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시작하는 철학
로제 폴 드르와 지음, 박언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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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철학이 없어." 또는 "그 사람은 철학이 있어." 또는 "그 정책에는 철학이 없어." 또는 "그 정책에는 철학이 있어."

 

흔히 하는 말이다. 여기서 쓰이는 철학이 어떤 의미로 쓰이는지는 문맥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이 될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일관성으로, 어떤 경우에는 진리로 쓰이기도 한다.

 

일관성이나 진리, 같지 않을 것 같은 용어가 한 단어에서 쓰이는 것은 그만큼 철학이라는 말이 함의하고 있는 뜻이 단순하지 않다는 말이기도 하겠다.

 

하지만 조금 더 나아가 보자. 일관성이란 자신이 생각이나 행동을 변함없이 꾸준히 유지한다는 뜻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그 무엇이 없다면 일관성을 유지하기는 불가능하다.

 

그 무엇이 무엇일까? 그것을 신념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다면 신념은 어디에서 오는가? 옳다는 믿음에서 오지 않을까? 옳다는 믿음으 어디에서 오는가?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해보면 결국 일관성은 진리와 연결이 된다.

 

진리라고 생각하기에, 믿기에 일관성을 지니고 살아가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결국 철학은 진리의 문제가 되는데...

 

사람이 태어나서 의식을 갖게 되면서 도대체 나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신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면 자연스레 남에 대한 질문도 하게 되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 질문도 하게 된다.

 

왜? 왜? 어떻게? 어떻게?

 

그러한 질문들이 앎으로 나아가고 앎은 다시 행동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앎과 행동은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알고도 행하지 않을 때 그를 철학이 있는 사람이라고는 하지 않으니 말이다.

 

참 별거 아닌 거 같은 질문이 별거로 존재하게 되고, 누구나 질문하는 문제가 특정한 사람만이 질문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사회는 잘못된 사회이다. 우리 교육이 그렇다. 도대체 우리는 철학에 대해서 배운 적이 있던가? 아니 철학을 가르치려고 했던가?

 

철학이 우리 삶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학교 교육에서 철학을 너무도 홀대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어쩌면 철학을 홀대했다고 하기보다는 철학을 너무도 위대한 그 무엇으로 인식해서 감히 가르치고 배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마치 철학은 특정한 어떤 뛰어난 사람들만이 하는 학문으로.

 

하지만 아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떻게 살아갈까? 도대체 어떤 삶이 좋은 삶일까?를 늘 고민한다. 이것이 철학이다. 좋은 삶은 진리를 추구하는 삶일테고, 그러한 진리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그렇게 살아가려는 노력을 한다는 뜻이니까 말이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철학을 서양에 국한했다는 한계는 있지만, 이는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동서양의 모든 철학을 아우르는 것은 자신의 능력 밖이라고 하니,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

 

동양철학에 대한 작업, 이슬람 철학에 대한 작업은 다른 사람들이 할 몫이라고 이해하면 이 책은 유럽 중심의 철학에 대해서 명료하게 잘 설명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한 책이다.

 

총 스무 명의 철학자가 나온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루크레티우스, 스토아학파, 아우구스티누스, 마키아벨리, 몽테뉴, 데카르트, 파스칼,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볼테르, 디드로, 루소, 흄, 칸트, 헤겔, 토크빌, 마르크스, 니체

 

이 중에 마키아벨리와 토크빌을 제외하고는 우리가 평소에도 철학자로 인정하고 있는 사람이고, 이 둘도 이 책을 읽어보면 왜 철학자로 다루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들에 대한 철학적 내용은 이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으니, 언급은 삼가하고...

 

그들의 생애와 철학을 연결지어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한 사람의 철학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고 그를 알기 위한 책 소개와 그와 연결되는 다음 철학자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책을 더 쉽게 읽게 하고 있다.

 

철학.

 

철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도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 지금도 고민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때 비록 서양철학자에 국한되었지만 그들의 고민이 무엇이었는지 안다면 지금 여기서의 우리 고민을 우리 스스로 해결하는데 어떤 시사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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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의 사회문화적 확장과 변용 - 텍스트와 이미지에서 문화교육으로 문화산업총서 4
김영순 지음 / 북코리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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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참 번역하기 힘든 말이다. 그냥 이야기하기로 하기도 모호하고.

