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집은 해설자의 말에도 나와 있듯이 주로 수평을 다루고 있다. 그는 수평에 대해서 참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러한 수평 중에서도 내 마음에 와 닿은 것은 바로 늙음이다.

 

늙음이야 말로 우리네 삶에서 가장 수평이 되는 순간이 아니던가. 인간은 수평에서 시작하여 수직을 꿈꾸다가 다시 수평으로 돌아오는 그러한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우리네 삶에서 두 순간(요즘은 그렇지도 않은가보다마는), 즉 수평이 되는 어린 시절과 늙음의 순간은 모두가 평등하게 겪지 않는가. 그렇게 늙음은 우리를 평등으로 이끌게 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왔는가는 결국 어떻게 늙었느냐로 귀결되지 않겠는가.  무슨 변증법도 아니지만, 처음의 수평과 나중의 수평은 다른 무게를 지니고 있을테고...

 

나중의 수평, 그 늙음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전달해 줄텐데...

 

그런데 요즘은 잘 늙는다는 것도 힘들겠다는 생각을 한다. 늙음이란 삶의 신산함을 거쳐 이제는 달관의 경지에 이르러 젊음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오히려 늙음을 무슨 특권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또 늙음을 그냥 내놓아버림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잘 늙음은 바로 '선배'가 된다는 말이고, '원로'가 된다는 말인데... 그런 선배, 원로가 그리운 요즘이다. 이런 시대를 견뎌나갈 지혜를 주는 그런 늙음 말이다. 

 

세상의 신산함을 온몸으로 겪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이 '가재미'란 시란 생각이 든다. 낮은 곳으로 낮은 곳에서 무게에 눌려 더 납작해진 몸으로, 아래위가 아니라 좌우로 자신의 삶을, 수평으로 자신의 삶을, 다른 말로 하면 무거운 짐에 눌려 낮은 곳에서만 살 수밖에 없었던 그런 삶.

 

그러나 그러한 삶 속에서도 세상 모든 삶이 녹아 있었으며, 우리는 그런 낮은 삶에 함께 할 때 그 삶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음을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두 시를 인용한다. 늙음에 대하여, 그러나 그 늙음의 다름에 대하여. 낮은 곳에서 수평으로 살다가 늙음에 다다랐지만, 그러나 그 늙음은 그냥 연민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삶이 우리를 위로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그 삶 속에는 세상이 들어 있다.

 

그 세상이 들어 있는 늙음은 우리에게 '선배'가 되고 '원로'가 된다. 그래서 이 두 시는 마음에 와 닿는다. 콕 박힌다. 나는 어떻게 늙을까? 내 늙음으로 남을 위로해주는 그런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가재미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아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내잡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속에 나란히 눕느다

산소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문태준, 가재미, 문학과지성사. 2006년 2쇄. 40-41쪽

 

 

 

 

노모(老母)

 

반쯤 감긴 눈가로 콧잔등으로 골짜기가 몰려드는 이 있지만

나를 이 세상으로 처음 데려온 근느 입가 사방에 골짜기가 몰려들었다

오물오물 밥을 씹을 때 그 입가는 골짜기는 참 아름답다

그는 골짜기에 사는 산새 소리와 꽃과 나물을 다 받아먹는다

맑은 샘물과 구름 그림자와 산뽕나무와 으름덩굴을 다 받아먹는다

서울 백반집에 마주 앉아 밥을 먹을 때 그는 골짜기를 다 데려와

오물오물 밥을 씹으며 참 아름다운 입가를 골짜기를 나에게 보여준다

 

문태준, 가재미, 문학과지성사. 2006년 2쇄.18쪽.

늙음.

 

이 시 '노모'처럼 아름다운 골짜기를 지닌 사람. 그런 선배를 만나고 싶다. 나도 그런 선배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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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언어 - 희망의 언어 에스페란토의 고난의 역사 카이로스총서 27
울리히 린스 지음, 최만원 옮김 / 갈무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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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페란토"

 

희망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예전에 우리나라 차 이름 중에 '에스페로'가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희망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

 

국제어를 표방하는 이 인공언어는 많은 사람에게 알려져 있지만, 반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기도 하다.

