는 고리로 존재하게 하는 그러한 존재라고 한다.

 

스승이 필요함을 인식하는 순간, 배움에서 도피할 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스승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도 스승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은 시간 속에서만 가능하고, 또 '부등가 교환'에서만 가능하게 된다.

 

그러한 '부등가 교환'을 추구하기 시작하면 지금처럼 공부, 일에서 도피하는 사람들은 줄어들 수 있다. 다른 모습의 인간이 출현할 수 있다. 사회가 변하고,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로 변모되기 시작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류 지향'을 멈추고, 이제는 '상류 지향'을 할 수 있게 된다. 아니, 그렇게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치다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겠는가?

 

고착된 사회에서 그래도 노력하는 사람이 상류를 지향할 수 있고, 상류에 도달할 수 있다고 우치다는 말하고 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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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90호가 왔다. 한 해에 6호씩 발행이 되는 이 책이 벌써 90호란다. 곧 100호가 되겠다. 90호 동안에 우리 교육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들을 했는데... 이 가운데 실현이 된 것도 있을테고, 여전히 진행 중인 것도 있을테다.

 

이번호는 특집이 "초록은 동색?"이다.

 

초록은 동색이라? 왠지 '우리가 남이가?'란 말이 연상되는 제목이다.

 

많은 차이를 무화시키고, 하나로 귀결시키는 언어, 집단성, 통일성, 단일성의 언어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이런 제목을 단 이유는, 그래선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이지 않을까 싶다. 같은 집단 내에서도 이질적인 존재들이 다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하다못해 새누리당에서도 그들의 이념적 편차가 심할 것이고, 이들이 추구하는 목표도 다를 것이라는 생각. 또 정책마다 자신의 생각이 다르다는 생각. 그러면서도 당의 지도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도 하는 현실.

 

역시 초록은 동색인가?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가끔은 서로 다름을 묻고, 하나인 것처럼 행동할 때가 있다. 그런데... 더 큰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을 통해 목표를 추구해나가는 것이다. 그 때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생긴다.

 

이번 호에서는 대안학교에서의 다름들을 이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대안학교 교사들이라고 하여 모두가 똑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초창기에 많은 갈등을 겪고, 그것을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대안교육 15년을 이끌어왔다.

 

그럼에도 최근에 들어온 새내기 대안학교 교사들과 초창기 대안학교 교사들은 다름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그 다름이 불거지고 있다고도 한다.

 

이게 문제인가?

 

다름이 불거지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 바람직한 현상 아닐까?

 

이 책의 어떤 글에서도 있다시피 진화의 방향은 다양성 아니던가? 생물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한 가장 최선의 일이 종의 다양성 아니던가? 그렇다면 다양한 주장이 펼쳐지는 현상은 바람직하고, 권장해야 할 사항이다.

 

대안학교들에서 다름이 불거지고 있는 것은 대안학교가 그만큼 더 진보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말이 될 것이고, 교육적 실천의 다양성은 교육이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말이 되기고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회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그 사회가 민주 사회라는 얘기이고, 이 사회는 그러한 다양성을 바탕으로 더 좋은 사회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다양성을 막으려는 시도는, 오히려 진화의 방향에 역행하는 일이기에... 교육 현장을 단일화하려는 그러한 시도들은 교육 발전의 방향과 정반대로 나아가는 것이고,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종북이라는 이름으로 막으려 하는 것은 사회 발전의 방향을 가로막은 일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다름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다름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지 않을까 싶다.

 

갈등이 문제가 아니라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이 문제다. 갈등의 원인을 파악하고, 그 해결방법에 대해서 다양한 논의들을 거쳐 가장 바람직한 방향으로 해결해 나가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오로지 '초록은 동색'이라고, 한쪽으로만 규정하고 대화를 하지 않으려는 자세가 문제가 된다.

 

민들레 90호. 이번 호는 바로 '초록은 동색'이라는 말을 통해 우리 사회의 소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름을 인정해야 하나가 될 수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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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쓴 후성유전학 - 21세기를 바꿀 새로운 유전학을 만나다
리처드 C. 프랜시스 지음, 김명남 옮김 / 시공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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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학이라고 하면 전문적인 공부를 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들다고 지레 읽기를 포기하고 만다. 어느 순간부터 과학은 전문화되고 파편화되어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분야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유전학은 그 복잡한 과정에 대한 설명,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그런 요소들을 가지고 설명하기 때문에 더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또 살아있는 유기체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 인간처럼 변수가 많은 유기체를 연구하는 학문은 정말로 어렵기 마련이다. 그러니 일반인들이 유전학에 관한 책을 기피하는 것도 이해할 만한 일이다.

 

이렇듯 학문과 사람의 괴리가 일어난 일에는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으로 책을 낸다면 그 책임은 저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게 쉽게 설명을 해야 하는 책임을 다해야 하는데, 그런 책을 만나기가 힘들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점점 전문적인 지식과는 멀어지고, 자신의 문제를 전문가에게 의존하게 된다.

 

이 책은 이 점에서 어디에 가까울까?

 

후생 유전학이라는 학문은 생소하다. 유전학은 들어봤고, 게놈프로젝트나 배아복제나 줄기세포나 하는 말들은 들어보았지만, 하다못해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는 읽어보았어도, 후생 유전학이라니... 선천성이 아니라는 얘기는 유전자 자체가 무언가를 발현한다는 얘기가 아닌데...

 

이런 생각을 하며 읽었다.

 

책의 저자는 쉽게 후생 유전학에 대해서 쓴다고 했는데, 그래도 내게는 어렵다. 왜냐하면 이 후생 유전학과 돌연변이는 어떻게 다르지?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돌연변이는 유전학에 해당된다. 즉 유전자에 변형이 일어난 상태라는 얘기다. 반면에 후생 유전학은 유전자에 변형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세포 속에 있는 유전자가 어떤 작용에 의하여 다르게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쌍동이도 후생 유전학에서는 특정 질병에 누구는 걸리고, 누구는 걸리지 않는다. 즉, 유전자가 환경에 의해서 서로 다르게 작동을 하는데, 이것이 몇 대에 걸쳐서 작동을 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다른 것은 머리 속에서 지우더라도 후생 유전학적 관점에서 환경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만 기억하면 된다.

 

천상병의 글에 있듯이 우리나라 나이와 서양의 나이를 비교하면서 뱃속에 있을 때도 나이로 계산하는 우리나라 나이 계산법이 더 일리가 있다는 말을 이 후생 유전학이 뒷받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태아시절에 받은 스트레스가 몇 대에 걸쳐 전이가 될 수 있으며, 또 동일한 유전자를 지니고 있어도 어떤 사람은 안 좋은 유전자가 발현이 되고, 발현이 되지 않고를 결정할 수 있다고 하니 말이다.

 

태교의 중요성을 강조한 선인들의 지혜가 새삼 요즘의 과학으로 증명이 되었다고나 해야 할까?

 

그래, 다른 것은 잊자. 그 어려운 용어들을 다 이해할 필요도 없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 적어도 사회로부터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개인의 건강에도, 그리고 자손의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일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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