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의 기억 - 아파르트헤이트가 건네는 이야기들 나를 찾아가는 징검다리 소설
베벌리 나이두 지음, 이경상 옮김 / 생각과느낌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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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공화국.

 

이 나라에 대해서 알려 주는 인물은 둘이다.

 

한 명은 인도의 성자라고 불리는 간디. 그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온갖 차별을 받고 나서야 진정한 인도의 독립운동, 비폭력 운동에 뛰어들었다고 하니 그와 이 나라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 한 명은 넬슨 만델라. 노벨 평화상을 받은 사람으로 또 남아프리가공화국 최초의 흑인대통령으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반대해서 온갖 탄압을 받았던 사람으로, 그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로도 만들어졌으니... 이렇게 두 사람에 의해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나에게 다가왔다.

 

지금은 흑백차별이 별로 없지 않나 싶은데...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폐지된 지 20년이 넘었으니, 흑백이 함께 어울려 살아갈 토대가 마련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더 많은 자료를 알고 있지 못해서 무어라 말하기는 어렵다.

 

이 책은 이러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판치던 시대부터 만델라가 대통령이 되어 무지개 정책(인종에 상관없이 함께 어울려 살아갈 사회를 만들어가는 정책)을 펼친 이후까지를 배경으로 시대 순으로 여러 편의 단편들을 모아 놓았다.

 

1940년대부터 시작하여 2000년에 이르러서 이 작품집은 끝나는데...

 

어린이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인종차별 정책이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때로는 백인 아이를 주인공으로, 때로는 흑인 아이를 주인공으로, 또 인도 출신의 아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아이들의 눈에 비친, 또는 아이들이 경험한 인종차별의 잔혹함을 표현해 내고 있다.

 

인종차별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지 이 작품을 읽으면 자연스레 느낄 수가 있는데, 최근에 본 영화 "헬프"와 연관이 되어 더더욱 마음에 남았다.

 

이 작품에서 알 수 있듯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사람들을 네 종류로 분류하고 있다. 영국인과 같은 백인, 예전에 이 나라로 들어와 정착한 보어인(이렇게 두 집단은 최상층을 이루게 된다), 백인과 흑인의 혼혈(컬러드라고 불린다), 그리고 원주민이라 불리는 흑인, 여기에 나중에는 인도계 사람들까지(아마 이들은 컬러드라고 하는 흑인들을 사람취급하지 않는 그런 사회. 여기에 흑인만큼 차별받지는 않지만, 백인처럼 대우받지는 못한다).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이고, 생명의 무게는 어떤 생명체든지 똑같다는 생각을 하면 어떻게 피부색깔로 사람들을 차별할까 하지만, 아직도 우리에게 이런 습성이 남아 있지 않나 싶기도 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사실 피부색에 의한 암묵적인 차별이 있지 않아 싶어 반성이 되기도 하고.

 

이런 차별의 습성이 경제력의 차이를 차별로 전환시키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 책의 마지막 작품은 아마도 인종차별 정책이 없어진 다음에 경제력의 차이가 또 다른 차별을 낳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런 차별도 아이들에게는 의미가 없는 것으로 바뀌고 있지 하는 결말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의 마지막 작품 제목이 '장벽을 넘어'인 것을 보면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서 과거에 일어났던 차별은 철저하게 기억하고, 그 기억을 바탕으로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차별은 인종뿐만이 아니라 경제적인 면에서도 일어날 수 있음을, 그것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됨을 이 책의 마지막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다.

 

사람은 그 자체로 존귀함을. 누구나 동등함을. 그래서 함께 지내야 더 행복함을, 힘들었던 과거를 작픔으로 표현해 내 기억함으로써 잊지 말자고, 그 바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자고 작가가 말하고 있는 듯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어찌 남 나라 일이겠는가. 우리도 지금 경제력에 따라서, 또 사상에 따라서 차이를 차이로 인정 안하고 차별로 전환시키려는 모습들이 보이지 않는가.

