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세기의 여름
플로리안 일리스 지음, 한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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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캡슐을 연상시키는 제목이다. 이런 제목으로 책을 쓰다니, 단지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이기 때문일까 하는 생각을 했으나, 꼭 그렇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이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이기 때문에 쓰인 책이라면, 앞으로 해마다 이런 종류의 책이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100년 전은 언제나 있다. 그리고 사건은 언제나 있고, 사람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지금까지는.

 

그렇다면 세기의 여름이다. 단지 여름을 이야기하는 책도 아닌데... '세기의'라는 말에 지중을 하면, 1900년대를 이루고 있는 년도 중에서 가장 뜨거운 해가 바로 1913년이라는 얘기가 된다. 여름은 계절 중에서 가장 뜨거운 계절이고, 사람들이 자신을 외부에 가장 잘 드러내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왜 1913년이 '세기의 여름'이 될까? 의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단순하게 생각하자. 인류의 역사에서 제일 먼저 큰 파국을 겪게 되는 1차 세계대전이 바로 다음 해에 일어난다. 즉, 1913년은 세계대전으로 달려가는 정점에 서 있는 해라는 뜻이기도 하다.

 

너무도 뜨거운 인간의 인간상실. 그것이 바로 전쟁이고, 이것이 국지전의 형태가 아닌 세계 전면전의 형태를 띠게 된 것이 바로 1차 세계대전이니, 1913년은 너무도 뜨거워서 곧 터져버릴 듯한 그런 해가 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세기의 여름'이 된다.

 

그렇다고 이 책은 정치사를 다루고 있는 책도 아니다. 역사를 다루고 있는 책도 아니다. 그냥 1913년을 보여주고 있다. 그 해에 일어난 각종 일들을. 현재의 역사와 연결지어서.

 

따라서 이 책은 몽타쥬 기법을 잘 살린 책이 된다. 온갖 이야기들이 중첩되어 나타난다. 그런 중첩 속에서 우리는 1913년을 재구성해낼 수 있다.

 

전쟁 위협에 대한 이야기가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더라도, 당시 군주들의 사냥 모습에서 전쟁의 냄새를 맡을 수 있으며, 시대의 흐름을 가장 잘 읽어내는, 몸으로 감지해내는 예술가들의 삶에서 그런 우울, 불안을 읽어낼 수 있다.

 

아주 세세하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인물들의 행적이 소개되고 있다. 단지 그들이 1913년에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그 속에서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또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들이 아슬아슬하게 비켜가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으니,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책이 된다.

 

1913년 1월에, 사실 1월에 없어지지도 않았는데...모나리자가 실종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12월에 다시 모나리자를 찾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모나리자의 실종과 발견. 이것이 1913년 일반인들을 강타한 사건이라면,,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청기사파','다리파', '입체파' 등의 미술 사조들이 나오고, 그들의 내면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지 못하던 그런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으며, 문학인으로서는 조이스, 카프카, 무질,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릴케 등이 나오고, 음악가로도 많은 사람이 나오는데...

 

정말 백화점이다. 유럽에서 유명하다고 하는 사람은 모두 다 한 번 쯤은 얼굴을 내밀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정말로 세기의 여름에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과거를 바라보는 입장에서, 지금 현재의 입장에서 판단하는 것도 의미있는 읽기가 된다.

 

우리는 지금 2013년이 1913년과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 역시 그 시대를 살았던 그 사람들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누구는 불안과 우울에 시달리고, 누구는 근거 없는 희망에 차 있으며, 누구는 남들이 하지 못하는 실험을 하고 있고, 누구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남을 비방하고 있으며, 누구는 앞날을 예측하지 못해 외부로 탈출하려 하고 있는 그런 상태.

 

과거가 현재를 비추어주는 거울이라면, 다음 해 전쟁이라는 큰 재앙이 닥칠 그 직전 해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맞이할 2014년을 대비할 수 있지 않을까.

 

먼 훗날 적어도 2013년을 '세기의 여름'이라고 지칭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이 아니라, 바로 내일, 더 잘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한 거울 역할이 바로 이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친숙한 이름들이 이 책을 읽는 재미를 더하게 해주고 있으며, 이들 생활을 엿보는 듯한 느낌을 지니게 되는 그러한 감정도 갖게 만드는 책이다.

