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파 공동체 - 제32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민음의 시 200
손미 / 민음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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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있는 시집이다. 손미라는 시인의 이름을 처음 들었음에도 망설이지 않고 이 시집을 사야겠다고 마음 먹은 이유이기도 하다.

 

김수영이라는 시인은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고, 그의 이름을 건 문학상을 탄 시집이라면 적어도 김수영의 시세계와 통하는 것이 있을 거라는 추측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건 추측에 불과하다. 만약 이 시집이 김수영의 시세계와 통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김수영 초기시에나 해당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집의 첫시부터 걸리기 시작하여, 시집을 읽어가는 동안 내내 미로 속을 헤맨듯한 느낌이다. 아니, 미로 속을 헤맸다. 시의 의미를 해석하기는커녕, 시의 맛조차 느끼지 못하고, 뭐지 뭐지 하면서 그냥 미로 속을 따라 걸은 느낌.

 

다시 펼쳐든다. 그래 몇 번을 읽으면 뭔가 감이 오지 않을까? 그 중 몇 편의 시를 몇 번씩 읽는다. 그래도 감이 오지 않는다. 시집의 맨 뒤에 있는 해설을 읽는다.

 

야, 이거 참.

이 시집의 해설은 거의 우주론 설명이다. 왜 이리 거창해? 왜 이리 힘들어. 이렇게 우주론까지 동원해서 시를 이해해야 한다면, 그 시의 생명이 얼마나 갈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그건 아닐 것이다. 시란 마음을 울리는 무엇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비록 해석은 되지 않고, 이해는 되지 않아도 마음 속에 무언가 여운을 남겨주어 계속 생각하게 해야 하지 않을까?

 

이 시집이 김수영 문학상을 탄 데에는 무슨 이유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김수영이 우리나라 시에서 참여시의 범위를 확장시켰다면, 이 시집도 시세계에서 무언가 한 자리는 차지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다시, 모든 것을 떠나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이왕 시집을 들었으니, 시에서 무언가를 찾는다면 더 좋지 않을까?

 

오독이 시작된다. 세상의 모든 말은 미끄러질 수밖에 없으니, 담화는 오독을 포함하고 있다고 자위하면서 내 나름의 해석을 만들어 간다.

 

시집의 처음, 첫시가 나오기 전, 자서(自序)에 이렇게 쓰여 있다.

 

우리 언젠가 만나 적 있지?

이 무덤 속에서

 

뭔 얘기? 우리가 누군가? 시인과 독자, 아니면 시인과 시인이 알고 있는 누구? 이 의문은 곧 몇 편의 시를 읽으면 풀린다.

 

'후박나무 토끼'라는 시다. 그 시의 3연에 '우리, 언젠가 만난 적 있지? / 이 무덤 속에서?'라고 되어 있다. 자서와는 문장부호 - 쉼표(,)와 물음표(?) - 차이뿐이다.

 

그럼 우리는 후박나무 토끼일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우린 다른 존재, 즉 나와 관계있는 다른 존재라고 보면 된다. 그렇다면 모든 존재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말이 된다.

 

세상에 연관되지 않은 것이 없듯이 우리는 서로서로 연관되어 있고, 지금 이 자리에서 만났다는 얘기는 전생에 인연이 있었다는 얘기로 이해가 된다. 그것을 우리가 알고 있든, 알고 있지 못하든.

 

그렇게 연결된 세계에서 우리는 개인으로 살아간다. 개인으로 살아가면서도 불쑥불쑥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것들을 찾는다.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려 한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은 현재에 그치지 않고, 과거로, 미래로 나아가면, 공간은 여기에서 저기로,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로 뻗어나간다.

 

그렇게 뻗어나가면서도 자신은 자신이 인식할 수 있는 곳에 있으려 한다. 그것이 바로 '지금-여기'인데, '지금-여기'는 또다른 시간들과 장소들이 중첩되어 있다.

