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가기로 하다. 어디로 갈까.... 가까운 곳... 하루만에 돌아볼 수 있는 곳. 무언가 볼 수 있는 곳. 하여 선택한 곳이 홍성...

 

만해 한용운 생가가 있는 곳이라는 이유만으로, 또 근처인 덕산(예산)에 수덕사가 있다는 이유로 고르게 된 곳. 특히 홍성에는 김좌진 생가도 있다고 하니... 겸사 겸사...

 

가면서 홍성은 한우도 유명하고, 또 가다가 남당항이라는 곳에 가면 맛있는 해산물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생각이 났으니... 구경할 것과 먹을 것이 풍부한 동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늘 카메라를 잊고 다닌다는 사실. 사진을 찍어서 기념할 것들도 있는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충전은 해놓고도 카메라를 집에 놓고 오고 말았으니.. 출발하고 한참 뒤에 아, 카메라! 하고 말았으니... 참... 

 

그래도 여행은 의미 있다. 카메라 대신 눈에, 마음에 마음껏 담아 오기로 작정하고...

 

먼저 아침에 출발했으니 점심을 먹어야지 하고 들른 곳은 남당리. 오호라, 새조개 축제란다. 새조개가 새랑 닮아서 붙인 이름인데.. 맛도 일품이다. 다만, 조금 비싸다는 것이 흠이기는 하지만... 어쩌겠는가, 남당항까지 갔으니 맛있게 먹을밖에.

 

생각보다 새조개의 양이 많아서 아주 만족스러운 식사. 어떤 식당(수덕사 근처 식당이다)에서 본, '수덕사도 식후경'이라고 홍성 유람도 식후경이다. 배가 찼으니... 목적지를 향해 가는 길밖에는 없는데...

 

먼저 가는 길에 고산사를 들르고, 이어서 김좌진 장군 생가를 들르기로 하다. 청산리대첩으로 유명한 분. 요즘 한국사 교과서 문제로 시끄러운데, 직접 일본군과 맞서 싸웠던 장군이 이 사태를 보면 어떤 말을 할까... 어떤 심정이 될까...

 

생가는 생각보다 커다란 규모였다. 아, 양반이었지, 학교까지 세울 정도였으면 나름 사는 집안이었겠지 하는 생각에... 잘 꾸며놓은 생가와 김좌진 장군 기념관. 그리고 동네 이름이 이제는 김좌진 장군의 호를 따서 '백야로'가 되어 있으니... 이렇게 독립운동가를 기리면서도... 한국사 교과서 문제가 불거지다니...이런 이율배반이 있나 싶기도 하다.

 

한데... 이 김좌진 생가에서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정문의 해설과 기념관의 해설에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는 점. 김좌진 장군은 박상실이라는 사람에게 암살당했다고 되어 있는데... 박상실은 공산주의자로 알려져 있는데... 기념관의 해설에서는 일제의 밀정인 김일성(金一星:우리가 알고 있는 그 김일성이 아니다)이 사주한 박상실에 의해 암살되었다고 되어 있다.

 

무엇이 맞는지... 집에 김좌진 장군에 관한 책이 있어, 분명히 김좌진 장군은 말년에 아나키즘에 경도되었고, 아나키즘을 적대시하던 공산주의자에 의해서 암살되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돌아와 찾아보니...

 

김좌진은 1930년 1월 24일 공산주의자 박상실에 의하여 살해당하였다. 그 이유는 그가 한족총연합회의 최고책임자일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무정부주의자들과 가깝게 지냈기 때문이었다. (박환, 식민지시대 한인아나키즘 운동사. 선인, 2006년 초판 2쇄. 250쪽에서)

 

이렇게 되어 있다. 김좌진 장군 같이 중요한 인물에 대한 기록은 명확하게 남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김좌진 장군 생가과 기념관에서는 일치된 기록을 남겨야지...

 

다음에 이제는 '만해로'를 따라 만해 한용운 생가에 도착. 김좌진 장군의 생가가 기와집이라면 만해의 생가는 초가집이다. 아주 작은... 그런 초가집. 여기에 만해 문학체험관이 있고, 민족시비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초가집이야 만해의 생가를 복원해 놓은 것이니 뭐 한 눈에 들어오고, 다만 만해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 현판이 있어서 사진을 찍는 의미도 있어 좋았다고 해야 하는데... 민족시비 공원을 한 바퀴 휘 돌아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우리가 아는 시인들의 시가 시비로 길을 따라 곳곳에 서 있는데... 지금 생각나는 시인만 해도, 백석, 윤동주, 이육사, 조지훈, 김남주, 조태일, 김달진, 유치환, 구상 등이 있으니 ... 한 번 볼만한 곳이다.

