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무거운 나날들이었다.

 

세상에 나서 무언가를 이루고 세상을 떠나야 하는데, 그럴 틈도 없이 어느 순간 세상을 뜨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더 이상 무엇을 할 수도 없는 상황.

 

이승과 저승이 참 멀리도 있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한 순간 이곳이 바로 이승이고 저승이구나 하게 만드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메멘토 모리!"

 

한 순간만 방심해도 죽음은 이렇게 우리에게 다가와 자신을 잊지 말라고 강요한다. 도저히 잊을 수 없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나는 바로 이 곳에 있다고 늘 죽음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데, 우리는 죽음에게 벽을 쌓고, 마치 죽음은 이 곳에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러다 순간, 그 벽이 아무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 다시 죽음을 이 곳에서 만나게 된다. 경계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이승의 길을 열심히 달리고 있었는데, 죽음의 길은 전혀 다른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승의 길을 달리다 보니 죽음의 길이 바로 눈 앞에 있었다. 아니, 죽음의 길로 들어서 있었다.

 

이런 일들... 나이 들어가면서 점점 더 많이 겪게 된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 하루하루 죽어간다는 것. 이승의 길을 많이 달리고 달려 죽음의 길을 만나게 된다는 것.

 

그렇기에 이승의 길을 달릴 때 더욱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 한 순간 길을 바꿔버린 사람. 그런 사람을 애도하며, 다시 한 번 "메멘토 모리!"

 

경계, 무너짐

-삶과 죽음

선이 있다고

명확한 경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삶을 충실히 살고,

죽음을 향해 가야 한다고,

한 면과 다른 면이

같지 않다고,

만나지 않는다고,

선을 넘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안과 밖이

하나임을,

한쪽을 달리다 보면

이미

다른 쪽에 와 있음을

선과 선이

엉켜있음을,

삶이 곧 죽음인 것을

나이들어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런 일들과 더불어... 세상에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너무도 많이 일어나고 있으니, 이번에 읽은 황규관의 시집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에는 이런 죽음에 대한 시들이 있다. 그게 현실이니...

 

죽음들

귀신 따위는 믿지 않던 내게도

얼굴의 핏기를 싹 빼앗긴 이들이

매일매일 찾아온다

반복은, 심장을 두려움으로

천천히 진화시키는 힘인가

하얀 알약을 한 움큼 털어 먹고 죽고

유독가스를 울음처럼 울쩍이다 죽고

일가족을 태운 채 강물에 뛰어들어 죽고

고전적으로 공중에 목을 매단

숱한 죽음들이, 조간신문처럼

꼭 눈을 뜨면 찾아온다

전쟁을 치른 어머니의 공포가

유전된 것도 아닐 텐데

심지어 맞아 죽고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떠밀려 죽고

몽땅 방화된 죽음도 섞여 있다

비슷비슷한 내력으로

별다를 게 없는 설움으로

굴욕에 무너진 식은땀으로

자꾸 내 삶에 부벼대는 것이다

오늘도 부산의 조선소에서

어제는 집에서 멀지 않는 전자공장에서

그제는 강 건너 허름한 재개발 지역에서

그리고 물고기가 모여 사는 냇물에서

식어버린 몸들이 매일매일 찾아온다

 

황규관,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실천문학사. 2011년. 96-97쪽

 

개인적인 죽음이든, 사회적인 죽음이든 죽음은 우리에게 슬픔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언제까지 슬픔에만 빠져 있을 수는 없다. 이 슬픔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 아니겠는가.

 

다시는 이런 죽음이 없게. 비록 죽음은 늘 삶에 따라오는 그림자 같은 존재지만, 그 죽음을 잘 맞이할 수 있게 우리의 삶을 잘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잘 살자, 그것이 잘 죽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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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 나를 위한 용서 그 아름다운 용서의 기술
프레드 러스킨 지음, 장현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2월
평점 :
품절


용서에 대한 책이 많이 나왔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 울화가 만연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사회 전체에 울화가 많을 때 분노와 좌절이 넘치게 되고, 이는 사회 문제로 비화되기 십상이다.

