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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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아닌가? 이 말은 텔레비전에서 심심치 않게 나오는 말이기도 하다. 주로 일본인들이 망언을 했을 때 우리가 하는 말로.

 

그러나 이 말은 다른 민족을 향해서 하기보다는 자기 민족을 향해서 해야 한다. 역사를 기억하는 일은 그 민족의 행복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다른 민족과 얽힌 문제라고 하더라도 역사를 기억하자는 말은 그 민족이 그 민족을 향해서 행해야만 한다.

 

우리의 예를 들어보면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점령했고,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일본 지배층이 인정을 안 한다. 이 때 우리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는 말로 경고를 한다. 그 경고는 유효하고 필요하다. 그렇다고 이렇게 경고만 해서 되는가? 안 된다. 이 경고를 우리에게도 향해야 한다.

 

우리는 식민지배를 당한 뼈아픈 경험을 안고 있다. 어떻게 그렇게 식민지배를 당하게 되었는지 철저하게 공부해야 한다. 그리고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역사를 반복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가해 민족에게 너희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잊지 말라고 해야만 하지만, 피해 민족도 그들이 겪었던 일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그들이 역사를 잊었을 때 그들은 또다시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홍구의"유신"을 읽으며 일본 지배층에게 하는 이 말을 바로 우리에게 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한 해가 지났다. 한홍구가 온몸으로 유신에 대한 글을 쓴 지가. 그리고 역사는 반복(?)되었다. 이 책의 논리대로 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유신의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다.

 

현 대통령에게 유신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유신에 대한 명확한 인식은 요구할 수 있고, 정확한 역사 인식 속에서 과거를 확실하게 청산하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요구할 수 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무엇하러 역사를 공부하겠는가?

 

하여 역사를 공부한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역사적 진실을 알리는 일을 적극적으로 해야 하고, 사람들이역사를 잊지 않고,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어 현재를 바르게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

 

오죽했으면 태사공 사마천이 자신의 역사서에 자객열전이라든지, 또는 간신들의 이야기까지 집어넣었겠는가. 타산지석이라고 역사에서는 배우지 못할 일이 없음을 이미 먼 옛날 역사가들이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 한국 현대사를 공부한 사람들, 또 지식인이라는 사람들, 그들은 과연 역사를 기억하고,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무슨 일을 했는가? 이 책은 그런 질문을 또 하게 만든다.

 

읽어가면서 너무도 가슴이 먹먹해져서, 더 읽고 싶지 않아지는 책이기도 했는데... 이미 한겨레 신문에 연재가 된 글이고, 가끔은 읽어본 글이기도 하지만, 책으로 묶여 나오고, 유신에 관한 역사를 이어서 주욱 읽으려니 마음이 너무도 무겁다.

 

이 책에 나오는 사건들만 살펴보자. 유신시대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는지.

 

국회의원의 일정비율을 대통령이 임명(소위 유정회), 김대중 납치사건.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재건위 사건.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 장준하 의문사. 동일방직 인분 사건. 반도상사 노동조합과 중앙정보부. 도시산업선교회. 자유언론실천선언.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건. 무등산 타잔. 베트남 파병. 기지촌. 통일벼. 원자력발전. 중학교 입시폐지와 고교평준화. YH사건. 남민전 사건. 김형욱 실종 사건. 부마항쟁 등등

 

이게 1972년부터 1979년에 일어난 우리 역사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이 책은 유신에 대해서, 유신시대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서, 그러나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또는 잘못 알고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현대사 전공자답게 구체적인 자료들을 동원해서 알려주고 있다.

 

여기에 글쓴이인 저자의 감정까지도 실려있어, 객관적인 역사 서술책이라고 하기보다는 동시대를 살았던 역사가가 자신이 체험했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서 온몸으로 쓴 책이라고 하는 편이 더 좋겠단 생각이 드는 책이다.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그것을 다른 민족에게만 이야기하지 말고, 우리 자신에게 이야기하자고.. 정말 우리는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가?

 

'겨울공화국'이라고 불렸던 유신시대를 기억하고 있는가? 그 때 죽어간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는가?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똥물을 뒤집어쓴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는가? 파업을 했다는 이유로 온갖 탄압을 받았던 사람들... 그들의 그 투쟁에 힘입어 민주노조가 건설되었음을 기억하고 있는가?

