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문회 이야기로 나라가 들썩이고 있다. 청문회가 아니라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할 사람들(?)이 청문회 대상이 되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청문회법을 개정하자는 이야기가 나와 시끄러운 것이다.

 

그런데 잘 이해를 못하겠다. 청문회라는 것이 그 자리에 맞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검증하는 제도 아닌가? 그것도 나라를 좌지우지 한다는 정치권 중에서도 장관급 이상에 해당하는 것 아닌가?

 

조선시대로 따지면 판서급 이상에 대한 청문회를 한다고 하는데, 그 청문회 무용론이 나오질 않나, 아니면 왜 청문회를 하는데 그 사람이 그 자리에 맞는 능력을 지니고 있느냐 있지 않느냐를 따지지 않고, 개인신상에 관한 것들부터 따지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하더니, 자신들이 야당인 시절 행정부의 관료들을 엄격한 잣대로 선별해야 한다고 기를 쓰고 청문회법을 만들어 놓더니, 이제 여당이 되니, 그것과 이것은 다른 문제라고 개인의 능력과 비리를 같은 선상에 놓지 말라고 하고, 그런 기준으로는 어느 누구도 통과할 자신이 없으니 청문회법을 개정하잖다.

 

조변석개. 때에 따라 이렇게 행정부 관료들에 대한 기준이 달라져도 되는지 모르겠다. 굳이 옛말을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아니던가.

 

세상에 제 몸 하나 깨끗히 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가정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으며, 또 제 집 하나 다스릴 능력이 없는 사람이 나라를 경영할 수 있으며, 제 나라를 제대로 경영하지 못하는 통치자가 어떻게 세계 평화에 기여하겠는가.

 

물론 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순서대로 가진 않겠지만, 적어도 '수신과 제가'는 '치국'에 앞서거나 동시에 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사회는 혼란에만 빠지게 된다. 그러니 개인신상에 관한 것들이 청문회에서 다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서양의 경우, 청문회에서 이런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 이미 추천과정에서 이런 문제는 다 검증이 되기 때문이다. 청문회에서 언급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검증을 마치고, 이 검증 기준을 통과한 사람만이 청문회 대상으로 추천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청문회에서 굳이 개인의 문제를 다룰 필요가 없다.

 

이미 검증을 거친 것들을 반복할 만큼 시간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시급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 때는 자리와 능력이 어울리느냐를 중심으로, 또 정책 비전을 중심으로 청문회를 실시하면 된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도 전에 우리는 개인 문제로 사회가 시끌시끌하다. 위장전입, 병역미필(가족까지 포함하여), 논문 표절, 전관예우, 부적절한 언행 등이 청문회 대상자들마다 오르내리고 있으니...

 

이래서 청문회장에 가기 전에 이미 까발려질 대로 다 까발려지니 '청문회에 가기도 전에 개인적 비판이나 가족들 문제가 거론되는 데는 어느 누구도 감당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고, 높아진 검증 기준을 통과할 수 있는 분을 찾기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웠다'(인터넷 한겨레 신문에 난 2014년 7월 1일자 기사 중에서 대통령의 말이라고 한 부분 재인용)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이 곧 청문회 검증 기준을 낮춰야 한다는 말로 들리는데... 

 

정작 문제는 청문회 검증 기준이 아니라 그 기준에 미달되는 사람을 추천하는데 있지 않나. 행정부의 장관이 되려는 사람이면 검증 기준이 매우 높아야 하지 않나. 적어도 선비란 개인적인 청렴함이나 가족들의 청렴함은 기본이요, 여기에 능력까지 갖추어야 하지 않나.

 

그러니 청문회의 검증 기준은 낮아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아져야 하고, 적어도 자신이 행정부의 장관 정도 하려면 이 높아진 검증 기준을 가뿐히 통과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 정도 기준도 통과 못할 사람은 나와 같은 장삼이사(張三李四)에 불과하니 행정부에서 일을 한다는 헛된 욕심을 버리는 것이 자신의 삶과 우리 사회의 삶에 더 도움이 되는 것 아닐까.

 

따라서 청문회 검증 기준은 낮아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아져야 한다. 그리고 이런 검증 기준을 통과한 사람만이 진정한 선량(選良)이라는 소리를 듣고 책임있는 자리에 갈 수가 있어야 한다. 그런 사회가 진정 좋은 사회이다.

