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 지성의 근본주의 비투비21 1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문성원 옮김 / 이후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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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유. 너무도 당연한 말이기도 하고 너무도 당연하기에 어려운 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유에 대해서는 철학적으로 사유하기도 하고, 법적으로 사유하기도 하는데... 바우만의 이 책은 사회학적으로 사유한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의 사회적 조건과 어떤 조건에서 사람들이 자유를 누리는지를 중심으로 이 책을 읽으면 된다.

 

자유라는 말에는 피의 냄새가 난다고 한 김수영의 시 '푸른 하늘을'도 있지만, '자유의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도 있고... 하여 자유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말을 중심으로 자유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바우만의 책을 읽으면, 바우만은 벤담의 '판옵티콘'에서부터 자유의 논의를 시작한다. 거기에서부터 지금의 신자유주의인 소비자 사회에서 자유에 대한 논의를 마치는데...

 

판옵티콘은 나는 너를 언제든지 볼 수 있지만, 너는 나를 볼 수 없다는 개념에서 시작한다. 이것은 권력을 쥔 자와 권력을 쥐지 못한 사람의 차이로 나타나고... 당연히 자유는 권력을 쥔 자의 손에 더 많이 주어지게 된다.

 

감시 당하는 사람, 이에게는 자유란 허울 좋은 이름일 뿐이다. 하여 사회학적인 자유에는 바로 권력이 개입한다. 고대나 중세 시대의 절대적인 권력에서부터는 자유를 논의할 필요가 없다. 이 때 노예들은 자유보다는 생존이 더 절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는 근대에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기 시작한다. 여기서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집단의 위계가 생기게 되는 것이고, 그러므로 권력의 문제를 자유의 문제에서 배제하면 안되게 되는 것이다.

 

소비자 사회에서는 경제 권력을 쥔 자는 자유를 많이 향유한다. 지금 이 시대의 권력은 바로 경제 권력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은 경제 권력을 많이 잃었기에 그들의 자유를 그다지 향유할 수가 없다.

 

자유롭게 생활하려고 하여도 생계가 확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 지금 이 시대의 사회학적인 자유에는 바로 경제 권력의 평등이 기본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이것이 전제조건이 되지 않으면 너는 자유이나, 살 권리도, 죽을 권리도 네가 선택할 수 있으나, 선택할 수 있는 폭은 정해져 있다가 된다.

 

이 점을 인식하면 자유는 만인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진 개념이 아니다. 자유는 그 사회의 권력 배치에 따라서 다르게 적용이 된다.

 

마치 조선시대 노비해방이 노비들에게는 죽음과도 같은 선언이었음과 같이, 중세의 끝에 농노 해방이 이루어졌으나 그들에게는 오로지 죽을 자유밖에는 없었다는 것과 같이... 경제 권력이 중심이 된 사회에서는 경제 권력이 제대로 분배되거나 감시되고 통제되지 않는다면 자유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만, 즉 굶을, 나앉을, 쓰레기가 되는 삶을 살 자유밖에 지니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예전에 극복되었던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생각나게 한다. 노예가 인간 선언을 하면서 자기의식을 지니고 주인과의 투쟁을 통해서 대자적인 존재로 거듭나는 과정이 바로 자유를 획득하는 과정이라면, 이 자유를 획득한 노예가 주인이 되었음에도 세상이 변해서, 생산과정의 주인이 되었을지는 몰라도(사실 이렇지도 않지만) 소비과정에서는 다시 노예로 전락한 상태,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시대 아니던가.

 

그렇다면 정-반-합이라는 헤겔의 변증법에 따르면 노예는 합의 위치에 다다랐으나, 이 합이 다시 정이 되어 반과의 투쟁을 해야 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노예로서 그냥 그렇게 정말로 내던져진, 쓰레기가 된(바우만의 용어로 한다면)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된다.

 

자유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천부적인 권리. 그러나 자유는 쉽게 말하면 선택의 권리이기도 하다. 선택할 수 있는 권리. 말로만 하면 참 보편타당한, 불편부당한 그러한 말인데, 선택에는 권력이 개입한다.

 

선택을 할 수도 있지만, 선택을 할 수 없기도 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과 선책할 수 있는 길이 이미 정해져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같은 자유를 향유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여 바우만의 이 사회학은 자유를 선택의 문제, 권력의 문제로 치환한다. 이렇게 치환하여 자유를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들이 진정한 자유를 향유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판단하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유의 전제 조건이 무엇인지... 말로만 넌 자유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게 하는 조건이 갖춰진 사회를 꿈꾸는 것이 바로 사회학 아니겠는가.

