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그들 역사의 이방인들 - 섞임과 넘나듦 그 공존의 민족사 너머의 역사책 1
이희근 지음 / 너머북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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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2007년 8월 18일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한국 정부에 한국 사회의 다민족적 성격을 인정하고 '단일 민족 국가'라는 이미지를 극복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5쪽

 

다음에는 이런 말이 이어진다.

 

  이와 같이 중국인,, 일보인, 그리고 북방 유목민족 등 한반도의 주변 여러종족 및 민족만이 아니라, 멀리 무슬림 세계의 아랍인까지도 오늘날 한민족으로 지칭되는 구성원의 일원을 이루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현재 한국인의 관념 속에 자리하고 있는, '한민족은 단일민족'이란 신화는 만들어진 역사 즉, 허구에 불과한 것이다. 8쪽

 

어떤 책에서는 이런 말도 있었다. 중국인들이 세계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잘 살고 있지만, 유일하게 중국인이 자신들의 공동체 만들기에 실패한 나라는 한국이다. 한국은 단일민족이라 배타적이다.

 

그런데... 이게 자랑일까? 그리고 우리가 진짜 단일민족일까? 단군신화만 보아도 우리 민족은 단일민족이 될 수 없지 않았을까? 곰족과 호랑이족. 그리고 천계족과 지상족. 이렇게만 보아도 이미 고대사회부터 우리 사회는 다문화 사회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단일민족'이라는 신화에 갇혀 독일의 아리안 순수혈통을 주장한 히틀러의 광신을 비판하면서도 우리 자신이 그러한 틀에 갇혀 있음을 인식하고 있지는 못하지 않았나 싶다.

 

이 책은 그러한 신화가 허구임을, 우리는 애초부터 다문화 사회였음을, 우리가 단일민족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얼토당토하지 않음을 역사적 사례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고조선 시대에 위만부터 시작하여 삼한시대 특히 가야 전에 마한, 변한, 진한 때에도 역시 중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많았으며, 왜라는 이름을 지닌 사람들은 지금의 일본과 똑같은 사람들은 아니겠지만 우리와는 다른 민족의 사람들이 한반도 남쪽에 자리잡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더 나아가 통일신라 때에는 아랍인들까지 들어왔음을 역사적 근거들을 들어 보여주고 있으며(이 책에서는 나오지 않는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황옥도 외국에서 건너온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 때에는 국제무역항은 벽란도를 중심으로 다양한 인종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함께 살아갔다고 한다.

 

여기에 거란과 여진에서 넘어온 사람들, 몽고에서 넘어온 사람들, 그리고 다시 명나라 유민들, 또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정착한 일본인들 등등 하여 이미 예전부터 우리는 다문화 사회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많은 민족들이 우리나라에 정착하긴 했지만, 그들에 대한 차별이 지금처럼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도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백정이다.

 

'백정'은 유목민족이 우리나라에 정착한 결과로 보여지는데, 유목생활을 강제로 정착생활로 돌리려는 정책으로 인해 그들은 우리 사회에서 이방인으로 취급받았으며, 제대로 된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백정'을 단지 천민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유래가 바로 외국에서 우리나라로 넘어온 다른 민족 구성원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차별이 어쩌면 지금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의 연원이지 않을까 싶은 마음도 들었고.

 

책에 "섞임과 넘나듦 그 공존의 민족사"라는 말이 있다. 다문화 사회는 차이를 인정하고 함께 공존하는 사회다. 그런 사회가 강한 사회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단일종은 멸종되기 쉽다. 마찬가지로 단일성을 강조하는 사회는 지속되기 어렵다.

 

우리 사회도 이제는 엄연한 다민족 사회다. 그걸 인정하기에 다문화 교육을 강조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다문화 교육이 어떤 때는 우리 민족 문화를 다른 민족에게 강요하는 것으로 느껴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모든 문화는 평등한데 다만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쪽으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 민족은 아주 오래 전부터 다른 민족구성원들과 함께 어울려 살았다. 하지만 그들을 우리 문화에 동화되는 쪽으로 정책을 펴왔는데... 그런 결과로 다민족 문화가 아직 우리나라에 제대로 살아남아 전승되지 못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제는 아니다. 역사에서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 우리는 다문화 사회가 이미 되었다. 그렇다면 다양한 문화가 함께 어울리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 사회를 만드는데 이 책은 우리의 다문화 역사를 살펴보게 함으로써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우리 민족의 다문화 역사가 이리도 오래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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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려온 시간을 살아가기 - 몸도 마음도 저당 잡히는 시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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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하는 현대.

이것이 현대를 바라보는 바우만의 관점이다.

