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 없는 시대에 희망을 노래하는 것은 사치다.

 

이런 말을 해야 하나?

 

아니면 희망이 없는 시대에 희망을 노래해야만 한다고 해야 하나?

 

참 캄캄하다. 먹먹하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좋을 듯하다.

 

도대체 앞이 보이지 않으니...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못하고 따지기 전에, 이미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가려버리고 있으니...

 

하여 희망은 없다. 희망이 없기에 나는 희망을 찾는다. 있으면 굳이 찾을 필요없으므로.

 

삶창 94호 책 겉면의 그림이 나를 또 먹먹하게 한다. 6인 병실.

 

여섯 명의 환자가 같은 공간에 있지만 이들은 모두 다른 공간에 있다. 이들은 각자 자기만의 것을 바라보고 있을 뿐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다.

 

그래, 이게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서로가 서로를 보고 있는듯하지만 절대로 서로를 보고 있지 못하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그렇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그렇고, 각 정당들이 그렇고, 그렇고, 그렇고.

 

삶창 94호 특집이 "나는~중이다"이다. 여기에 건방지게 나는 희망을 찾는 중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이렇게라도 희망을 찾는 흉내라도 내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아서.

 

그래도 삶창을 읽으면서 조금의 따스함을 느낀다. 이러한 따스함이 희망과 연결이 됐으면 좋으련만.

 

희망이 없는 시대, 다시 희망을 찾자. 희망을 찾는 몸부림이 우리를 살아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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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퍼센트 우주 - 우주의 96퍼센트를 차지하는 암흑물질ㆍ암흑에너지를 말하다
리처드 파넥 지음, 김혜원 옮김 / 시공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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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이 있다. 자신이 속한 세계가 세계의 전부인양 알고 있는 존재. 더 넓은 셋상을 보지 못하는 존재.

 

우리 인간은 '우물 안 개구리'를 비웃지만, 사실 우리들 인간 자체가 '우물 안 인간'이지 않은가.

 

우물 안에서 우물의 크기만한 구멍으로만 세상을 보는. 그러한 존재. 인간.

 

지구라는 행성이 얼마나 작은지 알고 있으면서도 그 지구가 전부인양 아등바등 대며, 서로 갈등하며 지내는 인간.

 

이러한 인간들이 눈을 우주로 돌린 지는 얼마되지 않는다. 몇 백년 전만 해도 인간은 우주의 중심이 지구인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지구는 우주 중에서도 아주 작은, 작아도 너무 작아 먼지보다도 작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깨달음에서 인간은 우주를 탐구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올해 들어서야 인간이 만든 기계가 태양계를 벗어났다고 하니, 우리는 볼 수 있는 것보다, 보지 못하는 것이 훨씬 많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볼 수 없음의 대표적인 존재가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는 겨우 4%에 불과하다는 주장. 이것은 허황된 주장이 아니라 최근의 과학계에서, 특히 천문학계에서는 정설이라고 할 수 있다는데...

 

우주에 우리가 모르는 물질이나 에너지가 96%가 된다는 사실은 우리 인간이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 알게 해준다.

 

하긴 빛의 속도록 140억년이 걸리는 자리에도 은하가 있다고 하고, 이들 은하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팽창을 하고 있다고 하니, 인간의 지적 능력으로는 아직도 4% 안에 머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계속 노력하고 있다. 암흑물질을 발견하려는 노력, 암흑에너지가 무엇인지 밝히려는 노력.. 그러한 노력들을 통해 우리는 더 넓은 우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이 책은 이러한 과학자들의 노력을 다루고 있다. 처음에 지구 중심에서 태양 중심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간략히 소개한 다음에 뉴턴의 업적과 이를 더욱 현실에 맞게 수정한 아인슈타인의 노력, 그리고 그들 뒤를 이어 우주를 탐구하는 과학자들의 모습을 '팩션'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알려준다.

 

많은 과학 용어들이 나오지만, 이 책을 하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이면 과학에 문외한이라도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우주의 본질을 밝히려는 과학자들의 노력과 경쟁을 흥미롭게 서술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우주에 관한 과학자들의 노력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과학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우주과학, 천문학, 또는 물리학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도 하고 있다.