 

유신시대... 글쓴이는 이 유신을 쿠테타라고 부른다. 한 사람이 두 번이나 쿠테타를 일으켰는데... 그 역사 사건을 단죄하지 못했기에 또 다른 쿠테타가 일어나(12.12사태)이 되었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이런 역사를 통해서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은 우리가 먹고 사는 일에 침윤되어서 다시 과거로 회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한다. 아마 글쓴이는 요즘 한국현대사 교과서 문제를 바라보면서 참담한 심경이 되었을 것이다.

 

한국현대사에서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유신시대에 대해서도 이렇게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둥의 판단유보 또는 그래도 그 시절이 있었기에 우리가 먹고 살 수 있지 않았느냐는 반론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 유신시대보다 조금 먼 일제시대에 대해서 온갖 왜곡이 일어나고 있는 현실에서 정말 우리는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래서 글쓴이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이 책을 썼을 터인데... 이렇게 책을 쓴 이유는 우리가 역사를 잊어서는 안되기 때문일텐데...

 

우리 다시 한 번 기억하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 

 

우리 역사를 기억하자.

적어도 안 좋은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꼭 기억하자.

우리가 어떤 세상을 겪어왔는지...

그 때 우리는 어떤 꿈을 꾸었는지...

그 꿈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지, 이루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역사는 바로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다. 우리가 나갈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가 바로 이것이라고 절규하고 있다. 이 절절한 외침... 듣자. 그리고 기억하자.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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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을 고른 이유는 오직 하나.

 

제목에 카프카가 들어 있기 때문.

 

카프카에 관심이 있었을 때 검색어를 카프카로 놓고 검색을 해보면 많은 책들이 뜨는데, 시집 제목에 카프카가 들어간 시집이 두 권이 있었다.

 

언젠간 읽어야지 하면서 사게 된 시집인데...

 

"카프카의 집"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고, 카프카 작품 중에서 "성"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성"이라는 카프카의 소설은 결코 성에 도달하지 못하고 성의 주변을 맴돌 수밖에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이루는 절대의 세계에,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지 못하고, 늘 안개에 쌓여 그렇게 헤매면서 어디론가 가기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리의 세계가 분명 존재한다고, 눈에 보인다고 생각하고 가는데, 가도가도 그 곳은 저 멀리에만 있고, 그곳은 또 뿌연 안개에 쌓여 있어 실체를 의심하게도 하는데...

 

그래도 그곳은 눈에 보이니 없다고 할 수도 없고, 하여 우리는 갈 수밖에 없는데...

 

진리의 세계를 향한 여정, 가야만 하는, 그러나 갈 수 없는 그런 세계에 대한 탐구, 그것이 카프카 소설이었다면, 이 시집에서는 그런 세계에 대한 시적인 추구가 이루어지고 있어야 하지 않나.

 

제목이 된 시 '카프카의 집'을 본다.

 

카프카의 집

  어느 낯선 세계, 공기조차도 고향 공기의

 어떤 요소도 갖지 않은, 낯섦으로 질식할 듯

한 곳, 미친 유혹들 속에서, 그저 계속 갈 뿐

                                                  - <城>에서

 

저녁 어둠이 안개에 젖을 때

만종 종소리는 낮은 곳으로 잦아들고

한사코 사물을 밀어내치려 해

집의 낯익은 현관 문고리를 잡고서도

여기가 어디던가,

묻게 한다.

 

불그스레한 가등 불빛 아래

포도 돌바닥이 번들거릴지라도

끝내 고독했던 사람은

여전히 그늘진 모퉁이에서 서성대며

그의 집에 붙은 포스터의

얼굴 또한 춥고 그로테스크하다.

 

다만 헤매다닐 뿐.

(굴뚝에서 한가롭게 풀려나는 연기

나무 끝에 오도마니 올라앉은 둥지

가족의 웃음 소리)

그 성은 멀고 머어

이방인의 집은

비어 있다.

 

밤이 더 싶어선 안 된다. 프라하여.

불안은 언제나

한걸음 앞서 스멀거리지만

보헤미아 처녀여

귀가를 서두르지 말라

머리카락카락 물 미립자 방울 맺히기 전엔.

