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이하기 위하여 송년회란 이름으로 술어 절어 산 나날들이다. 술에 젖어드는 만큼 세월의 무게가 나를 짓누른다. 그리고 세상의 습기가 나에게 스며든다. 술과 세월과 세상과 나이가 한꺼번에 나에게 다가온다. 무겁다.

 

이 삶의 무게는 정말 도도하다. 도저히 나에게서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 그럼에도 나는 낙타처럼 이 무게들을 지고 간다. 아직은 쓰러지지 않았으므로. 쓰러질 수 없으므로. 나에게는 이 짐들을 지고도 가야 할 길이 있으므로. 

 

가끔 오아시스를 그리워한다. 오아시스를 찾는다. 잠시 목이라도 축이게. 몸이라도 쉬게. 짐을 잠깐 동안이라도 내려놓을 수 있게. 앞만 보고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 볼 수 있게. 그리고 조금 더 멀리 볼 수 있게.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친 상태에서 책장을 기웃거린다. 며칠 동안 읽었던 바우만의 책들이 더 삶의 무게를 더해주고 있기에.. 그런 분석에서 내 삶도, 우리들의 삶도 자꾸 '부수적 피해' 쪽으로, '밑바닥 계급' 쪽으로 가고 있기에.

 

최장기간 파업이라는 기록을 세웠던 철도노조 파업이 막을 내렸다. 노동자들이 얻은 것이 무엇일지. 과연 민영화라는 이름의 사영화(私營化)가 막아질지 그것은 지켜볼 일이지만, 파업 내내 마음을 졸였던 노동자들. 또 앞으로 그들에게 발부된 체포영장, 구속영장 등은 더 많은 짐을 지우게 될텐데...

 

즐거운, 밝은 내용의 시로 시작을 해야 하는데... 한 해 우리는 우리네 삶을 이 시로 표현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정말로 사냥꾼에 몰린 사냥감이 된 해라고 해야 하나.

 

인간이 다른 생명체에게는 사냥꾼이겠지만, 이 시에서 보듯이 인간은 인간에게 더 무서운 사냥꾼이 된다. 약자들은 세계화 시대에, 신자유주의 시대에 자유란 이름으로, 자본이라는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에 의해 사냥감으로 전락한다.

 

현실을 직시하자. 그래야 벗어날 길이 보인다. 슬프지만... 우리의 현실을 보여주는 시.

 

사냥꾼

- 이희중

 

벌레의 집으로 옷을 짓고

꽃으로 베를 짜며 짐승의 살갗을 뺏어 입는다

식물의 시체 썩은 검은 물을 태워 수레를 굴리고

돌을 녹여 생각 없는 무서운 짐승과

그의 이빨을 만든다 흙을 박제한 후

의자에 의지하고 제 비린내를 강물에 씻어

세상을 더럽힌다 그리고 직설적으로

더 상징적으로 동족을 사냥한다

 

안도현 엮음, 바람난 살구꽃처럼, 현대문학북스. 2002년 1판. 22쪽

 

그래. 인정하자. 작년 한 해는 이러한 사냥꾼들이 득세를 한 해였다. 사냥꾼들에게 우리는 마냥 쫓기고만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쫓기고만 있었을까? 아니다. 분노도 했다. 광범위한 분노. 그러나 그 분노는 결코 그릇을 넘지 못했다. 그릇 안에서만 부글부글 끓고 있었을 뿐이다.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는 외침은 외침으로만 끝나고.. 우리는 우리의 분노를 그릇 안으로, 그릇 안으로만 삭여내고 있었다. 세상에... 분노할 일에 분노해야 하는데...우리는 단순한 '원민'이 아닌데... 분노도 못 하는 '항민'이 아닌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 '호민'이 되어야 하는데...