 

하지만, 이야기가 있는 그 무엇, 또는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그 무엇으로 이해하고 있는 용어가 스토리텔링인데, 최근에 유행하고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간, 단편적인 지식에, 단편적인 삶에 익숙해져 있어서, 전체를 보기 힘들었고, 또한 이야기가 인간 삶에서 꽤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알게모르게 무시하고 지내왔던 시절이었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이 되니(아직도 절대 빈곤층이 있기는 하지만, 사회 전체적인 평균으로 보면... 이 평균이라는 것이 참...)이제는 문화에 대한 욕구가 생겨나고 있다.

 

문화에 대한 욕구, 그 중에서도 무언가 의미를 발견하려고 하는 모습들이 스토리텔링으로 나타나지 않았나 싶은데, 이것을 아이들 학습에 이용하기까지 하니, 우리나라는 무언가 하나 유행하면 참...

 

스토리텔링에 대한 장단점을 논하기에 앞서, 아직 스토리텔링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고, 그래서 스토리텔링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어떤 이는 게임에서 스토리텔링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어떤 이는 영화나 만화 같은 예술에서, 어떤 이는 수학이나 과학 같은 학문에서, 어떤 이는 문학에서, 또 삶에서 스토리텔링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은 그러한 스토리텔링을 도시에 적용하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 이 공간이 우리와 동떨어져 홀로 존재할 수 없고, 이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서 스토리텔링은 시작한다.

 

객관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는 공간을 사람과 함께 하는 장소로서 존재하게 하는 요소, 그것이 바로 스토리텔링이고, 이러한 스토리텔링에 의해서 사람은 자신의 공간과 일체가 되는 모습을 보인다.

 

스토리텔링이 있는 도시 하면 우선 남원이 떠오르는데, 남원 하면 춘향이를 생각하고, 우리는 남원에서 춘향전을 읽어내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도시가 무언가와 연결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스토리텔링이다.

 

이러한 스토리텔링은 애향심뿐이 아니라, 관광 산업으로서도 각광을 받고 있으며(오죽했으면 강원도의 어느 도시와 전라도의 어느 도시가 서로 자기네 고장이 홍길동의 고장이라고 주장하면서 갈등을 일으켰겠는가) 도시를 설계하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여 이 책은 부천과 인천, 그리고 춘천이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어떻게 도시에서 스토리텔링을 만들어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만화도시로서의 부천, 개발되는 지역으로서의 인천에서도 검단 지역, 그리고 자연적 여가공간으로서의 춘천...

 

이 도시들이 스토리텔링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책에서 담아내고 있기에, 도시에 이야기를 입히고자 하는 사람들은 읽을 만한 책이다. 다만 도시 자체에서 어떤 스토리텔링을 찾아내고,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였으면 하는데, 도시와 스토리텔링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들어서 아쉬웠다.

 

도시를 기획할 때 어떤 이야기를 그 도시에 담아내는 노력에도 중점을 두고 연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특히 검단에서는 이미 사라져가는 이야기를 담으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으니, 그것보다는 새로운 이야기를 담은, 그 이야기가 담긴 새로운 도시의 모습을 이야기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부에서는 다양한 문화와 스토리텔링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구나, 스토리텔링이 어느 하나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 삶, 우리 문화 전반에 걸쳐서 작동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으니...

 

이야기는 인간의 탄생과 더불어 함께 존재했던 것. 나에게 이야기란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 마찬가지로 내가 살고 있고, 내가 향유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는 것. 그러므로 우리가 스토리텔링이라는 외래어로 이야기를 하지만, 이미 스토리텔링은 우리 삶의 전반에 걸쳐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해 준 책.

 

이야기는 바로 우리를 버티게 해주는 힘이기도 하다는 사실. 그래서 우리는 삶에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실.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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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은 근본주의다.

 

이렇게 말하니 무언가 대단한 것 같다. 무서운 것도 같다. 타협을 모르는, 웬지 꽉 막힌 그러한 잡지 같다.

 

몽상가들의 모임 같기도 하고... 실현 불가능한 일을 이야기하는 동키호테들의 모임 같기도 하고, 또 그냥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이상주의에만 몰두하는 사람들 같기도 하고.

 

그러나 근본주의에는 원칙이 있다. 아니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모습이 있다. 그래서 녹색평론은 근본주의를 포기하지 못한다. 이 때의 근본주의는 꽉 막힘이 아니라, 우리 삶이 지향해야 할 목표가 된다.

 

그만큼 우리나라에 늘 앞서서 문제제기를 녹색평론이 해오지 않았던가.

