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홍지수 옮김 / 봄아필 / 2013년 7월
품절


가장 두려운 재앙은 불시에 닥쳐, 논리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혹은 어떤 논리적 이유도 없이 희생자를 낸다. 이 재앙은 제멋대로 폭력을 휘둘러 누가 희생되고 누가 구제를 받을지 예측할 방법이 없다. 오늘날 불확실성은 개인화를 촉진하는 강력한 힘이다. 개인화는 사람들을 화합하게 하기보다는 분열시키고누가 어느 쪽에 속하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공동의 이익'이라는 개념은 점점 모호해지고 결국은 이해 불가능해진다. 두려움, 걱정, 불만은 홀로 삭여야 한다. 개개인이 느끼는 이러한 감정들은 축적되어 '공동의 명분'을 형성하지 않으며, 기반이 되는 구심점도 없다. 따라서 과거처럼 개인들이 서로 연대해서 맞서는 전술이 불가능해지고 예전에 노동계급의 방어적이고 전투적인 조직의 구축과는 사뭇 다른 인생 전략이 필요해진다.-44-45쪽

신뢰가 없다면 저항도 있을 수 없다. 신뢰가 없다면 대립도 있을 수 없다. 피고용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운다면, 자신의 권리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고려될 수 있는 틀을 '유지하는 힘'을 신뢰한다는 뜻이다.-51쪽

지배력을 얻기 위해 질서의 부재, 혼돈을 무기로 사용하는 점이다. 권력투쟁의 전략은 다른 이들의 계산에서 자신을 밝혀지지 않은 변수로 만드는 한편, 자신의 계산에서는 다른 이들에게 변수의 역할을 허용하지 않는 일이다. 간단히 말하면, 지배력을 얻으려면 자기 자신의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규칙들은 제거하는 동시에 다른 이들의 행동을 제약하는 규칙을 가능한 한 많이 만들어내야 한다. 내 운신의 폭이 넓을수록 내 힘은 강해진다. 내 선택의 폭이 좁을수록 권력 투쟁에서 내가 이길 확률은 낮다. -59쪽

오늘날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자신들이 도달할 수 없는 이상적인 수준을 사회가 강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이상의 부재이다. 품위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분명한 방법, 확고하고 안정된 지향점, 삶의 여정에서 예측 가능한 목적지의 결핍이 원인이다. -75쪽

다른 사람들 곁에서 개인이 첫 번째로 깨닫는 점은 다른 이들과 함께함으로써 얻은 유일한 이득은 회복 불가능한 자기 자신의 고독에서 살아남는 방법에 대한 조언, 그리고 누구의 삶이든 삶은 맞서야 할 위험 요소로 가득하고 홀로 싸워야 한다는 점뿐이다.
...개인은 시민의 최대의 적(토크빌)-83쪽

개인이 시민의 최악의 적이고 개인화가 시민정신과 그것을 기반으로 한 정치를 위태롭게 한다면, 그 이유는 개인들이 개인으로서 몰두하고 관심을 갖는 사항들이 공적 영역을 가득 채우고, 공적 영역을 차지할 자격이 있는 유일한 관심사라고 우기면서 다른 모든 것들을 공공의 담론 바깥으로 밀어내기 때문이다. '공(公) '사(私) 점령당했다.-85쪽

민주주의는 제도가 아니라 반제도적인 힘, 곧 변화를 막고,권력층 태생이 아닌 이들을 침묵시키거나 정치적 과정에서 배제하고, 자신들만이 전문성이 있다는 주장을 하면서 통치를 독점하려는 권력의 집요한 특성을 '붕괴'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권력자들은 소수의 통치를 주장하는 반면, 민주주의는 모두를 대표하는 통치이다. 즉, 모두가 동등하게 갖고 있는 특성, 시민권을 기반으로 한 권력이다.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제도를 비판한다. 민주주의는 정치체제에 내재하는 무정부적이고 파괴적인 요소이다. 본질적으로 반대와 변화의 힘이다. 특정 사회가 민주주의인지 알아보려면 그 사회에서 아직 만족스러울 만큼 사회가 민주적이지 않다는 불평이 끊임없이 나오는지 보면 된다.-93쪽

