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의 도전 - 배움이 달라지는 수업 철학
사토 마나부 지음, 손우정 옮김 / 우리교육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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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공동체가 유행이다.

 

유행이라는 말보다는, 교육의 방향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교육이라는 말이 외부에서 타율적으로 주어지는 결과만을 추구하는 그러한 교육이라면, 배움은 반대로 내부에서 자율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나와 있는 대로 대상과의 대화, 타인과의 대화,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대화가 바로 배움이라고 한다.

 

배움이 이루어지는 학교가 전세계적으로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으며, 이런 배움은 학생뿐만이 아니라, 교사들에게 해당한다는 사실을 이 책은 알려주고 있다.

 

배움이 이루어지기 위한 기본적인 태도는 우선 듣기에 있다는 사실. 듣기가 얼마나 안되고 있는지는 요즘 학교 교실을 보면 알 수가 있는데, 배움이 이루어지고 있는 학교에서는 듣기가 자연스레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듣기를 바탕으로 학생과 학생이, 학생과 교과서가, 학생과 교사가 자연스레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분위기에서, 잘된 발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발표는 다 좋은 발표라는 생각을 지니고 이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수업.

 

그러한 수업을 통한 배움. 이것이 바로 교사의 도전이고, 21세기 학교의 모습이어야 한다고 한다.

 

주로 일본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구체적인 수업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어떤 수업이 배움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고 있으며, 일본뿐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들의 사례도 들고 있어서 이것이 일본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추세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우리나라도 이제 교육에서 배움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혁신학교를 중심으로 배움을 중심에 놓고 있으며, 이러한 배움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는 학교도 나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배움이 몇몇 학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교육 전반에 걸쳐 일어날 때 학교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을 것이며, 교사들 역시 학교에 오는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교사와 학생을 바라보는 학부모들 역시 즐거운 마음을 지닐 수밖에 없을 테고.

 

교사의 도전.

 

이것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 이제는 교육이 아니라 배움을 향해서 가고 있다는 사실. 요즘 교육의 방향이다.

 

이렇게 가기 위해서 이 책의 저자인 사토 마나부 교수는 교육 정책가들에게 한 마디 한다.

 

학교 개혁을 소리 높여 논의하고 정책화하는 사람들은 한 번이라도 학교를 방문하여 교실을 자세히 관찰하고 교사 업무와 아이들 활동에서 배운 적이 있었을까? 아이들 장래와 교육의 미래에 희망을 건다면 학교와 교사를 재단하고 논평하여 비판하는 무책임한 발언은 허용해서는 안되며, 교사와 아이들이 직면하고 있는 고민을 구체적으로 공유하여 매일매일 실행하는 학교교육 활동에 스스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출발점이 공유되지 않는 한 어떤 개혁 논의나 정책도 무엇 하나 성과를 거둘 수 없을 것이다. (이 책 246-247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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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고를 때, 우선 아는 시인인가? 혹 내가 시를 알고 있는 시인의 시집인가? 또 제목이 마음에 꽂히는가? 그리고 몇 장을 넘기다 마음에 드는 시가 있는가?

 

헌책방에 가면 시집은 천천히 감상할 수가 있다. 새 책을 파는 서점처럼, 헌책방에서도 역시 시집은 자리를 얼마 차지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적하게 시집을 보고, 내용을 훑어본다. 거기에다 제본 상태나 보관상태까지.

 

이런 과정을 거쳐 이 시집이다 하면 손에 쥐고, 다른 책들을 보기 시작한다.

 

이 시집, 박용주의 "바람찬 날에 꽃이여 꽃이여"는 알고 있는 시가 두 편이 있다. 그리고 박용주가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학생일 때 이 시집을 냈다는 사실 때문에 알고 있었고, 그 중 한 편의 시는 아는 사람에게서 받기도 했었다.

 

이럴 경우 망설일 이유가 없다. 우선 내가 알고 있는 시가 두 편이고, 이 시인의 시집을 구하기가 쉽지 않을 터이니, 그냥 사고 본다.

