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온갖 것들이 깨어나고 있는 이 때, 이들을 축복하기라도 하듯이 봄비가 내리고 있다.

 

촉촉하게.

 

이 촉촉함이 모든 사람들 마음에 젖어들었으면...

 

아직도 봄이 오지 않은 사람들, 봄을 만끽할 수 없는 사람들...

 

진정, 봄이 필요한데, 그들에겐 아직도 겨울인 그런 사람들.

 

그 사람들의 가슴에 봄을 잊지 않게...

 

봄이 오고 말리라고...

 

봄비가 내리고 있다.

 

삶창 92호를 읽다.

 

봄비만큼 마음을 촉촉하게 적신다.

 

이 작은 책에 봄이 들어 있다.

 

우리네 삶의 봄이.

 

연초록의 싱그러운 잎들이 제 자태를 뽐내지 않고 드러내듯, 삶창도 그렇게 연초록의 밝음으로 세상에 나오고 있다.

 

새순들 자체가 세상을 밝게 하듯이, 삶창도 존재 자체로 세상을 밝게 하고 있다.

 

그래서 봄비만큼이나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 따뜻함.

 

힘든 시기를 견디고 있는 사람들이 견디어낼 수 있는 힘으로 바뀌리라.

 

봄비가 땅에 스며들어 새싹들의 영양분이 되듯이, 삶창도 사람들에게 영양분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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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콤 엑스 -상 - 제3세계총서 1
알렉스 헤일리 지음 / 창비 / 1978년 7월
평점 :
절판


"검은 것이 아름답다."

 

이 말은 흑인들이 백인들에 대한 대항 이데올로기로서 만들어진 말이다. 흑인들을 비하하는 세상에서 흑인들 자신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이 말처럼 좋은 말이 있을까.

 

과학이 발전하면서 우생학을 잘못 도용하여 인종간에 우열을 나누는 경우도 꽤 있었고, 그러한 우생학을 바탕으로 유색인종은(세상에, 그렇다면 백인은 유색인이 아닌지...) 열등하다는 주장을 했고, 또 그렇게 대우를 했다.

 

그런 차별 대우가 언어에도 녹아 있어, 흑인들은 니그로라는 말로, 또는 혼혈임을 나타내는 말로 쉽게 지칭이 되었으며,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도, 살고 있는 지역도 모두 차별을 받았다.

 

아주 오래 전, 중세 시대의 이야기? 아니다. 이것은 현대의 이야기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민주주의가 발전했다는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러한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일어선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에게 알려진 사람으로는 미국인으로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말콤 엑스가 있다.

 

킹 목사는 평화주의자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사람으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는 연설로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져 있고, 세계적으로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이지만, 말콤 엑스는 우리의 기억에서 잊혀진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만큼 그의 전기를 구해서 읽기도 쉽지는 않다. 킹 목사가 계속 간디와 더불어 조명을 받는 것에 비하면 말콤 엑스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한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그에 대한 오해와 그의 종교.

 

그는 이슬람교도다. 젊은 시절 온갖 방황을 거쳐(이런 방황이 사실은 그가 흑인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문제라는 사실. 이것을 인식해야만 사회는 변할 수가 있다. 그는 학창시절 뛰어난 성적을 거둔 학생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장래 희망에 대한 무시를 견딜 수 없어 자신의 피부색에 맞는 동포들을 찾아 할렘으로 간다. 이 할렘에 거주하는 동안, 그는 밑바닥에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경험했다고 해야 한다.) 감옥에서 맞이하게 되는 이슬람.

 

그것은 그에게 구원의 빛이었다. 그 빛을 향해 그는 앞으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아갔으며, 그러한 그를 언론들은 과격하다, 증오를 빚는 사람이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언론을 누가 장악하고 있었는가? 그것은 바로 백인이다. 하여 말콤 엑스는 증오는 바로 백인들이 만들어낸 것이며, 자신은 그러한 증오를 없애기 위해서 노력한다고 주장을 한다. 그 증오를 없애는 방법, 그것은 흑인의 권리를 되찾는, 흑인의 본래 모습을 되찾는 것이라는 주장, 이 주장이 백인게에는 또다른 증오의 모습이었으리라.

 

게다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미국이지만, 미국인들 대부분이 기독교인인 나라에서 이슬람을 믿는 말콤 엑스는 이미 이단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의 목사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은 킹 목사와 그가 다른 점이다. 요즘 이슬람에 대한 인식을 보라. 아마 그 때도 다르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도 그를 이슬람으로 이끌었던 종교지도자와의 갈등으로 그 단체에서 정권(권리를 중지당함)을 당한다. 그 후 그는 다른 단체를 이끌게 되는데, 이것이 흑인과 흑인의 갈등으로 보이게 되는 소지를 남기게 된다.

