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 - 이순원 장편소설
이순원 지음 / 곰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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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한다. 왜 그러는지 별다른 생각도 없이 그냥 어른이 되고 싶어한다. 어른이 되면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양, 그렇게 어른이 되고 싶어하는데... 막상 어른들은 아이들을 보고, 그 때가 좋아 하고 만다.

 

아이들은 또 하지 말라는 일은 더 하고 싶어한다. 사람 심리의 보편성이라고 하지만, 자꾸만 하지마 하지마 하고 금기를 세우면 그 금기를 깨고 싶어한다. 아이 때는 더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경험한 것이 적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이 더 많아서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어른보다는 덜하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경험에서 온다. 해 봤는데 잘 안된 경험, 이런 경험들이 쌓여 두려움을 형성한다. 그리고 두려움이 만들어지면 그 다음부터는 안전한 일만 하려 한다. 이게 어른들의 세계다.

 

모험과 격정의 세계는 아이들의 세계다. 아이들은 이런 세계를 겪고 어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아이들에게 이런 세계를 경험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런 기회를 주지 않고, 자연스레 시간이 지나면 어른이 되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어른은 나이가 많다고 어른이 아니다. 어른이 되는 시점이 몇 살 때부터다 하고 정해진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지금 사회는 어른은 만 19세다라고 한다. 법이라고 한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19세가 되면 이제는 어른이라고 한다.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고, 경험도 없는 사람에게 너는 나이가 되었으니 이제 어른이야 하면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러니 나이를 먹었어도 아이로 지내는 사람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이들은 어른이 되기 위해서 시간을 보냈을지 모르지만 그 시간 속에서 어른이 되기 위한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간접경험이든 직접 경험이든.

 

이 책은 어른이 어떻게 되는가를 다루고 있다. 소설이다. 그런데 읽다보면 자전소설이라고 해서 작가의 경험이 100%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마치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듯이 작품을 펼쳐가고 있기 때문이다.

 

간혹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소설 속의 나와 작가를 완전히 동일시 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작가가 진짜 이렇게 경험을 했어,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사람이 정말로 이렇게 행동을 했어 하면서 작가의 개인적 사생활과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사생활을 궁금해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작품은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작품을 읽는 바른 태도라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의 특징은 바로 이렇듯 자신의 이야기를 옆의 사람에게 들려주듯이 이끌어간다는 점이다. 그래서 흥미롭게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갈 수 있다. 읽어가면서 등장인물에 몰입할 수도 있다. 또 자신과 비교하면서 읽을 수도 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대관령에서 고랭지 농사를 짓는 부분에서 정점에 이른다. 이 정점에서 여자와의 경험은 자신이 어른이 아니라는 점을 일깨워주고, 한참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던 승희 누나에게서 어른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자신은 아직도 어른이 되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그는 작품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 무렵 무엇보다 나를 우울하게 했던 것은 지난 이태 동안의 내 삶에 대한 스스로의 생각이었다. 왠지 그 기간 동안 내가 했던 것은 어른 노릇이 아니라 어른 놀이였다는 생각이 자꾸만 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이런 상태로 다시 한 해가 지나고 또 한 해가 지나 스무 살이 된다고 해도,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흘러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된다 해도 그 일에 대해 어떤 후회나 미련 같은 것이 남는다면 그때에도 내가 하는 짓은 여전히 어른 노릇이 아니라 어른 놀이일 것 같은 생각이 들던 것이었다.  (272쪽)

 

결국 혈기왕성한 10대의 방황은 이렇게 끝난다. 그리고 그는 학교로 다시 돌아온다. 한참을 에둘러서 왔지만, 그 에두름은 인생에서 실패가 아니다. 오히려 성공이다. 그는 어른이 되기까지의 시간을 자신의 경험으로 온전히 채웠기 때문이다.

 

하여 19세가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나이에 맞는 어른이 되기 위한 준비를 마친 상태가 된다. 이제부터 그는 어른 놀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 노릇을 하게 될 것이다.

