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문학의 이해 - 작은책 7
홍기삼 / 민족사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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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책은 작다. 작은 책이라 들고 다니기 편하다. 가격도 저렴하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한 노력을 한 책이다.

 

두껍고 무거운 책, 종이질이 너무도 좋아 오히려 눈이 피곤한 책. 그러한 책들은 사람들이 가까이 하기에는 어렵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사람들이 가까이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벗어나 있어 좋다.

 

다음 이 책은 불교 교리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 않는다. 그냥 불교와 문학의 관계를 말할 뿐이다. 불교 경전 자체가 이미 문학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점을 작은 책에서 나름대로 연구하고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서양에서도 불교에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 특히나 독일에서는 불교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데... 바그너가 불교에 심취했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는 점.

 

독일 사람들은 어려운 일을 많이 겪었기에, 그리고 철학이 발전한 나라였기에 불교에도 관심을 지니고, 어느 정도 불교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렇듯 불교에 대해서 종교보다는 문학을 중심에 두고, 문학에 나타난 불교의 모습이라든지, 불교 경전이 지니는 문학성에 대해서 살펴본 작은 책이다.

 

여기에 저자가 어디엔가 발표했음직한 짧은 글들도 수록되어 있는데, 이 글들 역시 불교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글들이다.

 

뒤에 수록된 이 글들은 불교 관련 수필이라고 할 만하다. 수필이 저자의 경험이나 생각을 솔직하게 드러내주고 있기에 불교나 문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 책의 뒷부분은 쉽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불교를 이야기하고 있는 자리이니, 중언부언할 것 없이 여기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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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날.

 텔레비전에서 특집으로 방영해주는 영화 몇 편을 보았다.

 영화관에 가서 보아야 했으나 놓친 영화 몇 편과 이미 보았 음에도 또 보고 싶었던 영화 몇 편.

 

 그 중에 가슴을 울리는 영화는 역시 "7번 방의 선물"

 

 이 영화는 다시 보아도 천만 명이 넘는 관객이 볼 만한 영화였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내용의 사실성이야 차치하고서라도 영화 내용만으로 따라가다보면 자연스레 눈물샘에서 눈물이 물 흐르듯 흘러내릴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다시 한 번 재판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

 

 과연 재판이 공정한가? 인간이 인간을 재판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그럼에도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재판이 필요하다면 그 재판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일까?

 

한 사람의 몸을 구속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까지 재판은 이루어져 있다. 몸을 구속하는 것이야 잘못되었다는 판결이 나면 풀어주고, 그 동안의 고생을 보상해줄 수도 있겠으나, 생명을 빼앗는 행위는 나중에 잘못되었다고 판명이 되더라도 되돌릴 수 없다.

 

불가역성. 그것이 바로 사형제도의 문제이고, 재판의 무서운 점이다. 우리나라 아직도 사형제도가 존속되고 있는 나라인데... 15년이 넘게 사형 집행을 하지 않아서 사실상 사형폐지국이라고 하나, 법이 사형을 유지하고 있기에, 대통령이 사형집행에 서명을 하는 순간, 15년간 지켜온 사형 미집행국이라는 이름은 그대로 사라져버리고 만다.

 

영화 "7번 방의 선물". 되돌릴 수 없는 결과...

 

이 영화에도 변호사가 등장한다. 국선변호사. 돈이 없거나 변호사를 구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래도 자신을 변호할 수 있게 나라에서 선임해준 변호사. 대개는 성의 없이 변론을 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국선 변호사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니...

 

오히려 일부러 국선 변호사가 되기를 자청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니까... 왜냐하면 변호사란 힘없고 억울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사명감을 지닌 사람도 꽤 있으니까.

 

그럼에도 이 영화의 국선 변호사는 정말로 지지리도 자기 역할을 하지 않으려 애쓴다. 마지못해 맡았을 뿐이라는 점이 영화에서 노골적으로 보이고, 또한 권력에 밀착해 있음이 보이고, 그리고 피의자의 혐의사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최근에 나온 영화 "변호인"과 대조되는 모습을 보이는 변호사이다. 그래서 더 화가 난다. 이런 변호사가 실제로는 없겠지만, 영화에서처럼 존재하는 변호사가 있다면, 우리는 영화 "변호인"의 변호사와 영화 "7번 방의 선물"의 변호사가 공존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 어떤 변호사가 우리의 권익을 위해 변론을 해줄 것인지 어떻게 아나? 변호사들은 도대체 어떻게 자기들의 위치를 자리매김 했을까? 이런 의문이 든다.

 

하여 설날에 본 영화때문에... 예전에 읽었던 책이 떠올랐다.