 

백인에 대한 증오가 있었던 말콤은 성지 순례를 통해 인종간의 갈등을 어느 정도 극복한다. 그는 이제 흑인만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즉 사람에게는 피부색이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렇게 한 단계 나아간 말콤의 의식이 사회운동으로 정립되기에는 활동 시기가 너무 짧았다. 곧 그는 암살을 당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인종을 넘어선 더욱 폭넓은, 인종을 초월한 평화주의자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두 권으로 되어 있는 오래 된 책.

 

다시 읽으니 참으로 흥미롭다.

 

사회의 바닥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헤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말콤 엑스의 이야기는 희망을, 가능성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가 사람을 나락으로 내쳤더라도, 깨어있는 사람은, 그 사회의 모순을 파악하고, 사회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 그러한 깨어있는 사람이 결국 사회를 바꾸어 간다는 사실. 이를 말콤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게 된다.

 

그의 삶은 정말로 바닥에서 시작했으니 말이다.

 

진흙에서 핀 연꽃. 그 연꽃은 사회 변화의 상징이다.

 

많은 책 중에 창비 판으로 읽었는데, 다시 활자를 현재에 맞게 고쳐서 재출간하면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어려운 시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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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철학 - 지배와 저항의 논리
사카이 다카시 지음, 김은주 옮김 / 산눈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폭력은 두려움과 함께 한다. 두려움은 공포와 비슷한 감정이라고 한다면 폭력은 이 공포에 기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폭력은 일방향적이 아니다. 폭력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폭력이 있으며,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폭력도 있다. 아래로 내려오는 폭력이 지배의 폭력이라면, 위로 올라가는 폭력은 저항의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둘 다 폭력이라고 한다면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어떤 폭력은 정당하고, 어떤 폭력은 정당하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든다.

 

여기에 폭력은 무조건 옳지 않다고 하면 이 둘의 차이는 없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그 차이는 무엇인가 고찰해보아야 한다.

 

지배하는 폭력이 단순한 물리력 뿐만이 아니라, 공포를 수반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복종하게 한다. 이러한 지배하는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또다른 폭력일 수가 없다. 그것은 폭력의 재생산일 뿐이다.

 

그렇다면 저항의 폭력은 비폭력이어야 하는데, 이 비폭력은 무력함이 아니다. 오히려 비폭력은 힘을 바탕으로 한다. 힘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비폭력은 지배층에게 이용당하기만 할 뿐이다.

 

힘을 바탕으로 하는 비폭력, 이것이 역사 속에서 나타난 순간이 있었으니, 그것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인종차별 운동, 말콤 엑스의 운동, 간디의 운동 등등이다.

 

이들은 지배의 폭력에 맞서 비폭력의 저항으로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켜 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비폭력은 다른 세상이 가능함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다른 세상이 가능함을 인식하는 것은 비폭력의 힘을 모을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이러한 비폭력은 현실적으로 다른 세상을 만들어가게 된다.

 

1부에서 이러한 비폭력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2부나 3부에서는 폭력의 문제를 고찰하고 있다. 가장 큰 폭력인 전쟁, 이를 전면전과 게릴라전으로 나누고 있으며, 또 국가권력에 의한 폭력도 고찰하고 있다.

 

이러한 폭력에서 벗어나는 길은 개인주의에서 벗어나 상호신뢰로 뭉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결국 공포란 나만이 고립되어 있다는 생각, 또 나 이외의 사람들을 믿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깊숙히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테다. 하여 저자는 미디어도 비판하고 있다. 미디어들이 사건들을 계속 내보냄으로써 불안감을 조성하고, 이러한 불안감이 폭력에 대해서 관용적인 모습을 보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지배의 폭력은 두려움과 공포를 끊임없이 자극하여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다면, 저항의 폭력은 믿음과 사랑을 회복하여 함께 살아가야 함을 보여주는, 그래서 비폭력 직접행동을 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추구해야 할까. 그것은 명백하다. 비폭력 직접행동. 나만이 아닌 우리가 함께 하는, 서로가 서로를 믿는 그런 관계의 회복. 그것이 바로 폭력의 철학이다.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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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을 스마트하지 않게 쓴다.

 

이게 요즘 우리 아이들에게 딱 맞는 말이지 싶다.

 

하긴 어른들이라고 다를 것 같지는 않으니. 어른들도 스마트폰을 과연 스마트하게 사용하고 있을까 생각을 해보면, 글쎄 라는 답변이 나오게 된다.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기 위해서 만들어낸 기계가 인간을 옭죄게 하면 안되는데...