 

이 시집에서 이 시가 내 맘에 꽂힌 이유이기도 하다. 이 시의 내용은 바로 내 얘기이기도 했으므로.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했으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짐 지운 자들에게 분노하고, 끓어오르기도 했지만, 그것이 겨우 그릇 안에서만 그랬으므로. 이제는 넘쳐야 한다. 끓어 넘쳐야 한다. 뜨거움을 보여주어야 한다. 

 

물이 끓어서 그릇 밖으로 넘쳐 나지 않으면 그것은 그냥 끓을 뿐이다. 사라져갈 뿐이다. 이제는 정당한 분노는 제대로 끓어오르게 해야 한다. 뜨거움이 번지게 해야 한다. 그것이 진짜 분노다. 진짜 끓어오름이다.

 

                      물 끓이기

          - 정양

 

한밤중에 배가 고파서

국수나 삶으려고 물을 끓인다

끓어오를 일 너무 많아서

끓어오르는 놈만 미친 놈 되는 세상에

열받은 냄비 속 맹물은

끓어도 끓어도 넘치지 않는다

 

혈식(血食)을 일삼는 작고 천한 모기가

호랑이보다 구렁이보다

더 기가 막히고 열받게 한다던 다산 선생

오물수거비 받으러 오는 말단에게

신경질 부리며 부끄럽던 김수영 시인

그들이 남기고 간 세상은 아직도

끓어오르는 놈만 미쳐 보인다

열받는 사람만 쑥스럽다

 

흙탕물 튀기고 간 택시 때문에

문을 쾅쾅 여닫는 아내 때문에

'솔'을 팔지 않는 담뱃가게 때문에

모기나 미친 개나 호랑이 때문에 저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늘 수 있다면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부끄럽지도

쑥스럽지도 않은 세상이라면

그런 세상은 참 얼마나 아름다우랴

 

배고픈 한밤중을 한참이나 잊어버리고

호랑이든 구렁이든 미친 개든 말단이든

끝까지 끓어올라 당당하게

맘 놓고 넘치고 싶은 물이 끓는다

 

                                  안도현 엮음, 바람난 살구꽃처럼, 현대문학북스. 2002년 1판. 56-57쪽

 

새해에는 '끓어오른 놈만 미쳐보이는, 열받는 사람만 쑥스러운' 모습으로 남지 않고,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부끄럽지도, 쑥스럽지도 않은 아름다운 세상'이 되도록 해야지. 그래서 '끝까지 끓어올라 당당하게 맘 놓고 넘치'는 물이 되도록 해야지.

 

아름다운 시어들이, 세상을 밝고 명랑하게 보는 시로 시작하지 않고, 이런 시로 시작한 아름다움. 지금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아름다움은 바로 이런 것 아닐까... 하여 한 해를 되돌아보고, 새해를 다짐하는 시가 내게는 바로 이런 시가 된다.

 

시가 다시 내게로 다가왔다. 내 삶 속으로 스며들어 왔다. 고맙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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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수적 피해 - 지구화 시대의 사회 불평등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정일준 옮김 / 민음사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바우만의 책을 읽으면서 갑자기 들뢰즈가 생각이 났다.

 

바우만은 liquid (액체 또는 유동적)라는 말을 쓰고 있고, 들뢰즈는 nomad(유목)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이는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고정적이고, 고형적인 것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들뢰즈의 이론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가 말한 노마드가 지식인의 차원에서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는데... 탈주, 리좀 등 이는 지식인들이 포스트-모던한 시대를 살아가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탈영토화니 재영토화니 하는 말들이 결국은 있는 사람, 즉 버틸 수 있는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그러니 이러한 세계화 시대에 자신의 자리를 잃고 탈주가 아니라 배제되는 사람에게는 들뢰즈의 이론은 탁상의 공론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역시 잘 몰라서 그런다고 하겠지만, 그래도 그런 느낌이 팍 들고 있는 것은 뭘까?

