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관집 이층 창비시선 370
신경림 지음 / 창비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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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신경림 시인에게도 노시인이라는 호칭을 붙이게 되었다. 이름만으로도 믿음을 주는 몇 안되는 시인이라고 생각하는데...

 

그의 시집이 나오면 기쁜 마음으로 읽고는 했는데...어느덧 세월이 이리도 흘러 시인도 80이라는 나이가 되었다.

 

그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시인도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기도 했겠지. 이번 시집은 과거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제는 서서히 과거를 돌아보며 자신이 살아온 삶을 반추할 때가 되었다는 것인가. 시집의 뒤에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지금도 꿈을 꾸고 있다고 했는데... 그 꿈이 과거의 일을 되살리기도 한다고, 그리고 그 꿈이 바로 자신의 시이기도 하다고...

 

그렇다. 시인의 삶 전체가 바로 시가 된다. 우리네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로 자신이 살아온 과정을 글로 쓰면 대하소설이 된다고 하는데... 시인은 자신의 삶을 시로 표현하고 있다.

 

삶이 시가 되는 순간. 그것은 억지로 꾸미려고 해서는 이룰 수 없는 경지다. 정말로 대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젊었을 때 쓰는 글보다는 나이가 들어서 쓴 글이 훨씬 이해하기 쉽듯이 시인의 시는 젊은 시절에도 그다지 난해하지 않았지만, 이번 시집에 실린 시들은 더 이해하기 쉽다. 그냥 술술 읽힌다. 그리고 마음에, 머리에 콕 들어와 박힌다.

 

시집 뒷표지에 있는 박성우 시인의 글에서 '흑백으로 인화해서 보여준다'는 말이 나오는데, 시인이 이 시집을 정확히 파악한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인은 시인을 알아보나? 아니 시인이 시를 제대로 읽었다고 해야겠지.

 

이 시집의 전체적인 느낌은 제목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흑백사진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사진관집 이층이라는 제목에서 시들을 사진을 보듯이 인화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요즘 사진관이 점점 사라지는 현실에서는 시인이 말하는 사진관은 예전의 사진관일테고.. 그렇다면 사진은 화려한 칼라사진이 아닌 흑백사진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분위기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시가 나는 '남포 갈매기'라고 생각한다. 북에 두고온 가족을 그리워하는 사진사가 시인의 가족을 북한의 복장을 입혀 남포항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주었는데, 어느날 사진사는 사라지고, 그와 비슷한 사진을 고향의 술집에서 발견한다는 이야기를 시로 표현한 시.

 

빛바랜 한 장의 사진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는 시이기도 하고, 이런 흑백사진의 아련한 느낌을 주는듯한 시는 도처에서 나오는데... 우크라이나를 여행하고 나서 쓴 우크라이나 관련시들도 이런 느낌을 준다.

 

여기에 무엇보다도 이 시집의 첫 시...'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담고 있다.

 

이 시를 읽으면서 이청준의 소설"눈길"이 겹쳐졌는데... 눈길 속에서 아들이 멀어져 가는 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보고 있던 어머니의 그런 장면이, 이 시에서 어머니가 평생동안 걸어다닌 길에서 그리고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가는 길에서 어떤 슬픔 같은 것, 이제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그런 것들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고나 할까.

 

어렵지 않고 담담하게 적어내려간 시들인데... 나도 나이가 먹는가, 그 시들이 가슴에 콕콕 박히고 있다.

