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들과 옥천에 갔다 왔다. 옥천하면 안티 조선 운동과 정지용이 떠오르는데... 이문구가 쓴 글에서 옥천에 관한 일화를 읽은 적이 있다. 그 때 그렇지. 그럴 수 있지 하면서 참 인상 싶었는데... 박용래 시인과 옥천에 얽힌 사연.

 

  1973년 8월 며칠경엔가 있은 일이었다. 시인 이 아무개가 자기의 고향이 좋다 하여 작가 유광우 씨와 함께 옥천을 가다 말고 대전에 머문 날이었다. 우리 일행은 차시간에 늦어 막차를 놓쳤으므로 대전에서 하룻밤을 묵어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저녁 어스름에 밀려 온종일 삶던 더위가 그음하려 하자 목촉교 옆의 허름한 탁배기집으로 박시인을 불러 모셨다. 내가 초면인 유씨, 이씨를 인사시키자 박 시인은 무슨 바람이 불어 옥천같이 빼어난 고장을 다 둘러보게 되었더냐고 여간 기특해하여 마지 않았다. 이에 힘입었는지 이씨는 시키지도 않은 옥천 지방의 산수를 자랑 삼아 덧거리하였다. 그러자 박 시인은 대번에 이씨를 겨누어보며 '산 좋고 물 좋은 것은 어느 두메나 일반인데 시인이 고향을 쳐들면서 어떻게 물경풍치만을 떠들 수 있는가. 그런 것은 관광객에게 맡기고 시인이라면 모름지기 자기 고을이 배출한 시인부터 기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라고 바로잡아준 다음,

 "내가 옥천을 기억하는 건 오로지 시인 정지용을 낳은 땅이기 때문이오."

  하며 찻잔을 들어 서운한 마음을 가시려고 하였다. 나와 유씨가 숙연히 고개를 숙일 때였다. 물정 모르는 이씨가

  "그런가요? 나는 정지용이가 우리 게 사람인 줄도 몰랐네......"

  하며 새퉁스런 소리로 두런거렸다. 박 시인의 결곡한 성미를 알고 있던 내가 이제 큰일났구나 싶어 민망한 낯을 둘 데 없어하던 순간이었다. 바람벽에서 벼락 치는 소리가 터지면서 박 시인의 성난 음성이 귓전을 갈겼다.

  "야, 이문구, 너 정말 한심하구나. 너는 이런 거밖에 친구가 웂네? 정지용이 제 고향 선배인 줄두 모르는 이런 무녀리두 시인 명색이라고 하냥 댕기는겨? 이런 것도 사람이라구 마주 앉어 술 마시네?"

 

이문구, 이문구의 문인기행, 에르디아,2011년.  93-94쪽에서.

(이 이야기는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1권 박용래 편에도 나온다.)

 

정지용을 모르는 시인이라. 아니 알았는데, 그가 자신의 고향 출신이라는 사실을 모랐던 시인. 그 시인이 박용래 시인에게 당한 일화. 아무리 시대가 어려워도 한국에서 배출한 위대한 시인은, 특히 자신의 고장 사람이라면 알아야 한다는 것.

 

정지용이 누구인가? 교과서에서 늘 배우던 '청록파'시인들을 시인으로 등단하게끔 추천해준 그 인물 아니던가. 그러니 일반 사람들은 검열이라는 어려운 시절에 정지용을 몰랐다 하더라도 명색이 시인이라고 자처한다면 정지용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박용래 시인의 뜻이었으리라.

 

그런데 내가 도착한 옥천은,

 

넓은 벌 동쪽 끝으로 /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 얼룩백이 황소가 /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 정지용 전집, 민음사, 1992년 2판 6쇄 46쪽 '향수' 1연

 

시인이 그렇게 그리워한 그 고향엔 이미 넓은 벌도 없었고, 휘돌아 나가는 실개천도 없었으며(단지 현대식으로 크게 만들어놓은 개천만이 있었다), 게으른 울음을 우는 얼룩백이 황소도 없었다.

 

하여 나에게 옥천은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정지용 '고향' 1연)라고 읊던 정지용의 마음과 비슷하게 다가왔다.

 

옥천에 도착해서 정지용 생가로 가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 앞의 건물에 커다랗게 붙은 현수막은 옥천이 낳은 또 한사람의 서거를 기념한다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옥천이 그러한가?