 

아마도 바우만의 책을 읽어서 일 것이다. 그의 책을 읽으면 이렇게 어려운 용어는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액체라는 말도 유동적이라고도 번역하고 있듯이 들뢰즈가 말하는 리좀과 비슷한 개념으로 쓰이기는 하지만, 그가 말하는 유동적 근대 또는 액체 근대에서는 재영토화는 이루어지기 힘들다고 본다.

 

그들은 소외되고 배제되는 쓰레기가 되는 삶을 살게 되고 만다. 이를 그는 지구화 시대의 사회 불평등이라고 하는데...

 

이 책에 나와 있는 제목만 보아도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어느 정도 알게 된다.

 

서문- 사회 불평등의 부수적 피해

1. 광장에서 시장으로

2. 공산주의를 위한 진혼곡

3. 유동적 현대에 사회 불평등이 처한 운명

4. 이방인은 위험한 존재다?

5. 소비주의와 도덕성

6. 프라이버시의 위기와 인간 유대

7. 운과 개인화된 해결책

8. 현대 아테네에서 고대 예루살렘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다

9. 악의 자연사

10. 우리 가난한 사람들

11. 사회학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래 이 책은 그래서 지구화 시대, 세계화 시대에 밀려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들이 왜 밀려나고 있으며,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이것이 바우만이 추구하는 주제다. 그리고 이런 사회를 유지하는 것이 바로 정치권력이라고 한다.

 

인간의 취약성과 불확실성은 모든 정치권력의 기초다. 권력은 국민에게 인간 조건의 이런 두 가지 해악에 대한 효과적인 보호를 약속함으로써 권위와 복종을 확보한다. (188쪽)

 

이와 마찬가지로 이방인에 대한 두려움을 조장한다. 그러한 두려움을 통해 권력은 자신의 힘을 유지한다. 이렇듯 권력에게는 배타적인, 늘 버려지는 사람들이 존재해야 한다. 그것을 밑바닥 계급이라고 하는데,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쓰레기로 취급되는 계급이라는 뜻으로 해석이 된다.

 

그리고 이를 세계화에 따른 부수적 피해라고 한다. 이것이 세계화의 필연적인 결과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어쩔 수 없이 생긴, 긍정에 따르는 부정이라는 개념으로 홍보하고, 권력화한다.

 

바우만이 추구하는 사회학은 이런 사회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그는 이런 직시할 수 있는 힘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그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쉽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세상에 구체적인 대안이 어디 있겠는가.

 

그것은 우리가 현실을 직시하면서 그때 그때 상황에 맞게 우리의 삶을 만들어나가야 하는 데서 찾아진다. 이것이 바로 바우만이 제시하는 대안이다. 사회학은 이런 임무에 복무해야 한다.  

 

우리도 지금 너무도 많은 공포를 조장당하고 있다. 이러한 공포를 통해 우리는 삶에 일어나는 필연적인 손해를 부수적 피해라는 이름으로 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누군가에게 밀려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회는 불안 요소를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불안 요소는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고 사람들의 행복을 방해하게 된다.

 

바우만이 말하는 밑바닥 계급, 또 부수적 피해를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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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두 편의 영화를 봤다. 둘 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지만, 실화보다도 더 실감나는 배우들의 연기로 상당한 호평을 받고 있는 영화다.

 

사실, 두 영화 모두 보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편치 않을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고, 본 결과 역시 맘이 편치 않았다.

 

 

도대체 이런 영화가 지금 개봉이 되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니... 조금 우습기도 하다.

 

영화 속의 내용과 실제의 사실이 다를 수밖에 없고, 영화에서 사실을 찾아내려고 하는 모습이 우습기도 하지만, 예술이란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영화들이라고 해야 하나.

 

 

 

하나는 "집으로 가는 길"

 

마약 사범으로 몰려 프랑스 감옥에서 거의 2년을 갇혀 있다가 나오는 사연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영화.

 

마약이라는 범죄보다는, 그러한 일을 저지른 국민을 대하는 외교관을 태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하는, 외교관은 국가를 대표한다고 하면, 국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하는 영화.

