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빅 브라더 - 지그문트 바우만, 감시사회를 말하다 질문의 책 1
지그문트 바우만 & 데이비드 라이언 지음, 한길석 옮김 / 오월의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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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빅 브라더.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감시자. 그는 전지전능하다. 모든 것을 다 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존재를 알 수 없다. 얼마나 무서운가.

 

벤담의 '파놉티콘'이 이런 원리로 되어 있고, 감옥이 이런 구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감시체제가 근대의 감시체제라고 한다면, 사실 이 감시체제는 허점이 많은 체제다.

 

적어도 감옥에 가지 않거나 또 누군가의 시선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감시를 당하지 않을테니 말이다. 따라서 근대는 감시하는 자와 감시받는 자가 확연히 구분되는 사회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발달로 이제는 감시받는 자와 감시하는 자가 구분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이렇게 구분할 수가 없다고 보는 편이 옳다.

 

모든 정보에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정보들이 투명하게 공개되어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돌아다니고 있으니, 일방적인 감시사회가 될 수 없어 보인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과연 그런가?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여기에는 배제가 먼저 작동이 된다. 이 배제된 자들은 감시당하는 자에도 끼지 못한다. 이들은 추방당한 자들일 뿐이다. 감시도 필요없는. 적어도 감시될 자들은 배제된 자들이 아니라 배제될 자들이다. 그들은 어떤 위험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낙인찍힌 자들이 된다. 그리고 이들은 어떤 형태로든 감시를 당한다.

 

이런 감시가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분리가 필요하다. 분리를 바탕으로 배제가 이루어지며, 배제를 효율적으로 이끌어내기 위해서 감시라는 기제가 작동을 한다.

 

이 때 감시하는 기제는 예전에는 한 공간에서 특정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현대는, 바우만의 용어대로 유동하는 현대는 한 공간이 아니라 여러 공간에서 특정한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불특정 다수에 의해, 특정한 시간이 아니라 어느 시간에라도 가능한 시간에 이루어진다.

 

 유동하는 현대에는 소비하는 모든 활동들, 움직이는 모든 활동들, 말하는 모든 것들이 모두 감시의 대상이 된다.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료들이 모이고, 분석되고 활용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감시에 분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감시에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마치 자신의 편리를 위해서는 자신의 자유를 줄이기라도 하듯이.

 

이 점에 대해서 바우만이 데이비드 라이언과의 대담을 통해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다. 논점들이 명확하게 들어오지는 않고, 역시 대책은 제시되지 않지만 문제의식만은 공유할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자료가 집적되고 있는지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신용카드를 쓸 때마다, 또는 특정한 상점에서 물건을 살 때마다,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살 때마다, 검색 엔진을 이용하여 검색을 할 때마다 자신의 정보는 집적되고 있다.

 

하다못해 우리나라는 학교에서조차도 모든 정보가 집적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정보의 집적을 자발적으로 하고 있다. 즉, 감시당하는 자가 스스로를 감시하고 있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은 감시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이 감시당하는 결과를 낳고 있는 이 역설. 이것이 현대판 빅 브라더들의 모습이다. 우리는 모두 빅 브라더를 두려워하고 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들 하나하나가 모여 빅 브라더를 만들고 있다.

 

소위 말하는 '신상털기'라는 것을 생각해 보라. 아마도 몇 시간이면 자신의 모든 것들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질 것이다. 그만큼 자신이 감시하는 것 만큼 감시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감시사회에서 벗어나지? 지금으로선 앞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바우만은 말한다. 절망의 순간이지만 그래도 우리 인간이 최후까지 놓지 못할 것이 바로 희망이라고. 희망을 놓지 말자고.

 

그렇다. 아무리 감시사회가 되어도 구멍은 있다. 올더스 헉슬리의 디스토피아 소설 "멋진 신세계"를 보아도 벗어날 구멍은 늘 있지 않던가.

