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인문의 집을 짓다 - 2014 세종도서 교양부문 융합과 통섭의 지식 콘서트 2
양용기 지음 / 한국문학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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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서문에 해당하는 '들어가며'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책이 건축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청소년들에게, 또는 건축의 기본적인 지식을 익혔지만 더 심도 있게 공부하고자 하는 건축학도들에게, 그리고 건축을 종합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일반인들에게 하나의 길을 보여주는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의식주의 하나로서 오랜 시간 같이해온 건축물을 우리 삶의 중요한 동반자로 이해하는 데 얼마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아울러 건축을 통해 풍부한 인문학적 상상력이 발휘되기를 소망해본다." (9쪽)

 

이것이다.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가. 우리가 건축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제대로 알고 있었다면 4대강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그런 토목공사가 강행되게 내버려두지 않았을텐데, 인공하천이 된 청계천 복원사업을 그냥 두지 않았을텐데...

 

건축은 전문가만이 하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우리는 잘 모르니 전문가들이 잘 알아서 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그냥 내버려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건축이 인문학이라면, 인문학은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요소이니 건축 역시 우리들이 살아가는데 꼭 알아야 할 학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냥 주어진 집에서, 건물에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활 공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 인문학적으로 건축을 판단할 수 있는 것, 또 인문학적으로 건축이 존재하게 해야 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책임이자 권리가 아닐까 한다.

 

적어도 이 책을 읽는 내 소감은 그렇다.

 

대학의 건축학과가 5년이 된 이유도 국제적인 표준을 맞추기 위해서이기도 하겠지만, 건축이라는 학문이 4년만으로는 제대로 배울 수 없다는 데 있지 않을까 한다.

 

건축 기술만을 배운다면 4년이면 충분하겠지만, 건축은 인문학적 종합능력이 필요한 학문이기에 인문학을 공부하고, 과학을 공부하고, 기술을 배우는 과정을 거쳐야 하므로, 다른 대학에 비해 1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하지 않았나 싶다.

 

그만큼 건축은 종합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종합예술이되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그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과 함께 만들어가는 유동적인 종합 행위예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건축은 건축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존재하고, 변해가기 때문인데... 이런 건축에 인문학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주로 건축과 자연, 건축과 사람, 건축과 아름다움, 건축과 실용성 등을 중심으로 한 책들을 읽었는데, 이 책은 이들을 종합하고 있다.

 

제목과 마찬가지로 인문의 집을 짓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여 첫 시작을 '인간을 위한 건축:융합으로 아우르는 종합 학문'으로 시작한다.

 

그 다음에 '건축에 반영된 미술사, 미술사에 반영된 건축'이 이어져 예술과 건축의 관련성을 살펴보고 있으며, '도시를 창조한 건축, 사회를 이해하는 척도'에서 건축에 반영된 사회상을 살피고 있다. 건축이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 장소가 되기에 건축에서 사회가 빠질 수 없고, 그 사회에서 원하는 양식을 채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이야기 하고 있다. 건축을 보면 사회를 알 수 있다는 얘기가 여기서 나온다.

 

'과학에 바탕을 둔 건축, 미래를 준비하는 첨단과학'에서는 기술과 건축의 관련성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주로 그 사회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재료로 건축하던 과거와는 달리 획기적인 기술과학의 발달로 인해 예전에 불가능하던 건축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앞으로 더 과학기술이 발달할텐데, 그에 걸맞게 건축도 진화해 갈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철학, 미학, 심리학적 질문으로 완성되는 건축'에서는 건축은 바로 우리 인간의 삶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란 말도 있듯이 우리는 보기 좋은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을 좋아한다. 건축도 마찬가지다. 건축이 단지 실용적이기만 하다면 어찌 인문의 집을 짓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건축에는 철학과 미학, 그리고 심리학이 종합적으로 담겨 있다는 말, 동의한다.

 

'문화 전달자로서의 건축, 건축의 상징을 녹여내는 영화'에서는 현대 예술의 총아라고 할 수 있는 영화에 나타난 건축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있으며, 건축이 전세계인을 불러모으는 역할도 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식으로 인문학 분야와 건축이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쉽게 잘 설명해주고 있다. 곳곳에 사진도 있고, 어려운 개념은 옆 날개에서 설명을 해주고 있기 때문에 나같은 초심자도 쉽게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건축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가 학교에서 공통기본교과라고 하여 배우는 것이 있듯이 이러한 건축에 대해서도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화민족, 문화민족 하는데, 건축 역시 문화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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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을 춤추게 하는 감동의 수업여행 : 영혼을 흔드는 스토리텔링 수업
권순현 지음 / 테크빌교육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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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을 춤추게 하는 감동의 수업여행"이다. 교실이 춤춘다는 비유적인 표현이 마음에 와 닿는다.

