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켈러 - A Life - 고요한 밤의 빛이 된 여인
도로시 허먼 지음, 이수영 옮김 / 미다스북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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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켈러 하면 장애를 딛고 성공한 사람이라는 말이 먼저 떠오른다. 사실 어렸을 때 읽었던 헬렌 켈러의 이야기에는 그 정도가 다이기 때문이다. 설리번이라는 훌륭한 선생님으로 인하여 글을 알게 되고, 그 때부터 자신의 장애를 딛고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는 성공이야기.

 

장애는 극복될 수 없는 무엇이 아니다라는 살아 있는 예. 그게 다였다.

 

사실 설리번 선생에 대해서도 그냥 어렸을 때 헬렌에게 글을 가르쳐준 선생님 정도로밖에는 알지 못했다. 헬렌에 대한 지식은 여기에서 멈춰 있었던 듯하다. 짐승같던 헬렌이 사람이 되는 순간. 딱 거기까지.

 

커가면서 헬렌이 사회참여를 했다는 얘기까지는 알았다. 그가 사회주의에 공감했다는 사실도. 이것도 딱 여기까지. 장애를 가진 사람이 어려운 처지의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일은 당연하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기에 헬렌이 사회주의에 공감했다는 말을 듣고는 그랬겠지가 끝이었다.

 

그만큼 헬렌의 삶은 내게는 피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더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그러다 읽게 된 이 책. 헬렌의 전 생애를 다룬 이 책은 헬렌에 대해서, 장애에 대해서, 그리고 교사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 준다.

 

헬렌의 평전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이 책의 주인공은 세 명이다. 한 명은 헬렌 켈러. 또 한 명은 앤 설리번 메이시. 그리고 마지막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인 폴리 톰슨.

 

헬렌을 중심으로 둘을 좌우에 놓을 수가 있을까? 아니 어쩌면 이들은 헬렌의 삶에 좌우로 있지 않고 헬렌의 삶에 함께 있었던, 헬렌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앤 설리번으로만 알려져 있던 설리번 선생은 뒤에 메이시라는 성이 붙는다. 그가 유일하게 결혼하여 만든('얻은'이라는 말이 거슬린다) 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늘 헬렌 켈러의 삶에서 뒤에만 존재했던 이 사람이 헬렌의 삶 내내 함께 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

 

평생을 헬렌과 함께 살고 죽으면서도 헬렌의 삶을 걱정했던 사람. 그는 강인한 정신과 냉철한 지성으로 헬렌의 삶을 지배했다. 지배했다는 표현이 어색하다면 헬렌의 삶을 이끌었다고 해야 한다.

 

헬렌이 평생을 남들에게 드러내고 남들에게 인정받게 해주었던 사람. 그러나 자신은 헬렌의 뒤로 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 헬렌과 떨어진 삶을 생각도 하지 못했던 사람. 그는 헬렌과 함께 한 평생이 행복했을까? 때로는 그에게도 엄청난 갈등이 있었을테고, 헬렌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구도 있었을텐데...

 

헬렌의 내면까지도 다루어서 헬렌의 알려져 있지 않은 인간적인 모습까지도 우리에게 알려주겠다는 이 평전에서도 설리번의 이러한 내면적 갈등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짐작은 할 수 있을 뿐이다. 그에게도 인간적인 고되,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한 욕구 등이 왜 없었겠는가. 그럼에도 헬렌의 삶과 자신의 삶을 하나로 묶을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고(다른 말로 하면 헬렌이 자신의 도움이 없으면 살기 힘들 거라는 점을 알고) 헬렌과 평생을 함께 살아가야 했으니...

 

이 점은 폴리 톰슨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 앤 설리번이 죽은 뒤 폴리가 죽을 때까지 헬렌에게 앤 설리번의 역할을 했던 사람은 바로 폴리 톰슨이다. 죽어서도 헬렌과 앤과 함께 나란히 있는 그는 대부분의 헬렌 전기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헬렌의 말년에 앤 설리번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다.

 

이 책의 장점은 바로 이것이다. 그 당시 장애를 가진 여성이 사회에서 인정받는 길은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 헬렌의 성공에는 헬렌과 함께 한 사람들의 희생(?아마도 사랑이라고 해야 하겠지)이 있었다는 사실.

 

헬렌도 우리가 성녀로 알고 있지만, 그에게도 사람의 욕구가 충만했다는 사실. 그런 욕구를 자신의 생계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기에 남에게 의존해서 많이 억눌러야만 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지금 장애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하게 하고... 우리가 장애 문제를 시혜의 관점에서만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사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욕구를 지닌 사람이라는 사실. 우리와 세상을 대하는 태도와 살아가는 방식이 다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통합교육. 함께 하는 삶. 요즘 장애 운동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들 아니던가. 이를 헬렌 켈러의 삶에서 찾아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헬렌의 삶에서 신비주의를 걷어내고 있는 이 책은 오히려 그래서 헬렌의 삶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그 노력이. 그 시대에 남에게 의존해서 삶을 살 수밖에 없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한 헬렌의 삶이 더 감동으로 다가온다.