 

박원순이 쓴 "역사가 이들을 무죄로 하리라"-두레

 

부제가 '한국인권변론사'이고 더 작은 제목은 '가시밭길을 선택한 변호사들'이다.

 

영화 "변호인"과 "7번 방의 선물"을 함께 본 사람이라면 그 영화 속의 변호사들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힘없고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 험난한 길을 자처했던 변호사들이 이야기니까.

 

이들로 인해서 억울한 사람들이 조금은 줄었을테니까.

 

가장 좋은 사회는 변호사가 없는, 즉 재판이 필요없는 사회이겠지만, 그런 사회가 되기 전에 우선 제대로 돈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좋은' 변호사들이 넘치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사람이 사람을 재판할 때 두려움을 지니고 재판을 할 수 있는, 그래서 정말 작은 것 하나하나에도 관심을 가지고 혹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없도록 신중에 신중을 기해, 만에 하나라도 실수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재판. 그것을 돕는 변호사, 그런 사람들로 충만한 우리 사회였으면 좋겠다.

 

지금도 재판은 넘치고 넘쳐 재판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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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퀴드 러브 - 사랑하지 않을 권리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권태우 &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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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그림 사진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같은 사람의 사진을 모아 커다란 하나의 사람을 만드는 사진.

작은 사진 하나하나는 동일한 인물인데, 이렇게 각자 다른 인물들이 여럿이 모여 동일한 하나의 인물을 만든다.

 

과학을 잘 모르지만 부분이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는 이론을 아마 이런 데 적용하지 않았나 싶다.

 

바우만의 "리퀴드 러브"-아마도 유동하는 사랑 정도로 해석이 될 이 책은 이렇게 이런 그림 사진과 비슷하게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 속한 글들은 모두 하나하나의 독립된 글이다. 그냥 단편적인 글이다. 그러나

<사진출처 :http://news.naver.com/main/imagemontage/index.nhn?gid=966192#967384>

 

읽어보면 전체 글과 하나가 된다. 즉 부분들과 전체가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엄밀히 말해서 사회학 이론서라고 하기도 그렇고, 철학책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수필집이라고 하기도 그렇다. 형식을 파괴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한 책이다.

 

하지만 전해주는 말은 분명하다. 어느 한 부분을 읽어도 전체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똑같은 내용이 아니다. 다 다른 내용이다. 이런 내용들이 모여 하나의 글을 이루고 바우만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것은 하나다. 지금 사회는 일회성이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이는 소비자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담을 쌓고 있으며, 이 담으로 인해 너와 나를 구분하고, 공동체는 파괴되었으며, 일명 쓰레기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양산하고 있다.

 

지금이 그런 사회다. 여기서 벗어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이런 이야기, 바우만의 저서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는 이야기다.

 

만남이 얼마나 일회서인가는 성적인 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지속적인,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라는 말은 우스워지는 시대가 되었고, 사랑도 인스턴트 사랑, 언제든지 만나고,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는 그런 시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 문화를 우리가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인터넷 만남. 또는 연애를 쇼핑처럼 하는 시대.

 

인터넷이 이렇게 우리 사회를 변화시켰다면 휴대폰은 가족간의 모습도 변화시켰다. 하여 우리는 함께 살면서도 함께 살지 않는다. 또한 늘 만나면서도 늘 만나지 않는다. 접속이 가능한 만큼 접속을 끊는 것도 늘 가능한 사회.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사회가 되었다.

 

이것은 정착할 수 없는 유동적인 근대의 모습이고, 지속성이라는 것은 과거에만 속하는 일이 되었다.

 

우리의 사랑조차도 그러하니 다른 것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래도 우리는 우리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칸트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데, 지구는 둥글다. 우리는 이 둥근 지구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둥근 지구에서 살아간다는 얘기는 누구에게서 멀어진다는 얘기는 곧 누구에게 가까워진다는 얘기가 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차피 이 지구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지구에서 함께 살아갈 방법을 고민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점을 이야기 해주고 있다. 인간은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는 사실. 우리가 쓰레기를 양산할수록, 그 쓰레기로 인해 우리의 삶이 더욱 힘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 쓰레기란 결국 우리 자신의 다른 모습일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하는 순간.

 

우리가 우리에게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윤리가 된다. 윤리를 넘어 이제는 우리의 생존이 된다.

 

그리고 지금 시대는 우리의 생존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할 때이다. 이 점에서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언제라도 소통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언제라도 소통을 멈출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 그것을 인식하고...