 

용서란 참 힘든 일이다. 자신을 괴롭히는 대상을 용서한다는 일, 그만큼 힘든 일이 있을까? 반면에 그 용서를 실천한다면 얼마나 강한 사람이 될까? 이 때 강함은 외면적으로 강하다는 얘기가 아니라 내면적으로 강하다는 얘기가 된다.

 

내면적으로 강하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결정하고, 남에 의해 흔들리지 않고 제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다가오는데, 이런 사람을 만드는 데 용서가 큰 몫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용서를 하는 사람은 마음의 평화를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마음의 평화는 외적인 환경에 크게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서는 쉽지 않다. 더구나 자신에게 커다란 피해를 주거나 고통을 준 사람을 용서하기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용서를 해야만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왜냐 용서란 과거의 일을 잊는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과거의 일을 기억하고, 그 일이 다시 반복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미 지나간 일, 되돌릴 수 없는 일에 자신의 마음을 지나치게 많이 주고 있으면 나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 그래서 자신이 어찌 할 수 없는 일에 마음을 쓰는 일은 퇴행에 불과하고, 자꾸 자신을 울화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일이 된다는 것이다.

 

하여 지나간 일은 기억을 하되, 그것에 지나치게 마음을 쓰지 않는 일. 그것이 자기 개인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님을 명심하는 일.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내게 일어난 것.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 없는 것. 하지만 그것에서 다시 출발할 수는 있다는 것. 여기서 용서가 출발을 한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왜?"라는 질문만 하는 사람은 과거에만 얽매이게 된다. "왜 하필이면 내게?"하고만 하는 사람... 원인 분석에만 매달리고, 그런 일이 자기에게 일어났음을 도무지 인정할 수 없어서 괴로워하고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불행에 빠뜨리게 된다.

 

인생 자체가 울화와 분노와 절망으로 점철되어 시간이 갈수록 자신을 파괴하고 만다.

 

이 때 "왜?"라는 질문보다는 "어떻게?"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분명 일은 벌어졌다. 그렇다면 과거의 원인 분석에 매달리기 보다는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방법을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때 할 수 있는 질문이 "어떻게"이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한 실천방법이 이 책에 나와 있다. 용서가 왜 좋은지만을 설명하고 있는 책이 아니라, 용서의 기술을 알려주고 있는 책이다.

 

현재의 자신을 울화로 이끈 사건을 명확히 파악하게 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알며, 그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말을 한다는 기본적인 것에서 시작하여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 그리고 울화를 용서로 바꿀 수 있는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물론 용서는 자신의 건강까지도 좋게 만들 수 있으니, 마음 건강과 몸 건강을 동시에 챙길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바로 용서이고, 또 많은 사람들이 용서를 할 수 있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평화로 충만한 사회일테니 사람들이 행복한 사회일 것이다.

 

용서의 마직막 네 가지 기술은 참으로 단순하다. 아니 단순하기 때문에 용서의 기술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이므로.

 

희망(H)-교육(E)-긍정(A)-장기적 다짐(L)

 

이 말들을 연결지으면 HEAL이 된다. 즉 용서는 치유가 되는 셈이다. 사람은 누구나 희망을 갖지만 그 희망이 모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 그래서 실패했을지라도 다시 그것을 발판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 그렇게 나아가기 위해서는 장기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

 

이엇이 바로 용서의 기술이다. 자세한 것은 책에 나와 있으니 읽어보면 알 일이고... 사회가 분노로 가득 차 있을 때, 내 마음이 분노로, 울화로, 억울함으로 가득 차 있을 때 한 번 시도해 볼 일이다.