 

헬렌의 자신의 처지에서 힘든 사람들의 처지에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사회 전면에 나서기도 했다. 비록 남들은 헬렌에게서 그런 모습을 지우려고 했지만 말이다.

 

헬렌이 믿었다는 스베덴보리의 영성. 그것은 아마도 헬렌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극복하게 했을 것이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도 알려주었을 것이다.

 

적어도 영성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믿음을 가진다면 막 살 수는 없을테니 말이다. 그것은 장애를 가진 사람이든, 아닌 사람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책은 나에게 인간 헬렌 켈러를 알게 해주었다. 그리고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해주었고, 지금은 많이 나아진 듯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먼 장애 정책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해주었다.

 

좋은 책이다. 이런 평전이 필요하다. 한 사람을 성인으로 만들지도 않고, 그렇다고 약점만 나열하지도 않고, 그럼에도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자신을 처지를 둘러 보라.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무엇을 해야 행복할지 생각해 보라. 이 책은 그 점에서 시작하라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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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다. 겨울에 맞는 시, 뭐가 있을까 하다가 오래 전에 읽었던 정대구의 이 시집을 꺼내들었다.

 

인간의 기억은 한계가 있어 읽었는지, 읽지 않았는지 참으로 가물가물한 시집이다. 분명히 읽었을텐데... 시란 이렇게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아쉬워하지 않는다. 분명 내 마음 속 어딘가에, 또는 내 몸 어딘가에 살아있을테니.

 

이 시집을 꺼낸 이유는 제목 때문이다. "겨울기도" 지금은 겨울.

 

계절만이 아니라 우리네 삶 역시 겨울.

 

겨울임에도 황사가, 미세먼지가... 우리를 습격하고... 경제는 더욱 어려워진다고 난리고... 노동자들은 힘든 삶을 보내고... 시민단체들은 제 역할을 못하고... 남과 북은 여전히 경색국면이고...

 

이럴 때 경건하게 기도를 하지 않겠는가. 겨울에는 이 겨울을 잘 보내게 해달라고. 이 겨울을 이겨내고 움트는 봄을 맞이하게 해달라고. 이 시집의 제목이 된 '겨울 기도'처럼 힘듦은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힘듦이 비켜가기를...

 

힘든 계절, 힘든 시대...기도를 통해... 행동으로 나아가는 힘을 얻게 되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추위가 봄을 더욱 즐겁게 맞이할 수 있게 해달라고. 그런 기분으로 시집을 꺼내들었는데...

 

오래된 시집이다. 오래된 시들이다. 어렵지 않게 읽히는 시들이다. 그럼에도 생각할 수 있는 시들이 여러 편 있다. 시란, 시대가 흘러가도 언제나 시대와 함께 하는, 그 시대에 맞게 재해석 될 수 있는 그런 존재임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여기서 발견한 시. '워키토키'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다. 이제는 사라진 물건이라고 해야 하나. 한 때 이것을 지니고 멀리 있는 사람과 무전기 놀이를 할 수 있었던 그런 물건.

 

이 워키토키에서 소통을 생각하게 된다. 소통은 서로 믿음이 있어야 이루어질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소통이 그리운 시대...

 

이렇게 소통이 되는 상황이 우리에게 온다면 그야말로 봄이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예로부터 시인들은 이러한 상황을 많이들 꿈꾸어 왔으니... 

 

워키토키

 

이쪽은 자유의 마을, 그쪽 나와라 - 오버

이쪽은 평화의 마을, 왜 그러냐 - 오버

 

지금 말잠자리 한 마리 철조망을 넘어 그쪽으로 날아간다 - 오버

지금 고추잠자리 한 마리 역시 철조망을 넘어 그쪽으로 날아간다 - 오버

이쪽 하늘엔 구름이 한가롭다 - 오버

이쪽 하늘에도 구름이 한가롭다 - 오버

 

휴전선 일대의 하늘엔

우리말 워키토키의 전파가 무성하고

땅 속의 풀뿌리들도

저희끼리 왕성하게 뒤엉키는구나.

 

남남북녀 이쪽에 미끈한 총각 있다 - 오버

남남북녀 이쪽엔 어여쁜 처녀 있다 - 오버

 

새 소리 바람 소리 이쪽저쪽 넘나들며 짝을 맺고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 똑같은 우리 말

우리들의 자유만, 우리들의 평화만

철조망에 얽혀서 찢어지는가.