 

환경이니 생태니 하는 문제를 떠나서도 녹색평론은 삶의 기본적인 모습에 대해서, 어떤 것이 사람다운 삶인지에 대해서, 공존하는 삶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지 않았던가.

 

이제는 핵이니 생태니를 떠나서 우리 사람들이 존엄한 삶을 위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하고 있다.

 

그러한 고민이 "기본소득"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사람들 한 명 한 명에게 기본소득을 주자는 의견. 얼핏보면 공상에 불과할 주장으로도 보인다. 노인들에게 기초연급을 20만원씩 주자는 공약을 내세우고도 재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공약(公約)을 공약(空約)으로 만들어버리고 있는 이 현실에서, 노인도 아니고 모든 국민에게 똑같은 돈을 주자고 하는 주장은 공허하게도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자.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일정한 소득을 보장해주면 그 사람은 적어도 굶어죽을 걱정은 하지 않으니 자신의 삶을 충분히 누릴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돈이라는 것은 지금 모자라지 않는다. 넘치고 있는데, 그 넘침이 생산적이지 않은 부분으로 모여들어서 문제가 되는 것 아니겠는가.

 

처음에 무상급식도 무슨 무상급식이냐, 왜 부자들에게도 무상급식을 해야 하느냐, 무상급식을 하면 일하지 않고 얻어먹으려는 습성만 들게 된다는 둥 많은 반대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어떤가, 무상급식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지 않은가.

 

이와 마찬가지로, 기본소득도 충분히 재원을 마련할 수 있으며, 또한 이것이 실현이 되면 삶의 질이 상당히 높아질 거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진보정당에서도 기본소득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이미 외국에서는 이런 주장으로 상당한 득표를 하고 있는 정당이 있음에도, 이상한 현상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래, 녹색평론이 얼마 전부터 계속 기본소득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들이 근본주의에 빠져 있어서가 아니라, 이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향은 되돌려지지 않고 앞으로 주욱 나아갈 것이다.

 

우리 사회에 기본소득이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는 녹색평론. 이번 호 꼼꼼하게 읽으면 왜 기본소득이 도입되어야 하는지, 그것을 우리는 반대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밀고 나가야 함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더불어 일리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도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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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아니라 우기다.

 

우기와 건기로 나뉘어지고 있는 건지.

 

한 달이 넘게 비가 내리다 그치다 하고 있다.

 

남부지방엔 비는 커녕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고 하던데, 중부지방엔 햇살을 보기 힘든 날이 한 달이 넘어갔으니...

 

그러한 장마가 잠시 주춤하더니 며칠 반짝 해가 났다.

 

밀린 빨래를 하고, 눅눅해진 집안도 보송보송하게 하고.

 

그것도 잠시 다시 비다.

 

와, 지겹게 비가 온다.

 

이런 날씨에 우리나라 정치를 대입시킨다.

 

누구는 햇볕 정책을 퍼주기 정책이라고, 우리나라를 망가뜨리는 정책이라고 했는데...

 

그 때 햇볕정책이 이루어졌을 때 과연 우리는 힘들었던가.

 

위기의식을 느꼈던가.

 

남북간의 갈등이 이리도 심했고, 긴장이 고조되었던가.

 

아니지. 그건 아니지.

 

그 때는 지금의 장마와는 달리 서로의 얼굴이 펴질 때였지.

 

남북에도 따스한 기운이 넘칠 때였지.

 

햇볕이 얼마나 고마운지, 얼마나 좋은지 그 땐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이렇게 지리한 장마가 계속될 때 햇볕의 고마움은 마음에 다가온다.

 

한 번 경험한 햇볕. 다시 우리 곁에 돌아오게 해야지.

 

삶창 이번 호에서는 갑과 을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그동안 을에게는 이보다 더한 장마는 없었으리라.

 

장마에, 홍수에 온갖 피해를 보던 을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된 것. 을도 함께 살아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 이제는 갑과 을이라는 말을 쓰지 않도록 한다고 하는데, 단지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삶에서 갑과 을이라는 관계가 존재하지 않게 해야지.

 

간신히 을에게 비치는 햇살들, 그들을 따스하게 해주는 햇볕들, 그것이 사라지지 않게 했으면 좋겠다. 

 

삶창, 지리한 장마를 녹이는 따스한 햇볕처럼 이 책, 그렇게 다가온다. 마음이 따스해진다.

