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류지향 - 배움을 흥정하는 아이들, 일에서 도피하는 청년들 성장 거부 세대에 대한 사회학적 통찰
우치다 타츠루 지음, 김경옥 옮김 / 민들레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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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다 타츠루. 요즘에 많이 읽고 있는 일본 학자다. 교육에 관한 책을 주로 읽고 있는데, 이 책에 세 번째 책이다.

 

이 책이 내 손에 들어오기까지는 참으로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장바구니에 담아 놓고, 늘 살까 말까 망설이다가 다시 장바구니에서 지우곤 했던 책이다.

 

"하류지향"이라는 제목에 '배움을 흥정하는 아이들, 일에서 도피하는 청년들'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책이라, 당연한 얘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도서관에서 빌려볼까, 사서 볼까 망설이고 있는 와중에, 이 책을 펴낸 "민들레"에서 오랫동안 정기 구독을 했다고 이 책을 보내주었다. 결국 이 책은 내게 올 책이었구나.

 

이렇듯 어떻게든 내 손에 들어오는 책이 있다. 인연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간, 이 책은 내게 다가와 내 정신의 일부가 되었다.

 

책은 쉽게 읽힌다. 우치다의 책이 그렇듯이. 또한 읽으면서 '그럴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만큼 설득력이 있다는 얘기다. 교육 얘기라고 할 수 있지만, 사회 얘기하고 할 수 있고, 일본 얘기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 얘기라고도 할 수 있다.

 

오래 전에 우리나라에서 출간이 되었다고 판절이 된 책이라고 한다. 이 책을 민들레 출판사에서 다시 출간을 하였고, 서문에 그런 경위에 대한 우치다의 감상이 실려 있다.

 

처음에 잘 읽혔기에 판절이 되었을텐데, 몇 년 지나 다시 책이 나오게 된 이유는,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현실이 우리나라에서도 나타났기 때문일테고, 그러한 현실에 대한 분석이 타당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민들레 출판사는 계속해서 우리나라 교육에 관심을 보여온 출판사이니, 지금, 이 시점에서 이 책은 우리 교육을 바꾸어가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을 내렸을리라.

 

'배움으로부터 도피하는 아이들'이라는 말을 사토 마나부 교수가 썼고, 사토 교수는 이러한 문제를 돌하하기 위하여 '배움의 공동체'를 시도하였고, 나름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고 본다.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배움의 공동체'가 소개되었고, 시도하고 있으며,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학교도 있으니 말이다.

 

사토 교수가 이렇듯 교육 실천에 주목하고 집중하고 있다면, 사토 교수로부터 '배움으로부터 도피하는 아이들'이라는 개념을 빌려온 우치다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하는 원인 분석에 치중한다.

 

그 원인은 참으로 단순하다. 바로 "등가 교환"이다. 등가 교환은 자본주의의 기본으로, 즉, 화폐 경제를 유지시켜주는 근본 요소이다. 우치다는 이러한 등가 교환을 학생들이 어렸을 때부터 몸으로 익혔기 때문에 배움을 흥정하는 아이들이 탄생했다고 본다.

 

그거 배우면 뭐가 좋아요? 라는 질문은 그 물건이 왜 좋아요, 또는 그 물건이 어디에 좋아요? 라는 질문과 같다는 얘기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니, 너도 나에게 그에 상응하는 무엇을 주어야 한다는 신념(그것은 신념이다)을 지니고 있는 아이들에게는 배움이라는 '불쾌함'에 상응하는 교환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육은 그렇지 않다. 이를 우치다는 교육의 역설이라고 하는데...

