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대해서 엄청난 폭격을 하고, 이제는 지상군까지 투입했다고 한다.

 

홀로코스트라고 해서 그들이 당한 지가 이제 겨우 반세기가 넘었을 뿐인데, 그들은 자신들이 힘이 생겼다고 다른 민족에게 그와 비슷한 행위를 한다.

 

유엔 사무총장도 교황도 당장 전쟁을 멈추라고 하지만, 이스라엘은 들은 척도 안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폭격이, 침공이 정당하다고 한다. 오로지 팔레스타인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들, 이들이 전투원이면 모른다. 전쟁에서, 폭격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은 전투원보다는 비전투원, 즉 민간인이 더 많다.

 

민간인 중에서도 힘이 없는 여자와 아이들이 가장 많이 죽어간다. 그런 사실은 역사를 통해 알려져 왔고, 또 전쟁을 하고 있는 당사자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폭격을 멈추지 않는다.

 

왜?

 

폭격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 때 재미있게 보았던 일본 만화 "원피스"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니코 로빈이 잡혔을 때 과거를 회상하고 현실로 돌아와 버스터 콜이라고 하는 해군 군함을 불러 폭격을 하는 일이 일어났을 때 로빈은 '지도상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고 절규한다.

 

지도만 보고 폭격을 결정하는 사람들에게는 지도에 존재하는 공간만이 중요하지 그 공간을 장소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그렇게 쉽게 폭격을 결정하지.

 

특히 이 책 "폭격의 역사"를 읽으면 이런 폭격이 주로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인종, 민족, 집단에게 잘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세계 최초로 원자폭탄을 맞은 일본(그렇다고 일본이 피해자로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은 가해자로서의 위상이 더 크다)과 이슬람을 믿는 이라크, 아프카니스탄, 그리고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을 보면 폭격이 주로 어디에 일어났는지 알 수 있다.

 

물론 간혹 같은 백인끼리, 서양인끼리도 일어나지만 그것은 좀 열들하다고 믿는, 또는 지도상에서 그들의 존재를 부정할 때 일어난다.

 

지도상에서 보이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그곳에 없지는 않는다. 그들은 지도에서 단지 공간으로만, 목표지점으로만 존재하는 그곳을 자신들의 삶의 거주지로 삼고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폭격이라니... 정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아니고...

 

한 번에 삶의 터전을 잃는 사람들, 무엇인지도 모르고 목숨을 잃는 사람들... 그들은 결코 지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지도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엄연히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것을 보아야 한다. 그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다.

 

전세계의 평화를 위해 존재한다는 유엔의 사무를 총괄한다는 사무총장의 말, 교황의 말이 아니더라도 전세계 곳곳에서 평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의 말을 이스라엘은 들어야 한다.

 

그들이 당한 것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신은 분노의 신이기도 하겠지만, 사랑의 신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의 신을 섬기고 싶다.

 

자신들이 목숨처럼 여기는 종교를 진정으로 이 땅에서 실현시키고 싶다면 이젠 폭격을, 전쟁을 멈추어야 한다.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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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의 쟁점과 대안사회 기본소득 총서 2
김원태 외 지음 / 박종철출판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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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정말로 유토피아는 없는 걸까? 없기 때문에 우리의 그리움을 자아내는 걸까? 많은 사람들이 이상향을 꿈꾸었지만, 그들의 꿈은 꿈으로 그치고 말았다. 왜냐하면 이미 유토피아란 말에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뜻이 있기에, 현실에서 이루어진다면 그곳은 이미 유토피아가 아니다.

 

하지만 유토피아는 있다. 그것이 없다면 그러한 희망이 없다면 인간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우리 인간은 극한의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보는 족속들 아니던가. 그래서 재난의 유토피아라는 말도 있듯이, 재난 상황에서도 서로 돕는 공동체, 희망의 공동체를 만들어가고는 하지 않던가.

 

기본소득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유토피아와 같다. 비록 몇몇 나라에서 시도해보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은 전면적으로 실시되지 않고 있다. 또 실시하려는 정부도 드물다. 가진 자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고.