 

늙는다는 것, 많은 것을 버린다는 것이고, 많은 것을 버린다는 것은 그만큼 가벼워진다는 얘기인데... 가벼워진다는 것, 그것은 치장하지 않는 것이다. 담백한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

 

이런 시인의 눈을 우리 모두가 가져야하겠지. 나이들어서 더 욕심을 부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말로 그들은 이런 시를 읽으며 늙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나이 들어 눈 어두우니 별이 보인다

반짝반짝 서울 하늘에 별이 보인다

 

하늘이 별이 보이니

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고

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니

사람들 사아에 별이 보인다

 

반짝반짝 탁한 하늘에 별이 보인다

눈 밝아 보이지 않던 별이 보인다

 

신경림, 사진관집 이층. 창비. 2014. 초판 3쇄. 47쪽

 

이런 눈을 지닌 사람은 이렇게 살 수밖에 없다. 단지 나이 먹기에 이런 눈을 지니는 것이 아닌, 이런 삶을 살아왔기에 이런 눈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참 좋다. 마음이 따스해진다. 이게 바로 시를 읽는 재미 아니겠는가.

 

     쓰러진 것들을 위하여

 

아무래도 나는 늘 음지에 서 있었던 것 같다

개선하는 씨름꾼을 따라가며 환호하는 대신

패배한 장사 편에 서서 주먹을 부르쥐었고

몇십만이 모이는 유세장을 마다하고

코흘리개만 모아놓은 초라한 후보 앞에서 갈채했다

그래서 나는 늘 슬프고 안타깝고 아쉬웠지만

나를 불행하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나는 그러면서 행복했고

사람 사는 게 다 그러려니 여겼다

 

쓰러진 것들의 조각난 꿈을 이어주는

큰 손이 있다고 결코 믿지 않으면서도

 

신경림, 사진관집 이층. 창비. 2014. 초판 3쇄. 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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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 문학과지성 시인선 287
박주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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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늘 만나는 대상인데, 그 대상을 자신만의 관점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그냥 지나치기 쉬운 것들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는 일.

 

이 시집을 보면 여행시편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시인이 지나쳤던 장소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그 장소에서 보이지 않는 자신만의 무언가를 발견하고 표현한다. 그런데 그것이 결코 밝지 않다.

 

시집에서 느껴지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둡다. 겨울, 저녁, 밤, 그림자, 적막 등등 이런 시어들을 통해 전체적인 분위기가 형성된다.

 

2000년대에 나온 시집인데... 격동의 IMF시대를 겪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현실에서 나온 시집임에도 전체적으로 우울한데... 어디론가 여행을 갔지만, 마음 속의 우울이 해소가 되지 않은 상태. 그런 상태를 노래하고 있는 듯하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다. 여행지의 풍경에, 내가 만나는 대상들에게서 기쁨을 느끼기도 하지만, 무언가 해결되지 않은 슬픔. 무언가 어려움이 지속되고 있다는 느낌... 그런 느낌들을 받는데...이 시집의 시들은 대체로 그러하다. 

 

제목만 보아도 그렇다. "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

 

카프카라는 사람 자체가 어둡지 않은가. 그의 소설들도 어둡지 않은가.

 

제목이 된 시를 보자.

 

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

 

그 무렵 잠에서 나 배웠네

기적이 일어나기에는 너무 게을렀고 복록을 찾기엔

너무 함부로 살았다는 것을, 잠의 해안에 배 한 척

슬그머니 풀려나 때때로 부두를 드나들 때에

쓸쓸한 노래들이 한적하게 귀를 적시기도 했었지만

내게 병은 높은 것 때문이 아니라 언제나 낮은 것 때문이었다네

유리창에 나무 그림자가 물들고 노을이 쓰르라미 소리로

삶을 열고자 할 때 물이 붙잡혀 있는 것을 보네

새들이 지저귀어 나무 전체가 소리를 내고

덮거나 씻어내려 하는 것들이 못 본 척 지나갈 때

어느 한 고개에 와 있다는 생각을 하네

나 다시 잠이 드네, 잠의 벌판에는 말이 있고

나는 말의 등에 올라타 쏜살같이 초원을 달리네

전율을 가르며 갈기털이 다 빠져나가도록

폐와 팔다리가 모두 떨어져나가

마침내 말도 없고 나도 없어져 정적만 남을 때까지

 

박주택. 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 문학과지성사. 2007년 2쇄. 54쪽

 

인생. 잘살았다고도 할 수 없고, 못 살았다고도 할 수 없는 상태. 그렇다고 출세를 지향한 삶을 살지도 않았고, 오로지 낮은 것에 더 관심을 보이는 삶을 살았는데...