 

교육의 역설은 당사자가 교육이 제공하는 이익을 교육이 어느 정도 진행될 때까지, 경우에 따라서는 교육과정이 끝날 때까지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런데 소비주체로 학교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애당초 그런 역설이 교육을 성립시키는 바탕이 된다는 사실을 모른다. (56쪽)

 

이러니 아이들이 수업에 집중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에게 '불쾌함'에 대한  등가는 수업 시간 내내가 아니라, 수업 시간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나머지는 등가 교환이 되지 않는 요소이기 때문에, 더 수업에 집중하면 자신이 손해를 보기 때문에, 학생들은 기를 쓰고 수업에 집중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한다고 한다.

 

어째, 많이 보이는 모습인데...이를 학생들이 의식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몸에, 마음에 이미 내면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무의식적인 노력, 그것이 바로 수업에 참여하지 않는, 즉, 배움으로부터 도피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어른이 되면 일을 하지 않는 그런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또 이러한 등가 교환에는 시간이 사라져 버린다고 하는데... 시간이 왜 중요하냐면 

 

지성이란 요컨대 나 자신을 시간의 흐름 속에 놓고 나의 변화를 고려하는 것이다. 이 말을 거꾸로 하면, '무지'의 정의도 가능하다. 무지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 자신 역시 변화한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못하는 사고를 뜻한다. ... 공부로부터의 도피, 노동으로부터의 도피는 자신의 무지에 고착하는  욕망인 것이다. (156쪽)

 

이렇게 시간을 고려하다보면 '등가 교환'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등가 교환을 포기하는 순간 배움이 일어난다. 왜냐하면 미지의 것에 대한 추구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자신의 인생을 거는 모험이다. 이러한 모험을 떠나기 위해서는 스승이 필요하고, 스승은 단지 기술을 전수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사회에 연결해주고, 나를 과거와 미래로 연결시켜주는 고리로 존재하게 하는 그러한 존재라고 한다.

 

스승이 필요함을 인식하는 순간, 배움에서 도피할 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스승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도 스승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은 시간 속에서만 가능하고, 또 '부등가 교환'에서만 가능하게 된다.

 

그러한 '부등가 교환'을 추구하기 시작하면 지금처럼 공부, 일에서 도피하는 사람들은 줄어들 수 있다. 다른 모습의 인간이 출현할 수 있다. 사회가 변하고,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로 변모되기 시작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류 지향'을 멈추고, 이제는 '상류 지향'을 할 수 있게 된다. 아니, 그렇게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치다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겠는가?

 

고착된 사회에서 그래도 노력하는 사람이 상류를 지향할 수 있고, 상류에 도달할 수 있다고 우치다는 말하고 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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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90호가 왔다. 한 해에 6호씩 발행이 되는 이 책이 벌써 90호란다. 곧 100호가 되겠다. 90호 동안에 우리 교육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들을 했는데... 이 가운데 실현이 된 것도 있을테고, 여전히 진행 중인 것도 있을테다.

 

이번호는 특집이 "초록은 동색?"이다.

 

초록은 동색이라? 왠지 '우리가 남이가?'란 말이 연상되는 제목이다.

 

많은 차이를 무화시키고, 하나로 귀결시키는 언어, 집단성, 통일성, 단일성의 언어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이런 제목을 단 이유는, 그래선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이지 않을까 싶다. 같은 집단 내에서도 이질적인 존재들이 다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하다못해 새누리당에서도 그들의 이념적 편차가 심할 것이고, 이들이 추구하는 목표도 다를 것이라는 생각. 또 정책마다 자신의 생각이 다르다는 생각. 그러면서도 당의 지도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도 하는 현실.

 

역시 초록은 동색인가?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가끔은 서로 다름을 묻고, 하나인 것처럼 행동할 때가 있다. 그런데... 더 큰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을 통해 목표를 추구해나가는 것이다. 그 때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생긴다.

 

이번 호에서는 대안학교에서의 다름들을 이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대안학교 교사들이라고 하여 모두가 똑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초창기에 많은 갈등을 겪고, 그것을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대안교육 15년을 이끌어왔다.

 

그럼에도 최근에 들어온 새내기 대안학교 교사들과 초창기 대안학교 교사들은 다름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그 다름이 불거지고 있다고도 한다.

