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실업이 심각하다. 청년 실업 말고도 삼포세대라고 하는 말들이 유행한다.

그만큼 살아가기 힘든 시절이다.

 

텔레비전 광고에서 재미 있는 것을 봤다. 서류전형 통과라는 벽에서 서류를 종이비행기로 접어 날리나 비행기는 번번이 벽을 넘지 못하자, 우주복을 입은 사람이 망치를 들고 그 벽으로 돌진하여 망치로 내리치는... 그러나 벽은 꼼짝도 하지 않고 망치만 부러지고 마는.

 

아마도 예전의 애플 광고를 패러디한, 그러나 너무도 슬픈...

애플의 광고에서는 거대 권력을 박살내고 있었는데...우리나라 이 광고에서는 망치가 부러지고 마니... 현실은 그만큼 더 어려워졌다는 얘기다.

 

서류전형이라는 취업의 1단계에서도 많은 청년들이 좌절하고 만다. 그런데 우리들은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하고, 젊은 시절 그런 고통쯤은 견뎌내야 한다고, 오히려 좋은 경험이라고 입에 발린 소리를 한다.

 

이미 취업의 문을 통과해 기득권을 견고하게 잡고 있는 사람들이.

 

그러면서 취업을 하지 못하고 있는 책임을 청년 개개인들에게 지운다. 너희들의 노력이 부족해서 그래, 더 노력해 봐라고.

 

하지만 이것은 청년의 책임이 아니다. 그런 사회를 만들어 놓고, 그 좁은 문을, 그 견고하고 높은 담을 통과한 사람만이 취업할 수 있게 한 우리들의 잘못이다. 우리들의 책임이다.

 

적어도 기성세대라고 한다면 지금 청년들이 이리도 고통받는 것에 대해서 미안함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게 바로 어른의 몫이고, 어른의 자세다.

 

그런 어른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나라 이 광고, 결국 책임지는 어른들은 나오지 않는다. 함께 벽을 부수겠다고 망치들고 나오는 어른은 없다. 오로지 얄팍한 취업 팁, 서류전형 팁만을 알려주려고 한다.

 

지금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당당하게 자신들의 일할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청년들이 어른들에게 당신들 도대체 뭐 했냐고, 지금 뭐 하고 있냐고... 제대로 대책을 마련하라고 외치게 해야 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누구나 아프다고, 당연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미안하다고, 너희들을 아프지 않게 하겠다고... 그렇게 함께 하자고 해야 한다.

 

그게 어른의 자세다.

 

이희중의 시집을 읽고 있었는데.. 예전에 '사냥꾼'이라는 시가 우리 인간의 모습을 너무도 잘 나타내 주었다는 생각에 감탄을 하고 있었는데... 이번엔 청년 실업의 문제와 연결되는 시를 읽고 마음이 너무 아팠다. 이렇게 청년들을 소진하게 하면 안 되는데...

 

함께 그들을 막고 있는 높고 단단한 벽을 부수는 일에 나서야 하는데... 하는 생각... 어른으로서 미안해졌다.

 

두드리면 열린다는 문, 또는 기다리면 온다는 고기

 

문이 있는가

두드리면 열리는 문이 있는가

왜 헤매며 아무 벽이나 두드려 보는가

누구는 쉽게 열리더라고 하기도 하고

아예 열려 있더라고

문이 아니라 길이더라고 하네

그런가, 저마다 찾는 문

서성거리는 발들

세상은 바다 그 변경에 낚시를 드리우고

바늘 끝에 자신의 살점을 매달아 놓았다

목숨을 달아 놓았다, 무서운 미끼여

기다리면 큰 고기가 오는가

들린다, 경첩이 녹스는 소리

미끼가 썩어 가는 소리

 

이희중, 푸른 비상구, 민음사. 1995년 1판 2쇄.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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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훈 소설의 불교적 성격
김상수 지음 / 국학자료원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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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그 가운데서도 훌륭한 문예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작가가 하고픈 말을 경청한다는 것 외에도, 작품이 내포한 작가의 또 다른 자아와 맞닥뜨리는 순간을 경험하는 일이다. 그 작품 속 자아는 작가 스스로도 감지하지 못할 수 있는 은밀한 자아이다. 독자의 자아는 작가의 그 내밀한 자아가 구축해놓은 작품세계에서 그 구조물의 상징과 은유에 공감하고 공명하는 희열을 맛볼 수 있다.' 175쪽 결론에서

 

소설을 읽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찾아내는 것,, 그리고 작가의 다른 모습을 찾아내는 것, 여기에 바로 나 자신의 삶을 다르게 보게 되는 것.