 

그러면 안됨을 이 책에 나와 있는 살아 있는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서 느낄 수 있다. 그런 사회가 바로 야만임을. 문명은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함께 어울려 삶임을... 어린이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자고 작가는 말하고 있는 듯하다.

 

과거의 일. 잊어서는 안된다. 기억과 용서는 다른 말이다. 용서는 바로 기억에서 출발한다. 잊지 않음, 다시 반복되지 않게 함. 그것이 바로 기억이고 용서다.

 

한 편 한 편의 소설들이 마음 속으로 파고든다.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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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에서 카프카로 모리스 블랑쇼 선집 11
모리스 블랑쇼 지음, 이달승 옮김 / 그린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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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발음을 해보면 참 강한 발음이 나온다. 이름에 거센소리가 이렇게 연달아 있을 수도 있다니.

 

그의 이름 만큼이나 삶도 참으로 강렬했다는 생각이 든다. 문학에 살고 문학에 죽으려 했던 사람이었으니.

 

그는 늘 고독 속으로 들어가려 했고, 그 고독 속에서 글을 쓰려 했다. 글이 쓰여지지 않았을 때 더한 고독으로 들어갔으며, 반대로 글이 쓰여졌더라도 고독 속으로 들어갔다. 하여 그는 지하실에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고 싶어했다.

 

지하실.

 

무언가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는 곳. 그곳에서는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카프카는 그곳에서 남들을 의식하지 않고, 또 남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신만의 글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그런 생각은 생각으로만 그치고 그는 결코 지하실로 들어가지 못했으니, 그가 지니고 있었던 생활이라는 짐이 그를 늘 지상으로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그의 문학과는 반대로 그는 법과 관련된 그것도 보험과 관련된 생활을 하고 있었으니 문학과 생화의 불일치가 그를 더욱 고독으로 몰아갔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고독이 그를 경계인으로 살게 했고, 그의 작품도 이 쪽도 저 쪽도 아닌 양 쪽에 걸쳐 있는 그런 느낌을 주고, 또 그의 작품은 어쩌면 이곳과 저곳을 넘나들 수 있는 문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문이긴 한데 잘 보이는 문이 아니라 감춰진 문. 그래서 공들여 찾아야만 하는 문. 그것이 그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런 생각이 들게 만든 책이 바로 이 책이다.

 

프랑스 학자인 모리스 블랑쇼가 카프카에 대해 쓴 이 책은 카프카에 대해서 여러 면에서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아마도 카프카 작품을 읽은 사람을 전제로 쓴 듯한 느낌을 주는 글인데, 그만큼 글 내용이 쉽지 않다.

 

물론 카프카 본인이 쉽지 않은 인물이고 그의 작품은 난해하기로 유명하니, 카프카 작품의 주석서라고 할 수 있는 이 책 역시 난해한 것이 정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프카가 자기만족을 위해서 글을 썼다고 하더라도, 또는 자기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방편으로 자신의 죽음을 나타내는 글쓰기에 사력을 다했다 하더라도, 적어도 카프카에 관한 책들은 좀 쉬웠으면 좋겠다.

 

카프카 소설을 읽어도 난해해서 머리가 아플 지경인데, 카프카에 대해서 설명을 한 책조차도 이렇게 어렵다니... 도대체... 카프카 문학을 전공한 사람만 이런 책을 읽으란 말인지...

 

적어도 고등학교 시절, 우리는 카프카의 "변신" 정도는 배우지 않나, 또 좀더 나아가면 "성"아나 "소송"정도를 읽는 학생들도 나오는데, 정작 카프카에 대한 책들은 어렵기 그지 없으니,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가 이토록 어려워야 하는 것인지...

 

어느 정도 카프카에 대해서 감을 잡을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있는 그의 전집을 읽은 다음에 이 책을 읽으면 블랑쇼의 이 책 내용이 어느 정도 머리 속에 들어오기는 할 것 같다.