 

1913년을 만화경처럼, 파노라마처럼 표현해 낸 책이기에, 읽기에 전혀 지루하지 않다.

 

1914년 앞의 1913년이 '세기의 여름'이 되었는데, 우리는 2013년이 2014년으로 인해 '세기의 여름'이 되지 않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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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속담이 생각이 나지?

 

혀 속에 칼이 있다는.

 

말이 그만큼 위험하다는 얘기일텐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말이 위험한 것은 확실한데... 도대체 어떤 말이 위험할까?

 

말은 오히려 치유의 효과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세헤라자데처럼 말로써 목숨을 건지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물론 말로써 자신의 소중한 무엇을 잃은 사마천 같은 경우도 있고.

 

그런데 말이 다 똑같이 위험할까? 어떤 말은 가벼운 상처만을 남기고, 어떤 말은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지 않을까?

 

어떤 말은 상처를 주는 듯하나 오히려 도움이 되기도 할텐데...

 

요즘 우리 사회는 말들의 천국이다.

 

주인 잃은 말들이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고, 이 말들은 정착도 하지 못한다.

 

그냥 부유한다.

 

여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칼을 들이댔다고 한다.

 

같은 칼이 아닌데...

 

강자가 한 번 뱉은 말은 치명적인 위협으로 다가오고, 약자가 뱉은 말은 몸부림에 불과할진대...

 

이런 말의 경중을 따지지도 않는다.

 

그냥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위협이라고만 말한다.

 

그런 말들이 너무도 많이 떠돌아다닌다.

 

갑자기 이런 말이 생각난다.

 

양약고어구, 충언역어이(良藥苦於口, 忠言逆於耳)

 

좋은 약은 입에 쓰고, 충성스러운 말은 귀에 거슬린다.

 

이게 옛 선현들이 명심하고 있던 말이다.

 

자신의 귀에 거슬린다고 그건 해서는 안될 말이라고 하기보다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혀 속에 칼이 있다는 말, 그 칼이 나를 해치는 칼이 아니라 나를 깨우치는 칼이 되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말들을 다모클레스의 칼처럼 늘 자신의 머리 위에 두고 있어야 하지 않나.

 

그러면 지금보다 한결 나은 그런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데...

 

경어인(鏡於人), 사람에 나를 비추어 보라고 했다.

 

나를 말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내 거울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말에 일희일비할 까닭이 없다.

 

오히려 나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런 태도, 그런 지혜가 필요하다.

 

그래서 말은 하게 내버려두어야 한다.

 

말을 처벌하면 그 때는 자기 검열의 시대가 된다.

 

이런 검열의 시대는 곧 혀 속에 칼이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칼은 서로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게 된다.

 

그런 칼이 아니라, 서로를 경계하게 하고 발전하게 하는 칼이 되게...

 

우리의 혀 속에 있는 칼들이.. 그런 말들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요즘 세상이 하도...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서.

 

 

 

헌책방에서 구입한 박희진의 "미래의 시인에게"를 읽다.

 

참 많은 시집을 낸 시인이란다. 이 시집에서만 보아도 31권의 시집을 내었다고 하니. 이 중에 4개의 시집에서 골라 펴낸 시선집이다.

 

박희진 시인은 시낭송을 하기로 유명한 시인이니... 시는 곧 우리의 말과 함께 있음을 몸소 보여주는 시인인데...

 

그의 시 중에, 이 시집 마지막에 실린 시인데...'한국어를 기리는 노래'라는 시이다.

 

그 중의 한 부분

 

'한국의 시인은 / 한국어라는 소리를 내는 악기'(1-2행)라는 구절이 있다. 어디 시인만이겠는가.

 

우리는 모두 한국어라는 소리를 내는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의 말들이 칼이 아니라 음악이 되게 해야 하지 않을까. 그 말소리만 듣고도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말들.

 

적어도 힘있는 사람들의 말이 칼로 느껴지지 않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는 말들이 음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참 많은 시가 있지만....제목이 된 시.