 

소통을 할 수 있는 방법.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 그것을 고민해야 한다고 한다. 그것을 유동하는 사랑이 아니라, 이제는 함께 할 수 있는 사랑을 찾아야 하는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는 이 책의 한 부분에서 자신이 원하는 사회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그럿을 코뮤니타스라고 하는데... 우리에게는 아마도 공동체 정도로 해석이 되지 않을까 한다. 우리 역시 이러한 공동체를 추구하고 있지 않은가.

 

  코뮤니타스(그리고 간접적으로는 소시에타스도 마찬가지지만)의 생존과 번영은 인간의 상상력과 발명심 그리고 상투적인 일상성을 깨부수고 시도되지 않은 방법들을 시도해보려는 용기에 의존한다. 다시 말해 리스크를 안고 살아갈 수 있는, 결과에 대한 책임을 떠안을 수있는 인간의 능력에 의존한다. 바로 그러한 능력들이 '도덕 경제', 즉 서로 돕고 보살피며, 타자를 위해 살고, 상호 헌신의 조직을 짜내며, 인간들 간의 유대를 단단히 하고 수리하며, 권리를 의무로 해석하고 모두의 운명과 행복에 대한 책임을 함께 나누는 것-즉 뚫린 구멍을 막고, 영원히 끝나지 않는 구조화 작업이 방출한 홍수를 막기 위해 필요불가결한 이런 것들을 지탱해준다. (178쪽)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경제의 모습이고, 공동체의 모습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지 이 글에 비추어 판단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기존에 읽은 바우만의 책과 겹치는 내용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그 겹침은 앞에서 본 사진처럼 각자 다른 것이 모여 또 하나의 같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부분이 모여 전체가 되는데.. 부분 역시 부분으로써 제 역할을 다한다.

 

이것은 우리네 인간들도, 사회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모여 사회를 이루지만, 이 사람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다른 사람들이 사회를 만들어낸다.

 

이 책은 바로 앞의 그림과 같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삶도. 그러니 남의 삶을 우리와 똑같이 만들려는 자세를 지녀서는 안된다. 다름이 바로 사회를 이루는 기본요소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이 책이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앞의 그림 파일과 같은 것들이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사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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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빛 모서리 문학과지성 시인선 130
김중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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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에 나온 시들을 읽으며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남들이 말하는 격동의 80년대가 다시 살아난 듯한 느낌 때문이라고 할까?

 

치열하게 그 시대를 보냈다고 할 수도 없는데, 어떻게든 그 시대에 몸을 담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그 시대의 자장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리라.

 

때론 혁명을 꿈꾸고, 때론 좌절하고, 때론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때로는 수동적으로 방관하고, 때로는 벗어나고 싶어 달아나기도 하고, 때로는 그대로 그럴 수 없지 하고 그 자리로 돌아오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대로 그 시대가 행복했다고 한다. 적어도 꿈은 꿀 수 있지 않았느냐고... 무언가를 만들어가거나 선택을 할 수는 있지 않았느냐고...

 

지금은 그럴 수도 없다. 우리는 선택을 하는 모양을 취하고 있지만 사실 선택을 당하고 있으며, 꿈을 꿀 수 있다고 하지만 그 꿈조차도 한계지워지고 말았으니...

 

 

그럼에도 이 시집은 편치 않다. 80년대의 그 암울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집이 93년에 발간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시인의 나이를 보건대, 시인은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격동의 80년대를 온몸으로 통과한 사람일테고, 그러한 몸부림이 시로 나타나고, 이 시집에 시로 실렸기 때문이다.

 

93년에 나온 시집임에도 불구하고 시집의 서지를 보면 2011년에 13쇄가 발간되었다. 13쇄가 발간되었단 얘기는 꾸준히 시집이 팔리고 있다는 얘기인데... 그 얘기를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역사가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반복되고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리라.

 

이 시집에서 표현되고 있는 내용들이 단지 과거에만 존재하지 않고 20년이 흐른 지금에도 존재하고 있다는 얘기... 그래서 시를 읽으며 시대를 파악하고, 자신을 위로하기도 하리라.

 

반복되는 역사, 그것은 처음에는 비극이지만, 다음에는 희극이라고 했는데... 아니다, 역사는 반복하더라도 희극이 되지 않는다. 희극이었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미래에 그 당시를 평가할 때나 할 수 있는 말이고, 반복되는 당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똑같이 비극이다.

 

그럴 때 이탈이 필요하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같은 자리만 맴돌 수는 없지 않은가. 궤도에서 벗어나 궤도를 바라볼 수 있는 힘, 그것이 필요하다.

 

이 시집은 그렇게 이탈에서 시작한다. 첫시의 제목은 '이탈한 자가 문득'이다.