 

카프카.

 

그는 이름만큼이나 매혹적인 사람이다. 그의 작품 역시 마찬가지고.

그런 그에 대해서 그래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었음에, 이 책이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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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특집이다.

 

너무도 슬픈.

너무도 참담한.

그러나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는.

 

노아의 방주는 세상 생물의 종말로부터 생명체들을 구해냈다고 하는데, 세월이라는 이름을 가진 배는 청춘들을 비롯한 많은 생명들을 바닷속에 가두어 버렸다.

 

이 배가 그런 것이 아니라, 이 배를 둘러싼 사회가, 사람들이 그랬지만... 너무도 어이없고, 너무도 덧없는 그런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문제는 일이 일어난 다음에 벌어졌다. 제대로 해결이 되지 않아 지금까지도 미해결의 상태로 남아 있으며, 문제가 발생했는데 아무도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고 있으며, 책임져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책임질 자리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으며, 그 불똥이 온전히 행복한 오늘을 살아가야 할 아이들에게 떨어지고 말았다.

 

수학여행 전면 유보, 더불어 수련회 유보.

 

학교라는 공간을 벗어나 자기들만의 공간과 시간을 갖고자 열망했던 전국의 많은 학생들이 어쩔 수 없이 학교라는 공간과 가정이라는 공간을 벗어날 기회를 놓쳐 버리게 되었으니...

 

이는 그들의 놀이 시간을 뺏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장은 집과 학교와 같은 자신에게 익숙한 공간을 벗어나 다른 경험을 함으로써 얻어지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고로 인해서 전국적으로 학생들이 가져야 할 성장의 기회를 교육을 주관하는 교육부에서 박탈한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이었는지, 이번 호를 읽으면서 생각하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이번 호를 읽으며 생각한 것은 우리가 한 교육이 과연 무엇이었나 하는 것.

 

도대체 17-18세가 된 아이들이 자신들의 생명이 위급한 상황에 처했음에도 남의 말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가 하는 문제.

 

쥐는 배가 좌초할 것 같으면 먼저 탈출을 한다고 하는데, 그래서 선원들은 쥐가 탈출하는 것을 보고 배의 위험을 알아낼 수 있다고 하는데, 동물들이야 본능적인 직감으로 그렇게 한다고 해도, 사람 역시 동물적인 생존 본능이 있을텐데...

 

쥐를 열등한 동물로 취급하는 우리들이, 정작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쥐만도 못하게 행동하다니...

 

어쩌면 우리는 교육을 통해서 학생들의 이러한 생존본능을 아주 철저하게 죽였던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학교를 통해서 순응하는 법만 배웠지,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판단하는 법에 대해서는 배울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모두가 순응이지 결코 비판적인 사고는 아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듣는 소리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똑바로 앉아. 조용히 해. 왜 말대꾸야. 가만히 있어. 제대로 줄 맞춰. 자세 바르게. 나서지 마라 등등.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처럼 우리는 남과 다름을 인식하고 다름을 강화하는 교육을 할 생각을 하지 않고 오로지 같아야 된다는 신념으로 모두가 같아지는 교육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생각까지도 같아지는 교육.

 

그래서 남과 다른 생각, 남과 다른 행동을 하면 눈총을 받고 비판을 받고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는 그런 생활들, 그런 교육들.

 

그 교육의 효과가 바로 이런 사태 아닐런지. 말을 잘 듣는 학생들이 속절없이 자신들의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이런 현실을 낳았던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우리들은 이 세월호를 기억하는 일은 이런 교육 현장을 바꿔가는 일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지.

 

남을 보지 말고 우런 나를 보는 연습부터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바로 '세월호 사건'을 잊지 않는 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으니.

