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네 창비시선 302
문동만 지음 / 창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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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는 도종환의 시구절도 있지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흔들린다.  특히 요즘처럼 생존조차도 불분명한 시대에는 이흔들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만다.

 

흔들림.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그런 흔들림. 이 흔들림 속에서도 우리는 중심을 잡아야 한다. 중심을 잡지 못하면 떨어지고 만다. 내 인생을 흔드는 저 많은 것들 속에서 나는 그네에 탄 사람처럼 중심을 잡고 , 그 흔들림에 따라 흔들리되 결코 중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

 

문동만의 시집 "그네"를 집어들고 제일 먼저 읽은 시가 '그네'다. 시집 제목도 '그네'니 제목이 된 시부터 읽어야 한다는 어떤 강박, 또는 어떤 마음이 작동을 한 것이다.

 

아직 누군가의 몸이 떠나지 않은 그네,

그 반동 그대로 앉는다

그 사람처럼 흔들린다

흔들리는 것의 중심은 흔들림

흔들림이야말로 결연한 사유의 진동

누군가 먼저 흔들렸으므로

만졌던 쇠줄조차 따뜻하다

별빛도 흔들리며 곧은 것이다 여기 오는 동안

무한대의 굴절과 저항을 견디며

그렇게 흔들렸던 세월

흔들리며 발열하는 사랑

아직 누군가의 몸이 떠나지 않은 그네

누군가의 몸이 다시 앓을 그네

 

문동만, 그네, 창비. 2009년 초판. 104쪽 '그네' 전문

 

흔들리는 그네에서도 우리는 흔들림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아니, 그 흔들림 속에서 우리는 중심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함께 할 수 있다. 앞선 사람의 흔들림이 뒷사람의 흔들림과 함께 어울려 그 흔들림이 삶을 위기에 처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중심으로 돌연히 나서게 하는 흔들림이 된다.

 

그래서 흔들림은 우리의 몸을 앓게 한다. 고통으로 앓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세계를 향한 몸짓으로써의 앓음.

 

이 앓음이 없으면 우리의 인생은 곧음이 없이 그냥 굴절로만, 흔들림으로만 점철되고 말 것이다. 하여 그네는 흔들림이 꼭 우리의 삶을 어렵게만 하는 것이 아님을, 흔들림 속에서 우리는 함께 함을, 곧음을 찾을 수 있음을, 중심을 잡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가난한 집안의 자식으로 태어나 겪은 그 지독한 가난이, 그 고통이 아버지의 이야기, 어머니의 이야기, 형의 이야기로 형상화되어 적나라하게 시에 드러나 있어서 아직도 하층민의 삶은 퍽퍽함을 잘 보여주고 있는 시집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가난에만 함몰되어 있지는 않는다. 어떤 희망이,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희망이 시집에는 나타나 있다.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나아가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그런 시들로 인해, 어려운 시대, 힘을 얻게 되기도 한다.

 

'청어'란 시를 보면 약한 사람들이 어떻게 강자들에게 대항해야 하는지, 아니 약한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표현하고 있다.

 

청어는 포식자에게 잡아먹히면

그놈의 오장육부에 잔가시를 박으며

기꺼이 죽어준다고 한다

아무리 힘센 놈이라도 그 잔가시의

껄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다음부터는 청어를 잡아먹지 않는다 한다

그리하여 나머지 청어들은

안녕하고 가끔 몇몇의 청어는 자진하여

검은 아가리 속으로 제물처럼

바쳐주곤 한다는 것인데 그런 뭣 같은

얘기가 그런 같기도 하고

엉터리 같기도 하던 꽃비 내리는 봄날인데

오늘 청어 같은 한 사람이

스스로 기름 붓고 구워지셨다

터진 살 사이로 잔가시만 앙상한

물고기 한 마리 하늘길 따라 오르던 날

허방에도 어떤 여린 내장이 있는지

자디잔 핏방울이 떨어졌다

 

문동만, 그네, 창비. 2009년 초판. 85쪽 '청어' 전문

 

이러지 않아야 가장 좋겠지만, 약한 사람이 늘 당하는 일에서 벗어나려면 약한 사람에게도 힘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하는 일. 그런 일.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렇게 강한 자에게서 벗어나는 일이 없어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아직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현실.