 

      미래의 시인에게

 

어디서인지 자라고 있을 / 너의 고운 수정의 눈동자를 난 믿는다

또 아직은 별빛조차 어리기를 꺼리는 / 청수한 이마의 맑은 슬기를

 

너를 실제로 본 일은 없지만 / 어쩌면 꿈속에서 보았을지도 몰라

얼음 밑을 흐르는 은은한 물처럼 / 꿈꾸는 혈액이 절로 돌아갈 때

 

오 피어다오 미래의 시인이여 / 이 눈면 어둠을 뚫고 때가 이르거든

남 몰래 길렀던 장미의 체온을

 

 

활활 타오르는 불길로 보여다오 / 진정 새로운 빛과 소리와 향기를 지닌

영혼은 길이 꺼지지 않을 불길이 되리니

 

박희진 시선집, 미래의 시인에게, 우리글. 2008년. 29쪽. 

 

꼭 미래의 시인이 아니래도 좋다. 미래의 우리, 아니 현재의 우리들이 이런 '새로운 빛과 소리와 향기를 지닌 영혼'을 지니고, 그런 '불길'로 이 세상을 꽃피웠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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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진짜 유고시집이다. 행방불명 되었을 때의 시집이 아닌.

 

그의 사후 모아놓은 시들에다가 그를 추모하는 글을 모아 책으로 냈다.

 

엄밀히 말하면 시보다는 그에 대한 글이 더 많으니 천상병 유고시집이라기보다는 천상병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야 하리라.

 

역시 헌책방에서 구입한 책.

 

천상병은 시인이라기보다는 기인으로 더 많이 알려졌는데... 그의 말년 그가 텔레비전에도 나오고 하여, 인사동에 있는 귀천이 덩달아 유명해지기도 했다.

 

술과 돈을 달라는 일화로 유명한 시인. 그러나 그는 정작 시인이다. 우리는 그의 시 "귀천"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시인이 평생동안 수많은 시를 쓰지만 시대를 넘어 자신의 시가 한 편이라도 대중에게 계속 읽힌다면 그 시인은 행복한 시인일텐데... 천상병은 "귀천"이라는 시로 이미 행복해졌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초기시들과 후기시들의 내용이 많이 다르기는 하지만, 그는 천상 시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삶 자체가 시 아니었던가.

 

다른 사람이 이렇게 행동을 했으면 비난을 많이 받았을텐데... 이 책에 나와 있는 글들에서 볼 수 있듯이 천상병의 그 순진무구한 행동은 비난을 받을 수 없게 만든 그런 행동이었다니... 참.

 

그가 남에게 돈을 달라고 했지만, 딱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만 달라고 하였고, 남의 집에서 기숙한 것도 어떤 악의가 있어서 한 것이 아닌, 자연스런 행동이었다고 하니. 이런 시인, 이런 행동을 한 사람...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그런 사례이기도 하리라.

 

천상병에 대한 일화를 알고 싶으면 읽으면 된다. 예전 기인(?)들의 삶을 읽으면서 내 삶을 돌아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는 시 '귀천'에서 이 세상의 삶을 소풍이라고 했는데, 그는 소풍을 마치고 다른 세상으로 갔지만, 우리는 아직도 소풍 중인데...

 

소풍이라고 느낄만큼 아름다운 세상인지... 그런 세상을 단지 바라기만 해서는 안되고, 우리가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지... 이건 기행하고는 상관없는,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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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제목이 참... 역시 헌책방에서 산 시집인데... 시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시집을 산 이유는 출판사에 대한 믿음 때문인데...

 

이렇듯 어느 한 분야에서 믿음을 주기란 쉽지 않은데... 아직도 자기들이 잘났다고 하는데도 남들은 믿어주지 않는 집단이 있으니. 그들은 그것을 알까?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한다면 너무도 뻔뻔한 사람들이고, 모르면서 그렇게 행동한다면 너무도 무식한 사람들일텐데...

 

자신들을 선량(選良)이라고 한다. 뽑힌 인재라는 뜻일텐데... 도대체 그들을 뽑아준 사람들도 문제지만, 매번 최선이 없으니 차악(次惡)을 선택한다고 뽑았으니... 이걸 알고 자신들의 행동을 결정한다면 좀더 좋은 사람들이 될텐데.

 

출판사를 믿고 시집을 고르듯이 정당을 믿고 사람을 뽑는 경우도 꽤 있을텐데... 그 정당이 과연 믿음에 부합할까? 그렇게 믿고 뽑았는데, 영 아닌 사람들도 꽤 있지 않을까? 그러면 정당에 대한 믿음 역시 시나브로 사라져갈텐데...

