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일기가 아니다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택광 외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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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것은 일기가 아니다" 일기를 출간해 놓고 일기가 아니라고 제목을 붙였다. 일기가 내면의 모습을 잔잔하게 그려낸 글이라면, 일기임에도 일기가 아니라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테다.

 

아마도 일기는 자신만이 보도록 쓰여진 글이라면 바우만의 이 일기는 자기만이 보는 글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는 글이라는 뜻이리라.

 

처음 시작에 왜 일기를 쓰는지 그 이유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아마도 글쓰기는 그에게는 삶 자체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삶 자체. 따라서 일기는 그가 세상을 살아간 모습을 기록한 것이고, 이것은 개인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근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기록이기도 하기에 우리는 그의 일기를 읽으며 사회를 읽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참 많은 문제들이 이 책에 나와 있지만, 이 책에서 그가 다룬 내용들이 다른 책으로 쓰여져 번역되어 나온 것들이 많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바우만의 다른 책 내용들과 함께 읽게 된다. 말 그대로 그의 저작들을 함께 엮으며 읽을 수 있고, 그가 어떤 생각으로 그런 책들을 썼는지를 더 잘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바우만의 이 일기가 아니라고 하는 일기를 읽고 난 뒤에 이런 글을 쓰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것은 모든 독후 활동이 읽은 책에 의탁해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해 내는 일이라면 바우만의 책을 읽고서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바우만에 의탁해서 내 얘기를 하는 것에 불과하리라.

 

하여 바우만 읽기는 곧 바우만을 통해서 나를 읽은 행위이며, 나를 읽는 행위는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를 읽는 행위이기도 하다.

 

사회 속의 나... 이 책의 맨 마지막에 바우만 자신의 개인적 이야기가 나온다. "탈구"라는 개념으로...

 

탈구... 쉽게 말하면 장소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말이 되겠다. 그것이 공간이든, 사회적 위치든... 바우만은 폴란드계 유대인으로서 그의 조국에서 떨어져 나와 영국에서 살아가게 되었으며, 주류 사회학에서는 좀 떨어진 학자로서의 삶을 살았으니, 그의 인생은 '탈구'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러한 탈구된 삶이 바로 근대사회를 바우만 식으로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고...

 

액체 근대, 유동하는 근대라는 개념에서 그는 소비자사회로 넘어간 우리 시대를 읽어내고 있으며, 이러한 소비자시대의 대표격으로 '페이스북'을 언급하고 있으며, 여러 책에도 나온 것이지만, 프랑스 학자가 근대의 기점을 찾는 연구를 했는데... 근대의 기점을 개인적인 사생활을 공적인 자리로 끌고 나온 텔레비전의 한 방송으로 잡는다는... 그래서 우리는 사적인 것의 공적인 행위로 만들기, 또는 공적인 삶을 사적인 것으로 만드는 시대에 살고 있게 되었다는... 그런 얘기들이 이 책의 곳곳에 나와 있다.

 

이것을 우리 사회에 적용해야 한다. 우리 사회도 역시 페이스북, 요즘은 '카카오톡'이든지, 아니면 '카카오스토리'라는 것이 더 유행하고 있기도 하지만 이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더욱더 외로움에 빠져들고 있지는 않은지.

 

또 외국인 노동자들이라든지, 사회에서 배제된 집단들을 배제시킴으로써 우리들의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방송을 통해서, 또는 다른 활동을 통해서 우리들 역시 유동하는 근대에서 '쓰레기가 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우리도 바우만처럼 '일기가 아닌 일기'를 쓸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써야만 하지 않을까. 그런 일기를 쓴다면 자신이 처한 위치나,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 적어도 고민은 할테니까. 이런 고민들이 쌓이면 자연스레 실천으로도 나아갈 수 있을테니까.

 

그러니까 우리도 바우만처럼 '일기가 아닌 일기'를 쓰자. 사색하는 시간, 고독할 시간을 잃어버렸다고 하지만 이런 일기를 쓰는 시간을 갖는다면 우리는 고독한 시간, 사색하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사회에서 연결망이 아닌 공동체를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른다.