 

한 사람이 하나의 청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모든 청어가 되어 누구든 건드리면 이렇게 된다는 사실을 미리 알게 하는 일... 단결만이 살 길이다라는 말. 약한 사람들, 청어들에게 해당하는 말이리라.

 

이러저러한 시들이 마음에 와닿고, 아직도 시의적절한 시들인데... 이 시, '미안하다 봄'만큼 올해 봄에 어울리는 시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정말로, 미안하다, 봄. 미안하다, 청춘이라는 말이 나오게끔 하는 이 봄에...

 

너는 생활의 하수를 미나리꽝으로 받으며

 

푸른 잎들 밀어올리는데

 

회류하지 못하는 황사를 어느새 품어서

 

아침이면 가라앉혀놓고

 

먼 산을 당겨서 가까이 안는데

 

내 마음 마르고 습한 노래들 그치지 않는다

 

미안하다 봄

 

문동만, 그네, 창비, 2009년 초판. 100쪽. '미안하다 봄' 전문

 

하지만 곧 중심을 잡을 것이다. 언제까지 봄에게 미안하다고 하고만 말겠는가. 이 마르고 습한 노래들이 삶을 적시는 단비가 되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흔들리며, 흔들리며, 함께 흔들리며, 흔들림 속에서 중심을 잡으며, 우리는 청어와 같이 잔가시들을 절대로 버리지 않으며... 더 이상 봄에게 미안해 하지 않을 때까지..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이게...이 시집에서 하고자 하는 말이지 않을까... 시를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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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마음에 와 닿는다. "아직은 저항의 나이"

일과시 동인 제7집이란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내가 찾을 수 있는 건 2005년에 나온 일과시 동인 제8집이 있다. 이것까지만 보면 8집까지 이들이 함께 시집을 내었다는 말이 된다.

 

일과시라는 동인들 이름도 맘에 든다. 인간에게 일은 삶을 이루는 필수 요소이듯이 시 또한 우리네 삶에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시가 특정한 사람들만이 향유하는 문학이 아니라 일하는 사람들도 누릴 수 있는 문학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좋고...

 

무엇보다도 일하는 사람들이 시인으로서 시를 쓴다는 것, 일과시가 동떨어지지 않고 하나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좋다.

 

여기에 저항이라는 말이 주는 느낌이 좋고. 저항을 잃으면 과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저항을 할 수 있다는 얘기는 자유가 있다는 얘기고, 그 자유를 자신이 의식하고 있다는 얘기도 되고, 자유를 억압하는 것들에 대해 주체적으로 나설 수 있다는 얘기가 되니, 저항의 나이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을 수밖에.

 

그냥 죽어지낼 수 없는 시대에, 저항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몸부림 아니겠는가. 저항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찌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속된 말로 "남자는 군대 갔다 와야 사람 된다", 또 "군대 갔다 와서 사람 됐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한 사람이 지니고 있었던 저항의식을 군대에서 없애 이제는 고분고분 시류에 편승하는 사람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는다.

 

저항정신을 잃은 순응하는 사람. 그것이 바로 군대를 마친 사람이고, 그 다음부터는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처럼 나서지 마라, 나서 봤자 네 손해다라는 말이 팽배해지게 된다.

 

그러므로 저항을 잃은 나이는 사람으로서의 존재감을 잃은 나이가 되고, 이는 주체성을 잃은 남이 시키는대로 할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존재가 된다.

 

이 사회에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자신의 생각을 잊고, 잃고 남이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 자신이 출세하기 위해서 자신의 판단을 모두 유보하고 그냥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옳고 그름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오로지 이익만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 등등.