 

어느 순간 자신의 삶이 정체되어 있다고 느껴질 때,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시의 화자는 잠을 잔다. 잠 속에서 그는 자신이 사라질 때까지 달린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에 매여 있는지...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벗어날 수 없는 현실. 카프카는 그렇게 자신의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했지만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선택한 자신을 매어버린 것들에서 달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작품에 매진하는 것이었다. 그는 작품을 통해서 현실의 굴레에서 조금이나마 달아날 수가 있었다.

 

가끔은 이렇게 모든 것을 잊고 싶을 때가 있다. 세상이 더 지저분해진다고 느낄 때 그런 환멸을 피해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지만 여행에서도 세상의 어둠 끝을 보고마는 그런 때... 정말... 참을 수 없을 때 이 시에서처럼 모든 것이 없어지고 '정적만 남을 때까지' 달리고 싶어진다.

 

그래서 절대 고요만을 남기고 싶다. 폭발을 예비한 고요. 우주의 빅뱅 직전이 이랬을까 싶을 정도의 고요. 그 고요는 그냥 온 것이 아니라 현실의 절망 속에서 배태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정적은 고요는 무심함이 아니다. 포기가 아니다. 그것은 폭발을 예비하고 있다. 우주의 빅뱅처럼.

 

고요

 

  여기 고요가 있다 고요는 분노의 무덤이다 보라, 연못의 둘레에 고요가 있다 저 고요는 오래되지 않은 것이어서 명상을 가장하지만 성난 황소의 뿔처럼 치명적이다 고요가 고요를 밀어내고 고요가 고요를 갈아엎는다 고요를 보라, 팽팽히 당겨진 시위에 걸려 있는 화살같이 독이 차 있다

 

  무엇이 이토록 굴욕을 고요로 만들었는가? 왜 고요는 핏물을 입 안 가득 물고 있는가? 노란 제 몸에다 왜 창백한 유서만을 새기며 싸늘히 웃음 짓고 있는가?

 

박주택. 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 문학과지성사. 2007년 2쇄. 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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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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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아닌가? 이 말은 텔레비전에서 심심치 않게 나오는 말이기도 하다. 주로 일본인들이 망언을 했을 때 우리가 하는 말로.

 

그러나 이 말은 다른 민족을 향해서 하기보다는 자기 민족을 향해서 해야 한다. 역사를 기억하는 일은 그 민족의 행복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다른 민족과 얽힌 문제라고 하더라도 역사를 기억하자는 말은 그 민족이 그 민족을 향해서 행해야만 한다.

 

우리의 예를 들어보면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점령했고,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일본 지배층이 인정을 안 한다. 이 때 우리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는 말로 경고를 한다. 그 경고는 유효하고 필요하다. 그렇다고 이렇게 경고만 해서 되는가? 안 된다. 이 경고를 우리에게도 향해야 한다.

 

우리는 식민지배를 당한 뼈아픈 경험을 안고 있다. 어떻게 그렇게 식민지배를 당하게 되었는지 철저하게 공부해야 한다. 그리고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역사를 반복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가해 민족에게 너희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잊지 말라고 해야만 하지만, 피해 민족도 그들이 겪었던 일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그들이 역사를 잊었을 때 그들은 또다시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홍구의"유신"을 읽으며 일본 지배층에게 하는 이 말을 바로 우리에게 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한 해가 지났다. 한홍구가 온몸으로 유신에 대한 글을 쓴 지가. 그리고 역사는 반복(?)되었다. 이 책의 논리대로 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유신의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다.

 

현 대통령에게 유신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유신에 대한 명확한 인식은 요구할 수 있고, 정확한 역사 인식 속에서 과거를 확실하게 청산하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요구할 수 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무엇하러 역사를 공부하겠는가?