 

지금도 세계에스페란토협회가 있는 걸로 알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에스페란토어에 대한 강습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언어의 존재는 그렇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아는 사람들에게만 알음알음 전해지고 있다고나 할까.

 

이 언어를 창시한 사람이 자멘호프라는 사람. 그는 언어를 통해 갈등을 중재하고자 했는데... 특정 언어가 지배적인 언어가 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쉽게 쓸 수 있는 언어를 공통어로 사용한다면 갈등은 그만큼 줄 것이라는 희망적인 생각에서 만든 언어.

 

예외가 없는 언어로 유명한데... 이 언어를 배우려고 시도했다고 시도에서만 그치고 만 나는 아직도 이 언어는 어렵다. 우리나라 언어와는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 하지만 유럽 사람들에게는 이 언어는 그들의 언어를 기반으로 하였기 때문에 친숙한 언어이고 배우기도 쉬운 언어일텐데...

 

그럼에도 왜 이 언어가 공통어로 자리를 잡지 못했을까?

 

전세계의 민족들이 각 민족들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국제 사회에서는 서로의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 즉 인공어인 공통어를 쓴다면 우리가 외국어를 배우는데 그렇게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아도 될텐데... 서로의 언어를 존중하며 어느 민족에게도 속하지 않는 언어로 국제 사호에서 이야기한다면 서로가 더 도움이 될텐데...

 

각 나라의 학교에서 공통어로써 에스페란토어를 가르친다면 우리가 너무도 많은 외국어를 배울 필요도 없고, 또 각 나라 고유 언어의 고유한 의미를 몰라서 의사소통이 안 되는 불상사도 막을 수 있으련만... 그렇게 되지 않은 이유는?

 

그 이유를 추적해 가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500쪽에 달하는 방대한 양. 주석까지 합치면 600쪽이 넘는 엄청난 책이다.

 

평화를 표방한 희망의 언어인 에스페란토어가 어떻게 탄압을 받고 공통어로써의 자리를 잡지 못했는가를 추적하고 있는데... 주로 동유럽과 소련의 경우를 대상으로 서술하고 있다.

 

아마도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한 서유럽에서는 에스페란토어에 대해서 조직적으로 탄압하지 않았을테고, 일본과 중국, 그리고 우리나라 같은 동아시아 자료들은 그렇게 많이 있지 않을 것이며(아마도 이 책이 저자인 울리히 린스가 찾기에는), 아메리카 대륙에 관해서도 마찬가지 이유이지 않았을까 하는데...

 

적어도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에서 왜 공통어로써의 에스페란토어를 탄압했을까 하는 의문에서 역사적 사실들을 추적하고 있으리라 추측이 된다.

 

어느 한 민족의 언어가 지배적인 언어가 되지 않고, 모든 민족이 평등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세계일텐데... 그렇지 않았던 현실은 그들이 추구한 사회는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전체주의에 불과했다는 저자의 인식 때문일 것이다.

 

결국 국제적인 공통어는 공산주의 사회로 대표되던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체제에 도전하는 그런 위험한 언어로 낙인이 찍혔을 가능성이 높고, 그래서 에스페란토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즉 에스페란티스토들은 이런 나라들에서 탄압을 받았을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한 나라에서는 특정한 언어를 강요할 필요가 없었을테고, 지금은 자본의 힘으로 가장 영향력이 있는 나라인 미국의 언어, 영어가 세계 공통어의 역할을 자연스레 하고 있으니 굳이 에스페란토어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었으리라.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민족의 수가 어마어마한데, 이들이 각자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 각 민족의 언어들을 다 배워야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힘이 드는 일이겠는가.

 

지금 유럽연합만 보아도, 그들은 하나의 협정을 맺어도 그것을 유럽 연합 각국의 언어로 다 표기해야 하는데... 이런 일을 에스페란토라는 공통어만 서로 인정한다면 협정문에는 각 민족의 언어 하나와 공통어인 에스페란토어 하나, 이렇게 두 개의 언어만으로 기록이 될텐데... 그렇다면 더 경제적이고 더 편리하고 더 의미상 혼란이 없을텐데...