 

학교 그러면 근엄하고 딱딱한 도저히 융통성이라고는 없는, 어쩔 수 없이 다녀야 하는, 변화도 없이 늘 같은 일들이 반복되는 지루하고 단조로운 그러한 공간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 중에서도 교실은 네모들의 천국이다.

 

네모가 아닌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벽에 걸려 있는 시계 정도라고나 할까?

 

이렇게 딱딱한 천편일률적인 교실에서 무슨 창의성이 나오고, 무슨 재미와 흥미가 느껴지겠는가. 그냥 시간만 보내고, 네모들의 대표자인 교과서들은 고문도구처럼 학생들에게 느껴질 뿐이다.

 

교과서라는 고문도구를 들고 들어온 교사는 또 어떤가? 근엄 그 자체...규칙, 진도, 성적만으로 학생들을 이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이런 교실이 춤춘다? 춤추지 않고 그냥 잠만 자고 있는 교실을 깨워 들썩이게 한다. 어떻게?

 

그것이 바로 스토리텔링이다. 교실에 스토리텔링을 도입해서 잠든 교실을 깨우는 것이다. 단지 깨우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춤추게 한다. 활발하게 움직이게 한다.

 

비로소 아이들이 살아있는 수업이 되게 한다.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힘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이야기와 함께 살아온 아이들에게 다시 이야기를 만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스토리텔링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와 함께 했던 교수법이고, 이런 교수법이 단지 이론으로 정리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학창시절을 곰곰이 되새겨 보라. 어떤 수업이 기억에 남는가? 지식을 머리 속에 넣던 수업은 까마득히 사라져 버리고, 오직 학창시절의 기억은 재미있었던 이야기가 있는 수업이다.

 

좋아했던 선생님이 무슨 내용을 가르쳤다가 아니라 그 선생님이 해준 이야기가 선생님과 함께 기억에 남는 것이다.

 

우린 이미 그것을 경험했다. 단지 잊고 있었고, 이론으로 정립하지 않았을 뿐. 예전 선생님들도 몸으로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을 이제 공식적으로 수업에 들여오자고 하는 것이다. 교실에 이야기를 들여와 할용하자는 이론이 정립되고, 실현되고 있다.

 

그런 필요성과 사례들을 이 책에서 알려주고 있다. 다양한 공간, 다양한 수업에서 이야기가 어떻게 수업과 연계가 되고, 아이들에게 다가갔는지, 그런 수업이 어떻게 아이들을 활기차게 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 교사들은 이렇게 노력을 한다. 왜냐하면 교사의 생명은 수업이기 때문이다. 교사는 수업이 잘 되었을 때 가장 즐겁고, 수업이 잘 안 되었을 때 가장 절망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사들은 수업이 잘되게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한다.

 

그 노력의 일환이 바로 스토리텔링 수업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 책에 나와 있는 성공 사례들을 곧이곧대로 자신의 수업에 적용하는 교사는 없을 것이다.

 

교사들은 교실의 상황을 가장 잘 알기에 자신의 교실에 맞는 수업방식을 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에 나와 있는 많은 사례들 중에서 자신의 교실에서 실현이 될 것들을 선택하고, 또 자신의 교실 상황에 맞게 변용하여 적용할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엘리트에 속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나라 교사들 아닌가? 그러니 이런 책들이 꾸준히 나오는 것 아니겠는가.

 

이 책을 읽으며 교사들은 어떤 형식으로든 자신들의 교실이 춤추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교사들이 이렇게 노력을 한다는 사실을 믿고, 교실이 춤출 수 있는 환경을 만들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한 교실에서 수업 받는 학생이 20명 정도가 되게 학생 수를 줄여야 하고, 학교에서 온갖 실험 실습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시설 및 기자재를 구비할 수 있게 해야 하며, 교사들이 수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불필요한 일들을 요구하지 않는 근무 환경을 구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교실이 춤추는 시기가 더 당겨지고, 춤추는 교실에서 생동감있게 공부하는 아이들을 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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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을 춤추게 하는 감동의 수업여행 : 마음을 움직이는 참여수업
권순현 지음 / 테크빌교육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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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학생들의 참여수업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예전에 열린수업이니 협동학습이니 하는 것과 요즘에 유행하는 배움의 공동체, 또는 발도르프 교육, 프레네 교육 들을 총망라하여 수업에는 학생들이 참여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 주장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기억의 효율성

보고 들은 것의 50%  읽은 것의 10%  본 것의 30%  들은 것의 20%  말하고 행동한 것의 90% 말한 것의 70%   - 12쪽

 

또 학습 피라미드를 보면

 

24시간 후 평균 기억률

 

강의 5%  읽기 10%  시청각 체험 20%  시험 30%  그룹토의 50%  실행 70%  설명하기 90%  -13쪽

 

이 연구 결과들을 보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직접 참여했을 때 가장 잘 기억하고, 가장 오래 기억한다. 이점을 명심하고 우리나라 교육현장을 살펴보면 암담한 생각이 든다.

