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가 중학생이 되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우리 신화 1
최정원 지음 / 영림카디널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서사무가라고 한다. 전문용어로. 즉 무당들이 굿을 할 때 읊조리는 이야기라는 뜻이다. 서사라는 말에는 이야기가 있다는 뜻이고, 무가는 무당들의 노래라는 뜻이니, 사실 이러한 창세가는 굿을 접해보지 못한 요즘 세대들에게는 낯선 작품일 수밖에 없다.

 

낯설기만 하다면 다행이지만 아예 모르고 지내기 일쑤다. 그러니 우리나라에도 성경에 나오는 창세기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지낸다. 외국의 신화만 읽고 배우고 마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미륵과 석가의 내기에 관해서는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것이 굿에서 전해지는 '창세가'에 온전하게 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이 창세가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식을 반영하고 있음이 분명한데, 지금 세상이 이리도 혼탁한 것은 창세기에 석가가 속임수로 미륵을 이겼고, 그의 정당하지 못함이 이 현세를 이렇게 혼란에 빠뜨렸다고 하니, 당시의 사람들도 하느님이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왜 이렇게 싸움이나 도적질, 질투 등이 없어지지 않을까 고민을 했겠고, 그에 대한 답으로 이러한 창세가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사무가만을 보면 분량이 짧다. 하긴 굿에서 무당이 이야기를 너무 길게 하면 그 굿을 누가 하겠는가? 핵심만 간추려 이야기를 해야 할테니, 무가의 분량이 짧은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자라나는 세대에게, 또 무가를 잘 모르는 세대에게 무가의 원문만을 고집해서 그대로 전해 주다가는 그나마 남아 있는 '창세가'조차도 도서관이나 박물관에서 나오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많다.

 

하여 이 책의 저자는 창세가를 원문도 실어주고, 한글 풀이도 실어주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허구적인 내용을 첨가하여 한 편의 신화(소설)로 재탄생시켰다.

 

미륵이 세상을 창조하고, 이 때 미륵의 궁금증을 해소해주는 역할을 주기 위해서 메뚜기, 개구리, 생쥐를 등장시키고 있으며, 그 다음에 불과 물의 근원에 대한 해결이 있고, 인간들이 드디어 등장한다.

 

이러한 인간들이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중에 석가가 나타나 이 세상이 자신의 것이라고 하고, 미륵과 석가는 내기를 한다. 처음 두 번의 내기에서 미륵이 이겼으나 석가는 마지막으로 꽃을 피워내는(여기서는 모란이라고 한다) 내기를 하는데, 석가가 속임수를 써서 승리한다. 이에 미륵은 내세를 기약하며 현세를 떠나고 세상에는 온갖 악들이 창궐하게 된다.

 

현세불이 석가불이라면, 내세불은 미륵불이고, 세상이 혼란스럽고 어려울수록 옛날 사람들은 미륵을 찾았다. 우리나아에서 미륵은 후천개벽, 이 세상이 멸하고 새로운 세상을 불러오는 대상이었으니, 혁명을 이루려는 사람들이 미륵에 의탁한 것은 이 '창세가'에서 말미암았다고 할 수 있겠다.

 

짧은 분량의 '창세가'에 인물들을 설정하고, 성격도 만들고, 갈등을 형성함으로써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한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미륵-석가. 최초의 인간들. 그 자손들 중 석가의 편을 드는 반골(이름에서 이미 부정적인 특성을 읽을 수 있다), 미륵의 편을 드는 사필과 귀정(이 역시 이름에서 긍정적인 특성을 알 수 있고), 이들로부터 유래한 화전놀이. 

 

여기까지의 기원을 이 책을 읽으면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미륵과 석가의 내기는 꼭 대별왕-소별왕의 내기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어, 우리나라에서 전해지는 창세기의 신화들에서 표현하는 이승과 저승 또는 현세와 내세의 모습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가? 이 책에 나오는 현세의 모습과 비슷하다. 서로 속이고 죽이고 나만 위하고...

 

하여 우리도 이 현실을 벗어날 꿈을 꾼다. 옛날 사람들처럼 소박하게 미륵에게 귀의해 미륵이 환생해서 현세에 나타나기를 기원하지는 않지만, 이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온갖 노력을 다한다.

 

아직도 이 '창세가'에서 말하는 석가의 시대가 다하지 않았음인지... 하지만...이런 신화의 장점이 무엇이냐면...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반드시 온다는 것. 그런 믿음을 가지고 포기하지 말고 옳은 삶을 살아가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길이라는 것. 바로 그것이니...

