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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파 공동체 - 제32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ㅣ 민음의 시 200
손미 / 민음사 / 2013년 12월
평점 :
"제32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있는 시집이다. 손미라는 시인의 이름을 처음 들었음에도 망설이지 않고 이 시집을 사야겠다고 마음 먹은 이유이기도 하다.
김수영이라는 시인은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고, 그의 이름을 건 문학상을 탄 시집이라면 적어도 김수영의 시세계와 통하는 것이 있을 거라는 추측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건 추측에 불과하다. 만약 이 시집이 김수영의 시세계와 통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김수영 초기시에나 해당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집의 첫시부터 걸리기 시작하여, 시집을 읽어가는 동안 내내 미로 속을 헤맨듯한 느낌이다. 아니, 미로 속을 헤맸다. 시의 의미를 해석하기는커녕, 시의 맛조차 느끼지 못하고, 뭐지 뭐지 하면서 그냥 미로 속을 따라 걸은 느낌.
다시 펼쳐든다. 그래 몇 번을 읽으면 뭔가 감이 오지 않을까? 그 중 몇 편의 시를 몇 번씩 읽는다. 그래도 감이 오지 않는다. 시집의 맨 뒤에 있는 해설을 읽는다.
야, 이거 참.
이 시집의 해설은 거의 우주론 설명이다. 왜 이리 거창해? 왜 이리 힘들어. 이렇게 우주론까지 동원해서 시를 이해해야 한다면, 그 시의 생명이 얼마나 갈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그건 아닐 것이다. 시란 마음을 울리는 무엇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비록 해석은 되지 않고, 이해는 되지 않아도 마음 속에 무언가 여운을 남겨주어 계속 생각하게 해야 하지 않을까?
이 시집이 김수영 문학상을 탄 데에는 무슨 이유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김수영이 우리나라 시에서 참여시의 범위를 확장시켰다면, 이 시집도 시세계에서 무언가 한 자리는 차지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다시, 모든 것을 떠나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이왕 시집을 들었으니, 시에서 무언가를 찾는다면 더 좋지 않을까?
오독이 시작된다. 세상의 모든 말은 미끄러질 수밖에 없으니, 담화는 오독을 포함하고 있다고 자위하면서 내 나름의 해석을 만들어 간다.
시집의 처음, 첫시가 나오기 전, 자서(自序)에 이렇게 쓰여 있다.
뭔 얘기? 우리가 누군가? 시인과 독자, 아니면 시인과 시인이 알고 있는 누구? 이 의문은 곧 몇 편의 시를 읽으면 풀린다.
'후박나무 토끼'라는 시다. 그 시의 3연에 '우리, 언젠가 만난 적 있지? / 이 무덤 속에서?'라고 되어 있다. 자서와는 문장부호 - 쉼표(,)와 물음표(?) - 차이뿐이다.
그럼 우리는 후박나무 토끼일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우린 다른 존재, 즉 나와 관계있는 다른 존재라고 보면 된다. 그렇다면 모든 존재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말이 된다.
세상에 연관되지 않은 것이 없듯이 우리는 서로서로 연관되어 있고, 지금 이 자리에서 만났다는 얘기는 전생에 인연이 있었다는 얘기로 이해가 된다. 그것을 우리가 알고 있든, 알고 있지 못하든.
그렇게 연결된 세계에서 우리는 개인으로 살아간다. 개인으로 살아가면서도 불쑥불쑥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것들을 찾는다.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려 한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은 현재에 그치지 않고, 과거로, 미래로 나아가면, 공간은 여기에서 저기로,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로 뻗어나간다.
그렇게 뻗어나가면서도 자신은 자신이 인식할 수 있는 곳에 있으려 한다. 그것이 바로 '지금-여기'인데, '지금-여기'는 또다른 시간들과 장소들이 중첩되어 있다.
그러한 중첩이 '양파공동체'로 나타난다. 벗겨도 벗겨도 양파는 자신의 형태를 유지한 존재한다. 다만 크기가 줄뿐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지켜낸다. 마치 수많은 공동체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다른 공동체와 관계맺듯이.
이 양파공동체는 러시아 인형으로 대표되는 '마트로시카'와 관련된다. 독립된 개체들이 또다른 독립된 개체들 속에 들어있는. 양파가 꼭 이런 모습이다. 우리의 삶도 이런 모습이다. 우리는 모두 개체이고 독립되어 있지만, 또다른 독립된 개체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그 관계는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미로와 같다.
다른 세계를 꿈꾸지만, '조금만 참으면 도착할 수 있다'고 하지만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내 집'이라고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도달하는 순간, 그 곳은 없어진다. 즉, 우리는 자신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곳에 도달하는 순간 자신이 없어지고 만다.
그렇다면 우리가 중심을 두어야 할 곳은 바로 '지금-여기'이다. 이 '지금-여기'가 바로 내가 돌아가야 할 고향이다.
하여 우리는 양파공동체처럼 서로가 서로를 감싸고 있으며, 서로에게 투명한 존재로 지내고 싶지만, 얇은 막을 형성하고 있으며, 서로가 얽혀 미로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 미로를 헤쳐나갈 방법은 서로가 서로에게 말을 하는 것. '지금-여기'의 존재들이 서로를 인정하고, 대등한 대상으로 여기고 함께 대화를 하는 것. '양파에 입을 그리'고 싶다고 한 것은 이러한 대화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입을 다문 채 이 자리에서 투명하게 변해가는 것은 올바른가'라는 말은 그래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결국 소통의 문제다. 서로가 서로를 대등한 존재로 인정하고(단지 크기의 차이일 뿐이다), 서로가 서로를 감추어 미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대화를 통해서 길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이야기로 이 시집을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조금 비약을 한다면, 우리 언젠가 만난 적 있지라는 질문은, 우리가 우리를 대등한 존재로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여기고 함께 산 적이 있다는 얘기로 해석을 한다.
'무덤 속에서'가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함께 살자는 얘기로 해석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해석을 하면 김수영이 참여시의 지평을 더 넓혀놓았듯이, 김수영 문학상을 받은 이 시집도 김수영의 시세계를 더 넓혀놓았다고 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양파공동체
그러니 이제 열쇠를 다오. 조금만 견디면 그곳에 도착한다. 마중 나오는 싹을 얇게 저며 얼굴에 쌓고, 그 아래 열쇠를 숨겨 두길 바란다.
부화하는 열쇠에게 비밀을 말하는 건 올바른가?
이제 들여보내 다오. 나는 쪼개지고 부서지고 얇아지는 양파를 쥐고 기도햇다. 도착하면 뒷문을 열어야지. 뒷문을 열면 비탈진 숲, 숲을 지나면 시냇물, 굴어떨어진 영파는 첨벙첨벙 건너갈 것이다. 그러면 나는 사라질 수 있겠다.
나는 때때로 양파에 입을 그린 뒤 얼싸안고 울고 싶다. 흰 방들이 꽉꽉 차 있는 양파를.
문 열면 무수한 미로들.
오랫동안 문 앞에 앉아 양파가 익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때때로 쪼개고 열어 흰 방에 내리는 조용한 비를 지켜보았다. 내 비밀을 이 속에 감추는 건 올바른가. 꽉꽉 찬 보따리를 양손에 쥐고
조금만 참으면 도착할 수 있다.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내 집.
작아지는 양파를 발로 차며 속으로, 속으로만 가는 것은 올바른가. 입을 다문 채 이 자리에서 투명하게 변해 가는 것은 올바른가.
손미. 양파공동체. 민음사. 2013년. 16-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