 

가장 내밀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기록하는 일기가 자신을 공동체로 이끌 수도 있다는 사실. 이 책은 그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일기이면서도 일기가 아니다.

 

덧글

 

오타임에 분명한 부분

89쪽에 '보이치에 사디가 2011년에 ~'라고 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 일기는 2010년 10얼 7일자 일기이기 때문에 오타임이 분명하다. 몇 년인지 찾지는 않았지만.

 

또 하나 사람 이름. 그래도 많이 알려진 이름으로 해야 하지 않나. 303쪽에 한스 조나스라고 나오는데, 이 사람은 한스 요나스라고 주로 읽는다.  한스 요나스로 통일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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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자 한다. 사실 아직도 리얼리즘시가 좋으니... 무의미시라든지, 날이미지시보다는 그래도 무언가 의미를 전달해주는 시가 좋다.  나를 바라보고, 나를 다시 세울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시가 아직도 내게는 좋은시로 다가온다.

 

그래서 좋아하는 많은 시인들은 명징한 시를 쓴 시인들이다. 윤동주. 얼마나 명징한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리고 얼마나 삶을 경건하게 만드는가. 이육사, 얼마나 치열한가. 사회에 자신을 내던져 그 가열참으로 버텨내는 모습을 시 속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으니...

 

이런 시인들말고도 예전에는 박노해, 김남주의 시를 좋아했다. 치열한 삶에 대한 노래들. 리얼리즘이었다. 아직도 내게는 리얼리즘시들이 맘에 와닿는다.

 

어쩌면 맘을 울리는 시들도 좋아하지만 이성이 작동하는 시를 더 좋아할지도, 그것은 복잡한 것보다는 설명이 가능한 단순한 것을 좋아하는 태도를 벗어버리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시는 사실 단순할 수도 있지만 세상일을 하나로만 볼 수 없음을 깨우쳐주고 있기도 한데, 구태여 단순한 시만을 왜 좋아하는지... 세상이 분석되고 설명되면 변화시킬 수 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그럼에도 세상은 복잡하고, 다양하고, 그래서 세상은 살 만한 것이라고 느낄 나이가 되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더 다양하고 더 복잡하고 더 여유로와야 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습이니...

 

제목을 보고 샀으리라. "결혼식과 장례식"

 

인생에서 중요한 두 번의 행사. 하나는 자신이 기억하고 그 행사를 모두 지켜볼 수 있지만, 하나는 자신이 전혀 기억할 수 없고, 지켜볼 수도 없는, 주체가 되는 행사와 객체가 되는 행사. 그럼에도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번의 행사.

 

새로운 삶의 시작과 또다른 새로운 삶을 위한 죽음. 그것을 생각하고 무언가를 얻을 수 있지 않나 하고 샀으리라. 그러나 시집에는 그러한 내용을 찾기보다는 시인이 바라본 세상, 사물에 대해서만 알 수 있을 뿐.

 

결혼식과 장례식도 같은 제목을 한 극을 보고 나서 느낌을 시로 쓴 것이니... 이렇듯 세상은 복잡하고, 시도 복잡하고...

 

예상과는 달랐지만, 시는 읽을 만했다. 그렇게 느꼈으리라. 처음에 샀을 때도. 리얼리즘시를 좋아해 기를 쓰고 사회현실을 담은 시를 찾으려고 노력했겠지만, 몇몇을 제외하고는 찾을 수 없었던 시집.

 

김종삼이라는 시인, 황지우라는 시인(그는 이 시집에 제목으로 두 번 나온다), 이성복이라는 시인이 나와 반갑기도 하지만...

 

"나의 시는 여행 가방 안의 온갖 잡동사니이고 다음 기착지의 필수품들이다. 그것을 가방에서 꺼내고, 다시 담고 하는 사이 늙고 턱수염이 껄끄러워지겠지만."(김영태 시집, 결혼식과 장례식. 문학과지성사. 1988 2쇄. 뒷표지에서)

 

그래, 공연히 리얼리즘을 찾지 말자고. 그가 말하듯이 온갖 잡동사니들이 모인 이 시집은 시인이 보고 느낀 것을 언어로 조합해낸 결과물 아니던가.