 

그런데... 이런 당연한 말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당연과 물론의 세계'(김승희의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자서에서)에 우리는 너무도 물들어 있기 때문에, 이 세계에서 벗어나는 일은 너무도 무거운 싸움이 된다.

 

내가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던 것을 느끼면서 그것을 털어내기 위해서 싸우는 싸움, 결코 쉽지 않은 싸움이고, 너무도 '무겁고 힘든' 싸움이다.

 

나와 같은 보통 사람도 이럴진대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이 '당연과 물론의 세계'와 싸우기 위해서는 얼마나 힘들 것인가. 그들에게는 얼마나 엄격하고 높은 잣대가 주어진 것인가. 그걸 알아야 하지 않나.

 

검증 기준을 탓할 것이 아니라 검증 기준을 가볍게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없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위로 올라갈수록 자신이 말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는 정말로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이어야 할테니 말이다. 

 

하여 정치를 한다는 사람, 또 행정부에서 고위관료로 일을 하겠다는 사람, 더 높은 곳에서 나라를 위해서 사람들을 위해서 일을 한다는 사람들은 적어도 '당연과 물론의 세계'에 속해 있으면 안된다. 이들은 끊임없이 이 '당연과 물론의 세계'에서 벗어나려고 해야 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 벗어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주어진다.

 

김승희의 제목과 같은 시를 보자.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1

 

「이 문은 자동도어이오니

개폐를 운전자에게 맡겨주십시오」

 

누군가 나에게 넥타이를 입힌다

그리고 질질 끌고 간다

 

김승희,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세계사. 1995년. 11쪽

 

하여 우리는 이런 '토끼장의 평화'를 벗어나기 위해서 정말로 또다시 '무거운 싸움'을 해야 한다. 성경에 나오는 팔복을 빗대어 시인은 이렇게 표현한다. 마치 윤동주의 '팔복'을 읽는 느낌이 난다. 진정 이런 복은(이게 복이라니, 참 무서운 역설이다) 우리가 '무거운 싸움'을 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다가오리라.

 

八福(팔복)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땅의 나라가 저의 것이요

 

당연을 따르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당연을 따르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당연을 따르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당연을 따르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토끼장의 평화가 저의 것이라

 

김승희,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세계사. 1995년.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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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연장통 - 인간 본성의 진짜 얼굴을 만나다, 증보판
전중환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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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연장통이라는 제목에는 진화의 개념이 들어 있다.

 

연장통은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도구들을 모아놓은 통이니 사람들이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통, 즉 우리의 몸이나 마음을 의미하고, 오래된 이라는 말에서는 인류의 탄생에서부터 지금까지 인간에게 지속적으로 존재해 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제목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문화나 환경에 따라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진화해 온 것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를 학자들은 진화심리학이라고 한다. 심리학이 인간의 마음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개별적인 인간의 마음을 연구하는 학문에서 벗어나 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가에 대한 연구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진화' 심리학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자유의지는 없다'라든지 또 기타 뇌과학에 관한 책들을 읽어보면 인간은 자신의 마음을 자기가 다스린다고 생각하고 자기 마음의 주인이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진화의 결과로 형성된 뇌와 뇌의 작용에 의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하여 진화심리학은 최신 과학발전과 함께 간다.

 

이 책은 이러한 진화심리학을 바탕으로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 쉽고 재미있게 설명해주고 있는 책이다.

 

저자가 말하고 있듯이 진화심리학에 대한 이론 설명을 하는 책이 아니다. 그런 책을 원한다면 이 책에서 말하고 있듯이 '진화심리학'을 검색해서 그에 합당한 책을 읽으면 된다.

 

그렇다면 이 책은 무슨 역할을 할까? 우리가 진화심리학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안내서 역할을 한다. 아니, 진화심리학이 도대체 뭘까 하는 호기심을 자극하게 한다. 그래서 진화심리학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한다.

 

그리고 그런 목적을 달성했다고 본다. 과학책, 심리학 책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읽을 수 있는 이야기책이라는 느낌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쉽게 손에 들고 읽으면서 그렇구나 하는 감탄을 할 수 있는 책이기에 저자의 목적이 충분히 달성되었다고 본다.