 

이게 문제인가?

 

다름이 불거지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 바람직한 현상 아닐까?

 

이 책의 어떤 글에서도 있다시피 진화의 방향은 다양성 아니던가? 생물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한 가장 최선의 일이 종의 다양성 아니던가? 그렇다면 다양한 주장이 펼쳐지는 현상은 바람직하고, 권장해야 할 사항이다.

 

대안학교들에서 다름이 불거지고 있는 것은 대안학교가 그만큼 더 진보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말이 될 것이고, 교육적 실천의 다양성은 교육이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말이 되기고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회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그 사회가 민주 사회라는 얘기이고, 이 사회는 그러한 다양성을 바탕으로 더 좋은 사회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다양성을 막으려는 시도는, 오히려 진화의 방향에 역행하는 일이기에... 교육 현장을 단일화하려는 그러한 시도들은 교육 발전의 방향과 정반대로 나아가는 것이고,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종북이라는 이름으로 막으려 하는 것은 사회 발전의 방향을 가로막은 일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다름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다름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지 않을까 싶다.

 

갈등이 문제가 아니라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이 문제다. 갈등의 원인을 파악하고, 그 해결방법에 대해서 다양한 논의들을 거쳐 가장 바람직한 방향으로 해결해 나가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오로지 '초록은 동색'이라고, 한쪽으로만 규정하고 대화를 하지 않으려는 자세가 문제가 된다.

 

민들레 90호. 이번 호는 바로 '초록은 동색'이라는 말을 통해 우리 사회의 소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름을 인정해야 하나가 될 수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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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쓴 후성유전학 - 21세기를 바꿀 새로운 유전학을 만나다
리처드 C. 프랜시스 지음, 김명남 옮김 / 시공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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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학이라고 하면 전문적인 공부를 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들다고 지레 읽기를 포기하고 만다. 어느 순간부터 과학은 전문화되고 파편화되어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분야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유전학은 그 복잡한 과정에 대한 설명,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그런 요소들을 가지고 설명하기 때문에 더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또 살아있는 유기체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 인간처럼 변수가 많은 유기체를 연구하는 학문은 정말로 어렵기 마련이다. 그러니 일반인들이 유전학에 관한 책을 기피하는 것도 이해할 만한 일이다.

 

이렇듯 학문과 사람의 괴리가 일어난 일에는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으로 책을 낸다면 그 책임은 저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게 쉽게 설명을 해야 하는 책임을 다해야 하는데, 그런 책을 만나기가 힘들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점점 전문적인 지식과는 멀어지고, 자신의 문제를 전문가에게 의존하게 된다.

 

이 책은 이 점에서 어디에 가까울까?

 

후생 유전학이라는 학문은 생소하다. 유전학은 들어봤고, 게놈프로젝트나 배아복제나 줄기세포나 하는 말들은 들어보았지만, 하다못해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는 읽어보았어도, 후생 유전학이라니... 선천성이 아니라는 얘기는 유전자 자체가 무언가를 발현한다는 얘기가 아닌데...

 

이런 생각을 하며 읽었다.

 

책의 저자는 쉽게 후생 유전학에 대해서 쓴다고 했는데, 그래도 내게는 어렵다. 왜냐하면 이 후생 유전학과 돌연변이는 어떻게 다르지?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돌연변이는 유전학에 해당된다. 즉 유전자에 변형이 일어난 상태라는 얘기다. 반면에 후생 유전학은 유전자에 변형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세포 속에 있는 유전자가 어떤 작용에 의하여 다르게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쌍동이도 후생 유전학에서는 특정 질병에 누구는 걸리고, 누구는 걸리지 않는다. 즉, 유전자가 환경에 의해서 서로 다르게 작동을 하는데, 이것이 몇 대에 걸쳐서 작동을 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다른 것은 머리 속에서 지우더라도 후생 유전학적 관점에서 환경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만 기억하면 된다.