할 수 있는 능력과 하고 싶은 것이 일치하면 행동에 옮기겠다는 확고한 결심이 서게 된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겹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고, 두 가지가 서로 맞지 않을 때 가장 처음 직관적으로 느끼는 것이 모호함이다. 가능성의 부피가 의지의 능력을 초과하면, 모호함은 불안함과 걱정의 형태로 표면화된다. 그 반대의 경우, 즉 도달하고 싶은 상태보다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이 월등히 높아 도달해도 만족스럽지 않을 때 모호함은 불화, 철회, 탈출하려는 절박한 욕구로 표면화된다.-99쪽

당연히 내 형제는 내 책임이다. 내 형제가 내 책임이어야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냐고 묻지 않는 한 나는 도덕적인 사람이다. 내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나는 내형제를 책임져야 한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내 형제의 안녕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그런 내 형제의 의존성을 인식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도덕적인 사람이다. 내가 그 의존성에 의문을 갖는 순간, 그리고 카인이 그랬듯이 내가 왜 책임을 져야 하는지 이유를 대라고 요구하는 순간, 나는 내 책임을 저버리게 디고 더 이상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다. 의존성과 윤리는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을 수밖에 벗는 관계이다.-120-121쪽

모든 도덕성의 본질은 사람들이 타인의 인권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므로 이는 또한 한 사회의 윤리적 기준을 평가할 수 있는 척도이다. 이것이 복지국가가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척도, 복지국가의 평가에 필요한 유일한 척도라고 나는 주장한다.-132쪽

누군가에 대해 책임을 지는 행위는 평생 동안 해야 하는 힘든 일이고 도덕적인 갈등을 겪게 되는 일이며, 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없앨 수 없다. 그러나 도덕적인 사람에게 이는 반가운 내용이다. 사회복지사들은 매일매일 바로 이러한 상황에 처한다.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하고, 옳은 선택이라는 보장도 없고 적절한 선택이라고 확신을 주는 권위자도 없이 선택을 해야 하는 바로 그런 상황에서, 도움을 주는 타자의 책임, 모든 도덕성의 토대가 마련된다.
... 복지국가의 미래는 윤리적 투쟁에 달려 있다.-136쪽

포스트모던 시대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폭력의 양상은 정체성 문제의 사유호, 탈규제화, 분산에서 기인한다고 나는 제안하고 싶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정체성을 구축하는 집단적이고 제도화되고 집중화된 틀의 와해는 의도된 것이 아니라 저절로 발생한 현상이다. -154-155쪽

'공'이 '사'를 지배하려 한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 그 반대이다. 공적인 공간을 지배하는 것은 사(私)이다. 사는 사적인 이해와 목적의 언어로 해석될 수 없는 것은 남김없이 공적인 공간에서 몰아내버린다. ... 개인은 시민의 최악의 적이다. -178쪽

근대국가가 질서구축에 관한 한 무력하고 냉소적이라는 점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정치가 뭔가를 할 수 있는 힘(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힘)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정치적 삶과 관련된 모든 기관들이 지역에 발이 묶여 꼼짝 못하는 한편, 권력은 흘러서 그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머무르게 된다.-184-185쪽

빈곤층의 처지를 통해 얻는 교훈은 그들이 누리는 확실성은 우리가 그렇게 혐오하는 불확실성보다도 훨씬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틀림없으며, 일상적인 불확실성이 주는 불안감에 저항하면 즉시 무자비하게 처벌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빈곤층의 모습을 보고 빈곤하지 않은 계층들은 자신의 처지를 얌전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면 그들의 불확실한 삶은 계속된다. 끊임없이 유연해지는 세상과 점점 불안정해지는 자신의 처지를 견뎌내거나 체념하고 받아들인다. 빈곤층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상상력을 가둬버리고 자신의 손에 족쇄를 채운다. 그들은 감히 다른 세계를 상상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나치게 소심해져서 이 세계를 바꿀 엄두를 내지 못한다.-193쪽