 

그래, 자유란 말을 쉽게 하지 말자. 자유라는 말에는 피의 냄새가 배어 있다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자유라는 말에는 죽음의 길이 있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는 안 되겠지. 지금 이 21세기에.

 

우리의 자유라는 말에는 삶이라는 말이 함께 따라다니게 해야겠지. 이것이 바로 자유에 대해서 사회학적으로 고찰한 이유이기도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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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의 첫 시가 마음에 팍 꽂혔다. 사실 다른 책에서 본 시인데.. 어디엔가 적어 놓았던 시이기도 하고. 이 시가 이 시집에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됐다. 이 시집은.

 

자연친화적인 시를 쓰는 시인. 세상의 모든 일에 관심을 두는 시인. 그러나 시를 결코 어렵게 쓰지는 않는 시인.

 

내가 좋아하는 시인 중에 한 사람. 한 때 국어교과서에 나희덕 시인의 '배추의 마음'이라는 시가 실리기도 했었지.

 

그의 시는 쉽다. 읽기에 편하다. 그리고 무언가 의미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참 단정한 시들을 쓴다.

 

그런데 이런 단정함 속에서도 어떤 강함이 느껴진다. 유함이 강함을 이긴다고 했던가... 대놓고 뭐라 하지 않는데...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지니게 한다.

 

어쩌면 이게 시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지금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고 하면 소통단절의 시대라 할 수 있다.

 

말들은 넘쳐나는데, 이 말들이 각자 따로 놀고 있는 시대. 그런 시대에 어쩌면 우리는 이 시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말들을 서로 튕겨내고만 있지는 않은지... 오로지 자기의 말만 뱉어내고 남의 말을 품을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더 크고 강한 존재들이 더 넓은 존재들이 마음을 열고 작고 연약한 소리들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 오히려 더 굳건하게 자신들을 걸어 잠그고 있어 더 이상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천장호에서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불빛도 산 그림자도 잃어버렸다.

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

아무것도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

헛되이 던진 돌멩이들,

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 쩡 날아오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

 

나희덕, 그곳이 멀지 않다. 1997년. 민음사. 11쪽

 

호수는 무엇이든 받아들이다. '불빛도 산 그림자도' 받아들이고, 그리고 '단단함'이 아니라 부드러움으로 자신에게 기대는 모든 것들을 '비추어' 준다.

 

어느 것이 오더라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냥 조용히 감싸안는다. 그것이 호수다. 호수의 그 부드러움으로 모든 것들은 호수에 안겨 고요함을, 풍요로움을, 평화로움을 경험한다.

 

그러나 부드러움을 잃은 호수. 꽝꽝 얼어버린 호수는 '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인 호수가 된다. 오로지 자신만 안다. 다른 것들을 돌아보지 않는다. 품지 않는다. 그냥 되받아칠 뿐이다.

 

이런 호수의 차가움. 소통의 단절. 제 안에 갇혀 제 스스로만 존재하는 호수.

 

이것은 강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약한 사람들을 품지 않는. 관용과 용서. 이것은 먼저 강한 자들에게 필요한 미덕이다. 호수가 제 스스로를 얼려 놓고, 다른 것들을 튕겨낼 때 여기에 어떻게 관용과 용서가 끼어들 틈이 있겠는가.

 

소통이 단절된 모습은 바로 얼어붙은 호수와 다름이 없다. 그런 호수에 돌멩이 하나를 던진다. 제발 응답하라고, 받아들이라고, 예전의 모습을 되찾으라고.

 

그러나 이미 제 스스로 문을 닫아건 호수는 이 돌멩에 마저도 튕겨 낸다. 그리고 함께 있어야 할 존재들은 사라지고, 오로지 메아리만 남아서, 헛된 울림만 되풀이할 뿐이다.

 

이 시를 읽고 마음이 아팠던 이유는 이것이다.

 

이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헤어지게 되는 과정으로 해석해도 되지만(맨 마지막 행을 보면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해석하는 것이 더 좋기도 하다) 시의 좋은 점은 해석을 무한히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약자들의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는 지금 이 시대의 모습을 나는 이 시에서 읽는다. 그리고 마음이 아프다.

 

더 큰 돌들이, 더 많은 돌멩이들이 호수의 얼음을 향해 날아가, 부딪혀 얼음을 깨고 호수의 마음에 물결을 일으켜 그의 닫힌 문을 열어젖히는 꿈을 꾸기도 한다.