 

저항을 하지 못하는 시대... 저항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시대. 그런 시대가 과연 좋은 시대일까? 행복한 시대일까?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는 것도 일종의 저항일진대, 우리는 지금 말을 잃어가고 있지는 않는지... 무엇에 대한 저항이어야 하는지, 무엇을 위한 저항이어야 하는지 알아가야 할텐데.

 

2002년이면 이미 10년이 지난 시집이다. 시의 내용은 그보다 더 오래 되었을텐데...이 시집에서 말하는 일들이 왜 오래 전의 일같지 않고, 지금 벌어지는 일 같은지...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우리는 그동안 강산만 변하게 한 건 아닌지... 그 때 어렵게 살던 일하던 사람들, 지금도 힘들게 살고 있는데.. 이제는 그런 일도 잃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아직은 저항의 나이"가 아니라 "지금은 저항의 나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런지. 우리가 저항을 잃으면 사람으로서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를 잃은 것일테니... 

 

나이에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 "저항의 나이"에 속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 모두 저항의 나이에 머물러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세상의 모든 나이에 저항하지 않을, 저항하지 못할 나이는 없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 생각하고 행동하기.. 이것이 바로 저항이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행동하기... 이것이 저항이다. 우리는 모두 "저항의 나이"에 속해 있다. 저항해야 할 것에 저항하는 것. 그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권리이다. 

 

아직은 저항의 나이

 

 

                              - 문동만

 

눈꽃

너는 피어라 나는 네 안에 지마

그래도 울지 않으리

이마 위에 아이 눈썹 만한 눈이파리

예수가 죽어 간 나이

시인이 요절한 나이

초월하지도 못했네 순응하지도 않았네

아 아직은 저항의 나이

내가 쓴 길도 내가 지운 길도

덮고야 마는 단호한 눈발이여

앞선 발자국 하나 없이 내 흔적을 남겨서

당신에게 가야 하네

눈꽃 피는데, 당신에게 닾기도 전에

눈꽃만 피는데,

우두둑 솔가지 부러지고

나는 먹먹한 눈물 한 방울로

길을 녹이네

 

문동만 외, 아직은 저항의 나이.  삶이보이는창, 2002년초판. 22

 

(그런데 창비에서 나온 문동만의 시집 "그네"에 실려 있는 이 시는 맨 마지막 행이 수정되어 있다.   '길을 녹이네 -> 뵈지 않는 눈길을 녹이네'로)

 

 일과시 동인들, 이 시집에 시를 수록한 시인들 모두 귀한 분들이다. 아직도 우리에게 저항의 정신을 잃지 말라고, 우리가 사는 세상의 본모습에 대해서, 우리들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으니 말이다.

 

이 시집에는 문동만, 조태진, 오도엽, 송경동, 손상열, 서정홍, 김해화, 김해자, 김용만, 김기홍 시인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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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바람이 되어 - 신현림 치유시.산문집
신현림 글.사진 / 사과꽃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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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추모 모임에 갔었다. 거기서 들은 노래가 있는데... 마음을 후벼팠다고 해야 하나, 아련히 밀려오는 슬픔을 어떻게든 마음이 감당해내어야 하는 그런 노래. 슬픔을 슬픔으로 끝내지 않고, 슬픔을 더 높은 감정으로 만들어가는 그런 노래. 그런 가사.

 

궁금했다. 도대체 저 노래는 언제부터 불렸던가. 이번에야 처음으로 듣게 된 노래고, 처음으로 보게 된 가사인데... 왠지 그 가사가 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

 

분명 시일 거야. 시에 곡을 붙인 걸 거야.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하게 됐다.

 

"천 개의 바람이 되어"

 

이거다. 바로 이거야. 하는 생각이 들자마자 구입한 책.

 

순식간에 읽어내려가는데... 마음 한 켠이 아려온다. 그냥 아려오는게 아니라 삶과 죽음에 대해서, 죽음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에 대해서, 그리고 슬픔과 함께 해야 하는 우리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한꺼번에 생각하게 한다.