'유연성'은 또한 안정의 부재를 뜻한다.
...중요한 생계의 기능은 실존적인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며 이러한 안정감이 없이는 자기주장을 할 자유나 의지를 갖기가 불가능하고, 이러한 자유와 의지는 모든 자율성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이다. 현 상태로서의 일은 생존에 필요한 비용을 제공하기는 해도 그러한 안정감을 제공할 수 없다. -196쪽

모든 교육이 풀어야 하는 영원한 과제, '삶에 대한 준비'는 무엇보다도 매일매일 불확실성과 모호성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능력을 기르고, 다양한 관점이 존재하며 절대 오류가 없고 믿을 수 있는 권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인정함을 뜻해야 한다. 또한 차이를 받아들이고 다를 수 있는 권리를 존중하는 의지를 불어넣어줌을 뜻해야 한다. 자신의 선택과 그 결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용기와 비판과 자기비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강화시켜줌을 뜻해야 한다. '사고의 틀'을 바꾸고 자유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고, 새로운 미지의 세계가 안겨주는 기쁨과 함께 선택의 어려움이 주는 불안감도 아우를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줌을 뜻해야 한다.-226쪽

너무 잘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으며,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눈에 띄지 않는다. 사물은 사라지거나 파괴됐을 때 눈에 띈다. 우선 '기정 사실' 상태에서 벗어나야 그 사물의 본질에 대한 탐색이 시작되고 그 사물의 기원, 쓸모, 가치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한다.-230-231쪽

미래에 대한 전망에 의거해서 현재를 전환하려면, 조금이라도 현재를 장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현재에 대한 장악력, 즉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우리가 사는 유형의 사회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다. 함께 힘을 모아 게임의 법칙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우리를 두렵게 만들고 참혹한 결과로 고통받게 만드는 위험의 근원은 사회적 집단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위험은 무차별적으로 개인들에게 가해져 개인적인 문제가 되고, 이 문제는 오로지 개인이 홀로 직면해야 하고, 수습한다고 해도 오로지 개인의 노력을 통해서만 수습할 수 있다.-243쪽

우리는 진정으로 중요한 일을 할 수 없게 되거나 할 수 없다고 믿게 되면, 덜 중요한 일들로 관심을 돌리거나 우리가 할 수 잇거나 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외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 중요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는 문제들로부터 덜 중요하거나 전혀 중요하지 않지만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로 관심이 옮겨간다. 가장 두드러진 현상이 충동구매이다.-245쪽

삶이 분산되면 삶을 단편처럼, 개별적인 사건들의 연속처럼 살게 된다.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하면 존재가 파편으로 나뉘고 살미 단편으로 쪼개진다. 불안감이라는 망령을 처치하지 않는 한 오래 지속되는 가치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가능성은 요원하다.-261쪽

사랑은 가치와 관련이 있는 반면 이성은 쓸모와 관련 있다. 사랑의 눈으로 본 세상은 가치의 집합이다. 이성의 눈으로 본 세상은 쓸모 있는 사물들의 집합이다.
.. 가치는 사물의 질이지만, 쓸모는 사물을 사용하는 사람의 속성이다. -268쪽

용도와 가치 지향성에서 이성과 사랑은 각자 다른 길을 가게 된다. -270쪽

이성은 자기 자신에 대한 충실함을 권장한다. 반대로 사랑은 타자와의 연대를 요구한다. 따라서 더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 대상에 자신을 종속시킨다.-272쪽

정의라는 개념은 (타자에 대한 도덕적 책임에서는 기정사실인) 유일무이함의 경험과 (사회적 삶에서 기정사실인) 다수의 타자들에 대한 경험이 만나는 순간 잉태된다.
... 윤리의 '주요 장면'은 또한 사회정의의 주요 장면이자 사회 정의보다 먼저 발생한 장면이기도 하다.-296쪽

기술 발달과 정치의 무력함으로 시간적 공간적 거리가 와해되면서 인간이 처한 여건이 향상되기는커녕 양극화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으로 어떤 이들은 영토적 제약으로부터 해방되고, 공동체가 창출하던 의미들이 지역적 공동체 바깥에서 창출된다. 또 한편으로는 여전히 지역적으로 발이 묶인 이들의 삶의 터전은 공동체의 의미와 정체성을 부여하는 능력을 박탈당한다. 어떤 이들은 무릴적인 장애물로부터 해방되어 전례 없는 자유를 누리고 지금까지 들어보지도 못한 이동성을 누리며 먼 거리를 자유롭게 이동한다. 어떤 이들은 지역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의 터전을 자신에게 알맞게 가꾸기도 불가능해진다. -309쪽