유동하는, 무엇으로 변해갈지 모르는, 고정되어 있지 않은, 그렇기 때문에 예측을 하기 힘든 시대. 또 한 사람이 한 직장에서 한 가정을 꾸리고, 한 장소에서 평생을 살아가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어쩌면 자신의 삶에 대한 청사진을 그릴 수 없는 시대가 바로 현대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이런 유동하는 현대에 직면한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에 대한 분석을 담은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시트랄리가 질문을 하고 바우만이 대답을 하는 식으로 엮어진 대담집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현대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 전방위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현대에 대한 분석 중에 머리 속에 쏙 들어오는 구절이 있었는데 바로 규제완화에 대한 구절이다. 우리는 지금 '규제완화, 규제완화'하는 여당의 높은 목소리를 듣고 있는데, 그들은 규제완화를 통해서 우리 경제를 살릴 수 있다고 하는데, 바우만은 이러한 규제완화가 어떻게 전세계적인 금융위기를 일으켰는지를 이 책의 앞부분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규제완화는 경제를 살리는 정책이 아니라 있는 자들에게 더 많은 것들을 몰아주는 정책이고, 이런 규제완화로 인하여 중산층은 하층민으로, 하층민은 버려지는 삶으로 내몰리게 된다고 한다. 그럼에도 규제완화를 강하게 추진하는 이유는, 권력은 전지구적인 자본에 넘어갔는데, 정치는 지역적으로 행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규제완화에 대한 그의 글을 보자.

 

우리는 이제 좀 더 많은 자유를 부여한다는 미명 하에, 인간적 대담성과 주도성을 터무니없는 규제들로부터 해방시켜 선택의 자유를 증진시킨다는 미명 하에 촉진되는 규제 완화가 결국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즉 국가 개입을 찬양하는, 즉 규제 완화로 풀어놓은 자유에 의해 촉발된 파국을 강제로, 국가가가 지원책을 내놓아 구제하는 것을 찬양하는 정반대 노래의 합창으로 귀결되고 있다는 것을요. 79쪽

 

이렇게 국가는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 국가가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정치권력이 작동하는 모습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정치권력을 가진 자들의 권력 행사에서 벗어나게 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들의 권력행사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몇 년에 한 번 하는 투표로는 권력을 견제할 수 없는데, 그나마 남아있는 견제 수단으로서의 선거에도 제대로 참여하고 있지 않은 형편이다.

 

이는 그동안 국가나 정치권력에 의해 밖으로 밖으로 내몰려 더이상 중심의 일에 참여할 수 없게 된 상황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이들은 참여하고 싶어도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는데, 그에 대한 분석은 하지 않고, 의식이 어떻다느니, 왜 자기 권리를 포기하냐느니 하는 말들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행사하게 하기 위해서는 밖으로 내몰린 삶들을 안으로 불러들일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에 대한 노력이 결국 현실을 직시하고, 그 현실에 자그마한 틈을 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 책에서는 지금의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권력을 행사하는데 필요한 대상은 초기에는 토지였다고 한다. 식민지로 나타나는 토지가 남아 돌던 시대, 자본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언제든지 노동과 자본을 식민지로 보낼 수 있었고, 폐기물, 일명 쓰레기라고 불리는 대상들을 식민지에 보내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통이 발달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식민지는 사라졌다. 그 때 다시 개척한 식민지는 바로 사람이다. 사람, 특히 연령대를 불문하고 그들을 소비자로 만들어 버리는 자본의 능력. 이런 자본의 능력으로 우리나라는 지금 어린 아이들까지도 상품의 미끼에 걸려 허우적대고 있다.

 

사람의 연령층으로 더 이상 확대가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이들이 선택한 식민지는 바로 몸이다. 몸에 대한 권력의 행사. 무궁무진하다. 하여 우리나라는 성형천국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이제 사람의 몸은 경제권력의 대상이다.

 

이런 몸에 대한 확장은 이제는 몸 속으로까지 퍼져 나간다. 유전자가 바로 그것이다. 이제는 유전자조차도 상품이 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이러한 것들을 넘어서서 자본은 이제 우주로까지 눈을 돌린다.

 

이렇듯 자본은 정말로 끝없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식민지를 만들어내고 확장해 간다. 거기에 대응하는 권력은 아직도 미약하다. 그러나 언제까지 당하고만 있어서는 안된다.

 

이미 현실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무언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고,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견고한 자본의 권력에 흠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 틈을 내는 행위, 이를 '사랑'이라고 하고 싶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이 바로 희망, 유토피아를 이야기하고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싶다.