 

그 구멍을 누가 만들어주길 바라서는 안되겠다. 그 구멍은 나부터 먼저 말들어내는 것 아니겠는가. 어쩌면 그것이 바우만이 말한 희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서운 감시사회. 여기에 더 이상 일조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하고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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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진화론 - 창작의 원리에서 도구까지 위대한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인화 지음 / 해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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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이 유행이긴 하지만, 이렇게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스토리텔링을 만들어갈 수 있는지는 몰랐다.

 

스토리텔링 진화론이라고 하여 스토리텔링이 어떻게 발전되어 왔으며, 어떻게 하면 스토리텔링을 잘할 수 있나 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겠거니 했는데, 왜냐하면 저자가 소설가이자 교수이지 않은가, 그런데 그게 아니다.

 

스토리텔링에 관한 프로그램의 발전사를 이야기해주고 있는 책이다. 오래 전부터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스톨리텔링에 도움이 될 연구를 해왔음을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었고, 지금은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했음도 역시 알 수 있었다.

 

특히 외국의 프로그램보다도 우리나라에서 개발한 스토리헬퍼라는 프로그램이 상당히 우수하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은 바로 스토리헬퍼를 개발한 사람들이 그 프로그램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서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책이기 때문이다.

 

즉 창작에 몸담은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기 위해서 만든 프로그램이고, 그런 프로그램에 대해 일반인들이 잘 알지 못하기에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그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이다.

 

작가는 천재다. 또는 소설이나 극본은 작가의 영감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속설을 정면에서 비판하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책에 의하면 누구라도 소설을 쓰거나 극본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아주 조금만 노력을 하면 말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 작가는 다른 작가의 작품을 발판으로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말이 이 책이 주장하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모든 이야기는 나름대로의 핵심요소들을 지니고 있기에, 그런 핵심요소들의 공통점을 추출해서 자신 나름대로 재배열하는 방법을 익힌다면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데서 이 프로그램은 시작을 한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데 최근에 발전한 기술을 이용해서 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직접 예를 들어서 '늑대와 춤을'이라는 영화의 주요 요소를 '아바타'가 어떻게 차용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면서, 어떤 작품이든지 이와 같은 방법으로 창작이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는데...

 

하여 충분히 스토리헬퍼라는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창작을 할 수 있음을, 그리고 이 프로그램이 다른 나라의 다른 프로그램보다도 훨씬 우수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누구나 이런 프로그램을 무료로 이용하여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으니, 이는 스토리텔링의 발전이 기계문명과 어떻게 결합하여 완성되어 가는가를 보여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이런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창작의 고통을 느끼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의 모습을 보고 싶기도 하다.

 

아직은 아날로그적인 작가들이, 작품들이 더 좋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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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너무도 무거워서, 너무도 어두워서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정말로 화병에 걸려 쓰러질 것만 같아서... 전국민이 모두 울화병에 걸릴 정도로 무능한 모습을 보면서... 화사해야 할 봄날을 지옥으로만 만들고 있는 것 같아서...

 

 

시집을 찾아보았다. 시라도 읽어야 할 것 같아서. 그래야 미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 고른 시집이 안찬수의 "아름다운 지옥"

 

아름답다는 말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지옥에서도 희망을 보고 싶으니, 그래서 지옥에 가서 뭇중생들을 다 구하고 싶다는 지장보살도 있었으니... 제발 이 지옥에서도 아름다움을 조금이라도 보여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나왔으면 좋겠어서. 자신의 죄를 알고 인정하면 지옥 속에서도 최소한 아름다움은 만들어질테니. 조금은 지옥이 훈훈해질테니.