민주주의는 공과 사 사이에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소통이다. 사적인 문제들을 공적인 이슈로 탈바꿈시키고 공공의 안녕을 사적인 과제와 프로젝트로 재구성하는 일이다.
... 해석이라는 과업이 아직 달성되지 않았다는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사회, 아직 만족스러울 만큼 민주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회라야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 공과 사 사이의 소통과 해석이 가능하고 실용성이 있으려면 사회의 자율성과 사회 구성원들의 자율성이 있어야 한다. 시민들은 자율적이어야 한다.-328-3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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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된 시집이다. 하긴 성석제의 첫 시집이라고 하니. 그를 누가 시인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성석제는 소설가로 우리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가. 마치 황순원이 소설가로서 알려져 있지 그가 처음에는 시를 썼다는 사실을 잘 모르듯이.

 

집에 있는 시집들의 제목을 보다가 어라, 성석제 시집도 있네. 내가 산 것은 아닌데... 지금 나와 같이 사는 사람이 산 시집인가 보다.

 

읽어보지 않았는데, 이 책은 읽히지 않는 낯섬을 견디고 책꽂이에서 다시 펼쳐지길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이제는 헌책방에서나 구할 수 있는 책이 되었는데...

 

제목도 마음에 든다. "낯선 길에 묻다"

 

우리는 모두 낯선 길을 간다. 인생이란 바로 이러한 낯선 길을 걸어가는 여행 아니던가.

 

낯설기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그리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느끼게 해주는.

 

그런 길을 걸어본 적이 얼마나 오래되었던가. 아니, 요즘은 나이 먹었다는 이유로 낯섬을 의도적으로 피하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던지.

 

시인은 늘 보던 것도 낯설게 볼 수 있는 사람이고, 우리가 시를 읽는 이유는 일상이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낯섬을 만나는 즐거움을 누리기 때문이 아니던가.

 

그래서 이런 낯섬은 반갑기도 하다. 그가 소설가로 유명하다는 사실에서 그의 시집을 만나는 것도 또한 낯선 일이기도 하다.

 

'낯섬'과 '묻다'라는 말이 제목에 있는데, 이런 제목을 가진 시는 이 시집에 없다. 시집 전체를 읽으며 우리는 낯섬을 만나고, 그리고 물어야 하는 지도 모른다.

 

시집 내용이 밝지가 않다. 밝지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슬프다. 너무도 슬프다. 91년에 발간된 시집인데, 그런데도 이 시집에 나오는 내용들이 아직도 진행형이라는 사실이...

 

또 불행하게도, 참으로 낯설게도, 이렇게 된 경우는 거의 없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시집은, 33쪽부터 40쪽이 없다.

 

막내의 여섯 가지 심부름. 아버지와 아들, 수술실. 이렇게 세 편의 시가 빠져 있다. 낯설다. 그것도 모르고 지금까지 이 시집을 지니고 있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이 없음을 받아들이고 함께 해야 한다.

 

나중에 어디선가 이 세 편의 시를 적어서 끼워넣어야 되겠지.

 

이런 불행과 함께 시에 나오는 내용들은 참으로 불행하다. 어둡다. 슬프다. 90년대에는 그로테스크라는 말을 많이 썼나 본데... 지금은 우리가 살아간 현실을 시인이 직시하고 표현했다고밖에는 표현하지 못하겠다. 이 시집에 있는 내용들은 그로테스크가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므로.

 

특히 이런 시들은 눈물이 날 정도로 슬프다. 시에 이야기가 있으므로, 그 이야기를 우리가 머리 속에서 생생하게 영상으로 떠올릴 수 있으므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시들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 지금 현실에서 계속되고 있으므로.

 

한 상사. 유리 닦는 사람. 가족1. 하늘 가까운 방. 그리고 3부의 동물이 등장하는 시들.