 

이번 호에 있는 메르코글리아노의 글 중에 '전자미디어와 이별하기'라는 제목을 단 글이 있는데(78-79쪽) 이 글을 읽으며 세월호와도 연결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에서 최고속 인터넷망이 가장 발달해 있으며, 국민들의 사용량도 세계 최고이고, 스마트폰 사용도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우리나라에서 그런 스마트폰을 대부분의 학생들이 지니고 있었음에도 자신들의 생명이 위험에 처했을 때 그것이 제 구실을 전혀 하지 못했음을, 그 기계가 신고는 했을지언정 그 다음 생명의 구조로는 이어지지 못했음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아이들은 이 스마트폰을 믿고 승무원들의 방송을 믿으며, 또 교사들의 지시를 따르며 마냥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을까. 직접 현실을 볼 생각을 하지 않고 오로지 스마트폰 화면으로 자신들의 현실을 보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일까?

 

이런 가정은 위험하고 불필요하지만, 그래도 만약, 만약 스마트폰이 없었다면 그 혈기왕성한 나이의 아이들이 배 안에서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었을까... 누군가는 참지 못하고 배 위로 올라가 보지 않았을까. 누군가 올라가 보라고 밖으로 보내 보지 않았을까?

 

스마트폰이 없는 그 시간을 아이들은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라는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하여 우리는, 아니 나는 '세월호'을 잊지 않겠다. 아니 잊어서는 안된다. 잊을 수가 없다. 그 잊지 않는 방법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늘 생각하겠다.

 

아이들이 지금처럼 자라지 않게, 이렇게 무능하고 어리석은 어른들로 자라나지 않게... 그렇게 하도록 노력하겠다. 그것이 내가 '새월호'을 잊지 않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민들레 93호.

과연 우리는 '세월호'에서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 무엇을 잊지 말아야 하는지 생각해 보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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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한테 빗자루로 맞은 날
박일환 지음, 오윤화 그림 / 창비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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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는 어린이 시라고 한다. 어른들이 읽는 시와는 다르다는 생각들을 일반적으로 하고 있는데...

 

옛날 우리 조상들은 아이들 시와 어른들 시를 구분했을까? 그냥 시 아니었을까? 아이가 쓴 시치고는 제법이구나 하고 칭찬을 하지 않았던가.

 

언제부턴가 시와 동시가 구분이 되었는데... 이는 시를 누구나 쓸 수 있고, 또 쓰는 활동에서 전문적인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행위로 구분하기 시작하고부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이런 구분으로 인해 동시는 어른들에게서 멀어졌고, 시는 아이들에게서 멀어졌다고 할 수 있다. 가뜩이나 시를 읽지 않는 시대에, 어른들이 동시를 읽는 경우는 드물다고 할 수 있고, 덩달아 아이들 역시 시는커녕 동시조차도 잘 읽지 않는다.

 

그만큼 우리 시대는 시와는 멀어진 시대가 되었고, 시와 멀어진 만큼 삶을 대하는 태도가 각박해졌다고도 할 수 있겠다.

 

각박해진 시대, 시와 동시가 어른과 아이들에게서 동시에 멀어진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시집과 동시집은 많이 나오고 있다. 시대가 이럼에도 시집, 동시집이 계속 나오는 이유는 이들이 반드시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고, 사람들이 이들을 읽으면 좋은 이유가 있기 때문일텐데...

 

그렇다면 어른들이 동시를 읽으면 무엇이 좋을까?

 

우선 그들은 그들이 잠시 잊고 또는 잃고 있었던 마음을 되찾을 수가 있다. 구두쇠의 대명사로 알려진 스크루지가 어른 시절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을 점점 찾아가듯이, 동시는 어른들에게 과거의 자신을 생각하게 한다. 더불어 지금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게 하고...

 

가령 이 동시집에 나온 '엄마 얼굴이 빨개졌다'를 보자.

 

엄마 차 타고 가는데 / 갑자기 / 택시가 옆에서 끼어들자 / 엄마가 욕을 했다.

나도 옆에서 / 한마디 거들었더니 / 엄마 얼굴이 굳어졌다.