 

천상병의 글에 있듯이 우리나라 나이와 서양의 나이를 비교하면서 뱃속에 있을 때도 나이로 계산하는 우리나라 나이 계산법이 더 일리가 있다는 말을 이 후생 유전학이 뒷받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태아시절에 받은 스트레스가 몇 대에 걸쳐 전이가 될 수 있으며, 또 동일한 유전자를 지니고 있어도 어떤 사람은 안 좋은 유전자가 발현이 되고, 발현이 되지 않고를 결정할 수 있다고 하니 말이다.

 

태교의 중요성을 강조한 선인들의 지혜가 새삼 요즘의 과학으로 증명이 되었다고나 해야 할까?

 

그래, 다른 것은 잊자. 그 어려운 용어들을 다 이해할 필요도 없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 적어도 사회로부터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개인의 건강에도, 그리고 자손의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일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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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대표시를 말한다
최두석.나희덕 엮음 / 비(도서출판b)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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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서점에 들렀다.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사버릇하니 직접 서점에 가서 책을 대면할 시간이 없다. 그렇게 시간을 내지 않는다. 엄청난 책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즐거움도, 책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즐거움도 사라져버린 지 오래다.

 

그래도 가끔은 아주 가끔은 서점에 갈 일이다. 가서 직접 책을 고를 일이다. 그런데, 서점에 가면 참 엄청나게도 많은 학습관련 책들이 있다. 거의 서점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도대체 우리나라 서점은 학생들이 없으면 유지가 안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서 서점의 반은 신경도 쓰지 않고, 나머지 반 중에서 기술관련 서적들을 포기하면, 그 나머지 반 정도만 둘러보게 된다.

 

문학, 철학, 사회과학, 종교, 예술 등등. 그런 이름이 붙어있는 곳을 둘러 본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집어든다. 한 번 죽 훑어본다. 살 만한가, 아니면 미뤄두어야 하나?

 

많은 책들을 들었다 놨다 하다가 손에 들고 계산대까지 간 책. 바로 이 책이다. 서점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차례도 보고, 또 수록 내용도 보았으니 고르는데 실패할 일이 없는 책이다.

 

"나의 대표시를 말한다"

 

시인이 직접 자신의 시를 고르고, 그 시에 대해서 이야기한 책이다. 시 창작과정이 나와 있는 부분도 있고, 시에 얽힌 이야기가 있는 부분도 있고, 또 자신의 시론을 이야기하는 부분도 있는, 시인이 자신의 대표시를 이야기하는 기획의 책임에도 시인들답게 정말로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다.

 

기획은 기획일뿐, 난 내 예기를 한다. 시인답다. 총 63명의 시인이 참여했다. 적어도 63편의 시를 읽게 되는 셈이다. 그것도 시인 자신들이 좋아하는 시,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시를...

 

하여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또 시의 뒤안길을 함께 걷는 느낌도 받아서 더 좋기도 하다. 이미 읽었던 시도 있지만, 그것이 이 책을 읽는 재미를 반감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더 재미를 느끼게 한다. 어, 이 시에 이런 의미가 있었어, 이 시를 이런 식으로 썼구나 하는 새로움을 더하게 된다.

 

시로 들어가는 문이 63개가 있다고 보면 된다. 아무 문이나 열고 들어가면 된다. 그 문을 열면 더 많은 시의 세계가 펼쳐진다. 읽다가 마음에 드는 시를 만나면 출처가 친절하게도 명시되어 있으니, 시집을 사면 된다.

 

그렇게 되면 이 책은 자신이 할 일을 다 한 셈이 된다. 즉, 이 책은 하나로 완결된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시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문 역할을 한다. 충실한 문이다. 문이 너무도 많다. 어느 문을 선택하든 시의 세계로 들어가겠지만, 그 세계는 너무도 다름으로 인해 고르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선택의 불확실성. 그 즐거움. 이미 정해진 길만을 가는 권태로움에서 벗어나 무엇이 펼쳐질지 모른르는 시의 세계로 들어가는 설렘. 그것을 만끽할 수 있다.