 

현실임에도 낯설다고, 여기서 물어야 한다고 한다. 20여년이 지났는데... 정말로 이 시집에 나오는  시들이 낯설었으면 좋겠는데... 그래서 당시의 사회 상황에 대해서 공부하고, 이런 일이 있었나 하면 좋겠는데...

 

성석제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그래서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도 이야기로 되어 있는 시들이 많다. 마치 옛날에 임화나 이용악의 시에 이야기가 나와 있듯이. 그들 시를 '단편서사시' 또는 '이야기시', '리얼리즘시'라고 이름지었듯이 성석제의 시도 그 계보를 잇는다고 볼 수 있다.

 

이야기를 통해 우리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읽으면서도 시의 내용이 머리 속에 그려진다. 그것이 더 큰 울림을 준다.

 

새해 벽두. 20여년이 지난 지금 읽어본 성석제의 시집. 이 시집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000년대는 1990년대를 또는 1980년대를 낯설게 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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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이하기 위하여 송년회란 이름으로 술어 절어 산 나날들이다. 술에 젖어드는 만큼 세월의 무게가 나를 짓누른다. 그리고 세상의 습기가 나에게 스며든다. 술과 세월과 세상과 나이가 한꺼번에 나에게 다가온다. 무겁다.

 

이 삶의 무게는 정말 도도하다. 도저히 나에게서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 그럼에도 나는 낙타처럼 이 무게들을 지고 간다. 아직은 쓰러지지 않았으므로. 쓰러질 수 없으므로. 나에게는 이 짐들을 지고도 가야 할 길이 있으므로. 

 

가끔 오아시스를 그리워한다. 오아시스를 찾는다. 잠시 목이라도 축이게. 몸이라도 쉬게. 짐을 잠깐 동안이라도 내려놓을 수 있게. 앞만 보고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 볼 수 있게. 그리고 조금 더 멀리 볼 수 있게.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친 상태에서 책장을 기웃거린다. 며칠 동안 읽었던 바우만의 책들이 더 삶의 무게를 더해주고 있기에.. 그런 분석에서 내 삶도, 우리들의 삶도 자꾸 '부수적 피해' 쪽으로, '밑바닥 계급' 쪽으로 가고 있기에.

 

최장기간 파업이라는 기록을 세웠던 철도노조 파업이 막을 내렸다. 노동자들이 얻은 것이 무엇일지. 과연 민영화라는 이름의 사영화(私營化)가 막아질지 그것은 지켜볼 일이지만, 파업 내내 마음을 졸였던 노동자들. 또 앞으로 그들에게 발부된 체포영장, 구속영장 등은 더 많은 짐을 지우게 될텐데...

 

즐거운, 밝은 내용의 시로 시작을 해야 하는데... 한 해 우리는 우리네 삶을 이 시로 표현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정말로 사냥꾼에 몰린 사냥감이 된 해라고 해야 하나.

 

인간이 다른 생명체에게는 사냥꾼이겠지만, 이 시에서 보듯이 인간은 인간에게 더 무서운 사냥꾼이 된다. 약자들은 세계화 시대에, 신자유주의 시대에 자유란 이름으로, 자본이라는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에 의해 사냥감으로 전락한다.

 

현실을 직시하자. 그래야 벗어날 길이 보인다. 슬프지만... 우리의 현실을 보여주는 시.

 

사냥꾼

- 이희중

 

벌레의 집으로 옷을 짓고

꽃으로 베를 짜며 짐승의 살갗을 뺏어 입는다

식물의 시체 썩은 검은 물을 태워 수레를 굴리고

돌을 녹여 생각 없는 무서운 짐승과

그의 이빨을 만든다 흙을 박제한 후

의자에 의지하고 제 비린내를 강물에 씻어

세상을 더럽힌다 그리고 직설적으로

더 상징적으로 동족을 사냥한다

 

안도현 엮음, 바람난 살구꽃처럼, 현대문학북스. 2002년 1판. 22쪽

 

그래. 인정하자. 작년 한 해는 이러한 사냥꾼들이 득세를 한 해였다. 사냥꾼들에게 우리는 마냥 쫓기고만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쫓기고만 있었을까? 아니다. 분노도 했다. 광범위한 분노. 그러나 그 분노는 결코 그릇을 넘지 못했다. 그릇 안에서만 부글부글 끓고 있었을 뿐이다.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는 외침은 외침으로만 끝나고.. 우리는 우리의 분노를 그릇 안으로, 그릇 안으로만 삭여내고 있었다. 세상에... 분노할 일에 분노해야 하는데...우리는 단순한 '원민'이 아닌데... 분노도 못 하는 '항민'이 아닌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 '호민'이 되어야 하는데...