 

창비란 출판사 마찬가지다. 적어도 문학 분야에서는 믿음이 가는 출판사 아니던가. 예전부터 우리나라 문학을 선도해오던 출판사이니 말이다.

 

시집의 경우도 다양한 시집을 내었고, 그래서 어느 시집을 골라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데... 이 시집도 마찬가지다. 여러모로 궁리를 하면서 읽는데...

 

도대체 뭔 뜻인지 알 수가 없다. 뭔 뜻인지 알 수가 없다는 얘기는 마음에 쏙 들어오지 않는다는 얘기다. 요즘 시집들이 마음으로 읽기보다는 이성으로 읽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시집도 마찬가지다.

 

서정홍 시인이 쓰는 시와는 정반대에 서 있다고 보면 된다. 도대체, 이렇게 몽환적일 수가 있는가? 마치 초현실주의 그림을 보는 듯한 그런 느낌을 주는 시들이다.

 

대표 제목이 된 시인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를 읽어도 무슨 소리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대표시이니 자꾸 읽게 되는데... 읽으면서 '구두를 신고'라는 말은 언제든지 나갈 수 있는 준비를 했다는 뜻으로 생각을 하는데, '잠이 들었다'란 표현은 준비는 했으되, 나가지는 않는다는, 그래서 결국 자신은 자신의 내부로밖에 침잠할 수 없다는, 그런 히키코모리적인 내용으로밖에는 읽히지 않는다.

 

사회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 속으로만 들어가고 마는, 그것이 '내 몸의 가지들은 몸 속으로만 뻗어갔다'는 표현으로 나타나고, 사람들과의 단절은 '도시의 지붕들이 날아가는 사이가 길들도 사라졌다'고 표현되고 있다. 결국 자신은 '구두 속에서 나오지도 않았다'고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있다.

 

세상이 각박해지고, 상식으로는 해석이 되지 않을 때, 그 때 많은 사람들은 자신 속으로만 들어간다. 그의 이야기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자신을 향해서만 행해진다. 이런 세계 속에서 논리를 발견하기란 힘들다. 세상은 그 자체로 혼돈인 것이다.

 

이런 혼돈을 이 시집에서 담고 싶었을까? 도무지 연결이 되지 않는 시어들이, 상황들이 시 속에 나타나고 시집에 혼재되어 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사는 지금 세상이야 하는 듯이. 그렇담 시인이 그려낸 이런 혼란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냥 주저앉을 수는 없지 않은가?

 

출판사가 믿음을 주고 있듯이, 정당들이 믿음을 주어야 하듯이, 시인은 세상은 그래도 살만하다는 믿음을 주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 믿음을, 우리는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순간에도 "이야기"로 살아남는 "세헤라자데"에게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시인은 그래서 "카산드라"가 아니라 "세헤라자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의 이야기는 끊어질듯 끊어질듯 계속해서 이어지고, 그런 이어짐이 우리를 계속 살아있게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여 시인은 자신을 "세헤라자데"라고 지칭하고 있다. 이 험난한 세상,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사람. 시집의 제일 앞에 이 제목의 시가 나온 이유가 바로 그것이지 않을까. 비록 '구두를 신고 잠이 들'지만, 그래도 이야기를 포기하지 않는, 지금은 자신에게로 이야기를 하지만, 그 이야기가 횡설수설하고 있지만, 도무지 논리를 찾을 수가 없지만, 나중에는 밖으로 향할 수 있다는, 혼돈의 세상을 질서의 세상으로 만들 수 있다는, 그런 자세. 왜냐, 시인은 언제든 뚜벅뚜벅 걸어나오면 되니까. 구두는 이미 신고 있으니까.

 

세헤라자데

 