 

이쪽을 겨눈 그쪽의 총부리

그쪽을 겨눈 이쪽의 총부리.

 

정대구, 겨울기도. 문학과지성사. 1987년 초판 4쇄. 14-15쪽.

 

이렇게 봄이 왔으면 좋겠다.

 

이 시를 보는 순간 신동엽의 시가 생각이 났다. 신동엽은 꿈을 꾸었다고 했지. 또 그는 "봄은"이라는 시에서 봄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닌, 우리들의 내부에서 우리들이 맞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했는데... 그가 꾼 꿈은 이렇다.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제밤은

                                       - 신동엽

 

술을 믾이 마시고 잔

어제밤은

자다가 재미난 꿈을 꾸었지.

 

나비를 타고

하늘을 날아가다가

발 아래 아시아의 반도

삼면에 흰 물거품 철썩이는

아름다운 반도를 보았지.

 

그 반도의 허리, 개성에서

금강산 이르는 중심부엔 폭 십리의

완충지대, 이른바 북쪽 권력도

남쪽 권력도 아니 미친다는

평화로운 논밭.

 

술을 많이 마시고 난 어제밤은

자다가 참

재미난 꿈을 꾸었어.

 

그 중립지대가

요술을 부리데.

 

너구리새끼 사람새끼 곰새끼 노루새끼들

발가벗고 뛰어노는 폭 십리의 중립지대가

점점 팽창되는데,

그 평화지대 양쪽에서

총부리 마주 겨누고 있던

탱크들이 일백팔십도 뒤로 돌데.

 

하더니, 눈 깜박할 사이

물방게처럼

한 떼는 서귀포 밖

한 떼는 두만강 밖

거기서 제각기 바깥 하늘 향해

총칼을 내던져 버리데.

 

꽃피는 반도는

남에서 북쪽 끝까지

완충지대,

그 모오든 쇠붙이는 말끔이 씻겨가고

사랑 뜨는 반도,

황금이삭 타작하는 순이네 마을 돌이네 마을마다

높이높이 중립의 분수는

나부끼데.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제밤은 자면서 허망하게 우스운 꿈만 꾸었지.

 

신동엽, 신동엽 전집. 창작과비평사. 1985년 3판. 76쪽.

 

이런 꿈을 꾸고 싶다. 아니 꿈이 현실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평화가 바로 우리들의 봄일텐데...

남과 북에서만 아니라, 우리 사회 모두에서 이렇게 껍데기들이 사라진 세상, 서로가 서로 소통이 되는 세상. 그런 세상이 곧 봄이다.

 

지금은 겨울. 이런 봄을 꿈꾸는 기도를 해본다.

 

봄은 온다. 겨울은 간다. 그것이 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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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홍지수 옮김 / 봄아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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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최악의 적은 개인

 

바우만의 책을 계속 읽고 있다. 비슷한 내용도 있지만, 아무래도 읽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줘서 자꾸 읽게 된다. 이번 책의 제목은 "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다. 사회가 사람들을 개인으로 파현화시켰다. 그래서 파편화된 개인들은 뭉치지 못하고 흩어진 삶을 살게 된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람이 개개인으로 흩어진 삶을 살게 되니 자연스레 방황할 수밖에 없다.

 

이렇듯 개인으로 파편화된 사회에서는 시민은 형성되기 힘들다. 우리나라만 봐도 1980년대까지 형성되었던 수많은 시민단체들이 지금은 이름만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우리 사회도 개인적으로 파편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의 범람으로 공동체라는 이름보다는 개인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들이 더 많아졌으며, 책임을 개인이 질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개인들은 사회의 문제도 개인의 문제로 치환하게 되고, 함께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그것은 내 책임이겠거니, 내 능력이 이것밖에 안 되겠거니 하면서 포기하는 경우가 많게 된다.

 

이러한 개인들이 많아지는 사회에서는 자연스레 공동체의 문제라는 인식은 사라지게 된다. 우선적으로 노조가 힘이 없어지고... 이제는 노조의 조직율이 30%정도도 안 되는 사회가 되었고, 노조의 파업은 그들만의 파업이지 나와는 상관없는 그러한 일이 되어 버렸을 정도가 되었다.

 

노조의 약화와 더불어 각종 시민단체들의 활동도 줄어들게 되었다. 사회 곳곳에서 여러 문제들이 불거지고 있지만, 그러한 문제들을 통합하는 시민 운동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여기저기서 그들만의 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뿐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도 시민이 형성이 되고 있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 그만큼 개인주의가 만연해 있으며, 공동체에 대한 환멸이 작동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아마도 IMF이후 우리 사회가 겪은 문제가 아닐까 싶다.