 

이 시집에서 이 시가 내 맘에 꽂힌 이유이기도 하다. 이 시의 내용은 바로 내 얘기이기도 했으므로.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했으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짐 지운 자들에게 분노하고, 끓어오르기도 했지만, 그것이 겨우 그릇 안에서만 그랬으므로. 이제는 넘쳐야 한다. 끓어 넘쳐야 한다. 뜨거움을 보여주어야 한다. 

 

물이 끓어서 그릇 밖으로 넘쳐 나지 않으면 그것은 그냥 끓을 뿐이다. 사라져갈 뿐이다. 이제는 정당한 분노는 제대로 끓어오르게 해야 한다. 뜨거움이 번지게 해야 한다. 그것이 진짜 분노다. 진짜 끓어오름이다.

 

                      물 끓이기

          - 정양

 

한밤중에 배가 고파서

국수나 삶으려고 물을 끓인다

끓어오를 일 너무 많아서

끓어오르는 놈만 미친 놈 되는 세상에

열받은 냄비 속 맹물은

끓어도 끓어도 넘치지 않는다

 

혈식(血食)을 일삼는 작고 천한 모기가

호랑이보다 구렁이보다

더 기가 막히고 열받게 한다던 다산 선생

오물수거비 받으러 오는 말단에게

신경질 부리며 부끄럽던 김수영 시인

그들이 남기고 간 세상은 아직도

끓어오르는 놈만 미쳐 보인다

열받는 사람만 쑥스럽다

 

흙탕물 튀기고 간 택시 때문에

문을 쾅쾅 여닫는 아내 때문에

'솔'을 팔지 않는 담뱃가게 때문에

모기나 미친 개나 호랑이 때문에 저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늘 수 있다면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부끄럽지도

쑥스럽지도 않은 세상이라면

그런 세상은 참 얼마나 아름다우랴

 

배고픈 한밤중을 한참이나 잊어버리고

호랑이든 구렁이든 미친 개든 말단이든

끝까지 끓어올라 당당하게

맘 놓고 넘치고 싶은 물이 끓는다

 

                                  안도현 엮음, 바람난 살구꽃처럼, 현대문학북스. 2002년 1판. 56-57쪽

 

새해에는 '끓어오른 놈만 미쳐보이는, 열받는 사람만 쑥스러운' 모습으로 남지 않고,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부끄럽지도, 쑥스럽지도 않은 아름다운 세상'이 되도록 해야지. 그래서 '끝까지 끓어올라 당당하게 맘 놓고 넘치'는 물이 되도록 해야지.

 

아름다운 시어들이, 세상을 밝고 명랑하게 보는 시로 시작하지 않고, 이런 시로 시작한 아름다움. 지금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아름다움은 바로 이런 것 아닐까... 하여 한 해를 되돌아보고, 새해를 다짐하는 시가 내게는 바로 이런 시가 된다.

 

시가 다시 내게로 다가왔다. 내 삶 속으로 스며들어 왔다. 고맙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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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수적 피해 - 지구화 시대의 사회 불평등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정일준 옮김 / 민음사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바우만의 책을 읽으면서 갑자기 들뢰즈가 생각이 났다.

 

바우만은 liquid (액체 또는 유동적)라는 말을 쓰고 있고, 들뢰즈는 nomad(유목)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이는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고정적이고, 고형적인 것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들뢰즈의 이론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가 말한 노마드가 지식인의 차원에서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는데... 탈주, 리좀 등 이는 지식인들이 포스트-모던한 시대를 살아가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탈영토화니 재영토화니 하는 말들이 결국은 있는 사람, 즉 버틸 수 있는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그러니 이러한 세계화 시대에 자신의 자리를 잃고 탈주가 아니라 배제되는 사람에게는 들뢰즈의 이론은 탁상의 공론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역시 잘 몰라서 그런다고 하겠지만, 그래도 그런 느낌이 팍 들고 있는 것은 뭘까?

