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퀴드 러브 - 사랑하지 않을 권리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권태우 &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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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그림 사진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같은 사람의 사진을 모아 커다란 하나의 사람을 만드는 사진.

작은 사진 하나하나는 동일한 인물인데, 이렇게 각자 다른 인물들이 여럿이 모여 동일한 하나의 인물을 만든다.

 

과학을 잘 모르지만 부분이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는 이론을 아마 이런 데 적용하지 않았나 싶다.

 

바우만의 "리퀴드 러브"-아마도 유동하는 사랑 정도로 해석이 될 이 책은 이렇게 이런 그림 사진과 비슷하게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 속한 글들은 모두 하나하나의 독립된 글이다. 그냥 단편적인 글이다. 그러나

<사진출처 :http://news.naver.com/main/imagemontage/index.nhn?gid=966192#967384>

 

읽어보면 전체 글과 하나가 된다. 즉 부분들과 전체가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엄밀히 말해서 사회학 이론서라고 하기도 그렇고, 철학책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수필집이라고 하기도 그렇다. 형식을 파괴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한 책이다.

 

하지만 전해주는 말은 분명하다. 어느 한 부분을 읽어도 전체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똑같은 내용이 아니다. 다 다른 내용이다. 이런 내용들이 모여 하나의 글을 이루고 바우만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것은 하나다. 지금 사회는 일회성이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이는 소비자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담을 쌓고 있으며, 이 담으로 인해 너와 나를 구분하고, 공동체는 파괴되었으며, 일명 쓰레기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양산하고 있다.

 

지금이 그런 사회다. 여기서 벗어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이런 이야기, 바우만의 저서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는 이야기다.

 

만남이 얼마나 일회서인가는 성적인 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지속적인,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라는 말은 우스워지는 시대가 되었고, 사랑도 인스턴트 사랑, 언제든지 만나고,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는 그런 시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 문화를 우리가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인터넷 만남. 또는 연애를 쇼핑처럼 하는 시대.

 

인터넷이 이렇게 우리 사회를 변화시켰다면 휴대폰은 가족간의 모습도 변화시켰다. 하여 우리는 함께 살면서도 함께 살지 않는다. 또한 늘 만나면서도 늘 만나지 않는다. 접속이 가능한 만큼 접속을 끊는 것도 늘 가능한 사회.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사회가 되었다.

 

이것은 정착할 수 없는 유동적인 근대의 모습이고, 지속성이라는 것은 과거에만 속하는 일이 되었다.

 

우리의 사랑조차도 그러하니 다른 것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래도 우리는 우리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칸트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데, 지구는 둥글다. 우리는 이 둥근 지구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둥근 지구에서 살아간다는 얘기는 누구에게서 멀어진다는 얘기는 곧 누구에게 가까워진다는 얘기가 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차피 이 지구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지구에서 함께 살아갈 방법을 고민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점을 이야기 해주고 있다. 인간은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는 사실. 우리가 쓰레기를 양산할수록, 그 쓰레기로 인해 우리의 삶이 더욱 힘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 쓰레기란 결국 우리 자신의 다른 모습일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하는 순간.

 

우리가 우리에게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윤리가 된다. 윤리를 넘어 이제는 우리의 생존이 된다.

 

그리고 지금 시대는 우리의 생존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할 때이다. 이 점에서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언제라도 소통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언제라도 소통을 멈출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 그것을 인식하고...

 

소통을 할 수 있는 방법.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 그것을 고민해야 한다고 한다. 그것을 유동하는 사랑이 아니라, 이제는 함께 할 수 있는 사랑을 찾아야 하는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는 이 책의 한 부분에서 자신이 원하는 사회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그럿을 코뮤니타스라고 하는데... 우리에게는 아마도 공동체 정도로 해석이 되지 않을까 한다. 우리 역시 이러한 공동체를 추구하고 있지 않은가.