 

 

이 영화를 보면서 2000년대의 대한민국이 아직도 후진국이라는 사실, 국가는 국민을 바탕으로 유지가 되는데도, 국민을 위해서 존재하기 보다는, 즉, 링컨이 말했다는 그 유명한 말.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라는 말. 그것이 국가라는 사실을 잊게 해준 그런 영화.

려운 처지에 놓인 국민을 국가가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해서 너무도 적나라하게 알려준 영화라고 해야 하나.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저런 외교관은 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했을 거라 생각하는데. 그런 외교관이 존재하는 나라는 제대로 된 나라라고 할 수 없다는 생각.

 

외교에서 목표로 삼고 있는 국가의 이익이란 다른 말로 하면 국민의 이익이 아니던가. 그걸 망각한 외교관은?

 

역시 또 하나의 영화. "변호인"

 

 

 

보고 싶다와 보고 싶지 않다가 공존했던 영화. 어차피 일은 뻔한 거고, 역시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에 결말은 뻔하지만, 그렇지만, 그 결말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에, 보고 나면 마음이 더 무거워지지 않을까 생각했던 영화.

 

그래도 현실을 비껴갈 수 없다면, 그런 영화에서 표현하고 있는 국가와 국민의 문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본 영화.

 

역시 보고 난 다음에는 "국가란 무엇인가"를 또다시 생각하게 만든 영화. 아니 생각하게 한다기보다는 절규하게 한다고 해야 하는 영화.

 

이 영화가 마음 아프게 다가온 이유는 이 영화가 과거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아직도 진행중이라는. 무려 30년이 더 지난 일인데도, 민주화가 되었다고 하는데도, 왜 진행중이라는 생각이 들까?

 

내 생각이 잘못되었든지, 아니면 정말로 이 사회가 한 발짝도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든지 둘 중 하나 아니던가.

 

읽고 있는 책 중에 이런 구절이 있었는데... 두 영화를 보면서 이 구절이 딱 들어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정치 체제의 민주주의적 성숙도는 이러한 번역(사적인 관심과 욕구를 공적인 쟁점으로 재구성하고, 역으로 공적인 관심사를 개인의 권리와 의무로 재구성하는 것)의 성공과 실패, 매끄러움과 거칢에 의해 측정될 수 있다. 즉 그 주된 목적을 달성한 정도에 의해 측정되어야지,종종 민주주의의 필요충분조건으로 오인되곤 하는 이러저러한 절차의 완고한 준수 여부에 의해 측정되어서는 안 된다. (바우만, 부수적 피해.민음사. 2013년. 21쪽에서)

 

 

지금은 그래도 절차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확립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이지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차적 민주주의조차 확립되어 있지 않던 시대를 보여주고 있는 "변호인"이란 영화를 보면서 더욱 실감하고 있다고나 해야 할까.

 

우습게도, 아주 오래 전에 나온 소설인 채만식의 "논 이야기"까지가 떠올랐다. 해방이 되고 나서 만세를 부르지 않길 잘했다고 자조하는 주인공.

 

그에게 나라란, 국가란 자신에게 피해만 주는 존재였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외치는 우리나라 헌법 제 1조 제2항은 그 때는 요원했다. 그런데, 2000년대에 벌어진 "집으로 가는 길"에서도 역시 요원했다.

 

아니, 헌법이 87년 민주화 운동의 결과로 나타났듯이, 그래서 우리가 헌법, 헌법, 우리나라 모든 법 위에 있는 최상위 법으로 헌법을 인정하고 있듯이 헌법의 가장 앞에 나와 있는, 국가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그 당연한 귀절을, 헌법 책에만 있는 조항으로 여겨서는 안될 것이다.