 

이렇게 개인주의화되어 시민이 사라져 가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것이 바우만이 직면한 문제가 아닐까. 공공성을 회복하는 일. 광장을 찾는 일. 그것이 바로 깨어있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 아닐까.

 

그래서 치열하게도 바우만은 우리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말하듯이 현실을 지배하는 사람이 미래도 지배하기 때문이다. 현실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처한 현실. 권력은 시민을 해체해서 개인을 형성하려고 하는 현실. 그래서 노조의 파업에는 구속도 구속이지만 소송을 통해 개인에게 책임을 지우는 형식을 택하고 있다.

 

개인주의를 권력은 조장하고, 책임을 개인에게 물음으로써 자연스레 사람들은 불안감을 지니게 되고, 이런 불안감은 시민으로서 공적 영역에 참여하는 길을 막게 된다.

 

우리는 소비자가 된다

 

이런 개인주의화된 사회에서 개인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생산자가 아닌 소비자로 규정하게 된다. '돈'이 지배하는 사회. 개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만 하게 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자신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일을 찾게 된다.

 

가장 쉽게 찾아지는 것이 바로 소비자로서의 삶이다. 소비자로서의 삶을 잘 보여주고 있는 내용으로 바우만은 '야영지'에서의 모습을 예로 들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책임하에 야영지에 온다. 여기서는 공동체의 삶은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야영을 할 수 있는 개인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와서 자신들의 능력과 책임만큼 머물다 간다. 혹 야영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것을 힘써 고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고치는 데에까지 자신이 책임을 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냥 오지 않거나, 아니면 자신이 불편해하는 사항만 고치면 된다. 나머지는 다른 개인들에게 맡기면 된다. 여기서는 함께 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개인의 행동만이, 개인의 책임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소비자의 삶이고,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과 공간을 야영지로 만들고 있다고 바우만은 주장한다. 아니,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권력이 만드는 것인데... 권력은 이렇듯 사람들을 철저하게 개인으로 만들어 개인으로 행동하게 함으로써 자신이 들여야 할 비용을 줄인다. 소비자 사회에서 소비자로만 살아가는 개인들이 겪게 되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내 형제는 내 책임

 

이런 개인들의 사회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그것은 이 책에 나오는 카인의 예에서 찾을 수 있다.

 

내 형제는 바로 내 책임이라는 생각. 이것은 바우만이 주장하듯이 기본적인 윤리이기도 하겠지만, 개인주의화된 사회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내 형제를 꼭 말에 집착하여 가족으로 국한시킬 필요는 없다. 내 형제는 나와 같은 형체를 지닌 인간으로 해석을 해야 한다.

 

인류의 형제애. 그것이 바로 개인들의 사회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예전에 복지국가라는 이름으로 시도되었다.

 

지금은 이러한 복지국가, 즉 사회복지를 근로복지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전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근로복지는 일하는 사람들만을 위한 복지로 일하지 않는 내 형제에게는 내 책임이 없다는 주의이다. 이것이 바로 개인들의 사회이고, 시민이 실종된 사회이다.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 그것을 인정할 때 개인들의 사회를 극복할 수 있는 단초가 열린다. 적어도 사람들이 기본적인 생존에 대해서 불안해 하지 않을 때 그 때 사람들은 생활로 나갈 수가 있으며, 사적 공간에서 공적 공간으로 나갈 수 있는 동인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사회복지는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고, 이런 방법 중에 하나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 바우만은 지나가는 말로 제시하고 있지만,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기본소득을 국가가 또는 사회가 보장해주면 사람들은 사적인 공간에서 자신의 사멸에 대해서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적어도 생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에 사람들은 공적인 공간으로 나오게 된다. 그리고 공적인 공간에서 서로 다른 말들을 해석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혹자는 민주주의와 사회복지는 함께 가지 않는다고도 하는데, 바우만의 이 책을 읽다보면 민주주의는 사회복지와 함께 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회복지와 민주주의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니, 복지 예산을 두고 포퓰리즘이니, 사회주의니 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읽어봤으면 좋겠다.