 

  코뮤니타스(그리고 간접적으로는 소시에타스도 마찬가지지만)의 생존과 번영은 인간의 상상력과 발명심 그리고 상투적인 일상성을 깨부수고 시도되지 않은 방법들을 시도해보려는 용기에 의존한다. 다시 말해 리스크를 안고 살아갈 수 있는, 결과에 대한 책임을 떠안을 수있는 인간의 능력에 의존한다. 바로 그러한 능력들이 '도덕 경제', 즉 서로 돕고 보살피며, 타자를 위해 살고, 상호 헌신의 조직을 짜내며, 인간들 간의 유대를 단단히 하고 수리하며, 권리를 의무로 해석하고 모두의 운명과 행복에 대한 책임을 함께 나누는 것-즉 뚫린 구멍을 막고, 영원히 끝나지 않는 구조화 작업이 방출한 홍수를 막기 위해 필요불가결한 이런 것들을 지탱해준다. (178쪽)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경제의 모습이고, 공동체의 모습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지 이 글에 비추어 판단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기존에 읽은 바우만의 책과 겹치는 내용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그 겹침은 앞에서 본 사진처럼 각자 다른 것이 모여 또 하나의 같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부분이 모여 전체가 되는데.. 부분 역시 부분으로써 제 역할을 다한다.

 

이것은 우리네 인간들도, 사회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모여 사회를 이루지만, 이 사람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다른 사람들이 사회를 만들어낸다.

 

이 책은 바로 앞의 그림과 같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삶도. 그러니 남의 삶을 우리와 똑같이 만들려는 자세를 지녀서는 안된다. 다름이 바로 사회를 이루는 기본요소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이 책이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앞의 그림 파일과 같은 것들이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사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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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빛 모서리 문학과지성 시인선 130
김중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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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에 나온 시들을 읽으며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남들이 말하는 격동의 80년대가 다시 살아난 듯한 느낌 때문이라고 할까?

 

치열하게 그 시대를 보냈다고 할 수도 없는데, 어떻게든 그 시대에 몸을 담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그 시대의 자장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리라.

 

때론 혁명을 꿈꾸고, 때론 좌절하고, 때론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때로는 수동적으로 방관하고, 때로는 벗어나고 싶어 달아나기도 하고, 때로는 그대로 그럴 수 없지 하고 그 자리로 돌아오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대로 그 시대가 행복했다고 한다. 적어도 꿈은 꿀 수 있지 않았느냐고... 무언가를 만들어가거나 선택을 할 수는 있지 않았느냐고...

 

지금은 그럴 수도 없다. 우리는 선택을 하는 모양을 취하고 있지만 사실 선택을 당하고 있으며, 꿈을 꿀 수 있다고 하지만 그 꿈조차도 한계지워지고 말았으니...

 

 

그럼에도 이 시집은 편치 않다. 80년대의 그 암울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집이 93년에 발간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시인의 나이를 보건대, 시인은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격동의 80년대를 온몸으로 통과한 사람일테고, 그러한 몸부림이 시로 나타나고, 이 시집에 시로 실렸기 때문이다.

 

93년에 나온 시집임에도 불구하고 시집의 서지를 보면 2011년에 13쇄가 발간되었다. 13쇄가 발간되었단 얘기는 꾸준히 시집이 팔리고 있다는 얘기인데... 그 얘기를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역사가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반복되고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리라.

 

이 시집에서 표현되고 있는 내용들이 단지 과거에만 존재하지 않고 20년이 흐른 지금에도 존재하고 있다는 얘기... 그래서 시를 읽으며 시대를 파악하고, 자신을 위로하기도 하리라.

 

반복되는 역사, 그것은 처음에는 비극이지만, 다음에는 희극이라고 했는데... 아니다, 역사는 반복하더라도 희극이 되지 않는다. 희극이었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미래에 그 당시를 평가할 때나 할 수 있는 말이고, 반복되는 당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똑같이 비극이다.

 

그럴 때 이탈이 필요하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같은 자리만 맴돌 수는 없지 않은가. 궤도에서 벗어나 궤도를 바라볼 수 있는 힘, 그것이 필요하다.

 

이 시집은 그렇게 이탈에서 시작한다. 첫시의 제목은 '이탈한 자가 문득'이다.

 

이탈한 자가 문득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김중식, 황금빛 모서리, 문학과지성사. 2011년 초판 13쇄. 11쪽

 

역사의 궤도가 일정하게 반복하면 문제가 되지만, 그렇다고 그 궤도를 수정하기는 힘들다. 그 궤도를 수정하는 사람은 궤도 속의 사람이 아니라 궤도 밖으로 이탈한 사람이다. 그런 이탈이 있기에 수정이 가능하다. 그렇다. 진정 자유로운 사람은 궤도에서 벗어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역사를 만들어간다. 그런 사람이 없다면 역사는 그냥 궤도를 도는 반복을 할 뿐이다.