 

적어도 영화에서 표현된 내용들이, 소설에서 표현된 내용들이 과거의 것으로만 머물게 할 의무는, 권리는 우리에게 있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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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하는 공포 산책자 에쎄 시리즈 2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이번엔 바우만이 쓴 책 중에서 '유동하는 공포'라는 제목을 지닌 책이다. 'liquid'라는 말에 유동적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액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고 한다. 어떤 언어든지 바우만이 하고자 하는 말을 잘 전달하면 되는데...

 

이 책의 번역자 말에 의하면 이 liquid라는 말에는 "여기저기 스미는, 어느새 젖어드는, 차갑고, 무한하며, 숨막히게 하는"(306쪽)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유동하는 공포란, 우리의 삶에 알게모르게 젖어들어 있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공포라는 뜻으로 사용할 수 있으리라.

 

이러한 공포가 언제 나타났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다만 바우만은 근대(현대)에 나타나는 공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즉, 공포란 언제든지 존재했지만, 유동적인 공포는 현대의 것이라는 얘기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공포가 가장 무서울 때는 그것이 불분명할 때, 위치가 불확정할 때, 형태가 불확실할 때, 포착이 불가능할 때, 이리저리 유동하며, 종적도 원인도 불가해할 때다. 어떤 규칙성도 합리적 이유도 없는 공포, 그 낌새가 여기저기서 선뜻선뜻 나타나지만, 결코 통째로 드러나지는 않는 공포야말로 가장 무시무시하다. '공포'란 곧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위험의 정체를 모른다는 것, 그래서 그것에 대처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에 달려들어 맞서 싸우려 해도, 싸워볼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11-12쪽)

 

바로, 이게 공포다. 우리는 모르는 것, 불확실한 것에 공포를 느낀다. 이런 공포는 죽음, 악에서 나타난다.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는 예측불가능하기 때문이고, 그 다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조건에서 죽음만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러한 죽음과 친숙한 것이 바로 악이다. 이 악은 우리에게 죽음을 불러온다. 그래서 두렵다. 이것 자체가 공포다. 악에 대해서는 또한 알려져 있지 않다. 왜 악일까? 그 악을 어떻게 막을까? 신을 동원해도 악은 해답이 없다. 신과 악에 대한 문제, 즉 악으로 인한 고통은 성서에 나오는 '욥'의 이야기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가.

 

욥은 도덕적인 인간이다. 신심이 깊은 인간이다. 그럼에도 그는 온갖 고통을 받는다. 신이 그에게 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준다. 그는 악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 악은 공포의 근원이 된다.

 

하지만, 이렇게 초자연적인, 인과관계를 떠난 공포보다는 우리가 알고 있는, 또 알 수 있는 공포에 주목해야 한다. 초자연적인 것은 우리의 인식체계를 넘어선 것이기에 원초적인 공포를 제공하고 있다고 보고 논외로 한다면, 우리에게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공포, 즉 테러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테러는 전세계적으로 퍼져 있으며, 실질적인 위협보다는 매스컴을 통해 보여지는 위험이 더 크기에 공포를 조장하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우리나라는 테러보다는(테러는 유럽이나 미국에서 종교 분쟁과 관계가 깊다고 볼 수 있으므로) 분단의 위협이 공포로 작동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 책에서 바우만이 테러를 통해 이야기하는 것을 우리는 '분단'으로 받아들이고 적용하면 될 것이다.

 

바우만이 이 책에서 주장하고 있는 공포를 조장함으로써 지배권력을 유지한다고 보면, 이 말은 예전의 우리나라(정말로 예전이었으면 좋겠다)에 해당이 되는 말이다. 심심하면 터졌던 간첩단 사건이라든지, 땅굴 사건이라든지, 또는 북한의 도발 위험이라든지 하는 소위 말하는 '북풍'이 꽤 있었으니 말이다.

 

하여 전쟁 자체보다는 언론에서 보여주고 있는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우리 사회를 지배했으며, 우리의 행동을 제약하고 있었다. 이러한 공포를 지식인들(그람시의 용어로 하면 유기적 지식인이 아닌 전통적 지식인)이 더 조장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고.