 

참 오래 전의 시집이다. 그리고 박용주는 정말 어릴 때 시를 썼다. 중학교 3학년.

 

지금 중학교 3학년 하면 어리다는 생각이, 도대체 저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 시집을 읽으면 이게 어떻게 중학생이 생각해내고, 중학생이 표현할 수 있는 시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마치 어른이 쓴 시 같다는 느낌. 너무도 조숙한 것 아닌가 하는 느낌.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사람의 정신이라는 것이 꼭 육체적인 나이와 비례하는 것은 아니니, 박용주가 조숙했다고 해도 그의 시는 조숙이 아니라, 표현할 수 있는 내용을 표현할 수 있는 형식에 맞추어 냈다고 보는 편이 좋겠다.

 

그만큼 그의 시에서는 중학생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기존 어른들이 고민했던 것보다 더한 고민이 시에 담겨 있기도 하다.

 

어쩌면 지금 아이들을 우리는 너무 어리게만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이들 마음 속에도 이미 어른과 같은 마음이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억누르고만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시집을 읽으면... 이 시집의 주된 음조가 오월이라면, 이제 오월은 지났다. 유월도 칠월을 향해서 달리고 있으니...

 

우리도 그 빛나던 광주를 거쳐 87년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그동안 박용주가 어떻게 자랐을지 몰라도, 그의 시 구절은 '우리들의 가슴에 아픔으로 피어나는 / 순결한 꽃'(박용주, 목련이 진들 중에서)으로 다가온다.

 

그의 시 중에 내가 알고 있던 두 편 중 하나.

 

사실, 이 시집에서는 첫번째에 실린 '목련이 진들'로 5월 문학상을 탐으로써 그가 유명해졌으니, 이 시를 인용해야겠으나, 내가 기억하고 있던 시를 인용한다. 이 시처럼, 정말 더러움이, 이 세상의 더러움이 가려졌으면 해서...

 

이 세상의 더러움을 없애고 새로움이 나타난 세상이 되었으면 해서...

 

자기만 깨끗해진다고 부끄러워하는 시인을, 자기조차도 깨끗해지지 않고 있는 나 자신이 더욱 부끄러워서.. 그런 나보다도 못한 사람들이 더욱 창피해서...

 

벽지를 바르며

 

누렇게 바랜 낡은 벽지를 떼어내고

깨끗이 물걸레질을 하여

산뜻한 새 벽지로 도배를 하면서

 

한쪽으로만 밀려도 아니되고

빈틈없이 풀칠하여

무늬맞춰 벽에 바르며

문득 이 세상의 모든 낡은 것에

풀칠하고 싶었다

 

지켜본 세월만큼 햇볕에 바래고

더러움타고 먼지타서 낡아진 세상을

음습한 습기로 눅눅해진 세상을

빠삭거리는 새 종이로 바르고 싶었다

 

교만하고 음흉하여 어두운 벽엔

희고 밝은 종이로

슬프고 눈물나는 여린 색깔엔

화사하고 산뜻한 꽃무늬로 도배하고

좌절하고 고통하는 우울한 벽에는

연록으로 반짝이는 싱그러움을 입혀서

밝고 고운 세상으로 풀칠하고 싶었다

 

간혹은 은은한 상아 빛깔로 호사도 하고

등꽃같은 보라빛 고고함도 함께 칠해서

새롭게 태어나는 세상을 보고 싶었다

 

낡고 바랜 것이 벽지만은 아닌데

이 한 칸 벽만을 새로 바른다해서

세상의 더러움이 함께 가려지는 것도 아닌데

 

행여 무늬 틀리지않나 근심하며

내 기대일 벽만을 풀칠하는

이기심을 부끄러워 하면서

내것만을 깨끗하고 밝게 하는

이기심이 슬프기만 해서

풀칠하는 손길이 자꾸만 더디어진다

 

박용주, 바람찬 날에 꽃이여 꽃이여, 장백, 1990년. 77-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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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ang0917 2019-06-14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용주 시인은 한 맺힌 오월을 가슴 시리게 노래했어요. 시를 쓸 당시 나이가 중학생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절절한 슬픔을 끓어 냅니다. 어른이 된 지금 읽어도 최고라 말할 수 있어요.
그 후로 시를 쓰지는 않는다고 들었는데......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순천여고 시절 소식 주고 받았던 친구였는데 기억하고 있을련지......
 