 

바우만의 이 책을 읽다보면, 이제 사회의 불확실성 속에서 개인들이 얼마나 불안해 하는지, 그러한 불안이 개인주의를 부추기고, 이러한 개인주의가 시민을 사라지게 하고 있으며, 시민의 사라짐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장치로 작동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무엇부터... 우선 우리 사회의 기본적인 복지부터 확립하여 내 형제는 내 책임이라는 윤리성을 회복하는 일부터. 그 다음에는 사적인 공간으로 후퇴했던 개인들을 공적인 공간으로 불러내어 시민을 형성하는 것. 이것이 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이 책은 그 점을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다. 현대 사회를 적실하게 분석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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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생 2016-04-24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훌륭한 요약이네요. 지그문트 바우만의 책을 오늘 처음 보네요
오늘 우리 사회를 잘 진단한 것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수많은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데요. 지그문트 바우만 선생의 진단대로라면
우리 사회를 개선할 여지가 없어 보이네요
오늘 개인주의 사회는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20세기 후반과 21세기에 들어와서
전세계적으로 생긴 문제 같네요
정말 너무 개인주의사회도 문제는 문제네요
개인화 시대가 되면 더 좋아질줄 알았는데 여기에도 문제가 많네요
아뭏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우선 도서관에서 빌려보고 필요하면 사고 싶네요
제 블로그에 님의 리뷰를 복사하여 올렸습니다.
허락 없이 올려서 미안합니다., 원치 않으시면 karamos@naver.com으로 연락주시면
지우도록 하겠습니다.

kinye91 2016-04-25 08:22   좋아요 0 | URL
바우만의 책이 한 때 우리나라에 유행을 했지요. 물론 지금도 그의 책은 유용하지만요. 분석도 훌륭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지금-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수도 있다는 것에서 바우만 책의 의미를 찾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리뷰는 자유롭게 올리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홍지수 옮김 / 봄아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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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두려운 재앙은 불시에 닥쳐, 논리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혹은 어떤 논리적 이유도 없이 희생자를 낸다. 이 재앙은 제멋대로 폭력을 휘둘러 누가 희생되고 누가 구제를 받을지 예측할 방법이 없다. 오늘날 불확실성은 개인화를 촉진하는 강력한 힘이다. 개인화는 사람들을 화합하게 하기보다는 분열시키고누가 어느 쪽에 속하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공동의 이익'이라는 개념은 점점 모호해지고 결국은 이해 불가능해진다. 두려움, 걱정, 불만은 홀로 삭여야 한다. 개개인이 느끼는 이러한 감정들은 축적되어 '공동의 명분'을 형성하지 않으며, 기반이 되는 구심점도 없다. 따라서 과거처럼 개인들이 서로 연대해서 맞서는 전술이 불가능해지고 예전에 노동계급의 방어적이고 전투적인 조직의 구축과는 사뭇 다른 인생 전략이 필요해진다.-44-45쪽

신뢰가 없다면 저항도 있을 수 없다. 신뢰가 없다면 대립도 있을 수 없다. 피고용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운다면, 자신의 권리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고려될 수 있는 틀을 '유지하는 힘'을 신뢰한다는 뜻이다.-51쪽

지배력을 얻기 위해 질서의 부재, 혼돈을 무기로 사용하는 점이다. 권력투쟁의 전략은 다른 이들의 계산에서 자신을 밝혀지지 않은 변수로 만드는 한편, 자신의 계산에서는 다른 이들에게 변수의 역할을 허용하지 않는 일이다. 간단히 말하면, 지배력을 얻으려면 자기 자신의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규칙들은 제거하는 동시에 다른 이들의 행동을 제약하는 규칙을 가능한 한 많이 만들어내야 한다. 내 운신의 폭이 넓을수록 내 힘은 강해진다. 내 선택의 폭이 좁을수록 권력 투쟁에서 내가 이길 확률은 낮다. -59쪽

오늘날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자신들이 도달할 수 없는 이상적인 수준을 사회가 강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이상의 부재이다. 품위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분명한 방법, 확고하고 안정된 지향점, 삶의 여정에서 예측 가능한 목적지의 결핍이 원인이다. -75쪽

다른 사람들 곁에서 개인이 첫 번째로 깨닫는 점은 다른 이들과 함께함으로써 얻은 유일한 이득은 회복 불가능한 자기 자신의 고독에서 살아남는 방법에 대한 조언, 그리고 누구의 삶이든 삶은 맞서야 할 위험 요소로 가득하고 홀로 싸워야 한다는 점뿐이다.
...개인은 시민의 최대의 적(토크빌)-83쪽

개인이 시민의 최악의 적이고 개인화가 시민정신과 그것을 기반으로 한 정치를 위태롭게 한다면, 그 이유는 개인들이 개인으로서 몰두하고 관심을 갖는 사항들이 공적 영역을 가득 채우고, 공적 영역을 차지할 자격이 있는 유일한 관심사라고 우기면서 다른 모든 것들을 공공의 담론 바깥으로 밀어내기 때문이다. '공(公) '사(私) 점령당했다.-85쪽