 

그러한 중첩이 '양파공동체'로 나타난다. 벗겨도 벗겨도 양파는 자신의 형태를 유지한 존재한다. 다만 크기가 줄뿐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지켜낸다. 마치 수많은 공동체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다른 공동체와 관계맺듯이.

 

이 양파공동체는 러시아 인형으로 대표되는 '마트로시카'와 관련된다. 독립된 개체들이 또다른 독립된 개체들 속에 들어있는. 양파가 꼭 이런 모습이다. 우리의 삶도 이런 모습이다. 우리는 모두 개체이고 독립되어 있지만, 또다른 독립된 개체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그 관계는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미로와 같다.

 

다른 세계를 꿈꾸지만, '조금만 참으면 도착할 수 있다'고 하지만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내 집'이라고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도달하는 순간, 그 곳은 없어진다. 즉, 우리는 자신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곳에 도달하는 순간 자신이 없어지고 만다.

 

그렇다면 우리가 중심을 두어야 할 곳은 바로 '지금-여기'이다. 이 '지금-여기'가 바로 내가 돌아가야 할 고향이다. 

 

하여 우리는 양파공동체처럼 서로가 서로를 감싸고 있으며, 서로에게 투명한 존재로 지내고 싶지만, 얇은 막을 형성하고 있으며, 서로가 얽혀 미로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 미로를 헤쳐나갈 방법은 서로가 서로에게 말을 하는 것. '지금-여기'의 존재들이 서로를 인정하고, 대등한 대상으로 여기고 함께 대화를 하는 것. '양파에 입을 그리'고 싶다고 한 것은 이러한 대화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입을 다문 채 이 자리에서 투명하게 변해가는 것은 올바른가'라는 말은 그래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결국 소통의 문제다. 서로가 서로를 대등한 존재로 인정하고(단지 크기의 차이일 뿐이다), 서로가 서로를 감추어 미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대화를 통해서 길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이야기로 이 시집을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조금 비약을 한다면, 우리 언젠가 만난 적 있지라는 질문은, 우리가 우리를 대등한 존재로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여기고 함께 산 적이 있다는 얘기로 해석을 한다.

 

'무덤 속에서'가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함께 살자는 얘기로 해석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해석을 하면 김수영이 참여시의 지평을 더 넓혀놓았듯이, 김수영 문학상을 받은 이 시집도 김수영의 시세계를 더 넓혀놓았다고 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양파공동체

 

  그러니 이제 열쇠를 다오. 조금만 견디면 그곳에 도착한다. 마중 나오는 싹을 얇게 저며 얼굴에 쌓고, 그 아래 열쇠를 숨겨 두길 바란다.

  부화하는 열쇠에게 비밀을 말하는 건 올바른가?

 

  이제 들여보내 다오. 나는 쪼개지고 부서지고 얇아지는 양파를 쥐고 기도햇다. 도착하면 뒷문을 열어야지.  뒷문을 열면 비탈진 숲, 숲을 지나면 시냇물, 굴어떨어진 영파는 첨벙첨벙 건너갈 것이다. 그러면 나는 사라질 수 있겠다.

 

  나는 때때로 양파에 입을 그린 뒤 얼싸안고 울고 싶다. 흰 방들이 꽉꽉 차 있는 양파를.

 

  문 열면 무수한 미로들.

  오랫동안 문 앞에 앉아 양파가 익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때때로 쪼개고 열어 흰 방에 내리는 조용한 비를 지켜보았다. 내 비밀을 이 속에 감추는 건 올바른가. 꽉꽉 찬 보따리를 양손에 쥐고

 

  조금만 참으면 도착할 수 있다.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내 집.

 

  작아지는 양파를 발로 차며 속으로, 속으로만 가는 것은 올바른가. 입을 다문 채 이 자리에서 투명하게 변해 가는 것은 올바른가.

 

손미. 양파공동체. 민음사. 2013년. 16-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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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지 않겠다 창비청소년문학 15
공선옥 지음 / 창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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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의 소설집이다.