 

신중신, 카프카의 집, 문학과지성사. 1998년 초판. 66-67쪽

 

상당히 몽환적이다. 무언가 도달했음에도 도달하지 않았음을, 가야 하지만 갈 수 없음을 이 시에서 느낄 수 있다. 마치 카프카의 "성"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이 시에서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럼에도 가야한다. 그것이 바로 진리의 세계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다. 우리는 늘 어디론가 가야만 한다. 가지 않으면 우리는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다.

 

이렇게 카프카를 느끼기도 했지만, 또 하나 시집에서 반가운 제목을 만났다. '풀잎'

 

이 시에서 김수영의 '풀'을 느낀 건 나만의 착각일까. 진리의 세계에 사람은 혼자 갈 수가 없음을, 함께 가야만 함을, 어쩌면 이 '풀잎'이라는 시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

 

풀잎

 

풀잎이 한들바람에 흔들린다

천둥 뇌우 속에서 한결 명징해진다

혼자이면서 여럿으로

씨를 여물게 해 흩뿌리고

풋풋한 목숨 면면히 이어간다

 

풀잎은 죽음 곁에서 새 움이 돋아나고

꿈꾸지 않으면서

꽃을 피운다

흔들려 바람을 부르고

흔들리지 않으므로 나비의 요람이 된다

 

풀잎이 숲을 만들고

강바닥이 마르는 걸 막아준다

새벽에는 이슬에 젖어

태어난 아이가 힘찬 울음을 터뜨리도록

노래한다 한 소절마다의 엽록소로

 

풀잎은 항구하게 원시의 힘

농경의 고단한 쟁기질과

타오르는 풀무의 불길.

마침내 민초(民草)가 주인임을 터득시키는

민주주의의 지반이 된다.

 

신중신. 카프카의 집. 문학과지성사. 1998년 초판. 80-81쪽   

 

자, 내가 원하는, 가야만 하는 세계는 어디인가. 그곳으로 나만이 아니라, 함께 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 '풀잎'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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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걷다 - 사회적 약자를 위한 도시건축, 소통과 행복을 꿈꾸다
이훈길 지음 / 안그라픽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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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선 반갑다. 이런 책을 읽게 돼서. 아마도 이런 책이 나온 적이 있었겠지만, 과문한 탓에 도시건축, 그것도 장애인을 중심에 둔 도시건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책은 이 책이 처음이다.

 

장애인이 아니라 사람들이 편리하게, 소통할 수 있게 도시를 구성해야 한다는 내용의 책은 읽은 적이 있었고, 고 정기용 건축가의 책도 어느 정도는 소통을 중심에 둔 도시건축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장애인을 꼭 집어서 이야기한 책은 내게는 이 책이 처음이다.

 

"도시를 걷다"

 

한 번 걸어보라. 얼마나 불편한지. 조금만 걸어도 길이 연결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잠깐 한눈을 팔면 발에 무언가가 걸려 넘어지기 쉽다. 더 위험한 일은 차가 걷는 길에 세워져 있다든지, 난데없이 들어온다든지 하는 일이 빈번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상점의 간판들, 상점을 홍보하는 입간판들... 그리고 온갖 소음들, 매연들. 정말로 장애가 없는 사람들도 걷고 싶어하지 않는 길이 바로 도시의 길이다. 특히 서울은 더.

 

장애가 없는 사람들도 걷고 싶어하지 않는 도시의 길을 장애가 있는 사람이 걷는다는 일은 정말로 힘든 일이다. 위험한 일이다. 이 책에도 나오지만 이들은 장애가 없는 사람이 3분이면 가는 길을 30분에 걸쳐서 가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한다.

 

무엇이 문제일까? 도시를 계획할 때 전체적인 밑그림 없이 그때그때 편의성을 따지면서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이 한양으로 도읍을 옮길 때 과연 그들도 도읍지를 그냥 막 건설했을까? 예전 책을 읽어보면 상당히 공들여서 계획하고 건설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서울이 우리나라 수도가 된지 700년이 되어가고 있는 지금... 옛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안다는 온고지신의 지혜를 발휘하지는 못할지라도,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지금부터라도 모두가 행복한 도시를 건설하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작가는 이 책에서 건축가는 이런 사람이라고 말한다.