 

지금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면 사람이 실종되고 기계만 존재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연인끼리도 상대의 얼굴을 보지 않고 손바닥 안의 기계만을 보고 있는 현실과 약속을 잡을 때도 지속성이 없이 언제든지 약속을 하고 취소를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어서 약속이라는 말에서 책임이 사라져버리고 말았으며, 정보를 빠르게 검색할 수 있는 대신에 쓰레기 정보들이 넘쳐나게 되어 정보를 통합하는 능력이 상실되고 있으며, 세계 어느 곳과도 통화가 가능하게 되어 그리움이라든지, 신비감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사라져버리고 만 현실.

 

그렇다고 이러한 문명의 발전을 잘못된 것으로 무작정 거부만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반대로 무조건 열광만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

 

이런 스마트 세상에서 중심을 잡아야 한다. 어떻게 잡아야 할까?

 

아무리 기계문명이 발달해도 중심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인간 중심적으로 기계를 운용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내야 하지 않을까.

 

무작정 좋은 거다. 이게 발전이다 하지 말고, 인간의 삶에서 정말로 필요한가, 필요하지 않은가. 이것이 우리 인간의 삶에 어떤 작용을 할까 고민을 하고 사용하는 문화를 만들어가야 하지 않나.

 

민들레 86호에서는 이러한 디지털 시대(일명 스마트 시대)에 말을 걸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고.

 

학교에서 스마트 교육을 하겠다고 하는데, 과연 그것이 교육에서 반드시 필요한가 검토를 해봐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지구에서 가장 빠름, 빠름, 빠름을 추구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교육현장에까지 이 빠름을 추구하고자 한다고 하니... 과연 그것이 교육적일까 하는 의문을 가진다.

 

기계에 종속되지 않고, 기계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교육을 먼저 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처럼 아이들이 스마트폰 중독, 게임 중독에 접어들고 있는 이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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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힘 - 매혹적인 스토리텔링의 조건
이창용 외 지음 / 황금물고기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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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정의하는 말들은 많다. 사회적 인간이라든지, 정치적 인간이라든지, 놀이하는 인간이라든지, 또는 생각하는 인간이라든지...

 

이 중에서 언어적 인간이라는 말이 있다. 인간은 언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이고, 언어가 어쩌면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추측을 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언어 없이 인간이 존재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해보면 언어는 곧 인간이고, 인간은 곧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원시시대부터 언어를 사용하려고 했으며, 지금과 같은 고도의 문자가 없던 시대에는 그림을 통해서 또는 단순한 기호를 통해서 무언가를 표현하고 있지 않았던다.

 

이런 표현 욕구, 그것을 채워주는 것이 언어이고, 언어로 표현된 것이 바로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이야기는 우리 인간의 필수조건이라고 할만한다.

 

이야기하고 싶은 욕구가 얼마나 많은지, 아무 말 안하고 몇 시간, 며칠을 있어보면 안다. 입이 근질근질하다고 하지 않던가. 오죽했으면 스님들의 수행 중에 묵언수행이라는 것이 있겠는가.

 

그만큼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 널려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 삶에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런 이야기를 어떻게 만들면 더욱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이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이야기에 관한 책은 대부분 재미있다. 왜냐하면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재미있는 이야기에 대해 글을 썼는데, 재미가 없다면 그것은 잘못된 책이기 십상이다.

 

어떤 이야기가 재미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효과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을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추구한 내용을 책으로 정리해내었다고 할 수 있는 책이다.

 

그래서 이야기의 힘에 대한 예들이 적절하게 나타나 있어서 아, 이렇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단지 우리가 이야기라고 알고 있는 소설이나 영화, 만화만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이야기, 즉 스토리텔링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삶에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지를 광고를 통해서, 또는 상품을 통해서 실험한 결과를 이야기해주고 있으며, 이런 이야기가 정치에서도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오바마의 예를 들어서 보여주고 있다.

 

결국 이야기를 자신의 삶에 체현한 사람이 좀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는 남들에게도 매력적인 사람으로 자신을 내보일 수 있으며, 그러므로 자신의 삶에서도 더욱 자신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이와 반대로 아주 어린아이도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도 보여주고 있으므로 이야기는 결국 우리 인간의 삶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해야 한다.

 

이렇듯 중요한 이야기를 우리는 너무 간과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그렇다면 이제는 자신을 내보일 때 겉모습에만 신경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이야기로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삶의 필수 조건인 이야기, 그 힘에 대한 책.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

 

읽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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