 

이탈한 자가 문득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김중식, 황금빛 모서리, 문학과지성사. 2011년 초판 13쇄. 11쪽

 

역사의 궤도가 일정하게 반복하면 문제가 되지만, 그렇다고 그 궤도를 수정하기는 힘들다. 그 궤도를 수정하는 사람은 궤도 속의 사람이 아니라 궤도 밖으로 이탈한 사람이다. 그런 이탈이 있기에 수정이 가능하다. 그렇다. 진정 자유로운 사람은 궤도에서 벗어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역사를 만들어간다. 그런 사람이 없다면 역사는 그냥 궤도를 도는 반복을 할 뿐이다.

 

그렇다면 자유롭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경계에 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쪽에 포함되는 것이 아닌 경계에서 이쪽과 저쪽을 함께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계인,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기에 이탈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는 중심을 차지하고 있지는 않지만, 어디로도 갈 수가 있기에 늘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다. 반대로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기에 너무도 어려운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런 경계인의 삶을 그는 '갈대3'에서 노래하고 있다.

 

갈대3

 

  바다가 불러도 바다에 간 적 없고 바다를 사랑한다면서도 깨어지는 파도가 되기를 두려워한 놈이외다 山(산)을 사랑한다면서도 떨어지는 잎새가 되기를 두려워하였으므로 山이 움직여도 山에 들어간 적 없는 놈이외다 이런 놈이외다 붉은 山 푸른 바다 사이에서 고개 숙인 채 오도 가도 못하는 의지, 박약한

 

김중식, 황금빛 모서리, 문학과지성사. 2011년 초판 13쇄. 79쪽

 

그는 의지박약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어느 편에도 속하기를 거부한 강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해석을 할 수 있다.  강한 두 편이 있을 때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어느 편이든 자신의 편을 정해 그곳에 몸을 담그는 일, 그것이 더 쉬운 일이다.

 

이럴 때 어느 쪽으로도 가지 못하고 경계에서 이쪽 저쪽을 다 볼 수 있는 것, 이쪽 저쪽에서 다 비난을 받는 것, 결코 의지 박약이 아니다. 그것은 궤도에 들기를 거부한, 반복된 삶, 시류에 휩쓸리는 삶을 거부한 강한 의지이다.

 

2000년대가 이미 10년이 지나간 지금, 80년대 그 치열했던 삶들이 이 시집에 녹아 있음에도 이 시집이 계속 읽히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아직도 반복되는 삶을 살기 때문. 우리가 아직도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이 시집을 읽으며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가 그것이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이 시집에서 희망을 찾는다. 그것은 바로 궤도에서 이탈할 자유, 경계에서 바라볼 의지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날아오르길 기다리는 그런 모습. 그것을 이 시집에서 발견한다. 시집은 제목은 곧 그 시집의 얼굴이자 몸통이자 내용이다. 제목이 된 시를 보자.

 

  황금빛 모서리

 

뼛속을 긁어낸 의지의 대가로

석양 무렵 황금빛 모서리를 갖는 새는

몸을 쳐서 솟구칠 때마다

금부스러기를 지상에 떨어뜨린다

 

날개가 가자는 대로 먼 곳까지 갔다가

석양의 흑점에서 클로즈업으로 날아온 새가

기진맥진

빈 몸의 무게조차 가누지 못해도

 

아직 떠나지 않은 새의

피안을 노려보는 눈에는

발 밑의 벌레를 놓치는 원시의 배고픔쯤

헛것이 보여도

현란한 비상만 보인다.

 

김중식, 황금빛 모서리, 문학과지성사. 2011년 초판 13쇄. 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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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빈곤 - 노동, 소비주의 그리고 뉴퓨어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수영 옮김 / 천지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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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방대한 저작활동을 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하긴 그가 80이 넘은 노학자임을 감안하고, 그동안 사회문제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해왔다면 이 정도 책들은 내 수 있겠지.

 

왜 우리나라에서 지금 바우만이 인기를 얻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한 학자의 책이 이렇듯 거의 번역이 되는 경우는 정말로 많이 알려진 학자들 외에는 별로 없을텐데... 폴란드계 유대인인 영국의 교수 책이 이렇게나 많이 번역이 되다니...

 

그것은 아마도 바우만의 책들이 현대 사회에 대한 분석을 적확하게 해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도 신자유주의 시대라는 지금의 현실을 말이다.