 

그렇다면 자유롭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경계에 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쪽에 포함되는 것이 아닌 경계에서 이쪽과 저쪽을 함께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계인,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기에 이탈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는 중심을 차지하고 있지는 않지만, 어디로도 갈 수가 있기에 늘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다. 반대로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기에 너무도 어려운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런 경계인의 삶을 그는 '갈대3'에서 노래하고 있다.

 

갈대3

 

  바다가 불러도 바다에 간 적 없고 바다를 사랑한다면서도 깨어지는 파도가 되기를 두려워한 놈이외다 山(산)을 사랑한다면서도 떨어지는 잎새가 되기를 두려워하였으므로 山이 움직여도 山에 들어간 적 없는 놈이외다 이런 놈이외다 붉은 山 푸른 바다 사이에서 고개 숙인 채 오도 가도 못하는 의지, 박약한

 

김중식, 황금빛 모서리, 문학과지성사. 2011년 초판 13쇄. 79쪽

 

그는 의지박약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어느 편에도 속하기를 거부한 강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해석을 할 수 있다.  강한 두 편이 있을 때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어느 편이든 자신의 편을 정해 그곳에 몸을 담그는 일, 그것이 더 쉬운 일이다.

 

이럴 때 어느 쪽으로도 가지 못하고 경계에서 이쪽 저쪽을 다 볼 수 있는 것, 이쪽 저쪽에서 다 비난을 받는 것, 결코 의지 박약이 아니다. 그것은 궤도에 들기를 거부한, 반복된 삶, 시류에 휩쓸리는 삶을 거부한 강한 의지이다.

 

2000년대가 이미 10년이 지나간 지금, 80년대 그 치열했던 삶들이 이 시집에 녹아 있음에도 이 시집이 계속 읽히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아직도 반복되는 삶을 살기 때문. 우리가 아직도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이 시집을 읽으며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가 그것이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이 시집에서 희망을 찾는다. 그것은 바로 궤도에서 이탈할 자유, 경계에서 바라볼 의지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날아오르길 기다리는 그런 모습. 그것을 이 시집에서 발견한다. 시집은 제목은 곧 그 시집의 얼굴이자 몸통이자 내용이다. 제목이 된 시를 보자.

 

  황금빛 모서리

 

뼛속을 긁어낸 의지의 대가로

석양 무렵 황금빛 모서리를 갖는 새는

몸을 쳐서 솟구칠 때마다

금부스러기를 지상에 떨어뜨린다

 

날개가 가자는 대로 먼 곳까지 갔다가

석양의 흑점에서 클로즈업으로 날아온 새가

기진맥진

빈 몸의 무게조차 가누지 못해도

 

아직 떠나지 않은 새의

피안을 노려보는 눈에는

발 밑의 벌레를 놓치는 원시의 배고픔쯤

헛것이 보여도

현란한 비상만 보인다.

 

김중식, 황금빛 모서리, 문학과지성사. 2011년 초판 13쇄. 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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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빈곤 - 노동, 소비주의 그리고 뉴퓨어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수영 옮김 / 천지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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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방대한 저작활동을 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하긴 그가 80이 넘은 노학자임을 감안하고, 그동안 사회문제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해왔다면 이 정도 책들은 내 수 있겠지.

 

왜 우리나라에서 지금 바우만이 인기를 얻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한 학자의 책이 이렇듯 거의 번역이 되는 경우는 정말로 많이 알려진 학자들 외에는 별로 없을텐데... 폴란드계 유대인인 영국의 교수 책이 이렇게나 많이 번역이 되다니...

 

그것은 아마도 바우만의 책들이 현대 사회에 대한 분석을 적확하게 해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도 신자유주의 시대라는 지금의 현실을 말이다.

 

그의 책을 읽다보면 그의 다방면에 걸친 지식에도 놀라게 되지만, 우리나라의 현실에 그의 분석을 가져다 놓아도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책은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를 다른 말로 하면 세계화시대, 지구화시대라고 하니까 한 나라의 특수성을 지니기가 상당히 힘든 시대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자본은 지구적으로 활동하고 문제는 지역적으로 해결하게 한다고 그가 말하듯이 아직도 각 나라들은 자신들만의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분석이 우리나라에도 적용이 될 수 있는 것은 그의 분석은 지구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는 현대 자본의 모습에 천착하고 있기 때문에... 지구적으로 활동하는 자본이 우리나라라고 해서 다르게 행동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의 현대 사회에 대한 분석이 우리나라에도 타당하게 다가온다고 할 수 있다.