 

누가 썼는지 모르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낭송되고 노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이 책에 나와 있어서 구체적인 사항을 알 수 있게 된 지적인 면도 있었지만...

 

슬픔은 슬픔으로 다가오지만, 이 슬픔이 언제까지 슬픔으로 멈춰서는 안된다. 슬픔은 나아가야 한다. 그 나아감. 그것이 바로 시이든 아니면 다른 글이든, 말이든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 그래서 이 책은 그런 슬픔으로 가득 차 있을 때 펼쳐보면 좋다.

 

죽음이 상실이 아니라 우리가 맞이해야 할 또 하나의 만남임을, 슬픔이 우리가 멀리해야 할 대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존재임을.

 

이제 전국민이 슬픔에만 젖어 있어서는 안된다. 이 슬픔이 힘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슬픔 속에서 허우적대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우리 것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는 일이다.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슬픔을 극복할 수 있다. 아니, 극복해야만 한다. 찬찬히 이 책에 나온 시를 읽어보자. 그냥 읽어보고 또 읽어보고 마음으로 느껴보자.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솟아오를 것이다.

 

상실의 아픔에 대한 치유에 관한 시도 있고, 그에 대한 산문도 있다. 하나하나 짤막하게 펼쳐져 있어 읽기에도 편하다. 그리고 한 편 한 편을 읽고 생각하기에도 좋다. 조용히 자신을 관조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천 개의 바람... 그냥 읽어보자. 우선 영어로 된 시. 뜻을 알지 못해도 좋다. 그냥 읽기만 하면 무언가가 마음 속에 차오른다.

 

영어로 된 시는 다음과 같다.

 

a thousand winds

 

Do not stand at my grave and weep.

I am not there, I do not sleep.

 

I am a thousand winds that blow.

I am the diamond glint on snow.

 

I am the sunlight on ripened grain.

I am the gentle autumn rain.

 

when you awake in the morning’s hush,

I am the swift uplifting rush

of quiet birds in circled flight,

I am the soft stars that shine at night.

 

Do not stand at my grave and cry,

I am not there, I did not die.

 

- author unknown (17쪽)

 

한글로 된 번역본은 다음과 같다.

 

천 개의 바람이 되어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마세요.
나는 그곳에 없어요. 나는 잠들지 않아요
나는 천의 바람, 천의 숨결로 흩날립니다.
나는 눈 위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입니다.
나는 무르익은 곡식 비추는 햇빛이며
나는 부드러운 가을비입니다.

당신이 아침 소리에 깨어날 때
나는 하늘을 고요히 맴돌고 있어요
나는 밤하늘에 비치는 따스한 별입니다.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마세요
나는 그곳에 없어요. 나는 죽지 않습니다.

 

원작자 미상/신현림 번역

 

다양한 버전의 노래가 있고, 가사가 있던데, 내가 추모 집회에서 들은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가사를 음미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내 영혼 바람 되어

 

그 곳에서 울지 마오 / 나 거기 없소

나 그곳에 잠들지 않았다오. / 그곳에서 슬퍼 마오

나 거기 없소, 그 자리에 잠든 게 아니라오.

 

나는 천의 바람이 되어 / 찬란히 빛나는 눈빛되어

곡식 영그는 햇빛 되어 / 하늘한 가을비 되어

 

그대 아침 고요히 깨어나면 / 새가 되어 날아올라

밤이 되면 저 하늘 별빛 되어 / 부드럽게 빛난다오

그곳에서 슬퍼 마오 / 나 거기 없소, 그 자리에 잠든 게 아니라오

 

나는 천의 바람이 되어 / 찬란히 빛나는 눈빛 되어

곡식 영그는 햇빛 되어 / 하늘한 가을비 되어

 

그대 아침 고요히 깨나면 / 새가 되어 날아올라

밤이 되면 저 하늘 별빛 되어 / 부드럽게 빛난다오

 

그곳에서 슬퍼 마오 / 나 거기 없소, 그 자리에 잠든 게 아니라오

나 거기 없고, 이 세상을 떠난 게 아니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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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기는 새
최성각 지음 / 실천문학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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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풀꽃상"이라고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우리나라 환경에 중요한 영향을 준 대상에게 주는 상인데, 특이하게도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게 주는 상이다.

