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 나라.

 

가장 사이가 좋아야 함에도, 가장 사이가 좋지 않은 나라들 중에 하나.

 

서로 영향을 가장 많이 주고 받았음에도. 서로를 가장 많이 인정하지 않는 나라.

 

무언가 꼭 이겨야만 하는 나라.

 

일본은 우리에게 그런 나라다.

 

무비자로 왔다갔다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나라임에도, 사이가 좋지 않아서, 영토 문제로, 역사 문제로 갈등이 빚어지고 있어서 그리 편한 나라는 아니다.

 

한 번은 여행을 해봐야지 하고 있던 나라이기도 한데, 어디 해외에 나가는 일이 쉽나? 돈도 돈이지만, 시간도 시간이고, 또 그만큼 투자를 했으면 무언가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돈과 시간을 투자한 만큼의 성과가 있어야 여행이 성공했다는 그런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을 버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난데... 그냥 즐기면 되지 않나, 그것이 바로 여행 아니던가 하면 되는데...

 

그래도 한 번은 갔다와봐야지, 우리가 얼마나 이들에게 영향을 받았던가, 그러니 일본이라는 나라는 꼭 한 번은 갔다오고 싶었던 나라라.

 

백문이불여일견. 일본에 대해 듣고 듣고, 또 듣는 것보다는 한 번 보는 것이 낫다고 그래 가자.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언제 가겠냐 하고 선택한 일본의 도시가 바로 교토(京都).

 

우리나라로 치면 경주에 해당할텐데... 일본에서도 천년 고도라고 불리는 도시 아니던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라고 하고.

 

일본어도 영어도 안 되지만 하여튼 가족을 믿고 함께 한 여행.

 

비록 제대로 의사소통은 하지 못했지만, 앞의 두 책을 꼼꼼하게 읽은 결과 여행에는 별 지장이 없었다.

 

명소와 또 어떻게 버스를 타는지, 기차를 타는지, 입장료는 얼마인지, 특징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 자세히 나와 있어서 두 책을 읽고 간 결과가 만족스러웠다고나 할까.

 

물론 짧은 일정으로 교토의 모든 것을 볼 수 없었지만(말이 3박4일이지ㅡ오고 가는 날을 빼면 교토를 온전히 돈 날은 이틀에 불과하다. 그러니 이번 여행은 교토 동부로 한정하고 가기를 잘했다), 나름 알찬 여행이었다.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시인인 윤동주와 정지용이 다녔다는 동지사대학에 들른 것도 좋았고, 거기서 나란히 있는 그들의 시비를 보고 감회에 젖기도 하고, 정지용이 걸었다는 가모강(押川)도 한 번 걸어본 기억은 참 좋았다.

 

 

 

교토 동지사 대학에 있는 <정지용 시비>

 

 

교토 동지사 대학에 있는 <윤동주 시비>

 

동지사대학에서 더 좋았던 점은 이 대학 학생들은 자가용을 타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는 것. 도처에 자전거 보관대가 있고, 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왔다갔다 하는데, 학문의 전당이라는 대학을 차가 아닌 자전거로 다니는 모습, 이건 우리도 함께 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으니... 

 

그래, 배울 것은 배우고,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은 없애야 하겠지.

 

한 번은 가볼 만한 곳, 교토. 그리고 교토 여행이 참조가 될 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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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탈무드 - 하브루타 아빠의 특별한 자녀 교육법 하브루타 교육 시리즈
양동일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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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브루타'

 

요즘 많이 들리는 말이다. 예전에 교육방송에서 유대인 도서관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는데, 도서관 하면 무조건 정숙, 정숙을 강조하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유대인 도서관은 떠들썩했다. 그런데 그 떠들썩이 남을 방해하는 시끄러움이 아니라 자신들이 모르는 것을 찾아가는 소리들의 모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구난방이 아니라 주제를 향해 가는 소리들의 모음, 그러한 떠들썩함이 온 도서관을 채우고 있었고, 그러한 채움이 유대인의 지혜로 나타나는가 보다 했었다.

 

그러한 교육방식을 '하브루타' 또는 '헤브루타'라고 한다는데, 책을 읽어도 혼자 읽고 혼자만의 사색에 빠지지 않고 꼭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질문을 하는 과정을 거치는 교육방법이다.