 

마음 건강과 몸 건강을 챙길 수 있고, 더불어 사회 건강도 챙길 수 있으니 말이다. 여기에 더하여 주로 용서의 기술이라 함은 남을 용서하는 기술을 말하는 것으로만 이해하기 쉬운데, 이 책에서는 용서의 기술에서 자신을 용서하기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물론 자기를 용서하는 방법은 남을 용서하는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용서, 솔직히 어렵지만 시도해 보고 싶은 일이다. 아니 이제는 시도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을 평화로 이끄는 길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더 이 책에서도 누누히 이야기하고 있지만 용서가 결코 망각은 아니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굴복하는 것도 아니다. 용서란 상대방의 행동을 명확히 인식하고, 그의 책임을 무마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책임을 철저하게 묻되 나 자신의 마음이 상처받는 것을 막는 방법인 것이다.

 

그러니 용서와 굴복을 혼동하지 말고, 용서와 망각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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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선거를 보면서 든 생각. 녹색당을 찍으면 사표가 된다고, 의미 없는 투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소수 정당에 투표를 하면 안된다고... 될 만한 정당을 찍어야 한다고. 최선이 아닌 바에야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고.

 

그러나 그렇다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언제까지 남들에 의탁해서 내려고 하는가? 

 

비록 소수 정당이라고 하더라도 꾸준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하고, 적은 수의 사람이라도 지지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투표가 끝난 다음 녹색당의 득표가 얼마나 될까 궁금해서 찾아 보았다.

 

2년 전에 녹색당의 득표율이 0.48%, 103,811표였다. 정당이 해산되었다가 정당법의 개정을 거치는 우여곡절 끝에 다시 녹색당의 이름을 걸고 지방자치 선거에 도전했는데...

 

몇 %인지는 계산을 해보지 않았다. 선관위에 들어가 광역시비례대표 득표수를 계산해 보았더니, 170,522표가 나왔다. 2년 전보다는 7만표 정도 더 얻었는데,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급진적인 정당은? 또는 가장 좌파인 정당은?이라는 질문을 하면 대답이 각양각색으로 다양하겠지만, 우리나라 정당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고 알고 있는 사람은 그에 대한 답을 "녹색당"이라고 한다.

 

녹색과 좌파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사실 녹색은 지금 체제를 부정하면서 우리가 살 길을 찾아야 한다는, 근본부터 다시 살펴야 한다는 가장 급진적인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녹색이 편안함을 주지만, 그 편안함은 바로 우리가 자연과 사람과 함께 할 때만이 서로가 함께 공존할 때만이 주어질 수 있음을 녹색당은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공약을 내걸고 광역자치단체 비례대표로 출마를 했다. 정당의 이름으로. 지난 번보다는 더 나은 결과를 얻으리라는 생각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지금 이 시대에 녹색당을 알린다는 목표로, 이런 정당도 있다는 것을, 녹색당의 정책을 알린다는 목표로 나왔다고 하는 편이 더 좋을 듯하다.

 

광역자치단체 어느 곳에서도 5%이상을 득표를 하지 못해 아마도 비례대표를 내지는 못했을 거 같은데, 그래도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그 나아감을 보며 황규관의 시집 "패배는 나의 힘"이 생각났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 중에 녹색당과 어울리는 시들이 많이 있고, 또 제목이 된 '패배는 나의 힘'은 지금의 녹색당을 너무도 잘 말해주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를 보자.

 

패배는 나의 힘

 

어제는 내가 졌다

그러나 언제쯤 굴욕을 버릴 것인가

지고 난 다음 허름해진 어깨 위로

바람이 불고, 더 깊은 곳

언어가 닿지 않는 심연을 보았다

오늘도 나는 졌다

패배에 속옷까지 젖었다

적은 내게 모두를 댓가로 요구했지만

나는 아직 그걸 못하고 있다

사실은 이게 더 큰 굴욕이다

이기는 게 희망이나 선(善)이라고

누가 뿌리 깊게 유혹하였나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다시 싸움을 맞는 일

이게 승리나 패배보다 먼저 아닌가

거기서 끝까지 싸워야

눈빛이 텅 빈 침묵이 되어야

어떤 싸움도 치를 수 있는 것

끝내 패배한 자여

패배가 웃음이다

그치지 않고 부는 바람이다

 

황규관, 패배는 나의 힘, 창비 2014년 초판3쇄. 72-73쪽

 

이 시에서 말하고 있듯이 녹색당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래서 이들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패배를 웃음으로 다시 시작한다.