 

학생들의 참여보다는 교사의 일방적인 전달이 많고, 학생들이 직접 참여하여 실험 실습을 하기보다는 책을 통해 일방적으로 전달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서 학습의 효율성을 따지는 일은 무의미하다. 학습의 효율성을 따지기 전에 이미 학습에서 학생들은 멀어져 있고, 이것이 한 때 학교붕괴, 교실붕괴라는 말까지 만들어낼 정도였다.

 

지금도 인문계 고등학교 교실에 가보면 학습붕괴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의 풍경이 펼쳐진다고 한다.

 

학습에는 흥미가 없는데 자연스레 그냥 고등학교, 그것도 자신의 특기를 살릴 특성화고에 진학할 성적이 되지 않아 인문계로 올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이 수업 현장에서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고, 학교 책상을 자신의 침대로 여기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모습을 보게 될 테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는 수업을 한다면 학습에서 멀어진 아이들을 다시 학습으로 끌어올 수가 있을텐데, 그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참여수업이라는 것이다.

 

교사 중심에서 학생 중심으로 수업의 중심을 옮기고, 학생들이 스스로 질문을 하고 답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경험하게 하는 것. 그렇게 하게 위해 교사가 준비해야 한다는 것.

 

수많은 참여수업 사례들이 이 책에 나와 있다. 백화점 식으로 좋은 참여수업 방법들이 자신들의 성공담과 더불어 나와 있는데, 이들 중에 그 학교, 그 수업, 그리고 그 교사와 학생들에 맞게 응용하여 참여수업을 한다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법들이 제법 있다.

 

다양한 참여수업 방식들이 나와 있으니 수업 방식에 대해 고민하는 교사라면 참조할 수 있을 방법들이 많이 있다. 그게 아마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무언가 좀 아쉬운 게 있다.

 

논어에서도 첫 시작이 바로 배움이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몇 천 년 전 동양의 성인도 자신의 책을(물론 제자들이 엮은 것이지만) 배움으로 시작한다. 배움으로 시작한다는 얘기는 우리 인간은 본질적으로 배움을 추구한다는 얘기고, 배움이 없이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힘들다는 얘기다.

 

게다가 가르침으로 시작하지 않고 배움으로 시작한다는 얘기는 교육의 주체는 바로 학생이어야 한다는, 학생들이 스스로 참여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하여 예전에는 스승을 찾아 학생들이 여러 곳을 다니기도 했는데, 그만큼 예전에는 교육의 주체가 학생에게 있었다는 얘기다. 이런 학생들에게는 교사의 교수법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직 교사의 학문적 능력, 인품 등이 문제였을 뿐이다.

 

왜냐하면 이미 자신은 배우고자 하는 욕구로 꽉 차 있었기에 배우고자 하는 욕구를 불러일으켜야 하는 교수법이 필요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이게 아니다. 최근에 교육의 중심을 학생으로, 배움으로 옮기자는 논의가 있지만, 아직도 우리나라 교육에서 교육의 중심은 교사다.

 

이렇게 참여수업을 이야기라는 책이 나오는 것 역시 교육의 중심이 교사라는 얘기다. 교사가 학생들이 배움을 자신의 욕구로 만들게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중심에 놓고 책이 전개되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흥미, 적절한 보상, 여기에 성적 향상... 이 세 가지 요소가 갖춰지지 않으면 제대로 된 수업이 아니게 된다는 느낌을 받게 만들고 있다.