 

어렸을 때부터 이러한 교육을 받은 유대인들은 토론에 능하고, 다르게 생각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게 된다. 그들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탈무드'

 

이러한 하브루타 교육의 집대성이 바로 탈무드라고 할 수 있다. 너무도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탈무드지만 우리에게는 동화나 우화 수준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냥 이솝 우화 읽듯이 읽고는 재미있네 하고 끝내는 경우가 많다.

 

아주 가끔은 교과서에 실려 아이들에게 생각할거리를 제공해주기도 하지만, 그뿐이다. 더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사실 우화나 동화는 생각하면 할수록 새로운 면들이 발견되는데, 그래서 어떻게 읽느냐 어떻게 이야기를 나누느냐에 따라 같은 동화라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고, 삶에 방향을 다양하게 제시해주기도 한다.

 

탈무드 또한 마찬가지다. 유대인들에게 탈무드는 성서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고, 삶의 지침서 역할, 지혜를 얻어가는 도구로써의 역할도 한다고 할 수 있다.

 

'자녀 교육'

 

우리나라에서도 이제는 '하브루타'란 말이 많이 알려져 있어서 자녀 교육에 있어서 토론을 도입하는 가정이 많다.

 

자녀와 대화하는 가정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 책은 어떻게 대화하는 것이 자녀교육에 좋을까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아직은 어린 자녀를 둔 부모는 자녀에게 책을 읽어주려고 한다. 그리고 책을 읽어주는 것이 자녀의 지능발달에도 또 정서발달에도 좋다고 하니, 그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모는 책을 읽으라고 하거나 또 읽어주더라도 읽어주고는 거기에서 멈춘다. 더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이 책은 그러면 안 된다고, 더 나아가야 한다고. 책을 읽어주었으면 그 책에 대해서 자녀와 대화를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 교육을 탈무드를 통해서 하브루타 교육을 한 결과를 이 책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탈무드 한 편 또는 두 편 정도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이야기에서 주제를 끌어내어 함께 이야기하는 것, 아무리 엉뚱한 대답이라도 인정해주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도록 유도하는 모습. 이것이 바로 하브루타 교육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하브루타 교육의 장점으로 자녀들의 지혜를 일깨우는 것도 있지만, 함께 이야기를 함으로써 가족간의 유대도 돈독해지니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교육법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아이에게 탈무드 이야기를 해주고 질문을 하고 답을 듣고 또 질문을 하는 과정, 결국 자녀를 동등한 이야기 상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하브루타 교육 방법이다.

 

대화는 대등한 관계에서나 가능하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좀 낯설다. 아빠와 아이들이 이렇게 조곤조곤하게 대화할 수 있는 가정이 얼마나 될까? 이들은 독실한 신앙심으로 함께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쁘다는 이유로, 또는 그런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쑥쓰럽다는  이유로 이런 교육을 하지 않는다.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이런 가정환경이었다면 좀더 다양하고 유연한 사고방식을 우리 아이들이 습득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적어도 중고등학교에서 시험을 위한 공부만을 하는 공부기계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학교에서 과연 다양한 질문을 하는 학생들이 있는가? 만약 그런 학생이 있다면 우선 아이들에게 진도 나갈 시간을 빼앗는다고 엉뚱한 아이라는 비난을 받을테고, 교사에게도 역시 시간을 뺏는,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아이로 낙인찍힐 가능성이 많다.

 

교과서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우리나라에서 교과서를 비판적으로 보는 질문, 또는 그런 교육을 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지...

 

이건 가능의 문제가 아니고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문제인데, 아직도 그런 교육이 우리나라에서 가능하려면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아이와 아빠가 조곤조곤 대화하는 이런 '토론 탈무드' 책이 부럽기도 하지만 과연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우리나라 학교는

 

하급반 교과서다.