민주주의는 제도가 아니라 반제도적인 힘, 곧 변화를 막고,권력층 태생이 아닌 이들을 침묵시키거나 정치적 과정에서 배제하고, 자신들만이 전문성이 있다는 주장을 하면서 통치를 독점하려는 권력의 집요한 특성을 '붕괴'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권력자들은 소수의 통치를 주장하는 반면, 민주주의는 모두를 대표하는 통치이다. 즉, 모두가 동등하게 갖고 있는 특성, 시민권을 기반으로 한 권력이다.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제도를 비판한다. 민주주의는 정치체제에 내재하는 무정부적이고 파괴적인 요소이다. 본질적으로 반대와 변화의 힘이다. 특정 사회가 민주주의인지 알아보려면 그 사회에서 아직 만족스러울 만큼 사회가 민주적이지 않다는 불평이 끊임없이 나오는지 보면 된다.-93쪽

할 수 있는 능력과 하고 싶은 것이 일치하면 행동에 옮기겠다는 확고한 결심이 서게 된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겹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고, 두 가지가 서로 맞지 않을 때 가장 처음 직관적으로 느끼는 것이 모호함이다. 가능성의 부피가 의지의 능력을 초과하면, 모호함은 불안함과 걱정의 형태로 표면화된다. 그 반대의 경우, 즉 도달하고 싶은 상태보다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이 월등히 높아 도달해도 만족스럽지 않을 때 모호함은 불화, 철회, 탈출하려는 절박한 욕구로 표면화된다.-99쪽

당연히 내 형제는 내 책임이다. 내 형제가 내 책임이어야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냐고 묻지 않는 한 나는 도덕적인 사람이다. 내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나는 내형제를 책임져야 한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내 형제의 안녕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그런 내 형제의 의존성을 인식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도덕적인 사람이다. 내가 그 의존성에 의문을 갖는 순간, 그리고 카인이 그랬듯이 내가 왜 책임을 져야 하는지 이유를 대라고 요구하는 순간, 나는 내 책임을 저버리게 디고 더 이상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다. 의존성과 윤리는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을 수밖에 벗는 관계이다.-120-121쪽

모든 도덕성의 본질은 사람들이 타인의 인권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므로 이는 또한 한 사회의 윤리적 기준을 평가할 수 있는 척도이다. 이것이 복지국가가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척도, 복지국가의 평가에 필요한 유일한 척도라고 나는 주장한다.-132쪽

누군가에 대해 책임을 지는 행위는 평생 동안 해야 하는 힘든 일이고 도덕적인 갈등을 겪게 되는 일이며, 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없앨 수 없다. 그러나 도덕적인 사람에게 이는 반가운 내용이다. 사회복지사들은 매일매일 바로 이러한 상황에 처한다.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하고, 옳은 선택이라는 보장도 없고 적절한 선택이라고 확신을 주는 권위자도 없이 선택을 해야 하는 바로 그런 상황에서, 도움을 주는 타자의 책임, 모든 도덕성의 토대가 마련된다.
... 복지국가의 미래는 윤리적 투쟁에 달려 있다.-136쪽

포스트모던 시대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폭력의 양상은 정체성 문제의 사유호, 탈규제화, 분산에서 기인한다고 나는 제안하고 싶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정체성을 구축하는 집단적이고 제도화되고 집중화된 틀의 와해는 의도된 것이 아니라 저절로 발생한 현상이다. -154-155쪽

'공'이 '사'를 지배하려 한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 그 반대이다. 공적인 공간을 지배하는 것은 사(私)이다. 사는 사적인 이해와 목적의 언어로 해석될 수 없는 것은 남김없이 공적인 공간에서 몰아내버린다. ... 개인은 시민의 최악의 적이다. -178쪽

근대국가가 질서구축에 관한 한 무력하고 냉소적이라는 점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정치가 뭔가를 할 수 있는 힘(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힘)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정치적 삶과 관련된 모든 기관들이 지역에 발이 묶여 꼼짝 못하는 한편, 권력은 흘러서 그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머무르게 된다.-184-185쪽

빈곤층의 처지를 통해 얻는 교훈은 그들이 누리는 확실성은 우리가 그렇게 혐오하는 불확실성보다도 훨씬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틀림없으며, 일상적인 불확실성이 주는 불안감에 저항하면 즉시 무자비하게 처벌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빈곤층의 모습을 보고 빈곤하지 않은 계층들은 자신의 처지를 얌전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면 그들의 불확실한 삶은 계속된다. 끊임없이 유연해지는 세상과 점점 불안정해지는 자신의 처지를 견뎌내거나 체념하고 받아들인다. 빈곤층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상상력을 가둬버리고 자신의 손에 족쇄를 채운다. 그들은 감히 다른 세계를 상상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나치게 소심해져서 이 세계를 바꿀 엄두를 내지 못한다.-193쪽