 

6편의 단편 소설이 묶여 있는데, 그 중 '라면은 멋있다'와 '힘센 봉숭아' 두 편은 연작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과 사건의 전개가 연결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머지 네 편은 각자 독립된 단편들이라고 보면 된다.

 

그럼에도 소설집이라고 하면, 그 소설들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데... 이 소설집의 공통점은 주인공이 모두 청소년들이라는 점이다.

 

작가는 말한다.

 

청소년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나가는 글을 쓰면서 나는 내가 쓰는 것이 청소년소설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냥 소설을 썼다. 단지 그 소설의 화자들 내지는 주인공들이 청소년 시기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뿐, 여기 묶인 이 단편들이 청소년소설인지 안니지 나는 잘 모르겠다.(179쪽. 작가의 말에서)

 

청소년들. 한참 꿈이 많은 시절을 보내는 이들이다. 그러나 이런 청소년들이 행복한 삶을 살까? 어떤 이는 청소년들이 공부에 치여 자신을 잃어가는 모습을 소설로 쓰고, 어떤 이는 청소년들의 일탈을 소설로 그려내고 있지만, 공선옥은 이들 청소년 중에서도 가난을 짐으로 지고 있는 청소년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몇몇을 제외하고 우리는 가난을 자신의 업처럼 지고 살아가고 있는데... 그럼에도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가 가난하지만 가난에 굴복하지는 않는다. 가난에 허우적대기보다는 가난을 바로보면서 가난과 맞서려는 인물들이다.

 

그래서 절망의 나락에서도 '나는 죽지 않겠다'라고 삶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기도 하며, '일가'에서는 남의 외로움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라면은 멋있다'와 '힘센 봉숭아'에서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려는 인물이 등장하고, 이러한 가난 속에서도 꽃을 피우면서 가난 속에서 자신은 황폐해지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이는 인물이 등장한다.

 

'울 엄마 딸'에서는 엄마와 비슷한 길을 걸어가는 딸의 모습을 통해서 그 과정에서 모녀의 사랑을 확인하고, 청소년 임신이라는 어두운 현실을 어둡게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도 삶에의 의지를 일으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보리밭의 여우'를 통해서는 시대의 어둠을 은연중에 드러내나 결코 그 어둠 속에 잠기지 않는다.

 

하여 이 소설집에 나오는 배경이나 인물들은 우리가 흔히 만날 수 있는 인물이나 환경이 되는데, 소설을 읽으면서 위안을 받게 되는 점은 이들이 어둠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작가는 이렇게도 말하고 있다.

 

모든 어른들은 청소년 시기의 감성들을 야금야금 빼먹으며 늙어가는 것만 같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그 감성들의 최대치를 기억해내는특별한 즐거움을 누렸다. 그러하니, 이 글을 읽을 청소년들도 바로 지금 나중에 빼먹고 살 감성들을 최대한 비축하기를 바란다. (180쪽. 작가의 말에서)

 

청소년들이 살아갈 현실은 생각만큼 밝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칙칙함 속에 자신을 빠뜨리고 허우적대는 모습은 청소년들이 지녀서는 안된다.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듯이, 어두운 현실에서도 청소년들은 밝음을 추구한다.

 

아니, 청소년이라는 존재 자체가 밝음일 수 있다. 그 밝음으로 청소년들은 어둠 속에 가라앉아버리려는 어른들에게 살아갈 힘을 주기도 한다. 또한 그 밝음으로 청소년들은 어둠 속에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만들어가기도 한다.

 

그런 모습을 이 소설집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작가의 말대로 청소년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좋다. 청소년들이 읽으면서 나와 비슷하네 해도 좋은 소설이고, 이미 청소년 시기를 거쳐온 어른들이 읽으며 그 때 그랬었지 해도 좋으니까. 