 

하여 역사를 공부한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역사적 진실을 알리는 일을 적극적으로 해야 하고, 사람들이역사를 잊지 않고,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어 현재를 바르게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

 

오죽했으면 태사공 사마천이 자신의 역사서에 자객열전이라든지, 또는 간신들의 이야기까지 집어넣었겠는가. 타산지석이라고 역사에서는 배우지 못할 일이 없음을 이미 먼 옛날 역사가들이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 한국 현대사를 공부한 사람들, 또 지식인이라는 사람들, 그들은 과연 역사를 기억하고,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무슨 일을 했는가? 이 책은 그런 질문을 또 하게 만든다.

 

읽어가면서 너무도 가슴이 먹먹해져서, 더 읽고 싶지 않아지는 책이기도 했는데... 이미 한겨레 신문에 연재가 된 글이고, 가끔은 읽어본 글이기도 하지만, 책으로 묶여 나오고, 유신에 관한 역사를 이어서 주욱 읽으려니 마음이 너무도 무겁다.

 

이 책에 나오는 사건들만 살펴보자. 유신시대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는지.

 

국회의원의 일정비율을 대통령이 임명(소위 유정회), 김대중 납치사건.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재건위 사건.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 장준하 의문사. 동일방직 인분 사건. 반도상사 노동조합과 중앙정보부. 도시산업선교회. 자유언론실천선언.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건. 무등산 타잔. 베트남 파병. 기지촌. 통일벼. 원자력발전. 중학교 입시폐지와 고교평준화. YH사건. 남민전 사건. 김형욱 실종 사건. 부마항쟁 등등

 

이게 1972년부터 1979년에 일어난 우리 역사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이 책은 유신에 대해서, 유신시대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서, 그러나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또는 잘못 알고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현대사 전공자답게 구체적인 자료들을 동원해서 알려주고 있다.

 

여기에 글쓴이인 저자의 감정까지도 실려있어, 객관적인 역사 서술책이라고 하기보다는 동시대를 살았던 역사가가 자신이 체험했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서 온몸으로 쓴 책이라고 하는 편이 더 좋겠단 생각이 드는 책이다.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그것을 다른 민족에게만 이야기하지 말고, 우리 자신에게 이야기하자고.. 정말 우리는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가?

 

'겨울공화국'이라고 불렸던 유신시대를 기억하고 있는가? 그 때 죽어간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는가?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똥물을 뒤집어쓴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는가? 파업을 했다는 이유로 온갖 탄압을 받았던 사람들... 그들의 그 투쟁에 힘입어 민주노조가 건설되었음을 기억하고 있는가?

 

유신시대... 글쓴이는 이 유신을 쿠테타라고 부른다. 한 사람이 두 번이나 쿠테타를 일으켰는데... 그 역사 사건을 단죄하지 못했기에 또 다른 쿠테타가 일어나(12.12사태)이 되었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이런 역사를 통해서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은 우리가 먹고 사는 일에 침윤되어서 다시 과거로 회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한다. 아마 글쓴이는 요즘 한국현대사 교과서 문제를 바라보면서 참담한 심경이 되었을 것이다.

 

한국현대사에서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유신시대에 대해서도 이렇게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둥의 판단유보 또는 그래도 그 시절이 있었기에 우리가 먹고 살 수 있지 않았느냐는 반론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 유신시대보다 조금 먼 일제시대에 대해서 온갖 왜곡이 일어나고 있는 현실에서 정말 우리는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래서 글쓴이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이 책을 썼을 터인데... 이렇게 책을 쓴 이유는 우리가 역사를 잊어서는 안되기 때문일텐데...

 

우리 다시 한 번 기억하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 

 

우리 역사를 기억하자.

적어도 안 좋은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꼭 기억하자.

우리가 어떤 세상을 겪어왔는지...

그 때 우리는 어떤 꿈을 꾸었는지...