 

아름다운 지옥

 

나는 지옥으로 가련다

 

철로 둘러싼 산이 동쪽에 있는데

그 산은 깊고도 어두워

해와 달의 빛이 없다 한다

거기에 큰 지옥이 있으니

한 칸도 아니고 두 칸도 아니고

끝이 없는 지옥이다

 

지옥은 또 있으니

사각의 외로운 방이 자꾸만 작아지는 지옥

마음을 찌르는 반성의 화살이 쏟아지는 지옥

밑에서는 불을 때고 위에서는 용광로를 쏟아붓는 철판 위에서

하루도 잠들 날 없이 그리워해야 하는 지옥

지옥은 또 있으니

불을 뿜어대는 분화구 속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지옥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쟁론해야 하는 지옥

피를 닦아내면서 다시 피를 흘려야 하는 지옥

아침부터 외쳐서 다음날 아침이 되어도 계속 외쳐야 하는 지옥

지옥은 또 있으니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져 너풀거리는 마음의 누더기가 채찍질하는 지옥

자기가 누어놓은 똥을 먹어야 하는 지옥

썩어들어가는 손을 잘라내면 다시 자라나는 손을 잘라내야만 하는 지옥

지옥은 또 있으니

혀를 뽑아내는 지옥

혀에 바늘을 꽂고 말을 해야 하는 지옥

혀로 땅을 갈아엎어야만 하는 지옥

혀로 갈아엎은 땅에 묻혀야만 하는 지옥

 

이런 지옥이 끝없이 연결되어 있으니

지옥문을 다 통과해도 다시 처음 문으로 들어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장이여, 지장이여

나는 이미 내 죄근을 알고 있으니

나는 지옥으로 가련다

 

안찬수, 아름다운 지옥, 문학동네. 1996년. 49-51쪽

 

사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엘리어트가 말했다고 했지.

 

사월은, 꽃 피는 사월은 우리에게는 진달래와 같은 피가 생각나는 달이었지.

 

4·19로 대변되는 사월은 우리에게 피를 연상시켰던, 희생을 연상시켰던 달이었는데, 그럼에도 사월은 잔인한 달이 아니라, 우리에게 희망을 준 달, 새롭게 민주주의에 대해서 알게 해준 달이었는데...

 

이제 사월은 정말로 잔인한 달이 되었구나!

 

생떼같은 목숨들이 바닷속에서 아직도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5일을 보내고 있는 이 현실이 바로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배 안에 있는데, 있는 줄을 알면서도 배 안으로 쉽게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만 뱅뱅 돌던 5일. 그 모습을 온 국민이 지켜보아야 했던 5일은 그야말로 지옥에 다름 아니었다.

 

누구의 잘못이 더 큰 잘못이 되어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우리 어른들이 저지른 잘못에 한창 봄을 누려야 할 아이들이 차가운 바다 속에서 생사도 모르는 채 그렇게 있어야 한다는 이 현실.

 

마치 자신은 아무 책임이 없는 양, 자신만은 도덕적인 양, 자신의 말 한 마디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양, 저 높은 곳에서 우월한 도덕심을 지니고 있은 채 그냥 이런 아비규환을 내려다 보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높은 자리일수록 책임은 무거워야 하는데, 왜 우리나라는 높은 자리일수록 책임이 가벼워질까? 마치 자신은 책임이 없는데, 밑에서 다 잘못하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할까?

 

이래저래 위에서부터 아래에서까지 총체적인 무능을 드러내고 있는 이 현실은 차라리 지옥이다. 지옥이라고, 이건 지옥이라고 생각을 하면 조금 인정이 되려나.

 

이 지옥에서, 어른들이 만들어낸 이 지옥에서 아이들만은, 제발 아이들만은 탈출하게 해달라고 기원을 하는데...

 

정말로 지옥에 가야 할 사람은 아이들이 아니라, 이제서야 봄에 도달한 그 아이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겨울을 살고 있는 우리 어른들인데... 더 높은 자리에 있는 그런 사람들인데...

 

잔인한 사월... 정말로 잔인한 사월로 기억될 올 사월.