 

하여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평가가 바뀌지 않는 수업방법의 개선은 학생들에게 진정한 배움으로 가게 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렇게라고 학생들이 수업에 참여하게 하는 수업이 늘어난다면 점차적으로 평가도 바뀔테니, 이런 수업방법이 문제가 있기에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더 장려하고 강조하여 이런 수업방식이, 학생들이 참여하는, 수업의 주체가 교사가 아닌 학생들이 되게 하는 수업이 늘어나게 해야 한다. 그러면 이런 수업방법에 맞게 평가방식이 바뀔 것이고, 평가방식이 바뀌면 또 수업방식도 바뀔 것이고, 자연스레 우리 사회의 교육에 대한 관념도 바뀌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학력만을 중시하는, 공부 못하면 사람대접 못 받는 사회적 분위기가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이런 생각들이 들었는데... 심호택의 시가 생각났다. 적어도 이런 교육을 하는 부모가 사라지는 사회, 그리고 그런 교육이 잘못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

 

     똥 지 게

 

우리 어머니 나를 가르치며

잘못 가르친 것 한 가지

일꾼에게 궂은일 시켜놓고

봐라

공부 안 하면 어떻게 되나

저렇게 된다

똥지게 진다

 

심호택, 하늘밥도둑, 창작과비평사, 1996년 초판 7쇄. 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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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2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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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더 말할 것이 없다. 그냥 읽어보면 된다.

 

우리 그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소중한지.

 

작가가 우리 그림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림을 읽기 위해서 얼마나 공부를 했는지.

 

얼마나 자료를 찾아 다녔는지.

 

얼마나 우리 그림의 아름다움에 감탄했는지.

 

그냥 읽어보기만 하면 그 마음이 오롯이 우리에게 전해져 온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오주석이 살아있는 줄 알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우리나라 옛그림에 대해서 이야기해주고 있는 줄 알았다.

 

우리 그름이 얼마나 아룸다운지를 이야기해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 그림을 좀더 친숙하게 여기게 되고, 그림을 사랑해서 문화 정신이 높아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 책이 그의 유고작이다. 이런 우리 그림을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이 옛 그림 속으로 가고 말았다.

 

아쉬운 마음이 든다. 그래서 이 책이 더 소중하게 다가온다. 더 이상은 그의 설명을 들을 수가 없으니 말이다.

 

이번에 다룬 작품은 6편이다.

 

김홍도의 송하맹호도, 김홍도의 마상청앵도, 정선의 금강전도, 정약용의 매화쌍조도, 민영익의 노근묵란도, 작가를 알 수 없는 이채 초상

 

그림의 수준으로 따지면 정약용의 그림을 제외하고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김홍도의 호랑이 그림을 보고 호랑이를 이토록 자세하고 표현하고 있음에 놀라고, 호랑이의 위엄이 그림에서 느껴져 놀라고...

 

정선의 그림에서는 주역의 원리를 발견하고, 그를 설명하는 작가의 노력에 놀라고, 왜 금강산 금강산 하는지 그 그림을 보면서 놀라고...

 

민영익의 노근묵란도를 보면서 설명 없이 보았을 때 뭐야, 뭔 그림이 이리 난삽해 했다가, 설명을 읽으면서 나라 잃은 슬픔이 이렇게 그림으로 표현되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림이 단지 자신의 표현력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신을 드러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고...

 

정약용의 그림에서는 전문적인 화가는 아니지만 작가가 왜 이 그림을 넣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이야기를 읽게 되어 그림이 옛사람들에게는 기예가 아니라 생활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이채의 초상화에서는 정말이지 놀라울 정도의 표현력에 감탄하고, 지금 사진보다도 더 섬세한 표현, 단지 외양이 아니라 정신의 세계까지도 초상 그림에 드러나게 하는 그런 화가 정신, 선비 정신에 놀랄 따름이었다.

 

이런 설명을 더 이상 들을 수가 없게 되었다니... 안타깝다.

 

그러나 우리 옛 그림 읽기에 오주석이 선구자의 자리에 섰으니, 그의 자리를 이어받는 후학들이 많음도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이 오주석의 자리에서 그와 함께 우리 그림들 읽기를 하고 있고, 우리에게 알려주고도 있으니... 그 점에서 위안을 삼을 수도 있겠지.

 

옛그림에 대한 좋은 읽기였다. 머리에도 마음에도 콕콕 박히는 그런 읽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조금 우리 그림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오만한 생각도 드는, 그런 읽기. 그런 읽기를 알려준 책. 

 

덧글

 

소소한 오타. 그래도 바로잡아야 할. 163쪽.

 

지금 다산의 동암 바로 옆에 있는 천일각 정자 자리는 원래 빈터였는데, 선생은 이곳에서 강진만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형 약종을 그리워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라고 되어 있는데...

 

정약용이 바다를 보며 그리워한 형은 흑산도에 유배되어 있던 정약전일 것이다. 그러니 형 약종을 -> 형 약전을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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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미원주 2015-06-23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얼마전 1권을 읽고 이제 2권을 집어들어 보고 있어요. 감탄을 하면서요. 독후감 잘 봤어요

kinye91 2015-06-23 11:41   좋아요 0 | URL
저도 오주석 선생의 그림 읽기에 정말 감탄하면서 읽었습니다. 오주석 선생 덕분에 우리 그림에 대해서 관심이 놓아졌다고나 할까요.
 