 

박용래 시인에게 옥천은 정지용을 낳은 곳으로 기억되지만, 내게 옥천은 언론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려고 했던 곳, 안티 조선 운동을 벌였던 곳으로, 여기에 정지용의 고향으로 남아 있었는데, 정지용과는 별 상관도 없는, 또다른 인물의 이름이 현수막에서 나에게 보여지다니.. 씁쓸한 감정.

 

그래서 지금까지 가보지 못했던 정지용의 고장인 옥천을 큰맘 먹고 벗들과 함께 찾았는데, 초장부터 기분이 별로였다고 할까.

 

여기에 점심으로 먹었던 '구읍할매묵집'은 '구읍'이라는 이름과 '할매'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한옥이 아니라 양옥 건물이었으니, 그것도 상가 건물이었으니, 근처에 있던 한옥집들과 대조되고, 햐, 이거 내가 생각한 옥천과는 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말았다.

 

그럼에도 정지용 생가, 그 아담한 모습에, 그 앞에 흐르는 개천에 시인이 왜 '향수'를 노래했는지, 왜 '고향'을 그리워했는지, 고향의 변모를 서러워했는지 알 수 있었고, 정지용 문학관이 다른 문학관에 비해 그다지 떨어지지 않음에도 입장료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어떻게 운영되나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지만 좋았다고나 할까.

 

여기에 정지용 문학을 보여주는 한국 시의 역사에서 빼놓기 쉬운 인물인 백석, 오장환, 이용악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좋았고, 그리고 입구에 전시해놓은 정지용 문학상 수상 시들도 좋았다고 할까.

 

한국시에서 한 획을 그은 정지용. 그를 한 때 정O용으로 배웠던 적도 있었는데, 이제는 당당히 정지용이라고 하고, 그를 기리는 문학상도, 문학제도 있으니... 시인은 가도 그의 시는 남아 있고, 그의 시정신은 남아있다고 해야 하나.

 

시인이 다른 어떤 인물보다 더 기억되는 사회, 그리고 시인과 마을이 하나로 기억되는 사회, 그런 사회가 바로 문화 사회 아닐까.

 

언론의 민주주의를 실현했던 옥천, 그리고 정지용이라는 위대한 시인을 배출한 옥천. 그 옥천, 나중에 시간이 나면 천천히 '향수길'을 걸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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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 살림지식총서 194
김윤아 지음 / 살림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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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어트 홀은 '문화정체성'은 하나의 본질이 아니라 '입장 취하기'라고 했다. 과거와 소통하는 현재는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고 변화하는 것이다. 결국 나의 문화정체성은 그의 작품들에 대해 작은 한 권의 책으로 '입장 취하기'를 한 것이다. (87쪽)

 

이러한 입장 취하기로 그는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서 파시즘의 흔적이 느껴진다고 한다. 그것도 하야오의 작품 중에서 후기에 해당하는 "원령공주", "센과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분석하면서.

 

이러한 입장 취하기에서 그의 관점을 설득력있게 전달하기 위해 작품의 내용을 분석하고 있는데, 작품의 내용이라기보다는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이미지들을 분석하여 일본의 파시즘과 연결짓고 있다.

 

가령 "원령공주"에서 사슴신이 죽어갈 때 함께 죽어가는 숲의 정령들을 일제시대의 가미가제 특공대에 빗댄다든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는 일본의 신화를 작품에 끌어들여 그들에게 예전의 향수를 일으킨다든지, 신화는 민족을 단결시키는 역할을 해서 파시즘에서 주로  활용했다는 이야기까지 곁들여서 하고 있으며,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는 전쟁을 미화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이야기까지 하고 있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사람들 누구도 긴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으며, 또한 전쟁 상대가 누구인지 나와 있지도 않다는 이야기도 하고 있고.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는 얼굴이 다들 똑같다는, 이는 서구지향의 일본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읽으면서 이렇게 해석을 하는 경우도 있구나 하는 생각과 최근에 미야자키 하야오가 다시 만들었다는 "바람이 분다"에 관한 논쟁이 겹쳐서 떠올랐다.