 

초등학생도 읽을 수 있게 아주 쉽게 잘 풀어 썼다. 때때로 해설도 옆에 곁들여 놓아서, 창조론과 진화론을 잘 융합시켜서 신화를 풀이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요즘 신화를 읽으면서 느끼는 건데, 최첨단의 과학기술로 치닫는 현대... 어쩌면 우리는 먼 과거의 이야기인 신화를 더 읽고 공부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런 창세가와 같은 작품을 옛날의 케케묵은 이야기라고 치부하지 말고 지금 우리의 삶을 비추어볼 수 있는 거울이라고 생각을 하고 읽을 필요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성석제 지음 / 강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소설은 개정판이다. 초판은 읽지 못했다. 개정판에 있는 초판 서문에 보면 작가는 본래 시를 쓰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물론 나는 성석제의 시를 읽지 못했다. 나는 처음부터 그를 소설가로 알고 있었다)

 

그러다 '94년 여름에는 노래가 아닌, 무슨 말인지 나도 모를 시를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었다.'(8쪽)고 했다. 시가 노래가 되지 못하고, 무슨 암호처럼 유통되는 시대를 견디지 못했나 보다. 시를 견디지 못한 작가는 소설을 쓰기로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 때문에 문(文)을 쓰려고 했다. 내게 들어 있는 산문, 산문성을 모조리 토해내면 노래만 남지 않겠는가 하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8쪽)고.

 

이 서문이 왜 중요하냐면 이 소설집은 우리가 생각하는 소설집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소설집을 생각하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가는 첫 장부터 낭패하기 십상이다.

 

이게 무슨 소설이야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처음 작품부터 읽는 사람을 당혹스럽게 한다. '웃음소리'에 대해서 모아놓은 생각을 펼치는 소설이라니...

 

하지만 소설을 말 그대로 소설(小說)이라고 생각하면, 또 작가가 서문에서 말한 文이라고 생각을 하면 이 작품을 이해 못할 것이 없다. 그냥 이야기다. 文이다. 이것이 바로 이 작품집이다.

 

작가의 내면에 있는 이야기들을 내뱉어 놓은 것. 이것이 바로 이 소설집이라고 하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이야기들 속에서 '어처구니'(사전에는 상상보다 큰 사람이나 쿨건이라고 되어 있다고 한다)를 발견하게 된다.

 

내 삶이 소설로 쓰면 장편소설이라느니, 대하소설이라느니라는 말들을 많이 하는데, 바로 우리의 삶 속에도 이렇게 소설이 들어있는데, 이 작은 이야기들 속에 우리가 알고 있는 소설이 들어 있다.

 

이 작품집의 이야기들은 작지만, 그들은 그들 속에 '어처구니'를 갖고 있다. 이 어처구니들이 활동을 개시하면, 밖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소설이 된다. 그렇게 성석제는 이들을 '어처구니'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성석제란 소설가를 우리 시대 최고의 이야기꾼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몇몇 작품을 읽었을 때 이러한 수식어가 그냥 붙은 것은 아니구나 하고 감탄을 하기도 했었고.

 

이 작품은 그 정도는 아니다. 사건과 갈등과 인물의 성격 등이 구체화되기에는 다들 분량이 짧다. 그냥 작가의 내면에 있던 이야기들을 밖으로 끄집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마음 속에 쌓아두고 있었던 수많은 이야기들을 남들도 알게 표현해 낸 책이 바로 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의 이야기꾼으로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주 잘 드러나고 있다. 때로는 짧은 분량 속에서도 이야기의 재치가 번뜩이고 있다.

 

우리 사회의 모습을 적절하게 풍자하고 있기도 하고, 이 소설집이 나온 지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유효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작품들도 꽤 있다. 어쩌면 한 때 유행했던 용어인 '엽편소설'이라는 말을 붙여도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소설집이기도 하다.

 

그냥 예전에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를 제외한 다른 산문을 모은 산문집이라고 해도 상관이 없을 듯하고.

 

많은 작품 중에 현실의 비루함을 비꼬거나 정치권력의 일방성을 풍자하거나, 또는 그런 권력에 추수하다 패가망신한 사람을 등장시키거나, 권력에 맞섰으나 자신이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을 형상화하는 작품들은 이들 속에 '어처구니'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다른 작품들 속에서 이들이 어떻게 '어처구니'가 되었는지 알아보고 싶을 정도다.