중국에서 시성이라고 불리는 두보의 시 중 한 구절이 머리 속에서 맴돌았다.

 

'춘망'이라는 시의 첫구절.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 나라는 망했어도 산하는 존재한다 정도로 해석되는 말. 국가의 흥망성쇠와는 상관없이 자연은 그대로 존재한다는 말로 이해하면 될 듯하고, 이 시와 더불어 야은 길재의 시조도 연결이 되는데...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 /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여기서 두 번째 중장의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는 구절이 두보의 국파산하재와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순간적인 삶을 살고, 인간이 만든 나라도 영원하지 않고 생명이 있는데, 자연은 그와 반대로 영원히 존재한다는 말일텐데...

 

인천 아시안게임과 또 다른 뉴스 방송을 보다가 너무도 놀란 것이 강인데, 그 강이 직선으로 아주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는 것이었다.

 

강이 직선이라?

 

강은 곡선이어야 하지 않나? 이 때 곡선이 강이 유연하게 휘게 정비하라는 말이 아니라, 강 가의 곳곳이 드나듦이 있어서 온갖 생명체들이 그곳에 머물 수 있어야 하는데...그렇지 못했다는 말이다.

 

이렇게 정비된 강에서 어떤 생명체가 살 수 있을까? 생명체가 살지 못하는 강이 강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 4대강은 녹조로 녹조라떼라는 별명까지 얻었다는데... 나라는 망해도 산하는 영원해야 하는데, 우리는 거꾸로 나라는 멀쩡한데 산하를 망하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가만히 내버려 두면 더 좋을 산하를 인위적인 힘으로 변형시키려 해서 결국 산하를 망가뜨리고 있으니, 산천도 망하고 인걸도 없는 그런 상태로 변하지 않았나 싶다.

 

천혜의 자연이라는, 금수강산이라는 우리나라를 위에서 내려다보면 강은 인공적인 냄새가 너무 풀풀 나고, 푸른 산들은 하나둘 깎여나가 이제는 고층빌딩들이 숲을 대신하고 있으며, 자연스레 만들어졌던 길들이 온갖 인공적인 도로로 덮여버린 세상.

 

산하를 이렇게 파괴하고도 어떻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지...

 

아름다운 옛시절이라고 하던데...비록 가난했지만 자연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던 시대가 있었는데, 경제적으로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다고 하지만, 그 댓가가 자연 파괴라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지...

 

심호택의 "하늘밥도둑"이라는 시를 읽고 싶어졌다. 반듯반듯한, 녹색으로 뒤덮힌 강물의 영상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아름다운 옛날을 노래한...그래서 더욱 현재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그 시집을...

 

두보나 길재의 시가 앞뒤가 바뀐 지금... 다시 바로잡아야지. 순간이 영원을 뒤집으면 안되지. 영원에 맞춰 순간을 살아가야지. 

 

그의 시집에 나온 두 시... 마음이 짠하다.

 

그만큼 행복한 날이

 

그만큼 행복한 날이

다시는 없으니

싸리빗자루 둘러메고

살금살금 잠자리 쫓다가

얼굴이 발갛게 익어 들어오던 날

여기저기 찾아보아도

먹을 것 없던 날

 

심호택. 하늘밥도둑. 창작과비평사, 1996년 초판 7쇄. 8쪽

 

하늘밥도둑

 

망나니가 아닐 수야 없지

날개까지 돋친 놈이

멀쩡한 놈이

공연히 남의 집 곡식줄기나 분지르고 다니니

이름도 어디서 순 건달 이름이다만

괜찮다 요샛날은

밥도둑쯤은 별것도 아니란다

우리들 한 뜨락의 작은 벗이었으니

땅강아지, 만나면 예처럼 불러주련만

너는 도대체 어디 있는 거냐?

살아보자고, 우리들 타고난 대로

살아갈 희망은 있다고

그 막막한 아침 모래밭 네가 헤쳐갔듯이

나 또한 긴 한세월을 건너왔다만

너는 왜 아무데도 보이지 않는 거냐?

하늘밥도둑아 얼굴 좀 보자

세상에 벼라별 도적놈 각종으로 생겨나서

너는 이제 이름도 꺼내지 못하리

나와보면 안단다

부끄러워 말고 나오너라

 

심호택. 하늘밥도둑. 창작과비평사, 1996년 초판 7쇄. 1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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