그 꿈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지, 이루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역사는 바로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다. 우리가 나갈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가 바로 이것이라고 절규하고 있다. 이 절절한 외침... 듣자. 그리고 기억하자.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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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을 고른 이유는 오직 하나.

 

제목에 카프카가 들어 있기 때문.

 

카프카에 관심이 있었을 때 검색어를 카프카로 놓고 검색을 해보면 많은 책들이 뜨는데, 시집 제목에 카프카가 들어간 시집이 두 권이 있었다.

 

언젠간 읽어야지 하면서 사게 된 시집인데...

 

"카프카의 집"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고, 카프카 작품 중에서 "성"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성"이라는 카프카의 소설은 결코 성에 도달하지 못하고 성의 주변을 맴돌 수밖에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이루는 절대의 세계에,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지 못하고, 늘 안개에 쌓여 그렇게 헤매면서 어디론가 가기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리의 세계가 분명 존재한다고, 눈에 보인다고 생각하고 가는데, 가도가도 그 곳은 저 멀리에만 있고, 그곳은 또 뿌연 안개에 쌓여 있어 실체를 의심하게도 하는데...

 

그래도 그곳은 눈에 보이니 없다고 할 수도 없고, 하여 우리는 갈 수밖에 없는데...

 

진리의 세계를 향한 여정, 가야만 하는, 그러나 갈 수 없는 그런 세계에 대한 탐구, 그것이 카프카 소설이었다면, 이 시집에서는 그런 세계에 대한 시적인 추구가 이루어지고 있어야 하지 않나.

 

제목이 된 시 '카프카의 집'을 본다.

 

카프카의 집

  어느 낯선 세계, 공기조차도 고향 공기의

 어떤 요소도 갖지 않은, 낯섦으로 질식할 듯

한 곳, 미친 유혹들 속에서, 그저 계속 갈 뿐

                                                  - <城>에서

 

저녁 어둠이 안개에 젖을 때

만종 종소리는 낮은 곳으로 잦아들고

한사코 사물을 밀어내치려 해

집의 낯익은 현관 문고리를 잡고서도

여기가 어디던가,

묻게 한다.

 

불그스레한 가등 불빛 아래

포도 돌바닥이 번들거릴지라도

끝내 고독했던 사람은

여전히 그늘진 모퉁이에서 서성대며

그의 집에 붙은 포스터의

얼굴 또한 춥고 그로테스크하다.

 

다만 헤매다닐 뿐.

(굴뚝에서 한가롭게 풀려나는 연기

나무 끝에 오도마니 올라앉은 둥지

가족의 웃음 소리)

그 성은 멀고 머어

이방인의 집은

비어 있다.

 

밤이 더 싶어선 안 된다. 프라하여.

불안은 언제나

한걸음 앞서 스멀거리지만

보헤미아 처녀여

귀가를 서두르지 말라

머리카락카락 물 미립자 방울 맺히기 전엔.

 

신중신, 카프카의 집, 문학과지성사. 1998년 초판. 66-67쪽

 

상당히 몽환적이다. 무언가 도달했음에도 도달하지 않았음을, 가야 하지만 갈 수 없음을 이 시에서 느낄 수 있다. 마치 카프카의 "성"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이 시에서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럼에도 가야한다. 그것이 바로 진리의 세계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다. 우리는 늘 어디론가 가야만 한다. 가지 않으면 우리는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다.

 

이렇게 카프카를 느끼기도 했지만, 또 하나 시집에서 반가운 제목을 만났다. '풀잎'

 

이 시에서 김수영의 '풀'을 느낀 건 나만의 착각일까. 진리의 세계에 사람은 혼자 갈 수가 없음을, 함께 가야만 함을, 어쩌면 이 '풀잎'이라는 시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

 

풀잎

 

풀잎이 한들바람에 흔들린다

천둥 뇌우 속에서 한결 명징해진다

혼자이면서 여럿으로

씨를 여물게 해 흩뿌리고

풋풋한 목숨 면면히 이어간다

 

풀잎은 죽음 곁에서 새 움이 돋아나고

꿈꾸지 않으면서

꽃을 피운다

흔들려 바람을 부르고

흔들리지 않으므로 나비의 요람이 된다

 

풀잎이 숲을 만들고

강바닥이 마르는 걸 막아준다

새벽에는 이슬에 젖어

태어난 아이가 힘찬 울음을 터뜨리도록

노래한다 한 소절마다의 엽록소로

 

풀잎은 항구하게 원시의 힘

농경의 고단한 쟁기질과

타오르는 풀무의 불길.