 

시인은 이 시들디 다음 기착지의 필수품들이라고 했는데.. 나에게는 다음 시들을 위한 경유지 아니겠는가.

 

시의 다양성이 바로 현실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한다. 시를 통해서 현실을 인식하고, 현실을 변혁하려는 욕망을 지니고 실천을 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현실을 바라보는 다양성을, 복잡성을, 개인성을 느끼는 것도 바로 현실 아니겠는가.

 

현실이라는 복잡계를 애써 단순화하려고 하지 마라. 있는 그대로 봐라. 그리고 있는 그대로 느껴라. 그것도 가끔은 필요하다. 이 시집은 이 점을 내게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읽으면서 의미를 파악하기보다는 시, 그 자체를 즐길 수도 있지 않은가.

 

두 시를 인용한다. 그냥 읽고 즐기면 된다. 이 시집에 있는 시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한 편의 그림이기도 하고, 한 편의 음악이기도 하다. 이거면 됐다.

 

가구음악

 

꾸며지기 전

저렇게 헐렁하다

꾸며진 뒤에

분홍 쉼표

그저 거기에 놓여 있는 음악

 

김영태 시집, 결혼식과 장례식. 문학과지성사. 1988 2쇄. 56쪽

 

능금

 

제 몸에 묻어둔 팔

다리인 제 몸에서 나는 향기

비집고 나오는 가슴이

저절로 솟는 제 몸의 부끄러움

 

김영태 시집, 결혼식과 장례식. 문학과지성사. 1988 2쇄. 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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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명의 시집을 읽으며, 치매 환자를 죽게 하고 자신도 자살한 사람의 이야기를 신문에서 본 기억이 떠올랐다. 

 

신문이란 새소식을 전해주는 고마운 매체이기도 하지만, 이렇듯 슬프고도 안타까운 사연을 보여주기도 한다.

 

좋은 소식만 가득한 신문이었으면 좋겠는데... 정초부터 사실, 신문에서는 좋은 소식을 기대하기 힘들다.

 

오로지 사건 사고, 정치 싸움, 제가 서로 잘났다고 하는 그런 싸움들. 한국사 교과서를 놓고 벌이는 논쟁(논쟁거리도 되지 않는데... 이게 왜 논쟁이 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철도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구속 및 불이익. 아직도 끝나지 않은 밀양 송전탑. 제주도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반대... 그리고 회사를 이전했다는, 노조원들만 빼고... 기륭전자...또 기타 만드는 노동들의 끝나지 않은 투쟁 등등.

 

여기에 또하나 불거지고 있는 문제는 의료 민영화. 민영화라는 말을 쓰지 않고, 영리 보장 병원 정도라고 해야 하나... 결국 병원이 이익을 내도록 무언가를 허용해준다는 얘기인데... 이를 사람들은 의료 민영화라고 부른다. 나는 오히려 민영화라는 고상한 냄새를 풍기는 말보다는, 사영화(私營化)라는 명확한 의미가 떠오르는 말을 써야 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병원을 통해 이익을 남기려는 사람들... 정말로 의사가 무엇인지, 간호사가 무엇인지 고민을 해봤으면 좋겠다. 텔레비전에서도 몇 번 방영한 "허준"의 일대기처럼, 도대체 의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병원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더 나아가서는 사람들의 건강을 지키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텐데...

 

병원을 전부 공영화하자고 해도 시원찮을 판에, 의사들을 공무원으로 만들자고 해도 시원찮을 판에, 병원이 이익을 남길 수 있게 해준다고... 사실 병원이 이익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병원을 의사가 아닌 다른 사람이 경영을 해서 회사처럼 이익을 남길 수 있게 한다는 말로 들리기는 하지만...이런 말들이 나오는 자본주의 사회... 돈이 지배하는 사회...

 

정말 의사들이 그립다. 돈이 아닌 사람을 생각하는.

 

의사가 공무원이 되면 정말로 돈이 아닌 사람의 건강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사가 되지 않을까? 의료는 공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지닌 사람...

 

일본인 의학자. 닥터 노구치. 만화로, 정말 감동깊게 보았던 책이다. 9권이라는 길이가 전혀 길게 느껴지지 않았던. 그가 생체실험을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는 사실도 있지만, 그 시대의 한계라고 생각하고, 그가 의사로서 어떤 자세를 지녔는지를 중심으로 놓고 보면 여전히 감동적인 만화다.