 

이 길은 아직도 요원하다. 어쩌면 앞으로가 더 힘들지도 모른다.

 

이 책의 부제가 '희망의 언어 에스페란토의 고난의 역사'이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이런 언어는 지배 권력의 탄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본의 힘에 의해서 자연스레 사라질지도 모른다. 지금도 전세계에서 사라지고 있는 민족어들이 많다고 하는데...

 

에스페란티스토들이 처음에 국제연맹에서 에스페란토를 공통어로 만들어 사용하게 하려고 시도했듯이 지금 유엔의 공통어로 '에스페란토'를 지정한다면?

 

정말로 전세계에서 자국의 언어와 그리고 세계 공통어로써 '에스페란토'를 교육한다면, 그리고 외국인끼리는 '에스페란토'로 의사소통을 한다면?

 

그때는 에스페란토는 희망의 언어, 평화의 언어가 되지 않을까.

 

우리나라에도 일찍이 에스페란토어가 전래가 되었고, 김억같은 경우는 에스페란토어에 대해서 상당히 조예가 깊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지금도 에스페란토어를 배우는 사람들도 꽤 있고...

 

이런 상상을 해본다. 정말로 각 민족의 언어 하나, 그리고 세계 공통어 하나. 그렇게 되면 적어도 언어 패권주의는 사라질텐데...

 

그런 희망을 이 책에서 발견해야 하지 않을까. 에스페란토가 만들어진 지 10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이 언어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는 얘기 아닐까...

 

동유럽, 소련의 역사에서 그렇게 탄압을 받았음에도 사라지지 않은 에스페란토의 역사를 보면서... 아직 우리에게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세계 시민단체들이 공통어로 이런 언어를 먼저 사용하면 어떨까?

 

한 번에 제도로 바뀌겠지 하지 말고, 국제적인 시민단체들부터 특정 언어의 헤게모니로부터 벗어나 이렇게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아 누구에게도 속할 수 있는 이런 언어로 소통을 한다면...

 

자멘호프의 꿈이 실현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책이다. 길지만 에스페란토어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읽어보아야 할 책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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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뉴스에서 사랑의 온도탑이 100도를 넘었다고 했다. 기대한 것보다 더 많은 기부금을 모았다는 얘기다. 참 훈훈한 얘기다. 이런 훈훈함이 사람들이 겨울을 견디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뉴스를 보면서 씁씁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우리 모두가, 아니 사회가 책임져야 할 일들을 자꾸만 개인에게 미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IMF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사고는 있는 자들이 다 쳐놓고, 그 뒷수습은 없는 사람들이 십시일반 힘을 모아 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사회복지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 분배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자꾸만 개인에게 전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사랑의 온도탑. 좋다. 이거 100도를 늘 넘겼으면 좋겠다. 그러나 이런 사랑의 온도탑이 없어졌으면 좋겠다. 어려운 사람이 꼭 연말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사람들이 지내기 힘든 것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아니 계절을 가리지 않고 힘들텐데...

 

연말에 이런 행사를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런 행사 자체가 필요없게 사회기반 시설을, 사회복지를 만들어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바우만의 말처럼 내 형제는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왜 내 형제를 내게 묻습니까라는 질문이 나오는 순간, 그 사회는 윤리적인 사회에서 벗어나 버린다는 그런 말... 그런 사회가 되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하여 '삶이보이는 창'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사랑의 온도탑을 데우고 있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지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사람들 사이의 온기를 내보내고 있다. 이게 삶창이 지닌 매력이기도 하다.

 

이번에는 '친절'시리즈다. 감정노동이라는 말이 있듯이, 지나치게 친절을 강요하는 사회는 친절하지 않음이 팽배해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친절을 강요하는 사회, 그런 친절은 자신에게만 해당이 된다. 남에게는 오히려 막 대하는 그런 모습을 보이는 사회. 그것은 바람직한 사회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친절을 가장하고 사는 모습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대면하고 서로의 진심을 읽을 수 있는 그런 사회를 바란다. 그것이 바로 이번 삶창에서 말하는 '친절 금지'일 것이다.