 

그리고 만해문학체험관. 이곳은 만해의 숨결이 담겨 있는 곳이다. 둘러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곳이기도 하고, 만해의 유물들을 만나보기도 하는 곳이기도 하다.

 

적어도 만해에 대해서 공부를 했다면 한 번은 둘러보면 좋을 곳이라는 생각을 하고...

 

이제는 수덕사로 향했다. 수덕사... 유명한 절이다. 큰 절이라고 해야 하나... 내게는 만공 스님으로 유명한 절인데... 몇 번을 가봤었는데.. 오래간만에 가 보니, 많이도 변했다. 대웅전의 고풍스러운 모습을 빼고는 전혀 옛 기억을 되살릴 수가 없다.

 

정말로 와 본 지 오래 되었나 보다. 미술관도 생기고 성보박물관도 생기고... 성보 박물관에서 만공스님의 자취를 좇기도 하고, 미술관에서는 이응노 화백의 자취를 느끼기도 했으니... 이것만으로 됐다.

 

하루 여행 온 목표는 다 달성한 셈이다. 저녁은 이제 수덕사 근처의 산채비빔밥. 맛있게 먹고.. 돌아오는 길.

 

한 가지 아쉽다고 한다면 수덕사에서 윤봉길 의사를 기념한 '충의사'가 근처에 있는데... 그냥 지나쳐 왔다는 것.

 

홍성과 예산.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지역. 인물이 참 많기도 하다. 이런 인물들을 우리가 기억하고 기념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직 우리 민족의 정기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리라.

 

수덕사의 만공 스님도 일제시대에 조선 불교와 일본 불교를 통합하려는 총독의 움직임에 반대 성명을 일갈한 분 아니던가. 그래서 조선 불교가 조선 불교로 존재하게 했던 분 아니던가...  

 

하여 한국사 교과서 문제로 뒤숭숭해진 마음을 홍성,예산 여행으로 다잡고 왔다고도 해야겠다.

 

단순한 여행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 역사 속 인물을 만나고 온 길이기도 하고, 우리 문학을 만나기도 한 날이기도 하고... 세속과 초월해야 하는 종교도 세속에 참여할 수 있음을 느끼고 온 날이기도 하니...

 

무엇보다 벗들과 함께 한 여행. 좋은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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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서 구한 시집이다. 저자의 서명도 들어 있고, 또한 곳곳에 줄도 그어져 있는. 읽은 사람의 흔적이 오롯이 들어나 있는 시집이라고나 할까.

 

김기택이 시집 중에서 [사무원]을 읽은 적이 있다. 기발한 상상력이라기보다는, 현실을, 세상을 이렇게도 자세하게 들여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 시집인데...

 

세상을 관찰하는 힘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어서 좋은 시집이다.

 

그런 기대를 이번 시집에서도 저버리지 않는다. 이렇게 관찰할 수도 있구나. 이런 관찰을 토대로 표현할 수도 있구나.

 

상상력이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가까이에 있음을. 시란 어디선가 뚝 떨어지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세상을 잘 바라보는데 있음을, 이 시집은 보여주고 있다.

 

이 시집을 읽다가 요즘 뉴스에서 많이 나오는 미세먼지가 함께 떠올랐는데...

 

예전에는 봄이면 며칠 동안 황사로 고생을 했는데... 이제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오죽했으면 미세먼지로 인한 폐질환 환자가 30%나 늘어났다고 하겠는가. 먼지에서 가끔은 흙냄새도 나는데... 이 먼지들은 생명의 먼지가 아니라 죽음의 먼지일 뿐이다.

 

세상이 점점 이러한 먼지로 쌓여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이 먼지들을 털어내고 생명이 넘치는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어야 하는데...