 

조금이라도 기적이 있다면... 정말로 기적이 있다면... 우리 아이들이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다시 이 아이들이 봄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지옥은 아이들의 몫이 아니다. 지옥이 있다면 그건 어른들의 몫이다. 아이들은 절대로 지옥을 경험해서는 안된다.

 

정말로 기적이 일어나기를...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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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 - 이순원 장편소설
이순원 지음 / 곰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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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한다. 왜 그러는지 별다른 생각도 없이 그냥 어른이 되고 싶어한다. 어른이 되면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양, 그렇게 어른이 되고 싶어하는데... 막상 어른들은 아이들을 보고, 그 때가 좋아 하고 만다.

 

아이들은 또 하지 말라는 일은 더 하고 싶어한다. 사람 심리의 보편성이라고 하지만, 자꾸만 하지마 하지마 하고 금기를 세우면 그 금기를 깨고 싶어한다. 아이 때는 더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경험한 것이 적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이 더 많아서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어른보다는 덜하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경험에서 온다. 해 봤는데 잘 안된 경험, 이런 경험들이 쌓여 두려움을 형성한다. 그리고 두려움이 만들어지면 그 다음부터는 안전한 일만 하려 한다. 이게 어른들의 세계다.

 

모험과 격정의 세계는 아이들의 세계다. 아이들은 이런 세계를 겪고 어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아이들에게 이런 세계를 경험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런 기회를 주지 않고, 자연스레 시간이 지나면 어른이 되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어른은 나이가 많다고 어른이 아니다. 어른이 되는 시점이 몇 살 때부터다 하고 정해진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지금 사회는 어른은 만 19세다라고 한다. 법이라고 한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19세가 되면 이제는 어른이라고 한다.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고, 경험도 없는 사람에게 너는 나이가 되었으니 이제 어른이야 하면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러니 나이를 먹었어도 아이로 지내는 사람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이들은 어른이 되기 위해서 시간을 보냈을지 모르지만 그 시간 속에서 어른이 되기 위한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간접경험이든 직접 경험이든.

 

이 책은 어른이 어떻게 되는가를 다루고 있다. 소설이다. 그런데 읽다보면 자전소설이라고 해서 작가의 경험이 100%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마치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듯이 작품을 펼쳐가고 있기 때문이다.

 

간혹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소설 속의 나와 작가를 완전히 동일시 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작가가 진짜 이렇게 경험을 했어,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사람이 정말로 이렇게 행동을 했어 하면서 작가의 개인적 사생활과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사생활을 궁금해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작품은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작품을 읽는 바른 태도라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의 특징은 바로 이렇듯 자신의 이야기를 옆의 사람에게 들려주듯이 이끌어간다는 점이다. 그래서 흥미롭게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갈 수 있다. 읽어가면서 등장인물에 몰입할 수도 있다. 또 자신과 비교하면서 읽을 수도 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대관령에서 고랭지 농사를 짓는 부분에서 정점에 이른다. 이 정점에서 여자와의 경험은 자신이 어른이 아니라는 점을 일깨워주고, 한참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던 승희 누나에게서 어른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자신은 아직도 어른이 되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그는 작품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 무렵 무엇보다 나를 우울하게 했던 것은 지난 이태 동안의 내 삶에 대한 스스로의 생각이었다. 왠지 그 기간 동안 내가 했던 것은 어른 노릇이 아니라 어른 놀이였다는 생각이 자꾸만 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이런 상태로 다시 한 해가 지나고 또 한 해가 지나 스무 살이 된다고 해도,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흘러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된다 해도 그 일에 대해 어떤 후회나 미련 같은 것이 남는다면 그때에도 내가 하는 짓은 여전히 어른 노릇이 아니라 어른 놀이일 것 같은 생각이 들던 것이었다.  (272쪽)

 

결국 혈기왕성한 10대의 방황은 이렇게 끝난다. 그리고 그는 학교로 다시 돌아온다. 한참을 에둘러서 왔지만, 그 에두름은 인생에서 실패가 아니다. 오히려 성공이다. 그는 어른이 되기까지의 시간을 자신의 경험으로 온전히 채웠기 때문이다.