 

하급반 교과서

                         - 김명수

 

아이들이 큰소리로 책을 읽는다

나는 물끄러미 그 소리를 듣고 있다

한 아이가 소리내어 책을 읽으면

딴 아이도 따라서 책을 읽는다

청아한 목소리로 꾸밈없는 목소리로

"아니다 아니다!"하고 읽으니

"아니다 아니다!" 따라서 읽는다

"그렇다 그렇다!"하고 읽으니

"그렇다 그렇다!" 따라서 읽는다

외우기도 좋아라 하급반 교과서

활자도 커다랗고 읽기에도 좋아라

목소리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고

한 아이가 읽는 대로 따라 읽는다

이 봄날 쓸쓸한 우리들의 책읽기여

우리나라 아이들의 목청들이여

 

교육출판기획실 편, 내 무거운 책가방, 실천문학사. 1988년 3판. 147-148쪽

 

김명수의 하급반 교과서에 나온 그대로다. 도대체 질문이 없다. 아니, 우리 사회도 역시 질문이 없다. 하급반 교과서는 학교의 저학년에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라나 전반에서 쓰이고 있다.

 

비판을 비난으로 다름을 차별로 만드는 사회 아니던가. 좀 다르다는 것을 못 견뎌하는 그런 모습을 우리는 너무도 많이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브루타' 교육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입 다물고 사는 사회가 아니라, 도무지 질문이 없는 사회가 아니라, 말들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사회, 그 말들이 서로 부딪치기도 하고, 함께 하기도 하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 책

 

무언가 좀 이상한 느낌이 든다. 하브루타라고 하면 대등한 대화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빠가 너무 많이 알고 있다. 아빠는 답을 알고 있고, 그 답으로 아이들의 대답을 유도해나간다는 느낌이 든다.

 

이런 모습이 하브루타가 아니지 않은가. 하브루타는 답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답을 대화를 통하여 만들어가는 것 아닌가.

 

아무리 아이들이 어리다고 해도 아이들의 답은 그 자체로 답이다. 아빠가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그 답을 유도하면 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답을 잘 찾기 위한 방편이 하브루타가 아니라 답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 하브루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 책에서 아빠는 너무 답에 매달려 있다. 아니, 본인이 끝에서 꼭 답을 말하려 한다.

 

그래서 대화가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닫혀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 책 전반적으로 그런 느낌을 준다. 잘못 읽은 것인가?

 

동의하기 힘든 것들

 

이 책 224쪽에는 중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노조를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 '큰 자동차 회사의 노조들이 임금협상을 위해 극단적으로 자살을 하거나 그런 일이 있어요. 예전처럼 노동 환경이 나쁜 것도 아니고 좀 자제해야 돼요. 그렇다고 회사 편만 드는 것도 안 좋으니 서로 절충해서 살아야죠.'라는 말이 있다.

 

과연 그럴까? 중도는 힘있는 사람에게는 좋은 말이고, 좋은 실천이지만, 힘없는 사람에게 중도는 포기요, 좌절이요, 죽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또한 '예전처럼 노동 환경이 나쁜 것도 아니고'란 말, 노동환경을 과거와 비교하면 안된다. 그것은 마치 조선시대와 지금을 비교하면서 우리나라가 이렇게 살 만해졌는데 무슨 불만이냐는 말과 같다.

 

노동환경은 늘 현재의 문제다. 지금 노동자들이 견디기 힘들면 그것은 좋지 않은 노동환경이다.

 

235쪽에 '친구를 사귈 때는 나보다 한 단계 높은 친구를 사귀고, 여자를 사귈 때는 나보다 한 단계 낮은 여자를 선택하라는 말이야.'라는 말. 이상하다. 자기보다 나은 친구를 사귀는 것은 좋다. 그렇지만 내가 나은 친구가 되어주는 것도 좋다. 이런 이야기는 뒤에 나오니 더 말할 것이 없는데, 문제는 여자에 관한 얘기다.

 

자기보다 한 단계 낮은 여자를 선택하라는 말, 이거 여성 비하 아닌가? 이 글이 나오는 장의 작은 제목이 '여성 상위'이고 여성이 정말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인데, 왜 이런 말을 굳이 삽입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친구건 여자건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선택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더 좋은 일은 친구건 여자건 자기가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 아니겠는가.

