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학교는 예술이 필요한가
제시카 호프만 데이비스 지음, 백경미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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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가 교육을 압도하면서 학교에서는 예술이 사라졌었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라고 해야 옳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입시가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몇몇 학교에서는 교육과정 자율화라는 명목으로 예술 과목을 줄이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최근에 학교 폭력이 심해지면서 이러한 폭력을 근절할 수 있는 방법으로 예체능을 강화하는 방안이 제기되었는데, 이상하게도 예술보다는 체육 쪽으로 힘이 실려 방과후 체육활동이라든지, 스포츠클럽 활동이라든지 하는 시간은 늘어났지만, 예술은 늘어났다고 보기 힘들다.

 

다행인 것은 예체능은 집중이수제에서 제외함으로써 모든 학년에서 예술 과목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인데, 아직도 절대적인 시간은 부족한 현실이다.

 

이 책은 이러한 우리나라의 현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 외국에서도 예술을 교육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았나 본데, 이 책에서는 이를 인식하고 학교에서 예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예술에 대한 여러 의견들을 종합하고, 그 의견들을 토대로 하여 왜 학교에서 예술을 교육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하고 있다.

 

예술이 지식교과만큼, 어쩌면 지식교과보다도 더 교육에 필요하다는, 학생들이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교과가 바로 예술이라고 한다.

 

예술이 왜 필요한가? 그것은 학생들이 전인적인 인간으로 성장해가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몇몇 사례들만 보더라도 예술은 다양성을 인정하게 하고, 실패를 통해서 배울 수 있으며, 상상력을 키우고 발휘할 수 있으며, 또한 상대에 대해서 공감하는 능력을 형성할 수 있는 등 지식교과보다도 더 많은 것들을 학생에게 줄 수 있다고 한다.

 

문제는 이러한 예술교과의 정당성을 이론화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현장에서 실천하는 것인데, 어떻게 하면 학교에서 예술을 가르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

 

찾아보면 많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우선 입시위주의 교육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렇다면 이는 교사나 또는 예술인들과 정치인, 또는 일반 시민들이 함께 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가 되는데...

 

쉽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시도하면 지지자는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고 한다. 하긴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발도로프 교육이니 뭐니 하면서 예술 교과를 운용하는 학교도 많으니, 생각만 하고 있어서는 안되겠지.

 

그게 이 책의 의미일 터. 예술은 반드시 필요하다. 지식을 보조하는 도구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사람을 완성하는 도구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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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의 "젠틀맨"이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한다. 작년에 "강남 스타일"로 세계적인 스타로 떠오른 싸이의 후속작이다.

 

평가는 기존 강남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안정을 취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싸이라는 이름에 유명세를 더 타지 않나 싶다.

 

예전 같으면 B급 음악이라고 했을텐데, 이제는 그런 소리를 하지 않는다. 음악에 에이급이다 비급이다 하는 것이 있겠느냐마는, 이상하게도 싸이의 음악이 홀대를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강남 스타일로 세계적인 스타가 되기 전에는.

 

싸이가 세계적인 스타가 되고 난 뒤, 그의 작품은 나름대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냥 예전 싸이의 음악이라는 소리가 아니라, 이제는 세계적인 스타의 음악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스타는 한 번 만들어지면 계속 더 스타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기회를 지니게 된다. 그런데 어떻게 싸이가 만들어졌을까?

 

어쩌면 우리는 이제는 스타라는 것도 개인의 노력보다는 무언가 만들어진 제도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스타는 개인이라기 보다는 제도의 결과라는 생각.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니, 이는 싸이가 약간은 다르다고 하더라도 소위 말하는 아이돌들을 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말이다.

 

개인의 능력으로 스타가 되기 참 힘들어진 시대가 되었으니 말이다.

 

여기에 싸이라는 사람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싸이와 서태지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겠지만, 서태지도 처음에는 그런 음악을 하다니, 저게 무슨 음악이냐 하는 소리를 듣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는 우리나라 음악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하여 우리나라 대중음악계는 서태지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제 싸이는 자신만의 음악으로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으니.. 나중에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그냥 음악을 음악으로 즐겨도 되지만, 그런 음악의 역사를 알고 듣는 것도 좋지 않을까? 또 스타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도 알게 되면 더 좋지 않을까.