 

가장 큰 대상을 다루고 있는 천문학과 가장 작은 입자들을 다루고 있는 물리학, 이들이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협력하고 경쟁하는지를 이 책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고, 또 과학자들끼리의 협력과 경쟁에 대해서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보여줌으로써 우리 인간은 이제 겨우 '우물 밖'으로 나왔음을 알게 해주기도 한다.

 

갈 길은 멀다. 할 일도 많다. 이게 우리 인간들에게 주어진 희망이자 과제 아닐까?


칸트는 '우리가 어디까지 인식할 수 있을까'하는 질문을 던지면서 우리의 인식 너머에 있는 존재를 '물자체'란 개념으로 정립해내었는데... 천문학에서는 아직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분명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존재를 '암흑물질','암흑에너지'라는 개념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인식 너머에 있지만, 언젠가는 우리 인식 안쪽으로 들어올 수 있는 존재. 그러한 존재들에 대한 탐색은 우리 인간에 대한 탐색과도 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아주 작은 입자들에 눈을 돌리든, 너무도 큰 존재인 우주에 눈을 돌리든, 그것은 결국 우리 인간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과학자들이 치열한 모습, 그리고 자신들이 흥미를 지닌 부문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 이런 것들을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아마도 이런 책을 통해 우주나 물리학, 수학에 관심을 가진다면 그 흥미를 이어서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과학을 하겠다는 사람이 나오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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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라는 말이 득세를 하는 세상이다. 전문가의 말이 마치 최종적인 판단처럼 여겨지는 것은, 우리나라가 지금 각 분야별로  파편화되었다는 얘기다. 전체를 볼 수 없게 된 사회라는 뜻이기도 하다.

 

지금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데,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각자 다른 소리들만 한다. 이들은 전체를 보지 않는다. 오직 자기 것만을 본다.

 

그런데 자기 것이 완벽하다고 해서 전체가 훌륭해지나? 그렇지는 않다. 전체는 부분들의 단순한 합이 아니기 때문이다.

 

각 분야의 좋은 점을 다 모아놓았다고 해서 전체가 좋아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전체를 보는 일이다. 전체를 보고, 그 전체 속에서 부분을 생각한다면 세상은 각자 잘 굴러가겠지만, 전체의 흐름을 거스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요즘 일어나는 일들은 무서우리만큼 개별적이고 분산적이다.

 

원자력(이 말을 이제는 핵이라고 써야 할텐데...) 문제만 해도 그렇고, 4대강도 그렇고, 비정규직 문제도 그렇고, 요즘 한창 불붙고 있는 이념논쟁도 그렇고, 한국사 교과서 문제도 그렇고...

 

정말로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데, 이 일들이 하나로 통합이 되지 않는다. 전체를 무시하고 각 분야에서만 말들이 난무한다. 특히,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더.

 

그러나 이들은 다 연결되어 있다. 세상의 어떤 일들도 홀로 존재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각자의 일들은 이렇게든 저렇게든 연결이 된다.

 

가끔 나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나 역시 내 문제에서만 맴돌고 있을 뿐이다. 그럴 때 두 달에 한 번 받아보는 녹색평론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번엔 원자력국가와 민중의 삶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데, 원자력 문제는 녹색평론이 꾸준히 다루어오고 있는 문제다. 이는 단지 발전소만의 문제가 아니라, 요즘 밀양에서 벌어지고 있는 송전탑 건설 문제와 같이 발전소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도 심각한 삶의 침탈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니...

 

이것은 또한 지금의 삶의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할텐데... 하여 녹색평론은 우리네 삶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기본소득"을 이야기하고 있다. "기본소득"은 공상적인 이야기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충분히 가능하고, 또 빨리 시행해야 하는 일인데,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공론화가 되어 있지 않다.

 

이는 진보정당에서도 아직 자신들의 정책으로 다루고 있지 않은데, 이에 대한 철저한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스페인에서 거의 실험도시, 자유도시라 할 수 있는 마리날레다 이야기도 있으니, 이런 사례들이 참조가 될 듯도 하다.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으면서 전문가라고 자처하기보다는, 전체를 볼 수 있는 안목을 키울 수 있는 노력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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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자유로운 글쓰기 33 - 쫄지마, 글쓰기는 유쾌한 수다 떨기야! 양철북 청소년 교양 6
김주환 지음 / 양철북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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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7년간의 실수" 이후에 나온 책이다. 글쓴이가 학생들의 글을 모아 책으로 낸 것이.