 

최인훈은 '전후 최대 작가'라는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이런 평가를 차치하고서도 그의 작품 중에 '광장'은 지금까지도 읽히고 있는 작품으로 살아남았다.

 

여기에 그의 작품들 하나하나가 읽을 만하고, 여러 생각들을 하게 해주는데, 이 책은 이런 최인훈의 작품에 관통하는 하나의 틀이 무엇일까를 연구한 결과물이다.

 

그 결과 최인훈의 소설들을 관통하는 틀이 바로 '불교'라고 하고, 이를 종교로서의 불교라고 하기보다는 철학으로서의 불교라고 하고 있다.

 

즉 몇 천 년 동안 우리나라 정신세계를 관통해온 불교가 최인훈의 소설에서도 은연중에 또는 드러내놓고 나타난다고 보고 있는데, 그렇다고 그의 모든 작품에서 불교적 성격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불교가 우리가 사는 세상을 고통의 바다'苦海'로 보고 있고, 그것을 헤쳐나가 해탈에 이르러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대부분의 소설들이 바로 이런 불교적 성격을 자연스레 띠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소설이란 문제 있는 세상에서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인데, 소설의 장소에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소설이 소설로서 기능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최인훈의 소설에서 불교적 성격을 찾아내고, 그것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고 하는 이유는, 최인훈의 소설에서 이런 불교적 성격이 명확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가령 그의 작품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는 아예 '석가'라는 말이 등장하고, 소설제목을 통해서도 불교와의 관련성을 나타내는 '구운몽','서유기'가 있으며, '가면고'에서는 인도의 왕자가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하며, 불교에서 열반에 이르는 정진 방법으로 화두를 들고 있는데, 이 '화두'를 소설 제목으로 삼기도 했다.

 

그러니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중심에 불교가 있다고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소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기도 하고, 소설을 다양하게 보는 관점을 배울 수도 있는 책이기도 한데, 결국 소설은 작가가 완성해서 독자에게 내놓지만, 작가가 내놓은 순간 그 작품은 독자의 것이 되기도 한다는 것, 그래서 소설의 최종적인 완성은 독자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

 

소설이 생명력을 지니려면 시대에 따라 또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고 받아들여질 여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최인훈의 소설은 우리나라 현실을 비판한 사회소설로도, 또 대체 역사를 다룬 소설로도('태풍'), 가상의 현실을 도입하여 신랄하게 현실을 풍자한 소설로도, 고전소설에서 제목을 따와 그를 현실에 맞게 변용한 소설로도, 관념이 극명하게 드러난 난해한 소설로도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다양한 점 중에서 최인훈 소설의 불교적 성격을 밝혀 보여준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최인훈 소설에 또 하나의 관점이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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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도소를 지나며

                                                             - 학교1

 

  집을 향해 바쁜 걸음을 옮기다,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난 장애물, 꼼짝없이, 서 있는데, 그 앞으로, 똑 같은 머리, 똑 같은 옷을 사람들이, 곁눈질도 하지 않고, 빳빳하게 고갤 쳐들고, 똑 같은 걸음으로, 똑 같은 거리를 두고, 다른 것이라곤 가슴에 달려 있는 번호표 하나만을 지닌 채, 교도소를 향해 가고 있다.

 

  하나, 하나, 하나,

 

  삼각대 뒤에서, 남 일 바라보듯 보다, 철조망이 있는 높은 담장을 쳐다 보다, 문득 뒤돌아 보니, 방금 내가 지나온 곳, 걸음도 빨리 하여 지나온 학교, 담이 보인다. 거기서 거리낌 없이 놀고 있는 아이들. 교복 입고 있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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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와 예술 - 파리코뮌에서 베를린장벽의 붕괴까지
앨런 앤틀리프 지음, 신혜경 옮김 / 이학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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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는 경우 한 가지. 무정부주의로 번역하는 경우에 질서를 무시하는 혼동과 파괴를 추종하는 집단이라는 생각. 또 한 가지는 아나키스트는 테러리스트라서 테러를 맹종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일제시대 무정부주의로 번역하는 바람에 많은 오해가 있었고, 또 그들이 테러활동을 한 바람에, 여기에 우리나라에서 영화까지 만들어지는 바람에 그들은 폭력주의자로 낙인 찍히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나키즘이 잘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한 번도 권력을 잡은 적이 없다는 점이다.

 

권력을 부정하는 그들이 권력을 잡을 수는 없는 일. 권력 추구가 아니라 자율과 자치, 협동을 추구하는 그들이기에 정권을 잡고, 자신들의 생각을 강요한다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조직의 결정을 따르라는 말이 통할 수 없는 사상이 아나키즘이기에, 이들은 정치계에서 한 번도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 그 결과가 권력을 쥔 집단에 의해 오해되거나 축출되거나 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묻혀 들어가는 길이었다.