 

싸이가 다시 언론에 나오는데, 갑자기 두 책이 생각이 났다. 예전에 읽었었는데, 어쩌면 그 책들의 내용이 지금의 싸이 현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김호석, 스타 시스템, 삼인, 1998

이영미, 서태지와 꽃다지, 한울,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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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철완, 최동원 프로야구 레전드 2
최준서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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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야구의 계절이다. 이제는 9개 구단이 되었고, 신생 구단이 첫승과 첫 연승을 했으니,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간다고 해야 하나... 이제 몇 게임 하지도 않았는데, 좀 섣부르기는 하지만.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류현진이 활약을 하고 있어, 더 야구에 흥미를 느끼게 해주고 있는데...

 

이 때 최동원이라는 투수가 생각났다.

 

저번에 장효조를 읽었으니, 이번엔 최동원이다. 둘 다 같은 해에 세상을 떴는데...

 

최동원의 경기나 장효조의 경기를 중계로 본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과 함께 했던 이들 중 감독이나 코치가 된 이들도 많은데, 이들은 이제 야구를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으니...

 

최동원의 투구야 뭐, 하도 언론이나 여러 글에서 이야기를 해서, 게다가 영화로도 만들어졌으니 새삼 거론할 것이 없고, 이 책을 통해서는 시대를 앞서갔던 야구인 최동원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초대 선수협 회장을 역임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때문에 많은 고난을 겪었다는 사실, 또 투수로서 자신의 어깨에 보험을 들었다는 사실, 이런 것들이 지금은 당연시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인정받지 못하는 일이었으니...

 

지금의 선수협이 이 정도로 인정받고 있는 것도 이런 선배들의 노력이 있어서였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는 선수로서도 대단했지만, 인간으로서의 대접을 받길 원했던 사람으로서도 대단했다는 생각이 든다.

 

단지 돈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주기를 바랐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사람이 있었기에 지금 700만 관중의 시대를 열지 않았을까 한다.

 

철완으로 불리던 최동원. 그가 야구인으로서도 앞서간 인물이었다는 사실. 그런 인물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는 이렇게 야구를 즐기고 있다는 생각.

 

그렇다. 세상의 모든 일은 한 사람의 일로 되지 않는다. 모두 앞서간 사람들이 있었기에 이루어진다. 지금의 프로야구도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최동원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 기억이 지금의 선수들에게도, 팬들에게도, 또 미래의 선수, 팬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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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이후의 삶 - 역사, 철학, 예술로 3.11 이후를 성찰하다
한홍구.서경식.다카하시 데쓰야 대담, 이령경 옮김 / 반비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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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잊혀지고 마는가. 후쿠시마가.

 

마치 체르노빌이 먼 과거의 일로만 존재하듯이.

 

우습게도 체르노빌이 지금도 현재진행형인데, 사람들은 후쿠시마를 잊으려 한다. 잊으려 한다기보다는 잊혀지게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후쿠시마 사건 이후 발빠르게 원전가동 중지를 선언했던 일본이 곧 원전 재가동을 시도했는데, 마치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하고 있으며, 후쿠시마 사태 이후 오히려 원전을 수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선전을 하고, 수출을 하고 있으며, 또 바로 이웃나라인 일본에서 원자력발전소 폭발이 일어났음에도 우리나라는 다르다고, 우리는 안전하다고 가끔 가동이 멈추는 노후 원전을 여전히 가동하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새로운 원전을 건설하려고 하고 있으며... 여전히 원전에 대한 것은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고.

 

후쿠시마 이후의 삶. 이것은 분명 후쿠시마 이전의 삶과는 달라야 한다. 사람들의 의식도 달라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역사인식이 있어야 하고, 철학적 성찰을 할 수 있어야 하며, 인문학적 사고로 무장이 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원전이 기본적으로 비민주적인 기구라면 사회가 우선적으로 민주화되어야 하고, 원전에 관한 자료들이 모두 공개되어 일반인들도 원전에 대해 알 수 있고, 또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민주주의가 되려면 인문학적 성찰은 기본이리라.