 

얼마 전에 김은형의 "국어시간에 소설쓰기1,2"를 읽었고, 이 역시 학생들의 작품을 실어놓은 책이었는데...

 

요즘 학생들이 글을 쓸 시간이 있으려나 하는 생각도 들고, 학생들의 글을 모아 책으로 펴내는 교사들이 아직도 있으려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학교에서는 여전히 학생들이 글을 쓰고 또 교사들은 학생들의 글을 모은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글쓰기를 두려워한다.잘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런 강박관념 때문에 더 글쓰기에서 멀어진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글쓰기는 어렵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 글쓰기는 '유쾌한 수다 떨기'라고 한다.

 

친구들과 말로 이런저런 얘기를 하듯이 자신의 이야기를 글을 통해서 하면 된다고 한다. 말하기에도 역시 말 잘하는 친구가 있고, 잘 못하는 친구가 있지만, 말을 잘 못한다고 해서 친구들과 말을 하지 않고 지내지는 않으니, 글도 말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지니면 된다고 한다.

 

그런 관점에서 이 책은 글쓴이가 글에 대해서 먼저 한 마디 하고, 그 다음에는 학생들의 글을 예로 들고, 그 글을 통해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전달해 준다.

 

자기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펼치지 않기에, 학생들의 글을 예로 들고 있기에 읽기에도 편하고, 이해하기도 쉽다.

 

여기에 책을 시, 이야기, 비평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 것도 이해를 쉽게 하고 있다.

 

아마도 학생들을 주요 독자로 상정해서 그런지, 글이 어렵지 않아서 좋다. 그리고 이렇게 써야 한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하지 않아서 좋다.

 

글쓰기. 얼핏 굉장히 정적인 행위같지만, 사실 글쓰기는 상당히 동적인 행위이다. 글을 쓰는 동안 몸은 비록 한 곳에 고정되어 앉아 있지만, 머리 속에서는 온갖 곳을 다니며, 온갖 생각들이 자유롭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런 수많은 움직임 중에 자신에게 맞는 생각을, 남에게 이해하기 쉽게 펼쳐주는 행위, 그것은 지은이의 말처럼 '유쾌한 수다 떨기'일 수밖에 없다.

 

중학생에서 고등학생까지 다양한 글을 모아놓은 책이다. 교사들 역시 읽어보면 참조할 사항이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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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활 - 창간호 - 2013 7-8월호
말과활 편집부 지음 / 일곱번째숲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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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말과 활'이다. 말을 활에 비유를 한 것인지, 말과 활이 다른 존재지만, 함께 존재해야 한다고 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제목을 보고 우선 든 생각은 말이 무기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겠군이었다.

 

고은의 시 '화살'이 떠오르기도 했고... 무수히 많은 말들 중에 활의 역할을 하는 말이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런데 말과 활이 아니라 왜 말과 화살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고...

 

활은 화살을 실어 나르는 도구다. 활이 없으면 화살은 무용지물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사고도, 실천도 말이 없으면 힘들어진다. 우리의 실천이 말을 통해 매개되기 때문이다.

 

맑스가 포이에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철학자는 세상을 해석만 해왔다고, 이제는 세상을 변혁해야 한다'고 했을 때, 그 때 철학자들은 활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말은 세상을 변혁시키기 위한 방법이지, 한 번 쓰고 버려지는 수단에 불과하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말은 '화살'이 아니라 '활'에 비유된다.

 

화살을 담아서 세상을 향해, 목표를 향해 쏘는 활. 세상을 바꾸기를 바라는 염원과 실천을 담아서 세상을 향해, 목표를 향해 날아가는 말.

 

지금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말'이다. 일회용으로 처분되는 말이 아니라, 언제든지 사용이 가능한 '말'이다. 그런 '말'이 바로 '활'이 된다.

 

그러니 제목이 제대로 자리잡고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죽 읽어가면서, 세상에서 가장(?) 무식한 방식으로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어가면서(이런 사회문제를 다루고 있는, 시사성이 있는 책을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는데) 머리 속에서 온갖 생각이 떠오르게 되었는데...