핵 시리즈 만화를 구입했더니 그 세트로 딸려 왔다.

 

몇 년 전에 나온 만화라 그런가?

 

핵과 자연은 상반된 것인데, 핵반대가 결국 자연을 살리자는 운동이니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이 만화가 핵 반대 만화들과 세트가 된 이유도 나름 납득이 된다.

 

휴대전화(핸드폰)를 팔아서 쌀을 사면 된다는 그런 소리를 하던 사람도 있었는데, 휴대전화는 없어도 사람이 죽지 않지만 쌀은, 음식은 없으면 사람이 죽는다는 그 자명한 진실을 망각했으니, 이런 비극도 없다.

 

그래서 우리 주변은, 특히 대도시는 온통 콘크리트 뿐이다. 이러한 대도시에 농사를 짓겠다고 했더니 하천법인가 뭔가로 강이 오염된다고 안된다고 했다는 얘기도 들었고.

 

그러니 대도시 아이들은 자신이 먹는 음식이 어떻게 자신의 입으로 들어오는지 알 수도 없을 뿐더러, 생명체의 소중함을 체험할 기회도 별로 없게 된다.

 

오로지 휴대전화를 만지작 거리고 있을 뿐이다.

 

길거리를 보아도 아이들은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걷고 있다. 위험한 도로를 건널 때에도 휴대전화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휴대전화가 이미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도구가 아니라, 게임 속에 빠져들게 하는 게임기 기능을 하고 있을 뿐이니...

 

여행을 가도 아이들은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린다. 여행지에서 느끼는 멋과 맛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오직 이들은 자그마한 휴대전화에 자신의 눈을 고정시킨 채, 열심히 손가락 운동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런 만화다.

 

자연 속에서 자연을 느껴가는 여름이의 이야기.

 

그런 여름이를 통해 자연의 소중함을, 생명의 소중함을, 우리들 밥상의 소중함을 느낄 수가 있다.

 

만화라는 장르의 특유의 친숙함과 여름이라는 캐릭터 덕으로 재미있게 볼 수가 있다. 그리고 그 재미에 자연의 생명에 대해서도 조금씩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농사 만화라고도 , 교육 만화라고도 할 필요가 없다. 그냥 예전에 우리가 접했던 자연을 만화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고 하면 된다.

 

만화를 보면서 사람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은지 느끼면 된다. 여기에 한 가지 더하면 우리가 먹는 음식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면 더욱 좋고.

 

아이들이 읽을 만한 만화다. 아니 읽어야만 하는 만화다. 부모들이 함께 보고 이야기를 해주면 더욱 좋은 만화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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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리앗 삼성재벌에 맞선 다윗의 투쟁
김성환 엮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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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먹먹하다.

 

21세기에 제대로 된 노조를 만들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하긴 X파일을 공개했다는 이유로 국회의원인 노회찬이 의원직을 상실하기도 했으니...그 전에 국회의원도 아닌 일반 노동자가 겪을 일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이로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아직도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노조는 절대로 안된다' 이런 말이 통용이 되다니..

 

자신의 눈만이 아니라, 자식들 눈에 흙이 들어가도 노조는 안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무노조 신화라고 하는데, 신화는 전근대적인, 이성이 작동하지 않는 비합리적인, 미신에 의존하는 그러한 상태에서 나온 인간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그런 장치이지 않았던가.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기업. 우리나라를 실질적으로 먹여 살린다는 기업, 대부분의 국민이 들어가고 싶은 기업. 삼성.

 

그런 삼성에서 겪은 일들을 모아놓았다.