 

김기택이 이번 시집에서 이 미세먼지와 정반대되는 내용을 지닌 시가 있다. 그 시의 제목은 '맑은 공기에는 조금씩 비린내가 난다'

 

맑은 공기에는 조금씩 비린내가 난다

 

겨울 아침, 창문을 여니 찬 산바람이 들어온다

맑은 공기에는 언제나 조금씩 비린내가 난다

맑은 공기가 더 맑아지는 비린내

아침 냄새가 더 어침 냄새 같은 비린내

그 비린내를 마시니

폭포를 먹은 듯 머리가 세차기 헹구어진다

 

플 속에 사이좋게 섞여 썩고 있는

무수한 눈과 귀, 손과 발의 냄새들

마른 풀과 낙엽에서 녹아나오는 푸른 냄새들

아직도 공기 속에서 떠돌아다니는

투명한 심장과 미세한 허파와 안개 같은 핏줄들

희미한 냄새만 남은 웃음소리들 흐느낌들

 

덜 깬 잠을 때리는이 냄새에는 귀신 냄새가 서려 있다

깊이 들이마시면 허파가 시리다

귀신들도 비린내처럼 맑은 곳에서만 산다

이 냄새들이 산 속으로 계곡으로 더 깊이

절과 굿당을 불러들이고 있다

이른 아침이면 비린내는 이슬에 흠뻑 젖어 있다

 

김기택, 소. 문학과지성사. 2005년 초판 4쇄. 35쪽

 

이런 냄새... 맑은 공기. 살아 있는 것들을 포함한 그런 냄새. 이 겨울. 창문을 열지 못하고, 야외 활동을 자제하라는 말을 듣고 있는 지금. 맑은 공기 속에서 느껴지는 비린내. 그것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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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 지성의 근본주의 비투비21 1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문성원 옮김 / 이후 / 2002년 3월
평점 :
절판


자유. 너무도 당연한 말이기도 하고 너무도 당연하기에 어려운 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유에 대해서는 철학적으로 사유하기도 하고, 법적으로 사유하기도 하는데... 바우만의 이 책은 사회학적으로 사유한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의 사회적 조건과 어떤 조건에서 사람들이 자유를 누리는지를 중심으로 이 책을 읽으면 된다.

 

자유라는 말에는 피의 냄새가 난다고 한 김수영의 시 '푸른 하늘을'도 있지만, '자유의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도 있고... 하여 자유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말을 중심으로 자유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바우만의 책을 읽으면, 바우만은 벤담의 '판옵티콘'에서부터 자유의 논의를 시작한다. 거기에서부터 지금의 신자유주의인 소비자 사회에서 자유에 대한 논의를 마치는데...

 

판옵티콘은 나는 너를 언제든지 볼 수 있지만, 너는 나를 볼 수 없다는 개념에서 시작한다. 이것은 권력을 쥔 자와 권력을 쥐지 못한 사람의 차이로 나타나고... 당연히 자유는 권력을 쥔 자의 손에 더 많이 주어지게 된다.

 

감시 당하는 사람, 이에게는 자유란 허울 좋은 이름일 뿐이다. 하여 사회학적인 자유에는 바로 권력이 개입한다. 고대나 중세 시대의 절대적인 권력에서부터는 자유를 논의할 필요가 없다. 이 때 노예들은 자유보다는 생존이 더 절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는 근대에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기 시작한다. 여기서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집단의 위계가 생기게 되는 것이고, 그러므로 권력의 문제를 자유의 문제에서 배제하면 안되게 되는 것이다.

 

소비자 사회에서는 경제 권력을 쥔 자는 자유를 많이 향유한다. 지금 이 시대의 권력은 바로 경제 권력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은 경제 권력을 많이 잃었기에 그들의 자유를 그다지 향유할 수가 없다.

 

자유롭게 생활하려고 하여도 생계가 확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 지금 이 시대의 사회학적인 자유에는 바로 경제 권력의 평등이 기본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이것이 전제조건이 되지 않으면 너는 자유이나, 살 권리도, 죽을 권리도 네가 선택할 수 있으나, 선택할 수 있는 폭은 정해져 있다가 된다.

 

이 점을 인식하면 자유는 만인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진 개념이 아니다. 자유는 그 사회의 권력 배치에 따라서 다르게 적용이 된다.

 

마치 조선시대 노비해방이 노비들에게는 죽음과도 같은 선언이었음과 같이, 중세의 끝에 농노 해방이 이루어졌으나 그들에게는 오로지 죽을 자유밖에는 없었다는 것과 같이... 경제 권력이 중심이 된 사회에서는 경제 권력이 제대로 분배되거나 감시되고 통제되지 않는다면 자유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만, 즉 굶을, 나앉을, 쓰레기가 되는 삶을 살 자유밖에 지니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예전에 극복되었던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생각나게 한다. 노예가 인간 선언을 하면서 자기의식을 지니고 주인과의 투쟁을 통해서 대자적인 존재로 거듭나는 과정이 바로 자유를 획득하는 과정이라면, 이 자유를 획득한 노예가 주인이 되었음에도 세상이 변해서, 생산과정의 주인이 되었을지는 몰라도(사실 이렇지도 않지만) 소비과정에서는 다시 노예로 전락한 상태,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시대 아니던가.