 

  명심해야 할 것 가운데 하나는 건축을 위한 삶이 아니라 삶을 위한 건축이라는 사실이다. 건축가는 멋있는 건물을 짓는 사람이 아니라 건강한 건물을 짓는 사람이어야 하고 나아가 좋은 삶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전문가여야 한다. (200쪽)

 

그렇다. 적어도 건축가는 건축을 할 때 가장 약자를 중심으로, 그가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건축을 해야 한다. 가장 약자가 행복하다면 그보다 나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행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건축을 '유니버셜 디자인'이라고 한다.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디자인. 모두에게 통하는 디자인. 여기에는 장애인이고 임산부고 노인이고 모두가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디자인(건축)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런 '유니버셜 디자인'은 자연스레 '무장애 디자인'을 포함하고 있으리라. 누구에게도 장애가 되지 않는 디자인이라는 '무장애 디자인'.

 

하여 모두가 행복한 건축에는 시각만이 아니라 오감이 동원되어야 한다고 한다. 만약 우리가 장애인이라고 하더라도 어느 장애를 가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모든 장애인들이 행복한 건축이라면 오감을 적절히 자극하는, 또는 오감이 동원되는 그런 건축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 배웠다. 건축에는 오감이 작용되어야 한다는 사실. 집에는 시각만이 아니라, 촉각만이 아니라, 후각도 청각도 모두 함께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여기에 또 걷고 싶은 도시에서는 '거리'와 '길'의 개념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사실도 배웠다. 글쓴이는 '거리'는 단지 물리적 공간을 떠나서 삶이 이루어지는 공간, 행동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라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그래서 건축가는 '거리'를 추구해야 한다고 하고, '길'은 이동을 중심으로 하는 지향성을 지닌 목표중심적인 개념이라 건축가가 추구하는 개념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건축에서 길을 어떻게 개념지우던, 우리에게는 길이 바로 거리가 되어야 한다. '길'은 우리에게 생활이 되어야 하고 만남의 장소가 되어야 하며, 우리의 삶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어쩌면 길은 그래서 우리에게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삶이 녹아 있는, 삶이 이루어지고 있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건축가는 바로 그러한 건축을 추구해야 한다.

 

이 책에서는 사회적 약자를 배려해야 하는 건축에 대해서 자세하게 잘 설명해주고 있어서, 지금 우리의 도시 건축이 얼마나 배려에서, 아니 배려가 아니라 '함께 삶'에서 많이 벗어나 있는지를 알게 해주었다.

 

문제를 알면 고쳐야지. 바로 그 점이 이 책의 시작점이 아닐까 한다.

 

"자, 문제는 이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렇게 이 책의 저자가 묻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답은 사회적 약자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그런 도시를 만들 수 있도록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야 한다가 된다. 그것은 바로 사회적 약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니까.

사회적 약자가 행복한 도시라면 우리 모두는 행복할 수밖에 없으므로. 누군가가 불편하고 힘듦 생활을 하게 계획된 도시라면 우리에게도 불편하고 힘들 수밖에 없으므로.

 

참, 좋게 읽었다. 이런 책이 많이 나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런 책의 내용을 도시 행정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이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니, 한 나라의 정치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좋았다.

 

덧글

 

이 책 참 좋게 읽었는데.. 읽으면서 자꾸 학교 생각이 났다. 우리나라 학교 건물을 생각해 보라. 얼마나 폭력적인지. 사회적 약자에게 얼마나 다니기 힘든 건물인지.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예전에 대학에 입학한 장애인 대학생이 학교를 자퇴한 경우가 있었다. 도저히 학교를 다닐 수 없는 구조였기때문이다. 그런 일들을 거치며 대학은 조금 좋아졌는데...

 

초중고등학교는? 이렇게 물으면 아니다다. 건물은 낡고 휠체어는 당연히 다닐 수 없으며, 장애인 화장실은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경우가 많으니... 장애인에게 초중고등학교의 건물은 폭력이다. 접근하기 너무 힘든 철옹성이다. 이런 경험을 한 아이들이 어떤 생각을 할까 고민해봐야 한다.