 

모든 것을 비추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호수. 그래서 그 잔잔함으로 평화와 행복을 전해주는 호수. 그런 호수를 바라고 있기에... 이 시의 울림이 지금, 내 마음에도 울리고 있다.  

 

이 울림과 비슷하게 또 하나의 시. 도무지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시. '천장호에서'는 호수의 얼음과 돌멩이라면, 이 시에서는 항아리와 간장이다. 돌멩이는 얼음을 깨지 못하고, 새떼도 부르지 못하고, 그냥 메아리만 울리게 했다면, 간장은 항아리 밖으로 나온다. 항아리를 깬다.

 

     어떤 항아리

 

이건 금이 간 항아리면서

금이 갔다고 말할 수 없는 항아리

 

손가락으로 퉁겨 보면

그런 대로 맑은 소리를 내고

물을 담아 보아도 괜찮다

 

그런데 간장을 담으면 어디선가 샌다

간장만 통과시키는 막이라도 있는 것일까

 

너무나 짜서 맑아진,

너무 오래 달여서 서늘해진,

고통의 즙액만을 알아차리는

그의 감식안

 

무엇이든 담을 수 있지만

간장만은 담을 수 없는,

뜨거운 간장을 들이붓는 순간

산산조각이 나고 말 운명의,

 

시라는 항아리

 

나희덕, 그곳이 멀지 않다. 1997년. 민음사. 49-50쪽

 

항아리가 시가 아니라, 간장이었으면, 항아리는 시를 가두는 틀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럼에도 시는 항아리가 된다. 보통의 아름다움을 담기에는 부족하지 않은, 우리가 소통을 하는데는 어떤 지장도 주지 않는, 더욱이 아름다움까지도 주는 그런 항아리(시).

 

그러나 그 아름다움만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삶의 진한 고통이 들어가 있지 않으면 그냥 그렇게만 존재하게 된다. 틀을 깨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시다. 간장과 같은 삶이 들어가야 한다. 시에서 머무르지 않고 다른 존재로 거듭나는 그런 시.

 

시가 시로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그런 이야기 아닐까... 우리가 지녀야 할 또다른 소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시라는 생각이 드는데... 마음을 크게 울리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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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파티아 - 고대 그리스가 사랑한 여인
마르자 드스지엘스카 지음, 이미애 옮김 / 우물이있는집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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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히파티아. 어디선가 한 번 지나가면서 들은 이름이다. 여성학자들에 대해서 제대로 알려주지 않던 때, 수학,철학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고대의 인물이라고 말이다.

 

또 어디선가는 고대 그리스의 종교를 신봉했으며, 자신만의 세력을 형성해서 기독교 세력과 함께 할 수 없었기에 죽임을 당한 인물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히파티아의 죽음으로 고대 그리스 문화는 종말을 고하고, 이제는 기독교 문화만이 살아남았다는 그런 말을.

 

그 정도의 인물이었는데... 우연히 손에 들게 된 "히파티아"란 책.

 

지금까지의 해석과는 달리 철저한 고증을 통하여 히파티아에 대해서 알려준다고 하기에, 히파티아가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그러한지 읽어보기로 했다.

 

이 책에서는 히파티아에 관해서 두 가지 사실이 잘못 알려졌다고 하고 그를 바로잡기 위해서 다양한 문헌들을 인용한다.

 

첫번째 오해는 히파티아가 젊고 매력적인 나이에 죽임을 당했다는 설. 히파티아를 육체적인 존재로 전이시킴으로써 에로틱한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고 하는데...

 

당시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명한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던 사람이 싱싱한 매력을 지닌 얼굴과 몸매를 지니고 있었고, 기독교 광신자들이 이를 훼손했다는 말들은 우리의 성적 상상력을 자극하기는 하지만, 또 히파티아의 비극을 더욱 극대화시키는 효력을 발휘하기도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라는 의문에서 이 책은 시작하고 있다.

 

사람들 사이에 인정을 받을 만한 실력을 갖추고 수많은 제자들까지 두었던 여인, 히파티아가 과연 20대에 그런 일을, 또는 30대에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여기에서 의문은 시작되고, 여러 역사서를 고증한 끝에 이 책의 저자는 히파티아가 죽었을 때의 나이는 대략 60세 정도였을 거라고 한다. 그 정도 나이에 이르러 이미 자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적도 동지도 많은 상태였을 거라는 추론. 하여 이 책에서는 히타피아의 출생년도와 죽었을 때의 년도를 추정하여 확정하고 있는데...