 

그런데도 아직 부족하다. 원전철폐가 사회적 문제가 되지 않고 있다. 그냥 남 일이거니 한다. 이상하게 후쿠시마에서, 또 체르노빌에서, 또 스리마일에서, 비키니에서 여러 번 원자력으로 인한 사고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일로 여기지 않는다. 그냥 남일일 뿐이다.

 

남일이기에 관심이 없다. 그냥 신문이나 언론에 난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그러면 안되는데...

 

이런 원자력이 제주에서는 대양 해군이라는 명목으로 강정마을을 황폐화하고 있으며, 일본의 오키나와는 일본 내부에서도 일본의 외부로 존재하고 있게 되는데...

 

그래서 후쿠시마에서 시작한 대담이 합천으로(합천에는 일제 때 피폭된 우리 동포들이 제일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피폭 2세까지도. 피폭 2세에 관해서는 무관심이 더 심해진 상태니 말해 무엇하겠는가마는), 그리고 강정으로, 오키나와로 이어지고 있다.

 

원자력이라는 것이 결국 사회의 민주화와 연결이 될 수밖에 없고, 이것이 인간이 인간답게 사느냐 마느냐의 문제와도 연결이 된다는 얘기다.

 

하여, 원자력은 단순한 에너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삶의 총체적인 문제인 것이다. 이것을 인식하자고 세 명의 대담자는 그리도 오랫동안 모여 이야기를 한 것이리라.

 

먼 곳의 남 얘기가 아니다. 후쿠시마가 이렇게 우리하고 연결이 되고 있으니, 우리는 진정으로 후쿠시마 이후의 삶에 대해서 성찰해야 한다.

 

그러한 성찰을 바탕으로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야 한다. 혼자가 아닌 함께.

 

하여 이 책은 루쉰의 말로 시작하여 루쉰의 말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희망은 원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사람이 걸어가면 길이 생겨난다.'(8쪽, 259쪽)

 

그리고 벤야민의 말이라고 인용되어 있는 말.

 

'희망은 희망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다.'(261쪽)

 

우리에겐 희망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희망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걸 다른 말로 바꾸는 우리는 변할 수 있는 시대에, 변할 수 있는 사람들과 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 우린 변할 수 있다. 변해야 한다.

 

덧글

 

208쪽. 소소한 오타이지만, 사람 이름에는 오타는 치명적이다. 4-5번째 줄에서 '관군에 패해서 형장에 끌려간 정봉준이 목이 잘리기 직전에야~ ' 라는 구절에서 정봉준은 전봉준이다. 별것 아닌 것이 가끔 별것이 되는 경우가 있다. 조심해야 한다. 특히 사람 이름은...

 

용어 문제

원자력을 핵이라고 말하면?

일본은 원자력 마을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원자력 마피아라고 한다. 차라리 핵마피아라고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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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책 - 행복할 경우 읽지 말 것!
아르튀르 드레퓌스 지음, 이효숙 옮김 / 시공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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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였던가, 치르치르 미치르가 파랑새를 찾아 떠나는 이야기가. 결국 파랑새는 자신들의 곁에 있다는 그 도덕적인, 당연한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던 이야기.

 

이 동화를 간단하게 줄이면 행복은 마음 속에 있다가 되고, 이를 종교적으로 표현하면 원효대사의 한 마디, 일체유심조(一切有心造)가 되고, 의학자인 프랭클의 말로 하면 행복은 의미를 찾는데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깨달음을 얻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인생의 의미, 또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면 어느 정도 인생을 산 나이 든 사람이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젊은 사람이 이야기를 하면 "네가 뭘 알아? 네가 인생을 살아봤어?"하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쓴 사람, 그것도 용감하게 제목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책"이라고 붙인 사람, 또 작은 제목으로 '행복할 경우 읽지 말 것!'이라고 한 사람은 젊은 사람이다. 책에 있는 작가소개에 정확히 나와 있지 않은데, 20대 중반이라고 한다. 책 내용에서 유추하면 기껏해야 25세이다. 25세란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직장도 갖지 못했을 확률이 높은, 그래서 인생경험이나 사회경험이 거의 없다고 여겨지는, 이런 나이대의 사람이 이런 제목의 책을 쓰면 '웃기는 소리'나 '세상물정 모르는 소리'라는 소리를 듣기 쉬울텐데...