 

하여간

 

그래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해 준 책이다. 초등학교 정도의 아이를 둔 가정에서 해볼 만한 교육방법을 다루고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학교에서 교사들이 학생들과 함께 시도해 볼 만한 내용이라는 생각도 든다.

 

토론 교육이 강조되고 있고, 학생 활동 중심의 수업을 강조하고 있는 이 때 이 책의 세세한 내용보다는 그 방법론을 배워서 교육 현장에 적용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내용을 100% 믿고 따르지 말 것. 그것은 '하브루타'가 아니다. 이 책의 내용을 자신만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볼 것. 이것이 바로 이 책을 잘 읽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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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한 번만 더 날자꾸나 우리학교 작가탐구클럽
김예리 지음 / 우리학교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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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제대로 읽지는 않지만 이름만은 기억하는 작가. 그가 아마 이상이 아닐까 싶다.

 

이상이라는 이름이 필명이고, 본명이 김해경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고, 그의 대표작이 소설로는 "날개"이고, 시로는 "오감도"라고 하는데, 정작 이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읽은 사람은 많지 않은 경우.

 

작가가 작품보다 훨씬 더 유명한 경우다. 이상은.

 

그의 삶 자체가 파란만장했고, 또 너무도 일찍 세상을 떴기에 신비주의까지 생기고, 그의 작품이 초현실주의적이라고 하니 더 신비감이 생기는 작가.

 

어릴 적 큰아버지 집으로 양자 들어가고, 본집은 가난 그 자체고, 그는 요즘 말로 하면 서울공대에 해당하는 경성고공을 나와 총독부 건축기사가 되었지만, 그림에 빠지기도 하고, 결핵에 걸려 목숨이 위태롭기도 하고, 금홍이를 비롯한 여러 여자들과 문제를 일으키고, 결국 동경에 가서 죽은 삶.

 

자신의 삶을 소설로 옮겨 놓았다고 볼 수 있는 "봉별기", "종생기"가 있으니 정말 특이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비극일 것이다. 그는 일제시대가 시작하던 해에 태어나서, 해방을 보지 못하고 스물 여덟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떴으니, 얼핏 보면 그의 삶은 비극이다. 그러나 과연 비극일까? 그가 하지 못한 일이 있을까 생각해 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하여 그는 종생기에서 자신의 죽음은 '노사'라고 한다. 충분히 살았다는 뜻이다. 아니, 오히려 늦었다는 뜻이기도 하리라. 오죽했으면 김유정을 찾아가 함께 자살하자고까지 했을까.

 

이런 그의 삶은 우리에게 흥미를 준다. 그럼에도 이 흥미가 작가에서 끝난다. 작품까지 나아가지 못한다. 그런 이유는 그의 작품이 읽기에 힘들기 때문이다.

 

내용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우선 그는 띄어쓰기를 무시했다. 그러니 띄어쓰기에 익숙한 우리의 눈이 자꾸 글자들을 겹치게 읽어낸다. 읽기에서 턱 턱 장애물에 부딪치니 내용 파악은 뒷전이다. 이것이 이상의 작품을 우리에게서 멀어지게 만든다. 참, 나.

 

이런 이상에 대해서 좀더 쉽게 설명해주려는 의도로 만든 책이 바로 "우리학교 작가클럽" 시리즈의 한 권인 이 책이다.

 

이상의 작품 중에 가장 유명한 날개에서 구절을 따서 '한 번만 더 날자꾸나'라고 했다. 이상이라는 작가를 작품을 통해서 알려주고 있는 책이다.

 

물론 이 시리즈의 다른 책들과 같이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책이다. 그런데, 청소년을 대상으로 했으면 이상에 대해서 가장 기본적인 지식을 전해주겠다는 의도로 썼으면 좋았을텐데, 무언가 좀 전문적인 냄새가 난다.

 

대학교수가 써서 그런가? 대학생을 가르치던 사람이 중고교 학생들이 어느 수준이 되어야 잘 읽는지 감이 떨어지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겠지만, 그래도 이건 중고교생들이 읽기에는 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중고등학교 교사와 공동작업을 해서 편제나 문체, 또는 내용을 조금 바꾸었으면 이상이라는 작가에 대해서 학생들이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이상의 작품이 충분히 실려 있고, 그의 출생에서 죽음까지를 연대기적으로 다루고 있기에 끝까지 읽기만 한다면 이상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을 책이다.