 

지금 우리나라에 아나키스트가 얼마나 될까? 아나키즘을 추구하는 사람들, 그런 집단들, 그리고 아나키즘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아나키즘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데, 아나키즘을 추구하는 예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자율, 자치, 협동은 예술의 기본이 아니던가. 예술은 그 본성상 아나키즘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특정한 권위를 부정하고, 개인의 자율성을 최대화하려고 하며,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상들을 인정하고 공존하도록 하는, 또 작업을 할 때 혼자만이 하기도 하지만, 함께 하는 상호성이 중시되기도 하는 그런 활동, 그것이 바로 예술 아니던가.

 

이렇게 기본적으로 아나키즘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 예술이 아나키즘 사상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살펴본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서양에서 나온 책이라 우리나라 아나키즘과 예술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지만 이 책을 통해서 우리나라의 아나키즘과 예술 관계를 유추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책은 아나키즘과 예술의 관계를 1871년 파리 코뮌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때 나오는 작가가 바로 쿠르베이다. 쿠르베를 중심으로 프루동과 졸라의 논의를 살펴보면서 아나키즘과 예술의 관계를 설명해 나가고 있다.

 

그 다음에는 신인상주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미술에 관한 책을 보면서 신인상주의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점묘법을 드는데, 그 점묘법이 참 기발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아나키즘과 관련성을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아, 했다.

 

점묘법. 독립된 각 점들이 주변의 점들과 관계를 맺을 때 자기 나름의 색을 띠게 되는 표현법. 그렇다. 아나키즘 역시 독립된 개인들이 자율적인 생활을 하지만, 그런 자율적 개인들의 연합으로 아나키 사회라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연결이 되는구나. 단지 예술가들이 아나키즘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또 아나키즘 사상으로 당대 사회를 표현했다를 떠나서, 미술 표현기법 자체가 아나키적 요소를 지니고 있음도 깨닫게 되었다.

 

여기에 이어서 러시아 혁명기와 공산당 독주체제의 예술을 이야기하는데, 결국 아나키즘은 러시아에서 사라지게 되고, 예술 역시 사라지게 된다.

 

다름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에서 아니키즘은 허용될 수 없는 다양성의 사상이었기 때문일테고, 자연스레 그러한 예술 역시 창작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공은 미국으로 넘어간다. 미국에서도 역시 아나키즘 사상이 꽃필 조건이 많았기 때문이다. 인종차별, 베트남 전쟁 반대 등으로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사상들이 난무할 때 역시 그 조류에 따른 예술도 나타나게 된다.

 

하여 미국에서 이루어진 60년대부터 90년대에 이르는 과정에서 아나키즘과 예술이 어떻게 관련이 되는지를 이메일을 통한 인터뷰, 작품을 통한 소개 등을 통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아나키적인 예술이 현재에도 계속될 수 있음을, 아니 계속되어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나키즘이라는 말만 쓰지 않았을 뿐이지, 아나키적 예술이 많이 창작되었다.

 

가끔은 정권의 탄압을 받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아나키적 예술은 사그러지지 않고 더 타오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나키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억누르고 짓밟으려는 권력에 저항하는 사상, 그것이 아나키이고, 예술은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표현을 남에게 맡기지 않고 자신 스스로 판단하여 표현하는 장르이기 때문에, 아무리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 없는 것이 예술이고, 아나키적 예술이기 때문이다.

 

무언가 억압당한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을수록 아나키 예술은 더 활발히 이루어진다. 이미 충분히 자유로운 사회라면 아나키다 뭐다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고, 압력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반발 역시 강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역으로 아나키적인 예술이 많이 나오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는 얘기는 그 사회에 억압적인 요소가 많다는 얘기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 책은 그래서 아나키와 예술의 관계를 파리 코뮌부터 1990년대까지를 역사적으로 살피고 있지만, 지금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거울 역할을 하기도 한다고 할 수 있다.

 

한 번 주위를 살펴보자. 지금 우리 예술에서 이런 아나키적 예술이 얼마나 있는지.

 

덧글

 

이 책에서 예술이라고 했지만, 영어로는 Art이고, 또 주로 미술가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미술 관련 분야에서 아나키즘과의 관련은 잘 알 수 있지만, 다른 예술 분야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아마도 미술관련 이야기를 확장해서 다른 분야로 적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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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97호 : 함께 아이 키우기

 

어린이집 폭행 사건이 연일 방송에 나오던 때, 아이를 저렇게 때릴 수도 있구나, 이렇게 우리 아이들이 커가고 있구나 하는 자괴감과 함께,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런 일을 막을 수 있나 하는 생각까지, 어른들의 마음을 착잡하게 하던 사건들.