 

제목이 "새로운 빈곤"이다. 빈곤이야말로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해결이 된 적이 없는 문제이겠지만,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도 빈곤은 늘 존재했는데... 그가 새로운 빈곤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는 이 빈곤에 접근하는 우리의 모습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새로운 빈곤"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 그는 자본주의 역사를, 아니 근대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시작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만족하고 살 때, 없으면 없는 대로 더 많은 것을 추구하지 않던 시대에서 더 많은 노동이 필요해진 근대... 그 때 등장한 노동윤리부터 시작을 한다.

 

더 일하지 않으려는 사람, 자신의 빈곤에 만족하면서 살려고 하는 사람, 이들을 노동력으로 전환시킬 필요에서 노동의 윤리가 나온다. 이는 빈곤한 사람들을 더 살기 힘들게 함으로써 어쩔 수 없이 노동의 현장으로 나오게 만드는 일에서 시작한다.

 

이렇듯 노동력이 필요한 시대에는 잠재적인 노동력도 꾸준히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사회복지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고 실업자들이 자신들의 노동력을 유지하고 있어야 다음에 노동력을 활용하기 편함을 깨달은 자본은 복지에 투자하게 된다.

 

그래서 사회복지는 이루어지게 되고, 절대적인 빈곤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산업의 발달은 곧 노동력을 잉여로 만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생산 사회에서 소비 사회로 전환이 이루어진다. 소비 사회에서는 소비하지 않는 사람들은 쓸모가 없는 사람들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노동력은 더이상 많이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노동력은 계속 줄어들어야 한다.

 

이런 상태에서 실업자들에게 투자하는 일은 낭비로 치부된다. 하여 사회복지를 중시하는 일은 자본의 발목을 잡은 일이 된다.

 

실업자는 재활용이 가능한, 순환가능한 존재였다면, 이제 소비 사회에서는 쓸모 없어진 노동력은 잉여, 즉 쓰레기가 된다. 폐기물이 된다. 이런 폐기물은 여기에서 사라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완전히 없어지거나 적어도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현대의 모습이다. 이제 빈곤은 재활용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한 번 내쳐지면 보이지 않거나 사라져야 할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복지란 이름은 사라지게 된다. 하여 이들은 쓰레기 취급을 받게 된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빈곤"이다.

 

새로운 빈곤 계층을 최하위계급이라고 하여 이 계급은 사회의 불안을 조성하는 존재로 취급이 된다. 이들은 철저히 격리되어야 하며 우리와 함께 어울릴 수 없는 집단이 된다. 그리고 이들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는 개인이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회복지는 이미 사라지고 있으므로.

 

이 책은 이런 점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타당하다. 바우만의 다른 책에서도 이런 개념들은 여러 번 나왔기에 친숙한 개념으로 그의 사상을 이해할 수가 있다.

 

마찬가지로 책의 마지막 장에서 바우만은 대안을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다른 학자들이나 정치인들은 이것을 비현실적이라고 무시하겠지만 이라는 단서를 달고 있지만... 그것은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비현실적이라고 비판받고 있는(우리나라는 비판 정도가 아니라 무시라고 해야 한다) 기본소득에 관한 논의다.

 

그는 이것을 '소득 수급권과 소득을 벌어들이는 능력의 분리'(219쪽)라고 하는데... 이런 생각이 사회에 퍼지는 순간, 또는 우리들이 지니고 실현하기 위해서 운동을 하는 순간 우리는 인간에 대한 윤리를 회복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진다는 윤리의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재미삼아 보여주는 '나만 아니면 돼'가 아니라 '너도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돼'가 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것이 기본 소득을 이야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에게 '소득 수급권'을 보장해 준다면, 그는 불안에서 어느 정도 해방이 될 수 있고, 불안에서 해방이 된다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출발점에는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빈곤" 앞으로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기준이 될만한 책이다. 바우만의 말대로 우리는 "교차로"에 서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하는가?

 

선택은 우리가 해야 한다. 자본의 힘에 떠밀려서 가면 안된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을 말하고자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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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적으로 생각하기 - 제2판
지그문트 바우만.팀 메이 지음, 박창호 옮김 / 서울경제경영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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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말이 있고, 또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고, 지혜로운 존재라고 하니, 인간에게 있어 생각이란 바로 인간 존재의 본질이기도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생각을 하지 못한다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도 바로 생각을 하는 존재임을 나타내주고 있는데, 데카르트의 유명한 말을 빌리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그런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이다.