'유연성'은 또한 안정의 부재를 뜻한다.
...중요한 생계의 기능은 실존적인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며 이러한 안정감이 없이는 자기주장을 할 자유나 의지를 갖기가 불가능하고, 이러한 자유와 의지는 모든 자율성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이다. 현 상태로서의 일은 생존에 필요한 비용을 제공하기는 해도 그러한 안정감을 제공할 수 없다. -196쪽

모든 교육이 풀어야 하는 영원한 과제, '삶에 대한 준비'는 무엇보다도 매일매일 불확실성과 모호성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능력을 기르고, 다양한 관점이 존재하며 절대 오류가 없고 믿을 수 있는 권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인정함을 뜻해야 한다. 또한 차이를 받아들이고 다를 수 있는 권리를 존중하는 의지를 불어넣어줌을 뜻해야 한다. 자신의 선택과 그 결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용기와 비판과 자기비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강화시켜줌을 뜻해야 한다. '사고의 틀'을 바꾸고 자유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고, 새로운 미지의 세계가 안겨주는 기쁨과 함께 선택의 어려움이 주는 불안감도 아우를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줌을 뜻해야 한다.-226쪽

너무 잘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으며,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눈에 띄지 않는다. 사물은 사라지거나 파괴됐을 때 눈에 띈다. 우선 '기정 사실' 상태에서 벗어나야 그 사물의 본질에 대한 탐색이 시작되고 그 사물의 기원, 쓸모, 가치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한다.-230-231쪽

미래에 대한 전망에 의거해서 현재를 전환하려면, 조금이라도 현재를 장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현재에 대한 장악력, 즉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우리가 사는 유형의 사회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다. 함께 힘을 모아 게임의 법칙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우리를 두렵게 만들고 참혹한 결과로 고통받게 만드는 위험의 근원은 사회적 집단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위험은 무차별적으로 개인들에게 가해져 개인적인 문제가 되고, 이 문제는 오로지 개인이 홀로 직면해야 하고, 수습한다고 해도 오로지 개인의 노력을 통해서만 수습할 수 있다.-243쪽

우리는 진정으로 중요한 일을 할 수 없게 되거나 할 수 없다고 믿게 되면, 덜 중요한 일들로 관심을 돌리거나 우리가 할 수 잇거나 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외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 중요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는 문제들로부터 덜 중요하거나 전혀 중요하지 않지만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로 관심이 옮겨간다. 가장 두드러진 현상이 충동구매이다.-245쪽

삶이 분산되면 삶을 단편처럼, 개별적인 사건들의 연속처럼 살게 된다.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하면 존재가 파편으로 나뉘고 살미 단편으로 쪼개진다. 불안감이라는 망령을 처치하지 않는 한 오래 지속되는 가치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가능성은 요원하다.-261쪽

사랑은 가치와 관련이 있는 반면 이성은 쓸모와 관련 있다. 사랑의 눈으로 본 세상은 가치의 집합이다. 이성의 눈으로 본 세상은 쓸모 있는 사물들의 집합이다.
.. 가치는 사물의 질이지만, 쓸모는 사물을 사용하는 사람의 속성이다. -268쪽

용도와 가치 지향성에서 이성과 사랑은 각자 다른 길을 가게 된다. -270쪽

이성은 자기 자신에 대한 충실함을 권장한다. 반대로 사랑은 타자와의 연대를 요구한다. 따라서 더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 대상에 자신을 종속시킨다.-272쪽

정의라는 개념은 (타자에 대한 도덕적 책임에서는 기정사실인) 유일무이함의 경험과 (사회적 삶에서 기정사실인) 다수의 타자들에 대한 경험이 만나는 순간 잉태된다.
... 윤리의 '주요 장면'은 또한 사회정의의 주요 장면이자 사회 정의보다 먼저 발생한 장면이기도 하다.-296쪽

기술 발달과 정치의 무력함으로 시간적 공간적 거리가 와해되면서 인간이 처한 여건이 향상되기는커녕 양극화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으로 어떤 이들은 영토적 제약으로부터 해방되고, 공동체가 창출하던 의미들이 지역적 공동체 바깥에서 창출된다. 또 한편으로는 여전히 지역적으로 발이 묶인 이들의 삶의 터전은 공동체의 의미와 정체성을 부여하는 능력을 박탈당한다. 어떤 이들은 무릴적인 장애물로부터 해방되어 전례 없는 자유를 누리고 지금까지 들어보지도 못한 이동성을 누리며 먼 거리를 자유롭게 이동한다. 어떤 이들은 지역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의 터전을 자신에게 알맞게 가꾸기도 불가능해진다. -309쪽