 

적어도 학교 건축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최고의 건축가들이 고민을 하고, 설계를 하고, 조언을 하고, 교육당국은 그런 조언을 받아들여 건축을 해야 하지 않을까. 돈이 많이 들겠지만, 지금 낡은 학교 건축들을 개조해야 하지 않을까? 학교 다니면서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건축을 몸소 겪은 아이들이 자라면 도시 건축도 나라 건축도 모두 그런 방향으로 자연스레 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또 하나 다음에는 경제적 약자들도 도시에서 소외되지 않는 그런 건축에 대한 책도 나왔으면 좋겠다. 추상적인 주장만 담긴 책이 아닌 구체적인 내용이 담긴 그런 책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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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에서, 또 신문에서 대통령이 한 말이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공기업 노조 개혁방해 용납 안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말.

 

나라빚이 많고, 공기업들이 방만하게 운영해 와서 경영이 악화되었음에도 흥청망청 예산을 낭비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 책임이 노동자에 있다? 과연 그럴까? 노동자가 개혁 방해세력일까? 경영을 제대로 못 한 것은 경영자의 책임이 아닌가.

 

평생동안 일만 하던 사람들을 상황이 악화되었다고 해서 이렇게 다르게 대우해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어리석게도 카프카의 [변신]이 떠올랐다. 아니 [변신]이라고 하기보다는 카프카의 그 작품 주인공인 '그레고리 잠자'가 떠올랐다고 하는 편이 맞다.

 

왜 그럴까? 곰곰 생각해 보니, 그레고리는 가족을 위해서 일한 죄밖에 없었다. 그는 정말로 가족을 위해서 자신의 성향도 죽이고 일을 한다. 그런데 어느날 자신이 흉측한 벌레로 변해있음을 발견한다.

 

자신을 죽이고 일한 대가가 벌레가 된 것이다. 그 벌레는 그에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에게는 아니다. 그는 이미 이전의 그레고리가 아니라 벌레일 뿐이다.

 

보기에도 흉측하고 가족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그래서 가려야만 하는, 없애야만 하는 존재. 이전의 그의 모습은 가족에게 상관이 없다. 지금 그의 모습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리고 그는 이제 가족에게 필요 없는 존재다.

 

여기에 외부 손님이 있다. 그의 가족을 생활하게 하는 경제력을 지닌 외부 손님들. 그 손님들에게 이 벌레는 장애일 뿐이다. 손님들에게 벌레는 가려져야 하는 존재, 즉 알려져서는 안되는 존재이다.

 

그들에게 벌레의 존재가 알려진다면 가족들은 살아가기 힘들어진다. 그래서 그는 철저하게 가려져야 한다. 그래서 그를 도와주고 지지해주야 하는 가족들은 그를 귀찮아 하고, 사라졌으면 하는 존재로 여기고, 또 그렇게 행동한다.

 

무언가가 연상이 된다. 그레고리는 노동자다. 그들은 일만 한다. 그는 늘 같은 일을 한다. 그럼에도 상황이 변하니 그는 같은 존재가 되지 못한다. 꼭 필요한 존재에서 없어져야만 하는 존재가 된다.

 

경제성장의 주역이라던 노동자는 이제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었다. 여기에 다국적기업으로 표상되는 외국 기업들에게는 그들의 고임금은 투자를 저해하는 요소가 된다. 예전에는 저임금으로 외국 투자를 이끌어들였던 노동자들이 이제는 외국의 투자를 막는 요소가 된 것이다.

 

마치 [변신]의 그레고리가 가족에게 꼭 필요한 존재에서 필요없는 존재가 되었고, 그의 가족의 생계를 도와줄 손님들을 쫓아버리는 존재가 되었듯이, 지금 우리 경제의 주역이었던 노동자들이 그런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1900년대 초반에 살았던 카프카가 이런 노동자의 현실을 감안해서 소설을 쓰지 않았을텐데, 세계 명작이란, 세계에서 꾸준히 읽히고 있는 작품이란 이렇게 다양하게 시대에 따라서 또 사람에 따라서 해석이 될 수 있음을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난 어리석게도 요즘 이 소설을 우리 사회에서 느끼면서 섬뜩한 마음을 지니게 되었다.

 

나도 이렇게 ‘그레고리’에 불과하지 않을까?