 

아주 짤막한 작품들이 모여 있으니, 시간 날 때 한 편 한 편 그냥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 그 짧은 분량 속에서 우리가 '어처구니'를 찾아보는 재미도 느끼면 더욱 좋을 것 같은 작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년 중학교 입학생부터 소프트웨어 수업 의무화

 

  내년도 중학교 입학생부터 소프트웨어 교육이 의무화되는 등 초,중,고 교육과정에서 소프트웨어 교육이 대폭 강화된다. 

- 한겨레신문 2014년 7월 24일자. 20면에서.

 

뉴스에서 이 소식을 듣고, 뭐야 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신문 기사를 읽으며 과연 이것이 소프트웨어 산업을 살리는 길이 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본말이 전도된 대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어쩌면이 아니라 이것은 본말이 전도된 대책일 뿐이다.

 

어떻게 우리나라 소프트산업의 위축을 국민공통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초중고 교육과정에 책임을 떠넘길 수가 있는지.

 

하드웨어는 세계 최고를 자랑하지만, 그 하드웨어를 작동시키는, 또는 하드웨어를 더욱 쓸모있게 하는 소프트웨어는 다른 나라의 것을 쓰고 있다고, 막대한 부의 손실과 세계적인 추세에서 뒤쳐지고 있다고 호들갑들이다.

 

그래서 초등학교에서도 중학교에서도 하다못해 고등학교에서도 소프트웨어 교육을 해야 한다고 한다. 아니, 한다고 한다. 내년부터.

 

교사 충원 고민도 없이, 학교 현장의 시설에 대한 고민도 없이...

 

무엇보다도 그런 교육이 왜 국민기본공통교육과정에서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없다.

 

우리나라 소프트웨어 산업이 외국에 비해 뒤떨어진 것, 잘 생각해 보라. 우리나라가 과연 기초 과학에 투자를 하는가? 연구원들에게 투자를 하는가? 이런 것들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이 무조건 모든 국민이 소프트웨어에 대한 교육을 받으면 소프트웨어 강국이 자연스레 된다고 생각하는지.

 

오히려 소프트웨어는 창의적인 몇몇이 생계 걱정을 하지 않고 거기에 전념할 때 나올 수 좋은 프로그램이 나올 수 있는 것 아닌가?

 

전국민에게 별 관심도 없는 소프트웨어 교육을 하기보다는 이 분야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맘 놓고 연구하고 실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왜 우리나라에서 공부 잘한다는 학생들이 이공계, 특히 자연과학 또는 순수학문 분야로 나아가지 않고 의대로 진학하는지 고민을 해봤는지...

 

순수학문이 바탕이 되면 그 바탕 위애서 다양한 과학적, 기술적 성과들이 집적될 수 있을테고, 또한 연구원들이 생계 걱정을 하지 않고, 직장에서 떨어져 나갈 걱정을 하지 않고 연구 실험할 환경이 조성된다면 자연스레 소프트웨어 산업은 발전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초중고 교육과 상관이 없다. 왜 억지로 갖다 붙여서 애꿎은 초중고 학생들 학습량만 늘리려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니 학교 교육은 촘스키가 책의 제목에서 말한 대로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기껏 사회에 나가 쓰지도 않을 소프트웨어 교육에 몇 년을 허비하게 만드는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도대체 교육을 통해 어떤 성공을 할 수 있다는 건지...

 

계속되는 교육의 실패로 우리나라 학생들은 세계에서 가장 학교를 싫어하는 학생들이 되어 있고, 공부는 학교에서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배움이 평생간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하루라도 빨리 대학에 들어가기만을 고대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학생들에게 한 과목을 더 추가한다니... 누구를 위해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잘 취업하게 하기 위해서? 아님, 우리나라 국가 경쟁력을 위해서? 아님, 소프트웨어 산업을 위해서?

 

다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소프트웨어 산업을 살리기 위해서는 순수학문을 하겠다는 학생들이 늘어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야 하고, 연구원들이 마음 놓고 연구하고 실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도록 정부가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주어야 한다.

 

그게 먼저다. 그리고 그게 다다. 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또 하나의 고통을 전가하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촘스키.. 방향은 다르지만 그 역시 미국의 교육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었는데... 우리 교육, 마찬가지다.

 

어째서 이런 방안이 나왔는데, 교육 분야에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까? 무엇이 우선인지 그들은 잘 알텐데...

 

아님,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가? 

 

하지만 적어도 이런 문제는 정말로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다음에 대책을 내놓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학교 교육과정에 적용하려면. 이렇게 즉흥적이어선 안된다. 그리고 소프트웨어 산업을 진작시키는 해결방법으로 이것은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0대와 통하는 사찰 벽화 이야기 -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읽는 16가지 불교 철학 10대를 위한 책도둑 시리즈 14
강호진 지음, 스튜디오 돌 그림 / 철수와영희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절은 한적하고 호젓한 곳에 있다. 아마도 절이 자리잡은 자리는 대부분이 명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만큼 절이 위치한 곳은 산세도 좋고 물도 있고, 또 사람의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주기도 한다.