 

그들은 자신의 사치를 위해 쓸 돈은 있어도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데 돈을 쓰기는 아까워하니 말이다. 그럼에도 인간 공동체를 위해서 기본소득에 대해서 꾸준히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몇 년전부터 기본소득에 대한 이야기가 알려졌다. 나는 갑자기 나온 줄 알았더니, 그것도 무상급식 이야기 다음부터 나온 줄 알았더니,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는 예전부터 있었고, 점점 더 정교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기본소득은 보편적으로 누구에게나 일정한 금액을 국가가 지급해주자는 말이다. 적어도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돈이 없어서 못하지 않게...

 

얼마나 주어야 할까?

 

이 책에서서 강남훈은 높은 기본소득과 낮은 기본소득으로 나누어서 고찰하고 있는데, 높은 기본소득의 경우는 한 사람당 연간 평균 550만원을 주자는 것이고, 낮은 기본소득은 한 사람당 연간 300만원을 주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세금문제를 정밀하게 다룸으로써 우리나라에서도 높은 기본소득도 지금 현재 가능하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

 

그의 이론대로 하면 국민의 대다수가(적어도 80%정도가) 세금이 올라도 지금보다는 소득이 많아진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런 사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하여 기본소득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 노령연금이 65세 이상 노인에게 일률적으로 월20만을 주겠다고 한 공약이 재원이 없다는 이유로 폐기되었는데...

 

강남훈의 글을 읽다보면 또 뒤에 나오는 곽노완의 글을 읽다보면 65세 이상 노인에게 모두 월 20만원씩 주겠다는 공약이 충분히 실현가능함을, 결코 재원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정책의지의 문제다. 국민들에게 보편적 복지를 제공하느냐 선별적 복지를 제공하느냐 하는 정책의 문제이지 결코 예산의 문제가 아니다.

 

정책의 문제를 예산의 문제로 호도하여 기본소득으로 가는 징검다리인 노령연금을 사실상 폐지한 것은 우리나라 정책입안자들이 보편적 복지로 갈 생각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만하다.

 

그러니 의료부분도 교육부분도 자꾸 후퇴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미 한 걸음 내딛은 걸음은 되돌리기 쉽지 않다. 우리는 보편적 복지를 향한 한 걸음을 이미 내디뎠다. 이 한 걸음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교육의 무상화, 의료의 무상화, 궁극적으로는 전국민에게 기본소득을 주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이 책을 보니 결코 불가능한 일도 아니고 그냥 유토피아적 공상이라고 할 정책도 아니다. 이미 시작한 나라도, 시작한 자치단체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참으로 지독하게 홍보가 부족하다. 사실 기본소득 문제를 예산가지고 논쟁을 하다보면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국민들은 뭔 소린지 알지 못한다.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유리하고 좋은 정책이 기본소득인데, 대다수의 국민들이 그 좋은 점을 알지 못하고 넘어가는 현실.

 

그러한 현실에서는 기본소득이 도입되기는 요원하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앞부분의 내용이 상당히 어렵다. 정치경제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이해하기에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정치경제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홍보를 해야 한다. 정말로 자신의 삶에 딱 들어오게 설명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리 기본소득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그 좋은점을 이야기해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마치 그림의 떡처럼만 느껴지게 된다.

 

그 점에서 이 책이 좀 아쉽다. 학자들끼리 학술대회에서 하는 논의가 아니라, 대중에게 기본소득에 대해서 알려준다면, 또 알려주려고 한다면 좀더 쉽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학자들의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말로, 대중의 이해수준에 맞게 기본소득을 설명하고 홍보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대중에게 먹혀들어간다.

 

대중에게 먹혀들어가지 않는 정책... 아무리 좋아도 실현불가능하다. 그러니, 우리나라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기본소득 정책...좀더 쉽게 대중들에게 설명하는 책들이 나왔으면 좋겠다.

 

이 책은 그런 책을 위한 디딤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본소득이 유토피아가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 될 수 있음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그런 책을 위한 디딤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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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말로 좋은 날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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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 소설의 유쾌함. 그걸 기대하면서 그의 소설을 읽는다. 대부분 그의 소설은 화려한 입담에 기대어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한다. 유쾌한 반전, 풍자 등 읽으면서 즐거워진다.

 

제목도 그러하다. "참말로 좋은 날" 재미있을 것 같지 않은가.

 

그런데 내용이 아니다. 제목과 따로 놀고 있다. 제목이 소설의 내용을 더욱 증폭시켜 주고 있다. 제목과 어울리지 않는 작품들이 모여 있는데, 이 소설집의 소설들은 칙칙한 내용들이 많다.