 

2차세계대전 때 쓰인 비행기를 만든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만든 영화가 "바람이 분다"라고 하니, 파시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고 해도 적어도 전쟁범죄에 쓰인 비행기를 만든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는 것은 아무리 좋게 해석을 해도 파시즘적 요소가 작품에 스며들어 있지 않나 하는 우려가 요즘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데...

 

어쩌면 이 책을 쓴 사람은 거봐,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할지도 모르겠는데...

 

지금까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보면 "원령공주"는 일본 군국주의, 특히 천황제를 미화했다고 하기보다는 자연과 인간의 대결 속에서 자연이 인간에 의해 정복당하고, 폐허가 되지만, 그 폐허는 결국 인간에게도 해를 입힌다는, 그래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고(마지막에 산과 아시타카의 대화을 보면 그렇게 해석이 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는 자본주의의 탐욕을 비판하고 있다고, 즉 경제성장만을 추구했던, 경제동물 일본의 모습을 오히려 작품을 통하여 비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는 "가족"의 의미를 추구하고 있다고 해야 하는데...

 

이 책의 작가가 "입장 취하기"를 하고 있듯이 나역시 "입장 취하기"를 하고 있으며, 이런 입장 취하기들은 결국 같은 영화라도 그 영화에서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이렇게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볼 것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의 위대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그가 거장이라는 소리를 듣는 이유이기도 하겠고.

작품의 몇몇 이미지들로 파시즘적 요소를 파악해내기 보다는 그가 진정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주제에 집중하여 보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신화는 파시즘에서도 주요하게 쓰이지만, 모든 민족에게 자신들의 존재의의를 알려주는 역할도 하고 있으며, 우리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화를 자랑스레 여기고 그것을 작품에 담은 작가를 좋아하지 않는가. 그런 생각이라면 하야오의 작품에 나타난 신화적인 요소는 일본적인 애니메이션을 만들려는 그의 노력으로 보아야지, 파시즘에 대한 향수로 해석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 대한 나의 "입장 취하기"이겠지만.  

 

이 책을 읽은 한 가지 소득은 이렇게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작품들, 좀더 꼼꼼하게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다양한 관점들에 대해서도 알아볼 필요가 있으며, 그런 해석들 속에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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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안도현 시인은 절필을 선언했다.

 

이러한 시대에 시를 쓴다는 일이 부질없다고.

 

시를 통해서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아름답게 할 수 있는데,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시는 세상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많이 보이는데, 그는 이제 그럴 수 없는 시대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세상을 따스한 눈으로 보던 그가, 그런 시를 썼던 그가 이제는 절필을 하다니.

 

마치, '서울로 가는 전봉준'처럼 형형한 눈동자를 빛내고는 있지만, 세상 변혁에 실패한 사람처럼.

 

그러더니 며칠 전에는 안도현 시인이 기소  당했다는 기사가 나기도 했다.

 

그가 한 말이 빌미가 되어 검찰이 그를 기소했다는데, 그는 자신의 일을 국민들이 판단해 줄 거라고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해 놓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신청을 하기 위해 가는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 있었는데, 역시 나는 여기서 '서울로 가는 전봉준'을 느꼈다.

 

시인은 알게모르게 시대를, 자신의 운명을 시를 통해서 표출하고 있다지만, 그를 시인이게 만들어준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지금 그의 모습과 겹쳐질 줄이야.

 

서울로 압송되어 가는 전봉준. 자신의 꿈이 실현되지 않고, 세상 변혁에 실패하고, 결국 죽으러 가는 그 길에 그는 사진 한 장을 남겼다.

세상을 쏘아보는 눈빛. 형형한 눈빛이 뇌리에 박히는 그 사진.

 

그는 가지만, 그의 뜻은 가지 않겠다고 하는 그 눈빛.

 

서울로 가는 전봉준, 재판정으로 가는 안도현. 그의 시를 여기에 적어본다.

 

시인이 재판정이 아닌, 시를 써야할 자리에 있기를 바라면서.

 

서울로 가는 전봉준

 

눈 내리는 만경들 건너 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 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 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 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 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 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 주지 못하였네

못다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나라 풀뿌리들이

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봄바람 찾아오면

수천 개의 푸른 기상나팔을 불어제낄 것을

지금은 손발 묶인 저 얼음장 강줄기가

옥빛 대님을 홀연 풀어헤치고

서해로 출렁거리며 쳐들어 갈 것을

 

우리 성상(聖上)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목숨 타오르겠네

봉준이 이 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안도현, 서울로 가는 전봉준, 민음사, 1994년 중판. 44-45쪽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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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에게 배우다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37
맹문재 지음 / 실천문학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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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는다. 사실 시 읽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도 들고, 도대체 시인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생각도 들고, 이 땅에서 시인을 한다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도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기에 시를 쓸테니...