 

여기에 더하여 절 건물들을 보라. 웅장하게 지은 대웅전조차도 우리를 압도한다기보다는 감싸안아준다는 느낌을 주고, 조금 오래된 절에 가보면 세월의 힘에 의해 변해가는 절의 모습이 오히려 더 친근하게 다가온다.

 

그런데 절을 종교의 장소라기보다는 관광의 장소로, 또는 쉼터의 장소로만 이용을 했던 나에게는 절 건물 벽에 있는 그림들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실 절 벽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교의 내용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하는데, 읽은 경전이 얼마 되지도 않고 불교 신자도 아닌 내가 그 내용들을 제대로 읽어낼 리는 없다.

 

한문 실력이 부족해서 우리나라 옛건물들인 한옥에 가면 기둥마다 붙여놓은 주련들을 읽어내지 못해 아, 한자구나 무슨 뜻일까 궁금해만 한 모습과 비슷하게도 절에 가서도 그림을 그냥 눈으로만 보고 말았다.

 

눈으로만 본 그림이 마음으로 들어와 나에게 어떤 감흥을 불러일으켜야 하는데, 뭘 알아야 감흥이 일지. 역시 알아야 보인다. 보여야 사랑한다. 사랑해야 느낄 수 있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유명해진 이 말처럼 말이다.

 

이 책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작은 제목이 바로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읽는 16가지 불교 철학'이다.

 

철학이라는 말 때문에 긴장할 필요는 없다. 그냥 쉽게 우리가 절에서 만날 수 있는 벽화 16가지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교회나 성당에 가도, 특히 외국의 유명한 성당에는 기독교에 관련된 그림이 많다. 세계적인 명작이라고 하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역시 성당에 있는 그림이 아니던가. 그런 식으로 절에도 그림이 많고, 그 그림을 유명한 화가가 그린 경우도 있겠지만(우리는 어린 시절에 황룡사 담에 소나무 그림이 있는데 너무도 잘 그려서 새들이 와서 앉으려다 부딪쳐 죽었다는 이야기를 읽고 자랐다. 여기에 담징이 그렸다는 금당벽화 이야기도) 대부분은 이름없는 화가가 그린 그림이 많다.

 

또, 절에서는 벽화가 닳아 새것으로 고칠 때는 전의 것을 싹 없애고 다시 그렸다고 하니 유명한 절 벽화가 많이 남아 있지 않은 현실이다.

 

이 책에서는 그것을 안타까워 하기보다는 생과 사가 하나이고, 윤회임을 이야기하면서 오래된 벽화보다는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벽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좋다고 해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게 하려는 모습 또는 집착에 불과하니, 이 책의 지은이가 우리가 또렷이 볼 수 있는 벽화를 선택한 것은 불교의 교리에도 맞는 자세라는 생각이 든다.

 

하여 16가지의 벽화가 소개되고, 그 벽화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그 이야기 끝에 불교철학에 관한 이야기가 덧붙여지고 있는데...

 

불교철학이라고 해도 어렵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냥 청소년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그 벽화와 관련지어 불교의 핵심 교리를 이야기해주고 있다. 그래서 결코 어렵지 않다. 지루하지도 않다. 오히려 재미있다.

 

재미있게 읽으면서 그동안 지나치기만 했던 벽화에 담긴 이야기를 알아갈 수 있고, 더불어 자신의 마음 속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고 답을 할 수도 있다.

 

이 책에도 나오지만 잘 산다는 것, 간단하다. 조과 스님을 찾아온 백낙천에게 스님이 해 주었다는 말. 

 

"아무리 작은 악이라도 짓지 말고, 모든 착한 일을 다 행하라. 그렇게 스스로 마음을 깨끗이 하면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156쪽)

 

백낙천은 이 말을 듣고 세 살 아이도 아는 말이라고 코웃음을 치지만, 스님은 세 살 아이도 아는 말이지만, 팔순 노인도 실천하기엔 어려운 말이라고 되받아친다.(156쪽)

 

그렇다. 앎과 삶이 일치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과연 그들이 몰라서 그랬겠는지, 그들은 그냥 관행이라서 그랬다고 하기도 하지만... 그들의 앎은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앎과 삶이 하나되기가 어려운데, 진리의 길은 결코 먼 데 있지 않은데... 그것이 이리도 실천하기 힘드니...