 

소설은 문제적 시대에 문제적 개인을 다룬 작품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그만큼 현대사회는 순수를 잃은 사회이고, 이 사회에서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순수하고는 거리가 먼 인간들이 등장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 인물들을 다루고 있는 작품들이 현대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문제적 개인이 아니라, 오히려 순수성을 지닌 인간이라면? 과연 문제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거기에 대한 답을 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 비극적인 결말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등장인물들의 죽음이나 또는 제대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물들을 이 작품이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첫작품부터 그러한 내용이 전개되는데, 마지막 작품인 '저만치 떨어져 피어 있네'에서 정점을 이룬다.

 

김소월의 '산유화'에서 따왔음직한 제목을 달고 있는 이 단편은(중편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사회의 비루함에 속하지 못하고 순수함을 지키려고 하는 모습이 오히려 비루함이 되는 그러한 사람을 다루고 있다.

 

미대에 나와 작품전에도 수차 입선했음에도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겠다고 하다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혼자 떨어져 나올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 그런 주인공이 전세로 든 집이 경매로 넘어가자 겪게 되는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가족간의 갈등 중에서 돈이 차지하는 비중이 80%정도가 된다고 하는데, 돈이 없는 가정이 어떻게 파탄이 나는지를 이 작품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처절할 정도로 무능한 주인공이 청력을 잃어가는 아내와 점점 자신의 현실을 비관하는 딸, 그리고 더이상은 어찌해볼 수 없는 경제적, 사회적 무능력 속에서 파탄되어 가는 모습.

 

이것이 어찌 소설 속 현실이겠는가.

 

심심찮게 뉴스에 나오는 모습 아니던가.

 

기껏 없는 돈을 내어 전세를 얻었는데, 그 집이 경매에 넘어가고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쫓겨나는 신세가 되는 사람들. 이런 일이 현실에서는 부지기수로 일어나는데...

 

이 현실을 소설 속에 담아내어 그 비극성을 도드라지게 표현해내고 있는데...

 

저만치 떨어져 피어 있네에서 저만치... 결국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함께 하지 못한다는, 그래서 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 작품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제목과 달리 유쾌함을 얻지는 못했지만, 지지리도 어두운 현실을 깨달았다고나 해야 할까... 아직도 진행중임을...

 

이제는 의료민영화까지 되면 도대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라고 하는지...

 

언제 "참말로 좋은 세상"이 올지... 정말.

 

그나마 그래도 비극적으로 끝나긴 하지만, 웃음을 유발하는 작품이 '고귀한 신세' 정도일 것이고, 나머지 작품은 제목과는 다르게 주변부로 계속 밀려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삶을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집이다.

 

그래서 현실성을 확보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소설 속 현실이 실제 현실이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 제목따라 '참말로 좋은 세상'이 왔으면 하는 마음이 들게 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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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기본소득을 - 21세기 지구를 뒤흔들 희망 프로젝트 기본소득 총서 1
최광은 지음 / 박종철출판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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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과 장미 또는 빵과 장미.

 

밥이나 빵이 최소한의 생계를 뜻한다면 장미는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생활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생계를 넘어 생활을 해야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데,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했다는 현대에 밥조차 해결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 역설적이다.

 

적어도 인류가 생산해내는 물질로는 굶주리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나와서는 안되는데, 그렇지 않은 현실은 자본주의의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밥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기본소득"이다.

 

누구에게나 조건없이 모두 동등한 소득을 보장해주는 제도. 그것이 바로 기본소득이다. 신고니 심사니 할 필요없이 그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라도 일정한 소득을 보장해주는 일. 기본소득.

 

그리 많은 액수일 필요는 없다. 밥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정도의 금액이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와 더불어 장미라고 할 수 있는 생활에 필요한 제반 조건들의 충족이 함께 이루어져야 하지만.

 

선별적 복지가 사람들에게 위화감 조성 및 막대한 행정력으로 인한 자금 소비를 초래한다면, 기본소득은 그러한 절차가 없고 모두가 동등하게 받기 때문에 위화감이 생길 여지가 없다.