 

이런 의사, 우리나라에도 있다. 바로 성산 장기려 박사.

 

돈을 마다하고 무료 진료를 했던 사람. 돈이 없는 사람도 진료를 받을 수 있게 의료조합을 운영했던 사람. 권정생 선생의 "몽실언니"에 나오는 무료로 치료해주는 의사의 모델이 된 사람. 자신이 받은 상금을 모두 의료기기를 사는데 썼던 사람.

 

조금이라도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손해를 보지 않도록 그들에게 최선을 다했던 사람. 자신의 부와 명예가 아니라 사람들의 건강을 걱정했던 사람. 성산 장기려. 그가 바로 우리나라 의사의 표본이 아닐까.

 

신문에서 읽은 기사가 참 멀리도 나아갔다. 이진명이 시집을 읽으며 의료 문제가 떠올랐기 때문인데...

 

그의 이번 시집에는 어려운 사람들 이야기가 꽤 나온다. 물론 자신의 이야기도 나오지만. 그런 어려운 사람들 이야기 중에서도 마음에 너무도 아프게 다가왔던 시. 이것은 지금 우리가 아직도 겪고 있는 문제다. 그리고 의료의 문제이기도 하다.

 

마을에 의사가 배치되어 있어, 순회 진료를 하고,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는 곳에, 가까운 곳에, 돈을 걱정하지 않고 찾을 수 있는, 스스로 마을 사람들의 건강을 모두 알고 있는 그런 의사가 마을 곳곳에 있다면, 의료의 공공화가 현실이 된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텐데... 일어나지 않을텐데... 하는 시.

 

눈물 머금은 신이 우리를 바라보신다

 

김노인은 64세, 중풍으로 누워 수년째 산소호흡기로 연명한다

아내 박씨 62세, 방 하나 얻어 수년째 남편 병수발한다

문밖에 배달 우유가 쌓인 걸 이상히 여긴 이웃이 방문을 열어본다

아내 박씨는 밥숟가락을 입에 문 채 죽어 있고,

김노인은 눈물을 머금은 채 아내 쪽을 바라보고 있다

구급차가 와서 두 노인을 실어간다

음식물에 기도가 막혀 질식사하는 광경을 목격하면서도

거동 못해 아내를 구하지 못한,

김노인은 병원으로 실려가는 도중 숨을 거둔다

 

아침신문이 턱하니 식탁에 뱉어버리고 싶은

지독한 죽음의 참상을 차렸다

나는 꼼짝없이 앉아 꾸역꾸역 그걸 씹어야 했다

씹다가 군소리도 싫어

썩어문드러질 숟가락 던지고 대단스러울 내일의

천국 내일의 어느날인가로 알아서 끌려갔다

알아서 끌려가

병자의 무거운 몸을 이리저리 들어 추슬러놓고

늦은 밥술을 떴다 밥술을 뜨다 기도가 막히고

밥숟가락이 입에 물린 채 죽어가는데

그런 나를 눈물 머금고 바라만 보는 그 누가

거동 못하는 그 누가

 

아, 눈물 머금은 신(神)이 나를, 우리를 바라보신다

 

이진명, 세워진 사람, 창비. 2008년 초판 2쇄. 32쪽-33쪽.

 

마음 한 켠이 짠하다. 이런 일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적어도 우리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의료나 복지 제도를 운영해야 하지 않겠는가.

 

고령화 사회로 간다고, 점점 노인들이 많아진다고 따라서 의료의 문제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데... '영리'가 아니라 '건강'에 중심을 두는 그런 의료정책이 이루어져야 할텐데...

 

돈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의사가 되기로, 간호사가 되기로 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할텐데... 누구 말대로 '농부에게 월급'을 주듯이, 의사들도 공무원이 되게 하여, 생계와 생활을 보장해 주어, 정말로 돈을 보지 않고, 사람들의 건강을 위해서 일할 사람이 의사가 되게 하여 진정한 마을의사들이 사람들의 건강을 돌보게 했으면 좋겠다.