 

현실의 밝은 면만이 아니라 현실의 어두운 면을 고루 보여주고 있으며, 청소년들이라고 해서 늘 밝음 쪽에만 서야 한다고 표현하지도 않는다. 그냥 청소년들이 겪을 수 있는 일들을 담담히 형상화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형상화 속에서 보여주는 낙천성. 아무리 현실이 힘들고 지치게 해도 사람이 지니고 있는 희망, 즐거움. 그것이 바로 절망에 빠져들지 않고, 절망을 듣고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요소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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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버지의 친척 사계절 1318 문고 42
남상순 지음 / 사계절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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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제목이다.

 

"나는 아버지의 친척"이라니. 아버지와 나는 친척이 아니라, 가족이 아니던가. 그것도 촌수를 따지면 1촌이다. 이 1촌이라는 개념도 편의상 나누는 것이지 사실, 부모와 자식간에는 촌수를 따질 수도 없다.

 

이런 관계가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인데, 아버지의 친척이라고 하면 뭔가 사연이 있는 것이다. 이런 사연이 소설을 읽게 만들기도 한다.

 

이 소설은 "가족"을 다루고 있다. 진정한 가족이란 무엇일까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하는 소설이다.

 

부모가 이혼하고 엄마와 함께 살던 미용은 엄마가 암으로 죽자 외가에서 살게 된다. 그러다 평소에는 얼굴도 보지 못하던 아버지 집으로 가 살게 되는데... 이미 아버지에게는 새엄마와 또 입양한 자식이 있다. 그것도 자신과 동갑인 남자(준석)가.

 

미용은 자신을 딸이 아니라 친척이라고 소개하는 아버지에 대해 의아한 감정을 느끼게 되고, 아버지나 새엄마가 낳지 않은 자식인 준석이 아들이라고 하는 것에 반발을 하게 된다. 준석이 그 사실을 모를 거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준석도 그걸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둘은 조금 더 가까워지는데...

 

생물학적인 가족과 사회적인 가족이 있다고 판단할 수 있는데... 혈연으로 뭉친 가족이 가족으로서의 구실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단지 친권자란 이유로 아동을 학대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런 경우에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담을 쌓아 아이들이 제대로 된 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또 함께 있으되, 서로 다른 삶을 살면서, 어떻게 하면 가정에서 벗어날까만을 고민하게 하는 가족. 이런 가족은 차라리 없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데...

 

그럼에도 생물학적인 가족은 핏줄이라는 이름으로, 천륜이라는 이름으로 굳게 맺어져 있다. 아직까지는.

 

이런 가족 개념에 균열이 생기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회학적 가족인데... 핏줄이 아니더라도 함께 살면서 가족을 이루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함께 살면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서로를 보듬어주는 관계를 맺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핏줄로는 연결이 되어 있지 않지만, 삶을 통해서 강한 유대관계를 보여주게 된다.

 

가족으로서 자신의 삶뿐만이 아니라, 함께 사는 이들의 감정도 살피고 서로의 삶이 좀더 윤택하게 될 수 있도록 서로 돕는 관계, 이런 가족의 재구성, 그것이 바로 사회학적 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사회학적 가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본다. 진정 가족이란 무엇인가? 꼭 혈연으로 묶여 있어야 하나? 그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혈연이 아니더라도 훌륭한 가족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의 친딸인 미용이는 미용이대로, 입양 아들인 준석은 준석대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새엄마는 새엄마대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서로의 감정을 보듬어 주려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그들은 가족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이렇듯 이 소설은 생물학적인 가족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급변하는 현대 사회, 우리는 어떤 가족을 원할 것인가?

 

단지 핏줄로 연결되어 있는 가족, 아니면 함께 삶을 이루어나가는 가족?

 

진정한 가족이란 어떤 것인지 이 소설은 고민해보라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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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엄마 납치사건 미래인 청소년 걸작선 9
비키 그랜트 지음, 이도영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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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설을 고를지 고민이 많이 된다. 잘못 골랐다가 재미라도 없으면 참 난감하다. 그래서 제목을 보고, 뒷면에 실린 책에 대한 소개글을 보게 된다. 그것도 아니면 작가가 이미 알고 있던 사람이던가.