  옛날이야기 들려줄까 악몽처럼 가볍고 공기처럼 무겁고 움켜잡으면 모래처럼 빠져나가버리는 이야기 조용한 비명같은 이야기 천년 동안 짠 레이스처럼 거미줄처럼 툭 끊어져 바람에 날아가버릴 것 같은 이야기 지난밤에 본 영화 같고 어제 꿈에서 본 장면 같고 어제 낮에 걸었던 바람 부는 길 같은 흔해빠진 낯선 이야기 당신 피부처럼 맑고 당신 눈동자처럼 검고 당신 입술처럼 붉고 당신처럼 한번도 본 적 없는 이야기 포르말린처럼 매혹적이고 젖처럼 비릿하고 연탄가스처럼 죽여주는 이야기 마지막 키스처럼 짜릿하고 올이 풀린 스웨터처럼 줄줄 새는 이야기 집 나간 개처럼 비를 맞고 쫓겨난 개처럼 빗자루로 맞고 그래도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개 같은 이야기 당신이 마지막으로 했던 이야기 매일 당신이 하는 이야기 내가 죽을 때까지 죽은 당신이 매일 하는 그 이야기 끝이 없는 이야기 흔들리는 구름처럼 불안하고 물고기의 피처럼 뜨겁고 애인의 수염처럼 아름답고 귀를 막아도 들리는 이야기 실험은 없고 실험정신도 없고 실험이란 실험은 모두 거부하는 실험적인 이야기 어느날 문득 무언가 떠올린 당신이 노트에 적어내려가는 이야기 어젯밤에 내가 들려준 이야기인 줄도 모르고 내일 밤 내가 당신 귀에 속삭일 이야기인 줄도 모르고

 

강성은,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창비. 2010년 초판 3쇄.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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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수 혁명 - 안전한 식수를 향한 인간의 권리와 투쟁
제임스 샐즈먼 지음, 김정로 외 옮김 / 시공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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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몸의 70%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요소. 그러나 단지 수치만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는, 우리 삶을 유지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물이다.

 

또한 지구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어쩌면 공기만큼아니 흔한 존재이기도 하다. 이런 흔한 존재가 우리에게 귀한 존재로 다가오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바로 물 중에서도 먹는 물에 해당이 된다.

 

물을 종류별로 나누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만은, 지구상에서 가장 물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닷물일텐데, 이 바닷물은 우리가 먹을 수가 없다. 다른 지구상의 생물들의 삶을 유지시켜 주고 있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식용할 수 없는 존재로 남아 있다.

 

지하수. 이것 역시 물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물보다 보지 못하는 물이 더 많다는 현실. 그럼에도 이 지하수 중에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물이 그다지 많지는 않다는 사실.

 

이것은 이 책에서 예로 들고 있는 방글라데시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안전하게 마실 수 있는 물을 확보해주겠다는 의미로 방글라데시에 많은 우물을 팠는데... 처음에 있었던 환호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니 과학의 발달이 일어남에 따라, 또는 물의 성분을 제대로 분석할 수 있게 됨에 따라, 그 우물물에서 천연 비소가 함유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해내었으니...

 

그래서 우물을 마실 수 있는 우물과 마실 수 없는 우물로 구분하고는 있지만, 다른 물을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은 아직도 비소가 함유되어 있는 우물에서 물을 구해 마신다고 한다는 현실.

 

지하수 중에는 이처럼 우리가 먹을 수 없는 물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물들. 강, 호수 등등. 이 중에 우리가 마실 수 있는 물이 얼마나 될까? 얼마 되지 않는다. 이 물들은 많이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저개발 국가에서는 강과 호수의 물들은 마실 수가 없다.

 

마실 수 있기는커녕 이 물들은 오히려 질병을 유발하고 있다고 하니...

 

이렇게 우리 지구상에 존재하는 물 중에 우리가 마실 수 있는 물이 얼마나 될까 하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나, 이 결론이 지구상에 물이 부족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지금까지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간이 물을 얻지 못해 멸망에 이르기까지 극심한 물부족은 겪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겪을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기 때문이다.

 

공공재냐 경제재냐

 

물로 인해서 인류가 멸망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물이 많이 오염되어 있지만, 오염시키지 않으려는 노력도 만만치 않게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물에 관해서는 옛날부터 끊이지 않는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물이 공공재냐 경제재냐 하는.

 

물을 공공재의 관점에서 접근하면 물에 대한 접근권은 인간이 지닌 보편적인 권리가 된다. 따라서 물에 대한 접근을 막아서는 안된다. 이것은 돈이 없다고 하여 물을 마시지 못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얘기다.

 

또한 국가는 국민들이 안전한 물을 마실 수 있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물은 돈을 주고 이용하더라도, 그것은 생존에 지장이 없는 범위 내에서만 지불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 서면 물에 대한 민영화는 논의할 가치도 없다.