 

사랑을 남녀간의 사랑으로만 해석하지 말고, 확장된 사랑으로 해석하면 사랑은 이 책에서 말하는 이런 의미, 이런 태도가 된다.

  

사랑은 장기간의, 고된 노력의 산물로, 위험하여, 항상 차질이 빚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름 아니라 언제든 곤란한 타협과 무거운 자기희생을 무릅쓸 각오가 되어 있을 것을 요구합니다. 286쪽.

 

그렇다. 현실은 유동적이다. 이 유동적이라는 말이 절망을 불러오기도 하지만,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가능성을 현실성으로 전환시키는 힘, 그것이 바로 사랑이 아닐까 하고, 사랑은 현실을 똑바로 보게 하는 힘을 우리에게 부여해주고, 현실에서 더 나은 가능태로 나아가게 하는 동기를 부여해준다는 생각이 든다.

 

바우만의 이 책. 더 유동하는 우리나라에 우리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할까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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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문회 이야기로 나라가 들썩이고 있다. 청문회가 아니라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할 사람들(?)이 청문회 대상이 되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청문회법을 개정하자는 이야기가 나와 시끄러운 것이다.

 

그런데 잘 이해를 못하겠다. 청문회라는 것이 그 자리에 맞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검증하는 제도 아닌가? 그것도 나라를 좌지우지 한다는 정치권 중에서도 장관급 이상에 해당하는 것 아닌가?

 

조선시대로 따지면 판서급 이상에 대한 청문회를 한다고 하는데, 그 청문회 무용론이 나오질 않나, 아니면 왜 청문회를 하는데 그 사람이 그 자리에 맞는 능력을 지니고 있느냐 있지 않느냐를 따지지 않고, 개인신상에 관한 것들부터 따지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하더니, 자신들이 야당인 시절 행정부의 관료들을 엄격한 잣대로 선별해야 한다고 기를 쓰고 청문회법을 만들어 놓더니, 이제 여당이 되니, 그것과 이것은 다른 문제라고 개인의 능력과 비리를 같은 선상에 놓지 말라고 하고, 그런 기준으로는 어느 누구도 통과할 자신이 없으니 청문회법을 개정하잖다.

 

조변석개. 때에 따라 이렇게 행정부 관료들에 대한 기준이 달라져도 되는지 모르겠다. 굳이 옛말을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아니던가.

 

세상에 제 몸 하나 깨끗히 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가정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으며, 또 제 집 하나 다스릴 능력이 없는 사람이 나라를 경영할 수 있으며, 제 나라를 제대로 경영하지 못하는 통치자가 어떻게 세계 평화에 기여하겠는가.

 

물론 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순서대로 가진 않겠지만, 적어도 '수신과 제가'는 '치국'에 앞서거나 동시에 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사회는 혼란에만 빠지게 된다. 그러니 개인신상에 관한 것들이 청문회에서 다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서양의 경우, 청문회에서 이런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 이미 추천과정에서 이런 문제는 다 검증이 되기 때문이다. 청문회에서 언급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검증을 마치고, 이 검증 기준을 통과한 사람만이 청문회 대상으로 추천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청문회에서 굳이 개인의 문제를 다룰 필요가 없다.

 

이미 검증을 거친 것들을 반복할 만큼 시간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시급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 때는 자리와 능력이 어울리느냐를 중심으로, 또 정책 비전을 중심으로 청문회를 실시하면 된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도 전에 우리는 개인 문제로 사회가 시끌시끌하다. 위장전입, 병역미필(가족까지 포함하여), 논문 표절, 전관예우, 부적절한 언행 등이 청문회 대상자들마다 오르내리고 있으니...

 

이래서 청문회장에 가기 전에 이미 까발려질 대로 다 까발려지니 '청문회에 가기도 전에 개인적 비판이나 가족들 문제가 거론되는 데는 어느 누구도 감당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고, 높아진 검증 기준을 통과할 수 있는 분을 찾기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웠다'(인터넷 한겨레 신문에 난 2014년 7월 1일자 기사 중에서 대통령의 말이라고 한 부분 재인용)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이 곧 청문회 검증 기준을 낮춰야 한다는 말로 들리는데... 

 

정작 문제는 청문회 검증 기준이 아니라 그 기준에 미달되는 사람을 추천하는데 있지 않나. 행정부의 장관이 되려는 사람이면 검증 기준이 매우 높아야 하지 않나. 적어도 선비란 개인적인 청렴함이나 가족들의 청렴함은 기본이요, 여기에 능력까지 갖추어야 하지 않나.