 

355년에 태어나서 415년에 죽었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향년 60세. 이 정도면 완숙의 경지에 이르지 않았을까 하고.

 

두번째 오해는 히파티아가 그리스 신앙에 빠져 있었으며, 기독교를 배척했다는 설. 그래서 그리스식 사고와 기독교식 사고를 정면 대립하게 함으로써 히파티아의 죽음은 고대 세계의 종말을 뜻한다고, 즉 알렉산드리아에서 헬레니즘 문화는 히파티아의 죽음과 함께 끝나고 지식은 암흑의 세계로 접어들었다는 설.

 

이 설에 대해 저자는 히파티아 제자의 편지를 통해 히파티아가 기독교를 믿었으리라고 추정한다. 히파티아는 기독교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를 믿었으며, 단지 다른 종교들을 멀리 한 것이 아니라 종교간의 융화를 지향했다는 것이다. 그의 제자들에는 다양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으며, 심지어는 주교가 된 제자도 있고, 또 이교도들의 반란에 히파티아는 참여하지 않았음을 보여, 히파티아는 이교도가 아니었음을 추론하고 있다.

 

이교도가 아닌데... 기독교도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의문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무엇일까? 저자는 그것을 정치적인 갈등 사이에서 희생을 당한 것이라고 한다. 알렉산드리아 제독과 알렉산드리아 주교 사이의 정치적인 권력 다툼 속에서 히파티아는 제독의 편을 들고, 그것에 위협을 느낀 주교가 히파티아를 이교도가 아닌 마녀로 몰아가고, 당시 마녀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기독교 광신도들에 의해 히파티아가 죽임을 당했을 거라고 말이다.

 

일견 타당성이 있는 의견이다. 이교도 스승에게서 주교가 나올 리는 없을테고, 당시에는 제독과 주교 사이에 권력다툼이 있었을테니, 히파티아 같이 유명세를 탄 사람이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한쪽은 동맹자로, 한쪽은 적대자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을테니 말이다.

 

이런 두 가지 논점을 가지고 히파티아에 대한 오해를 풀어가는 책이 이 책이다. 따라서 구체적으로 히파티아가 수학에서, 또 철학에서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는 간략하게 언급하고 넘어가고 있다. 두 분야에서 당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으며, 당시 유명한 수학책을 재해석하기도 했다는 이야기, 저서들을 출간하기도 했다는 이야기. 어쩌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 수학이 히파티아가 재해석한 수학책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등등.

 

히파티아 뒤에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 여성들이 나오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한 사람으로 히파티아는 손꼽을 만하다고... 하여 여성학자들의 계보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이 책은 말해주고 있다.

 

이제는 바야흐로 남성보다 여성이 더 활약하는 시대가 되었고, 남성성보다는 여성성이 강조되는 시대가 되었는데...그런 스승의 시조로 히파티아가 자리를 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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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은 해설자의 말에도 나와 있듯이 주로 수평을 다루고 있다. 그는 수평에 대해서 참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러한 수평 중에서도 내 마음에 와 닿은 것은 바로 늙음이다.

 

늙음이야 말로 우리네 삶에서 가장 수평이 되는 순간이 아니던가. 인간은 수평에서 시작하여 수직을 꿈꾸다가 다시 수평으로 돌아오는 그러한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우리네 삶에서 두 순간(요즘은 그렇지도 않은가보다마는), 즉 수평이 되는 어린 시절과 늙음의 순간은 모두가 평등하게 겪지 않는가. 그렇게 늙음은 우리를 평등으로 이끌게 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왔는가는 결국 어떻게 늙었느냐로 귀결되지 않겠는가.  무슨 변증법도 아니지만, 처음의 수평과 나중의 수평은 다른 무게를 지니고 있을테고...

 

나중의 수평, 그 늙음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전달해 줄텐데...

 

그런데 요즘은 잘 늙는다는 것도 힘들겠다는 생각을 한다. 늙음이란 삶의 신산함을 거쳐 이제는 달관의 경지에 이르러 젊음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오히려 늙음을 무슨 특권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또 늙음을 그냥 내놓아버림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잘 늙음은 바로 '선배'가 된다는 말이고, '원로'가 된다는 말인데... 그런 선배, 원로가 그리운 요즘이다. 이런 시대를 견뎌나갈 지혜를 주는 그런 늙음 말이다. 