"그런 말 하면 못 써. / 어른에게 저 새끼가 뭐야?"

시무룩한 표정으로 / "저 택시라고 한 건데……."

순간, / 엄마 얼굴이 빨개졌다.

 

박일환, 엄마 얼굴이 빨개졌다. 창비. 2013년 초판. 36쪽 '엄마 얼굴이 빨개졌다' 전문

 

각박해진 시대.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교통질서. 이런 상황에서 욕이 쉽게 나오는 어른들의 모습은 자연스럽다. 여기에 아이가 한 말이 욕으로 들리는 상황까지. 이런 모습이 동시에 거침없이 나온다. 그리고 이런 동시를 읽으면서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게 된다.

 

나 역시 내 상황으로 인해 아이들의 말을 잘못 듣지 않았나. 이런 경우가 아이들의 말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말을 내 상황에 맞게 듣지는 않았던가. 그런 성찰을 할 수 있다.

 

하여 동시는 어른들에게도 읽는 즐거움 뿐만 아니라, 어떤 깨달음을 얻는 즐거움을 준다.

 

그러면 아이들은 왜 동시를 읽어야 할까?

 

동시를 읽으면 동시를 읽으면서 느낄 수 있는 말의 울림이 주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말들이 얼마나 재미있는 울림을 주는지, 이 동시집에 나와 있는 '콩새'의 부분을 읽어 보자.

 

콩알처럼 동글동글한

콩새는

콩을 좋아해.

 

 

박일환, 엄마 얼굴이 빨개졌다. 창비. 2013년 초판. 20쪽 '콩새' 1,2연

 

말이 울림이 참 좋지 않은가. 이런 말 울림들이 이 동시집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우리말이 얼마나 부드럽고 아름다운지, 그냥 일상에서 아이들이 쓰는 말을 썼을 뿐인데도 자연스레 느낄 수 있다.

 

다음으로 동시를 읽으면 주변을 자세히 보는 눈을 키울 수 있다. 동시를 읽다보면 어? 하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은 생각도 못했는데, 그 상황이 이렇게도 보일 수 있다는 것.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창의성, 창의성 하는 시대에, 창의성을 키우기 위해서 가장 먼저 지녀야 할 자세가 무언가를 자세히 보는 습관인데, 동시는 이런 습관을 자연스레 지니게 해줄 수 있다.

 

여기에 눈에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까지도 갖추게 해주니, 동시는 창의성이 필요한 시대에 아이들에게 즐거움과 창의성을 한꺼번에 갖추게 할 수 있는 좋은 대상이 된다.

 

여기에 주변을 따뜻한 시선으로 볼 수 있는 자세까지 갖추게 되니, 일석삼조의 효과, 아이 그 이상의 효과를 주는 것이 바로 동시라는 생각이 든다.

 

주변을 자세히 볼 수 있는 자세와 따뜻한 마음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동시 한 편.

 

고드름 눈물

 

밤새 거꾸로 자라던 / 고드름.

 

힘겹게 매달려 있는 게 / 억울했던지

 

해님이 나타나자 / 눈물을 흘리네.

 

똑-

똑-

똑-

고드름 눈물 / 떨어질 때마다

 

네 마음 다 안다는 듯 / 말없이 받아안은 / 처마 밑 / 움푹 파인 자리가 / 일렬로 다정하네.

 

박일환, 엄마 얼굴이 빨개졌다. 창비. 2013년 초판. 94-95쪽

 

이런 시들이, 아이들도 어른들도 함께 읽을 수 있는 시들이 이 시집에 수두룩하다. 읽으면서 입가에 미소가 절로 생기기도 하고, 가끔은 마음이 찡해지기도 하는 동시들이.

 

이런 동시를 읽는 어른들과 아이들이 많은 세상...

행복하지 않을 수가 없는 세상일 것이다.

그런 세상...우리가 바라는 세상 아니던가.

 

시를 읽자. 동시를 읽자.