 

이진명의 이 시집에 실려 있는 연작시 "바위"처럼 언제든지 찾아가서 쉬고, 위로받을 수 있는 존재. 그런 존재들이 의사로 함께 존재했으면 좋겠다.

 

이진명의 시집을 읽으며, 이 시집의 중간에 있는 슬픈 현실을 담은 시들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든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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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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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만은 유동하는 근대에서 44개의 편지를 띄웠다. 그리고 그 편지는 내게 닿았다.

 

44편 모두가 마음으로 파고들면서,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 '고독'을 찾게 하였고, 그래서 바우만이 '수용하는 그 행위는 반항을 만들어낸다. 만약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적어도 그때 가장 그럴듯한 결과는 바로 반항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388쪽)'라고 했듯이, '고독'을 깨닫는 순간 '고독'하게 만든 사회에 대하여 반항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바우만의 44편의 편지에 이어서 한 편의 편지를 띄운다. 

 

우리 역시 유동하는 근대에 살고 있으며, 고독을 잃어버리고 있고, 그래서 반항마저도 빼앗겨버린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나오는 '공위시대'라는 말이 지금에 해당하는지도 모르겠다. 낡은 것은 사라져 가는데, 새로운 것은 오지 않은 시기로 말해질 수 있는 그런 '공위시대'

 

격변하는 현대사회에서 낡은 가치들은 무시되고 있으나, 새로운 가치는 등장하지 않고 있는 상황.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일. 그것이 바로 '반항하는 인간'이 되는 일.

 

어쩌면 바우만의 이런 책은 젊은이들이 읽어야 할지 모른다. 이 책은 과거를 이야기하지 않고, 현재를 분석하고 현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현재를 이야기하는 목적이 바로 미래를 만들어가는데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이념이나 가치에 사로잡혀 있는 소위 기성세대들보다는 미래를 살아갈 사람들은 젊은이들이 읽으면서 자신들의 행동을 만들어가는데 도움을 받으면 좋을 책이다.

 

그래서 45번째 편지는 이렇게 시작할 수 있다.

 

기존의 가치에 안주하지 마라. 눈은 앞을 보게 되어 있다. 앞을 보고 걸음을 걸어라.

 

대학의 죽음이 논의된 지 오래. 대학에서 학문 추구는 사라진 지 오래라는 말이 들린다. 대학은 오로지 취업의 한 관문으로서만 존재한다고... 취업과 관련이 없는 전공은 홀대당하고 있다고... 그리고 학생들도 전공과 관계없이 너도나도 영어 공부나 취직공부에만 전념하고 있다고.

 

이것은 바로 현재의 공포다. 취업 불안이 취업에 대한 공포로 나타나고 있다. 비정규직이 양산이 되고, 그나마 이러한 비정규직 일자리도 찾기 힘든 상황이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현재다. 그래서 이런 공포를 벗어나기 위해 지극히 개인적인 선택을 한다.

 

소위 스펙을 쌓으려고 한다. 이것이 취업에 도움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너나없이 취업 준비 학원을 다닌다든지, 영어가 필수라고 영어 공부에 매달린다든지, 조금이라도 취업에 유리한 전공을 선택하려고 한다.

 

자신의 삶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는다. 그렇게 고민할 시간도 없다. 오로지 달릴 뿐이다. 그런데 이 달림이 이상하다.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자꾸 제자리 걸음을 하던지, 아니면 거꾸로 달린다는 생각이 든다.

 

취업 공포. 이것은 기존의 가치다. 그리고 현재에 매몰되어 있는 모습에 불과하다. 취업을 하려고 하는 이유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다. 거창하게 자아실현이니 뭐니 하지만, 본질은 내가 살기 위해서 취업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치열하게 자리를 정해져 있으니,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즉 의자를 차지하기 위하여 치명적인 '의자놀이'를 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문제를 개인적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그렇게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게 문제다.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경제학자 우석훈이 "88만원 세대"란 책에서 했던 말대로 '토플을 집어치우고 바리케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개인적인 해결책에서는 벗어나야 한다.

 

그러므로 눈을 앞으로 돌리자,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자. 그러면 이런 '의자놀이'가 우스워진다.