 

그의 책을 읽다보면 그의 다방면에 걸친 지식에도 놀라게 되지만, 우리나라의 현실에 그의 분석을 가져다 놓아도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책은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를 다른 말로 하면 세계화시대, 지구화시대라고 하니까 한 나라의 특수성을 지니기가 상당히 힘든 시대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자본은 지구적으로 활동하고 문제는 지역적으로 해결하게 한다고 그가 말하듯이 아직도 각 나라들은 자신들만의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분석이 우리나라에도 적용이 될 수 있는 것은 그의 분석은 지구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는 현대 자본의 모습에 천착하고 있기 때문에... 지구적으로 활동하는 자본이 우리나라라고 해서 다르게 행동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의 현대 사회에 대한 분석이 우리나라에도 타당하게 다가온다고 할 수 있다.

 

제목이 "새로운 빈곤"이다. 빈곤이야말로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해결이 된 적이 없는 문제이겠지만,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도 빈곤은 늘 존재했는데... 그가 새로운 빈곤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는 이 빈곤에 접근하는 우리의 모습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새로운 빈곤"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 그는 자본주의 역사를, 아니 근대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시작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만족하고 살 때, 없으면 없는 대로 더 많은 것을 추구하지 않던 시대에서 더 많은 노동이 필요해진 근대... 그 때 등장한 노동윤리부터 시작을 한다.

 

더 일하지 않으려는 사람, 자신의 빈곤에 만족하면서 살려고 하는 사람, 이들을 노동력으로 전환시킬 필요에서 노동의 윤리가 나온다. 이는 빈곤한 사람들을 더 살기 힘들게 함으로써 어쩔 수 없이 노동의 현장으로 나오게 만드는 일에서 시작한다.

 

이렇듯 노동력이 필요한 시대에는 잠재적인 노동력도 꾸준히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사회복지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고 실업자들이 자신들의 노동력을 유지하고 있어야 다음에 노동력을 활용하기 편함을 깨달은 자본은 복지에 투자하게 된다.

 

그래서 사회복지는 이루어지게 되고, 절대적인 빈곤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산업의 발달은 곧 노동력을 잉여로 만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생산 사회에서 소비 사회로 전환이 이루어진다. 소비 사회에서는 소비하지 않는 사람들은 쓸모가 없는 사람들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노동력은 더이상 많이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노동력은 계속 줄어들어야 한다.

 

이런 상태에서 실업자들에게 투자하는 일은 낭비로 치부된다. 하여 사회복지를 중시하는 일은 자본의 발목을 잡은 일이 된다.

 

실업자는 재활용이 가능한, 순환가능한 존재였다면, 이제 소비 사회에서는 쓸모 없어진 노동력은 잉여, 즉 쓰레기가 된다. 폐기물이 된다. 이런 폐기물은 여기에서 사라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완전히 없어지거나 적어도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현대의 모습이다. 이제 빈곤은 재활용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한 번 내쳐지면 보이지 않거나 사라져야 할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복지란 이름은 사라지게 된다. 하여 이들은 쓰레기 취급을 받게 된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빈곤"이다.

 

새로운 빈곤 계층을 최하위계급이라고 하여 이 계급은 사회의 불안을 조성하는 존재로 취급이 된다. 이들은 철저히 격리되어야 하며 우리와 함께 어울릴 수 없는 집단이 된다. 그리고 이들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는 개인이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회복지는 이미 사라지고 있으므로.

 

이 책은 이런 점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타당하다. 바우만의 다른 책에서도 이런 개념들은 여러 번 나왔기에 친숙한 개념으로 그의 사상을 이해할 수가 있다.

 

마찬가지로 책의 마지막 장에서 바우만은 대안을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다른 학자들이나 정치인들은 이것을 비현실적이라고 무시하겠지만 이라는 단서를 달고 있지만... 그것은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비현실적이라고 비판받고 있는(우리나라는 비판 정도가 아니라 무시라고 해야 한다) 기본소득에 관한 논의다.

 

그는 이것을 '소득 수급권과 소득을 벌어들이는 능력의 분리'(219쪽)라고 하는데... 이런 생각이 사회에 퍼지는 순간, 또는 우리들이 지니고 실현하기 위해서 운동을 하는 순간 우리는 인간에 대한 윤리를 회복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진다는 윤리의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재미삼아 보여주는 '나만 아니면 돼'가 아니라 '너도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돼'가 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것이 기본 소득을 이야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에게 '소득 수급권'을 보장해 준다면, 그는 불안에서 어느 정도 해방이 될 수 있고, 불안에서 해방이 된다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출발점에는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빈곤" 앞으로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기준이 될만한 책이다. 바우만의 말대로 우리는 "교차로"에 서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하는가?

 

선택은 우리가 해야 한다. 자본의 힘에 떠밀려서 가면 안된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을 말하고자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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