 

사람들의 따스한 이야기.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 그럼에도 아직도 힘들게 지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끝나지 않은 이야기... 그런 이야기들이 생생하게 이번 호에도 실려 있다. 그래서 삶창은 나를 깨어있게 한다.

 

적어도 눈 뜨고 있으라고 한다. 그것도 강하게가 아니라 나직하게 나에게 속삭인다. 깨어 있는 삶이 아름답다고.

 

삶창은 이렇게 계속 따스하게 깨어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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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 창비시선 168
정양 지음 / 창비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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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이라는 시인을 발견하게 되었다. 안도현이 엮은 시집에서 '물끓이기'란 시로 그를 알게 되었는데, 일상 생활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게 만든 시인의 표현이 마음에 쏙 들었다.

 

이렇게 마음에 드는 시인을 발견하게 되면 그의 시집을 사 보게 된다. 몇 권의 시집을 발간한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을 아직까지 몰랐다니... 제법 시집을 읽었다는 나도 시에 관해서는 아직도 문외한임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어떤 시집을 고를까 하다가 그래도 최근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고른 시집.

 

뒤를 먼저 살피는데, 이 시집이 언제 발간이 되었고 몇 쇄나 인쇄가 되었는지를 살핀다. 여러 쇄가 인쇄되었다는 얘기는 제법 읽혔다는 얘기다. 단 한 번의 출판으로 절판이 되거나 품절이 된 시집도 있는데, 이 시집은 1997년에 처음 발간이 되었는데, 내 손에 들어온 시집은 2013년 초판 5쇄다. 최소한 다섯 번은 찍어냈다는 얘기이니, 이 시집은 시집 중에서는 그래도 많이 읽힌 축에 드는 시집이리라.

 

시를 읽기 전에 먼저 시인의 말을 살핀다. 그의 말 '시 쓰는 일, 그것이 빛깔이 되든 수단이 되든 목적이 되든, 허무나 그리움 같은 폭폭한 것에 인박히어 그 면역과 건망증을 되풀이하면서 우리는 한 세상을 살고 있다. 진실로 맘에 드는 시집 한권 만들 때까지 이 건망증은 계속될 것만 같다.(129쪽)'는 그의 말이 맘에 쏙 들어온다.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이렇듯 무엇인가가 우리에게 인박히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잊는다. 잊고 살다가 어느 순간 내 맘 속에 떠오를 때 그 때 그것은 다시 나에게로 다가와 의미있는 무엇이 된다.

 

그의 시들은 그의 삶을 통해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다. 그것들이 자연스레 시로 표현되고 있다. 이 시집의 해설에서 이야기하듯이 그의 시를 갯벌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냥 보면 별 것 아닌, 그저 그런 풍경으로서의 갯벌.

 

그러나 갯벌은 자세히 보면 엄청난 역동성을 지니고 있다. 정지되어 있는 듯한, 이미 쇠락한 듯한 그 갯벌에서 온갖 생명들이 요동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생명력 또한 발견할 수 있고. 또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갯벌의 포용성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의 시도 마찬가지다. 그냥 개인의 일상생활, 특히 시골생활이 많은데... 그리고 시의 대부분이 시인의 경험과 동떨어질 수 없는 내용들이라고 짐작이 되는데... 한 사람의 일상을 시로 풀어낸 듯한 시집이지만, 가만히 읽어보면 온갖 것들이 살아서 숨쉬고 있다. 그래서 갯벌이라는 비유를 비평가가 썼는지도 모른다.

 

이 중에서 어디선가 본 시인데... 왜 시인의 이름이 남아 있지 않았을까 싶은 시가 '토막말'이란 시. 분명 어디에서 보고, 이렇게 시를 쓸 수도 있구나, 일상어가, 비속어가 이렇게 시 속에서 시퍼렇게 살아 숨쉴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했던 시인데.. 왜 시인을 기억하지 못했을까 하는 시, 보자.