 

문제는 기본소득에 대해서 동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하고, 이를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는 점인데, 이미 브라질에서는 시민기본소득법을 통과해 실시하기도 했고, 또 미국의 알래스카 주에서는 석유 판매로 남은 돈으로 주민들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해주고 있다고 하니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세계적으로도 '기본소득네트워크'가 결성되어 국제적인 연대도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기본소특한국네트워크가 결성이 되었고, 세계기본소득네트워크에 가입이 되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다만 아쉬운 점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지 않다는 점과 이를 거대 정당들이 자신들의 정책으로 연구하지 않는다는 점... 책 뒤에 나오지만 우리나라에서 기본소득에 관심을 가진 정당은 이 책이 나온 2010년을 기준으로 '사회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밖에 없었다.

 

정책적으로 큰 힘을 발휘하는 새누리당은 보편적 복지에 부정적인 입장이 많고(그들이 무상급식에 반대했던, 또는 어쩔 수 없이 찬성했던 그런 모습은 익히 잘 알려져 있으니), 그만큼 커다란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새정치민주연합도 기본소득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다.

 

그러니 우리나라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더 활발해지고 정치 쟁점이 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활동들이 필요한데, 정책적 실현을 위해서는 선거제도 개혁이 함께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처럼 승자독식의 소선거구제가 아닌, 비례대표제를 대폭 확대하고, 중대선거구제로 전환하여 다양한 정당들이 국회에 진출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이런 제도가 마련된다면 기본소득과 같은 문제는 각 정당들이 연구 검토하여 자신들의 정책으로 내걸 수 있게 될 것이고, 국민들은 좀더 다양한 정당들에 대해서 사표가 하닌 투표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기본소득 문제도 각 정당들이 연구하게 되지 않을까 한다. 아직은 멀기만 한 기본소득이지만, 불과 몇 년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무상급식이 실현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 기본소득도 마찬가지다.

 

멀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리고 많은 연구자들이나 활동가들이 기본소득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있고, 다양한 논의를 통하여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가장 먼저 공격하는 재원 마련 방안에 대해서도 나름 대책을 세워가고 있으니... 기본소득제도의 도입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이 책은 2010년에 나왔다는, 벌써 4년이 지나서 시일이 지난 감이 있는 내용도 있지만, 기본소득에 관해서 기초적인 정보와 내용을 제시해주고 있다.

 

기본소득에 관한 역사, 내용, 쟁점, 그리고 우리나라 현황까지 구체적으로 소개해주고 있어서 기본소득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처음에 읽을 수 있는 책으로 좋다는 생각이 든다.

 

더 많이 읽어서 더 많이 기본소득에 대한 생각이 퍼져 나가길 바란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민들레 씨앗처럼 많은 곳으로 퍼져나갈 것이다.  

 

이 책의 작은 제목이 '21세기 지구를 뒤흔들 희망 프로젝트'다. 희망의 씨앗이 이미 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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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도 목이 마르다 - 이원규 시집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76
이원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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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의 해설을 보면 이원규 시인을 '길'의 시인이라고 한다. 그가 걸은 거리만도 엄청날텐데, 단지 걸은 길이 길다고 해서 길의 시인이라는 말을 붙이지는 않았으리라.

 

길은 과정이다. 끝이 아니다. 계속 되어야 하는 진행형. 그러나 계속 가야만 하는 쉬임이 없는 움직임이 아니다. 길은 자체로 쉼터이다. 움직임이자 쉼터. 그것이 바로 길이다.

 

하여 길은 움직일 때 움직이고, 쉴 때 쉰다. 길이 이 역할을 못할 때 그 길은 죽은 길이다. 이미 길이 아니다. 길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똑같은 길이 아니다.

 

쉼이 없는 길. 곧 떠오르지 않는가. 바로 지금 우리들이 가고 있는 길이다. 삶의 길이기도 하고, 문명의 이기를 통해 가는 길이기도 하고.

 

이런 쉼이 없는 길은 곧 막힌다. 끝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계속 이어지지 않고 어디선가 멈춰야만 한다. 이것이 현대의 길이다. 현대인의 길이다.

 

이 시집을 읽으며 이 시집은 첫번째 실린 시로 됐다고 생각했다. 그 시에서 맘이 딱 멈췄다. 나머지는 길이다. 가다 쉬고 쉬다 가고 또 가고 쉬고 하는 길.

 

하여 이 시집은 하나의 길이 된다. 시를 읽는 사람에게.