 

그러나 녹색당의 싸움은 배제가 아니라 품는 것에 있다. 이들은 모든 것들을 품으려 한다. 그래서 모두 함께 살자고 한다. 그런 지난한 싸움... 녹색당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황규관의 또 다른 시 '품어야 산다'를 보면 아마도 이런 자세가 바로 녹색당이 지향하고 있는 자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비록 미미하지만, 정당법, 선거법을 개정해서 녹색당이 자신의 목소리를 당당히 내면서 남들을 품는 정책을 펴기를 바란다.

 

적어도 이런 정당이 우리나라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품어야 산다

 

어머니가 배고픈 아기에게 젖을 물리듯

강물의 물살이 지친 물새의 발목을

제 속살로 가만히 주물러주듯

 

품어야 산다

 

폐지수거하다 뙤약볕에 지친

혼자 사는 103호 할머니를

초등학교 울타리 넘어온 느티나무 그늘이

품어주고,

 

아기가 퉁퉁 분 어머니 젖가슴을

이빨 없는 입으로 힘차게 빨아대도

물새의 부르튼 발이

휘도는 물살을 살며시 밀어주듯

 

품어야 산다

 

막다른 골목길이 혼자 선 외등을 품듯

그 자리에서만 외등은 빛나듯

우유배달하는 여자의 입김으로

동이 트듯

 

품는 힘으로

안겨야 산다

 

황규관, 패배는 나의 힘, 창비 2014년 초판3쇄.  104-1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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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자치 단체장 선거가 끝나고, 광역단체장과 기초단체장, 광역의원, 기초의원, 교육감이 뽑혔다. 이들은 이제 4년간 지방자치를 실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단체장이라고 하면 남 앞에 나서서 남들을 이끌어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거꾸로 공무원이 국민의 종이라면, 단체장은 시민의 뜻을 대변해서 행하는 대리인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그들은 군림하는 자들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몇 천 년 전에 살았던 맹자의 말에 의하면 군주는 배고, 백성은 물이라고 했다 배가 제 맘대로 가는 것 같지만, 물이 없으면 배가 갈 수 없고, 또 배가 제대로 가지 않으면 물이 배를 엎어버릴 수도 있다는 그런 말.

 

하여 이번에 뽑힌 지방자치 단체장들은 자신들이 바로 물 위에 위태롭게 떠 가는 배라는 생각을 하고, 물의 흐름을 거스리지 않는 정책을 펼 수 있기를 바란다.

 

우연히 황규관의 시집을 읽게 되었다. 꼭 지방자치 단체장 선거와 맞물리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집에 첫번째로 실린 시가 눈에 확 들어왔다.

 

내가 세운 뜻

 

나이 서른을 몇 년 넘기고서야 뜻 하나 세운다

뭐 그리 큰 뜻은 아니고

인적도 드문 벌판 한 가운데

나무 한그루로 서는 것이

이제사 슬며시 바래보는 소망이다

저 울울창창한 산자락의 숲이

얼마나 보기 좋으냐, 하지만

아무래도 내 자리는

가끔 지나는 새가 한번씩 앉아 쉬고 

그늘이라고 해야 듬성듬성 뙤약볕 내리쬐는

못난 그림자 한 뼘 있으면

좋겠다는, 뜻 하나 세운다

정말 아무래도 그 모습이 내 본모습인 것 같아

나도 가슴이 서늘해지지만

부는 바람에 다른 세상 소식 귀동냥하고

새의 낯빛으로

내 벗들 근황 읽어내면 그만이지

나이 서른을 몇 년 넘기고서야

뜻이라고 세워본다

혼자 묻고 혼자 답하고

내 잎에게

땅 속 벌레 얘기 전해주는 뜻,

이제사 슬며시 세워본다

 

황규관, 물은 제 길을 간다, 갈무리. 2000년. 9쪽-10쪽 

 

이렇게 소박하게 자신의 위치를 소망하는 사람. 남 앞에 서되, 남 위에 군림하지 않고 남과 함께 가는, 그래서 남에게 작은 그늘이나마 줄 수 있는 그런 사람.