 

아마도 1회 풀꽃상을 동강의 비오리가 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렇게 풀꽃상을 만들고 환경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려고 노력한 사람이 바로 최성각이다.

 

그는 소설가라고 할 수 있는데, 예전에 그의 소설을 두 권 읽은 적이 있다. "엽편소설"이라는 이름을 단, 아주 짧은 소설을 보통은 '꽁트'라고 하는데, 그는 나뭇잎 같이 짧다고 엽편소설이라는 말을 썼다.

 

"택시 드라이버" 그리고 "사막의 우물을 파는 인부" 이렇게 두 권의 소설집을 읽고 환경에 대해서, 생태에 대해서 이렇게 집중해서 소설을 쓴 작가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우리나라 환경이 생태가 이런 사람들로 인해서 지켜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고.

 

그러다 그가 시골에 들어가 살고, 작품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그의 소설집이 나왔다. 생태소설집이라는 이름을 달고.

 

기존에 발표한 소설들을 묶어서 방대한 한 권의 책으로 내었는데, 가히 생태 문학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형식은 참으로 다양하다. 어떤 작품은 이게 소설이야, 르포야 할 정도로 실명이 직접 나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소설의 형식이라고 하는 이유는 현실 자체가 이미 소설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집에 나온 환경, 생태에 관한 이야기들은 4대강, 밀양 송전탑, 후쿠시마 원전 폭발 이전의 일들을 다루고 있다. 그가 그토록 환경, 생태에 대해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한 발짝도 더 나아지지 않았다고 보아야 하는데...

 

그럼에도 이 작품들이 의미 있는 이유는 이 작품들을 통해 우리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는 단지 과거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는 우리의 현재를 결정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는 단지 역사 속의 한 사건으로만 존재하지 않게 된다. 과거는 끊임없이 현재로 불려나오게 된다. 현재로 불려나오는 과거, 이것은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알려준다.

 

최성각이 이번 작품집이 하는 역할도 그것이다. 우리가 지금 심각한 환경, 생태 위기에 처해있지만, 생태감수성이 지지부진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느끼고 있지만, 우리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환경, 생태 문제들을 작품을 통해 불러냄으로써 다시 우리의 생태 감수성을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제목이 "쫓기는 새"다. 서양 환경운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레이첼 카슨의 책 제목이 "침묵의 봄"이듯이, 그가 자신의 생태 소설들을 묶은 책 제목은 "쫓기는 새"이다. 새들이 쫓기면, 과연 우리에게 봄이 있을까?

 

봄은 새들과 함께 맞이하는 것 아닐까? 그런 점에서 "쫓기는 새"라는 제목은 우리에게 많은 경각심을 준다. 거기다 제목을 새의 처지에서 썼다는 점도 좋다. 결국 새가 쫓긴다는 얘기는 우리가 새를 쫓아냈다는 얘기가 되니,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라고 제목이 말하고 있다.

 

중편도 있고, 단편도 있고, 엽편도 있는데, 한 편 한 편의 소설이 다 깊은 생각을 필요로 한다. 또한 생태감수성을 일깨우고 있다. 우리가 과거 자연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작품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앞으로 자연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하게 해준다고 할 수 있다. 자연과 인간은 결코 떨어져 살아갈 수가 없다. 새가 없으면 봄이 없다. 봄이 없으면 인간도 없다. 결국 새가 없으면 인간도 없다. 이 말은 자연이 없으면 인간도 없다는 말이다.