 

이와 반대로 경제재로 접근을 하면 물은 상품이 된다. 상품은 수요와 공급에 따르기 때문에 물의 가격은 그 때 그 때 달라질 수 있으며, 구입 능력이 없으면 물도 구입할 수 없게 된다.

 

경제 논리를 충실히 따른다면 물은 국가에서 운영하는 것보다는 민간 업체에서 운영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이런 효율성을 따지던 예로 볼리비아를 들고 있다.

 

물의 경제성과 효율성을 확보하기 위해 민간업체에 물관리를 넘겼지만 곧 엄청난 국민적 저항에 부딪친 정부가 물의 민영화를 포기한 사례를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도 한 때 수도사업 민영화란 얘기가 나온 적이 있던 걸로 알고 있는데... 볼리비아의 예가 우리에게도 해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순환하는 물

 

물은 순환해야 한다. 아니 지구상의 모든 것은 순환해야 한다. 이 순환이 끊어지면 문제가 생긴다.

 

대표적인 것이 생활하수이다. 이 생활하수는 이제는 순환을 하지 못한다. 이것은 그냥 쓰레기일 뿐이다. 어디로 가나? 사라져 버린다. 우리의 물을 오염시키는 주범으로 전락하면서.

 

지금 지구는 딱딱한 콘크리트로 덮여 있으며, 물은 관을 통해 흘러 바다로 나아갈 뿐, 땅 속으로 스며들 기회를 많이 잃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지하에 스며들어 있다가 다시 지상으로 나와 사용되다가 증발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그런 순환과정을 많이도 잃었다. 어디선가 단절이 되었다.

 

다른 물들도 마찬가지다. 이 책에서는 화장실에서 수도꼭지로 라는 말을 하는데... 우리가 쓰는 생활하수를 다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 예로 최근에 우주비행사들이 그들의 오줌을 정화하여 물로 만들어 사용한 예를 들어주고 있으며, 또한 생활하수를 정화하여 다른 방향에서 사용하는 예도 들어주고 있다.

 

그렇다. 물은 순환하여야 한다. 순환하지 않는 물은 죽음의 물이다. 그것은 우리 인간에게 재앙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물이 순환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생수냐 수도냐

 

예전에 우리나라는 물을 판매한다는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지하수가 많던 시절, 그 시절에 수도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너무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었으므로.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수돗물은 마시지 않는 물, 어쩔 수 없을 때만 마시는 물. 주로 화장실에서 사용하거나 설거지할 때 사용하는 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공공기관에서조차도 수돗물을 마시지 않고 정수기를 설치하고 있는 실정이니...

 

이런 틈을 비집고 생수 판매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 책에서는 생수가 일반 음료의 판매를 앞질렀다고 하니.. 엄청난 판매량이다. 이렇게 생수가 판매되는 데는 여러 문제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생수를 담는 플라스틱통이다.

 

이것은 또다른 오염원이 되니, 우리는 안전하기 위해서 물을 마시는데... 그런 물을 마시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를 또다른 위험에 밀어넣고 있는 형국이다.

 

이 책을 보면 생수에 대한 역사는 순환하고 있다. 물을 함께 마시던 시대에서 자신만의 생수를 유리병에 담아 마시던 시대로, 다시 정수시설을 갖추게 됨으로써 수도를 이용하던 시대로, 그러다가최근에 다시 생수를 마시는 시대로 돌아섰다고 하는데...

 

이제는 생수가 대세가 된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생수 시장은 전세계에서 가장 이윤을 많이 남기는 시장이 되었고... 한참 전에 나온 책이 물에 관한 이야기 "블루 골드"였는데... 정말, 물은 이제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생수 판매가 앞으로 계속 지속될 수 있을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이런 식으로 순환하지 않는 물소비는 결국 물의 고갈을 불러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소개된 바와 같이 바닷물을 담수로 처리하는 기술이 발전하여, 바닷물을 식수로 사용하는 예가 늘어날 것인데... 바닷물을 담수로 만드는 과정에서도 엄청난 지구 파괴 행위가 일어난다고 하니...

 

물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것이 더 지속가능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듯 우리가 마시는 물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또 쟁점이 되는 사항을 중심으로 살펴본 책이다. 물에 관한 여러가지 일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고민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한다.

 

"있을 때 잘해"라는 말이 있다. 물, 정말 있을 때 잘해야 하는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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