 

여기에 이 책은 세 개의 선택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는 우선 이 책의 편자들이 한 선택이다. 그 많은 시인들 중에 편자들은 63인의 시인을 선택했다. 아마도 더 많은 시인들을 선택했겠지만, 요청에 응하지 않은 시인들도 있을터. 또 황동규의 경우와 같이(황동규, 시가 태어나는 자리) 자신의 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이미 한 시인도 있을터. 그래도 우리나라 모든 시인에게 글 한 자락을 요청하지는 않았으리라.

 

때문에 이 책에는 편자들이 선택이 들어 있다. 시를 바라보는 편자들의 시각이 먼저 개입하고 있는 셈이다.  

 

다음은 시인들의 선택이다. 자신에게 대표시를 뽑아달라는 청탁이 왔다. 세상에, 여러 자식들 중에 어느 자식이 가장 예쁘냐는 질문과 같다. 난감하다. 그래도 이 책에서 장철문 시인이 말하듯이 '서로가 응원하며 살아도 벅찬 세상에 안 쓰고 버틸 수도 없다'(256쪽)고 같은 시인들의 처지에서 이런 책을 기획하는 어려움을 알기에 시인들은 어렵지만, 또 그닥 하고 싶지 않지만 자신들의 대표시를 고른다.

 

그리고 꼭 한 마디 한다. 아직 나의 대표시는 쓰여지지 않았다고. 그렇다. 시인이 이것이 나의 대표시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 시인은 이미 늙어버린, 시인으로서의 영감을 잃은 그런 상태가 되어버리리라.

 

그럼에도 편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독자들을 위해서 시를 위해서 그들은 한 편의 시를 선택한다. 그 선택이 이 책에 나와 있다.

 

편자의 선택과 시인의 선택에 중첩에 더하여 이제는 읽는 사람의 선택이 더해진다. 시인이 아무리 이 시 좋다고 해도 읽는 독자는 자신의 관점에서 시를 판단한다. '그건 네 얘기고'가 되는 셈이다. 독자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다시 만들어간다. 그런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63인의 시인 중에 선택을 한다. 시인이 아니라면 시를 선택을 한다. 마음에 드는 시가 있으면 그 시가 수록된 시집에도 기웃거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독자의 선택이다.

 

이런 세 가지의 선택이 모여 이 책을 이룬다. 63개의 문이 언제든지 열릴 준비를 하고 있다. 그냥 아무 문이나 자신이 고른 문을 열고 들어가면 된다. 시 세계에 발을 담그면 된다. 그러면 이 책은 자신이 할 일을 다하게 된다.

 

이제는 다른 책으로, 다른 시집으로 시의 세계를 여행하면 된다. 자신만의 지도를 갖고, 자신의 발검으로. 

 

이 책에 나와 있는 머리말이 바로 이 책의 효용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시인에게 대표시는 늘 미래에 존재하는 한 그루 나무와도 같다. 안개 속에서 그곳을 향해 걸어가게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다시 저만치 사라지는 한 그루 나무. 그 최후의 시를 행해 모든 시인은 고단하게, 그러나 끊임없이 걷는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펴내게 된 것은 시를 읽고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실제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책이 드물고 아쉬운 사정 때문이다. 현대시가 갈수록 난해해지고 있는데다 발표되는 시의 분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언제부턴가 독자디 따라 읽기가 어려워져 버렸다. 원론적인 성격의 시론이나 시창작법에 관한 책은 많이 있지만, 그 효용은 상당히 제한적이다. 시인마다 시에 대한 관점과 태도가 다르기에 좋은 시편들의 공통적 특질을 추출해 일반화한다는 것 자체가 무망한 일이 되기 십상이다. (5쪽)

(중략)

  이 책은 일반 독자들뿐 아니라 시를 습작을 하는 이들에게도 좋으 참고가 되리라 믿는다. 시인으로 살아가는 일의 속내와 시상이 떠오르는 순간, 그리고 그 날것의 소재가 한 편의 시로 태언기까지의 우여곡절을 세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6쪽)

  

더 말해 무엇하리. 직접 읽으면 된다.