 

그럼에도 생각은 제각각 특성을 지니고 있어서 어떤 것이 바람직한 생각인지 고민하게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생각은 어떤 것일까? 우리네 삶의 존재에 대해서 고민한 것이 철학적 사고라고 한다면, 인간 본질을 추구하는 학문이 철학임에는 틀림이 없겠다.

 

여기에 인간의 건강을 생각하는 학문이 의학이고, 과학적인 현상에 대해서 연구하는 학문이 과학이라면... 사회학은 무엇인가? 도대체 '사회학적으로 생각하기'란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한 의문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냥 생각하는 동물이 인간이다 하면 될 것을, 철학적 사고, 과학적 사고, 인문학적 사고도 모자라 이제는 사회학적 사고를 하라고 한다.

 

사회학적 사고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은 근대에 들어서일테고,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근대의 학문이라면... 왜 철학이나 과학에서 사회학이 분리되어 나왔을까 하는 의문도 갖게 된다.

 

어쩌면 과학의 발달로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여기'에 대해서 파악할 필요가 생겼을테고, 이러한 필요에 부응해서 사회학이 발달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하여간 왜 사회학이 탄생이 되었고, 사회학적 사고란 무엇인지 세세하게 추구할 필요는 없다. 바우만과 팀 메이가 이 책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내용은 이러한 사회학의 역사, 또는 개념 추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우리는 사회에서 벗어날 수가 없고,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것이 바로 사회이기 때문에, 이 사회 속에서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사회학적인 사고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사회학적으로 생각하기란 그냥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 속에서 가장 바른 방향이 무엇인지, 어떻게 판단하고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나와 사회에 도움이 되는지 생각하라는 얘기라고 보면 된다.

 

이 책을 읽어가면서 이 책은 영국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쓰여진 사회학 입문서라고 보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는데... 왜냐하면 다 기억하지는 못해도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책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김찬호가 쓴 "사회를 보는 논리"(문학과지성사.  2004년 초판 11쇄). 내가 갖고 있는 책이 이미 10년 전 책이니, 아마도 이 책은 더 많이 찍어내었을테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회학적으로 생각하게 하는데 도움을 많이 주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우만과 팀 메이의 이 책을 읽을 때 이들의 논리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생각하면서 읽어야 된다는 얘기가 성립이 된다.

 

이들 역시 사회학적인 생각의 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서 '지금-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바람직한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더불어 행동을 할 수 있는 자세까지 지니면 더욱 좋을 것이다.

 

나라는 존재에서 가정으로, 가정에서 마을로, 마을에서 지역으로, 지역에서 나라로, 나라에서 세계로, 세계에서 우주로... 우리의 존재가 무한히 뻗어나가고 있는데... 그럼에도 중심이 되는 것은 바로 내가 지내고 있는 '지금-여기'라는 시공간이다.

 

이 시공간에서 나라는 존재가 남이라는 다른 존재와 함께 어울려 사회를 이루고, 그 사회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삶을 살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사회학적으로 생각하기'의 성공한 모습이지 않을까 한다.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장들에는 생각할 거리들과 더 읽으면 좋을 책들이 소개되어 있어서 사회학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더 깊게 들어갈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주고 있는 책이다.

 

사회학에 문외한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으므로, 자신을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책이기도 하다.

 

급변하는 현대 사회... 자칫 잘못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마는 사회가 현대사회다. 전혀 나와는 상관없이 굴러가는 모습을 보이는 현대 사회인데...

 

그래도 나와 전혀 관계가 없지는 않으니...이것이 사회학적으로 생각할 필요이다. 더 위험한 사회일 수록 그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을 확보할 필요가 있으니 말이다.

 

앞에서 언급한 김찬호의 책과 함께 읽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책이다.

 

덧글

 

도서관에서 책을 분류할 때 십진분류법을 사용한다. 그 중에 사회학과 관련된 부분은 300번이다. 이 300번에 어떤 것들이 속해 있는가 보면 이렇다. 이것이 우리가 소위 말하는 사회과학인데, 더 범위를 좁혀서 사회학이라고 하면 330번이다. 책의 뒷표지 바코드 위에 있는 숫자 중 마지막 세 숫자가 책이 십진분류법에서 어디에 속하는지 알려주고 있다.