 

여기서 더 나아갈 일은 진화심리학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아보는 일이다.

 

꼭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왜 그런 마음이 작동하는지에 대해서 조금은 깊게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아무런 의문없이 지나쳤던 문제들, 그것들이 사실은 진화의 산물일 수 있다는 것. 인간이 인간으로서 최적의 상태로 살아갈 수 있게 수백만년에 걸쳐서 진화해 온 것이 지금 우리를 이루고 있다는 것.

 

고기에 관해서, 이방인에 대한 태도에 관해서, 털이 왜 없어졌는지에 관해서, 도덕, 종교에 관해서, 그리고 동성애에 관해서 진화론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노력이 계속되어지고 있음을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진화론, 아직도 창조론으로 진화론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종교적 신념을 떠나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하는 것조차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기제가 바로 진화론임을 이 책은 간명하고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뇌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진화심리학은 더 발전을 하게 될 것이고... 우리는 오래된 연장통에 새로운 연장들을 넣어두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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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은 세상을 비춘다. 그런데 별은 밤에만 비춘다. 낮에는 별들의 빛이 세상이 닿지 않는다. 아니 닿을 필요가 없다. 별빛이 필요없을 만큼 밝기 때문이다.(사실 별빛은 낮이나 밤이나 같다. 다만 우리의 눈에 보이냐 보이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이지만... 그러한 과학적 사실 말고... 우리가 느끼는 진실의 면에서는 이렇다)

 

그렇다면 별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한다. 결국 별의 바탕은 어둠이다. 어둠이 없다면 별은 제 진가를 발휘하지 못한다.

 

지금 우리나라 청문회 문제로 말들이 많다. 청문회라는 것은 그 사람이 그 직책에 어울리는지를 함께 묻고 답해보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청문회 자리에 나선다는 것 자체는 세상의 별이 되고자 한다는 얘기다. 그는 자신의 빛으로 세상을 조금더 밝게 비추고자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런 별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밝아서, 그들의 삶이 대낮이어서 도리어 별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

 

무슨 무슨 비리 비리 비리......

 

언론에는 그 많은 비리들이 감자를 캘 때 감자들이 줄줄히 딸려나오듯이 나오고 있다. 세상에 그들은 자신의 삶이 너무도 밝아서 그러한 어둠 쯤은 쉽게 감춰질 줄 알았나 보다.

 

그러나 자신의 어둠을 감추었던 밝음이, 그러한 대낮이 청문회라는 자리에서는 결코 대낮이 되지 못한다. 청문회는 어둠이다. 별의 바탕이다.

 

별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서야 하는 바탕이다. 청문회라는 바탕에 서 있을 때 그는 진짜 별인지 아니면 별 흉내를 내고마는 가짜 별인지 판명이 된다.

 

청문회라는 바탕, 철저하게 어두운 바탕에서 그 동안 자신을 가리고 있던 낮, 밝음을 제거하면 진짜 별이 되는 사람들은 그 때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대낮에 가려져 있던 빛들이 제 구실을 하기 시작한다.

 

반대로 대낮에 가려져 있던 어둠을 지니고 있던 사람들... 대낮을 제거하고 나면 이제는 어둠만이 남는다.

 

그들에게는 청문회라는 어둠에서 자신들의 어둠밖에 남지 않기 때문에 빛을 발할 수가 없다. 별이 될 수가 없다. 그냥 묻힐 뿐이다.

 

그런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은지... 이렇게 자신의 대낮에 가려져 있던 어둠이 청문회라는 바탕에 의해 드러나는데도 그걸 한사코 부인하고 '난 별이다. 난 빛이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대낮일 때 자신의 어둠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없애려고 하고, 대낮이라 티가 나지 않더라도 자신만의 빛을 간직하려는 자세를 지녀야 하는데.. 그래야 정말 별이 될 수 있는데...

 

세상의 별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 청문회라는 바탕에 서고자 하는 사람들... 대낮에는 빛을 발하지는 않지만 결국 빛을 발하게 되는 자신만의 빛을 간직하는 삶을 살기를...