 

성경에서도 생계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또한 우리 말에서도 자기 먹을 것은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이 있다. 이만큼 생계는 사회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사회가 해결해야 할 일은 개인적으로 해결하려 한다. 이것이 바로 유동하는 근대, 액체 근대의 문제이다.

 

젊은이들도 이런 액체 근대 속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다른 가치를 보여주는 주장들이 있다.

 

전국민에게 "기본소득"을!

 

생계를 보장해주는 제도를 만들자는 운동이 있다. 그러면 생계 걱정 때문에 창조적인 일에 도전하지 않았던 젊은이들이 생계 걱정에서 벗어나 새로운 일을 도전할 수 있을 것이다.

 

공위 시대. 새로운 가치를 주창하고 있다. 그런데 외면한다. 아직 이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꼭 '기본소득'이 아니더라도. 이들은 함께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잃었다. 바로 '고독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주범은 스마트폰, 참 스마트하게 쓰여야 하는데, 오히려 사람들에게서 고독을 뺏어가 버리고 말았다. 다른 말로 하면 생각할 시간을, 함께 하는 시간을 뺏어가버렸다는 말이다. 그래서 함께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음에도 파편화된 경험밖에는 공유하지 못한다.

 

스마트폰을 스마트하게 사용해야 한다. 수용해야 한다. 이제 스마트폰을 제거하기란 불가능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시대를 수용한 다음, 그 다음을 생각해야 한다.

 

"집으로 가는 길"이란 영화에 보면 우리나라에는 네티즌이 있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지난 대선에서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댓글, 이런 스마트폰과 관련된 일 아니던가.

 

스마트폰은 사람들을 철저하게 개별화, 파편화시켰지만, 반대로 사람들을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로 불러내는 역할도 한다.

 

즉, 스마트폰을 수용하고, 그 한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때 우리는 '반항하는 인간'이 될 수 있다.

 

이를 이용해서 '기본소득' 문제를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 공간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면 개인적으로 해결하려 했던 문제가 사회적으로 해결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 때 우리는 다른 세계로 한 발 도약할 수 있다. 이게 4번째 편지이다. 바우만의 논리를 내적으로 더 밀고나간 그런 편지.

 

이 책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 지금은 이런 방법을 택할 수도 있지 않나 하는.

 

더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책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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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 전체의 이미지는 시각이다. 제목인 "춤"부터 보아도 이미 시각적 이미지가 강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에서도 빛과 색깔이 등장한다. 색깔이 빛의 형상이라면 그는 빛에 집중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 시집을 여는 시의 제목도 '빛의 소묘'이다. 그만큼 시인은 빛에 관심이 많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빛 가운데서도 그는 이상하게 스러져 가는 빛이거나 갓 나타난 빛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런 시들이 많다. 전체적으로 외워야지 하는 시가 나타나지 않는 이유도 이런 데서 오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빛에는 온기가 없다. 온기라는 말이 이상하면 '열'이 없다. 즉, 그의 시집에 나오는 빛들은 빛으로 끝난다. 빛이 '볕'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빛'이 '볕'으로 나아가지 않는 상태. 그것은 그냥 보기에만 좋을 뿐이다. 우리의 삶에서 오히려 보기에 좋아서 고통일 수밖에 없는 순간일 수도 있다.

 

사람들의 삶에는 '빛'이 '볕'으로 전환되어야 살만하다고 느낄테니 말이다.

 

그래서 이 시집을 읽으며 보기에만 좋음이 얼마나 우리를 더 힘들게 할 수도 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깔끔한 모습, 단정한 모습, 단아한 목소리. 언제 보아도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이 보기에 참 좋지만, 그 모습에 사람다움이 없다면, 따스함이 없다면 거리만 느낄 뿐이다.

 

함께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할 수 없는 사람. 지향을 하지만, 결코 함께는 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그것이 바로 '볕'이 되지 못한 '빛'의 한계다.

 

훌륭한 지도자는 그래서 '빛'이 되기보다는 '볕'이 되어야 한다. 사람에게 다가와 눈부시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몸을 따스하게 덥혀줄 줄 알아야 한다. 덥혀주어야 한다.