우리는 ‘그레고리’처럼 대우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면 안 되지 않는가.

 

아니겠지.

아니라고 자위를 해본다.

그래야만 하지.

‘그레고리’는 무력하게 죽음의 세계로, 내쳐짐의 세계로 갔지만... 바우만의 용어로 하면 그레고리는 '쓰레기'가 된 삶이 되어 폐기되어 버렸지만,

우리는... 노동자들은... 

그렇게 ‘그레고리’처럼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카프카가 미리 경고한 것 아닌가. 난 그런 생각이 든다.

 

카프카의 [변신]을 2014년에 우리나라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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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속 변화를 꿈꾸는 기적의 수업 멘토링 - 최고의 교사를 만드는 행복한 교과서 행복한 교과서 시리즈 6
김성효 지음 / 행복한미래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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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는 교실붕괴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었다. 텔레비전에서 보여주는 교실의 모습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그런 방송에서 보여지는 교실은  배움이 일어나는 공간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가르침이 일어나는 공간도 아니었다. 그냥 여러 무리들이 제 하고 싶은 일들을 하는, 소통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는 그런 공간에 불과했다.

 

그런 공간에서는 수업이 이루어질 수 없다. 수업도 이루어지지 않는 교실이니 교실붕괴라는 말이 맞는 현실이었다. 수업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자연스레 학생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심화되었고, 이런 갈등들은 왕따문제로 불거지게 되었다.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정신을 갉아먹는 폭력, 소통의 부재가 따돌림으로 나타나게 되었고, 이런 모습의 최대 피해자는 바로 학생들 자신이었다. 왕따 가해자가 언제 왕따 피해자가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학생들은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가해자 그룹에 속하려는 노력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학생들끼리의 관계가 이렇게 흘러가다 보니 교사들은 기본적인 생활지도에서 좌절하고, 또한 수업에서도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학창시절, 모범생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성적도 우등생 쪽에 속해 있었던 교사들이 자신들과 전혀 다른 아이들을 만나게 되고,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교사들의 노력이 시작되었다. 어떤 교사는 학생들의 생활태도를 이해하고 바꾸기 위해서 자신을 바꿔가기 시작했으며, 어떤 교사는 수업을 바꾸려는 노력을 했고, 어떤 교사는 학교를 바꾸려는 노력을, 어떤 교사는 우리나라 교육제도를 바꾸려는 노력을 했다.

 

아마도 이런 노력이 1990년대 후반부터 나타난 모습이리라. 대안학교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것도 이 때쯤이니까.

 

이런 노력 덕분인지, 아니면 시대가 변하고, 학생들이 변했는지, 그것도 아니면 이제는 체념한 것인지 교실붕괴라는 말은 쏙 들어갔다. 대신 학습부진이라는 말이 떠돌기 시작했고... 학생들의 정신건강이 좋지 않다는 얘기와 국제학업성취도에서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나, 학업 흥미도에서는 최하위라는 좋지 못한 얘기가 들린다.

 

이제는 수업이다. 일본에서 사토 마나부 교수의 "수업이 바뀌면 학교가 바뀐다"는 말이 우리나라에 유행처럼 들어오고, 배움의 공동체를 표방한 학교도 많이 생기기 시작했다.

 

교사들, 사회에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상당히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이다. 자신들의 수업에 관해서, 자신들에 대해서...

 

그래서 수업이 안 되었을 때, 남들의 비난보다는 우선 자신들이 견디지 못한다. 나는 왜 이럴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고민들을 늘 안고 산다. 그리고 돌파구를 마련하려고 노력한다.

 

수업에 관한 연수도 찾아 듣고, 책을 찾아 부단히 고민하고, 동료 교사들, 선배교사들에게도 질문을 수시로 한다. 아무리 그래도 수업에서는 변화가 잘 보이지 않는다. 이 때 교사들은 좌절한다. 그리고 현실에 안주하기 시작한다. 현실에의 안주, 그것은 곧 교사의 무덤이다.

 

하루하루 수업시간마다 짜증내고 화내고 한숨쉬는 생활. 그것은 교사에게는 지옥이다. 그런 지옥에서 교사들은 벗어나고 싶어한다. 수업이 안되었을 때 피해는 학생들도 받지만, 교사 자신도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수업을 못 하고 싶은 교사가 어디 있겠는가. 다만 그게 잘 안될 뿐이다. 그 안되는 문제를 가지고 안된다고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는 데 교사의 딜레마가 있다.