 

온갖 생각이라기보다는 '말과 활'인데... 그 활에서 나간 말이 상대를 향해 꽂히지 않고, 왜 내 가슴으로 날아와 박히는지... 그것도 정확하게 쏙쏙.

 

읽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한 우울과 좌절과 절망과 분노를 느꼈다고 할까. 무언가 희망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희망은 저 멀리 멀어지고, 암담함이 자꾸 앞으로 다가와 나를 끌어가고 있었다.

 

조금 나아지려나 하고 계속 읽어가는데... 그래, 그래도 희망이 있음을 뒤로 가면서 느끼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아니다. 더 많은 과제들이, 더 많은 불안들이, 더 많은 좌절들이 앞으로 죽 늘어서 있다.

 

그래서 '말과 활'을 읽으면서 봄날 이 땅 여기저기 수없이 날아다니는 민들레씨앗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 책에 나와 있는 이 많은 말들은 그 민들레씨앗처럼 여기저기 날아다니는데, 이런 말들이 '활'에서 떠난 '화살'처럼 무언가를 향해 똑바로 날아가지 않고, 어디에 떨어질지 모르게 이렇게 날아다녀도 되나 하는 생각.

 

참, 많은 사람들의 말이 실려 있다. 주제를 몇 가지로 압축해 말들을 실어놓았지만, 그 주제 속에서도 온갖 말들은 서로 관계를 맺기도 하고, 홀로 날아가기도 한다. 이 책이 '활' 역할을 해서 '말'을 세상 속으로 쏘아 놓았는데... 이 '말'들은 민들레씨앗처럼 공중에서 흩날리고 있다.

 

이게 내 느낌이다. 그러다 다시 생각해본다. 민들레씨앗. 이것은 결국 어디엔가 떨어진다. 어디엔가 정착한다. 그리고 자신의 꽃을 피울 준비를 한다.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 그곳에 어디라도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한다. 이게 바로 민들레씨앗이다. 아무런 목적없이 날아다니는 것 같지만, 민들레씨앗은 자신이 있을 곳에 자리를 잡고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이 책도 그랬으면 좋겠다. '활'이 한 방향을 향해 '화살'을 날리지만... 이 책은 그런 한 방향 '활'이 아니라, 사방으로, 어디든지, 언제든지 날아가는, 날아가서 설혹 빗맞더라도 그 자리에서 자신의 자리를 잡는 그런 '민들레씨앗'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금, 이 척박한 시대... 그런 척박한 땅에서도 민들레는 자라니까...

 

읽다가 조금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장면이 있었는데... 이것은 이 많은 '말'들 속에서 서로 다른 모습을 지닌 말들이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비정규직 노조원은 진보당(특정 정당의 이름이 아니라, 진보를 추구하는 정당 모두를 통칭하는 말이다) 의원들을 비판하고 있다. 그들이 비정규직 문제를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지 않고 함께 하지도 않았음을 이 책에서 말하고 있다. 

 

그런데 또 읽다보면 이번에는 진보당 관계자의 글이 있다. 서로의 입장에 따라서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고려하더라도, 이런 글들이 함께 실려 있는데, 서로 의견교환이 안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꼼꼼하게 읽지 않아서 그런가?) 다음 호에서는 약간은 다른 의견이 실리면 거기에 대한 편집자나 또는 상대방의 의견이 실렸으면 좋겠다.

 

또 독일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김상봉의 글에서 노동자의 경영 참여 부분과 뒷부분에 나오는 글인 박노자의 글에서 노동자의 경영 참여 부분은 이를 바라보는 관점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부분에 대해서 더 구체적인 의견교환을 다뤄주었으면 좋겠다.

 

대체로 진보의 위기라고 한다. 작금의 세태는 진보의 위기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이럴 때,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을 일리치에 빗대면 래디컬하다고, 뿌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진보가 근본으로 돌아가(결코 부정적인 의미의 근본주의가 아닌, 자신들의 정체성,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 등을 근본적으로 성찰한다는 뜻으로) 다시 시작하는 화살을 쏘는 '활'이 되었으면 한다. 

 

이 책의 '말'들이 그런 '활'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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