 

너무 많은 것을 욕심내지 않고 작은 것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겠다는 소망, 참 작은 소망같지만 너무도 큰 소망이다. 이런 사람이 되기가 얼마나 힘든지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단체장이 되면 이런 작은 소망을 세웠어도 지키기가 힘들다. 이것이 작은 소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체장들, 정말로 남에게 그늘이 되어 줄 수 있는 그런 정책을 펴는,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감추어도 남들은 편안해질 수 있는 그런 정책을 펴겠다는 소망을 세웠으면 한다.

 

하여 그런 소망은 이렇게 이루어내야 한다. 그는 '폭포'라는 시에서 말한다.

 

폭포

 

물이 비명을 지른다

 

곤두박질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먼바다로 가는 길에

꼭 맞아야 할 제 운명에

물이 소리를 지른다

공포에 질린 괴성이 아니라

온몸을 던져 저를 부수는 파열음이다

숲도 그 소리에

한결 더 푸르러진다

떨어져야 하는 운명 없이

누구도 빛나는 바다에 다다르지 못한다는 걸

물은 아는 것이다

물은 제 비명에 담긴

운명에 대한 남김 없는 사랑을

쉴새없이 내지른다

날벌레 한 마리까지 비추는 마음도

자신에 대한 아득한 사랑부터라고

 

황규관, 물은 제 길을 간다. 갈무리, 2000년. 15쪽-16쪽

 

남에게 작은 그늘이 되고 싶다는 소망,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겠다는 소망, 결코 작은 소망이 아니다. 이 시에서 말하는 '빛나는 바다'다. 이 '빛나는 바다'에 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온전히 내던져야 한다. 자신을 내던지는 울음소리, 온몸이 내지르는 소리를 자신이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그렇게 살 때 나 자신도 잘 살게 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

 

이 두 시를 읽고 마음에 새기는 단체장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소수의 이익을 위해서 정책을 펼 수는 없으리라. 그들은 약한 사람을 위해서, 힘든 사람을 위해서,무언가가 필요한 사람을 위해서 정책을 펼칠 수 있으리라. 그러면 그들은 '빛나는 바다' 즉 자신이 가고자 했던 곳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시인 김수영은 이 시와 같은 제목의 시에서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고 했다. 물은 저 혼자 흐르지 않는다. 함께 흐른다. 함께 흐르면서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물은 곧 시민이다. 국민이다.

 

새로 출범하는 자치단체장들... 시민이 물임을, 자신들은 물 위에 떠 있는 배에 불과함을 명심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들은 거창한 정책이 아니라 시민들이 자유롭게, 언제든지 편하게 쉴 수 있는 그늘을 마련해주는 일에 '폭포'처럼 온몸을 던져 나서주었으면 좋겠다.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지켜보는 존재, 길을 알고 제 길을 가는 존재, 그것이 바로 우리 '시민들'이니... 우리 역시 두 눈 똑바로 뜨고 우리의 길을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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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디자인 - 아이들이 몰입하는 맘에드림 혁신학교 이야기 10
남경운.서동석.이경은 지음 / 맘에드림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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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지방자치 단체장 및 교육감 선거일이었다. 오늘 결과가 나왔는데, 교육감을 선출하는 17곳 중에서 13곳에 진보적 성향의 교육감이 당선되었다고 한다.

 

특히 서울의 경우는 혁신학교를 폐지하겠다는 공약을 걸었던 후보가 낙선하고, 혁신학교를 계승발전시키겠다는 후보가 당선이 되었다.