마침내 민초(民草)가 주인임을 터득시키는

민주주의의 지반이 된다.

 

신중신. 카프카의 집. 문학과지성사. 1998년 초판. 80-81쪽   

 

자, 내가 원하는, 가야만 하는 세계는 어디인가. 그곳으로 나만이 아니라, 함께 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 '풀잎'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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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걷다 - 사회적 약자를 위한 도시건축, 소통과 행복을 꿈꾸다
이훈길 지음 / 안그라픽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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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선 반갑다. 이런 책을 읽게 돼서. 아마도 이런 책이 나온 적이 있었겠지만, 과문한 탓에 도시건축, 그것도 장애인을 중심에 둔 도시건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책은 이 책이 처음이다.

 

장애인이 아니라 사람들이 편리하게, 소통할 수 있게 도시를 구성해야 한다는 내용의 책은 읽은 적이 있었고, 고 정기용 건축가의 책도 어느 정도는 소통을 중심에 둔 도시건축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장애인을 꼭 집어서 이야기한 책은 내게는 이 책이 처음이다.

 

"도시를 걷다"

 

한 번 걸어보라. 얼마나 불편한지. 조금만 걸어도 길이 연결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잠깐 한눈을 팔면 발에 무언가가 걸려 넘어지기 쉽다. 더 위험한 일은 차가 걷는 길에 세워져 있다든지, 난데없이 들어온다든지 하는 일이 빈번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상점의 간판들, 상점을 홍보하는 입간판들... 그리고 온갖 소음들, 매연들. 정말로 장애가 없는 사람들도 걷고 싶어하지 않는 길이 바로 도시의 길이다. 특히 서울은 더.

 

장애가 없는 사람들도 걷고 싶어하지 않는 도시의 길을 장애가 있는 사람이 걷는다는 일은 정말로 힘든 일이다. 위험한 일이다. 이 책에도 나오지만 이들은 장애가 없는 사람이 3분이면 가는 길을 30분에 걸쳐서 가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한다.

 

무엇이 문제일까? 도시를 계획할 때 전체적인 밑그림 없이 그때그때 편의성을 따지면서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이 한양으로 도읍을 옮길 때 과연 그들도 도읍지를 그냥 막 건설했을까? 예전 책을 읽어보면 상당히 공들여서 계획하고 건설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서울이 우리나라 수도가 된지 700년이 되어가고 있는 지금... 옛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안다는 온고지신의 지혜를 발휘하지는 못할지라도,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지금부터라도 모두가 행복한 도시를 건설하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작가는 이 책에서 건축가는 이런 사람이라고 말한다.

 

  명심해야 할 것 가운데 하나는 건축을 위한 삶이 아니라 삶을 위한 건축이라는 사실이다. 건축가는 멋있는 건물을 짓는 사람이 아니라 건강한 건물을 짓는 사람이어야 하고 나아가 좋은 삶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전문가여야 한다. (200쪽)

 

그렇다. 적어도 건축가는 건축을 할 때 가장 약자를 중심으로, 그가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건축을 해야 한다. 가장 약자가 행복하다면 그보다 나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행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건축을 '유니버셜 디자인'이라고 한다.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디자인. 모두에게 통하는 디자인. 여기에는 장애인이고 임산부고 노인이고 모두가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디자인(건축)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런 '유니버셜 디자인'은 자연스레 '무장애 디자인'을 포함하고 있으리라. 누구에게도 장애가 되지 않는 디자인이라는 '무장애 디자인'.