 

자신만의 빛이 없이, 대낮에 겨우 자신의 어둠을 감추고만 있던 이들... 청문회라는 바탕에서 빛은 커녕 자신의 존재조차도 가두어버리는 이들. 반성하길.

 

정진규의 '별'이란 시... 마음에 와 닿는다.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대낮에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별들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에게만

별들이 보인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만

별들을 낳을 수 있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어둡다

 

정진규,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문학세계사. 1990년. 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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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의 기억 - 아파르트헤이트가 건네는 이야기들 나를 찾아가는 징검다리 소설
베벌리 나이두 지음, 이경상 옮김 / 생각과느낌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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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공화국.

 

이 나라에 대해서 알려 주는 인물은 둘이다.

 

한 명은 인도의 성자라고 불리는 간디. 그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온갖 차별을 받고 나서야 진정한 인도의 독립운동, 비폭력 운동에 뛰어들었다고 하니 그와 이 나라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 한 명은 넬슨 만델라. 노벨 평화상을 받은 사람으로 또 남아프리가공화국 최초의 흑인대통령으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반대해서 온갖 탄압을 받았던 사람으로, 그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로도 만들어졌으니... 이렇게 두 사람에 의해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나에게 다가왔다.

 

지금은 흑백차별이 별로 없지 않나 싶은데...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폐지된 지 20년이 넘었으니, 흑백이 함께 어울려 살아갈 토대가 마련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더 많은 자료를 알고 있지 못해서 무어라 말하기는 어렵다.

 

이 책은 이러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판치던 시대부터 만델라가 대통령이 되어 무지개 정책(인종에 상관없이 함께 어울려 살아갈 사회를 만들어가는 정책)을 펼친 이후까지를 배경으로 시대 순으로 여러 편의 단편들을 모아 놓았다.

 

1940년대부터 시작하여 2000년에 이르러서 이 작품집은 끝나는데...

 

어린이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인종차별 정책이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때로는 백인 아이를 주인공으로, 때로는 흑인 아이를 주인공으로, 또 인도 출신의 아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아이들의 눈에 비친, 또는 아이들이 경험한 인종차별의 잔혹함을 표현해 내고 있다.

 

인종차별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지 이 작품을 읽으면 자연스레 느낄 수가 있는데, 최근에 본 영화 "헬프"와 연관이 되어 더더욱 마음에 남았다.

 

이 작품에서 알 수 있듯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사람들을 네 종류로 분류하고 있다. 영국인과 같은 백인, 예전에 이 나라로 들어와 정착한 보어인(이렇게 두 집단은 최상층을 이루게 된다), 백인과 흑인의 혼혈(컬러드라고 불린다), 그리고 원주민이라 불리는 흑인, 여기에 나중에는 인도계 사람들까지(아마 이들은 컬러드라고 하는 흑인들을 사람취급하지 않는 그런 사회. 여기에 흑인만큼 차별받지는 않지만, 백인처럼 대우받지는 못한다).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이고, 생명의 무게는 어떤 생명체든지 똑같다는 생각을 하면 어떻게 피부색깔로 사람들을 차별할까 하지만, 아직도 우리에게 이런 습성이 남아 있지 않나 싶기도 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사실 피부색에 의한 암묵적인 차별이 있지 않아 싶어 반성이 되기도 하고.

 

이런 차별의 습성이 경제력의 차이를 차별로 전환시키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 책의 마지막 작품은 아마도 인종차별 정책이 없어진 다음에 경제력의 차이가 또 다른 차별을 낳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런 차별도 아이들에게는 의미가 없는 것으로 바뀌고 있지 하는 결말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의 마지막 작품 제목이 '장벽을 넘어'인 것을 보면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서 과거에 일어났던 차별은 철저하게 기억하고, 그 기억을 바탕으로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차별은 인종뿐만이 아니라 경제적인 면에서도 일어날 수 있음을, 그것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됨을 이 책의 마지막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다.

 

사람은 그 자체로 존귀함을. 누구나 동등함을. 그래서 함께 지내야 더 행복함을, 힘들었던 과거를 작픔으로 표현해 내 기억함으로써 잊지 말자고, 그 바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자고 작가가 말하고 있는 듯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어찌 남 나라 일이겠는가. 우리도 지금 경제력에 따라서, 또 사상에 따라서 차이를 차이로 인정 안하고 차별로 전환시키려는 모습들이 보이지 않는가.