 

하여 19세가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나이에 맞는 어른이 되기 위한 준비를 마친 상태가 된다. 이제부터 그는 어른 놀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 노릇을 하게 될 것이다.

 

아이 시기에, 이 책에서 말하는 시기를 청소년기로 잡으면 청소년기에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은 바로 성과 우정, 그리고 공부일 것이다. 이 책은 이 셋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우정은 승태와의 관계로 성은 승태에게 배우는 것으로, 그러나 나중에는 자신이 승태를 가르치는 것으로 가지만 이것은 피상적인 성에 대한 인식일 뿐임을 깨우치는 과정을, 공부는 굳이 학교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는 다른 방향을 택해야 한다는 청소년기의 생각에서 어른들이 말하는 공부의 중요성과의 마찰이 있지만, 결국 그를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것은 공부였음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밝혀진다.

 

물론 이 때 말하는 공부는 꼭 학교 공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도 공부를 할 수 있지만, 이것이 진정한 공부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행동을 성찰할 수 있는 힘을 키우게 하는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 이 책의 주인공은 이를 책을 통해서 하게 되는데... 이 책을 통해서 하게 된 공부가 자신의 경험을 관통하면서 성찰하게 하고, 다시 주인공을 학교로 돌아오게 한다.

 

성과 우정과 공부. 청소년기에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인데, 이들이 유기적으로 잘 관계를 맺으면 자신의 성장에 무한한 도움을 주게 되고, 이들이 어긋난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 성장에 걸림돌로 작동을 하게 되는데...

 

그렇다. 19세가 되기 전, 나름대로의 길을 찾아 방황을 했던 주인공이 자신의 10대를 의미있게 되돌아볼 수 있음은 바로 성찰하는 힘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인데...

 

지금 청소년들은 어떤 경험을 하면서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힘을 얻어야 하나? 이런 고민을 이 책을 읽은 청소년들은 하게 될 것이고, 어른들은 이렇게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어떻게 도와야 하나 하는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그 점에서 어른들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유익한 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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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는 교육 잡지라고 할 수 있다. 두 달에 한 번 나오는 계간지인데, 나올 때가 되면 많이 기다려진다. 어떤 인연인지 첫호부터 읽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꾸준히 읽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책에서 배우는 점이 아직도 많다고 할 수 있고, 또 이 책에서 제기하는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어떤 호를 읽어도 여러 생각을 하게 하는데, 이번 호는 저번 호에서 연령 대가 더 내려가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가 주제다. 정확히 이 책에 있는 제목으로 한다면 특집 기획이 "육아, 시장의 유혹을 넘다"이다.

 

저번 호는 청소년의 정치 참여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이번에는 육아로 내려갔으니.. 어쩌면 정부에서 야심차게 시도하고 있는 "돌봄교실"이라는 육아(?) 방식에 비판의 칼날을 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정부에서는 어린이집에 보냈을 때 보조금을 지급하는데, 그럼 집에서 애를 키우면? 안 준다. 그래서 어린이집에 보낸다. 이러면 아이는 누가 키우지? 예전 개그콘서트에서 했던 유행어처럼, 소는 누가 키워? 가 아니라 아이는 누가 키우냐 말이다.

 

아이를 키우는 일차적인 사람은 바로 부모 아니던가. 오히려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면 보조금을 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아이를 집에서 부모가 키우면 보조금을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이를 집에서 부모가 키울 수 있게, (키운다는 말이 좀 이상한데, 이 말 대신 함께 지낼 수 있게로 쓰자), 함께 지낼 수 있게 부모가 일에 매달려 가정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현실을 고쳐야 하고, 또 돈이 없어서 아이와 함께 지낼 수 없는 가정을 위해서 보조금을 지급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마찬가지로 돌봄교실도, 아이를 학교에 늦게까지 남기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일찍 퇴근하여 아이와 함께 지낼 수 있게 하는 정책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런 정책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과 더불어 이번 호는 잘못된 육아에 우리가 얼마나 많이 휩쓸리고 있나를 살피고 있다.