민주주의는 공과 사 사이에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소통이다. 사적인 문제들을 공적인 이슈로 탈바꿈시키고 공공의 안녕을 사적인 과제와 프로젝트로 재구성하는 일이다.
... 해석이라는 과업이 아직 달성되지 않았다는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사회, 아직 만족스러울 만큼 민주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회라야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 공과 사 사이의 소통과 해석이 가능하고 실용성이 있으려면 사회의 자율성과 사회 구성원들의 자율성이 있어야 한다. 시민들은 자율적이어야 한다.-328-3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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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된 시집이다. 하긴 성석제의 첫 시집이라고 하니. 그를 누가 시인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성석제는 소설가로 우리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가. 마치 황순원이 소설가로서 알려져 있지 그가 처음에는 시를 썼다는 사실을 잘 모르듯이.

 

집에 있는 시집들의 제목을 보다가 어라, 성석제 시집도 있네. 내가 산 것은 아닌데... 지금 나와 같이 사는 사람이 산 시집인가 보다.

 

읽어보지 않았는데, 이 책은 읽히지 않는 낯섬을 견디고 책꽂이에서 다시 펼쳐지길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이제는 헌책방에서나 구할 수 있는 책이 되었는데...

 

제목도 마음에 든다. "낯선 길에 묻다"

 

우리는 모두 낯선 길을 간다. 인생이란 바로 이러한 낯선 길을 걸어가는 여행 아니던가.

 

낯설기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그리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느끼게 해주는.

 

그런 길을 걸어본 적이 얼마나 오래되었던가. 아니, 요즘은 나이 먹었다는 이유로 낯섬을 의도적으로 피하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던지.

 

시인은 늘 보던 것도 낯설게 볼 수 있는 사람이고, 우리가 시를 읽는 이유는 일상이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낯섬을 만나는 즐거움을 누리기 때문이 아니던가.

 

그래서 이런 낯섬은 반갑기도 하다. 그가 소설가로 유명하다는 사실에서 그의 시집을 만나는 것도 또한 낯선 일이기도 하다.

 

'낯섬'과 '묻다'라는 말이 제목에 있는데, 이런 제목을 가진 시는 이 시집에 없다. 시집 전체를 읽으며 우리는 낯섬을 만나고, 그리고 물어야 하는 지도 모른다.

 

시집 내용이 밝지가 않다. 밝지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슬프다. 너무도 슬프다. 91년에 발간된 시집인데, 그런데도 이 시집에 나오는 내용들이 아직도 진행형이라는 사실이...

 

또 불행하게도, 참으로 낯설게도, 이렇게 된 경우는 거의 없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시집은, 33쪽부터 40쪽이 없다.

 

막내의 여섯 가지 심부름. 아버지와 아들, 수술실. 이렇게 세 편의 시가 빠져 있다. 낯설다. 그것도 모르고 지금까지 이 시집을 지니고 있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이 없음을 받아들이고 함께 해야 한다.

 

나중에 어디선가 이 세 편의 시를 적어서 끼워넣어야 되겠지.

 

이런 불행과 함께 시에 나오는 내용들은 참으로 불행하다. 어둡다. 슬프다. 90년대에는 그로테스크라는 말을 많이 썼나 본데... 지금은 우리가 살아간 현실을 시인이 직시하고 표현했다고밖에는 표현하지 못하겠다. 이 시집에 있는 내용들은 그로테스크가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므로.

 

특히 이런 시들은 눈물이 날 정도로 슬프다. 시에 이야기가 있으므로, 그 이야기를 우리가 머리 속에서 생생하게 영상으로 떠올릴 수 있으므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시들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 지금 현실에서 계속되고 있으므로.

 

한 상사. 유리 닦는 사람. 가족1. 하늘 가까운 방. 그리고 3부의 동물이 등장하는 시들.

 

현실임에도 낯설다고, 여기서 물어야 한다고 한다. 20여년이 지났는데... 정말로 이 시집에 나오는  시들이 낯설었으면 좋겠는데... 그래서 당시의 사회 상황에 대해서 공부하고, 이런 일이 있었나 하면 좋겠는데...

 

성석제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그래서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도 이야기로 되어 있는 시들이 많다. 마치 옛날에 임화나 이용악의 시에 이야기가 나와 있듯이. 그들 시를 '단편서사시' 또는 '이야기시', '리얼리즘시'라고 이름지었듯이 성석제의 시도 그 계보를 잇는다고 볼 수 있다.

 

이야기를 통해 우리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읽으면서도 시의 내용이 머리 속에 그려진다. 그것이 더 큰 울림을 준다.

 

새해 벽두. 20여년이 지난 지금 읽어본 성석제의 시집. 이 시집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000년대는 1990년대를 또는 1980년대를 낯설게 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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