 

서점에서 시집을 전시해놓은 장소가 점점 줄어들더니 요즘은 시집 찾기 힘들고, 따라서 새롭게 시를 쓰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조차 힘든 때라는 사실이 안타깝다.

 

예전에는 시집을 출판하는 출판사들이 꽤 있었다. 지금까지도 시집을 편찬해내는 창비와 문지를 비롯해서 실천문학사, 민음사, 문학동네, 미래사 등등...

 

그럼에도 이런 출판사들의 시집들조차도 서점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힘드니, 다른 출판사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또 이름없는 시인들의 시집이야 더할 나위 없이 전시되기 힘든 노릇이다.

 

예전에 사놓은 시집들을 가끔 들춰본다. 새롭게 읽을거리가 떨어졌거나, 아니면 머리가 무거워 무언가 안정을 취하고 싶을 때 이 시집, 저 시집을 뒤척거리는데...

 

그만큼 시집은 마음에 큰 위안을 준다. 그래서 늘 가까이에 두고 있으면 좋은, 또 세월이 흘러도 그 가치가 변하지 않는 것이 바로 시집이다.

 

이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시를 보자.

 

물고기에게 배우다

 

개울가에서 아픈 몸 데리고 있다가

무심히 보는 물속

살아온 울타리에 익숙한지

물고기들은 돌덩이에 부딪히는 불상사 한번 없이

제 길을 간다

멈춰 서서 구경도 하고

눈치 보지 않고 입 벌려 배를 채우기도 하고

유유히 간다

길은 어디에도 없는데

쉬지 않고 길을 내고

낸 길은 또 미련을 두지 않고 지운다

즐기면서 길을 내고 낸 길을 버리는 물고기들에게

나는 배운다

약한 자의 발자국을 믿는다면서

슬픈 그림자를 자꾸 눕히지 않는가

물고기들이 무수히 지나갔지만

발자국 하나 남지 않은 저 무한한 광장에

나는 들어선다

 

맹문재, 물고기에게 배우다, 실천문학사, 2002년. 15쪽

 

아마도 시의 화자는 몸이 아프기보다는 마음이 아팠으리라. 그간 세파에 찌들리고, 살기 위해 버둥거리며 살아온 나날들 속에 마음은 지치고, 이런 상태에서 몸 역시 좋지 않았으리라. 그래서 그는 잠시 개울가로 쉬러 나온다. 의식적으로 쉬러 나왔든지, 아니면 우연히 개울에 머무리게 되었든지는 중요하지 않다.

 

시의 화자가 잠시 쉴 틈을 얻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쉴 틈,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여유가 된다. 그 여유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되돌아볼 기회를 갖게 된다. 그래서 쉼은 활동의 다른 이름이 된다. 그 때 눈에 들어온 개울 속... 물은 나를 비추는 거울 역할도 한다. 이 시에서는 단순한 물이 아니다. 물 속 세상이다. 물 속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물고기들이다. 그 물고기들이 나를 비춰주는 역할을 한다.

 

물고기들을 보고 있으니 신기하다. 물 속엔 길도 없는데, 그들은 한 번의 부딪힘도 없이, 서로 갈등도 없이, 또 죽어라고 먹이만을 쫓지도 않고 잘 살아가고 있다. 자기 길을 가되, 그 길을 남겨두고 그 길이 옳다고 하지 않는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름인지, 내 길만이 정당하다는 생각이 없다. 또한 그들 세상에선 정당한 길은 없다. 모든 길이 정당하다. 그리고 그 길은 간 다음에는 지워진다. 지워져야 한다. 지워지지 않고 남겨져 있으면 그 길은 자신의 길이 옳음을 주장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기에.

 

갑자기 내가 살아온 길이 생각난다.

 

'약한 자의 발자국'

 

약한 자들을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고, 또한 그 길만이 옳다고 주장한 적은 없었던가. 약한 자들을 위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그 길 속에서 길을 잃지는 않았던가. 그래서 자꾸 슬픔만을 남겨 놓지 않았던가.