 

덧글

 

이 책을 읽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다른 점이 있었다. 잘못된 글자임에 분명한 시 구절을 보고서, 이 시집이 내게 있다는 생각에 찾아보게 된 시. 이시영의 '고개'

 

3행. '아제야 야제야 정갭이 아제야'라고 되어 있는데, 두 번째 '야제야'는 분명히 '아제야'의 오타이다. 단순한 실수이지만, 시에서는 치명적일 수도 있다. 조심할 일이다

 

그리고 14행. '못 살아가겠다고 못 참겠다'고, 15행. '너도 울고 나도 울고 쩌렁쩌렁 울었지만' (42쪽)으로 되어 있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이시영의 시집 "바람 속으로"에 보면(1995년 초판 5쇄. 132쪽) 14-15행이 한 행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시어도 하나가 다른데..(이 책에서는 '너도 울고 나도 울고'로 되어 있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시집에는 '너도 울고 도 울고'로 되어 있다.)

 

도대체 시인은 어느 쪽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지. 시인이 시를 고쳤다고 봐야 하는 건지, 아니면 이것도 편집자의 실수일런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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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스 비벤디 -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 유동하는 근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한상석 옮김 / 후마니타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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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바우만이 쓴 책 중에 내가 두 번째로 읽은 책. 그가 갑자기(?) 우리나라에 소개되었고, 그의 저작들이 물밀듯이 번역되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만 10여 권이 넘으니, 지금 우리나라는 바우만 열풍이라고 할 수도 있다.

 

바우만이 쓴 책 중 처음으로 읽은 책이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였는데, 지속적으로 불평등 지수가 높아지고 있음에도 우리가 불평등을 감수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을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사회가 있다는 식으로 이해했는데...

 

이 책도 역시 "개인"이다. 지구화된 시대에 오히려 사람들의 삶은 "개인화"되었다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소통을 할 수 있는 기회는 더욱 많이 늘어났으나, 그것은 기회에 불과할 뿐이고, 오히려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서 담을 쌓고 있는 현실이라고 한다.

 

하여 이 책의 제목은 우리말로 번역된 것만 들면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다.

 

'유동하는 세계', 이는 흐르는 세계라고 해도 좋고, 급격하게 변하는 세계라고 해도 좋다. 또는 고정적인 장소를 잃어버린 세계라고 해도 좋다. 오히려 고정적인 장소를 잃어버리고, 순간순간적으로 머무는 공간만 존재하는 세계라고 해도 좋겠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장소를 잃고 낯선 공간에 내던져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경제학 용어로는 노동유연성이라고 하고, 자본의 초국적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노동유연성이라는 말이 다른 말로 바꾸면 노동자를 쉽게 해고할 수 있는 조건이라는 뜻이고, 초국적성이라는 것은 이윤을 위해서라면 어디로든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자본이라는 뜻인데, 노동자로 대표되는 사람은 장소성을 잃고, 자본은 장소성을 버리는 상태.

 

하여 세상은 끊임없이 유동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유동성은 불안과 공포를 조장할 수밖에 없다. 이제는 생활이 아니라 생존이 문제가 되고, 이러한 생존에 장소를 잃은 사람들이 위협을 가한다는 선전이 행해진다.

 

즉 유동하는 세계에서는 바로 이곳이 지옥이 되는 것이고, 이 지옥은 다른 말로 유토피아에 다름 아니다. 결국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세계, 벗어나고자 하는 세계에 불과하다고 한다.