 

아마도 바우만의 책을 읽어서 일 것이다. 그의 책을 읽으면 이렇게 어려운 용어는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액체라는 말도 유동적이라고도 번역하고 있듯이 들뢰즈가 말하는 리좀과 비슷한 개념으로 쓰이기는 하지만, 그가 말하는 유동적 근대 또는 액체 근대에서는 재영토화는 이루어지기 힘들다고 본다.

 

그들은 소외되고 배제되는 쓰레기가 되는 삶을 살게 되고 만다. 이를 그는 지구화 시대의 사회 불평등이라고 하는데...

 

이 책에 나와 있는 제목만 보아도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어느 정도 알게 된다.

 

서문- 사회 불평등의 부수적 피해

1. 광장에서 시장으로

2. 공산주의를 위한 진혼곡

3. 유동적 현대에 사회 불평등이 처한 운명

4. 이방인은 위험한 존재다?

5. 소비주의와 도덕성

6. 프라이버시의 위기와 인간 유대

7. 운과 개인화된 해결책

8. 현대 아테네에서 고대 예루살렘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다

9. 악의 자연사

10. 우리 가난한 사람들

11. 사회학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래 이 책은 그래서 지구화 시대, 세계화 시대에 밀려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들이 왜 밀려나고 있으며,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이것이 바우만이 추구하는 주제다. 그리고 이런 사회를 유지하는 것이 바로 정치권력이라고 한다.

 

인간의 취약성과 불확실성은 모든 정치권력의 기초다. 권력은 국민에게 인간 조건의 이런 두 가지 해악에 대한 효과적인 보호를 약속함으로써 권위와 복종을 확보한다. (188쪽)

 

이와 마찬가지로 이방인에 대한 두려움을 조장한다. 그러한 두려움을 통해 권력은 자신의 힘을 유지한다. 이렇듯 권력에게는 배타적인, 늘 버려지는 사람들이 존재해야 한다. 그것을 밑바닥 계급이라고 하는데,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쓰레기로 취급되는 계급이라는 뜻으로 해석이 된다.

 

그리고 이를 세계화에 따른 부수적 피해라고 한다. 이것이 세계화의 필연적인 결과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어쩔 수 없이 생긴, 긍정에 따르는 부정이라는 개념으로 홍보하고, 권력화한다.

 

바우만이 추구하는 사회학은 이런 사회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그는 이런 직시할 수 있는 힘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그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쉽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세상에 구체적인 대안이 어디 있겠는가.

 

그것은 우리가 현실을 직시하면서 그때 그때 상황에 맞게 우리의 삶을 만들어나가야 하는 데서 찾아진다. 이것이 바로 바우만이 제시하는 대안이다. 사회학은 이런 임무에 복무해야 한다.  

 

우리도 지금 너무도 많은 공포를 조장당하고 있다. 이러한 공포를 통해 우리는 삶에 일어나는 필연적인 손해를 부수적 피해라는 이름으로 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누군가에게 밀려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회는 불안 요소를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불안 요소는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고 사람들의 행복을 방해하게 된다.

 

바우만이 말하는 밑바닥 계급, 또 부수적 피해를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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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두 편의 영화를 봤다. 둘 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지만, 실화보다도 더 실감나는 배우들의 연기로 상당한 호평을 받고 있는 영화다.

 

사실, 두 영화 모두 보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편치 않을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고, 본 결과 역시 맘이 편치 않았다.

 

 

도대체 이런 영화가 지금 개봉이 되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니... 조금 우습기도 하다.

 

영화 속의 내용과 실제의 사실이 다를 수밖에 없고, 영화에서 사실을 찾아내려고 하는 모습이 우습기도 하지만, 예술이란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영화들이라고 해야 하나.