 

아이 시기에, 이 책에서 말하는 시기를 청소년기로 잡으면 청소년기에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은 바로 성과 우정, 그리고 공부일 것이다. 이 책은 이 셋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우정은 승태와의 관계로 성은 승태에게 배우는 것으로, 그러나 나중에는 자신이 승태를 가르치는 것으로 가지만 이것은 피상적인 성에 대한 인식일 뿐임을 깨우치는 과정을, 공부는 굳이 학교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는 다른 방향을 택해야 한다는 청소년기의 생각에서 어른들이 말하는 공부의 중요성과의 마찰이 있지만, 결국 그를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것은 공부였음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밝혀진다.

 

물론 이 때 말하는 공부는 꼭 학교 공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도 공부를 할 수 있지만, 이것이 진정한 공부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행동을 성찰할 수 있는 힘을 키우게 하는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 이 책의 주인공은 이를 책을 통해서 하게 되는데... 이 책을 통해서 하게 된 공부가 자신의 경험을 관통하면서 성찰하게 하고, 다시 주인공을 학교로 돌아오게 한다.

 

성과 우정과 공부. 청소년기에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인데, 이들이 유기적으로 잘 관계를 맺으면 자신의 성장에 무한한 도움을 주게 되고, 이들이 어긋난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 성장에 걸림돌로 작동을 하게 되는데...

 

그렇다. 19세가 되기 전, 나름대로의 길을 찾아 방황을 했던 주인공이 자신의 10대를 의미있게 되돌아볼 수 있음은 바로 성찰하는 힘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인데...

 

지금 청소년들은 어떤 경험을 하면서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힘을 얻어야 하나? 이런 고민을 이 책을 읽은 청소년들은 하게 될 것이고, 어른들은 이렇게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어떻게 도와야 하나 하는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그 점에서 어른들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유익한 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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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는 교육 잡지라고 할 수 있다. 두 달에 한 번 나오는 계간지인데, 나올 때가 되면 많이 기다려진다. 어떤 인연인지 첫호부터 읽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꾸준히 읽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책에서 배우는 점이 아직도 많다고 할 수 있고, 또 이 책에서 제기하는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어떤 호를 읽어도 여러 생각을 하게 하는데, 이번 호는 저번 호에서 연령 대가 더 내려가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가 주제다. 정확히 이 책에 있는 제목으로 한다면 특집 기획이 "육아, 시장의 유혹을 넘다"이다.

 

저번 호는 청소년의 정치 참여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이번에는 육아로 내려갔으니.. 어쩌면 정부에서 야심차게 시도하고 있는 "돌봄교실"이라는 육아(?) 방식에 비판의 칼날을 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정부에서는 어린이집에 보냈을 때 보조금을 지급하는데, 그럼 집에서 애를 키우면? 안 준다. 그래서 어린이집에 보낸다. 이러면 아이는 누가 키우지? 예전 개그콘서트에서 했던 유행어처럼, 소는 누가 키워? 가 아니라 아이는 누가 키우냐 말이다.

 

아이를 키우는 일차적인 사람은 바로 부모 아니던가. 오히려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면 보조금을 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아이를 집에서 부모가 키우면 보조금을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이를 집에서 부모가 키울 수 있게, (키운다는 말이 좀 이상한데, 이 말 대신 함께 지낼 수 있게로 쓰자), 함께 지낼 수 있게 부모가 일에 매달려 가정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현실을 고쳐야 하고, 또 돈이 없어서 아이와 함께 지낼 수 없는 가정을 위해서 보조금을 지급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마찬가지로 돌봄교실도, 아이를 학교에 늦게까지 남기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일찍 퇴근하여 아이와 함께 지낼 수 있게 하는 정책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런 정책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과 더불어 이번 호는 잘못된 육아에 우리가 얼마나 많이 휩쓸리고 있나를 살피고 있다.

 

특히 병원에서부터 여러 협찬하는 회사까지 얽혀 있는 육아시장에서 벗어나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들이 가장 큰 시장으로 삼고 있는 것은 이제 육아시장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기업들이 어른을 대상으로 하다가, 청소년으로 내려갔다가, 이제는 유아를 대상으로 마케팅을 한다고 한다. 유아에 대한 상품을 많이 팔기 위해서 병원을 이용하는 회사들이 많으며, 또 이들은 광고를 통해서 부모들의 불안을 조성해 자신들의 상품을 판다고 한다.