 

더 많은 내용을 채워가는 것은 그 다음 일이고. 그러니 우선 읽어 보라. 자꾸 읽어야 한다. 읽어서 뇌를 자극해야 한다. 그래야 이상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덧글

 

하나. 139쪽에 마지막 부분 글들이 잘려 나갔다. 사진 자료에 가려 몇몇 단어들이 보이지 않는다. 이 점은 편집 과정의 실수일 듯.

 

. 이상의 작품은 대부분 띄어쓰기가 안 되어 있다. 이 점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으면 훨씬 좋지 않았을까 한다.

 

셋. 구인회 이야기가 없다. 이상에게 구인회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던가. 박태원이든, 김기림이든, 김유정이든, 이태준이든... 그가 소설 "김유정"에서 쓴 내용은 이런 구인회 활동이 바탕이 되었다. 책의 맨 뒤에 '작가 탐구 활동에 구인회 이야기가 나오지만, 본문에서 언급하는 편이 훨씬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넷. 이상을 저항시인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과연 그런가? 시란 하나로 해석되지 않고, 다양하게 해석되어서 그 묘미가 살아난다지만, 이상의 시들이 첨예한 민족의식을 담고 있다는 얘기는 조금 멀리 나아간 얘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책에서 이런 얘기는 넘어가도 되지 않았을까. 이런 얘기는 전문적인, 적어도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책에서 했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

 

저항시의 반열에 드는 시로 "열하약도 No.2(미정고)"와 "출판법"이 있다. 한 번 찾아 읽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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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빙하기를 맞으며

                        - 비정규직 양산의 세상에서


엄동설한!

빛나는 가을이 지나고,

세상이 하얗게 덮여

뼛속까지 동장군 칼날이 들어올 때,

태초에

유목민들은

세상은 끝났다고

다른 세상을 찾아 떠나갔으니

유목민들에게

세상은 

원형이 아니라

직선이었으므로

하얀 세상은

세상의 끝이었으므로,

또 다른 초록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었으므로.

하여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


세월이 흘러 흘러

정착민이 된 인간에게

하얀 세상은

곧 다가올 푸른 세상에 대한

예고였으니

그들에게 세상은 돌고 도는

원이었으니.

하얀 세상에서

즐기고 쉬면 되는 것이었으니

정착민에게 하얀 세상은

쉼터이었으니

인류의 의식이 개명한 이래

하얀 세상은

세상의 끝에서 쉼터로 변해왔는데……


다시 돌아온 하얀 세상은

원형도 직선도 아닌

나선형 직선이었는지

더 춥고 더 힘들게

칼날 끝에 서게 하였으니

가야 할 곳도, 머물 곳도 없는

현대판 유목민들은

갈 곳을 잃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있을 뿐인데……


역사는 순환한다지만

지금 겨울은 너무도 가혹해

수천 수만 년 일궈온

정착민의 생활이 깨져

어디론가 쫓겨 가고 있는

삶뿐이니.


지금은 빙하기.

다시 빙하기를 맞으며

빙하기에도 끝이 있음을

기억하는 

기억해 내어 견뎌야만 하는

추운 겨울

삶의 빙하기.


1)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 - 천규석의 책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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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뢰딩거의 고양이 - 과학의 아포리즘이 세계를 바꾸다
에른스트 페터 피셔 지음, 박규호 옮김 / 들녘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과학은 어렵다. 그런 선입견이 있다. 그리고 사실 과학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학생이 아니고서는 학창시절에 제일 어려운 과목으로 과학을 꼽는 학생들이 많다.

 

과학은 수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기에 수학에서 고전을 하는 학생들이 과학을 좋아할 수가 없다. 게다가 충분한 시간을 두고 과학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시험을 위해서 과학에 접근하는 대다수의 학생에게 과학의 아름다움, 과학의 즐거움을 느끼리라 생각하는 것은 망상에 가깝다.