 

토막말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놓고 간 말

썰물진 모래밭에 한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시퍼죽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 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이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정양. 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 창비. 2013년 초판 5쇄. 38쪽

 

아름답다. 감정을 언어로 순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낸 그 말이. 그 말을 보면서 한 편의 시를 쓴 시가. 우리네 삶의 현장이 고스란히 시에 녹아 있지 않은가.

 

이런 시... 읽으면 기분이 좋다. 그리고 시를 가까이 하게 된다. 시란 언어의 유희를 떠나 우리네 삶에 밀착하게 달라붙어 있을 때 더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이런 시는 우리에게 시를 친숙하게 여기는데 도움을 준다.

 

삶을 수수하게 노래하고 있는 시들. 그런 시들을 통해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정양의 시집. 이번에는 새벽을 이야기하고 있는 시를 본다.

 

그 새벽.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다. 그냥 해가 뜨는 장면이 아니다. 그 해 뜨는 장면을 보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깊은 어둠을 경험해야 하는가.

 

어둠을 통해서 새벽은 더욱 아름답게 우리에게 다가오고, 어둠이 아무리 깊어도 새벽이 온다는 그런 사실을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알려주는 시다.

 

새벽은

 

한사코 끗발이 죽는 노름판에

끗발이 끝끝내 꽉 막혀야

새벽이 온다

 

화톳불 식어가는 초상집에도

술독이 바닥난 주막집에도

 

꽁초까지 떨어져야 새벽이 온다

가물가물거리는

저 촛불이 꺼져버려야 비로소

새벽은 온다

 

정양. 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 창비. 2013년 초판 5쇄. 73쪽.

 

우리의 새벽은 이렇게 오겠지. 그게 바로 새벽이겠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감흥이 없는 날짜의 변화, 시간의 변화, 자연의 변화에 불과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하여 아무리 어둠이 짙어도 그 어둠의 끝에는 반드시 새벽이 온다는,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보아야 한다는... 그런, 갯벌은 자신의 몸을 제대로 썩여야 뭇생명들을 머금을 수 있음을... 이런 시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미 오래 전부터 활동을 해왔던 시인인데... 이제서야 그의 시집을 읽고 그렇구나, 이럴 수도 있구나, 이렇듯 생활이 바로 시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시가 한둘이 아니겠지마는, 이번에 읽은 정양의 시집은 한 마디로 좋다였다. 그의 생활을 통하여 우리 사회를 볼 수도 있었고, 민초들의 삶을 통하여 인간 삶을 생각할 수도 있었고, 그의 내력을 드러낸 시들을 통하여 우리 현대사를 생각할 수도 있었기에...

 

내 마음에 들었던 시들은 더 있는데... 길어서 인용은 그만하고, 제목만 말하면 '사진찍기2', '평양소주','낯도 안 붉히고'가 있다. 이들만이 아니다.

 

이 시집은 정말로 갯벌이다. 많은 생명들이 이 시집에서 자신들의 생활을 살아가고 있다. 그것만으로 이 시집은 제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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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서 희망으로...

 

녹색평론 이번 호를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절망은 우리의 현실에서, 희망은 우리와 비슷한 나라들, 라틴아메리카에서... 아니, 바로 우리의 이 현실에서...

 

'밀양 송전탑의 어떤 하루'와 '일상 속에 감춰진 방사능'에서 절망을 보았는데...

 

이 둘은 핵과 관련이 되고, 그것은 우리의 파멸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에도 이상하게도 남의 일처럼 여겨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대도시의 전력을 위해서 위험천만한, 송전선이 지나는 근처의 삶을 파괴하는 그런 발전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 밀양의 외침을 공영방송이라는 데서, 전국방송이라는 데서 제대로 다루어주지도 않고, 오로지 지역이기주의로 몰아부치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을 대변한다는 국회에서조차도 제대로 이 문제를 다루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절망을 본다.

 

또한 우리 주변에 산재해 있지만 우리가 알고 있지 못하는 방사능, 그러나 전문가들에게도 철저히 무시당하고 있는 방사능에 대해서, 이렇게 알려주는 글을 읽으며, 이것 참... 알려주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닌데... 왜 이렇게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지...