 

거기에서 벗어나기가 얼마나 힘든지는 아이를 키워본 사람은 다 알 것이고...

 

한 번 유이기때 이렇게 회사들의 상품과 관계를 맺은 사람은 그 관계를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유지할 가능성이 많다는 사실이 유추되어 더 모골이 송연해졌다.

 

우리는 아이들을 잘 키운다고 하지만, 그 때 잘 키운다는 말이 자신들의 뜻대로 아이들이 커줄 때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아이들이 자신들의 본성대로 크는 것을 지켜보지 못하고 숱하게 간섭하게 되는 것이다. 또 불안에 떨기도 하고.

 

그러나 옛이야기를 떠올려보자.

 

세 딸에게 누구 복으로 이렇게 잘 사느냐라는 부모의 질문에 두 딸은 부모님 복이라고 해서 부모의 사랑을 받았지만, 내 복으로 산다고 말한 딸은 부모의 미움을 받아 내침을 당한다는 옛이야기. 부모 복으로 산다는 두 딸은 참으로 못나게 되었지만, 자신의 복으로 산다고 말한 딸은 잘 살게 되었다는 결말을 갖고 있는 이야기.

 

이 이야기를 잘 살펴보면 정말로 잘 사는 아이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세상을 열어가는 아이이다. 그것이 잘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모는 아이가 지금 어떻다고 초조해할 필요가 없다. 아이에게는 아이의 복이 있다. 그리고 아이에게는 아이의 인생이 있다. 그 인생에 자신의 인생을 대입해서는 안된다. 이게 이번 호에서 하는 얘기다.

 

이렇게만 생각하면 아이는 늦든 빠르든, 똑똑하든, 그렇지 않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소중한 존재다. 그런 소중한 존재가 부모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즉, 모두 소중한 존재들이 잠시 동안 한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는 상태, 그것이 바로 가족인 것이다.

 

그렇다면 가족 구성원 각자가 자기 인생을 행복하게 살면 그것이 바로 가족의 행복이 된다. 가족의 행복, 그것은 곧 사회의 행복이 된다. 이런 가족이 된다면 아이에게 공부해라, 공부해라 하면서 공부만이 살 길인양 강요하지는 않을터다.

 

이런 가족이 많다면 우리나라 사교육에서 대표적으로 행해지는 선행학습은 굳이 사회구성원들이 사회협약을 맺어(이번 호에 나온다 ) 하지 말자고 결의를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없어진다.  무엇이 아이의 행복인지 아는 부모들이 선행학습을 강요하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이런 점을 생각하게 해준 이번 호. 여러 가지 글들이 있다. 하나하나 모두 소중한 글이다. 그럼에도 늘 특집은 우리 사회의 문제와 맞물려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이 땅의 사람들, 현재 부모이거나 부모였거나, 부모일 사람들이다. 정말 자신이 원하는 아이의 행복은 무엇인지,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번 호를 통해서 고민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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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상처 - 고단한 교사들을 위한 치유 심리학
김현수 지음 / 에듀니티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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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교사들의 위치를 물어보는 질문이 있었다. 교사는 성직자인가, 전문가인가, 노동자인가? 참 쉽지 않은 질문이다. 물론 이 질문은 교사들을 노동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걸러내기 위한 장치로써 작동했지만, 그 자리들은 교사들이 자리할 수 있는 세 자리임에는 틀림이 없다.

 

성직자라고 하면 무한한 희생을 담보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우선 하게 되는데, 이는 성직자들을 '상처받은 치유자'라고 한 말을 떠올리게 한다. 자신이 다른 사람을 치유하지만, 그 자신 역시 상처받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 그 상처로 인해 오히려 남들을 더 잘 치유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상처받은 치유자'의 역할이다. 이 때 상처받은 치유자의 상처는 멋진 옹이가 되어 아름다운 무늬로 나타나게 된다.

 

교사들도 이러한 성직자처럼 무한한 애정을 지니고 아이들을 위해서 자신의 전존재를 걸고 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이들로 인해 상처받고 고통받기고 하지만, 이들은 이 상처받음으로인해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그 상처를 자신의 몸에 껴안고 함께 가려고 한다. 이런 교사들에게 아이들의 상처는 교사의 상처로, 그 상처가 바로 옹이가 되어 아름다운 무늬로 나타나게 된다. 이런 교사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있다.