 

그렇다면 정-반-합이라는 헤겔의 변증법에 따르면 노예는 합의 위치에 다다랐으나, 이 합이 다시 정이 되어 반과의 투쟁을 해야 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노예로서 그냥 그렇게 정말로 내던져진, 쓰레기가 된(바우만의 용어로 한다면)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된다.

 

자유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천부적인 권리. 그러나 자유는 쉽게 말하면 선택의 권리이기도 하다. 선택할 수 있는 권리. 말로만 하면 참 보편타당한, 불편부당한 그러한 말인데, 선택에는 권력이 개입한다.

 

선택을 할 수도 있지만, 선택을 할 수 없기도 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과 선책할 수 있는 길이 이미 정해져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같은 자유를 향유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여 바우만의 이 사회학은 자유를 선택의 문제, 권력의 문제로 치환한다. 이렇게 치환하여 자유를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들이 진정한 자유를 향유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판단하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유의 전제 조건이 무엇인지... 말로만 넌 자유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게 하는 조건이 갖춰진 사회를 꿈꾸는 것이 바로 사회학 아니겠는가.

 

그래, 자유란 말을 쉽게 하지 말자. 자유라는 말에는 피의 냄새가 배어 있다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자유라는 말에는 죽음의 길이 있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는 안 되겠지. 지금 이 21세기에.

 

우리의 자유라는 말에는 삶이라는 말이 함께 따라다니게 해야겠지. 이것이 바로 자유에 대해서 사회학적으로 고찰한 이유이기도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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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의 첫 시가 마음에 팍 꽂혔다. 사실 다른 책에서 본 시인데.. 어디엔가 적어 놓았던 시이기도 하고. 이 시가 이 시집에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됐다. 이 시집은.

 

자연친화적인 시를 쓰는 시인. 세상의 모든 일에 관심을 두는 시인. 그러나 시를 결코 어렵게 쓰지는 않는 시인.

 

내가 좋아하는 시인 중에 한 사람. 한 때 국어교과서에 나희덕 시인의 '배추의 마음'이라는 시가 실리기도 했었지.

 

그의 시는 쉽다. 읽기에 편하다. 그리고 무언가 의미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참 단정한 시들을 쓴다.

 

그런데 이런 단정함 속에서도 어떤 강함이 느껴진다. 유함이 강함을 이긴다고 했던가... 대놓고 뭐라 하지 않는데...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지니게 한다.

 

어쩌면 이게 시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지금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고 하면 소통단절의 시대라 할 수 있다.

 

말들은 넘쳐나는데, 이 말들이 각자 따로 놀고 있는 시대. 그런 시대에 어쩌면 우리는 이 시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말들을 서로 튕겨내고만 있지는 않은지... 오로지 자기의 말만 뱉어내고 남의 말을 품을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더 크고 강한 존재들이 더 넓은 존재들이 마음을 열고 작고 연약한 소리들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 오히려 더 굳건하게 자신들을 걸어 잠그고 있어 더 이상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천장호에서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불빛도 산 그림자도 잃어버렸다.

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

아무것도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

헛되이 던진 돌멩이들,

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 쩡 날아오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

 

나희덕, 그곳이 멀지 않다. 1997년. 민음사. 11쪽

 

호수는 무엇이든 받아들이다. '불빛도 산 그림자도' 받아들이고, 그리고 '단단함'이 아니라 부드러움으로 자신에게 기대는 모든 것들을 '비추어' 준다.

 

어느 것이 오더라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냥 조용히 감싸안는다. 그것이 호수다. 호수의 그 부드러움으로 모든 것들은 호수에 안겨 고요함을, 풍요로움을, 평화로움을 경험한다.

 

그러나 부드러움을 잃은 호수. 꽝꽝 얼어버린 호수는 '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인 호수가 된다. 오로지 자신만 안다. 다른 것들을 돌아보지 않는다. 품지 않는다. 그냥 되받아칠 뿐이다.

 

이런 호수의 차가움. 소통의 단절. 제 안에 갇혀 제 스스로만 존재하는 호수.