 

혁신학교가 뭐길래 이렇게 논쟁이 되었는지, 혁신학교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은 잘 알 수가 없으리라. 다만 교육이란 진보니 보수니 하는 진영논리로 이야기될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이끌어가야 할 진영을 떠나 함께 협력해야 할, 백년을 내다보고 실시해야 할 그런 백년지대계라는 사실만 명심했으면 좋겠다.

 

이 책은 서울의 한 혁신학교에서 수업혁신을 시도하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수업혁신!

 

어느 순간부터 수업이 되지 않는다고, 학생들이 수업으로부터 도피한다고 그런 말들을 했었는데,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혁신학교에 지원하고 수업혁신을 중점사업으로 삼은 학교의 이야기다.

 

수업혁신이 교사가 어떻게 하면 잘 가르칠까 하는 방향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서로 협력하며 배울 수 있을까 하는 방향에서 접근하는 노력이라면, 수업혁신은 교육의 입장에서 출발하지 않고, 배움의 입장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교사를 중심에 놓은 교육이 아니라 학생이 중심이 되는 교육. 교사의 설명이 주가 되는 수업이 아니라 학생의 배움이 주가 되는 수업. 그런 수업에서는 학생들이 배움으로부터 멀어질 수가 없다.

 

그러나 처음부터 잘 될 수는 없는 일. 이 학교에서는 한 학기동안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고 한다. 수업혁신이라는 것이 교사 개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한 학기를 지나면서 깨닫게 되고, 결국 교사들이 함께 수업혁신에 나설 때 수업혁신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알게 되고 그렇게 활동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내 수업이니 내가 책임진다는 자세가 아니라, 우리의 수업이니 우리가 함께 책임지자라는 자세로 돌아서는 이 지점. 바로 이 지점에서 수업혁신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우리의 수업이 같은 교과만의 수업이 아니라, 모든 교사의 수업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그래서 내 수업을 같은 교과의 교사들에게 보아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교과의 교사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보여주고 이야기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것이 이 학교가 실시한 수업혁신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다른 교과의 교사들이 모여 수업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이게 혁신학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겠지만... 우선 교사의 잡무를 없애야 한다. 전담행정사를 두어 교사를 공문으로부터 해방하는 일. 그 다음에는 방과후 수업을 현직 교사들이 하지 않도록 한 일. 그래서 오후의 시간을 낼 수 있도록 한 일.

 

이런 조건이 갖추어진 다음에 비로소 교사들이 시간을 내어 수업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자, 이것이 불가능한가? 이렇게 되기까지 지원을 해주는 것이 혁신학교에 대한 특권인가?

 

아니다. 이것은 모든 학교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교사들이 수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일. 방과후에 교사들끼리 모여 의논을 할 수 있게 하는 일. 이건 학교 교육의 기본이 아니던가.

 

혁신학교라서 가능하다가 아니라 모든 학교가 이렇게 되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조건을 만들어주어야 하는 기관이 바로 교육청이다. 다행히도 진보교육감들이 대거 당선된 이 때 아마도 교육조건에 대한 이런 논의가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기대를 한다.

 

수업혁신이 되었다고 당장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교육에 있어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조급증이다. 이 조급증을 버리고, 수업혁신을 통해 아이들의 수업태도가 달라졌음에 만족을 해도 되고, 아이들의 표정이 밝아졌음에 만족해도 된다. 그러면 자연스레 아이들은 배움으로 한발짝씩 다가서게 된다.

 

여기에 결과 중심의 평가보다는 과정 중심의 평가가 이루어진다면 수업혁신은 더욱 쉽고 빠르게 이루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만의 수업이 아니라 우리의 수업이라는 생각으로 함께 수업을 고민하면서 수업했던 서울형 혁신학교...한울중학교 선생님들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이런 수업혁신이 모든 학교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음을... 그게 가능하게 교육의 조건을 만들어가야 함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교육감들이 이런 조건을 만들어 내는 정책을 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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