 

눅눅해진 마음이 보송보송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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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을 보다 이런, 이런 하는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이거 완전 '꺼삐딴 리'네.

 

일제시대엔 일본에, 해방직후 북쪽에선 소련에, 전쟁 이후엔 미국에 잘보이는, 그래서 시대를 막론하고 잘 사는, 또 힘없는 사람은 무시하고, 힘있는 사람에겐 잘 보이는, 그런 인물. 이인국 박사. 그가 바로 '꺼삐딴 리'였다.

 

그런데 21세기에. 최첨단 과학 시대에, 정보화시대에, 자기에 대해서 다 알려지는시대에, 정부의 최고위직에 이런 관료도, 이런 '꺼삐딴 리'도 여전히 살아남아 고위직에 임명이 되는구나 하는 씁쓸한 생각.

 

아니, 본래 관료란 이런 것이구나... 관료들이란 본래 '꺼삐딴 리'구나.

 

하여 이 땅의 '꺼삐딴 리'들을, 그런 관료들을 시로서 이야기한 사람. 김남주. 그리고 그의 시. 완전. 이런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지만, 관료들은 영혼을 내어놓고 살고 있다고 하는 말이 있지만, 이렇게 이 시에 딱 들어맞을 줄이야.

 

시인은 시대를 꿰뚫어보고, 또 시대를 앞서가기도 하고, 시대를 변혁하기도 하는데, 전사 시인이었던 김남주가 보기에 이건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

 

헛웃음이 아니라, 우리가 참 잘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 하여 전광용의 "꺼삐딴 리"와  김남주의 두 시가 떠오른 날.

 

참고로 한겨레 신문 2013년 7얼 27일자 4면에는 

 

"김대중 땐 햇별정책에 편승하고

 노무현 땐 육군참모총장 됐다

 박근혜 땐 국정원장임명받았다"

 

는 내용이 들어 있는 작은 제목을 단 기사가 나와 있다. 한 번 읽어보기를...

 

그리고 김남주의 이 시, '어떤 관료'. 이런 관료들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하는데, 민주주의 사회에서, 민주공화국에서는 주권이 관료에게 있지 않고 국민에게 있는데, 그게 이루어지고 있을까.

 

어떤 관료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

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듯!

 

일제 말기에 그는 면서기로 채용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근면했기 때문이다

 

미군정 시기에 그는 군주사로 승진했다

남달리 매사에 정직했기 때문이다

 

자유당 시절에 그는 도청과장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성실했기 때문이다

 

공화당 시절에 그는 서기관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공정했기 때문이다

 

민정당 시절에 그는 청백리상을 받았다

반평생을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에게 봉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아프리칸가 어딘가에서 식인종이 쳐들어와서

우리나라를 지배한다 하더라도

한결같이 그는 관리생활을 계속할 것이다

 

국가에는 충성을 국민에게는 봉사를 일념으로 삼아

근면하고 정직하게!

성실하고 공정하게

 

김남주, 저 창살에 햇살이2, 창작과비평사, 1992년. 152-153쪽

 

이런 관료들을 통제하려면 국민의 의사를 대변한다는 국회의원들을 제대로 뽑아야 하는데, 지금 우리 사회에서 국회의원들은 제 역할을 하고 있는가. 언론에서 보도되고 있는 국회의원들의 행태는 우리를 실망시키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이들이 혹시 이렇게 해서 뽑히지는 않았는가. 아니, 우리가 이렇게 해서 그들을 뽑지 않았는가. 영혼이 없는 관료나 '꺼삐딴 리'들은 깨어있지 않은 국민이 만들어내지 않았는가, 반성해 보는 날.

 

선거에 대하여

 

개가 나와도 그 지방 사람들은

우리 개 우리 후보 하면서 그 개를 국민의 대표로 뽑아 국회로 보낼것입니다

개가 그 꼬랑지에 OO당의 깃발을 달고

개가 그 주둥이를 놀려 그 지방 사투리도

멍멍멍 지방유세를 하고 다니기만 하면

 

김남주, 선거에 대하여 부분.

 

시와사회사 편집위원회 엮음, "피여 꽃이여 이름이여", 시와사회사, 1994 1판 2쇄. 312쪽에서 재인용

 

적어도 이렇게는 되지 말아야지. 김남주의 시가 과거에만 존재했던 일이 되게, '꺼삐딴 리'들이 존재하지 않게 우리가 깨어있어야지. 암 그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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