 

교사는 자신이 주저앉는 순간 자신과 더불어 학생들에게도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 조급함을 버리고.

 

이 책에서는 그런 말을 학생들보다 반 발자국만 앞서 가라고 했다. 한 발자국이 아니라, 반 발자국. 언제든지 학생들을 바라볼 수 있는 거리, 그리고 학생들이 따라잡을 수 있는 거리. 그렇다고 학생들에게 뒤처져지지 않는 자리. 그게 반 걸음 앞서가는 거다.

 

너무 멀리 가지 않았기에 학생들은 충분히 따라올 수 있고, 교사들도 학생들과 비슷한 걸음으로 가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는다. 조급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학생들을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이것만 되면 된다. 학생들을 이해하고 공감해주기. 즉, 학생들과 소통이 되기. 이것이 수업의 처음과 끝이다.

 

이 책에서는 이 말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끝까지 지치지 않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학생을 이해하는 마음이 열정보다 앞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학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마음이 열정보다 앞설 때 교사는 학생을 가장 편안한 상태로 만들어 줄 수 있다. 이럴 때에야 비로소 학생들도 최고의 성장을 보여준다. (245쪽)

 

그것이다. 수업멘토링,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바로 학생을 이해하라는 것. 잘 가르치려는 열정이 수업 기술 쪽으로 치우치기 쉽다면 학생을 이해한다는 것은 학생의 자리에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백 가지 수업 기술보다는 바로 학생을 이해하는 마음, 이것이 수업을 잘 할 수 있는 처음이자 끝이 된다.

 

이런 마음가짐을 지니고 서두르지 않고 조급해하지 않으면 시나브로 수업은 좋아진다. 학생들도 수업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학생들이 성장하게 된다. 나머지는 이 책의 구체적인 수업기술을 참조하면 된다. 이 책에 소개된 수업기술 외에도 자신만의 기술을 개발할 수 있다.

 

그러면 수업은 즐거워진다. 좋아진다. 훌륭한 교사가 될 수 있다.

 

초등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쓴 책이지만, 중학교 교사가 읽어도 참조할 내용이 많다. 함께 고민하면서 함께 실천한다면, 교사들이 만족한 수업을 할 수 있을 것이고, 교사들이 만족한 수업을 한다면 그 수업의 결과는 학생들에게 그대로 전달이 될 것이다.

 

수업. 교사의 처음이자 끝이다.

 

반 걸음 앞서 가기

       - 선생 노릇1

 

딱 반 걸음만 앞서가야지.

의식하지 못해도

늘 눈 앞에 보이게.

하는 행동 하나 하나

모두 보이게.

강요하지 않고,

빨리도 가지 않고,

늦게도 가지 않고,

오직 반 걸음,

겨우 저 정도야,

금방 따라 잡을 수 있을 걸

하게 해야지.

그래서 반 걸음

손을 내밀면

언제든 

잡을 수 있게,

손 잡고 함께

함께

갈 수 있게,

반 걸음만

겨우 반 걸음만 앞서 가야지,

그 힘든 길을.

덧글

197쪽. 국어 수업에 대한 설명에서 '반모음'이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내가 알기로는 우리 말에서 반모음이라는 개념을 학교 문법에서는 쓰지 않는다. 세계적으로 기본 모음이 10자나 되는 나라가 드문데, 우리나라는 기본 모음에 이중모음까지 모음이 많아서 영어식의 반모음을 굳이 설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냥 모음이라고 해야 한다. 누가 '으'를 반모음이라고 하는가? 'ㅡ'는 우리나라 기본 모음자 중의 하나이다.

 

모든 교사들은 페스탈로치를 꿈꾼다. 그런데 페스탈로치가 되기 힘든 환경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교사들이 페스탈로치가 될 수 있도록 환경적 지원을 해줘야 하지 않을까. 세계 최장의 수업시간, 아직도 많은 학급 학생수 등등... 교사가 수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해줄 수 있을 때 교사와 학생의 수업시간은 더욱 행복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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