 

세상의 신산함을 온몸으로 겪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이 '가재미'란 시란 생각이 든다. 낮은 곳으로 낮은 곳에서 무게에 눌려 더 납작해진 몸으로, 아래위가 아니라 좌우로 자신의 삶을, 수평으로 자신의 삶을, 다른 말로 하면 무거운 짐에 눌려 낮은 곳에서만 살 수밖에 없었던 그런 삶.

 

그러나 그러한 삶 속에서도 세상 모든 삶이 녹아 있었으며, 우리는 그런 낮은 삶에 함께 할 때 그 삶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음을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두 시를 인용한다. 늙음에 대하여, 그러나 그 늙음의 다름에 대하여. 낮은 곳에서 수평으로 살다가 늙음에 다다랐지만, 그러나 그 늙음은 그냥 연민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삶이 우리를 위로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그 삶 속에는 세상이 들어 있다.

 

그 세상이 들어 있는 늙음은 우리에게 '선배'가 되고 '원로'가 된다. 그래서 이 두 시는 마음에 와 닿는다. 콕 박힌다. 나는 어떻게 늙을까? 내 늙음으로 남을 위로해주는 그런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가재미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아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내잡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속에 나란히 눕느다

산소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문태준, 가재미, 문학과지성사. 2006년 2쇄. 40-41쪽

 

 

 

 

노모(老母)

 

반쯤 감긴 눈가로 콧잔등으로 골짜기가 몰려드는 이 있지만

나를 이 세상으로 처음 데려온 근느 입가 사방에 골짜기가 몰려들었다

오물오물 밥을 씹을 때 그 입가는 골짜기는 참 아름답다

그는 골짜기에 사는 산새 소리와 꽃과 나물을 다 받아먹는다

맑은 샘물과 구름 그림자와 산뽕나무와 으름덩굴을 다 받아먹는다

서울 백반집에 마주 앉아 밥을 먹을 때 그는 골짜기를 다 데려와

오물오물 밥을 씹으며 참 아름다운 입가를 골짜기를 나에게 보여준다

 

문태준, 가재미, 문학과지성사. 2006년 2쇄.18쪽.

늙음.

 

이 시 '노모'처럼 아름다운 골짜기를 지닌 사람. 그런 선배를 만나고 싶다. 나도 그런 선배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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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언어 - 희망의 언어 에스페란토의 고난의 역사 카이로스총서 27
울리히 린스 지음, 최만원 옮김 / 갈무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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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페란토"

 

희망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예전에 우리나라 차 이름 중에 '에스페로'가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희망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

 

국제어를 표방하는 이 인공언어는 많은 사람에게 알려져 있지만, 반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기도 하다.

 

지금도 세계에스페란토협회가 있는 걸로 알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에스페란토어에 대한 강습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언어의 존재는 그렇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아는 사람들에게만 알음알음 전해지고 있다고나 할까.

 

이 언어를 창시한 사람이 자멘호프라는 사람. 그는 언어를 통해 갈등을 중재하고자 했는데... 특정 언어가 지배적인 언어가 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쉽게 쓸 수 있는 언어를 공통어로 사용한다면 갈등은 그만큼 줄 것이라는 희망적인 생각에서 만든 언어.

 

예외가 없는 언어로 유명한데... 이 언어를 배우려고 시도했다고 시도에서만 그치고 만 나는 아직도 이 언어는 어렵다. 우리나라 언어와는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 하지만 유럽 사람들에게는 이 언어는 그들의 언어를 기반으로 하였기 때문에 친숙한 언어이고 배우기도 쉬운 언어일텐데...

 

그럼에도 왜 이 언어가 공통어로 자리를 잡지 못했을까?

 

전세계의 민족들이 각 민족들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국제 사회에서는 서로의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 즉 인공어인 공통어를 쓴다면 우리가 외국어를 배우는데 그렇게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아도 될텐데... 서로의 언어를 존중하며 어느 민족에게도 속하지 않는 언어로 국제 사호에서 이야기한다면 서로가 더 도움이 될텐데...

 

각 나라의 학교에서 공통어로써 에스페란토어를 가르친다면 우리가 너무도 많은 외국어를 배울 필요도 없고, 또 각 나라 고유 언어의 고유한 의미를 몰라서 의사소통이 안 되는 불상사도 막을 수 있으련만... 그렇게 되지 않은 이유는?