 

발자국은 길이고, 그 발자국을 따라가자고 했지만, 사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하나만의 길이 아니다. 우리들이 가는 길이 모두 길이다.

 

그래서 내가 갈 길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는 곳이 길이 되고, 그 길은 나만의 길이고, 또 그 때의 길일 뿐이라는 사실. 그것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길로 얽매여진 삶이 아닌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또한 누구와도 어울릴 수 있는 광장이 나온다. 그것을 물고기들이 보여주고 있다.

 

이런 생각이 드는 시다. 그래, 어쩌면 집착에 빠져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무엇만을 위해서 산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도 들고.

 

요즘은 정답은 없다는 생각을 한다. 정답이 정해져 있고, 그것이 어디 숨어있어서 그 숨어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고 예전에는 생각했는데, 지금은 정답이란 만들어가는 그 무엇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 시는 마음에 쏙 들어온다. 어쩌면 이렇게 내 마음과 비슷하지. 그런 생각을 하게 한다. 이게 바로 시의 효용성이다. 시를 읽는 즐거움이기도 하고.

 

이런 마음을 가진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한 그루의 나무를 위하여

 

나의 시가

한 그루의 나무만큼만 살았으면 좋겠네

 

플라스틱 스티로폼 시멘트말고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처럼 창창하게

살았으면 좋겠네

나의 시가 발표되기 위해서는

수십 년은 살았을 한 그루의 나무가

베어질 것이네

 

그 나무만큼 나의 시가

사람들의 가슴에 들어찼으면 좋겠네

살아가는 동안

사람들을 이끌어주는 안경이 되고

신발이 되고

부엌칼이 되었으면 좋겠네

 

나의 시가

한 그루의 나무만큼만 살았으면 좋겠네

 

맹문재, 물고기에게 배우다. 실천문학사, 2002년. 101-102쪽 

 

이런 시 말고도 마음에 와닿은 시가 참 많다. 특히 이 시집의 30쪽에 있는 '풀'이란 시는 김수영의 '풀'에서 나온 시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를 읽으면서는 김수영의 풀이 자꾸 생각나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나오기도 했으니...

 

더워진다. 시를 읽어보자. 아님 휴가지에서 시집 한 권. 얼마나 좋은가.

 

덧글

 

안타깝게도 이 시집은 품절이라고 나온다. 아마도 헌책방이나 도서관에서 구할 수 있을 듯. 굳이 이 시집이 아니어도 좋다. 시들은 서로 서로 통하니, 적어도 자신의 마음에 드는 시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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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참 좋게 읽었던 시집이다.

 

이 시집에서 마음에 들었던 시도 꽤 있었고... 무엇보다 시가 어렵지 않다고 생각해서 더 좋았고.

 

제목이 "시간의 그물"이다 보니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변한 자신에 대한 이야기, 세상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는데, 그 중에서는 이미 변해버린 고향, 즉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이야기와 변한 세상에 대한 이야기, 따라서 상실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있는 시들이 제법 있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릴 적에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했는데, 그 땐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세월의 무게를 느끼는 나이가 되어가고, 세상이 점점 더 무거워지고, 나 자신은 점점 더 작아지고... 꿈은 사라지고, 현실은 어두워지고, 갈 길은 먼데, 앞은 보이지 않는 듯하고...

 

시집을 넘기면 처음에 이런 시가 나온다.

 

신발

 

신발의 문수 바꾸지 앟아도 되던 날부터

하나 둘씩 내 곁을 떠나간 친구여

하나 둘씩 내 곂을 떠나간 꿈이여

 

이재무, 시간의 그물, 문학동네. 1997년 초판. 11쪽

 

나이를 먹어감은 상실과 통하는 나이, 현실적이 되어갈수록 점점 자신의 꿈과는 멀어지는 나이. 어릴 적 자신을 잃어가는 나이. 그런 나이듦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신발의 문수.