 

하여 모두가 행복한 건축에는 시각만이 아니라 오감이 동원되어야 한다고 한다. 만약 우리가 장애인이라고 하더라도 어느 장애를 가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모든 장애인들이 행복한 건축이라면 오감을 적절히 자극하는, 또는 오감이 동원되는 그런 건축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 배웠다. 건축에는 오감이 작용되어야 한다는 사실. 집에는 시각만이 아니라, 촉각만이 아니라, 후각도 청각도 모두 함께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여기에 또 걷고 싶은 도시에서는 '거리'와 '길'의 개념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사실도 배웠다. 글쓴이는 '거리'는 단지 물리적 공간을 떠나서 삶이 이루어지는 공간, 행동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라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그래서 건축가는 '거리'를 추구해야 한다고 하고, '길'은 이동을 중심으로 하는 지향성을 지닌 목표중심적인 개념이라 건축가가 추구하는 개념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건축에서 길을 어떻게 개념지우던, 우리에게는 길이 바로 거리가 되어야 한다. '길'은 우리에게 생활이 되어야 하고 만남의 장소가 되어야 하며, 우리의 삶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어쩌면 길은 그래서 우리에게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삶이 녹아 있는, 삶이 이루어지고 있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건축가는 바로 그러한 건축을 추구해야 한다.

 

이 책에서는 사회적 약자를 배려해야 하는 건축에 대해서 자세하게 잘 설명해주고 있어서, 지금 우리의 도시 건축이 얼마나 배려에서, 아니 배려가 아니라 '함께 삶'에서 많이 벗어나 있는지를 알게 해주었다.

 

문제를 알면 고쳐야지. 바로 그 점이 이 책의 시작점이 아닐까 한다.

 

"자, 문제는 이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렇게 이 책의 저자가 묻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답은 사회적 약자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그런 도시를 만들 수 있도록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야 한다가 된다. 그것은 바로 사회적 약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니까.

사회적 약자가 행복한 도시라면 우리 모두는 행복할 수밖에 없으므로. 누군가가 불편하고 힘듦 생활을 하게 계획된 도시라면 우리에게도 불편하고 힘들 수밖에 없으므로.

 

참, 좋게 읽었다. 이런 책이 많이 나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런 책의 내용을 도시 행정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이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니, 한 나라의 정치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좋았다.

 

덧글

 

이 책 참 좋게 읽었는데.. 읽으면서 자꾸 학교 생각이 났다. 우리나라 학교 건물을 생각해 보라. 얼마나 폭력적인지. 사회적 약자에게 얼마나 다니기 힘든 건물인지.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예전에 대학에 입학한 장애인 대학생이 학교를 자퇴한 경우가 있었다. 도저히 학교를 다닐 수 없는 구조였기때문이다. 그런 일들을 거치며 대학은 조금 좋아졌는데...

 

초중고등학교는? 이렇게 물으면 아니다다. 건물은 낡고 휠체어는 당연히 다닐 수 없으며, 장애인 화장실은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경우가 많으니... 장애인에게 초중고등학교의 건물은 폭력이다. 접근하기 너무 힘든 철옹성이다. 이런 경험을 한 아이들이 어떤 생각을 할까 고민해봐야 한다.

 

적어도 학교 건축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최고의 건축가들이 고민을 하고, 설계를 하고, 조언을 하고, 교육당국은 그런 조언을 받아들여 건축을 해야 하지 않을까. 돈이 많이 들겠지만, 지금 낡은 학교 건축들을 개조해야 하지 않을까? 학교 다니면서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건축을 몸소 겪은 아이들이 자라면 도시 건축도 나라 건축도 모두 그런 방향으로 자연스레 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또 하나 다음에는 경제적 약자들도 도시에서 소외되지 않는 그런 건축에 대한 책도 나왔으면 좋겠다. 추상적인 주장만 담긴 책이 아닌 구체적인 내용이 담긴 그런 책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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