 

그 겪은 일들이 예전에 전태일이 겪었던 일들과 어쩜 이리도 흡사한지. 이 책을 엮는 김성환 씨가 꼭 전태일 같다. 그만큼 그가 하는 일은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는 전태일이 겪었던 일보다도 더 심한 일을 겪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 때는 그래도 재벌의 힘이 그렇게 세지 않았는데, 고 노무현 대통령이 말했듯이 이미 시장으로 권력이 넘어갔다는 2000년대는 정말로 노동자들이 대기업에 맞서기는 골리앗에 맞서는 다윗도 되지 않을 터이다.

 

정경유착을 넘어 법경유착이라는 말까지 이 책에 나오는데... 어떤 형태로든 노조를 만들려고 했던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일들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쳤던 전태일의 외침이 떠오르게 한다.

 

전태일, 그가 만약 지금 살았더라면 그는 이 책을 엮은 김성환과 같은 일을 하지 않았을까.

 

그와 같은 전태일이 아직도 많이 있다는 사실이 나를 암울하게 한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전태일이 아직도 많이 있다는 사실이 희망을 발견하게 한다.

 

어떻게 이렇게 비인간적인 행위를 할 수 있을까, 이러고도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이 이후 쌍용차 노동자들이 겪은 일들을 생각해 보면 삼성 노동자든, 쌍용노동자든, 떠 어디 노동자든, 이들은 아직도 전태일이 외쳤던 것들에서 많이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기록으로서 가치가 있다. 이 책이 과거의 일로 그 땐 그랬었나, 그런 시절도 있었나 하는 이야깃거리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환상을 품어본다.

 

마음이 읽는 내내 편치 않았지만, 우린 알아야 한다. 적어도 현실에 대해서는. 이런 기록들 남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굳이 공자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면 자신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난다는 사실을.

 

그리고 노동자들은 어떤 형태로든 노동자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본가와 노동자는 처지가 다르다는 사실을. 노동자가 노동자를 배신해서 잘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이책에 나오는 정말 노동자 같지 않은 사람들. 사람같지 않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되지 않기 위해서도 이 책은 필요하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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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 책방에 가다.

 

많은 책들은 또다른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그 중에 눈에 잘 띄지 않는 책들, 시집...

 

우연히 눈에 띠면 기분이 좋다.

 

이번엔 김광규 시집이다.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이다.

 

이 시집에서 가장 친숙한 시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다.

 

이러고 싶지 않은데, 우리는 지금 이 시에 나오는 사람들과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지는 않는지.

 

과거는 과거일 뿐이고, 지금은 먹고 살기 바쁜 일상에 젖어 더이상의 꿈을 꾸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 시에서는 4.19의 기억을 지니고 있다면, 지금 우리는 87년의 기억을 지니고 있는 것 아닌가.

 

단지, 과거로... 그 때는 열정이 넘치던 때로, 그러나 지금은 다 지나간 그냥 과거일 뿐인... 그런 모습으로.

 

그렇게 되지 말아야 하는데... 과거는 바로 현재를 이끌어 갈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 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낵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 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김광규,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문학과 지성사, 1982 3쇄. 58-60쪽

 

슬프다. 지금 내 처지가 이와 비슷한 느낌이 들어서.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 세상이 변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변하는 모습이. 에고.

 

그래서 이 시집에 실려 있는 이 '소'라는 시, 정말, 가슴에 와닿는다. 내가 지니고 있는 뿔. 나도 뿔을 가지고 있음을 늘 생각하고 있어야 하는데...

 

 

산비탈에 비를 맞으며

소가 한 마리 서 있다

누군가 끌어가기를 기다리며

멍청하게 그냥 서 있다

 

소는 부지런히 많은 논밭을 갈았고

소는 젖으로 많은 아이를 길렀고

소는 고기로 많은 사람을 살찌게 했다

 

도살장으로 가는 트럭 위에

소들이 가득 실려 있다

죽으러 가는지를 알면서도

유순하게 그냥 실려 있다

 

소들은 왜 끌려만 다니는가

소들은 왜 죽으러 가는가

소들은 왜 뿔을 가지고 있는가

 

김광규,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문학과 지성사, 1982 3쇄. 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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