 

인생에 대해서, 행복에 대해서 아는 것이 나이와 비례하지는 않는데, 또 역사를 살펴보면 큰사상을 이룩한 사람들은 이미 젊은시절에 그것을 이루었는데, 예수도, 부처도 그리 나이가 많다고는 할 수 없는 나이였으니, 나이를 따지지는 말자.

 

그냥 책을 읽으면 된다. 어쩌면 작은 제목은 당연한 말이 된다.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책"을 이미 행복한 사람이 일을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제목에 눈길이 가고, 손에 드는 사람은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일테고, 이들은 지금 자신의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책의 도움을 얻으려 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 책을 읽으며 행복에 대한 답을 얻으려 할 것이다. 그리고 읽은 다음 "뭐야, 이거. 도대체 뭔 소릴 한 거야?"할 테다.

 

무슨 철학적인 내용이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구체적인 방법론도 없고, 그냥 자신의 일상을 책에 담고 있다.

 

기대했던 "행복론" 또는 이상하게 당위적인 말로 너무도 지당한 말로 행복은 이런 거야 하는 말도 없다.

 

20대 젊은이의 일상이 책에 담겨 있을 뿐이다. 다만 그 일상을 따라가다 보면 불행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게 된다.

 

요즈음의 생활양태에 맞게 이 책의 전개는 무지 빠르다. 그리고 편제도 보통의 책처럼 글자가 많이 배열되어 있지도 않다. 그림과 글이 적절히 어울리고 있으며, 글은 짧은 편에 속한다.

 

속도감이 느껴진다.

 

20대에 권태를 느끼고 은퇴를 생각하는 친구에게 자살을 이야기한다. 은퇴와 자살이 무엇이 다르냐고 하면서. 어짜피 끝 아니냐고.

 

하지만, 이는 직선적인 사고다. 출발에서 이미 끝을 보고 달리는 경우에만 해당한다. 그러나 출발에서 끝을 볼 수는 없다. 인생은 직선이 아니기 때문이고, 인생은 단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출발하여 끝으로 가는 과정은 숱한 일들로 채워져 있다. 이 일들은 정해져 있지 않다. 많은 경우 우리가 우연이라고 하는 일들로 점철되어 있다. 그런 우연들에 대해 우리는 그냥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해석을 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행복에서 멀어진다. 즉, 행복은 인생의 과정이다. 이쪽도 저쪽도 모두 존재하는. 그러한 과정들이 모여 우리는 삶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삶이라는 직업에서 행복을 느끼려면 시간의 뒤를 볼 필요는 없다. 시간의 뒤를 보면 해석이 개입하게 되고, 이는 자책과 후회로 연결되게 된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앞을 보면 된다. 그리고 그 순간에 충실하면 된다.

 

어짜피 출발점은 이미 지났고, 끝은 아직 오지 않았다. 나는 지금 무수한 일상들 속에 있다. 그리고 이 일상속에서 삶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은 바로 행복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책을 읽는 일은 바로 그 순간은 다른 것을 잊고 책에 집중하기에 행복해진다. 행복하게 된다. 또한 이 책을 놓는 순간은 그 순간으로 다 읽었다는 만족감에 행복해 진다. 결국 이 책을 읽었다는 행위 자체가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이 책을 읽지 않을 정도로 자신이 행복하기에 역시 행복하다. 참 재미있는 제목이다. 읽거나 읽지 않거나 우리는 모두 행복하다.

 

불행하다고 생각한다면 한 번 읽어 보자. 무엇이 행복인지...

 

행복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책도 있구나 하자. 그런 생각을 하는 자체도 행복이니까... 

 

결국 우리의 일상이 바로 행복이다. 바로 파랑새다. 그 파랑새가 우리 주변에 너무도 많이 있다. 그걸 알아차리라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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