 

여기에 정부가 대책이라고 내놓은 것이 고작 CCTV 설치를 확대하는 것이라니... 교사도 감시당하고, 아이들 역시 보호하는 이름으로 감시당하고, 여기에 아이들과 함께 하는 공간을 불신의 공간으로 만드는 정책을 대책이라고 내놓았으니...

 

어디에도 아이들을 잘 키우겠다는 정책은 없고, 오직 책임을 면하려는 정책만 난무하고 있으니, 이렇게 사람이 사람을 만나 온전한 인간으로 자라나는 과정에 대한 전반적인 고민도 없이 오직 자신들의 책임만 면하고 싶은 마음에 감시를 강화하는 그런 정책 속에서 자란 아이들이 어떻게 성장해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면 온몸이 오싹해진다.

 

며칠 전에 수명이 다한 월성 1호기의 재가동이 원자력안전위원회에서 결정되었다. 수명이 다했는데, 재가동을 해도 괜찮다고 원자력(사실 나는 핵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전" 위원회에서 결정했다고 한다.

 

이거와 어린이집 대책이 일맥상통하는 이유가 본질적인 대책 마련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현상태를 벗어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순간의 책임을 면하려는 어른들을 보고 그 속에서 보호라는 명목하에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를 당하며 자란 아이들은 핵과 같은 중대 사안에서도 그 때의 책임만 면하면 된다는 생각, 누구도 장기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는 자세를 지니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아이들이 중요하다.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서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 말을 굳이 하지는 않으련다. 이 말은 워낙 많이 쓰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는 어른들이 늘 고민해야 할 문제이고,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그 점에 대해서 민들레97호에서 특집으로 다루고 있어서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민들레에서는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주장하고 있기에, 내 아이뿐만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잘 자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아이들을 잘 키우고 있는데, 이런 긍정적인 모습들을 적극 홍보해서 이들을 따라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언론이나 다른 매체들에서도 어린이집의 부정적인 면보다는 잘 되고 있는 육아방식,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돌봄방식에 대해서 계속 홍보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민들레에서 이번에 특집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예전에도 소개한 적이 있거나 또는 민들레라는 책을 통해서 비슷한 방식들을 이미 접한 사람들이 많지만 어린이집 사건을 통해서 일회적이고 책임을 면하려는 처방이 아닌, 정말 아이들이 행복하게 자랄 수 있는 그런 돌봄 방식을 우리 사회에 알리기 위해서 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를 키우는 방식에 유일한 정답은 없다. 아이가 자라고 있는 환경에 따라서 다양한 방식이 이루어질 것이다. 다만, 기본적으로 아이가 행복하게 스스로 설 수 있게 돌보는 것을 공통으로 삼으면 될 것이다.

 

아마도 이런 자세가 우리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는 기본 태도가 아닐까 한다.

 

' 내 자식을 위한 욕망이 아닐까 염려될 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나름의 기준으로 '이것이 주변의 누구라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인가' 묻기로 한 것이.' (9쪽)

 

내 자식을 가장 잘 돌보는 방법은 내 자식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자식들을 함께 위한다는 마음, 그리고 모든 아이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돌봄 방식을 찾는 것이다.

 

그런 고민을 하는 부모의 이야기가 이번 호의 맨 앞에 나왔다. 결국 내 자식만이라는 이기심은 바람직한 돌봄의 방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힘없는 사회적 약자의 아이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돌봄 방식,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 정책 당국자들이 명심해야 할 일이고, 또 시민단체나 교육단체에서 몸담고 있는 사람들 역시 명심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이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아이의 성장에 책임이 있으니, 이는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모든 아이들이, 특히 더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아이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소외되거나 배제되지 않는 돌봄 방식을 사회가 마련하는 것 말이다.

 

그러려면 적어도 아이들에게 이런 환경만은 만들어주도록 하자.

 

'매일 하고 싶은 놀이를 찾아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스스로 살아가는 방법을 알아간다. '자기주도적인 삶'은 가르친다고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놀이 속에서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임을 본다. 친구들과 놀면서 서로 도와주고 양보하는 것도 배우고, 교사의 지시 없이도 질서를 알게 된다. 하늘을 지붕 삼아 자연의 조화를 가슴에 담으며 사계절 햇볕이 주는 유익을 매일 받아먹고 누린다.' (131쪽)

  

이번 호 참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하고 있는데, 아이 키우기에 대해서만 언급하기로 한다. 더 많은 것들은 읽어보면 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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