 

그러나 모든 교사가 이러한 성직자처럼 지낼 수는 없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모습만을 기대해서도 안된다. 교사에게 성직자로서의 역할만을 기대한다면 교사들은 자신들의 상처를 옹이로 만들기 전에 그 상처에 중독되어 쓰러질 것이다.

 

다음에는 전문가로서의 교사. 교사는 전문가다. 최소한 자신이 가르치는 분야에서는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당연한 말이다. 요즘처럼 정보통신기술이 발전한 시대에 전문가가 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남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전문가는 쉽게 상처를 받는다. 자신이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분야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면 엄청난 상처를 받는다. 그 때 받은 상처는 옹이가 되기 전에 곪아버리고 만다. 곪아서 결국 터져버린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사들, 이렇게 자신이 전문가라고 자처하고 있지만 전문가로서 인정을 받지 못해 받은 상처로 인해 곪아서 터진 커다란 상처, 어쩌면 회복불가능한 상처를 안고 지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학교를 떠나는 교사들이 많고, 학교를 떠나버리고 싶어하는 교사들이 많다. 아니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학교에 나오기는 하지만, 그냥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그런 교사들로 변해버린 교사들이 많다. 이게 오늘 우리가 처한 우리나라 교사들의 현실이다.

 

교사들을 전문가로서 제대로 대우하지 않는 현실. 그럼에도 교사들에게는 전문가 이상의 성직자로서의 태도까지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니 교사들은 이래저래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 상처를 받고 있는 교사들, 그 상처를 제대로 치유하지 않으면 피해는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간다. 그래서 교사와 아이들이 함께 상처를 받게 된다.

 

마지막은 노동자로서의 교사.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정받지 못하는 교사의 위상이 바로 노동자일 것이다. 그러나 교사가 노동자가 아닌가. 자신의 노동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는 사람들이 모두 노동자 아닌가. 교사의 수업도, 다른 업무도 모두 노동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이상하게도 노동자라는 개념을 잘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교사들이 노동자라고 하면, 그 순간 그 언어로 인해 상처를 받게 된다. 그리고 주위에서 더 많은 상처를 주는 말들과 행위들을 만나게 된다.

 

참으로 교사들은 어떤 자리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든지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교사들이 언제까지 상처만 받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이 상처를 극복해야만 교사도 학생도 행복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교사와 학생이 행복하다면 자연스레 학부모가 행복해지고, 소위 말하는 학교의 3주체가 행복하다면 우리 사회는 행복한 사회가 될 수밖에 없을 터인데...

 

여기서 교사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은 단순하다. 이 책을 읽은 소감을 간단히 말하라면 교사들은 자신의 상처를 감추어서는 안된다. 적극적으로 상처를 드러내라다.

 

즉, 교사들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 나는 어떻게 해야 행복한가?에 대한 질문을 끝없이 하고 그것을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이 번민과 고통에서 벗어나는 한 순간이 바로 그가 "Who am I?"라고 질문하는 순간이다. 그는 나는 누구인가? 질문을 하고 '나는 장발장이다'라고 외치는 순간 자신의 상처에서 벗어난다. 상처가 옹이가 되어 무늬가 되는 순간이다.

 

교사도 마찬가지다. 교사는 누구인가라고 묻지 말고,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바로 자신의 위치를 찾는 일. 그 다음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해야만 하는 일과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구분하면 된다.

 

이런 구분을 통해 할 수 있는 일과 해야만 하는 일을 하면 된다. 그리고 이런 일들을 하는데 혼자 할 생각을 하지 말고 아이들과 함께, 동료 교사들과 함께, 더 나아가 사회 구성원들과 함께 할 생각을 하면 된다.

 

생각에서 행동으로 나아가면 된다. 우리는 생각이 행동을 바꾸지만, 행동 역시 생각을 바꾼다. 그렇기에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해서 행동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교사들 스스로 행복해지려고 해야 한다.

 

교사가 행복해야 아이들이 행복하고, 아이들이 행복하면 교사 역시 행복해지고, 교사와 아이들이 모두 행복해지면 사회도 행복해진다.