 

그러니 청문회의 검증 기준은 낮아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아져야 하고, 적어도 자신이 행정부의 장관 정도 하려면 이 높아진 검증 기준을 가뿐히 통과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 정도 기준도 통과 못할 사람은 나와 같은 장삼이사(張三李四)에 불과하니 행정부에서 일을 한다는 헛된 욕심을 버리는 것이 자신의 삶과 우리 사회의 삶에 더 도움이 되는 것 아닐까.

 

따라서 청문회 검증 기준은 낮아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아져야 한다. 그리고 이런 검증 기준을 통과한 사람만이 진정한 선량(選良)이라는 소리를 듣고 책임있는 자리에 갈 수가 있어야 한다. 그런 사회가 진정 좋은 사회이다.

 

그런데... 이런 당연한 말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당연과 물론의 세계'(김승희의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자서에서)에 우리는 너무도 물들어 있기 때문에, 이 세계에서 벗어나는 일은 너무도 무거운 싸움이 된다.

 

내가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던 것을 느끼면서 그것을 털어내기 위해서 싸우는 싸움, 결코 쉽지 않은 싸움이고, 너무도 '무겁고 힘든' 싸움이다.

 

나와 같은 보통 사람도 이럴진대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이 '당연과 물론의 세계'와 싸우기 위해서는 얼마나 힘들 것인가. 그들에게는 얼마나 엄격하고 높은 잣대가 주어진 것인가. 그걸 알아야 하지 않나.

 

검증 기준을 탓할 것이 아니라 검증 기준을 가볍게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없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위로 올라갈수록 자신이 말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는 정말로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이어야 할테니 말이다. 

 

하여 정치를 한다는 사람, 또 행정부에서 고위관료로 일을 하겠다는 사람, 더 높은 곳에서 나라를 위해서 사람들을 위해서 일을 한다는 사람들은 적어도 '당연과 물론의 세계'에 속해 있으면 안된다. 이들은 끊임없이 이 '당연과 물론의 세계'에서 벗어나려고 해야 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 벗어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주어진다.

 

김승희의 제목과 같은 시를 보자.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1

 

「이 문은 자동도어이오니

개폐를 운전자에게 맡겨주십시오」

 

누군가 나에게 넥타이를 입힌다

그리고 질질 끌고 간다

 

김승희,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세계사. 1995년. 11쪽

 

하여 우리는 이런 '토끼장의 평화'를 벗어나기 위해서 정말로 또다시 '무거운 싸움'을 해야 한다. 성경에 나오는 팔복을 빗대어 시인은 이렇게 표현한다. 마치 윤동주의 '팔복'을 읽는 느낌이 난다. 진정 이런 복은(이게 복이라니, 참 무서운 역설이다) 우리가 '무거운 싸움'을 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다가오리라.

 

八福(팔복)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땅의 나라가 저의 것이요

 

당연을 따르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당연을 따르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당연을 따르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당연을 따르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토끼장의 평화가 저의 것이라

 

김승희,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세계사. 1995년.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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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연장통 - 인간 본성의 진짜 얼굴을 만나다, 증보판
전중환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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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연장통이라는 제목에는 진화의 개념이 들어 있다.

 

연장통은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도구들을 모아놓은 통이니 사람들이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통, 즉 우리의 몸이나 마음을 의미하고, 오래된 이라는 말에서는 인류의 탄생에서부터 지금까지 인간에게 지속적으로 존재해 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제목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문화나 환경에 따라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진화해 온 것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를 학자들은 진화심리학이라고 한다. 심리학이 인간의 마음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개별적인 인간의 마음을 연구하는 학문에서 벗어나 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가에 대한 연구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진화' 심리학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자유의지는 없다'라든지 또 기타 뇌과학에 관한 책들을 읽어보면 인간은 자신의 마음을 자기가 다스린다고 생각하고 자기 마음의 주인이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진화의 결과로 형성된 뇌와 뇌의 작용에 의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하여 진화심리학은 최신 과학발전과 함께 간다.

 

이 책은 이러한 진화심리학을 바탕으로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 쉽고 재미있게 설명해주고 있는 책이다.

 

저자가 말하고 있듯이 진화심리학에 대한 이론 설명을 하는 책이 아니다. 그런 책을 원한다면 이 책에서 말하고 있듯이 '진화심리학'을 검색해서 그에 합당한 책을 읽으면 된다.

 

그렇다면 이 책은 무슨 역할을 할까? 우리가 진화심리학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안내서 역할을 한다. 아니, 진화심리학이 도대체 뭘까 하는 호기심을 자극하게 한다. 그래서 진화심리학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한다.

 

그리고 그런 목적을 달성했다고 본다. 과학책, 심리학 책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읽을 수 있는 이야기책이라는 느낌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쉽게 손에 들고 읽으면서 그렇구나 하는 감탄을 할 수 있는 책이기에 저자의 목적이 충분히 달성되었다고 본다.