 

그러나 바우만이 말하는 점을 새겨둘 필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일테니 말이다.

 

가난한 나라의 빚을 탕감하고, 부유한 나라의 시장을 가난한 나라의 주요 상품에 개방하고, 지금 취학 기회를 전혀 얻지 못하고 있는 1억 1천 5백만 명의 아동이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후원하는 일, 그리고 이와 비슷한 행동들을 고안하고, 결의하고, 실행하는 일이 진정한 테러와의 전쟁이다. (181쪽)

 

이것을 우리는 북한에 적용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전쟁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지식인의 역할이 아니겠는가.

 

다가오는 공포, 우리의 힘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공포에 대한 유일한 치료법. 그 시작은 그것을 바로 보는 것이다. 그 뿌리를 캐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그 뿌리를 찾아 들어가 잘라버릴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286쪽)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공포, 우리 삶에 속속들이 들어차 있는 공포, 그래서 우리의 행동을 제약하는 공포. 그것을 바로 보는 일. 그 뿌리를 캐고 들어가는 일.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 그것이 바로 지식인이고, 그람시가 말한 유기적 지식인이다.

 

이런 지식인들이 제 역할을 할 때 우리는 '유동하는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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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의 시대 - 유동하는 현대사회의 문화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윤태준 옮김 / 오월의봄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사회학자라고 해야 한다. 지그문트 바우만. 최근에 우리나라에 엄청나게 소개되고 있는 학자이고, 나 역시 그의 책을 읽기 시작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학자들이 많으련만, 자꾸 외국학자에게 눈이 가는 이유는, 아무래도 우리나라 문화를 멀리서, 좀 떨어뜨려 놓고 보고 싶은 생각이 앞서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유행의 시대라고 제목을 붙였지만, 책에 있는 영어 식의 제목에 의한 번역에 따르면 '유동하는 현대사회의 문화'이다.  '유동하는 현대 사회'를 '액체 근대'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액체 현대'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지금을 이야기하는, 1900년대부터 2000년대를 '모던'이라는 이름으로 지칭한다고 보면 별 문제는 없는 번역일텐데... 각 출판사나 번역가들이 하나로 정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현대 사회의 문화에 대한 고찰을 담고 있는데... 여러 글들이 모여 하나의 책을 이루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문화'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는 책이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의 핵심을 바로 이 구절이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람들의 모든 의심과 저항이 하나의 흐름으로 함께 흘러가지 못하도록 막을 수만 있다면, 탄압받는 사람 하나하나가 각자 개별적으로 한 가지 유형의 억압만 따로 떼어 해결하려 단독으로 노력하며 다른 불행한 사람들도 똑같이 하고 있을지 의심스럽게 바라보게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가능하다면 여러 감정의 흐름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배출되도록 유도하고, 분해하고, 흩어버려서 많은 부족과 공동체가 하나로 뭉쳐서 저항하는 에너지를 소진시킬 수 있게 될 것이다. 법의 수호자들은 공정한 중재자의 옷을 입고 집단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대변자이자 평화로운 공존의 전도사로서 모든 반목과 상호 파괴적인 전쟁을 끝내는 데 헌신하는 역할을 맡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는 동안 적개심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현 상황을 가져온 그들 원래의 역할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침묵 속에 잠들 것이다. (64쪽)

 

어떤 문화에 대한 글이든 결국은 사람이 살아가는 일에 관한 글일테니, 문화가 계몽으로 작동을 하든, 지배로 작동을 하든, 또는 소비를 작동으로 하든, 문화는 우리의 삶에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이 문화를 이러한 '분할하여 통치하라'는 식으로 운영을 하는 것이 지배층의 전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즉, 유행이라는 것도 다양한 집단을 하나로 묶는다기보다는 다양한 집단을 각기 유행이라는 이름으로 자꾸만 분산시킴으로써 하나로 뭉치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된다.  역시 마찬가지로 자본이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에는 '예술'도 역시 자본의 지배하에 들어가 자본의 취향에 맞게 변형, 구분, 분할되어 존재하게 되고, 이러한 문화들은 실생활과 동떨어지게 된다.