 

신발의 문수를 바꾸지 않아도 되던 날, 이는 어른이 된 날이고, 어른이 되었음은 현실적이 되었음이고, 현실적이 되었음은 삶에 자신이 얽매이게 되었음이고, 삶에 얽매이게 되었음은 친구들과 만나는 횟수를 줄이는 나이가 되었음을, 많은 꿈들을 접고, 오로지 생활을 위해서 전념하는 나이가 되었음을, 씁쓸하지만.. 그런 나이듦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육체적인 나이는 먹을수록 꿈을 잃어가겠지만, 정신적인 나이는 먹어도 먹어도 꿈을 잃은 나이는 아닐터...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신이 시대의 변함이 결코 좋은 쪽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일 터이다.

 

하여 이런 나이듦에 대한 시가 한 편 더 있다.

 

마흔

 

몸에 난 상처조차 쉽게 아물어주지 않는다

그러니 마음이 겪는 아픔이야 오죽하겠는가

유혹은 많고 녹스는 몸 무겁구나

 

이재무, 시간의 그물, 문학동네, 1997년 초판. 99쪽

 

불혹의 나이. 그러나 몸이 무거워지고, 미혹되지 않음은 어쩌면 도전하지 않음의 다른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 시가 하게 한다. 그래, 나이듦은 어쩌면 안주일지도, 그 안주를 통해 몸은 점점 무거워지고, 정신은 도전을 포기하는, 하여 실패로 인한 마음의 아픔은 회복 불가능할 수준까지 이르는 그런 나이.

 

그렇다고 나이 먹었다고 주저앉을 수만은 없는 일. 녹스는 몸, 무겁더라도 움직여야 한다. 움직임이 바로 우리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이런 나이듦에 대한 시 속에서 요즘 정치 상황과 맞물려 내 눈에 쏙 들어온 시가 있었으니..

 

                        도배공

 

이미 벽과 한몸이 되어버린 낡은 벽지

벗겨내는 일 여간 고되지 않다

보라, 안간힘으로 버티는 저 완강한

기성의 아집과 집착을

그는 그만 이쯤에서 오래된 고집과 타협하고 싶어진다

갑자기 그는 일을 서두른다

낡은 벽지는 더 많이 아주 오래 살아남는다

 

이재무, 시간의 그물, 문학동네, 1997년 초판. 78쪽

 

우리들이 바로 이 도배공과 같지 않았을까... 낡은 벽지를 싹 걷어내고, 아주 말끔하게, 완전히 걷어내고, 그 자리를 깨끗이 청소하고, 그 다음에야 새 벽지를 발라야 하는데, 우리는 힘들다는 이유로,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또다른 이유로 낡은 벽지를 완전히 걷어내지 않고, 그 위에 그냥 새 벽지를 덧붙이지 않았던가...

 

곰팡이가 슬어있는 벽지 위에 바른 새 벽지. 과연 새 벽지 역할을 할까. 지금까지 우리가 발랐던 벽지들은 이런 낡은 벽지 위에 발랐기에 이상하게도 새로운 느낌을 주지 못하고, 낡은 느낌을, 곧 곰팡이가 스는, 쾨쾨한 냄새를 풍기는 벽지로 변하게 하지 않았을까.

 

우리나라 정치가 이렇지 않았을까. 정치를 이렇게 만든 장본인은 바로 우리들이 아닐까. 우리는 정말로 새 벽지를 바를 마음을 지니고 있었던가. 그냥 눈 가리고 아웅이라고, 대충 더러운 것들이 보이지 않게만 가리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먼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새 벽지 안 쪽에 얼마나 많은 낡은 벽지들이 존재하고 있는가, 그 썩어버린 벽지들이 새 벽지까지 썩게 하고 있지는 않았던가.

 

뉴스를 보기가 싫어진 지는 오래되었지만, 그래도 세상 돌아가는 꼴은 알아야지 하고 보다보면 낡은 벽지에서 스며나오는 그 더러움이 새 벽지도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만들어버리고 있음을 보게 된다.

 

눅눅해진다. 마음이... 그러면 안되는데... 이제는 정말로 깨끗이 긁어내고, 그 위에 새로운 벽지를 발라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이재무의 시집... 어쩌면 나이 들어감에 대하여 쓴 시들이기도 하겠지만, 낡음을 제거하지 않고, 낡음 위에 덧붙여진 새로움이 얼마나 위태로운가를 보여주는 시들도 상당수 있으니... 세월은 우리 육체를 늙어가게 하겠지만, 반대로 우리의 정신은 더욱 젊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

 

이 시집을 읽으며 그래야 한다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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