 

족필(足筆) 

 

노숙자 아니고선 함부로

저 풀꽃을 넘볼 수 없으리

 

바람 불면

투명한 바람의 이불을 덮고

꽃이 피면 파르르

꽃잎 위에 무정처의 숙박계를 쓰는

 

세상 도처의 저 꽃들은

슬픈 나의 여인숙

 

걸어서

만 리 길을 가본 자만이

겨우 알 수 있으리

발바닥이 곧 날개이자

 

한 자루 필생의 붓이었다는 것을

 

이원규, 강물도 목이 마르다. 실천문학사. 2011년 초판 5쇄. 11쪽

 

이 시다. 첫번째 시가.

 

우리의 인생이 발로 쓴 삶이라는 사실. 결국 내가 걸어온 길이 내 삶의 길이었음을 시는 이야기하고 있는데... 발로 걸어서 가는 길. 그것은 어느 하나도 소홀히 여길 수 없는 길이다.

 

길 가에 있는 풀꽃부터 시작하여 발바닥에 닿는 흙, 돌멩이까지, 그리고 눈으로 보는 머언 별들까지도 다 길 위에서 만날 수 있다.

 

하여 우리는 길에서 살고 길에서 죽는다. 이 길에 대한 생각. 발로 쓴 글... 발로 쓴 삶.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 나아가 생각해 보니 세상은 온통 길이다. 길로 이루어져 있다. 길이 없으면 그것은 죽음이다. 아니, 죽음조차도 길로 이어져 있다. 우리는 죽음을 끝이라 하지 않는다. 다른 길로 갈 뿐이라고 한다.

 

이런 길을 가로막는 길이 있으니, 그것은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길이다. 탐욕으로 자연을 막고 있다. 자연스럽지 않다. 어색하다. 그러니 다시 길을 내기 위하여 걸어야 한다. 길은 걸어야 한다. 길에 발바닥이 닿아야 한다. 발바닥이 닿지 않는 길, 문명의 길, 탐욕의 길을 벗어나야 한다.

 

한 때 언론에서 일본인들이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산 곳곳에 박아두었다던 철침을 뽑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다. 우리나라 길들을 막는 철침. 그것에 우리는 분노하고,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된다고들 했었다.

 

그런데 철침보다도 더 무서운, 더 안 좋은 것들로 길을 가로막고 있는 지금의 현실은 무엇인가. 그것은 탐욕에 가려져 진보로 인식되기만 하는데... 결코 그것이 아님을 이 시집을 읽어보면 알 수 있게 된다.

 

시집의 말미에서 이문재 시인은 이원규 시인을 일컬어 시보다 큰 삶을 사는 시인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나라 군 단위의 길들을 거의 다 걸었다고 한다. 걸으면서 자연과 하나되는 삶, 인간 탐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그는 깨달았으리라.

 

그렇다고 이 시집이 현대 문명을 비판만 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길에서 만날 수 있는 일들을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자연과 하나되는 삶을 보여줌으로써 현대 문명의 탐욕에 더 도드라지게 만들고 있다.

 

자연스레 한 쪽을 비판해서 다른 쪽에 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쪽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런 삶을 살 수 있음을 은연중 이야기해주고 있다.

 

그래서 이 시집을 읽으면서 마음이 포근해졌다. 마치 고요한 산 속에서 맨발로 산자락을 걸으며 자연의 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벽소령 안개 사우나'나 '탁좆'이라는 시를 보라. 웃음이 머금어지면서도 마음이 편해진다. 그리고 지리산의 바람이 내 몸을 스쳐지나가는 듯 시원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게 이 시집의 매력이다.

 

시집을 덮고 생각해 보니, 우리 몸 자체가 길이다. 우리 몸이 온갖 길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스러운 길들. 그 길들이 막힐 때 그것이 바로 암이다. 온갖 현대질병이다. 그러니 세상의 길은 곧 우리 몸의 길이다.

 

암세포가 주위를 고려하지 않는, 자신의 기억을 잃은 세포라면 현대인의 탐욕은 바로 이런 암세포와 같다.

 

암세포가 어떻게 우리 몸의 길을 파괴하고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암세포의 발생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거나, 또는 없애려고 한다.

 

'길'도 마찬가지다. 길은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 길이 자신의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그 길에서 우리는 가다 쉬고 쉬고 가다를 해야 한다. 그게 바로 길도 살고 우리도 사는 길이다.

 

따뜻하다. 이 시집. '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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