 

엠마 골드만이었던가, '내가 춤추지 않으면 혁명이 아니다'라고 했던 사람이. 교사가 행복하지 않은 교육개혁은 개혁이 아니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 땅에서 지치고 힘들어하는 교사, 아이들에게서, 학부모에게서, 교육관료에게서, 이 나라 현실에게서 상처를 받고 있지만, 이 상처를 옹이로 만들어야 한다. 옹이가 무늬가 되어 우리 교육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게 해야 한다.

 

이 책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그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고...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으라고... 자신들의 행복을 찾으라고. 행복에는 정답이 없으니 자신이 어떨 때 행복한지 그것부터 생각해 보라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의미를 찾으라고.. 빅터 프랭클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하는 일에서 의미를 찾으면 행복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행복의 지름길이다.

 

상처받은 교사들... 그 상처를 감추려 하지 마라. 그 상처는 교육을 아름답게 만드는 무늬가 되는 옹이다. 교사의 상처가 옹이가 되어 교육의 멋진 무늬가 되게 하자.

 

이 책은 이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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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대표 시 선집 민음의 시 201
김행숙 외 엮음 / 민음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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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은 온몸으로 시를 밀고 나갔다고 한다. 온몸으로 시를 썼다는 얘기는 자신의 삶이 곧 시가 되었다는 얘기다.

 

그런 김수영은 시대와 불화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는데... 왜냐하면 온몸으로 밀고 나간다는 얘기는 자신이 처해 있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새로운 것이든, 더 발전적인 것이든 현재에 머물러 있지 않은 시를 쓴 시인, 그가 바로 김수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그를 기려서 제정한 상이 김수영문 학상이다. 지금까지 32회까지 수상작이 나왔다. 이들은 각자가 나름대로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 특성을 이번 김수영 문학상 수상시집을 보면 그 특성을 알 수 있다.

 

1회 정희성의 시로부터 32회 손미의 시까지 참으로 다양한 시들이 있는데, 이런 다양성이 김수영의 시를 더 풍부하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제목을 김수영의 시론에서 나온 '시란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는 구절에서 따오고 있는데, 이렇게 시는 온몸을 울리는 역할을 한다.

 

시대에 따라서 온몸을 울리는 시들이 어떤 시들인지, 70-80년대에는 시대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그 시대에 맞서는 시들이 우리들의 온몸을 울렸다면, 형식적 민주주의가 이루어졌다는 90년대 이후에는 이제 시의 독특한 모습을 실험하는 시들이 온몸을 울리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시의 사회적 역할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형식은 내용을 담보할 수밖에 없으므로, 시의 형식적 실험은 내용의 실험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각 수상시집에서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시 두 편씩을 실었다. 도대체 어떤 시들이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는지 알고 싶다면 이 시집을 보면 될 것이다. 알토란 같은 시들을 잘 모아놓았으니 말이다.

 

다만, 책이 조금 두터워지더라도 각 회 수상작들 뒤에 수상작 선정 이유가 있을텐데, 그 선정 이유를 함께 실어주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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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판서블 컴퍼니, 파타고니아
이본 쉬나드 & 빈센트 스탠리 지음, 박찬웅 외 옮김 / 틔움출판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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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파타고니아라는 이름을 최근에 들었다. 책임있는 기업을 표방하고 있다고 하는. 그래서 그들은 환경에 최소한의 피해를 주는 방향으로 자신들의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고, 그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자연환경만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도 제대로 맺으려는 기업이라는 말을 들어서 흥미를 가졌던 기업이다.

 

최근에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이 나왔는데, 볼까 하다 너무도 슬퍼서 볼 엄두를 내지 못했던 그 영화는 기업의 책임이 도대체 이렇게 방기될 수도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는데... 일하는 사람의 몸에 그토록 해로운 제품인데, 어떻게 괜찮은 제품이 될 수 있는지 의문을 품게 하는 영화. 영화를 보지 않고도 내용을 대충 짐작하게 된 건, "삼성반도체와 백혈병"이라는 책을 보아서 일텐데...