 

국민의 건강이 국민의 행복을 이루는 기본 조건이고, 방사능은 국민의 건강을 위협하는 제일 요소라는 사실을 외면한다고 해서 사라지겠는가... 송전탑이든 방사능이든 모두 핵과 관련이 있는 문제인데...

 

이렇게 녹색평론에서는 끊임없이 방사능에 대해서, 핵에 대해서 우리의 지속가능성에 대해서, 조화로운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도 세상은 그저 조용하기만 할 뿐인 모습에서 절망을 본다.

 

그러나 이 책의 중후반에 있는 라틴아메리카 이야기에서 희망을 본다. 아니 희망은 이런 절망 속에 있음을 본다.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듯이... 인간이 가장 나중까지 지닌 것이 바로 희망이듯이...

 

우리와 비슷한 역사적 상황을 겪었던, 어쩌면 우리보다 더 혹독한 시련을 겪었던 라틴아메리카가 지금 어떻게 변모하고 있는지, 가끔 들려오는 소식은 참 고무적이다. 이런 고무적인 현상에 더해서 이번 호에서는 '시와 라틴아메리카 혁명'이란 글과 '부엔 비비르-좋은 삶과 자연의 권리'라는 글을 실었다.

 

라틴아메리카의 오늘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글인데... 두 번째 연재되고 있는 '농사꾼이 본 쿠바(2)'와 더불어 생각할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는 글이다.

 

시가 꼭 혁명을 주장할 필요는 없다. 꼭 선동시일 필요는 없다. 인간의 내밀한 감정을 잘 드러낸 시라면 그 시는 혁명성을 지니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길게 본다. 그들은 인간의 삶에서 겪는 고통을, 그 기다림을 혁명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치환할 줄 알았다.

 

그래서 서정을 노래한 시와 노래들이 그들의 혁명을 유지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마치 일제시대 임화의 단편서사시가 서정성을 획득했을 때 더한 울림을 주었듯이... 이용악의 시들이 우리 민족의 암담한 현실을 노래했지만, 그 시들이 우리 민족의 독립의식을 오히려 더 일깨웠듯이...이육사의 시들이 상당한 울림을 가지고 지금도 읽히고 있듯이... 개인적인 서정이 담뿍 담긴 윤동주의 시들을 우리가 저항시라고 부르듯이...

 

혁명을 노래하는 시들은 꼭 피의 냄새를 풍길 필요는 없다. 우리의 삶을 대변하는, 표현하는 그런 시들이면 된다.

 

그래서 파블로 네루다의 혁명시만큼 그의 연애시가 혁명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제는 자연과 함께 조화를 이루는 삶을 헌법에 채택하는 운동을 하고 있는 라틴아메리카는 진정한 혁명의 길로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혁명을 계속 진행중인 일로 만들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역사에서, 그들의 활동에서 우리가 나아갈 희망을 발견해야 한다.

 

'시와 라틴아메리카 혁명'이라는 글을 읽으며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 파블로 네루다. 그들 나라에서는 돈 파블로라고 알려졌다는 그 사람. 그 사람의 시집이 떠올랐고...

 

단순한 혁명시인이 아닌, 삶을 노래한, 그래서 혁명시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시집이 예전에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나왔다는 사실이 반갑기도 했다.

 

제목을 보라.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다. 이 절망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결국 사랑은 희망으로, 절망은 희망을 예비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절망 속에 좌절해 가는 것이 아니라, 절망 속에서 희망을 꽃피운, 사랑을 노래한 그들은 지금... 희망을 시대를 만들었고, 이끌어가고 있다.

 

밀양에서, 강정에서, 또 어디어디에서 우리는 숱한 절망들을 만난다. 그러나 그 절망들 속에서도 우리는 희망을 찾고 있다. 희망을 보고 있다. 함께 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하여 희망이 지금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희망이 없다는 얘기가 아님을... 희망은 언제가 되던 오게 되어 있음을 역사 속에서 우리는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런 희망을, 지금 절망의 시대... 다시 한 번 찾고 있다. 녹색평론 134호를 읽으며 절망이 절망으로 끝나지 않음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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