 

그 이유를 추적해 가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500쪽에 달하는 방대한 양. 주석까지 합치면 600쪽이 넘는 엄청난 책이다.

 

평화를 표방한 희망의 언어인 에스페란토어가 어떻게 탄압을 받고 공통어로써의 자리를 잡지 못했는가를 추적하고 있는데... 주로 동유럽과 소련의 경우를 대상으로 서술하고 있다.

 

아마도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한 서유럽에서는 에스페란토어에 대해서 조직적으로 탄압하지 않았을테고, 일본과 중국, 그리고 우리나라 같은 동아시아 자료들은 그렇게 많이 있지 않을 것이며(아마도 이 책이 저자인 울리히 린스가 찾기에는), 아메리카 대륙에 관해서도 마찬가지 이유이지 않았을까 하는데...

 

적어도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에서 왜 공통어로써의 에스페란토어를 탄압했을까 하는 의문에서 역사적 사실들을 추적하고 있으리라 추측이 된다.

 

어느 한 민족의 언어가 지배적인 언어가 되지 않고, 모든 민족이 평등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세계일텐데... 그렇지 않았던 현실은 그들이 추구한 사회는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전체주의에 불과했다는 저자의 인식 때문일 것이다.

 

결국 국제적인 공통어는 공산주의 사회로 대표되던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체제에 도전하는 그런 위험한 언어로 낙인이 찍혔을 가능성이 높고, 그래서 에스페란토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즉 에스페란티스토들은 이런 나라들에서 탄압을 받았을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한 나라에서는 특정한 언어를 강요할 필요가 없었을테고, 지금은 자본의 힘으로 가장 영향력이 있는 나라인 미국의 언어, 영어가 세계 공통어의 역할을 자연스레 하고 있으니 굳이 에스페란토어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었으리라.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민족의 수가 어마어마한데, 이들이 각자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 각 민족의 언어들을 다 배워야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힘이 드는 일이겠는가.

 

지금 유럽연합만 보아도, 그들은 하나의 협정을 맺어도 그것을 유럽 연합 각국의 언어로 다 표기해야 하는데... 이런 일을 에스페란토라는 공통어만 서로 인정한다면 협정문에는 각 민족의 언어 하나와 공통어인 에스페란토어 하나, 이렇게 두 개의 언어만으로 기록이 될텐데... 그렇다면 더 경제적이고 더 편리하고 더 의미상 혼란이 없을텐데...

 

이 길은 아직도 요원하다. 어쩌면 앞으로가 더 힘들지도 모른다.

 

이 책의 부제가 '희망의 언어 에스페란토의 고난의 역사'이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이런 언어는 지배 권력의 탄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본의 힘에 의해서 자연스레 사라질지도 모른다. 지금도 전세계에서 사라지고 있는 민족어들이 많다고 하는데...

 

에스페란티스토들이 처음에 국제연맹에서 에스페란토를 공통어로 만들어 사용하게 하려고 시도했듯이 지금 유엔의 공통어로 '에스페란토'를 지정한다면?

 

정말로 전세계에서 자국의 언어와 그리고 세계 공통어로써 '에스페란토'를 교육한다면, 그리고 외국인끼리는 '에스페란토'로 의사소통을 한다면?

 

그때는 에스페란토는 희망의 언어, 평화의 언어가 되지 않을까.

 

우리나라에도 일찍이 에스페란토어가 전래가 되었고, 김억같은 경우는 에스페란토어에 대해서 상당히 조예가 깊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지금도 에스페란토어를 배우는 사람들도 꽤 있고...

 

이런 상상을 해본다. 정말로 각 민족의 언어 하나, 그리고 세계 공통어 하나. 그렇게 되면 적어도 언어 패권주의는 사라질텐데...

 

그런 희망을 이 책에서 발견해야 하지 않을까. 에스페란토가 만들어진 지 10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이 언어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는 얘기 아닐까...

 

동유럽, 소련의 역사에서 그렇게 탄압을 받았음에도 사라지지 않은 에스페란토의 역사를 보면서... 아직 우리에게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세계 시민단체들이 공통어로 이런 언어를 먼저 사용하면 어떨까?

 

한 번에 제도로 바뀌겠지 하지 말고, 국제적인 시민단체들부터 특정 언어의 헤게모니로부터 벗어나 이렇게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아 누구에게도 속할 수 있는 이런 언어로 소통을 한다면...

 

자멘호프의 꿈이 실현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책이다. 길지만 에스페란토어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읽어보아야 할 책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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