 

만약 파타고니아 기업이라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그에 대한 해결책이 나와 있었다. 그들이 만든 제품을 판매하는데 판매하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말을 들은 이 기업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문제는 포름알데히드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작업 공정을 바꾸게 된다. 이 약품을 쓰지 않고도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해 낸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옷을 만들 때도 유기농 면만을 사용하려고 한다고 한다. 자신의 기업이 살기 위해서 토양을 오염시킬 수는 없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기에 가능한 일인데... 자연을 훼손 안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이 기업을 책임지는 기업으로 인식되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이들 역시 기업을 운영하기에 이윤을 남기지 않으면 안된다. 이윤을 남기되 그것이 노동자와 사회와 자연에 가장 적은 피해를 주는 방향으로 운영이 되도록 하는 것. 그것이 최소한 기업이 지녀야 할 책임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이 책의 뒷부분 한국의 독자에게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파타고니아의 사명 선언문은 "우리는 필요한 제품을 최고의 품질로 만들고, 제품 생산으로 환경 피해를 주지 않으며, 환경위기 극복을 위한 해법을 찾아 널리 알리고 실천한다."이다.

 

이 선언문에는 노동자에 대한 것이 나타나 있지 않지만 이들은 노동자가 곧 소비자가 되고, 지역하회 주민이 되며, 자연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야 할 사람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가장 쾌적한 환경에서 자신의 노동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지낼 수 있도록 기업의 환경을 조성한다고 한다.

 

건강한 노동자로 살 수 있도록 기업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 그것에서 점차 확장이 되면 이 지구의 건강까지 나아가게 된다.

 

즉, 자신들이 고용한 사람들이 의미를 지니고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기업, 그런 기업이 결국 지구의 환경을 보호하는 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는 얘기인데...

 

이 기업도 이윤이 너무도 안 날 때는 구조조정을 통해 노동자들을 해고한 적이 있었다고도 하니, 정말 기업의 책임은 어디까지인지 결정하기가 어렵다.

 

어쩔 수 없이 구조조정을 하더라도, 그들이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는 기업이라면 나름 책임있는 기업이라고 할텐데... 왜 자꾸 우리나라 기업들과 비교가 되는지.

 

이들이 이 책을 쓴 이유는 단지 자기들이 이렇게 잘해왔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기업들도 충분히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고, 앞으로 기업을 운영하기를 바라는 청년들에게 어떤 기업이 책임있는 기업인지, 좋은 기업인지를 알려주기 위해서라고 하니... 우리나라 기업인들은 기본적으로 이런 책 정도는 읽어두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단지 이윤을 얼마나 많이 남기느냐 하는 책 말고 말이다.

 

그리고 이런 기업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소위 말하는 착한 소비, 공정 무역 등이 강화될 필요가 있다. 착한 소비란 자신의 소비가 지구의 환경을 파괴하는 비용이 들어있음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소비일테고, 공정 무역도 마찬가지일테다.

 

즉,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제품에는 그것이 쓰임이 다했을 때 어떻게 처리되느냐 하는 비용도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소비자들이 나와야 한다는 얘기다. 그들이 그런 소비를 하기 시작하면 기업들도 함부로 제품을 생산하지 못할 것이다.

 

이 책의 저자들이 이야기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요즘의 소비자들은 생산자이기도 하고, 또 폭넓은 정보력과 빨리 공유할 수 있는 통신망이 있으므로 비윤리적인 기업은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 비윤리적인 기업은 장기적으로 볼 때 이윤을 남기기 힘들다는 것. 당장은 책임있는 기업이 이윤을 많이 남기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멀게 보면 이런 기업이 이윤을 많이 남긴다는 것.

 

그래서 미국이 경제위기로 휘청거릴 때도 사회적 책임을 다했던 기업들은 높은 이윤을 남기고 있다는 사례를 들고 있다.

 

자, 기업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기업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아니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지구의 한 부분을 파괴하는 것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최소화할 수 있는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 그런 노력을 하는 기업이 바로 책임을 지는 기업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기업이 인정을 받고 자리를 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단지 유행이나 편리를 따지는 기업보다는 말이다.

 

기업은 책임을 지는 기업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기업이 책임 있는 기업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소비자로서의 우리의 태도 역시 중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책임 있는 기업을 운영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유용하겠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너무도 유용한 책이다. 적어도 우리가 깨어 있다면 책임 있는 기업들이 더 많이 생겨날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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