 

300 사회과학

 

310 통계학   320 경제학    330 사회학, 사회문제     340 정치학                350 행정학  

360 법학      370 교육학    380 풍속,민속학            390 국방, 군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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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를 보는데 충격적인 보도가 나왔다. 우리나라가 OECD국가 가운데 노인 빈곤율이 1위란다. 무려 50%정도의 노인이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고 한다.

 

바우만의 책을 읽고 있는 중인데, 이렇게 소비자 사회로 전환이 되고,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가난조차도 이제는 나라가 책임을 져주지 못하는, 사회복지에서 노동복지로 전환이 되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나라는 더 심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선거에서 노인복지를 강조하고, 모든 노인에게 기초노령연금을 지급하겠다고 하는 나라에서 빈곤에 허덕이는 노인이 아직도 많다고 하니...

 

여기에 어떤 보도에서 폐지 줍는 노인들의 평균 월 수입이 26만원 정도라고 하는데... 이나마 고물상이라고 하는 곳, 재활용센터의 운영 세금이 올라, 노인들에게 폐지 대금으로 지급하는 돈이 줄어들거라고도 하던데...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런가? 아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풍요로움은 굶주리는 사람 모두를 먹이고도 남지 않는가. 그럼에도 골고루 분배가 되지 못하고, 음식 쓰레기로 버려지는, 또 사용 가능한 물품들이 그냥 폐기물이 되고 마는 현실 아니던가.

 

가난 구제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는 것일텐데...

 

사회복지가 확립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모두는 형제라고 생각하면, 우리 모두의 생활은 우리 모두가 책임을 져야 하는데...

 

정현종의 시집을 읽다가 이거네.. 이 시가 지금 우리 현실이네... 그럼 이런 현실에서 이런 사람은 없나?

 

정말로 이런 사람, 이런 정치가가 필요하네 하는 생각을 했다.

 

가난이여

-인도시편 1

 

석가모니는 저 가난을 구할 길 없어

스스로 헐벗었다

정치로도 경제로도 무슨 운동으로도

국가 해 가지고는 더더구나 안될 게 뻔하니

지상에 가난은 영원할 터이니

저 버림받은 가난을 어쩌나 어쩌나 하다가

도무지 그걸 구할 길 없어

스스로 ...... 헐벗었다

 

그리하여 한 사람의 알몸이 빛났다

 

그리고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 되었다

 

정현종,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계사. 1989년 5판. 95쪽

 

이 시에서 말하는 가난이 단지 물질적 가난만을 말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우선 물질적 가난에 국한시켜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가난해진 사람이 있다. 세상에 어떤 정치,경제,국가로도 가난을 해결할 수 없어 스스로 헐벗었다는 석가모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라는 말을 한 예수와 통하는 것이다. 즉, 물질적인 부를 추구하는 사람은 동양이든 서양이든 영혼이 가난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나도 가난해야 한다. 마치 중생이 병들어서 자신도 아프다던 유마거사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내려가 그들과 함께 해야 한다.

 

그들과 함께 하지 않고 어떤 대책을 내놓아도 그것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자기만족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 시는 석가모니를 들어서 가난에 대해서는 함께 가난해지는, 그들과 함께 할 때만이 가난을 구제할 수 있다고 한다. 자신의 것을 모두 놓아버리는 경지.

 

이 경지에 도달했을 때 빛나는 사람이 된다. 그것이 바로 석가모니의 삶이었다. 예수의 삶이었다.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더라도, 적어도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들과 함께 하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럴 때 물질적 가난, 정신적 가난을 극복하지 않겠는가.

 

다 내려놓아 더욱 빛나는 사람.

 

지금 사람들은 다 내려놓지 않아도 된다. 다만 내려놓은 모습을 보여주기만 해도 좋다. 적어도 함께 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만 해도.. 이렇게 노인 빈곤율이 소위 잘사는 나라라는 OECD국가 중 최고를 기록하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정현종의 이번 시집에서는 선(禪)의 냄새가 많이 난다. 불교적인 분위기가 많이 느껴지기도 하고. 그리고 뒤에 인도시편이 몇 편 있는데...

 

굳이 불교라고 하지 않아도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것이 바로 물질적, 정신적 허영을 버리라는 것 아니던가.

 

그래 모두가 조금은 가난해질 필요가 있다. 그래서 모두가 조금은 부유해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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