 

특히 병원에서부터 여러 협찬하는 회사까지 얽혀 있는 육아시장에서 벗어나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들이 가장 큰 시장으로 삼고 있는 것은 이제 육아시장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기업들이 어른을 대상으로 하다가, 청소년으로 내려갔다가, 이제는 유아를 대상으로 마케팅을 한다고 한다. 유아에 대한 상품을 많이 팔기 위해서 병원을 이용하는 회사들이 많으며, 또 이들은 광고를 통해서 부모들의 불안을 조성해 자신들의 상품을 판다고 한다.

 

거기에서 벗어나기가 얼마나 힘든지는 아이를 키워본 사람은 다 알 것이고...

 

한 번 유이기때 이렇게 회사들의 상품과 관계를 맺은 사람은 그 관계를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유지할 가능성이 많다는 사실이 유추되어 더 모골이 송연해졌다.

 

우리는 아이들을 잘 키운다고 하지만, 그 때 잘 키운다는 말이 자신들의 뜻대로 아이들이 커줄 때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아이들이 자신들의 본성대로 크는 것을 지켜보지 못하고 숱하게 간섭하게 되는 것이다. 또 불안에 떨기도 하고.

 

그러나 옛이야기를 떠올려보자.

 

세 딸에게 누구 복으로 이렇게 잘 사느냐라는 부모의 질문에 두 딸은 부모님 복이라고 해서 부모의 사랑을 받았지만, 내 복으로 산다고 말한 딸은 부모의 미움을 받아 내침을 당한다는 옛이야기. 부모 복으로 산다는 두 딸은 참으로 못나게 되었지만, 자신의 복으로 산다고 말한 딸은 잘 살게 되었다는 결말을 갖고 있는 이야기.

 

이 이야기를 잘 살펴보면 정말로 잘 사는 아이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세상을 열어가는 아이이다. 그것이 잘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모는 아이가 지금 어떻다고 초조해할 필요가 없다. 아이에게는 아이의 복이 있다. 그리고 아이에게는 아이의 인생이 있다. 그 인생에 자신의 인생을 대입해서는 안된다. 이게 이번 호에서 하는 얘기다.

 

이렇게만 생각하면 아이는 늦든 빠르든, 똑똑하든, 그렇지 않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소중한 존재다. 그런 소중한 존재가 부모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즉, 모두 소중한 존재들이 잠시 동안 한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는 상태, 그것이 바로 가족인 것이다.

 

그렇다면 가족 구성원 각자가 자기 인생을 행복하게 살면 그것이 바로 가족의 행복이 된다. 가족의 행복, 그것은 곧 사회의 행복이 된다. 이런 가족이 된다면 아이에게 공부해라, 공부해라 하면서 공부만이 살 길인양 강요하지는 않을터다.

 

이런 가족이 많다면 우리나라 사교육에서 대표적으로 행해지는 선행학습은 굳이 사회구성원들이 사회협약을 맺어(이번 호에 나온다 ) 하지 말자고 결의를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없어진다.  무엇이 아이의 행복인지 아는 부모들이 선행학습을 강요하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이런 점을 생각하게 해준 이번 호. 여러 가지 글들이 있다. 하나하나 모두 소중한 글이다. 그럼에도 늘 특집은 우리 사회의 문제와 맞물려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이 땅의 사람들, 현재 부모이거나 부모였거나, 부모일 사람들이다. 정말 자신이 원하는 아이의 행복은 무엇인지,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번 호를 통해서 고민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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