 

지구화란 말을 쓰지만 오히려 더 개인화된 사회에서는 남에 대한 공포 두려움이 조장이 되고, 이러한 두려움은 자신들을 보호하는 장벽을 쌓게 마련인데, 이 장벽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공간이 바로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또 도시민들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낯선 이방인들이 자신에게 침입해 들어오지 않도록 담장을 높이, 문을 꼭꼭, 게다가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아파트 단지 입구에 경비실을 설치해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관리하는 것도 모자라, 아파트 동 건물에는 비밀장치를 한 잠금장치를 해서 다른 사람들이 아예 들어올 수 없게 만들어 놓고 있으며, 택배에 대한 두려움을 조장하여 함부로 문을 열지 말라는 경고성 방송을 하고 있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차량에도 우리는 블랙박스라는 감시 카메라를 달고 있지 않은가. 사회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해결하라고 하는, 그렇지 않으면 피해는 고스란히 너에게 돌아간다는.

 

역시 마찬가지로 사회 구조적인 문제는 내버려두고 범죄 예방을 위해서 감시카메라를 더 많이 설치 해야 한다는 그런 발상들만이 판치고 있는 세상이 아니던가.

 

바우만은 이 책에서 세 가지의 사회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사냥터지기의 사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정원사의 세계, 그리고 마지막은 사냥꾼의 세계.

 

사냥터지기는 사냥터로 대표되는 자연을 훼손하려 하지 않는다. 또한 자기 뜻대로 그곳을 바꾸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 그곳이 지켜지길 바란다.  하여 그는 그 곳을 망가뜨리는 행위를 막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런 일에 자신의 삶을 바친다. 이것은 과거의 세상이라고 할 만하다. 적어도 근대에 들어서서는 인간은 자연을 그냥 내버려두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번째 사회로 넘어갈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정원사의 세계이다. 정원사는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있다. 그 모습대로 사회를 가꾸어가려고 한다. 사회에 대한 밑그림이 있다면 그 밑그림대로 사회를 만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습과도 같다. 바로 근대의 인간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세계를 바로 유토피아라고 했으며, 그런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신들이 유토피아를 건설하고 있다는 생각에 의문이 들었다. 과연 이것이 유토피아인가. 무언가 잘못되지 않았던가.

 

유토피아를 건설한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그런 삶이 사냥꾼의 삶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냥꾼의 삶은 미래를 내다보지 않으며, 현재에서도 오직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하다. 바로 '지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지옥, 이것이 바로 지금의 세계 '유동하는 세계'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우만은 이탈로 칼비노가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카르코 폴로의 말이라고 한 말을 인용한다.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방법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끊임없는 경각심이 필요하고 불안이 따르는 위험한 길입니다. 그것은, 즉 지옥의 한 가운데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해 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 공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174쪽)

 

이 말에 이어 자신의 말을 한다.

 

'다수'는 '다수에게 쉬운' 전략을 선택할 것이며, 결국 그 사회의 일부가 되어 더 이상 그 사회의 괴상한 논리에 어리둥절해 하거나, 어디서나 제시되는 강압적이고 대체로 허무맹랑한 요구에도 자극받지 않을 것(174-175쪽)이라고 하고, '누가 그리고 무엇이 지옥이 아닌지'를 알아내려고 고투하는 사람이라면, 자신들이 고집스럽게 '지옥'이라고 부르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온갖 종류의 압력에 맞서 용감하게 싸워야만 할 것이라는 점(175쪽)이라고.

 

우리 사회도 많이도 파편화되었고, 수많은 위험들이 과장되어 우리 앞에 전달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두려움에 빠져 있으며, 그런 위험들을 개인적으로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지옥'이다.

 

함께 할 수 있음을, 두려움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깨우칠 때 우리는 이러한 유동하는 세계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것이 바우만이 하고자 하는 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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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23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