 

이 책을 선정한 이유는 단순하다. 오로지 제목. 

 

"불량엄마 납치사건" 무언가 제목에서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는가.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제목만으로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 청소년들에게 추천해줄 수 있을지 판단해보려는 욕구가 작동하게 만든 제목이다.

 

이 제목이 흥리로운 것도 한 가지 이유이겠지만, 사실은 남자 아이를 주인공으로 하여 가족간의 문제를 다룬 소설이 뭐 없을까 하다가 고른 작품이기도 하다.

 

여자 아이가 주인공인 소설은 "딸들이 자라서 엄마가 된다"가 있으니, 딸과 엄마의 갈등을 다룬 소설은 됐고, 이제는 아들과 엄마의 갈등을 다룬 소설을 읽으면 되겠다 싶어서, 남자 청소년들에게 추천해줄 수 있을만한 책인가 싶어서 고르게 되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다.

 

그런데... 읽다보니, 이건 내가 고른 이유하고는 좀 거리가 먼 소설이다. 아들과 엄마의 갈등을 중심에 놓고 다룬 소설이 아니다. 오히려 추리력을 필요로 하는 소설이다. 일종의 추리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아들과 엄마의 갈등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것은 이 소설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법에 관한 내용이 많다. 소설의 각 제목들이 모두 법률 용어다. 예를 들면, 자기부죄거부특권, 도청, 비공개 심리, 물적 증거, 변호인-의뢰인 특권, 피후견인, 자백, 고소 등등 법률 용어가 나오고, 그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고, 소설의 내용이 시작된다.

 

그래서 소설을 읽어가면서 자연스레 법률 용어를 익히게 된다. 멀게만 느껴지는 법이 우리 실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그리고 결코 어렵지 않음을 이 소설을 통해 깨닫게 된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법률 소설인 것은 아니다. 어느 날 사라진 엄마를 찾는 주인공(시릴)의 모습을 통해서 읽는 내내 주인공과 함께 엄마가 어디에 있는지, 누가 납치했는지, 왜 납치했는지 등에 대해서 고민을 할 수 있다.

 

법과 추리를 함께 버무리고, 여기에 청소년들의 심리를 첨가하여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번역된 책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지만, 길지 않고 짧은 문체로 읽기에도 편하다.

 

각 장들도 길지 않아서, 읽으면서 지루해할 틈이 없다. 또한 주인공인 '시릴'을 살펴보면서 그의 모습에 웃음을 머금기도 하게 된다.

 

어느 날 사라진 엄마를 찾아가는 시릴. 그와 함께 도대체 어떤 일이 왜 일어났는지, 어떻게 해결되는지를 찾아가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왜 불량엄마라고 했는지, 그 엄마가 겪은 일들이 나오지는 않지만, 우리는 소설을 읽으면서 엄마가 젊은시절에 어떤 일을 겪었는지, 그 일을 회피하지 않고 아이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아들의 입장에서 엄마는 불량엄마지만, 그럼에도 자기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엄마, 그 엄마를 찾기 위한 아들 '시릴'의 추리... 그리고 법률적 의미로 인해 밝혀지는 사건의 전모... 

 

다만, 법률이라고 했지만, 그 법률은 이 소설을 쓴 저자가 살고 있는 캐나다의 법률 얘기니, 우리나라와는 조금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고...

 

주인공 시릴의 엄마인 애니의 삶은 우리네 정서와는 좀 맞지 않는 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이 소설을 읽는데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캐나다라는 나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읽을테니 말이다.