 

여기서 더 나아갈 일은 진화심리학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아보는 일이다.

 

꼭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왜 그런 마음이 작동하는지에 대해서 조금은 깊게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아무런 의문없이 지나쳤던 문제들, 그것들이 사실은 진화의 산물일 수 있다는 것. 인간이 인간으로서 최적의 상태로 살아갈 수 있게 수백만년에 걸쳐서 진화해 온 것이 지금 우리를 이루고 있다는 것.

 

고기에 관해서, 이방인에 대한 태도에 관해서, 털이 왜 없어졌는지에 관해서, 도덕, 종교에 관해서, 그리고 동성애에 관해서 진화론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노력이 계속되어지고 있음을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진화론, 아직도 창조론으로 진화론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종교적 신념을 떠나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하는 것조차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기제가 바로 진화론임을 이 책은 간명하고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뇌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진화심리학은 더 발전을 하게 될 것이고... 우리는 오래된 연장통에 새로운 연장들을 넣어두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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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은 세상을 비춘다. 그런데 별은 밤에만 비춘다. 낮에는 별들의 빛이 세상이 닿지 않는다. 아니 닿을 필요가 없다. 별빛이 필요없을 만큼 밝기 때문이다.(사실 별빛은 낮이나 밤이나 같다. 다만 우리의 눈에 보이냐 보이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이지만... 그러한 과학적 사실 말고... 우리가 느끼는 진실의 면에서는 이렇다)

 

그렇다면 별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한다. 결국 별의 바탕은 어둠이다. 어둠이 없다면 별은 제 진가를 발휘하지 못한다.

 

지금 우리나라 청문회 문제로 말들이 많다. 청문회라는 것은 그 사람이 그 직책에 어울리는지를 함께 묻고 답해보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청문회 자리에 나선다는 것 자체는 세상의 별이 되고자 한다는 얘기다. 그는 자신의 빛으로 세상을 조금더 밝게 비추고자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런 별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밝아서, 그들의 삶이 대낮이어서 도리어 별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

 

무슨 무슨 비리 비리 비리......

 

언론에는 그 많은 비리들이 감자를 캘 때 감자들이 줄줄히 딸려나오듯이 나오고 있다. 세상에 그들은 자신의 삶이 너무도 밝아서 그러한 어둠 쯤은 쉽게 감춰질 줄 알았나 보다.

 

그러나 자신의 어둠을 감추었던 밝음이, 그러한 대낮이 청문회라는 자리에서는 결코 대낮이 되지 못한다. 청문회는 어둠이다. 별의 바탕이다.

 

별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서야 하는 바탕이다. 청문회라는 바탕에 서 있을 때 그는 진짜 별인지 아니면 별 흉내를 내고마는 가짜 별인지 판명이 된다.

 

청문회라는 바탕, 철저하게 어두운 바탕에서 그 동안 자신을 가리고 있던 낮, 밝음을 제거하면 진짜 별이 되는 사람들은 그 때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대낮에 가려져 있던 빛들이 제 구실을 하기 시작한다.

 

반대로 대낮에 가려져 있던 어둠을 지니고 있던 사람들... 대낮을 제거하고 나면 이제는 어둠만이 남는다.

 

그들에게는 청문회라는 어둠에서 자신들의 어둠밖에 남지 않기 때문에 빛을 발할 수가 없다. 별이 될 수가 없다. 그냥 묻힐 뿐이다.

 

그런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은지... 이렇게 자신의 대낮에 가려져 있던 어둠이 청문회라는 바탕에 의해 드러나는데도 그걸 한사코 부인하고 '난 별이다. 난 빛이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대낮일 때 자신의 어둠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없애려고 하고, 대낮이라 티가 나지 않더라도 자신만의 빛을 간직하려는 자세를 지녀야 하는데.. 그래야 정말 별이 될 수 있는데...

 

세상의 별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 청문회라는 바탕에 서고자 하는 사람들... 대낮에는 빛을 발하지는 않지만 결국 빛을 발하게 되는 자신만의 빛을 간직하는 삶을 살기를...

 

자신만의 빛이 없이, 대낮에 겨우 자신의 어둠을 감추고만 있던 이들... 청문회라는 바탕에서 빛은 커녕 자신의 존재조차도 가두어버리는 이들. 반성하길.

 

정진규의 '별'이란 시... 마음에 와 닿는다.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대낮에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별들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에게만

별들이 보인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만

별들을 낳을 수 있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어둡다

 

정진규,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문학세계사. 1990년. 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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