 

 

 

하나는 "집으로 가는 길"

 

마약 사범으로 몰려 프랑스 감옥에서 거의 2년을 갇혀 있다가 나오는 사연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영화.

 

마약이라는 범죄보다는, 그러한 일을 저지른 국민을 대하는 외교관을 태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하는, 외교관은 국가를 대표한다고 하면, 국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하는 영화.

 

 

이 영화를 보면서 2000년대의 대한민국이 아직도 후진국이라는 사실, 국가는 국민을 바탕으로 유지가 되는데도, 국민을 위해서 존재하기 보다는, 즉, 링컨이 말했다는 그 유명한 말.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라는 말. 그것이 국가라는 사실을 잊게 해준 그런 영화.

려운 처지에 놓인 국민을 국가가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해서 너무도 적나라하게 알려준 영화라고 해야 하나.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저런 외교관은 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했을 거라 생각하는데. 그런 외교관이 존재하는 나라는 제대로 된 나라라고 할 수 없다는 생각.

 

외교에서 목표로 삼고 있는 국가의 이익이란 다른 말로 하면 국민의 이익이 아니던가. 그걸 망각한 외교관은?

 

역시 또 하나의 영화. "변호인"

 

 

 

보고 싶다와 보고 싶지 않다가 공존했던 영화. 어차피 일은 뻔한 거고, 역시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에 결말은 뻔하지만, 그렇지만, 그 결말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에, 보고 나면 마음이 더 무거워지지 않을까 생각했던 영화.

 

그래도 현실을 비껴갈 수 없다면, 그런 영화에서 표현하고 있는 국가와 국민의 문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본 영화.

 

역시 보고 난 다음에는 "국가란 무엇인가"를 또다시 생각하게 만든 영화. 아니 생각하게 한다기보다는 절규하게 한다고 해야 하는 영화.

 

이 영화가 마음 아프게 다가온 이유는 이 영화가 과거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아직도 진행중이라는. 무려 30년이 더 지난 일인데도, 민주화가 되었다고 하는데도, 왜 진행중이라는 생각이 들까?

 

내 생각이 잘못되었든지, 아니면 정말로 이 사회가 한 발짝도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든지 둘 중 하나 아니던가.

 

읽고 있는 책 중에 이런 구절이 있었는데... 두 영화를 보면서 이 구절이 딱 들어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정치 체제의 민주주의적 성숙도는 이러한 번역(사적인 관심과 욕구를 공적인 쟁점으로 재구성하고, 역으로 공적인 관심사를 개인의 권리와 의무로 재구성하는 것)의 성공과 실패, 매끄러움과 거칢에 의해 측정될 수 있다. 즉 그 주된 목적을 달성한 정도에 의해 측정되어야지,종종 민주주의의 필요충분조건으로 오인되곤 하는 이러저러한 절차의 완고한 준수 여부에 의해 측정되어서는 안 된다. (바우만, 부수적 피해.민음사. 2013년. 21쪽에서)

 

 

지금은 그래도 절차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확립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이지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차적 민주주의조차 확립되어 있지 않던 시대를 보여주고 있는 "변호인"이란 영화를 보면서 더욱 실감하고 있다고나 해야 할까.

 

우습게도, 아주 오래 전에 나온 소설인 채만식의 "논 이야기"까지가 떠올랐다. 해방이 되고 나서 만세를 부르지 않길 잘했다고 자조하는 주인공.

 

그에게 나라란, 국가란 자신에게 피해만 주는 존재였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외치는 우리나라 헌법 제 1조 제2항은 그 때는 요원했다. 그런데, 2000년대에 벌어진 "집으로 가는 길"에서도 역시 요원했다.

 

아니, 헌법이 87년 민주화 운동의 결과로 나타났듯이, 그래서 우리가 헌법, 헌법, 우리나라 모든 법 위에 있는 최상위 법으로 헌법을 인정하고 있듯이 헌법의 가장 앞에 나와 있는, 국가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그 당연한 귀절을, 헌법 책에만 있는 조항으로 여겨서는 안될 것이다.

 

적어도 영화에서 표현된 내용들이, 소설에서 표현된 내용들이 과거의 것으로만 머물게 할 의무는, 권리는 우리에게 있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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