어른도 아이들도, 모두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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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 사주명리학과 안티 오이디푸스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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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팔자는 타고 났다는 말을 한다. 당연한 말이다. 자기가 태어난 년월일시를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긴 요즘은 의학기술이 발달해서 태어나는 날을 조정하기는 하지만, 이미 태어났다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런데 타고 났다는 말은 바꿀 수 없다는 말과 같지 않다. 사람들이 이 두 말을 같은 말로 쓰고 있는데, 타고 났다는 말은 이미 그랬다는 과거형을 뿐이라면 바꿀 수 있다/없다는 말은 지금이라는, 얼마든지 유동적인 현재형이다.

 

과거형으로 현재를 규정지으려는 것이 바로 운명론이고, 이러한 운명론을 사람들을 우매하게 만들어 체제에 순응하게 만들고 만다. 자기의 운명이 정해졌다는데 무얼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운명론을 통렬하게 풍자한 작품이 아마도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가 아닐까 싶은데, 자신의 사주를 믿고 평생을 그대로만 살려고 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 과연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으로 살았는가. 아니다.

 

왜냐하면 운명이란 이미 타고 났지만, 그 타고 남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쪽으로 사주를 해석하고 활용하는 것이 '사주명리학'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사주명리학을 활용한다면 사주명리학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점집에 가서 점치는, 그 점대로 하고, 또 부적을 받아서 운명에서 벗어나려는 자세를 지닐 필요가 없이,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이 나아갈 길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는 주장이 바로 이 책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사주명리학은 운명론이나 미신이 아니라 철학이고 인문학이다. 우리가 살아갈 길을 안내해 주는 이정표이다. 이정표대로 따라가든 아니든 그것은 사람들이 할 일이다. 즉, 운명에 대한 삶은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것일 뿐이다.

 

운명이 그러니 내가 이럴 수밖에 없어라는 말은 핑계에 불과하다. 그것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 자신이 포기했음을 나타내주는 말일 뿐이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천지의 기운을 자신의 몸에 받은 것은 당연한 일. 그것이 기질을 형성하는 것도 당연한 일. 그러나 사람은 단지 주어진 것을 따라만 가는 존재가 아니라, 무언가를 만들어갈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주를 행위를 통해서 또다른 관계로 만들어갈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이 책은 강조하고 있다.

 

존재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관계론이라는 얘기다. 우리의 운명은 주어진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가는 관계 속에서 구현되는 것이라는 얘기.

 

하여 자신의 사주를 명확히 알 필요는 있다. 사주를 명확히 알고 자신이 추구해야 할 관계를 파악한 다음에 행위로 나아간다면 자신의 운명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것이 된다.

 

이 책의 부록에 사주가 단지 8자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밝혀놓고 있다. 사주의 경우의 수를 20,736가지, 천간까지 합쳐 계산해 보면 팔자가 만들어지는 경우는 12,960,000가지(280쪽)라고 한다.

 

천이백만분의 일. 이것이 내가 지닌 팔자다. 여기에 내가 스스로 관계를 통하여 만들어가는 팔자까지 생각해 보면 경우의 수는 무한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팔자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팔자는 타고 났지만 결코 정해지지 않는다. 팔자는 유동적이다. 팔자는 관계지향적이다. 관계를 통해서 팔자는 우리가 만들어갈 수 있다. 때문에 팔자는 만들어진다. 팔자는 곧 내 행위를 통한 삶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자신의 처지를 명확히 아는 것. 모든 것은 앎에서 시작한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 이것을 바탕으로 실천으로 나아가 관계를 만들어가기 시작한다면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 된다.

 

하여 운명은 길이다. 우리가 다양한 경험들을 할 수 있는 길. 이 길에서 어떤 관계를 만들어가느냐에 따라 우리가 가는 운명의 길이 달라진다.

 

이렇듯 미신이라고 도외시하고 있었던 사주명리학이 단순한 미신이 아닌 삶에 대한 철학, 인문학이었음을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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