 

그러면 안됨을 이 책에 나와 있는 살아 있는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서 느낄 수 있다. 그런 사회가 바로 야만임을. 문명은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함께 어울려 삶임을... 어린이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자고 작가는 말하고 있는 듯하다.

 

과거의 일. 잊어서는 안된다. 기억과 용서는 다른 말이다. 용서는 바로 기억에서 출발한다. 잊지 않음, 다시 반복되지 않게 함. 그것이 바로 기억이고 용서다.

 

한 편 한 편의 소설들이 마음 속으로 파고든다.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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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에서 카프카로 모리스 블랑쇼 선집 11
모리스 블랑쇼 지음, 이달승 옮김 / 그린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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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발음을 해보면 참 강한 발음이 나온다. 이름에 거센소리가 이렇게 연달아 있을 수도 있다니.

 

그의 이름 만큼이나 삶도 참으로 강렬했다는 생각이 든다. 문학에 살고 문학에 죽으려 했던 사람이었으니.

 

그는 늘 고독 속으로 들어가려 했고, 그 고독 속에서 글을 쓰려 했다. 글이 쓰여지지 않았을 때 더한 고독으로 들어갔으며, 반대로 글이 쓰여졌더라도 고독 속으로 들어갔다. 하여 그는 지하실에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고 싶어했다.

 

지하실.

 

무언가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는 곳. 그곳에서는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카프카는 그곳에서 남들을 의식하지 않고, 또 남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신만의 글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그런 생각은 생각으로만 그치고 그는 결코 지하실로 들어가지 못했으니, 그가 지니고 있었던 생활이라는 짐이 그를 늘 지상으로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그의 문학과는 반대로 그는 법과 관련된 그것도 보험과 관련된 생활을 하고 있었으니 문학과 생화의 불일치가 그를 더욱 고독으로 몰아갔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고독이 그를 경계인으로 살게 했고, 그의 작품도 이 쪽도 저 쪽도 아닌 양 쪽에 걸쳐 있는 그런 느낌을 주고, 또 그의 작품은 어쩌면 이곳과 저곳을 넘나들 수 있는 문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문이긴 한데 잘 보이는 문이 아니라 감춰진 문. 그래서 공들여 찾아야만 하는 문. 그것이 그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런 생각이 들게 만든 책이 바로 이 책이다.

 

프랑스 학자인 모리스 블랑쇼가 카프카에 대해 쓴 이 책은 카프카에 대해서 여러 면에서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아마도 카프카 작품을 읽은 사람을 전제로 쓴 듯한 느낌을 주는 글인데, 그만큼 글 내용이 쉽지 않다.

 

물론 카프카 본인이 쉽지 않은 인물이고 그의 작품은 난해하기로 유명하니, 카프카 작품의 주석서라고 할 수 있는 이 책 역시 난해한 것이 정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프카가 자기만족을 위해서 글을 썼다고 하더라도, 또는 자기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방편으로 자신의 죽음을 나타내는 글쓰기에 사력을 다했다 하더라도, 적어도 카프카에 관한 책들은 좀 쉬웠으면 좋겠다.

 

카프카 소설을 읽어도 난해해서 머리가 아플 지경인데, 카프카에 대해서 설명을 한 책조차도 이렇게 어렵다니... 도대체... 카프카 문학을 전공한 사람만 이런 책을 읽으란 말인지...

 

적어도 고등학교 시절, 우리는 카프카의 "변신" 정도는 배우지 않나, 또 좀더 나아가면 "성"아나 "소송"정도를 읽는 학생들도 나오는데, 정작 카프카에 대한 책들은 어렵기 그지 없으니,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가 이토록 어려워야 하는 것인지...

 

어느 정도 카프카에 대해서 감을 잡을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있는 그의 전집을 읽은 다음에 이 책을 읽으면 블랑쇼의 이 책 내용이 어느 정도 머리 속에 들어오기는 할 것 같다.

 

카프카.

 

그는 이름만큼이나 매혹적인 사람이다. 그의 작품 역시 마찬가지고.

그런 그에 대해서 그래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었음에, 이 책이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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