 

이것은 강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약한 사람들을 품지 않는. 관용과 용서. 이것은 먼저 강한 자들에게 필요한 미덕이다. 호수가 제 스스로를 얼려 놓고, 다른 것들을 튕겨낼 때 여기에 어떻게 관용과 용서가 끼어들 틈이 있겠는가.

 

소통이 단절된 모습은 바로 얼어붙은 호수와 다름이 없다. 그런 호수에 돌멩이 하나를 던진다. 제발 응답하라고, 받아들이라고, 예전의 모습을 되찾으라고.

 

그러나 이미 제 스스로 문을 닫아건 호수는 이 돌멩에 마저도 튕겨 낸다. 그리고 함께 있어야 할 존재들은 사라지고, 오로지 메아리만 남아서, 헛된 울림만 되풀이할 뿐이다.

 

이 시를 읽고 마음이 아팠던 이유는 이것이다.

 

이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헤어지게 되는 과정으로 해석해도 되지만(맨 마지막 행을 보면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해석하는 것이 더 좋기도 하다) 시의 좋은 점은 해석을 무한히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약자들의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는 지금 이 시대의 모습을 나는 이 시에서 읽는다. 그리고 마음이 아프다.

 

더 큰 돌들이, 더 많은 돌멩이들이 호수의 얼음을 향해 날아가, 부딪혀 얼음을 깨고 호수의 마음에 물결을 일으켜 그의 닫힌 문을 열어젖히는 꿈을 꾸기도 한다.

 

모든 것을 비추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호수. 그래서 그 잔잔함으로 평화와 행복을 전해주는 호수. 그런 호수를 바라고 있기에... 이 시의 울림이 지금, 내 마음에도 울리고 있다.  

 

이 울림과 비슷하게 또 하나의 시. 도무지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시. '천장호에서'는 호수의 얼음과 돌멩이라면, 이 시에서는 항아리와 간장이다. 돌멩이는 얼음을 깨지 못하고, 새떼도 부르지 못하고, 그냥 메아리만 울리게 했다면, 간장은 항아리 밖으로 나온다. 항아리를 깬다.

 

     어떤 항아리

 

이건 금이 간 항아리면서

금이 갔다고 말할 수 없는 항아리

 

손가락으로 퉁겨 보면

그런 대로 맑은 소리를 내고

물을 담아 보아도 괜찮다

 

그런데 간장을 담으면 어디선가 샌다

간장만 통과시키는 막이라도 있는 것일까

 

너무나 짜서 맑아진,

너무 오래 달여서 서늘해진,

고통의 즙액만을 알아차리는

그의 감식안

 

무엇이든 담을 수 있지만

간장만은 담을 수 없는,

뜨거운 간장을 들이붓는 순간

산산조각이 나고 말 운명의,

 

시라는 항아리

 

나희덕, 그곳이 멀지 않다. 1997년. 민음사. 49-50쪽

 

항아리가 시가 아니라, 간장이었으면, 항아리는 시를 가두는 틀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럼에도 시는 항아리가 된다. 보통의 아름다움을 담기에는 부족하지 않은, 우리가 소통을 하는데는 어떤 지장도 주지 않는, 더욱이 아름다움까지도 주는 그런 항아리(시).

 

그러나 그 아름다움만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삶의 진한 고통이 들어가 있지 않으면 그냥 그렇게만 존재하게 된다. 틀을 깨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시다. 간장과 같은 삶이 들어가야 한다. 시에서 머무르지 않고 다른 존재로 거듭나는 그런 시.

 

시가 시로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그런 이야기 아닐까... 우리가 지녀야 할 또다른 소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시라는 생각이 드는데... 마음을 크게 울리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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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파티아 - 고대 그리스가 사랑한 여인
마르자 드스지엘스카 지음, 이미애 옮김 / 우물이있는집 / 2002년 9월
평점 :
품절


히파티아. 어디선가 한 번 지나가면서 들은 이름이다. 여성학자들에 대해서 제대로 알려주지 않던 때, 수학,철학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고대의 인물이라고 말이다.

 

또 어디선가는 고대 그리스의 종교를 신봉했으며, 자신만의 세력을 형성해서 기독교 세력과 함께 할 수 없었기에 죽임을 당한 인물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히파티아의 죽음으로 고대 그리스 문화는 종말을 고하고, 이제는 기독교 문화만이 살아남았다는 그런 말을.

 

그 정도의 인물이었는데... 우연히 손에 들게 된 "히파티아"란 책.