 

밝음에 따스함이 없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삶을 더 힘들게 할 뿐이다. 그런 지도자는 멀리서 바라볼 때만 좋다. 가까이에 있으면 주변에 있는 사람을 힘들게만 한다.

 

왜 이 시집을 읽으면서 '볕'이 되지 못한 '빛'의 이야기를 생각했는지는 모른다. 이상하게도 이 시집을 읽으면서 밝기는 있되, 온기는 없는 그런 '빛'만을 생각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볕'이 그리웠을 뿐이다.

 

정치는 '빛'이 아니라 '볕'임을 생각하게 되었을 뿐이다. 나는 화려하고 밝은 '빛'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을 따스하게 만들어줄 '볕'을 그리워하고 있을 뿐임을 이 시집을 통해서 느꼈을 뿐이다. 왜 그런지는 모른 채...

 

어쩌면 지금의 정치가 '빛'에만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말은 화려하다. 참으로 화려하다. 정치인들의 말을 들으면 세상이 이만큼 좋을 수가 없다.

 

화려한 말들. 국민을 걱정하는 말들. 그리고 너무도 깔끔하게 보이는 외모들. 그 수사들 속에는 이상하게도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들은 '빛'으로만 보인다. 나는 그들에게 '볕'을 바라는데 말이다.

 

사실, 이 시집에는 따스한 시선을 담은 시들도 많다. 그럼에도 이렇게 느낀 것은 내가 읽고 싶은 대로 읽고 느끼고 싶은 대로 느낀 시집을 제멋대로 해석한 '오독'의 대표적인 예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모든 글은 오독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이 시집을 통해 '볕'을 그리워하는 나를 발견한 것에 위안을 삼는다.

 

마음에 드는 시는 '얼음 계곡'(83-85쪽)이라는 시인데, 프로스트의 '두 갈래 길'을 연상시키는 시다. 하지만 이 시보다도 더 마음에 남아 있는 시... '지평(地平)'

 

地平

 

석유를 먹고 온몸에 수포가 잡혔다. / 옴팍집에 살 때였다.

아버지 등에 업혀 캄캄한 / 빈 들판을 달리고 있었다.

읍내의 병원은 멀어, / 겨울바람이 수수깡 속처럼 울었다.

들판의 어디쯤에서였을까, / 아버지는 나를 둥근 돌 위에 얹어놓고

목의 땀을 씻어내리고 있었다.

 

서른이 넘어서까지 그 풍경을 / 실제라고 믿고 살았다.

삶이 어렵다고 느낄 때마다 / 들판에 솟아 있는 흰 돌을

빈 터처럼 간직하며 견뎠다. / 마흔을 앞에 두고 나는 이제 그것이,

내 환각이 만들어낸 도피처라는 것을 안다.

 

달빛에 바쳐진 아이라고, / 끝없는 들판에서 나는

아버지를 이야기 속에 가둬 / 내 설화를 창조하였다.

호롱불에 위험하게 흔들리던 / 옴팍집 흙벽에는 석유처럼 가계(家系)가

속절없이 타올랐다. / 지평을 향한 생(生)이 만든

겨울밤의 환각.

 

박형준, 춤. 창비. 2005년 초판. 26-27쪽

 

지평, 늘 가까이에 있는 것 같지만, 다가가고 다가가도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늘 보인다. 이것이 바로 삶이다. 볕이 없는 삶. 그런 삶은 환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삶을 지탱하기 위해서.

 

내 삶의 지평은 어디인가. 나는 그 지평의 어디쯤에선가 하나의 바위를 만들어놓고, 가끔은 쉬고 있지 않은가. 그 바위는 내 스스로도 만들지만, 누군가가 만들어줄 수도 있지 않은가. 그것이 바로 내 삶을 '빛'에서 '볕'으로 비춰주고 있는 사람 아니겠는가.

 

내 삶이 유지되는 일이 내 곁에 있는 그런 '볕'같은 사람 덕분이듯이,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그런 '볕'같은 정치가는 어디에 있을지... 우리는 저 지평의 끝에 그런 정치가를 우리가 쉴 수 있는 바위처럼 창조해야 하지 않을까...

 

이 시집을 읽으며 한 공상...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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