 

오히려 우리나라와 다른 상황을 통해서 우리의 현상황을, 또는 우리가 겪을 수 있는 상황을 간접체험하는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어떤 삶이 바람직한지 소설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고민하게 될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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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 (반양장) 사계절 1318 문고 2
로버트 뉴턴 펙 지음, 김옥수 옮김 / 사계절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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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성장소설이다. 청소년소설이라고 하는데... 청소년이 어른으로 자라나는 과정을 담고 있기에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모든 청소년 소설은 성장소설일 수 있겠다. 청소년이 주인공이 되는 소설은 청소년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가는가를 작품 전개를 통해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성장소설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이유는 저자의 자전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소설임에도 읽다보면 이것이 허구를 바탕으로 한 소설인지, 사실을 바탕으로 한 회고록인지 헷갈리기 때문이다. 책의 소개에도 저자의 경험이 녹아들어 있다고 하기도 하고.

 

하지만 그럼에도 소설이란 이름을 달고 나왔으면 허구로 보아야 한다. 역사소설을 역사로 인정하지 않듯이.

 

이 소설은 어른이 된 저자가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만, 읽어가면서 후일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먹어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내가 그렇게 지냈었지 하는...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고, 감동적이었는데... 그런데... 아이들이 이 소설을 좋아할까? 아니, 아이들에게 이 소설이 읽힐 수 있을까 하는데는 의문이 들었다.

 

청소년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청소년들이 읽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는데... 아이들이 이 소설을 읽으며 감정이입을 하기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지금 아이들의 삶과 이 소설은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농장에서 어렸을 때부터 한 명의 노동력으로 인정받았으며, 자신의 일을 해야만 하는 주인공과 어린시절부터 청년시절까지 온전한 노동력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오로지 해야할 일이란 공부밖에 없다는 식의 생활을 해온 요즘 아이들의 삶은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소설은 나와는 다른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현실 속에서 주인공이 살아가는 모습에 관심을 가지고 읽는다면 나름 재미도 있고 감동도 있을테니...

 

요즘 청소년들이 이 소설을 읽을 때는 우선 소설 속의 상황을 파악하고, 그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지켜보면 좋을 듯하다.

 

제목이 읽지 않으면 이해가 가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

 

이 제목과 연결지으면 죽음과 삶이 드러나게 된다.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은 바로 아버지가 죽은 날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죽을 때, 다른 존재는 산다는 삶의 경험.

 

주인공이 키운 핑키라는 돼지를 통해서 죽음은 곧 삶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해준다.

 

주인공은 핑키의 죽음을 통해서 어른에 한 발짝 다가섰고, 곧이어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어른이 된다.

 

겨우 열세 살에.

 

열세 살. 한 창 어리광부릴 나이라고 생각하는데, 두 죽음을 통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삶과 죽음이 그렇게 공존하고 있음을 알게 되는 주인공. 결국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잃어간다는 것, 잃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

 

그 잃음 위에서 얻음을 만들어가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마음에 와닿았던 구절이 있다. 죽음을 예감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말.

 

"봄이 오면 너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야. 어른이라구. 열세 살짜리 어른. 어른이 되기에 충분한 나이지. 이 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네가 책임지고 처리해야 해. 로버트, 너말고는 책임질 사람이 없어. 바로 너 말고는." (149쪽)

 

아버지의 장례식에 온 이웃인 태너 아저씨 부부와 나눈 말.

 

"이렇게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태너 아저씨."

"로버트, 내 이름은 벤저민 프랭클린 태너야. 이웃들은 모두 나를 벤이라 부르지. 친한 친구끼리는 서로 이름을 부르며 지내는 게 좋다고 생각하네."

"그리고 이제부턴 나를 베스라고 불러. 로버트." (177쪽)

 

열두 살에 겪은 일들을 통하여 열세 살에 어른이 된 아이의 이야기. 그런 성장을 담은 소설. 도대체 아이란 무엇일까?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나 고민하는 어른들이 읽으면 더 좋은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세상은 자기와는 상관없다고 여기고 있는 청소년들이 읽어도 좋을 소설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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