 

이런 상태에서 뛰어난 과학자가 나올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드는데, 현대 과학은 특출난 한 개인에 의해 이루어진다기보다는 함께 하는 가운데서 성과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전적인 말을 곱씹어보지 않더라도 좋아하는 것보다 즐기는 것이 더 좋다고 했으니, 과학을 즐기는 학생들이 그리 많지 않은 현실에서 과학적 성과를 거두기를 바라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과학고라는 과학 특수 학교가 많이 만들어졌고, 이런 과학고도 모자라 영재학교라고 전국에서 우수한 학생들을 모집하는 특수 과학고가 존재하고 있는 상태에서, 기초과학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업적을 낸(이것도 좀 우습기는 하지만... 업적을 내기 위해서 과학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좋아서, 즐겨서 과학을 공부하는 학생이 많아져야 하는데, 다만, 이렇게 즐기는 학생이 많으면 성과는 자연스레 따라오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 이 말을 쓴다) 사람이 아직도 없는 상태니(이를 아주 간단하게 노벨상으로 국한하자면), 과학고의 운영이 성공적이라고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는 문과와 이과의 구분도 없어져 모든 학생이 과학을 공통으로 배워야 한다고 하는데, 그런다고 성과가 나올까는 의문이다.

 

과학고와 같은 특수학교, 또 과학을 모든 학생들이 특정한 나이가 되도록 배워야 한다는 의무, 이런 것 말고 정말로 과학을 좋아하고, 즐기고, 또 그러한 과학으로 자신의 생활을 해나갈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 책은 이렇게 과학에 대해서 흥미를 잃은 사람들, 또 과학은 너무 어렵다고 아예 접근을 포기한 사람들에게 과학도 재미있음을, 즐거움임을, 또 아름다움임을 알려주기 위해서 쓰여졌다고 할 수 있다.

 

딱딱한 과학이론에 대한 건조한 설명이 아니라, 과학자의 일화와 연결지음으로써 과학이론에 좀더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케플러의 난제는 과학이라는 학문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밖에 없다. 과학의 발전을 이루어낸 인물들에 관해서 널리 이야기함으로써 관심을 일깨우는 것이다. ... 이 책에서는 보다 새로운 방식으로 독자의 관심을 불어일으킬 작정이다. 즉 특정한 물음이나 성찰에 대한 명제들을 그것을 최초로 던진 인물과 직접 연결시켜 이야기하는 방식을 사용하려고 한다.' (6-7쪽)

 

이런 목표를 지니고 슈뢰딩거의 고양이부터 시작하여 노벨상까지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 물리학이나 화학, 생물학, 생리학 전반에 걸쳐 우리에게 친숙한 또는 생소한 용어들을 과학자의 삶과 연결지어 설명해주고 있기에, 과학이론에 대해서 골치 싸매며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과학이론을 우리에게 전달해준다기보다는 과학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마치, 보물창고로 들어가 보물들이 어디에 있는지, 그 보물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려주는 지도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 지도를 손에 들고 우선 한 걸음 내디디면, 이제는 지도에서 찾을 수 있는 길을 더욱 구체적으로 갈 수 있는 과학에 대해 찾으려 하게 된다. 그리고 찾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이 목표로 하는 것이니까.

 

과학이 자기와 동떨어진 또는 상관없는 학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 이 책을 한 번 읽어보자. 과학은 바로 우리 삶임을.

 

내가 어떤 세상을 살고 있고, 또 나는 누구인지에 대해서 알고 싶은 욕구가 생길테니. 이것이 바로 이 책이 의도한 바일테고... 한 가지 이 책에서 누차 강조하고 있는 점은 과학은 과학으로써만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

 

위대한 과학자들도 꿈에서 또는 신비로운 체험을 통해서 자신의 발견을 정식화하기도 했다는 점. 하여 과학자들이 연구실에 들어앉아 연구를 하기도 하지만 다양한 공부와 경험을 통해 자신의 과학을 공고하게 만든다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과학고라는 특수한 학교를 운영하는 우리나라, 과학고가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지를 이 책에 단서를 얻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진정한 과학자를 어떻게 양성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과학고 운영자들이 해야 하고, 그런 질문에 과학의 아포리즘들과 관계된 과학자들의 삶이 실려 있는 이 책은 훌륭한 참고자료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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