 

그 점을 명심해야 한다. 앞으로 이렇게 생태소설집이라는 이름을 단 소설이 나오지 않도록, 우리의 삶을 되돌아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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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이 넘도록 충격에 휩싸여 지내고 있는데... 그래서 무언가를 털어놓아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겠다 싶어 "털어놓기와 건강"이란 책을 집어들고 읽었는데...

 

얼마 전에는 국민을 미개하다고 한 사람이 나타나질 않나(국민들 힘으로 민주화를 이루어낸 우리나라인데, 그렇게 민주화를 이루어낸 국민이 미개하다면, 그 국민들로 하여금 민주화를 하게 한 정치인들은 도대체 어느 정도 수준인지... 미개보다 못한 수준은?), 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나 참으로 한심하다.

 

"가난한 집 애들이 설악산이나 경주 불국사로 수학여행을 가면 될 일이지, 왜 배를 타고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다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 어느 목사의 말.

 

부끄러워서 실명을 거론하기조차 싫은 그런 말이다. 이게 말이 되나? 목회자란 사람이. 도대체 이 사람이 진정 종교인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종교인이라면 힘든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위로해주어야 하지 않나?

 

종교인이라면 사람들의 영혼을 파 먹는 것이 아니라, 황폐화된 영혼을 사랑으로 가득차게, 기쁨으로 가득차게 해 주어야 하지 않나?

 

존 러스킨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란 책에서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행복한 사회를 꾸리는 모습을 상상했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바로 예수가 꿈꾸던 세상이고, 모든 종교인이 꿈꾸는 세상 아니던가.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다니.. 그것도 종교인에게서. 이렇게 종교인이 사람들의 영혼을 파먹어도 되는 것인지... 답답하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평화와 위안과 행복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도록 사람들을 이끄는 존재가 바로 종교인 아니던가. 오강남의 역설적인 제목이 붙은 책이 생각나는 나날들이다.

 

"예수는 없다"

 

예수는 없다. 이렇게 말하는 종교인들에게는 예수는 없다. 그들은 예수가 가장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동등한 대우를 해주었다는 사실을, 예수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사랑으로 대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그들에게 과연 예수가 있을까? 하여 오강남이 쓴 또 다른 책이 생각난다. "예수가 외면한 그 한 가지 질문"

 

진정한 종교인이란, 우리의 영혼을 충만하게 하는 종교란 어떤 것일지... 우리를 동등한 사람으로 대우해주는 종교 아니던가. 하느님 아래에서는 모두가 평등한 존재. 모두가 사랑을 받아야 할 존재. 그것이 바로 우리 사람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는 종교인들이 많고, 종교도 많다. 이들이 굳이 언론이 드러낼 필요가 없어서 그렇지, 세상에는 훌륭한 종교인들이, 진정한 종교가 많다.

 

이제는 이들도 좀 드러났으면 좋겠다. 영혼이 맑아지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매번 이렇게 내 영혼을 갉아먹는 소리를 이제는 언론을 통해서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알고 있기로 60-70년대 그 험악했던 시절에 진정한 종교인으로 살아간 사람들이 많았으니 말이다. 강원룡 목사 같은 분도 있었고, 김재준 목사 같은 분도, 문익환 목사 같은 분도... 지학순 주교 같은 분도, 김수환 추기경 같은 분도... 함석헌, 유영모 같은 그런 종교인들... 우리의 영혼을 채워주었던 그런 종교인들이 많았으니,

 

강원룡 목사(강원용이라고 나온다. 그럼에도 나는 강원룡이라는 이름에 더 친숙하다)의 자서전인 "역사의 언덕에서1-5"를 읽고 얼마나 마음이 따뜻해졌던가. 어떻게 지내야 진정한 종교인의 자세인지를 알게 되었던가.

 

다시는 내 영혼을 파 먹는 소리를 하는 종교인, 내 귀를 씻게 만드는 종교인, 그런 사람들 소리가 안 들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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