 

결국 어떤 종교든 이 말 하나로 통한다는 생각이 든다.

 

옳은 것을 행하고, 옳지 않은 것을 행하지 말고, 네 마음을 깨끗이 하라.

 

이렇듯 이 책은 꼭 불교에 국한되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절에서 볼 수 있는 그림들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해주고 있다. 하여 불교에 대해 문외한이라고 해도 이 책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그림과 이야기가 있으니 재미 없을 턱이 없고, 자신이 보던 그림에 그런 이야기가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즐거움도 있을테니 말이다.

 

종교와 상관없다. 기독교나 천주교 또는 이슬람 신자라면 관광지라고 할 수 있는(좀 불경한 말인가) 절에 가면 절 벽에 그려져 있는 그림들을 보고, 이런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데 이 책의 의미를 두면 된다.

 

물론 불교 신자들이나 불교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하나 더할테고, 지식에 실천까지 더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마음가짐을 지니면 된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종교를 떠나 옳은 삶으로의 실천으로 나아가 앎과 삶이 일치되는 삶을 살아야 하겠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종교.

인간의 삶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상.

연약한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을 위로하는 방편으로 종교를 만들었는지, 아니면 신이 인간을 위해서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종교가 존재하는지 논란은 있지만, 종교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특히 갑작스런 죽음을 경험하거나 자신의 힘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을 겪거나 할 때 우리는 종교에 귀의한다. 그리고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세상에 참으로 많은 종교가 있다.

엄청나게 많은 종교. 그런 종교로 인해서 전쟁이 일어나기도 하고.

그럼에도 사람들은 종교를 통해 평화를 얻기도 한다.

그런 종교 중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믿는 종교가 불교, 기독교, 천주교 등이다.

이 중에 불교는 우리의 역사에서 참으로 오래동안 우리와 함께 했던 종교인데.

 

세상이 그 많고 많은 교회와 성당과 절과 모스크들이 있는데 왜 세상은 평화로와지지 않을까?

세상에 악인도 많고 안 좋은 일도 많으니, 도대체 무슨 까닭인가?

이런 의문이 사라지지 않는다.

 

헌책방에서 불교 관련 책장을 둘러보다 지장경을 발견했다. 한 번은 꼭 읽겠다고 작정했던 경전.

금강경이나 법화경, 화엄경 등이 너무도 어렵다면 지장경은 그리 어렵지는 않다.

지옥에 머물면서 또는 세상을 돌면서 사람들을 구제한다고 하는 지장보살.

그가 건 서원이 바로 모든 사람들을 구제하겠다는 것이었다지.

그는 모든 사람이 구제될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고 했다지.

하여 그의 이름을 외는 순간, 그를 믿는 순간 우리는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지.

지옥에 떨어졌더라도 그가 구제해준다고 하지.

 

얼마나 마음이 편한가.

지장보살과 함께 있으면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이를 현실에 맞게 재구성하면 좋은 일, 착한 일, 착한 마음을 지니고 세상을 살라는 얘기가 아닐까.

지장경에는 아주 자그마한 선행을 한 사람도 그 선행에 의해서 지옥을 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니.

지장보살을 믿는 사람들은 지장보살만 믿고 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지장보살이 낸 서원에 따라 우리 모두가 선업을 쌓도록, 해탈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종교를 믿는 이유이기도 하다.

믿음과 실천이 함께 가는.

지장보살이 지옥을 두루 다니며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은 바로 사랑일텐데, 이를 자비라고 하기도 하니, 이 자비는 바로 우리들이 모두 지니고 있어야 할 삶의 태도 아니던가.

자비가 넘치는 사회, 그 사회가 바로 천당이고 극락이 아니겠는가.

지장보살을 다시 불러내는 사회. 그 사회는 아직도 지옥에서 헤매는 사회가 아닐까.

 

내가 지장경을 꼭 읽고 싶다고 생각했던 이유가 바로 현실이 지옥처럼 느껴질 때 그 지옥에서도 벗어날 길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지옥 속에서도 사람을 위해서 노력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 그것이 신이든, 우리 사람이든 그런 존재는 반드시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에 이 지장경을 읽고 싶었던 것이리라.

 

어려운 시대다. 정말로 앞이 꽉 막힌, 캄캄한 시대다. 그런 시대, 지장보살이 필요한 시대다.

지장보살. 마음 속에만 있는 보살이 아니다. 지장보살은 행동하는 보살이다. 직접 움직이는 보살이다.

요즘, 그립다. 그런 지장보살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