 

전체적인 내용보다는 인용한 구절에 집중을 하면,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볼 수가 있게 된다. 상당히 많은 일이 일어나지만, 지금 우리는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람들의 모든 의심과 저항이 하나의 흐름으로 함께 흘러가지' 못하고 있으며, 이들은 각자의 불행에만 치중할 뿐, 다른 이들의 불행은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지 않은가.

 

미국산 소고기 수입부터, 한미 FTA, 4대강 사업, 강정마을, 밀양 송전탑, 철도 파업, 여기에 최근에는 특정 방송사 징계까지... 많은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이들이 하나의 흐름으로 연계되지 못하고 있다.

 

정말로 '분할하여 통치하라'는 명제가 우리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각기 불행할 뿐이다.

 

얼마나 통렬한 통찰인가?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통찰을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유행이 하나의 흐름으로 집단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것 같지만, 사실 유행은 지극히 개별화되고 펴현화된 움직임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유행의 창출에 성공했기에 사람들은 전체의 흐름을 볼 수 없게 되었고, 그에 따라 자신의 불행만을 보고, 남의 불행은 보지 못하는 현실이 되는 것이다.

 

가령 철도파업으로 사람들의 출퇴근과 이동이 불편해지고 있다. 방송은 이 점을 중점적으로 방송하고 있다. 즉, 나의 불편함을 불행으로 치환하여 호도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러한 불편함으로 인해서 생존이 달린 불행에 처한 사람들과 구별짓기(부르디외의 용어)를 하고 있다.

 

즉 나의 불편함과 그들의 불행을 등가교환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되고 있기에, 내가 불행을 당할 때 그들도 역시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유동하는 현대 사회의 문화가 지니고 있는 불행이다.

 

이러한 일을 바우만은 '문화적 다원주의'라고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다른 문화를 인정하는 '다원주의'가 아니라, 다원주의라는 이름으로 다름을 배제하고, 관심을 끊는 그런 문화적 상대주의를 일컫고 있는 것이다.

 

저것은 내 일이 아니야.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 공연히 간섭할 필요 없어. 이렇게 규정 짓는 순간, 이것은 '문화적 다원주의'를 표방한 또하나의 억압이고 말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그대로 돌아온다.

 

하여,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는 '타인의 존재를 무관심하게 잊어버리지 않고, '자기와 관계 없는 일에 끼어들(69쪽)'어야 한다. 이것은 힘든 일이고, 자신에게는 엄청난 모험이겠지만, 적어도 지식인은 이래야 한다고 바우만은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이게 단순히 지식인만의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일이지 않은가.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던 말...  니믈러 목사의 말이라고 하는데... 행 갈이를 하면 시가 되는 그런 말.

 

이 말은 바우만이 말한 앞서 인용한 글과 통한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에게도 경종을 울리는 말이다.

 

나치가 공산당원을 잡으러 왔다. 난 침묵했다 난 공산당원이 아니기때문에. 다시 나치는 유태인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때도 난 침묵했다. 난 유태인이 아니기때문에. 시간이 흘러 나치는 다시 천주교인을 잡아들이기 시작했지만, 난 또 침묵했다. 난 개신교도인이기때문애. 마침내 나치가 나를 잡으러 왔다. 그러나 내 주변엔 날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나치주의자들만이 남아 있었다.

 

덧글

 

번역자도 역자의 말에서 말하고 있듯이 문장이 참으로 만연체다. 그래서 글의 핵심을 놓치지 일쑤다. 바우만의 문체가 그렇다고 하고,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을 그는 그의 언어로 유려하게 표현했다고 하지만, 우리 말로 옮길 때에는 우리말에 맞게 좀 다듬었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 말은 역자도 했지만, 역시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힘든 작업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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