 

지금까지의 해석과는 달리 철저한 고증을 통하여 히파티아에 대해서 알려준다고 하기에, 히파티아가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그러한지 읽어보기로 했다.

 

이 책에서는 히파티아에 관해서 두 가지 사실이 잘못 알려졌다고 하고 그를 바로잡기 위해서 다양한 문헌들을 인용한다.

 

첫번째 오해는 히파티아가 젊고 매력적인 나이에 죽임을 당했다는 설. 히파티아를 육체적인 존재로 전이시킴으로써 에로틱한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고 하는데...

 

당시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명한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던 사람이 싱싱한 매력을 지닌 얼굴과 몸매를 지니고 있었고, 기독교 광신자들이 이를 훼손했다는 말들은 우리의 성적 상상력을 자극하기는 하지만, 또 히파티아의 비극을 더욱 극대화시키는 효력을 발휘하기도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라는 의문에서 이 책은 시작하고 있다.

 

사람들 사이에 인정을 받을 만한 실력을 갖추고 수많은 제자들까지 두었던 여인, 히파티아가 과연 20대에 그런 일을, 또는 30대에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여기에서 의문은 시작되고, 여러 역사서를 고증한 끝에 이 책의 저자는 히파티아가 죽었을 때의 나이는 대략 60세 정도였을 거라고 한다. 그 정도 나이에 이르러 이미 자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적도 동지도 많은 상태였을 거라는 추론. 하여 이 책에서는 히타피아의 출생년도와 죽었을 때의 년도를 추정하여 확정하고 있는데...

 

355년에 태어나서 415년에 죽었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향년 60세. 이 정도면 완숙의 경지에 이르지 않았을까 하고.

 

두번째 오해는 히파티아가 그리스 신앙에 빠져 있었으며, 기독교를 배척했다는 설. 그래서 그리스식 사고와 기독교식 사고를 정면 대립하게 함으로써 히파티아의 죽음은 고대 세계의 종말을 뜻한다고, 즉 알렉산드리아에서 헬레니즘 문화는 히파티아의 죽음과 함께 끝나고 지식은 암흑의 세계로 접어들었다는 설.

 

이 설에 대해 저자는 히파티아 제자의 편지를 통해 히파티아가 기독교를 믿었으리라고 추정한다. 히파티아는 기독교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를 믿었으며, 단지 다른 종교들을 멀리 한 것이 아니라 종교간의 융화를 지향했다는 것이다. 그의 제자들에는 다양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으며, 심지어는 주교가 된 제자도 있고, 또 이교도들의 반란에 히파티아는 참여하지 않았음을 보여, 히파티아는 이교도가 아니었음을 추론하고 있다.

 

이교도가 아닌데... 기독교도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의문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무엇일까? 저자는 그것을 정치적인 갈등 사이에서 희생을 당한 것이라고 한다. 알렉산드리아 제독과 알렉산드리아 주교 사이의 정치적인 권력 다툼 속에서 히파티아는 제독의 편을 들고, 그것에 위협을 느낀 주교가 히파티아를 이교도가 아닌 마녀로 몰아가고, 당시 마녀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기독교 광신도들에 의해 히파티아가 죽임을 당했을 거라고 말이다.

 

일견 타당성이 있는 의견이다. 이교도 스승에게서 주교가 나올 리는 없을테고, 당시에는 제독과 주교 사이에 권력다툼이 있었을테니, 히파티아 같이 유명세를 탄 사람이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한쪽은 동맹자로, 한쪽은 적대자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을테니 말이다.

 

이런 두 가지 논점을 가지고 히파티아에 대한 오해를 풀어가는 책이 이 책이다. 따라서 구체적으로 히파티아가 수학에서, 또 철학에서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는 간략하게 언급하고 넘어가고 있다. 두 분야에서 당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으며, 당시 유명한 수학책을 재해석하기도 했다는 이야기, 저서들을 출간하기도 했다는 이야기. 어쩌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 수학이 히파티아가 재해석한 수학책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등등.

 

히파티아 뒤에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 여성들이 나오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한 사람으로 히파티아는 손꼽을 만하다고... 하여 여성학자들의 계보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이 책은 말해주고 있다.

 

이제는 바야흐로 남성보다 여성이 더 활약하는 시대가 되었고, 남성성보다는 여성성이 강조되는 시대가 되었는데...그런 스승의 시조로 히파티아가 자리를 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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